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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528호), 대표적인 조선시대 관아 누각

충북 제천시 청풍면 읍리 청풍문화재단지에 있는 한벽루(寒碧樓, 보물 528호)이다. 고려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한 것을 기념하기 하여 관아 객사 옆에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 인조 때 다시 세운 것이다. 관아가 있던 지역이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옮겨졌다. 관동팔경 유람길 마지막 행선지 중 한곳으로 죽령을 넘어 단양군을 지나 이 곳에 묵으면서 남한강 경치를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주심포계 양식의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건물 오른편에 앞면 3칸의 계단식 익랑을 두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고, 내부에는 우암 송시열과 김수증이 쓴 편액이 있었다고 한다.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계단식 익랑을 두고 있는 조선시대 관아 부속 건물로 쓰였던 누각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528호). 청풍도호부 관아 객사 옆에 세워졌던 대표적인 조선시대 관아 누각 건물이다. 관아에서 주최하는 각종 연회와 행사가 치러졌던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은 앞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사방이 뚫려 있는 개방적인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지어진 익랑.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익랑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누각 마루에서 본 익랑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누각내부. 넓은 대청마루만 있는 간결한 구조이다.  내부에는 송시열.김수증이 쓴 편액과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던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 많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에 걸려있는 글이 적혀 있는 액자.

OLYMPUS DIGITAL CAMERA누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풍경. 원래 위치는 아니지만 현재 위치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빼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청풍 한벽루.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문화재단지 내 망월산성에서 내려다 본 청풍 한벽루와 관아 건물.

제천 청풍 한벽루, 보물 528호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이 루는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 양식이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안동 영호루, 공민왕 친필 현판이 걸려 있던 누각

경북 안동시 정하동 낙동강 남쪽 강변에 있는 영호루(映湖樓)이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불렸던 곳이다. 안동 도호부 관아에서 공식 행사를 위해 경치좋은 곳에 세웠던 누각으로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다. 고려말 홍건적 침입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했을 때 자주 찾았던 곳으로 ‘영호루’라 적힌 글씨를 현판에 남겨놓았다. 홍수로 여러차례 유실과 중건을 거듭하였다가 1970년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콘크리이트 지은 것으로 건축물로서 가치는 없지만 역사적의 의의가 있는 곳이다. 영호루에 올라서면 낙동강 주변과 안동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SANYO DIGITAL CAMERA안동 영호루. 조선시대 4대 누각으로 손꼽혔던 곳으로 낙동강변 경치가 아름다운 명소에 세워져 있다.현재의 건물은 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70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쓴 ‘영호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에서 보이는 풍경.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와 철교가 아래에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에서 보이는 안동 구도심과 낙동강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 내부.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에 걸려 있는 글씨가 적힌 현판들

OLYMPUS DIGITAL CAMERA공민왕이 직접 쓴 영호루 현판 글씨 탑본.

OLYMPUS DIGITAL CAMERA영호루 현판 글씨를 탁본하여 첩으로 만든 탁본첩.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안동 영호루 현판의 글씨를 탁본하여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 글씨는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갔던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과 글씨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공민왕의 서체를 짐작할 수 있다. 탁본을 첩으로 만든 것은 조선시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영호루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영호루는 안동시 남쪽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진 잘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누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던 공민왕은 피난 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환도 후인 1362년에 공민왕이 친필로 쓴 영호루란고 쓴 금자 현판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영호루는 여러번의 물난리로 공민왕 이후 유실이 5차례, 중수가 7차례 이루어졌다. 현재의 누각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5칸, 측면 4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각에는 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가 걸려 있으며, 정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현판이 걸려 있기도 하다. 원래 누각이 있었던 강 건너편에는 옛자리를 알려주는 표석이 서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2.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17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남원 광한루(보물 281호), 호남을 대표하는 관아 누각

전북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광한루(廣寒樓, 보물 281호)이다. 남원도호부 관아에서 공식적인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에 경치가 좋은 곳에 세운 누각이다. 조선 세종 때 황희가 처음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인조 4년(1626)에 고쳐 지었으며,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웠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4칸으로 지방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이다. 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광한루에 올라 멀리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이를 바라보는 장면에 등장하면서 크게 유명해졌다.  남원은 도호부사(종3품)가 수령인 고을로 주위 10여개 고을을 관할하는 역할도 있었다.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는 지방수령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직위이며, 과거에 급제한지 얼마되치 않은 초짜 암행어사가 혼내줄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아마도 소설이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이런 암행어사가 있었으면 하는 민간의 바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누각은 사방이 트여있어 주변의 훌륭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주로 경복궁 경회루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규모가 큰 고을의 관아에서 세운 것이 대부분이며,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가 유명한 지방의 누각이다. 지역을 찾은 고위 인사들의 접대나 지역내 유력인사들 위한 공식적인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전쟁때에는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남원 광한루는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명승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일반적으로누각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치가 빼어난 강변 등에 위치하고 있는데 비해 광한루는 정원을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그 중심에 누각을 세웠다. 광한루 정원에는 지금도 크고 작은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는 조선사회에서 광한루 정원이 오랜 세월동안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때 명재상으로 존경받는 황희 정승이 이 곳을 처음 조성했기때문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광한루의 화려함에 대해서 시비를 걸 수 없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원 광한루(보물 281). 남원도호부 관아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가질 수 있는 공간으로 지은 누각이다. 세종 때 황희 정승이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건물은 인조 때 중건한 것이라 한다. 지방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하천 물을 끌어들어 인공적으로 정원을 조성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광한루.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4칸규모이다. 옆쪽에 온돌방이 있는 앞면 2칸 규모의 부속건물을 달았다. 누마루는 사방이 뚫려 있으며, 난간으로 둘렀다.

OLYMPUS DIGITAL CAMERA광한루 현판. 서까래가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을 바치는 바깥쪽 전면부 기둥은 석재를, 안쪽은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옆면 바깥쪽은 석재 기둥 위에 목재 기둥을 올려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한루 누각 동쪽편에 2칸짜리 부속건물을 달아 놓고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증축한 것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과는 달리 온돌이 있는 방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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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는 칸이 있는 계단을 만들어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이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구한말에 설치한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 ‘호남제일루’란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일반적인 계단을 아니고 마루를 설치하여 계단처럼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광한루 내부. 앞면 5칸, 옆면 4칸의 상당히 넓은 공간이다. 이곳에서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가 연회를 갖거나 통영 세병관이나 여수 진남관처럼 긴급 사태시 주위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열렸던 연회의 모습에서 남원부사의 이미지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계관(桂觀)이라고 적힌 현판이 내부에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에도 광한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분합문을 달아 겨울에도  행사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광한루.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강릉 경포대, 관동팔경 중 한곳으로 경포호수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강원도 강릉시 경포로에 위치한 경포대(鏡浦臺)이다. 관동팔경 중 하나 경포호수에 위치한 많은 누각과 정자를 대표하는 곳으로 경포호수와 동해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경포대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처럼 관아에서 손님접대나 공식적인 행사를 위해서 세운 누각이다. 고려 충숙왕대에 방해정 뒷편에 처음 지어졌으며, 조선 중종대인 1508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수많은 시인,묵객,선비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포대 내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명사들이 쓴 글들이 경포대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조선 중종대에 처음 지어진 건물은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97년에 강릉도호부사가 새로 지은 것을 그후 여러차례 보수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누각이다. 건물에는 모두 48개의 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경포호수의 빼어난 경치를 다양하게 강상하기 위해서 다양한 높이의 마루를 두고 있다.

강릉 경포대, 강원도 강릉시 경포로.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 당시 강원도 안렴사 박숙이 현 방해정 뒷산 인월사 옛터에 창건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고 이후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현 위치로 옮겨지은 후 여러 차례 고쳐지었고, 1873년 부사 이직현이 다시 세운 뒤 1934년, 1947년, 1962년에 보수하였다. 경포호수와 주위의 넓은 들을 감상할 수 있는 비교적 높은 장소에 지어진 이 건물은 정면 다섯칸, 측면 5칸 규모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익공양식에 2고주 7량가구이며, 연등 천장으로 되어 있다.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은 위치에 맞춘어 높낮이를 설정하고, 다양한 행사에 따라 공간을 나누며, 시각의 연속성이 요구되는 곳에 적절한 공간 형태를 부여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 (녹두일출, 죽도명월, 강문어화, 초당취연, 홍장야우, 증봉낙조, 환선취적, 한송모종 등과 월주, 월탑, 월파 등의 이른바 ‘경포월삼’은 천하의 장관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내부에는 율곡 이이 선생이 10세 때에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하여 숙종의 어제시 및 유명한 문장가로 알려진 강릉부사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들의 글이 걸려 있다. <출처:문화재청>

SANYO DIGITAL CAMERA강릉 경포호가 내려다 보이는 나즈막한 언덕에 위치한 경포대. 강릉도호부 관아에서 공식적인 연회나 손님접대를 위해 지은 누각이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앞면 5칸, 옆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모두 48개의 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하고 있으며, 양쪽에는 다양한 경포호수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누마루처럼 높게 지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경포대. 나무판으로 만든 벽으로 막혀 있다.

SANYO DIGITAL CAMERA양쪽모서리에 1칸 규모로 지어진 높은 마루. 개인적으로 경포호수를 감상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가운데에는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행사의 주빈이 앉을 수 있도록 1칸 정도 마루를 높게 만들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포대 현판. 헌종 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이익회(李翊會)가 쓴 글씨라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 천장 아래에는 많은 유명인사들이 남겨놓은 글들이 적힌 현판들이 걸려 있다.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가 잘 알려져 있는 글이다.

SANYO DIGITAL CAMERA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중국 명나라 학자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강산’은 뒷날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포대에서 내려다 본 경포호수 경치.

SANYO DIGITAL CAMERA남쪽편 초당마을이 있는 지역.

<출처>
1. 한국향토문화대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문화재청

광주부(廣州府) 관아, 남한산성내 설치된 행궁과 관청들

경기도 광주는 고려 성종때 전국에 설치한 12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광주목이 설치된 지역으로 그 범위는 현재의 광주시,성남시, 서울의 강남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한성 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던 시기에도 광주호족은 전국의 유력 호족 가운데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목은 인조대에 광주부로, 숙종대에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었다. 원래 광주의 중심지역은 현재 하남시 춘궁동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병자호란 이후에 관아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이성산성과 고려초기 절터이 춘궁동사지가 있으며,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남아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남쪽 성벽 부근을 비롯하여 방어상 취약했던 지점에 옹성을 쌓는 등 많은 보완이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한강 동남쪽 지역을 관장하던 광주목 관아를 옮기고 행궁을 건설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보완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으로 비상시 국왕이 거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을 관장하던 광주목사는 원래부터 정3품의 높은 관직이었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로 승격하여 종2품의 부윤 또는 정2품의 유수가 수장으로 있었으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장인 수어사도 겸하게 되었다. 평사시 남한산성에는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주민은 4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산성을 축조하고 방어하기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7개의 사찰을 산성내에 두었다고 한다.

광주부
조선시대 광주부의 영역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지역, 안산시 일부지역, 서울 송파고, 강동구 일부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광주부 지도는 북쪽이 아니라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이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행궁을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광주는 수운과 육로가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지도에 물길과 도로망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광주의 중앙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광주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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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에 수록된 광주부의 지도이다. 1872년에 광주부에서 제작한 ‘광주전도’와 내용이 동일하고 채색부분만 다르다. 산과 하천의 표현이 선명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산성도시를 세우다.
남한산성행궁(사적 480호)은 행궁 중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갖춘 유일한 곳이다. 이 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일 뿐만 아니라 광주의 행정업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몇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이들 관리들은 대개 군사업무도 겸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남한산성이 군사방어체계에서 주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 내에는 산성 축성과 관리에 동원한 승려들을 위해 창건된 7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에는 4천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히 다양한 문화와 이야기가 생겨났는데, 지금까지 도당굿과 숭렬전 제례, 현절사 제향의 무형문화유산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산성 안에 주민이 거주하면서 생업을 꾸리며 상업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남한산성은 하나의 산성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도, ‘고지도첩’, 17세기 후반. 이 그림은 남한산성 주요시설물을 간략하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려놓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남한산성 유적들을 비교하면서 찾아보기 좋은 그림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성곽과 중요 건축물, 도로망을 간략하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렸다. 성곽의 경우 옹성과 대문 등을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산성 내부구조의 경우 최고의 권위 건축물이 행궁을 강조했으며, 중요 관청과 창고.사찰 등 핵심정보를 수록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행궁, 국왕의 임시 거처이자 광주유수부 관아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임시 거처로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행궁(行宮)은 국왕이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를 순행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를 말하며 행재소(行在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은 궁궐 밖에 머무는 경우는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순행하는 경우와 전란을 피해 머무는 경우, 능행이나 신변치료를 위히 명승지를 찾는 경우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국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은 많았겠지만, 행궁으로 규모를 갖추었던 곳으로는 세종이 치료를 위치 찾았던 온양 행궁,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의 이유로 설치했던 강화와 남산산성의 행궁, 정조가 능행과 정치적인 이유로 세웠던 화성행궁이 잘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산성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는데, 동.서로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으로 가려진 곳에 위치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둔 두 영역인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뒤에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설치했다. 이는 전국의 행궁 중에서 유일한 사례로 남한산서의 국가와 왕실의 보장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궁 뒤 언덕에는 숙동대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는 광주유수의 집무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성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면서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모형. 남한산성은 좌전(종묘)과 우실(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 정문인 한남루(漢南樓). 행궁은 원래 지역을 다스리던 관아에 국왕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 정문 또한 일반적인 관아 아문(衙門)과 마찬가지로 문루(門樓)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은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서 조성해 놓고 있다. 문루인 한남루를 들어서면 행궁의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외삼문과 주위에 행각들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피신할 것을 전제로 지은 행궁이기때문에 많은 수행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행각에 많은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문을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이 있고, 양쪽에 실무관원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마련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면 광주유수가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하궐로 들어가게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중문 양쪽에 마련된 행각. 비상시 국왕을 수행하는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의 중심건물인 하궐 외행전 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건물이다. 다른 행궁의 예로 볼 때 평상시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공간인 동헌의 역할을 하며, 국왕이 행궁에 머물때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과 편전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마당에 해당하는 외행전 마당. 다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중문에서 외행전까지 국왕이 지나가는 삼도가 깔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외행전 마당 한쪽편에 위치한 창고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창고 윗쪽에는 길게 늘어선 행각 건물이 있다. 평상시에는 광주유수부 관리들의 집무공간으로, 비상시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관리들이 머문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왕과 가족들이 머무는 침전 역할을 하는 내행전. 얖면 7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에는 없는 행궁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로 된 가운데 3칸은 국왕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거나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어좌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상궐 내행전 왼쪽으로는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머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오른편에도 수행인원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다. 행각으로 보이는 건물로 직급이 낮은 내시 등의 수행원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서쪽편 담장 너머로는 광주부유수의 집무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좌승당이 있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3칸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주유수는 동헌인 외행전 대신 이 건물을 일상적인 업무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좌승당 아래쪽으로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건물인 일장각이 있다. 일반적인 관아 건물의 성격으로 볼 때 광주유수가 머무는 숙소인 내아에 해당되는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은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살림집으로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고위 관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단심 부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아의 규모 또한 작은 편이다. 마찬가지로 각도 감영 관아의 내아 또한 건물규모가 작은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 대청마루. 광주유수가 머물던 공간임을 보여주는 가구배치를 하고 있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상당히 직위가 높은 인물로 대체로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재덕당 뒷편 언덕에 세워진 정자. 국왕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광주유수가 손님을 접견하기 위해 세운 작은 정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 바깥쪽에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과 우실이 있다.

남한산성을 거쳐 간 관리들
1559년부터 1899년까지 광주목사.광주부윤.광주유수를 역임한 관리는 379명이다. 이 중 광주부의 읍치가 남한산성 내에 옮겨진 인조 2년부터가 남한산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남한산성을 거친 조선시대 관리는 총 266명이 된다. 조선시대 광주지역은 여러 차례 읍격의 오름내림에 따라 파견하는 관리의 품계에 차이가 있었다. 목사에서 부윤, 유수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부윤으로 바뀌는 변화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 관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직책이 수어사이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어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현장인 남한산성은 광주부윤을 부사로 임명해 운영하다가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1795년(정조19)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강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남문 앞에 모아 놓은 광주부를 거쳐간 관리들의 공덕비. 광주목사, 광주부윤, 광주유수는 정2품에서 정3품에 이르는 장.차관급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 당시 한양에서 고관을 지내던 인물들이 잠시 외관직을 맡았던 곳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주목사와 광주유수 등을 지낸 임연, 조태채, 조관빈의 초상.

OLYMPUS DIGITAL CAMERA중정남한지. 헌종 10년(1844)에 광주유수로 부임한 홍경모가 정조 3년(1779)에 남한수어사 서명응이 하명을 받고 편찬한 ‘남한지’에 광주부의 구지를 참작하고 관계기사를 채록하여 완성한 읍지이다.

연무관(演武館),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

남한산성에는 별도의 군사조직인 수어청(守禦廳)이 정조대에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면서 광주유수가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내 동쪽편에 위치한 행궁은 광주부 수장으로서 행정의 중심지였다면 산성내 중앙도로 북쪽편에 위치한 연무관과 주위 건물들은 군사조직인 수어청 산하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내에는 평상시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승병들을 위한 사찰이 7개, 산성내 마을에는 약 1천호 4천명의 주민이 상주하였다.

연무관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수어사 김좌명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 연병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정조 때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에도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 규모는 약 330m²로 규모가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내부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전,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출처:광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내 관아건물 중 현재까지 그 원형이 남아 있는 연무관. 원래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대 연병관, 정조대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했으나 통칭 연무관이라 부른다.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어서 웅장해 보인다. 수원 화성 연무대의 경우는 사방이 뚫려 있는 정자와 같은 형식을 하고 있으나, 남한산성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내부는 열린 공간이지만, 삼면에 판문을 달아서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내부는 칸막이를 하고 온돌을 설치한 일반적인 관아 건물인 동헌과는 달리 내부가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는 들보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연무관은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사가 병사들의 훈련을 지휘하는 공간으로 수어사를 겸직했던 광주유수 근무처가 행궁내에 있었기때문에 이 곳에서 관리들이 상근했던 곳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수원화성의 연무대와 마찬가지로 군사훈련 지휘소라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연무관은 수원화성 연무대와 달리 바람을 막기 위해 양쪽에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연무관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들어오는 길에는 남한산성과 그 역사를 같이한 오래된 고목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동쪽편에는 산성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보통 옛 관아가 있던 곳에서는 객사가 초등학교로 변한 경우가 많은데 원래 이 곳에는 수어청 소속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남한산성 옛 지도에는 이곳을 영고(營庫)라 표시되어 있으며, 여러 건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아마도 무기고를 비롯하여 군인들이 근무하던 장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올라가는 길.

수어청의 설치와 산성수비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는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으로 구성된 5군영 체제였는데 이 중 수어청은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중앙군영이었다. 처음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가 관활했으나 병자호란 이후부터는 군영으로 독립해 수어사를 두었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고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정조 19년(1795)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광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함으로써 군사지휘소 역할을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상량문. 영조 39년(1763)에 연무관을 중수하면서 쓴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도리. 들보에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둘러 얹혀서 연직하중 또는 수평하중을 받는 가로재이다. 숙종 28년(1702) 3월 30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등단록. 조선후기 각 군영대장의 의망,수점단자를 모은 책으로 편자는 미상이다. 이 등단록은 총 3책의 등단록 중 제2책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장용대장, 총위대장, 수어사 등이 실려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수어영교리노졸수효기. 남한산성을 방어하던 수어청 광주부 소속의 군대 편성과 병력을 볼 수 있는 문서이다. 장교로부터 잡색군까지 직능별 병종과 인원이 앞뒤로 적혀 있고, 15겹으로 접게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고아주부 소속 병력은 총 736명으로 장교 172명, 서리청직 121명, 군졸 238명, 잡색군 142명, 승군 63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위정기 탁본첩, 1816년. 이위정은 순조 중엽(1815)에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사정이고, 기문을 쓴 사람은 김정희이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여기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어찌 천하가 위복하지 않겠는가”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위정기 편액, 1816년

침괘정(枕戈亭), 무기제작소로 알려진 관아 건물

광주부가 있었던 광주부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많은 관청들과 성벽을 관리하던 사찰과 큰 마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지고 관아건물로는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연무당과 연못인 지수당,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지만 관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침괘정 정도만이 남아 있다. 조선 영조대에 지어진 침괘정은 문헌상 기록으로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건물의 형태는 온돌방과 마루바, 회랑 역할을 하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는 집무실로 사용했던 관아 건물로 보인다. 아마도 부근에 무기를 제작하는 공방과 창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산성 행궁 앞 광장에는 산성내에 시간을 알려주는 종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국보 280호로 지정된 천흥사 종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침괘정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쵬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광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내 광주부 관아 역항를 했던 남한산성 행궁 앞 언덕에 위치한 침괘정.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상당히 큰 규모의 관아 건물로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침괘정은 앞면 7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일반 주택과는 달리 앞과 뒤가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오른쪽 5칸은 회랑형식으로 툇마루를 앞뒤로 둘렀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3칸은 앞.뒤로 툇마루를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툇마루.

삶 그리고 문화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는 큰 길가 양 옆으로 초가로 지은 상점들이 연이어 들어섰고, 일반 민가들은 행궁보다 낮은 저지대인 비교적 평지에 밀집되어 도시적 마을을 형성했다. 주거지는 중앙의 동서로를 기준으로 남동과 북동으로 나뉘어졌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통계를 보면 산성내 남동에 614호로 남자 1,119명 여자 1,055명, 북동에 462호에 남자 1,009명 여자 853명이 살아서 대략 6:4의 비율로, 개천이 흘러 생활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은 남동의 규모가 더 컸다고 보인다. 남한산성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다. 군역동원을 위해 세운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고 무속신앙이 성행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숭렬전 제례와 도당굿 등 무형문화와 각종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침괘정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성 광장, 행궁 앞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성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과 함께 복원된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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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국보 280호로 지정된 천흥사 종이 걸려있었는데 지금은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고, 복제품을 종각에 걸어 놓고 있다. 천흥사종이라고 불리는 이종은 천안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범종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에서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된 종이다. 서울의 보신각 종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 앞 광장에서 남한산성 동문으로 연결되는 큰 길.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입구는 오일장이 열리던 장터였다한다. 조선말까지 성내에 읍지소가 있었고 민가가 일천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주민들간에는 지금도 이곳을 장터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호패. 조선후기에 만드어져 남한산성에서 사용됐던 호패 세점이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차고 다녀야 했는데, 인구수를 파악하고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호패로 보아 이만영은 경신년(1800)에 태어나서 남한산성 내 남부에 살았고, 이병희는 정해년(1827)에 태어났으며 이병희도 정해년(1827)에 태어났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지수당(池水堂)과 비상시 대비 물을 저장했던 연못

산성내에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3개의 큰 연못이 파고 물을 저장해 두고 있다. 원래의 연못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되거나 훼손되어 현재는 2의 연못이 남아 있다. 연못에는 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세운 정자인 지수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 내에는 조선시대 차관급에 해당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사를 겸했던 정2품의 광주유수가 근무했던 행궁과 관아가 있었고, 연못의 정자는 관아에서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한산성내 연못과 정자는 조경과 연회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군사적인 목적의 저수지 기능이 중요시 되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수당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을축년 대홍수(1925) 때 매몰된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하여 복원한 것이다. <출처:광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내 물을 저장했던 3개의 연못 중 가운데 연못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지수당. 이 정자는 1672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1925년 홍수로 매몰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수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광주부 유수가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2품의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군사방어상 중요했던 남한산성의 입지를 말해주듯이 그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수당 내부와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지수당 앞 연못. 풍류를 즐기는 정원의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산성내 물을 저장하는 공간이라는 기능적 측면이 강한 연못이라서 장식성을 배제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에서 물을 저장하는 공간으로서 주 역할을 했던 곳은 서쪽편 연못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수당이 있는 동쪽편 연못에 비해서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연못은 산성내 물을 저장하는 중요한 연못으로 그 규모가 큰 편이다. 연못한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놓고 있다. 방형(사각형)연못에 원형의 작은 섬을 두고 있는 도교사상이 반영된 연못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연못 동쪽편에는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觀魚亭)이 있었다. 3개의 연못 중에서 서편 소도에 있는 정자로 지수당과 마주하고 있으며 소선을 두어 왕래하였다. 제갈량이 못에 임하여 방책을 경정하며, 적을 헤아렸다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못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천, 산성 동쪽편 좌익문을 통해 광주지역으로 흘러내려 간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축성과 방어를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세운 7개 사찰 중 하나인 망월사.

OLYMPUS DIGITAL CAMERA남한가람지, 1931년. 남한지를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사찰과 승군의 제도를 정리한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광주향교. 조선숙종대에 지어진 건물로 경기도 지역에서는 큰 규모를 하고 있는 향교이다. 지금은 외삼문을 보수하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혼란스러운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