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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죽서루(보물), 삼척도호부 관아 누각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죽서루(竹西樓, 보물)이다. 삼척도호부 관아에서 경치좋은 곳에 세워손님접대 등에 사용하였던 누각 건물로 관동팔경으로 손꼽혔던 명소이다. 창건연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동안거사집>에 고려 원종 때(1266년)에 이승휴가 이곳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조선초 태종 때(1403년) 삼척부사가 건물을 디시 지었으며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유명인사들이 쓴 글이 걸려 있으며 ‘제일계정(第一溪亭)’이라 적힌 현판은 조선후기 남인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쓴 글씨라고 한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세워져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01-20220710<삼척 죽서루(보물)>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원래는 5칸이었는데 수리하는 과정에서 7칸으로 바뀌었으며 지붕도 원래는 다른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양식을 하고 있어 조선초기 건물형태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12-20220710<남동쪽에서 본 모습>

삼척 죽서루(보물) 14-20220710<북동쪽에서 본 모습>

삼척 죽서루(보물) 04-20220710<옆쪽에서 본 모습>

기둥은 원래 있던 자연 암반위에 올려 놓고 있으며, 일부는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자연환경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은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13-20220710<건물을 받치는 기둥>

건물은 사방이 뚫려 있는 2층 누각 건물이다.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지만 양쪽에는 일부 우물천장도 있어 여러차례 수리과정에서 다양한 양식이 섞여 있다. 내부에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글씨를 쓴 ‘제일계정’ 현판을 비롯하여 역대 삼척부사와 숙종, 율곡, 정조 등 유명인사들이 쓴 글들이 걸려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11-20220710<죽서루 내부>

삼척 죽서루(보물) 07-20220710<허목이 쓴 ‘제일계정’ 현판>

삼척 죽서루(보물) 08-20220710<삼척부사를 지낸 이규헌이 쓴 ‘해선유희지소’ 현판>

삼척 죽서루(보물) 06-20220710<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

삼척 죽서루(보물) 09-20220710<양쪽 끝 우물천장>

<죽서루와 오십천>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소개된 명소로 관동팔경 중 하나이다. 오십천은 삼척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든 하천이다. 죽서루가 있는 곳은 오십천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빼어난 경치로 손꼽혔던 곳이다.

삼척 죽서루(보물) 05-20220710<죽서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십천>

삼척 죽서루(보물) 02-20220710<오십천 절벽 위에 세워진 죽서루>

삼척 죽서루(보물) 03-20220710<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오십천>

삼척 죽서루를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누각의 아래쪽으로 관아의 부속 건물들을 표현하고 있으며 절벽 아래로 배 한 척을 배치하였다. 실경보다는 이상향을 담은 그림처럼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죽서루도, 엄치옥, 조선 19세기>

죽서루가 있는 이곳은 옛 삼척도호부 관아가 있던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삼척읍성 남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삼척 죽서루(보물) 10-20220710<죽서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옛 삼척도호부 관아터>

삼척 죽서루(竹西樓), 보물
이 누각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가 쓴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403년(태종3) 당시 삼척 부사 김효손이 고쳐 지었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개의 기둥은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제일루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누각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1662년 (현종3)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는 171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는 1837년(현종 3)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정조, 율곡 이이 선생 등 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안내문, 삼척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삼척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청송 찬경루(讚慶樓, 보물), 관아에 운영했던 누각

경북 청송군 청송읍에 있는 찬경루(讚慶樓, 보물)이다. 조선초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청송군이 세종의 비 소현왕후의 관향임을 들어 당시 관찰사가 찬경루(讚慶樓)라 이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1-20201204<청송 찬경루(보물)>

건물을 앞면 4칸, 옆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강변 경치가 좋은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경치좋은 용전천 주변 풍경과 멀리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보이는 방향으로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뒷편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2-20201204<정면에서 본 모습.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 >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1-20201204<찬경루 현판>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2-20201204<자연 암반 위에 올려놓은 건물 기둥>

건물 내부 뒷편에는 2칸 정도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온돌방 앞에는 국왕이 앉을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주변보다 한단 높게 만들어 놓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 누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찬경루만의 특징이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6-20201204<찬경루 내부>

건물 내부에는 안평대군이 쓴 송백강릉(松栢岡陵) 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나 화재로 불타서 없어지고 정조 때 (1792) 한철유가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유명인사였던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홍성민 등이 시문을 남겼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5-20201204 < ’송백강릉(松栢岡陵)’이라 적힌 현판>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8-20201204<뒷편에서 본 모습>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0-20201204<동쪽에서 본 모습>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7-20201204<서쪽에서 본 모습>

찬경루(讚慶樓), 보물 제2049호
찬경루는 세종 10년(1428)에 운봉관과 함께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2층 16칸 으로 세운 누각이다. 조선시대 때 누각은 객사와 이웃하여 있으면서, 사신들을 위한 연회나 지방 유생들을 위한 백일장 장소로 사용되었다. 숙종 14년(1688)에 손보고 고쳤으며, 화재로 인해 불타서 없어진 것을 정조 16년(1792)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등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008년에 건물을 다시 고치고 단청(丹靑)도 새로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홍여방이 찬경루에 대해 쓴 문서에는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끊이지 않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이 누(樓)에 올라 그 묘(墓)를 바라보면 저절로 우러러 찬미하게 되어 찬경(讚慶樓)이라 이름 지었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찬경루’ 라는 이름은, 청송 심씨 가문에서 소헌왕후가 탄생하였고 이 누각이 청송 심씨 시조 묘소를 바라보고 있음에 따라, ‘우러러 찬미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건물 내 사분합문 위쪽에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송백강릉(松栢岡陵) 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나 화재로 불타서 없어졌다. 지금은 정조 16년(1792)에 부사 한광근(韓光)의 아들 한철유(裕)가 쓴 송백강릉(松岡陵)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건물 안에 조선시대 때 명성을 떨치던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홍성민 등이 남긴 시문이 보관되어 있다.(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대표적인 조선시대 관아 누각

충북 제천시 청풍면 읍리 청풍문화재단지에 있는 한벽루(寒碧樓, 보물)이다. 고려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한 것을 기념하기 하여 관아 객사 옆에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 인조 때 다시 세운 것이다. 관아가 있던 지역이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옮겨졌다. 관동팔경 유람길 마지막 행선지 중 한곳으로 죽령을 넘어 단양군을 지나 이 곳에 묵으면서 남한강 경치를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주심포계 양식의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건물 오른편에 앞면 3칸의 계단식 익랑을 두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고, 내부에는 우암 송시열과 김수증이 쓴 편액이 있었다고 한다.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계단식 익랑을 두고 있는 조선시대 관아 부속 건물로 쓰였던 누각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청풍도호부 관아 객사 옆에 세워졌던 대표적인 조선시대 관아 누각 건물이다. 관아에서 주최하는 각종 연회와 행사가 치러졌던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은 앞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사방이 뚫려 있는 개방적인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지어진 익랑.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익랑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누각 마루에서 본 익랑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누각내부. 넓은 대청마루만 있는 간결한 구조이다.  내부에는 송시열.김수증이 쓴 편액과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던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 많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에 걸려있는 글이 적혀 있는 액자.

OLYMPUS DIGITAL CAMERA누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풍경. 원래 위치는 아니지만 현재 위치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빼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청풍 한벽루.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문화재단지 내 망월산성에서 내려다 본 청풍 한벽루와 관아 건물.

제천 청풍 한벽루, 보물 528호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이 루는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 양식이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안동 영호루, 공민왕 친필 현판이 걸려 있던 누각

경북 안동시 정하동 낙동강 남쪽 강변에 있는 영호루(映湖樓)이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불렸던 곳이다. 안동 도호부 관아에서 공식 행사를 위해 경치좋은 곳에 세웠던 누각으로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다. 고려말 홍건적 침입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했을 때 자주 찾았던 곳으로 ‘영호루’라 적힌 글씨를 현판에 남겨놓았다. 홍수로 여러차례 유실과 중건을 거듭하였다가 1970년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콘크리이트 지은 것으로 건축물로서 가치는 없지만 역사적의 의의가 있는 곳이다. 영호루에 올라서면 낙동강 주변과 안동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SANYO DIGITAL CAMERA안동 영호루. 조선시대 4대 누각으로 손꼽혔던 곳으로 낙동강변 경치가 아름다운 명소에 세워져 있다.현재의 건물은 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70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쓴 ‘영호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에서 보이는 풍경.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와 철교가 아래에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에서 보이는 안동 구도심과 낙동강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 내부.

SANYO DIGITAL CAMERA영호루에 걸려 있는 글씨가 적힌 현판들

OLYMPUS DIGITAL CAMERA공민왕이 직접 쓴 영호루 현판 글씨 탑본.

OLYMPUS DIGITAL CAMERA영호루 현판 글씨를 탁본하여 첩으로 만든 탁본첩.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안동 영호루 현판의 글씨를 탁본하여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 글씨는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갔던 공민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과 글씨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공민왕의 서체를 짐작할 수 있다. 탁본을 첩으로 만든 것은 조선시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영호루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영호루는 안동시 남쪽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진 잘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누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던 공민왕은 피난 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환도 후인 1362년에 공민왕이 친필로 쓴 영호루란고 쓴 금자 현판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영호루는 여러번의 물난리로 공민왕 이후 유실이 5차례, 중수가 7차례 이루어졌다. 현재의 누각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5칸, 측면 4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각에는 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가 걸려 있으며, 정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현판이 걸려 있기도 하다. 원래 누각이 있었던 강 건너편에는 옛자리를 알려주는 표석이 서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2.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17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남원 광한루(보물), 호남을 대표하는 관아 누각

전북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광한루(廣寒樓, 보물)이다. 남원도호부 관아에서 공식적인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에 경치가 좋은 곳에 세운 누각이다. 조선 세종 때 황희가 처음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인조 4년(1626)에 고쳐 지었으며,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웠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4칸으로 지방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이다. 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광한루에 올라 멀리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이를 바라보는 장면에 등장하면서 크게 유명해졌다.  남원은 도호부사(종3품)가 수령인 고을로 주위 10여개 고을을 관할하는 역할도 있었다.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는 지방수령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직위이며, 과거에 급제한지 얼마되치 않은 초짜 암행어사가 혼내줄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아마도 소설이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이런 암행어사가 있었으면 하는 민간의 바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누각은 사방이 트여있어 주변의 훌륭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주로 경복궁 경회루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규모가 큰 고을의 관아에서 세운 것이 대부분이며,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가 유명한 지방의 누각이다. 지역을 찾은 고위 인사들의 접대나 지역내 유력인사들 위한 공식적인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전쟁때에는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남원 광한루는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명승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일반적으로누각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치가 빼어난 강변 등에 위치하고 있는데 비해 광한루는 정원을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그 중심에 누각을 세웠다. 광한루 정원에는 지금도 크고 작은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는 조선사회에서 광한루 정원이 오랜 세월동안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때 명재상으로 존경받는 황희 정승이 이 곳을 처음 조성했기때문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광한루의 화려함에 대해서 시비를 걸 수 없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원 광한루(보물)>

남원도호부 관아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가질 수 있는 공간으로 지은 누각이다. 세종 때 황희 정승이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건물은 인조 때 중건한 것이라 한다. 지방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하천 물을 끌어들어 인공적으로 정원을 조성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광한루.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4칸규모이다. 옆쪽에 온돌방이 있는 앞면 2칸 규모의 부속건물을 달았다. 누마루는 사방이 뚫려 있으며, 난간으로 둘렀다.

OLYMPUS DIGITAL CAMERA광한루 현판. 서까래가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을 바치는 바깥쪽 전면부 기둥은 석재를, 안쪽은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옆면 바깥쪽은 석재 기둥 위에 목재 기둥을 올려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한루 누각 동쪽편에 2칸짜리 부속건물을 달아 놓고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증축한 것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과는 달리 온돌이 있는 방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뒷편에는 칸이 있는 계단을 만들어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이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구한말에 설치한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 ‘호남제일루’란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일반적인 계단을 아니고 마루를 설치하여 계단처럼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광한루 내부. 앞면 5칸, 옆면 4칸의 상당히 넓은 공간이다. 이곳에서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가 연회를 갖거나 통영 세병관이나 여수 진남관처럼 긴급 사태시 주위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열렸던 연회의 모습에서 남원부사의 이미지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계관(桂觀)이라고 적힌 현판이 내부에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에도 광한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분합문을 달아 겨울에도  행사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광한루.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