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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온달관광지 드라마세트장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을 오르는 입구에 있는 온달관광지 드라마세트장이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태왕사신기’를 촬영하기 위해 궁궐과 도심풍경으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이 이 곳에 있다. 세트장은 궁궐 건물과 도심 풍경, 그리고 성벽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구려 왕성와 궁궐을 재현한 것 같은데 북경 자금성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성벽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벽돌로 쌓은 전성을 사용하고 있다. 고구려 왕성을 표현한다는 것이 명.청시대 중국 궁궐과 거리풍경을 재현해 놓고 있다. 물론 발굴조사된 평양의 고구려 왕궁은 북경 자금성과 비슷한 형태이기는 하다.

SANYO DIGITAL CAMERA온달산성 오르는 길에 보이는 드라마세트장. TV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을 위해 조성한 세트장으로 고구려 왕궁과 왕성을 표현하고 있다. 왕궁은 북경 자금성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왕성의 성벽. 명.청시대 중국 읍성이나 왕성의 형태를 재현하고 있는데 실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드라마세트장 입구의 기념 조형물.

SANYO DIGITAL CAMERA왕성성문. 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명.청시대 중국의 성문에 한국의 문루를 사용하고 있는 등 실제와는 많이 다르게 만들었다.

SANYO DIGITAL CAMERA실제보다 크고 과장되게 만든 망루

SANYO DIGITAL CAMERA중국 자금성이나 읍성에서 볼 수 있는 해자. 실제보다 아주 작게 만들었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성벽과 궁궐건물들이 섞여 있다.

SANYO DIGITAL CAMERA궁궐로 들어가는 길과 궁궐 정문.

SANYO DIGITAL CAMERA궁궐 월대에서 내려다 본 궁궐마당.

SANYO DIGITAL CAMERA다양한 건물들을 배치한 거리풍경. 중국 읍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2층건물들이 많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중국 거리에서 볼 수 있는 2층 건물.

SANYO DIGITAL CAMERA또 다른 중국풍 건물

SANYO DIGITAL CAMERA조선시대 한옥같은 건물

SANYO DIGITAL CAMERA드라마에 사용되었던 수레

SANYO DIGITAL CAMERA온달산성 입구. 중국 풍 패루에 한옥 지붕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형태의 출입문이다.

SANYO DIGITAL CAMERA마을 풍경.

SANYO DIGITAL CAMERA온달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는 온달산성. 남한강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단양 도담삼봉(명승), 단양팔경 중 첫번째

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남한강에 있는 도담삼봉(島潭三峯, 명승)이다. 단양팔경 중에서도 첫번째로 손꼽히고 있다.   중국 신선사상에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선세계를 구현한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경주 임해전지를 비롯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남한강 가운데 높이 6 m의 장군봉(남편봉)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첩봉, 오른쪽에는 처봉이 나란히 솟아 있다. 장군봉 중간에는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도담상봉은 태조와 함께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법과 질서 등 국가의 기반을 설계한 정도전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지냈으며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하였으며,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많은 인사들이 도담삼봉 풍경과 관련된 시와 그림을 남겼다.

SANYO DIGITAL CAMERA단양팔경 중 첫번째로 손꼽히는 도담삼봉. 호수같은 남한강 가운데 3봉우리가 솟아 있다. 신선세계를 구현한 인공연못 등에서 볼 수 있는 세봉우리를 잘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SANYO DIGITAL CAMERA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는 가운데 봉우리. 장군봉 또는 남편봉이라 불리다. 이곳 정자에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장군봉에 세워진 정자.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처봉이라 불리는 오른쪽 봉우리. 남편과 돌아 앉은 형상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첩봉이라 불리는 왼쪽편 작은 봉우리.

SANYO DIGITAL CAMERA강물에 비친 도담삼봉.

SANYO DIGITAL CAMERA남한강 상류방향. 이 지역은 석회암 지질로 경치가 아름다운 절벽이 많은 카스트르 지형이다.

SANYO DIGITAL CAMERA남한강 하류방향. 멀지 않은 곳에 단양읍 시가지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도담삼봉 주변을 운행하는 유람선

OLYMPUS DIGITAL CAMERA하류방향 단양읍 부근 다리에서 본 도담삼봉 부근 남한강.

OLYMPUS DIGITAL CAMERA단양읍 부근 남한강.

단양 도담삼봉(島潭三峯), 명승44호, 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195번지
「단양 도담삼봉(丹陽 島潭三峰)」은 절경이 특이하고 아름다워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손꼽히며 단양군수를 지낸 이황을 비롯하여 황준량, 홍이상, 김정희, 김홍도, 이방운 등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긴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개국공신인 정도전 탄생에 관련한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정도전은 자신을 삼봉이라 자호할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고 전한다. 도담삼봉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원추 모양의 봉우리로 남한강이 휘돌아 이룬 깊은 못에 크고 높은 장군봉을 중심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형상이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남한강과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단양군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단양군청, 2009년
  2.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년

단양 적성산성(사적),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신라가 쌓은 산성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성재산에 정상부에 있는 적성산성(赤城山城,사적 )이다. 이곳은 조령(문경새재)과 더불어 영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한 교통로인 죽령길을 지키는 산성이다. 남한강 북쪽에서 죽령을 향하는 적을 제압하는 목적으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곳이다. 산성내에 가장 오래된 비석 중 하나인 단양 신라적성비(국보189호)가 있고, 산성에 올라서면 남한강 전경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소백산맥에서 몇 안되는 중요한 교통로인 죽령이 멀리 보인다. 중앙고속도로 서울방향 휴게소에서 걸어 올라갈 수 있어 접근이 매우 용이하다.

성재산 정상부을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900m 정도이며, 북동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붕괴되었는데 최근에 대부분 복원하였다. 석축은 작은 돌을 촘촘하게 쌓았는데 보은의 삼년산성, 서울의 아차산성과 비슷한 신라계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며, 당시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경쟁을 벌렸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적성산성 아래에는 조선시대 단양군 읍치가 있었으며, 고려시대까지 이 지역을 다스리는 읍성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단양 적성산성.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놓고 다투던 시절에 신라가 쌓은 석축산성이다.

SANYO DIGITAL CAMERA산성은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성재산 정상부에 석축을 둘러쌓은 테뫼식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900m 정도이다. 성벽 바깥으로도 경사가 심하여 공략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산성에서 발견된 신라 적성비. 땅속에 묻혀 있어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글자가 또렷하게 보인다. 비석에는 440자 정도의 글자가 적혀 있다고 한다. 비문 내용은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 지역민들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이라고 하며. 유명한 장군 이사부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입구에서 본 적성산성

SANYO DIGITAL CAMERA고려시대까지 단양군 읍치을 방어하는 읍성역할을 했으나 그 이후 북동쪽 일부만 제외하고 모두 허물어졌다. 최근에 인근 보은 삼년산성을 참조하여 옛 성벽을 거의 복원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한강 방면으로 내가는 성문.

SANYO DIGITAL CAMERA성문 옆에는 적성산성의 축성방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옛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적성산성 옛 성벽 석축. 작은 돌로 촘촘히 석축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 아래로 보이는 남한강

SANYO DIGITAL CAMERA조선시대 성곽과 달리 성벽 위에 여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전투시 목책을 성벽 위에 쌓았을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산성 바깥쪽 성벽. 성벽 아래로 경사가 매우 급하다.

SANYO DIGITAL CAMERA산성 안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산성에서 보이는 남한강 지역은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수양개(사적398호)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구석기시대 이래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적성산성 남쪽으로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인 죽령과 소백산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적성산성 남쪽편 성벽

SANYO DIGITAL CAMERA적성산성 아래 고속도로휴게소

단양 적성산성, 사적265호,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 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단양군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단양군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단양 신라적성비(국보), 진흥왕이 한강유역 장악을 기념하여 세운 비(碑)

단양군 단성면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 적성비이다. 1978년에 땅속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 자연석 형태를 하고 있으며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거의 판독할 수 있다. 진흥왕대인 6세기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는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들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에 언급된 사람들의 이름과 관등을 『삼국사기』의 내용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진흥왕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적성산성은 경상도에서 중부지방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인 죽령 고개를 넘어 남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적 의미가 상당히 높은 지역으로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거주해왔던 곳이다. 적성산성 아래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어, 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은 충북지역 상당부분을 장악했다고 할 수 있기때문에 그 의미를 높게 사서 적성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영토확장 의지가 담겨 있는 중원 고구려비에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남한강 유역에는 중원 고구려비, 장미산성, 온달산성 등 신라 진흥왕때 신라와 고구려 간의 투쟁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죽령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적성산성. 이곳에서 신라의 한강유역 장악에 도움을 준 지역사람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세운 적성비가 발견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적성산성 중턱에 위치한 단양 신라 적성비

SANYO DIGITAL CAMERA땅속에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기때문 새로 만든 비석처럼 글자가 깨끗하고 선명하다. 내용은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 지역민들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이라고 하며. 유명한 장군 이사부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탁본.

SANYO DIGITAL CAMERA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쌓은 적성산성.

SANYO DIGITAL CAMERA적성산성.

SANYO DIGITAL CAMERA적성산성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걸어 올라 갈 수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멀리 죽령 고갯길이 보인다.

단양 신라 적성비(赤城碑), 국보198호,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