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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유릉(사적), 재궁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사적) 재실이다. 황제의 능으로 먼저 조성된 홍릉 재실의 예를 따르고 있는데, 건물 배치는 약간 다른 면을 보인다. 유릉 재실은 국왕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이는 재방과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두 건물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양쪽 건물 모두 솟을대문에서 어도로 연결되어 있다.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에는 많은 방과 마루를 두고 있다.

재실은 원래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하며 삼국시대 시조묘나 신궁제도에서 그 기능이 유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유학이 사회전반을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제도에서 그 기능이 정립되었다고 하며, 일반 사대부에서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으로 많은 재실들이 건축되었다. 재실은 평상시 영(종5품) 또는 참봉(종9품) 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능역 안쪽에 위치한 재궁. 홍릉 재궁의 예를 따르고 있지만 규모가 큰 편이며 건물 배치도 다르다.

OLYMPUS DIGITAL CAMERA재궁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재궁에는 2개의 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두 건물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왕이 지나가는 어도가 두 건물에 모두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건물은 앞면 6칸 규모의 건물로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제관이 머무는 공간인 재방인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 건물은 앞면 7칸 규모이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인 것으로 보인다. 안향청에서 능역내 침전까지는 어도가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릉 행랑채. 상당히 긴 건물로 많은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제기고 옆에는 어도가 능역내 침전으로 연결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재궁에서 능역으로 연결되는 어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남양주 홍릉(사적) 재궁, 황제의 능역에 조성된 재궁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의 홍릉(사적) 재궁이다. 홍릉은 황제의 능으로 조성되어 기존 왕릉과는 달리 재궁이라 부르며 건물 규모나 형태 등 다른 부분이 많다. 왕릉을 지키는 관리들이 머무는 공간이자 제관이 머무는 공간인 재실도 홍살문 바깥쪽 능역 입구에 있던 기존 왕릉 재실과는 달리 홍살문 안쪽 능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홍릉 재실은 국왕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이는 재실 건물을 가운데 두고 뒷편에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이 배치되어 있으며,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에는 많은 방과 마루를 두고 있다.

재실은 원래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하며 삼국시대 시조묘나 신궁제도에서 그 기능이 유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유학이 사회전반을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제도에서 그 기능이 정립되었다고 하며, 일반 사대부에서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으로 많은 재실들이 건축되었다. 재실은 평상시 영(종5품) 또는 참봉(종9품) 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도 남양주 고종의 홍릉 재궁. 능역 입구에 있던 기존 왕릉 재실과는 달리 홍살문 안쪽 능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홍릉 재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 등이 상주하던 곳이며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모든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제물을 준비하는 전사청과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를 주관하는 제관이 머무는 공간인 재방. 앞면 7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기존 왕릉 재실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재방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재궁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행랑채. 솟을대문 좌우에 가마를 세워두는 공간을 두고 있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서울 숭인원(崇仁園, 사적), 영친왕 아들 이진의 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숭인원(崇仁園, 사적)이다.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과 이방자의 장남인 이진의 무덤이다. 바로 옆에는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의 묘인 영희원이 있다. 이곳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있었던 자리로 1919년 고종이 죽으면서 남양주 금곡동에 고종의 홍릉이 조성되면서 이장하였다. 1922년 홍릉이 있던 빈자리에 영친왕의 맏아들인 이진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영휘원이 있는 이곳은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었던 능역이며, 고종도 이 곳에 자신의 능을 조성할 생각이 있었던 곳이다. 이지역은 홍릉이 옮겨간 이후에도 홍릉이라고 불렸다. 경종의 의릉과 홍릉 사이 넓은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넓은 능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경희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과 국책연구기관 등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인 숭인원(사적). 1921년 순종이 있을 때 조성된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 왕자의 예우에 맞추어 묘역을 조성해 놓았다.

서울 숭인원, 사적 361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의 맏아들인 이진의 묘소이다. 진은 1921년 8월18일에 태어나 19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이 근처에는 명성황후 민씨를 모셨던 홍릉이 있었으나 홍릉은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였다. <출처:문화재청>

SANYO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다른 왕릉이나 원(園)과는 달리 신도만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산릉제례를 올리는 정자각. 기존 왕릉의 정자각 제도들 적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SANYO DIGITAL CAMERA정자각 뒷편 봉분. 석물은 문석인만 있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서울 영휘원(永徽園, 사적),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의 후비 순헌황귀비의 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永徽園, 사적)이다.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이다. 구한말 아관파천 때 고종을 직접 모셨으며,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영친왕을 낳았다. 왕을 낳은 후궁으로 여겨져 경복궁 뒷편 칠궁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양정의숙, 진명여학교를 설립했고, 숙명여학교에 거액을 기부하여 구한말 사학발전에 공헌했다.

영휘원이 있는 이곳은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었던 능역이며, 고종도 이 곳에 자신의 능을 조성할 생각이 있었던 곳이다. 이지역은 홍릉이 옮겨간 이후에도 홍릉이라고 불렸다. 경종의 의릉과 홍릉 사이 넓은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넓은 능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경희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과 국책연구기관 등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고종이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사적). 명성황후가 처음 묻혔던 서울 청량리 능역에 위치하고 있다. 왕을 낳은 후궁의 예를 갖추어 능역을 조성해 놓고 있다.

서울 영휘원, 사적 361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영휘원은 조선 26대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무덤으로 위패는 조선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에 모셨다. 엄귀비는 신교육에 관심이 많아 양정의숙·진명여학교를 설립했고, 숙명여학교 설립시 많은 돈을 기부하는 등 근대 사립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휘원 안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晋, 1921∼1923)의 무덤인 숭인원이 있다. 원래 이곳은 명성왕후를 모셨던 홍릉이 있었으나,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당시 미금시) 금곡동 고종황제의 릉과 합장하기 위해 옮겼다. 영휘원과 숭인원 주변에는 많은 석물과 정자각·비각 등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SANYO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SANYO DIGITAL CAMERA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SANYO DIGITAL CAMERA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SANYO DIGITAL CAMERA표석이 세워진 비각.

SANYO DIGITAL CAMERA정자각 뒷편 봉분.

SANYO DIGITAL CAMERA능역 입구에 위치한 재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남양주 유릉(裕陵, 사적),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유릉(裕陵, 사적)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를 합장한 왕릉이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조성된 왕릉이다. 왕의 장례식인 국장은 새로 즉위한 왕이 주관해야 하지만, 순종의 장례식은 당시 이왕직 장관이었던 민영기가 주관하였다. 황제의 예우에 맞추어 고종의 홍릉과 거의 비슷하게 조성하였다. 석물들을 현대 조각상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등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나 일제가 영향을 미친 부분이 많은 왕릉이기도 하다. 순종의 능을 조성한 이후 서울 광진구 유강원에 있던 순명효왕후를 함께 모셔 합장하였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에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합장되었기 때문에 왕릉조성에 대한민국 정부의 손길이 미친 유일한 왕릉이다.

유릉은 기존 왕릉과는 달리 제례시설인 정자각 대신 ‘-’형 침전을 세우고, 봉분 주위에 있던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상들을 침전 앞으로 옮겼다. 석물 중 석호와 석양은 없어지고 대신 중국 등의 영향을 받아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문.무석인과 함께 참도 양쪽에 도열하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참도 또한 신도,어도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삼도의 형식으로 바뀌었다. 침전 월대의 계단 또한 가운데 3개, 양쪽에 2개씩 놓여 있다.

남양주 유릉, 사적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유릉은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능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세 분을 하나의 봉분에 모시고 있다. 순종(1874~1726)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로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순종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과 강제로 병합되면서 황제의 자리에 물러났으며, 1926년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순종의 승하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일운동인 6.10만세 운동이 일어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순종의 첫 번째 황후인 순명효황후(1872~1904)는 1904년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순명효황후의 무덤은 본래 서울시 광진구 지역에 유강원으로 조성되었고, 순종 승하 후 경기도 남양주에 유릉을 새로 조성하면서 함께 모셔지게 되었다. 순종의 두 번째 황후인 순정효황후(1894~1966)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 황제 즉위화 함께 황후로 책봉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겪다가 1966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돌아가셨으며, 현재 유릉의 마지막 안장자가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사적). 일제강점기 이왕직장관이 주관하여 일제의 영향아래 조성된 왕릉이다. 1966년 순정효황후가 이곳에 묻힘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관여한 유일한 왕릉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입구 홍살문. 일반 왕릉의 홍살문고 큰 차이는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침전으로 이어지는 참도. 황제의 격에 맞게 삼도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참도 양쪽에 도열하고 있는 석상. 왕릉 봉분 주위에 세워져 있는 석물들이 침전 앞으로 옮겨져 있다. 석양, 석호는 없어지고 문.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로 구성되어 있다. 동물의 형상을 간략해서 묘사한 기존 석물과는 달리 일제는 서양식 조각수법을 반영해서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각상을 세우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침전 월대에서 내려다 본 참도와 양쪽에 도열해 있는 석상.

침전
이 건물은 조선 제27대 순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중국을 섬기는 제후 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즉 종래의 ‘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문관과 무관 모습의 문무석이 서 있다. 그 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을 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돌조각을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기존 왕릉의 산릉제례 시설인 정자각과는 달리 왕이 머무는 숙소라는 개념의 침전이 왕릉 앞에 있다. 침전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사당에서 주로 사용하는 맞배지붕 대신 궁궐전각처럼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다. 정자각과는 달리 월대 전면에 3개의 계단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유릉 침전 내부. 정자각과는 달리 왕이 머무는 닫집이 내부에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침천 앞에 세워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유릉 봉분.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하나의 봉분에 합장되어 있다. 순정효황후가 1966년에 돌아가셨기때문에 현재의 봉분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릉 재궁.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기존 왕릉과는 달리 홍살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릉 수복방. 기존 왕릉에는 없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 옆쪽에 있는 어정(御井). 제사를 준비하는시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천과 금천교.

OLYMPUS DIGITAL CAMERA홍릉과 유릉 사이에 위치한 연못, 조선의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연못은 사각형으로, 섬은 둥글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이곳은 연못도 둥글고 섬도 둥글게 조성해 놓고 있다.

순종 승하와 6.10 만세운동
1926년 4월25일 순종이 창덕궁에서 돌아가시자 많은 민중이 순종의 인산일인 6월10일에 서울로 운집하였다. 그리고 순종의 발인행렬을 쫓아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선언문을 뿌렸다. 1926년의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처럼 황제의 인산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대한제국의 쇠망과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민중의 모습과 조선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민중의 의지가 표출된 역사적 사건이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순종 국장 기념 사진첩, 1926년. 조선의 마지막 국장이라 할 수 있는 순종의 국장 사진이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