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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릉(洪陵, 사적), 대한제국 1대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 사적)이다. 대한제국 1대 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홍릉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때문에 황제의 예를 따라서 조성했다. 기존 왕릉의 제사시설이었던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형의 앞면 5칸짜리 침전을 세워 놓았으며, 능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 대신 침전 앞 참도 양쪽으로 문.무석인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석상을 순서대로 세워 놓았다. 참도도 기존에 어도와 신도로 되어 있던 것을 삼도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능역 입구에 위치해 있던 재실 또한 왕릉 앞으로 옮겼다. 건물 규모도 상당히 큰 편이며, 재궁이라 부른다.

고종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이후 능역 조성을 미루다,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청량리 부근에 홍릉을 조성였다. 청량리 홍릉은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겼고,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서 고종은 남양주 금곡동에 새 능역을 정하고 황제국에 걸맞은 능제를 마련하고 능역조성을 시장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이곳에 능을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능과 합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왕릉이지만, 고종 생전에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능역을 조성해 왔으며 고종 사후 3.1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좋지 않아 일제가 고종이 추진하던 내용대로 홍릉을 조성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기간 동안 외세에 휘둘리면서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 했지만, 능역의 규모는 이전 왕릉에 비해서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조선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능인 홍릉. 기존 왕릉과는 달리 봉분 앞에 제사시설로 앞면 5칸짜리 큰 건물인 침전을 세우고,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연결된 참도 또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 주위에 있던 석물들도 대부분 침전 앞으로 옮겨졌으며, 기존의 석양, 석호 대신에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상이 참도 양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고종.명성황후 홍릉,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인 고종(1852~1919년), 명성황후(1851~1895년)를 합장하여 모신 능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돌아가신 후 처음에 그 능을 동구릉 안에 조성하고자 하였지만 국내외의 복잡한 사정으로 제대로 조성하지 못하였다. 1897년 10월 명성황후를 대한제국의 황후로 높이고, 같은해 11월에 능 이름을 홍릉으로 새로 정하여 서울시 청량리에 모시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은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1900년부터 풍수상의 문제로 능을 옮기자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에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지역을 새 능역으로 정하여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능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후 1901년에는 침전이 완성되었고, 1904년까지 주요 석물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금곡 홍릉은 고종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다가, 1919년 고종 승하 후 명성황후와 합장하면서 현재 황제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홍릉 들어가는 길. 바닥에 돌을 깔고 양쪽에 개울을 만들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릉 입구 연못. 조선의 전통 정원 연못과는 달리 둥근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릉 입구 금천교. 기존 왕릉과는 달리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이는 신성한 영역을 넓게 잡고 있음을 말해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은 금천.

OLYMPUS DIGITAL CAMERA금천교를 지나면 능역이 넓게 펼쳐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성한 영역임을 말해 주는 홍살문.

침전
이 건물은 조선26대 고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중국을 섬기는 제후 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즉 종래의 ‘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문관과 무관 모습의 문무석이 서 있다. 그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은 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돌조각을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침전으로 연결되는 참도. 삼도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며 봉분 앞에 있던 석물들이 침전 앞으로 옮겨졌다. 침전이 신위가 모셔진 공간임을 말해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침전 월대 아래 서 있는 문석인과 무석인. 기존 왕릉과 달리 제향의 의미를 갖는 향나무가 침전 앞에 심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제의 능으로 격상되면서 봉분지위에 있던 석물 대부분이 침전 앞으로 옮겨졌다. 석물 중 석호와 석양은 없어지고, 문.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상이 순서대로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존 왕릉 제사시설인 정자각 대신 홍릉에는 ‘-’자형으로 침전이 월대위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침전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궁궐 정전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침전내에는 기존의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처럼 왕이 머무는 장소인 닫집에 신위를 모신다.

OLYMPUS DIGITAL CAMERA침전 옆 표지석이 있는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홍릉 표지석. 기존 왕릉 표지석과 큰 차이는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릉 봉분. 기존 왕릉과는 달리 석물은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릉 재궁. 기존 왕릉 재실이 능역 입구에 위치해 있는 반면에 홍릉 재궁은 홍살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사 준비를 하는 수라간

OLYMPUS DIGITAL CAMERA수복방

SANYO DIGITAL CAMERA중국 베이징 명나라 신종의 능인 정릉(딩링) , 홍릉이 중국 황제능을 따랐다고는 하지만 실제 명황제의 능 중 하나인 딩링은 휠씬 크고 웅장하며, 조성방법도 많이 다른 것 같다.

고종 승하와 3.1운동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1월 경운궁(덕수궁)에서 돌아가셨다.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와 경제적 수탈에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항일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3.1운동은 각 종교계의 민족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계획하여 고종의 발인을 이틀 앞두고 거행되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이 만세 운동은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하여 전국에서 상경한 민중들이 각 지방에 영향을 미쳐   3.1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덕수궁 국장 화첩, 1919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고중의 국장 모습이다. 사진으로 조선시대 국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서울대 규장각(奎章閣)] 대한제국의 성립과 국권침탈

구한말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국가주도의 개혁인 갑오개혁이 있었고,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조선은 서구화를 향한 일련의 개혁조치인 광무개혁이 있었다. 기존의 국호인 조선을 버리고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주권국으로서 황제를 칭하고, 이에 부응하는 일련의 조치가 있었다. 이후 러시아와 서구열강의 지원을 받았던 일본과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지고 결국은 1910년 일본에 병합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서울대 규장각에는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대한제국 성립 이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각종 조약.협정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규장각에서 이런 문서를 전시하면서 그런 조약들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국가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협정이나 조약 등은 형식적 의미로 그치는데 조약이나 협정의 불법성을 강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구한말 대한제국이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에 침탈당하는 동안에 당시 지배층의 무기력함이난 부패상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를 수집.전시하여 후대에 이런 치욕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떤 나라사람이 국가를 멸망시키는 과정에 있었던 조약내용의 불법성에 관심을 가질지 의문이다.

조일수호조교 체결 당시의 강화도 풍경
전시된 사진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러 온 일본 협상대표를 따라 온 일본인 사진사 가와타가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조약을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 협상대표가 그해 일본수신사로 간 김기수에게 기념으로 준 것이다. 가와타가 찍은 사진은 일본 협상대표를 태운 8척의 군함과 수송선이 부산포에 도착한 이후부터 강화도에 와서 조약협상을 체결하는 진무영과 열무당 그리고 강화 읍성 주변 등을 촬영한 것으로 1876년 2월 당시 강화도와 강화 주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전시된 사진의 촬영 위치와 방향 등을 판단하는데 기준이 되는 사진은 전시된 사진 가운데 「남산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본 강화읍성」이다. 남산에서 동북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것으로 사진에는 송악산과 읍성 그리고 그 사이 강화유수부가 선명하게 보인다. 송악산 끝자락의 읍성과 강화유수부를 기준으로 다른 사진을 비교하면 피사체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사진 전시장 앞부분에 게재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강화부 지도를 함께 참고하면 전시된 사진의 촬영방향과 해당 피사체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산포 왜관(초량관) 방파제 앞에 정박한 8척의 일본군함(왼쪽), 현무호에서 바라 본 부산포 왜관(초량관) 원경(오른쪽)

일본특명전권변리공사 구로다 기요타가를 태운 본선 현무호를 비롯하여 호위군함 2척, 운송선 6척 등 총8척이 1876년 1월15일 부산포에 도착하여 정박한 모습, 각 군함에 걸린 일장기가 선명하다. 일본 특명전권변리공사 구로다 키요타카가 탄 현무호에서 바라 본 부산포 왜관의 원경. 왜관은 임진난 이후 일본의 간청으로 다시 도모포(豆毛浦, 1607년)에 설치했다가 초량(1678년)으로 옮겨 한말까지 존속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가까이서 본 부산포 왜관(초량관, 왼쪽), 덕진 성곽과 민가(오른쪽)

왜관부두에 한국과는 양식이 다른 일본식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 정박했던 일본 협상대표 일행은 1876년 1월17일과 23일 각각 강화도를 향해 부산포를 출발했다. 성곽을 지키는 조선군인과 민간이의 시선이 모두 사진기를 향하고 있다. 덕진은 초지진.광성진과 함께 서해를 통해 서울로 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위치한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제물진(濟物鎭) 갑곶돈대(왼쪽), 진해루(鎭海樓, 오른쪽)

갑곶이 있는 제물진은 김포에서 또는 서해에서 배를 이용해 강화로 갈 때 이용하는 포구다. 왼쪽 끝 성곽 아래 빈터는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의 주둔지였다. 문루의 현판에 진해루가 선명하다. 오른 쪽 아래 일본군이 상륙할 때 타고 온 보트의 앞부분과 맞은 편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일본군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을 향해 행진하고 있는 일본군(왼쪽), 배수문과 일본군을 구경하는 사람(오른쪽)

읍성을 따라 남문을 향해 행진하고 있는 일본군. 왼쪽에 행진하는 군인의 뒷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앞쪽에 남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갑곶과 남문 사이에 아치형 배수문이 보인다. 배수문을 자세히 보면 출입을 막으려는 장치가 되어 있다. 배수문 앞 다리 왼쪽에는 방금 지나간 듯한 일본군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강화읍성과 남문.

왼쪽이 남산 끝자락이며 남문 바깥인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바라본 남문 원경이다. 남문이 닫혀 있다. 일본군이 남문을 통해 읍내로 들어간 뒤 주민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성문을 바라보며 수근거리고 있는 듯하다. 오른쪽에 송덕비 두 개가 보인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정문누각(왼쪽), 남산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본 강화읍성(오른쪽)

누각에 걸린 현판의 마지막 글자가 영(營)이다. 강화 읍성 안에 있던 어떤 영(營)의 정문인 듯하다. 왼쪽 끝 성곽 끝자락이 송악산이며 그 아래 강화유수부(현 고려궁지)가 보인다. 가운데 산이 견자산이며 그 뒤로 희미하게 문수산이 보인다. 견자산과 남산 사이에 남문이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견자산에서 바라본 남문과 읍성(왼쪽), 진무영(鎭撫營)의 열무당(閱武堂) 전경(오른쪽)

성곽을 중심으로 왼쪽이 남문 밖이며 오른쪽이 성안이다. 남산의 능선을 따라 내려간 성줄기 끝에 있는 문루가 남문이다. 군인들이 사열하던 광장 중앙에 열무당이 있다. 그 뒤로 오른쪽에 송악산과 읍성이, 열무당 왼쪽 위로 강화유수부가 보인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열무당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있는 일본군

일본군이 열무당에 4대의 기관포를 설치하고 있다. 열무당 오른쪽 지붕 옆으로 강화유수부가 선명하게 보인다. 열무당에 설치한 4문의 기관포는 조약의 불평등을 강요하는 위협의 상징이다. 기관포 앞에 사열한 일본군 외에도 자세히 보면 각 기관포마다 건물 안쪽에 일본군이 다수 도열해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일본 협상대표의 임시 공관

정문에 대일본(국특명)전권별리대신공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정문 중앙 안으로 중문이 보이고 그 안에 숙소가 있다. 그림자 방향으로 보아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사진 앞의 그림자는 중문의 그림자이며 햇볕을 가린 차광막이 처진 곳이 일본 협상 대표의 숙소인 듯하다. 햇볕때문인지 차광막 앞에서 조선인 관리들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조선국 협상대표인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종사관 2명, 사진을 선물받은 수신사 김기수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제국 관립인천외국어학교와 1910년대 초등학교 풍경.

세줄로 줄을 쓴 학생들의 갓과 옷, 머리모양에서 당시 학생구성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둘째 줄 오른쪽 끝에 기모노를 입은 학생도 보인다. 촬영일자가 1898년 1월이다. <출처:규장각>

외교협정 형식과 절차
개항 이후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 필요한 외교협정의 절차와 형식에 관한 법령이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비준권자인 왕이 협상대표를 임명하고 최종 비준하는 절차를 거쳤고 또한 당시 국제관습법인 ‘공법’에 준하여 체결되었다. 대체로 외교협정에는 주권과 관련된 정식조약, 주권에 저촉되이 않는 범위 안에서 행정적 편의를 위해 주재 공사와 외무대신의 책임 아래 국가 원수의 비준 발부를 생략하는 협약.의정서, 그리고 제3국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당사국만의 약속인 각서 등이 있었다. 이러한 외교협정은의 구별은 나라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그 형식과 절차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이 외국과 체결한 정식 조약으로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이후 서구열강과 체결한 통상조약 등이 있다. 이 정식조약이 외교협정으로서의 공식성을 갖기 위해서는 대개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1) 국서접수, 상대국의 조약체결의사를 접수
2)의정부 개최, 국서 수용여부에 대한 의정부(각의) 회의 개최
3)협상대표 임명, 국가 원수가 조약 내용을 협상할 대표에게 전권위임 임명장 수여
4) 조약협상 및 조인, 두나라 협상 대표가 합의한 장소에서 협상을 하고 합의 결과를 조약문으로 작성하여 각자의 직명.이름을 쓰고 사인 또는 날인함.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1876년 2월 2일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통상조약이다. 모두 12개 조항으로 부산과 5도 연해안 2개의 항구의 개항, 개항장 내 일본인 영사재판권 인정 등을 담고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각국과의 통상조약비준교환에 대한 전권위임장

1883년 3월 10일 고종이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에게 서양 각국과의 통상조약비준교환에 대해 전권을 위임한 위임장이다. 전시 면의 마지막에 국새인 <대군주보(大君主寶)>가 선명하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조미수호통상조약비준교환에 대한 전권위임장

1883년 2월 4일에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가 조미수호 통상조약 비준서의 교환에 대한 전권을 푸트에게 위임한다는 영문위임장이다. 백악관 문양의 압인과 미국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선명하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서구 열강들과 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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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어진(御眞)

고종황제가 익선관에 황색 곤룡포를 입은 차림으로 어좌에 앉아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고종은 홍색 곤룡포 대신 황색 곤룡포를 착용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종대례의궤,1897년. 구한말 광무개혁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그와 관련된 일련의 조치들을 기록하고 있는 의궤이다.

1897년 10월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 1897년 8월 권재형이 국제공법상 황제나 왕은 자주독립국가에 있어서 동등한 존호이므로 조선에서 황제를 칭해도 전혀 지장이 없음을 주장하면서 건원칭제 논의가 시작되었고, 9월 21일에는 황제즉위식을 거행할 원구단 축조공사를 시작하였다. 10월 12일 즉위식을 거행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즉위식 다음날인 10월 13일 조서를 내려 자신이 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사실을 선포하였다. 본 의궤에는 즉위식 준비를 주관 이들의 명단을 기록한 <좌목>, 즉위식과 관련된 명령을 기록한 <조칙>, 즉위식의 행렬을 그린 <반차도>, 그리고 의식 준비와 관련된 각종 공문서 내용 및 재정 조달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황제 즉위 이후 달라진 왕실 의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 의궤이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대한제국 선포이후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던 명성황후의 국장에 대한 기록이다.

1898년의 장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살해된 고종의 비 민씨를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봉하고 청량리에 있던 홍릉으로 이장할 때의 국장 절차와 과정을 기록하였다. 왕비릉은 원래 양주의 숭릉 오른쪽에 조성했다가 1897년 홍릉으로 바꾸었다. 이 의궤는 국장이 끝난 1897년 10월 28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1898년 5월 20일 완료하였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총 7건이 제작되어, 규장각(황제용), 시강원(황태자용), 의정부, 비서원, 장례원, 적상산사고, 오대산사고에 각각 보관되었다. 이중 규장각과 시강원에 보관된 것은 궁중용 의궤로 5권 5책으로 되어 있고, 의정부.비서원 등에 보관한 부본은 4권 4책으로 되어 있다. 붉은 삼베 비단은 분상용으로 적상산 사고에 보관한 것이며, 붉은 비단표지는 황태자, 노란색 비단표지는 황제에게 올린 것이다. 노란색은 황제의 색깔을 상징하는데, 고종 때 위상이 높아진 황실의 분위기를 의궤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제 규장각에는 오대산본을 제외한 6건이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본은 일제시대 일본으로 유출되어 현재는 일본 궁내청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대리조칙
오호라 짐이 역대 임금들의 크나큰 위업을 계승하고 지켜온 지 이제 44년이 되었다. 여러 차례 큰 난리를 겪으면서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인재등용이 더러 적임자로 되지 못하여 소란이 나날이 심해지고 조치가 시기에 대부분 맞지 않아 근심스러운 일이 급하게 생겼다. 백성들의 곤궁과 나라의 위기가 이보다 심한 때가 없어서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하다. 다행히 황태자의 덕스러운 기량은 하늘이 준 것이고 훌륭한 명성은 일찍부터 드러났다. 문안을 하고 식사를 살펴보는 겨를에 도움을 주는 것이 컸고 정사를 베풀고 개선하는 방도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 있게 되었다. 집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황위를 물려주는 것은 원래 역대로 시행해오는 규례였고, 또한 우리 선대 임금들의 훌륭한 예의를 옳게 계승햐야 할 것이다. 짐은 지금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하노니, 의식절차는 궁내부와 장례원(掌禮院)에게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황제대리조칙(복제), 1907년

1907년 7월 18일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황제를 양위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대응하여 대한제국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일시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할 것을 반포한 조칙이다. 일본은 이 조칙을 황태자에게 황위를 넘겨 준 것으로 처리하여 이틀 뒤인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을사늑약(乙巳勒約,복제), 1905년. 국권을 상실하게 했던 이 문서에 자기 이름을 걸고 도장을 찍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1905년 11월 17일에 한국 외교권을 강탈한 협정이다. 이 조약은 외교권 박탈이라는 주권과 관련된 조약인데도 정식 조약이 아닌 협약으로 체결된 점, 조약문에 조약 명칭이 없는 점 등 외교문서로서 결함이 많고 고종황제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불법적 외교협정이다. <출처: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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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내용.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 한일협약의 약정을 요구한 기밀통비발,1907년

1907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에게 한일협약의 약정을 요구한 조회문이다. 전시된 조회의 별지(일본문 한일협약문)는 1907년 7월24일 체결된 한일협약이 일본에 의해 강제된 것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전시된 조회문 번역의 수정 흔적은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은 고종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한일의정서, 협정사, 한일협약 주요 내용

OLYMPUS DIGITAL CAMERA병합늑약(倂合勒約, 복제), 1910년.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자손만대에 널리 알리고, 역사이래 최대의 수치라 할 수 있는 한일병합늑약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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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늑약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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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늑약 내용
1910년 8월 22일 한국 전권위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전권위원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ㅏ다케 사이에 조인한 한국병합에 관한 협정이다. 이 늑약은 을사늑약과 함께 외교협정의 절차상의 결함과 함께 한국과 일본 양국이 작성한 조약의 글씨체 등이 토씨를 제외하고는 똑같은 등의 결점으로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통치권 양여에 관한 순종황제 칙유(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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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에 순종황제가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고 포고한 칙유다. 칙유에는 국제대신 어새가 찍혀 있고 순종황제의 서명이 없는 결함이 있어 일본이 ‘날조’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일본황제의 조서

1910년 8월 29일 오전 11시 공포된 일본황제의 조서이다. 이 조서는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통감관저에서 병합늑약에 기명.날인한 뒤 ‘병합조약과 병합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을 동시에 공포하기로 한 각서’에 따라 공포된 것이다. 조서에는 어명+국새+부서가 선명하다. <출처:규장각>

외교 협정상 있을수 없는 불법
1910년 8월 22일 작성된 네 가지 문서 즉 1)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는 위임장, 2) 병합늑약(국한문), 3) 병합늑약(일문), 4) 각서의 글씨체가 ‘똑같다’는 사실은 곧 네 문서를 한 사람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병합조약과 양국 황제의 조칙을 동시에 공포하기’로 약속한 4)각서의 판심을 보면 ‘통감부’이다. 이것은 네가지 문서 모두 통감부의 주도로 작성되었음을 뜻한다. 특히 1)과 2)는 한국측에서 작성해야 하는 문서인데도 이것을 통감부에서 작성했다는 것은 외교협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는 위임장,

OLYMPUS DIGITAL CAMERA2) 병합늑약(국한문), 3) 병합늑약(일문),

OLYMPUS DIGITAL CAMERA4) 각서

OLYMPUS DIGITAL CAMERA외교 협정문의 내용과 형식

 

 

 

서울 환구단(圜丘壇, 사적), 대한제국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곳

서울 중구 조선호텔 자리에 남아 있는 환구단(圜丘壇)이다. 환구단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으로 지위를 격상하면서 하늘에 제사을 올리기 위해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1897년에 설치하였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고종 황제가 머물던 덕수궁을 마주보는 작은 언덕에 세워졌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인 황궁우(皇穹宇), 돌로 만든 북(石鼓)과 출입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조선총독부가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중국 북경의 천단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 데, 그 규모나 내용면에서 많이 부족해 보인다. 구한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도 크지 않으며, 원형도 훼손되어서 지금은 도심속에 숨어 있는 작은 정원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국력을 보여주고 장소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제천의례가 행해졌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대 일시적으로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는 했으나 곧 폐지되었다고 한다. 환구단에서 올리는 제사는 삼국시대이 제천의식과는 달리 중국의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환구단은 본래 중국의 천자가 동지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을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에 따라 둥근 원형의 제산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지금도 북경 자금성 남쪽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천단(天壇)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 환구단(사적)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거의 없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은 없어지고 황궁우와 출입문 등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환구단 사진(1907년)과 배치도. 엄청난 면적과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천단공원과는 달리 규모도 작고 면적도 좁다. 남쪽에 제사을 올리는 원형의 제단이, 북쪽에 위패를 모시는 건물인 황궁우가 있다. 제사 준비시설로 전사청과 재실 등이 있다.

환구단(圜丘壇) 정문, 1897년, 서울 중구 소공동
이 문은 대한제국 초기 환구단 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정문으로 지은 것이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로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당시의 황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의 맞은편 남별궁터에 세웠다. 환구단의 전체시설은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그리고 그 주변 시설로 어재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추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황궁우(皇穹宇)와 석고각 안에 있었던 돌북 뿐이다.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의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위치하였는데, 1960년대말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원래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 복원을 논의하게 되었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환구단 시민광장으로 자리를 정한 것은, 서울광장 및 덕수궁과 마주보고 있어서 보다 많은 시민이 환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 측칸을 좁게 조정하였다. 기둥 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사용한 점도 특별하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환구단 정문. 원래는 남쪽편 조선호텔 입구에 있었다. 1960년대 철거된 후 우이동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평삼문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환구단 정문 추녀마루 잡상.

OLYMPUS DIGITAL CAMERA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3층제단이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북경 천단공원의 제단. 이곳과 비슷한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皇穹宇)는 제천행사때사용하는 신패를 보관하는 곳이다. 북경 천단공원의 황궁우를 참조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것은 원형의 1층 건물인데 비해 우리나라 것은 팔각형에 3층건물을 하고 있다. 아마도 웅장한 기년전과 비슷하게 지을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 월대를 오르는 계단. 동.서.남 세방향으로 계단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 단청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추녀마루에 세워진 잡상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 건물 앞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계단.

SANYO DIGITAL CAMERA중국 천단공원의 황궁우.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 정문.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 동쪽편 협문. 삼문으로 된 정문과는 달리 작은 협문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 역할을 하는 난간.

OLYMPUS DIGITAL CAMERA마당에 세워진 해시계.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안쪽에 모아 놓은 석물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 정문.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기존의 목조건물과는 달리 중국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지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궁우 정문 앞 계단. 계단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국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단 난간 기둥에 세워진 석수(石獸).

OLYMPUS DIGITAL CAMERA삼문 앞 작은 석수.

SANYO DIGITAL CAMERA2009년 황궁우.

OLYMPUS DIGITAL CAMERA석고(石鼓). 

석고는 광무6년(1902)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이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구한말 최고의 조각으로 평가받는 돌로 만든 북(석고)

 환구단(圜丘壇), 사적157호, 1897년, 서울 중구 소공동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皇壇) 또는 원구단(圜丘壇,圓丘壇), 원단(圜壇,圓壇)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1897년 10월에 완공된 환구단은 당시 왕실 최그의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이 설계를 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 돌로 만든 북(石鼓)과 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의 덕수궁)과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출처:서울시청>

[중앙박물관 조선실5] 대한제국과 근대

중앙박물관 조선실의 제일 마지막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존의 정치.사회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2012년 특별전과 비슷한 형태로 구한말 변혁기에 서양문화와의 접촉과 서양의 영향을 받은 대한제국 시기를 재조명하는 내용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9세기말 서양열강세력들의 대리전이자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보여준 청.일전쟁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는데,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정비된 서구식 교육제도, 의료, 교통, 통신 등의 모습들과 서양인에 비친 조선의 모습들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19세기말 급격히 발전하는 서구문화를 따라 잡고자 하는 노력과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고 일제에 강점당하는 조선사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전시내용으로는 대한제국의 교육에 사용된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교과서를 비롯하여 새롭게 도입된 사진기, 전화기 등 기기들과 선교사들과 함께온 서양 의료진의 유물들, 서양에 비쳐진 조선의 모습 등이 있다.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는 유물로 그가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 중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세웠던 척화비가 전시되어 있으며, 주로 대한제국의 성립과 근대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한말은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중국 정세를 당시 집권층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했는지에 대한 유물들과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와 무능함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후대에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곳이다

대한제국과 근대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고종은 광무1년(1897) 10월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광무3년(1899)에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여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주 선언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었다. 러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904년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지만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 일본은 점차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국권을 침탈하기에 이르렀다. 암울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의 문물은 놀라운 속도로 생활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서구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독립신문.황성신문 등이 발행되어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고취하였다.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도 이 때 문을 열었다. 특히 전화기.사진기.축음기 등 과학기기와 철도.자동차 등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은 우리의 일상적 삶을 크게 바꿔 놓았다. <출처:중앙박물관>

개항 – 척사와 개화
고종 13년(1876) 일본과 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이에 반대하는 척사파가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고, 고종 31년(1894)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다. 한편 갑오개혁(1894)에 이르러서는 신분제를 법률적으로 폐지하는 등 기존의 제도를 근대적인 제도로 바꾸어 나갔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자손에게 길이길이 경계하노라. – 병인년(고종3, 1866)에 만들고 신미년(고종8,1871)에 세운다.

OLYMPUS DIGITAL CAMERA척화비斥和碑, 고종8년(1871),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내용의 비석, 척화비. 이 비석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며, 쇄국정책은 후대 사람들이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지고, 멸망하게 된 큰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아편전쟁 이후 피폐된 중국 청나라의 정세를 듣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취할수 있는 여러 정책 중 하나라고 보여지며 이를 폄훼하는 것은 바림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로 인한 국가재정과 경제력의 피폐가 더 큰 원인이었던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안으로 세도 정치이 폐해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밖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하였다. 어린 국왕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에 세워졌던 것으로 임오군란(1882)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개항을 반대한 학자 이항로의 글을 모은책. 이항로 선생 본인은 청렴하게 살았고 그의 주장은 그리 나빠보이는 않지만, 당시 기득권세력들이 이를 이용한 측면이 많아 보인다.

서양세력을 배격한 대표적인 유학자인 화서 이항로의 시문집이다. 고종 3년 (1866) 동부승지 등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에서 이항로는 서양세력과 화의를 하면 짐승과 같은 상태로 빠지게 될 것이라며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 병영에서 사용한 화승총. 19세기말이면 세계적으로 기관총이 널리 사용되었던 시기인데, 이런 총으로 외세에 저항한다는 것을 말이 그렇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대한제국 때 강화도 병영에 보관되었던 화승총이다. 나무로 만든 총신에 ‘신축년에 강화의 무기고를 고쳐 격납했다.’는 내용의 붓글씨가 쓰여 있다. 이를 통해 이 총이 1900년대 강화도의 대한제국 진위 제1연대에서 보관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학농민전쟁 참가자들의 연명서, 사발통문.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도부의 목숨을 건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사발통문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돌려 적은 통문이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고부성을 함락하여 군수 조병갑을 비롯한 악독한 관리를 없애고 전주감영을 함락시킨 뒤, 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을 결의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어진, 전 채용신 필 고종어진. 이전의 어진에 비해서 사진과 같은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아마도 사진이 들어온 이후에 그린 것이라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평상복인 황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원래 왕의 평상복은 붉은색 곤룡포와 익선관이었는데,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이 그림과 같이 황룡포를 착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화를 향한 노력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도 서양 세력의 개방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병인양요(1866).신미양요(1871)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 13년(1876) 조선정부는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1894)이 일어났다. 광무 원년(1897)에 조선의 자주권을 유지하고 근대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권이 일본에 의해 침해당하자, 한국인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항 이후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신문과 같은 근대적 출판물이 간행되고, 학교.의원이 세워지고, 철도와 전신이 설립되는 등 새로운 제도와 문물이 생겨났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獨立新聞, 대한제국, 광무3년(1899) 5월16일,

1896년 4월7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최초의 한글 신문이다. 근대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사상, 자주적 근대화를 강조하여 국민 계몽의 역할을 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총4면에 격일간지로ㅓ 발행되었다가 판형이 두 배로 확대되고 일간지로 발행되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된 뒤에는 기관지의 역할도 하다가 1899년 12월4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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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 유학 관료들이 주도하여 만든 신문, 황성신문

광무 2년(1898) 9월 5일 남궁억 등 개신 유학 관료들이 <황성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한 일간 신문이다. 광무 9녀 (1905) 11월 20일에 실린 장지연의 노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하다. 1901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다가 같은 해 9월 14일 폐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갑오개혁 때 궁내부에 걸었던 현판

궁내부는 왕실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고종 31년 (1894) 갑오개혁 때 만들어졌다. 갑오개혁기에 왕실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부와 국가 운영을 담당하는 의정부가 분리되는 관제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개혁으로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을 구분하는 등 근대적인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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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식 호적

건양 2년(1897) 충청남도 홍산군 남면 마동리 제6통 제3호에 거주한 농민 박준달의 호적이다. 이 호적에는 박준달, 부인 문씨 그리고 아들과 달 등 4인 가족이 기재되어 있다. 개별 가호에서 가족 사항을 적어 관청에 신고하는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달리, 관청에 의해 정해진 양식에 따라 가족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식 교육과 의식의 성장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교육제도가 마련되었다. 1895년 ‘국가의 부강은 국민의 교육에 있다’는 내용의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가 발표되고, 같은 해 학부學部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소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를 세우고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정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당시 교과서들은 일본에서 편집한 서양 교과서를 다시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학부 주관 아래 국어독본, 역사, 지리 등 여러 종류의 교과용 도서를 발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글 문법책, 국문정리. 한글 문법을 최초로 정리한 연구서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크게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897년 이봉운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문법 연구서이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글은 언문에서 국문으로 격상되었으나 제대로 된 연구서와 전문가가 없었다. 이 책은 독립신문에 실렸던 서재필과 지석영의 논설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한글만으로 글을 짓고 띄어 쓰기를 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세계지리 교과서, 소학만국지지小學萬國地誌, 세계지리에 대하여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소학교용으로 국문과 한문을 섞어 기술하였고, 대륙별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총론에서 지리학의 정의, 지구, 대륙, 반도, 산지, 대양, 육지와 해양의 면적, 세계의 인구, 정부의 체제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등 산수 교과서, 산술신서算術新書, 이상설 편집, 대한제국, 광무4년(1900), 일본인 편찬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하여 편집한 사범학교 및 중학교용 산수 교과서이다. 세로쓰기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계산과정 등은 가로쓰기를 하였다. 수학에 대한 총론 및 정수.소수.분수 계산법 등을 서술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전 형식의 국어 교과서, 언문言文, 지석영, 대한제국, 융희3년(1909), 사전형식의 단어집 체제로 된 국어 교과서로 19,000개의 한자어에 독음을 표시하여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였다. 한자의 뜻을 국문으로 풀이하여 국어만 알면 한자의 뜻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한자음의 높고 낮음을 권점으로 표시하였다.<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물리학교과서, 물리학초보物理學初步, 안일영 편집, 대한제국, 융희3년(1909), 물리학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총8편으로 나누어 한글과 한문을 섞어 설명한 교과서이다. 실험하는 모습이나 물리적 현상들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표현하여 이해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6개 나라의 국기가 있는 세계지도, 세계전도

세계를 2개의 반구로 나누어 그린 세계지도로 광무 4년(1900)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에서 중간한 것이다. 동반구와 서반구도가 상하로 붙여 장황되어 있으나, 원래는 좌우로 배치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반구 위에 ‘조선’ 등 18개국, 서반구 위에 ‘애급’ 등 18개국, 총 36개 국가의 국기를 원색으로 수록하고 각국의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함꼐 표기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 의학의 도입
본격적인 서양 의학의 도입은 의료 선교사 알렌이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의 개설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제중원濟衆院으로 개명)이 탄생하였다. 제중원에는 의학당이 만들어져 근대식 의학교육이 이루어지고, 1894년 병원의 운영권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한편 대하제국은 1899년 무상의학교육을 내용으로 한 ‘의학교관제醫學校官制’를 공포하며 점차 근대적 공공의료의 체계를 잡아갔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해부학교과서解剖學敎科書, 에비슨 편집, 대한제국, 융희3년(1909), 에비슨 O.R.Avison(1860~1956)이 편집한 해부학 교과서이다. 제중원 의료책임자로 임명된 에비슨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의학교재의 필요성을 느껴서 의학생들과 함께 서양 의학 교과서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대부분의 의학교과서를 번역, 출판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알렌이 사용했던 약절구, 19세기 후반, 에비슨의 수술 사진, 대한제국, 광무8년(1904), 등록문화재 448호,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장면을 찍은 유리건판이다. 에비슨은 1893년11월부터 제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여, 우리나라에 근대 서양 의학을 보급하는데 공헌하였다. 박서양은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알렌의 진단서, 미국 1885년, 등록문화재445호,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알렌 H.N.Alllen (1858~1932)이 1885년 9월13일자로 작성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의학 진단서이다. 이 진단서는 인천해관 직원이었다. 웰쉬 C.AWelsh에게 발부한 것으로 2주간의 요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인천해관문서仁川海關文書』에 첨부되어 있던 문서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미세한 것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기구, 현미경顯微鏡, 미국 1900년대, 사물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확대하여 관찰할 수 있게 만든 기구이다. 당시 현미경은 자체 조명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앞에 전구를 켜 놓고 빛을 반사경으로 시료에 비추어 관찰하였다. 현미경은 19세기 서양문물과 함께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소리의 이동, 전화기,
1876년 벨A.G.Bell이 발명한 전화기는 음성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전달하는 기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82년 유학생 상운이 처음으로 전화기를 중국에서 들여왔고, 1898년 궁내부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 최초로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1902년 3월 한성과 인천 사이에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고, 6월 한성시내에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전화기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스웨덴 에릭슨사에서 만든 자석식 전화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석식 전화기는 상대를 호출할 때 자석 발전기를 돌려야 하고 또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통화 전류를 공급할 전지를 구비하여야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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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석.자동 겸용 전화기, 스웨덴, 1890년대

근대 우편 업무의 시작, 우표 발행
근대 우편제도는 1884년 우정총국이 창설되면서 시작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과 우편제도가 중지되었다. 1895년에 이르러 우편제도가 재정비되어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에 우체사가 설치되었으며, 중앙은 통신원이 생겼다.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정식 가입하여 외국과의 우편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우표는 우정총국의 개국과 함께 발행된 5종의 문위우표이다. 실제 발행된 우표는 5문과 10문이 두 종류였다. 당시 통용화폐단위가 ‘문文’이었기 때문에 문위우표라고 하며 우표라는 용어 대신 ‘우초’라고 표기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우표와 우편엽서, 19세기말~20세기초, 1895년7월22일 발행된 태극 보통우표4종, 1903년 10월1일 발행된 독수리 보통우표 3종과 1900년 1월부터 1901년 5월 사이에 발행된 이화 보통우편 등 총14종의 우표가 부착되어 있다. 우표 가운데 검은색으로 ‘일전’, ‘삼전’이라고 첨부해 놓은 우표는 그 금액에 해당되는 우표가 없어 다른 우표 위에 그 금액을 찍어서 사용한 것으로 주로 1901~1903년에 첨쇄하여 사용한 우표이다. 모두 소인이 찍힌 실제 사용한 우표를 모은 것이다. 왼쪽에는 광무5년(1901) 전환국에서 발행한 우체왕복엽서가 부착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우편엽서는 1900년 5월10일에 최초로 발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제국기 발급된 전보, 1902년, 대한제국전보사에서 취급한 전보이다. 수신자는 부산 밀양진읍 박태영 댁의 ‘진영’이라고 되어 있다. ‘위참셔관’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전보지와 봉투가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봉투에 찍힌 소인을 통해 광무6년(1902) 6월14일에 보내진 전보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표 수집가의 우표와 메모, 대한제국기, 1900년대, 대한제국기 발행된 우표를 부착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메모록이다. 1884년 발행된 문위우표, 1900년의 이화 보통우편, 1903년의 독수리 보통우표 등 총25종의 우표가 부착되어 있다. 1884년 우정총국이 신설되면서부터 1905년 일본에 통신권이 강탈당하는 시기까지의 우표 발행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 메모에 의하면 우편제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당시 사람들이 우편배달부란 명칭을 알지 못하여 ‘소식을 전하며 걸어 다닌다’는 의미로 ‘보장군報將軍’, ‘보장군步將軍’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입체사진을 볼 수 있는 장치와 입체사진, 1920년대, 입체사진기로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입체감 있게 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를 입체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입체감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의 좌우 두 눈의 망막에 비치는 영상이 일반적으로 대상의 거리에 따라 좌우로 조금씩 밀리기 때문이다. 1850~1920년 사이에 수백만 장의 입체사진이 생산되었고, 다양한 입체사진기와 입체경이 발매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00~1920년대 사이에 서양인이 찍은 당시 풍경 및 풍속을 담은 입체 사진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그림엽서, 1897~1910년, 대한제국 시기에 발행된 그림엽서이다. 이 당시에 발행된 그림엽서들은 주로 서양과 일본 등에서 발행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발행된 것 가운데에는 한일병합이 전조를 알리는 내용의 것들이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 관리의 복식, 풍물 등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았고 점차적으로 풍경, 명승고적 등을 그림과 사진으로 담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나팔형 축음기, 소리의 기록과 재생, 영국 1900년대, 원판을 통해 소리를 재생하고 나팔모양의 혼horn이 소리를 크게 해주는 축음기이다. 1877년 에디슨이 ‘틴포일 Tin Foil’이라는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축음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기계 안에 사람이 있거나, 귀신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다. 축음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초반에는 유성기 등으로 불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축음기로 통칭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기록
19세기 후반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이래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다녀갔고, 그들은 조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들 중에는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부분도 있지만, 조선의 정치.문화.지리.생활풍습.종교 등 서양인의 시각에 비친 조선의 이미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용한 아침이 나라에 등장한 자동차, 더 그래픽, 영국, 1909년, 서울에 등장한 자동차 소식을 실은 영국 잡지 ‘더 그래픽’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남대문 앞에 등장한 자동차를 보고 놀란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이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이 기사를 통해 1909년 이전에 자동차가 서울 거리에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자동차를 보고 놀란 사람들을 통해 자동차 등의 서양문물이 당시 사람들에게 준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전환기의 조선, 미국 1909년, 캐나다인 제임스 게일이 선교사로 1888년부터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경험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게일은 이 책에서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한글의 우수함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글 성서 번역에도 착수하였고, 직접 한영사전을 편찬하였다. 또한 여성 교육을 실시하여 한국 여성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 15년간 한국에서의 인연과 생활, 미국 1904년, 릴이아스 언더우드가 조선에서의 체험을 서술한 책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부인인 그녀는 이 책에서 조선의 첫인상부터 직접 목격한 궁중생활과 궁중의 숨은 이야기, 관서.관북지방 여행, 한국 초대 교회의 어려움 등을 기술하였다. 명성황후의 전용 의사가 되면서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이를 기록하였다. 한국과 이웃나라들, 영국 1897년, 영국인 이사벨라 비숍이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4차례 방문한 이후 현장답사와 자료 수집 및 문헌 연구를 통해 조선에서 경험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비쇼은 이 책에서 부패한 관료, 가난, 여성의 삶 등에 대한 언급을 통해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한편,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프랑스에서 발행된 춘향전, 프랑스, 1892년, 고전소설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각색하여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 소설가 로니는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도움을 받아 춘향전을 번역하였다. 감미롭게 묘사된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는 아시아 문학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이국적인 감성을 자극하였다. 이 책의 삽화에는 춘향과 이도령의 모습이 서양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로니의 번역본은 1999년 프랑스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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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프랑스 태생의 작가 폴 자쿨레의 다색판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성모 마라아상을 우리나라의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작품 제목 ‘보물’은 어머니에게 아이는 보물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폴 자쿨레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아시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새로운 구도와 색채로 다색 판화에 담았다. 어머니가 머물던 서울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담아 한국인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의 성립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날 ‘대한大韓’이란 국호를 반포하며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국의 위상에 맞도록 의례를 재정비하였다. 황제의 인장은 기존의 거북이가 조각된 인장이 아니라 용이 조각된 인장을 사용하였으며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금책을 내렸다. 또 명성왕후를 황후로 추봉追封하고 미뤄두었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외에도 태조와 고종의 직계4대조를 황제로 추존하는 등 황실 관련 기념사업을 추진하여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종황제 옥보, 광무6년(1902)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 옥보, 1921년

OLYMPUS DIGITAL CAMERA황태자 책봉 내용을 담은 금책, 광무1년(1897)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제국 황제의 인장, 칙령지보

1897년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에 오르면서 만든 국새 가운데 하나로 통신조서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 외교 문서에 사용한 ‘대한국새’, 포상에 사용한 ‘황제어새’, 고급관리의 사령장에 사용한 ‘제고지보’, 군대의 통수에 사용되었던 ‘대원수보’ 등이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의 훈장제도
대한제국의 선포에 이어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문무관복을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고, 관복에 다는 훈장 제도는 1900년 ‘훈장조례’를 반포하면서 시행하였다. 국가의 공훈은 대훈위大勳位와 훈勳, 공功의 세 종류로 구분하였다. 훈장은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과 길상 문양으로 도안되었는데 태극장太極章과 팔괘장八卦章에는 태극기 문양을 이용하였다. 1883년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정하였다. 태극기는 대한제국의 상징으로서 각종 공식 문서와 우표,여권,훈장 등의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훈공3등 태극중수장, 훈공5등 태극소수장, 훈공7등 태극소수장, 훈공3등 팔괘중수장,

OLYMPUS DIGITAL CAMERA 태극문양의 대한제국 훈장

대한제국의 훈장제도는 광무 4년(1900) ‘훈장조례’를 공포하면서 처음 시행되었다. 원래 금척대수정장, 이화대수정장.태극장.자응장 4종이 있었는데, 이후 팔괘장(1901).서봉장(1907)이 추가되었다. 전시된 훈장은 대한제국 3등 훈장 태극장, 대한제국 3등 훈장 팔괘장, 대한제국 7등 훈장 태극장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태극기가 그려진 대한제국기의 여권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의 신분과 국적을 증명하고 그의 보호를 의뢰하는 문서이다. 이 여권은 광무 8년(1904) 12월 19일 외교 담당 관청인 외부에서 박기오에게 발행한 여권이다. 왼쪽에는 영어와 불어로, 오른쪽에는 한자로 여권의 내용이 기입되어 있고, 1년간의 유효기간이 명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극기를 활용한 엽서와 상품카드

OLYMPUS DIGITAL CAMERA고종의 외교고문 데니가 소장했던 태극기, 고종 27년(1890) 경, 등록문화재 382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져 있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가 1890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던 태극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져 있다. 팔괘문의 형태는 지금과 같으나 색은 청색이다. 제작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를 매다는 끈이 오른쪽에 남아 있어 태극기의 오른쪽을 국기봉에 매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미국인 목사 윌리엄아서 노블 부부가 소장했던 태극기

1892년부터 1936년까지 우리나라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한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노블과 그의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이 소장했던 태극기이다. 이 태극기는 박음질로 천을 덧대어 태극과 사괘 문양을 만들었다.  매티 윌콕스 노블이 쓴 친필. 글씨 내용은 ‘Korea Flag up to Japanese Occupancy(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국국기)’인데, 이는 노블 목사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의 친필이다. 이들 부부는 일제강점기에 이 태극기를 파기하라는 일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보존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양화법의 수용
서양화법은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조선후기 회화에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회화에도 투시법과 명압법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사실적 회화양식과 대상을 직접 눈앞에 두고 사생하는 기법이 새롭게 도입되었다. 휴버트보스 Hubert Vos 같은 서양화가의 내한도 서양화법의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화가 안중식과 조석진은 중국에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김규진은 일본에서 사진술을 연마했다. 채용신, 김은호의 초상화에는 서양화와 마찬가지로 빛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산수화 역시 관념 산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실제의 경치를 직접 사생하는 풍조가 확산되며 투시원근법의 활용이 두드러졌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계절의 풍경, 지운영, 1929년, 조선 말기 및 근대 초기의 문인화가인 백련 지운영의 작품으로 사계절의 자연을 10폭에 나누어 그렸다. 지운영은 개화ㅏ기 사진술 도입에 선구적인 인물로 주목 받아왔으며, 1900년 어진모사작엡에 천거될 만큼 당대의 인정받은 화가였다.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인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은 1880년대 초반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습하고 강한 필선을 사용하여 사계절의 풍경을 표현한 이 그림은 19세기의 전통을 계승한 남종화품의 산수화이다. 그는 전통과 근대를 연결하는 시점에서 전통적인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근대 화풍을 모색하여 전통 회화의 변화를 주도한 작가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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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의 초상화, 등록문화재 486호, 채용신이 1914년 그린 최연홍의 초상화이다. 운낭자상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기독교의 성모자상을 연상시키며 옷주름 묘사에 있어 서양화법의 영향이 엿보인다. 선에 주로 의존한 전통 초상화와 달리 골이 파인 부분에 엷은 먹을 반복적으로 칠함으로써 입체감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개성이 결여된 얼굴과 치마 밖으로 살짝 드러난 버선발 표현 등 전통성도 뚜렷하다. 운낭자는 원래 평안남도 가산의 관기官妓로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군수 부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부상당한 군수의 동생을 치료해줬다고 한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기적妓籍에서 빼주고, 사후에 그 초상화를 평양 의열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이규상 초상과 기념장
19세기 말 무관을 지낸 이규상의 초상으로, 전통 관복을 입고 가슴에는 고종황제 망육순望六旬 기념장과 황태자 가례嘉禮 기념장을 달아 그 자체만으로도 시대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통초상화는 19세기말~20세기 초에 큰 변화를 겪는데 이규상 초상에는 기법 면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얼굴 묘사를 보면 왼쪽보다 오른쪽을 밝게 그려 빛의 원리에 입각한 서양의 명암법을 수용했지만, 좌우의 균형을 중시하는 동양초상화의 관례에 따라 명도차를 최소화하였다. 화문석의 문양을 뒤로 갈수록 작게 처리한 것도 서양화의 투시법의 영향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규상 초상화(20세기초, 복제품)와 사진

대한제국의 기념장
대한제국기에는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념장이 총5회에 걸쳐 발행되었다. 1901년 고종황제 성수聖數 50주년을 맞아 관계자들에게 수여한 것을 시작으로 1902년 고종황제 망육순과 등극 4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장이 발행되고, 1907년에는 황태자의 가례 기념장과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이 발행되었다. 그 후 1909년에는 순종황제의 민정시찰을 기념하기 위한 남서 지역 순행巡幸 기념장 등이 발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딱지본 소설, 1908~1926년, 복제본, 딱지본이란 책의 표지가 아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시장터의 국수가격인 육전 정도로 한권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육전소설’이라고도 한다. 1908년경부터 나오기 시작한 딱지본 소설은 1920년~3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딱지본 소설은 파격적인 색상과 민화형식과 서양화 기법을 사용한 일러스트가 결합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청전』,『춘향전』 등과 같은 고전 소설도 있었지만, 서양 세계에 대한 호기심, 자유연애 등 변화하는 도덕관념을 담거나 과학소설, 탐정소설 등 새로운 소재를 다룬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여권, 광무8년(1904), 외국에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분과 국적을 증명하고 그의 신변 보호를 의뢰하는 문서이다. 이 여권은 1904년 12월19일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한 관청인 외부外部에서 박기오에게 발행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0세기초 광화문 육조거리

OLYMPUS DIGITAL CAMERA종로대로, 동대문대로, 전차

OLYMPUS DIGITAL CAMERA미감리교에서 정동에 개설한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 서울의 조폐국 견습생들, 영어학교 수업시간

OLYMPUS DIGITAL CAMERA바둑을 즐기는 이탈리아 영사 로제티와 그의 통역 양홍묵, 에비슨 부부와 허스트, 박서양 등, 한반도에 살던 호랑이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 OLYMPUS DIGITAL CAMERA구한말 모습이 담긴 사진

운현궁 양관(洋館, 사적), 일제가 흥선대원군 일가에 지어준 서양식 저택

운현궁 양관(洋館)은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일제가 한일합방 이전인 1907년도에 지어준 건물이다. 원래 이 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의 뒤뜰에 해당하는 곳으로 별당격인 아재당과 정자인 영화루, 은신군.남연군의 사당이 있었던 자리로 이들 건물들을 헐고 일제가 한일합병에 앞서 왕실인사를 회유하기 위해서 만들어 준 것으로 보인다.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의 장손으로 여러차례 국왕을 추대되었던 인물이다. 일제가 을사늑약 이후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 이 건물을 일본에서 귀국한 이준용에게 지어주었다. 이 건물은 그후 의친왕의 차남이 이우의 소유가 되었다가 해방후인 1946년부터 덕성학원에서 소유하게 되어 현재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행, 총독부청사 등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건축했던 많은 서양식 건축물들과 비슷하게 바로크 건축양식을 모방해서 만든 건물로 외형적으로 화려하면서 곡선이나 타원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의 건축시기 또한 비슷한 양식의 건물에 비해서 이른 시기인 1907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공공기관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관 출입문을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돌출되게 지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원군이 사저였던 운현궁 동쪽편 언덕에 세워진 운현궁 양관.

구한말 청나라를 비롯하여 여러차례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이준용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으로 쫓겨났다가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1907년에 귀국하였다. 이 건물은 그가 귀국하던 1907년에 일제가  황제였던 고종과 순종을 압박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현궁 양관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운현궁 양관과 그 주변은 해방 이후 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어 지금은 운현초등학교와 덕성여대 평생교육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입구에는 정자 용도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현궁 양관이 있는 덕성여대 평색교육관 들어가는 길. 정원이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원 사이로 보이는 운현궁 양관

OLYMPUS DIGITAL CAMERA중앙에 현관을 두고 있는 2층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서양식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장식이 많은 함석지붕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근 콘크리이트로 지은 건물로 보이는데, 유럽 건물들을 모방하여 원형기둥들과 아치를 많이 사용하여 외관을 장식하고 있다. 정원을 감상하기 좋도록 한옥의 툇마루나 누마루처럼 베란다를 많이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가 만든 공공기관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지붕이 있는 현관 입구. 마차나 자동차를 현관에서 비를 맞지 않고 바로 탈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서양건축물에서는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는데, 유독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석 등으로 만든 여러가지 장식이 있는 지붕.

OLYMPUS DIGITAL CAMERA운현궁 양관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