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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신안실] 신안선의 발굴

1. 신안선 발굴,  2. 신안선에 실린 도자기들,  3. 화물주인과 선원들의 생활, 4. 차,꽃,향과 관련된 기물, 5. 청자의 고장, 용천요, 6. 청백자의 고장, 경덕진요, 7. 자주요, 길주요 등, 8. 복건성 가마들

신안 해저유물은 전남 신안군 도독도 앞바다에서 침몰된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에 발견된 유물들이다. 1975년 어부의 그물에서 중국 용천요에서 만든 청자가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4년까지 8여년간에 걸처쳐 발굴이 진행되었다. 약 2만8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청자가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선박의 주인을 알려주는 화물 물품표인 목간을 비롯하여, 선원들이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주방기구, 놀이기구, 칼 등과 배에 실린 화물들이 사찰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주는 불교용품과 함께 14세기까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대부분의 동전들이 포함된 28톤에 이르는 동전도 함께 발견되었다. 신안해저유물들의 발굴조사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여러 기관에서 참여하였다고 하며, 발견된 주요 유물들은 현재 중앙박물관 신안해저문화재실에서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 3층 신안해저문화재실.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된 고려시대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신안선 발굴로 베일을 드러낸 ‘해상 실크로드’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잇는 교역과 문화전파의 길이다. 세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실크로드는 바닷길과 육로 등 다양한 경로로 개척되었으며 특히, 해상 실크로드(바닷길)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도자기나 향신료 등을 대량을 수송할 수 있게 되어 흔히 ‘도자의 길’(Ceramic Road)이라고도 부른다. 신안선의 발견으로 이 길의 실체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중국의 원대의 바닷길은 서아시아의 이슬람제국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의 동남해안에 이르기까지 해상교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졌으며 이 바닷길은 한국과 일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1323년 어느날, 중국의 경원(慶元, 지금의 낭보(寧波)) 항구에서 도자기를 포함한 다양한 무역품을 싣고 일본 하카다(博多)와 교토(京都)로 향하던 국제무역선은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하였다. 이후 1975년 한 어부에 의해 청자화병이 발견되면서, 국제 무역선은 650여년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신안선(新安船)”이라고도 불리는 이 침몰선의 발굴로, 바닷길을 통한 대외교류와 수중고고학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발굴된 유물은 당시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실상과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안선과 해상실크로드. 신안선이 침몰된 시기인 1,320년(충숙왕10)에는 몽골족이 세원 중국 원나라를 중심으로 동.서간 무역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당시에는 중국 청자를 중심으로 선박을 이용한 해상교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일본은 해상실크로드의 동쪽 끝단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안선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해상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안선의 발굴
1975년 8월 어느날 전라남도 신안 앞 바다에서 한 어부가 끌어올린 그물에 청자 꽃병 등 6점의 도자기가 올라왔다. 이를 계기로 중국 원나라 침몰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듬해인 1976년 1984년까지 수중고고발굴로 인양 작업이 이루어졌다. 해당 선박은 1323년 엄청난 수량의 무역품을 싣고 중국 경원(慶元, 지금의 닝보(寧波))항을 출발하여 일본 하카타(博多)항으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 침몰했다. 침몰 후 65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무역선을 우리는 ‘신안선’이라 부른다. 신안해저문화재는 발굴품이 2만 4천여 점, 압수한 도굴품 2천여점으로 총2만 6천여 점에 달한다. 종류별로는 도자기가 2만여 점, 동전이 28톤에 달하며, 이외에도 금속품 천여 점, 자단목 천여 점 및 다양한 목공예품, 향신료, 약재, 석제품, 유리제품, 골각제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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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넝쿨무늬 큰 꽃병, 청자 각화 모란당초문병,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1975년 신안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끌어올려진 6점의 청자 중 1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976년 1차발굴 당시 모습.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1차례 진행된 수중발굴 기간 동안, 바닷 속에서 끌어올린 전체 유물은 도자기류, 금속, 석제품 등 3만여 점, 동전, 자단목, 선체편 등 방대한 양에 이른다.

OLYMPUS DIGITAL CAMERA바닥속 신안해저문화재의 모습(재현전시)

바다속에 잠겨 있다 발견된 신안해저 문화재 모습의 일부를 재현하여 전시한 것입니다. 신안해저문화재 조사단은 1977년 3차 조사 때부터 체계적인 조사를 위해 신안해저선의 선체를 중심으로 격자모양의 구획틀(grid)를 설치하였습니다. 하나의 크기가 6m x 4m 인 구획틀은 내부에 2㎡ 크기의 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2㎡ 크기의 칸은 신안해저유물이 실린 배에 설치되었고, 각각의 칸에 고유의 기호와 번호를 부여하였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N1과 N2로 명명되었던 문화재배치모습을 근거로 재현한 것입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방대한 규모의 중국도자기
신안해저선에 실렸던 최상의 상품은 도자기다. 인양된 도자기 종류는 청자, 청백자, 백자, 흑유자, 백탁유자, 백지흑화자, 갈유자와 도기, 연유 도기, 토기로 분류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중국 각지의 주요 가마를 망라한다. 대표적인 예로 저장성(浙江省) 용천요(龍泉窯)와 철점요(哲店窯), 장시성(江西省) 경덕진요(景德鎭窯)와 길주요(吉州窯), 칠리진요(七理鎭窯), 푸젠성(福建省)의 건요(建窯), 홍당요(洪搪窯), 민청의요(閩淸義窯), 환계요(宦溪窯), 차양요(茶洋窯), 덕화요(德化窯), 자조요(磁竈窯)를 들 수 있다. 그밖에 장쑤성(江蘇省), 광둥성(廣東省), 허베이성(河北省)에서 생산된 도자기도 포함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안선에서 발견된 방대한 양의 도자기들. 청자의 고장 용천요, 중국 대표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이 무역선에서 실려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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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 청백자 반,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향병, 청백자 향병,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주름무늬 항아리, 청자 호문 유개호,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주전자, 청자 소주자,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도기 항아리, 도기 호,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병, 청백자병,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주전자, 청백자 주자,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작은병, 흑유 소호, 자조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작은병, 흑유 소호, 자조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도기 대야, 도기 분,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화분, 백탁유 화분, 철점요, 원 13새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항아리, 청자 소호,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두귀병, 청자 양이병,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연적, 사자장식 뚜껑, 작은 항아리, 합,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주자와 향병, 청백자 주자와 향병,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도기 항아리,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주전자, 백탁유 주자, 철점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참외모양 작은 주전자, 청자 과형 소주자,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완, 청백자 완,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완, 흑유완, 차양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완, 흑유완, 건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도기 항아리,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화분, 백탁유 화분, 철점요, 원 13새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향로, 청자 향로,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접시, 청자 반,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잔, 정자 고족배,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접시, 청백자반,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리잔, 청백자 고족배,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잔, 청백자잔, 경덕진요, 원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두귀병, 청자 양이병,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청자병, 용천요, 원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화분, 백탁유화분, 철점요, 원 13세기 후반 ~14세기 전반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 사대부 취향이 잘 반영된 백자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이다. 높이 47cm의 큰 항아리로 목이 짤고 어깨가 올라간 모습을 하고 있다. 겉면에는 청화로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동자를 거느린 선비의 모습을 그려넣고 있다. 그림의 화풍으로 볼 때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청화(靑華)는 코발트(Co)를 비롯하여 철, 망간, 동, 니켈 등 여러 금속화합물로 된 안료이다. 조선시대 청화안료는 주로 중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했으며, 고가의 안료였기때문에 관요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도화서 화원이 주로 그렸기때문에 청화백자에 그린 그림의 솜씨는 대체로 뛰어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

조선중기인 16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선비가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중국풍의 그림으로 지배층인 사대부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보물, 조선 16세기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白磁 靑畵松竹人物文 立壺)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높이 47㎝, 아가리 지름 15.4㎝, 밑지름 16.7㎝의 청화백자 항아리로, 목은 짧고 어깨가 올라가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릇 모양을 하고 있다. 밑 부분은 좁게 내려가다가 굽에서 나팔모양으로 퍼졌는데, 이러한 모양은 짧게 수직으로 내려가는 굽을 가진 초기 청화백자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다. 목 윗부분에는 가로줄 하나를 그린 다음 그 밑에 구름을 그려 넣었고, 굽 부분에도 가로로 한 줄을 그렸다. 그릇의 몸통 전면에는 소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소나무 밑에는 책상에 팔을 괴고 있는 인물을, 대나무 밑에는 거문고를 든 동자를 거느린 한 선비가 거닐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구도나, 인물의 배치 및 묘사가 16세기 후반의 화풍과 매우 유사하여, 이 항아리의 제작시기는 대체로 16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릇을 구우면서 굽이 두꺼워 터진 곳이 있고, 아가리 부분과 굽 부분에 약간 수리를 한 흔적이 있으나, 보기 드문 조선 전기의 걸작이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으로 대나무 아래 선비가 동자를 거느리고 걷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나무와 소나가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그림은 값비싼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그렸기때문에 여백이 많은 편이며, 16세기 화풍이 잘드러나 있다. 도화서 화원이 그림을 그리고 관요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1. 이화여대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18세기 회화 화풍을 보여주는 걸작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이다. 조선후기인 18세기에 만들어진 걸작으로 큰 백자항아리 겉면에 넓은 이파리들고 포도넝쿨을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철사안료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농담과 강약이 뛰어나며 표현이 사실적인 18세기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화풍이다. 도자기의 형태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용무늬기 그려진 용준(龍樽)으로 보이며 포도넝쿨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조선후기에는 도화서 화원을 관요에 파견하여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이 작품에 표현에 그림의 수준이 아주 뛰어난 것으로 볼 때 도화서 화원이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철화(鐵畵)란 산화철 등을 주 안료로 하여 점토와 유약 등을 혼합하여 붓으로 도자기표면에 문양을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고려청자부터 분청사기, 조선백자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철화백자는 붓을 사용하여 문양을 그리기때문에 회화적인 특징이 잘 나타난다.

20160129_112052-20160129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철화안료를 이용하여 붓으로 도자기 겉면에 포도넝쿨을 그려놓고 있다. 18세기 회화의 화풍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국보 107호, 조선 18세기
백자항아리 면 전체를 화폭 삼아 넓은 이파리들과 그 사이로 뻗어 내린 포도넝쿨이 그려진 대형의 항아리이다. 붓놀림이 자유자재하고 철사(鐵砂) 안료에 농담을 주면서 문양을 그려 마치 한 폭의 묵포도도(墨葡萄圖)를 연상케 한다. 포도그림의 구도와 세부표현 등에서는 심정주(1678~1750)나 권경, 혹은 이인문 같은 18세기 화가들의 화풍에 비견되기도 한다. 발색의 조절이 어려운 철사 안료로 자연스럽게 농담을 표현한 점에서도 뛰어난 솜씨가 보인다. 대형의 항아리에 용무늬 그려진 용준(龍樽)은 왕실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유사한 크기와 형태로 포도무늬를 그린 예는 이 항아리가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다. 회화적이고 문기 넘치는 문양 표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온 수작이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9_112135-20160129넝쿨과 포도송이를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20160129_112152-20160129포도 넝쿨.

20160129_112143-20160129아가리 부분에 표현된 포도송이와 포도이파리.

20160129_112104-20160129
포도넝쿨이 표현되 부분에서 본 항아리

20160129_112114-20160129
넓은 여백 사이로 보이는 포도넝쿨

20160129_112126-20160129
다른 방향에서 본 모습

20160129_112300-20160129이화여대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모습.

<출처>
1. 이화여대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지방백자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중기 사옹원 산하 관요인 분원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전국 각지에는 많은 가마들이 있었으며, 공물의 형태를 도자기를 만들어 왕실에 납품했다.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걸작도자기인 분청사기가 주로 지방의 가마에서 만들어졌다. 관요가 설치되면서 왕실과 관청의 요구에 걸맞게 수준높은 도자기를 생산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지방의 가마들은 관요에서 만든 백자를 닮은 것을 만들고 노력하면 전반적으로 백자의 수준이 높아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백화철화 운용문호, 경기도 가평 하판리 백자요지 출토. 용이 그려진 항아리는 국왕을 상징하기때문에 관요에서 제작하여 궁중에 납품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지방가마에서도 만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가평 하판리 백자가마터에서 출토된 항아리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제작해 접합하였으며 동체 전면에 짙은 철화로 용무늬를 장식하였다. 가평의 흙은 조선후기 관요에 공급될 만큼 질이 좋은데, 이 항아리의 태토도 정선되었고 비교적 색이 좋으며 얇고 치밀하게 제작되었다. 왕실용 의례기로 관요에서만 제작되던 운룡문호가 중기 이후 지방가마에서도 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조선전기 지방백자

조선시대 질 좋은 백자의 생산은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지방의 일부 가마에서는 왕실과 관청의 수요를 위해 고급의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다. 관요가 설치된 이후, 이에 강한 영향을 받은 전국의 요장들은 관요 생산품을 닮은 백자를 제작하고자 노력했다. 조선중기 큰 전란을 겪으면서 전국적으로 그릇을 새로이 만들어야 했고, 관요 생산품과 더불어 지방백자에 대한 수요와 생산이 확대되어 제작의 효율성을 높이는 요업기술이 전반적으로 발달하였다. 대체로 조선후기 지방 요장은 주원료인 백토가 산출되거나 유통경제가 발달한 곳에 위치했으며, 대개 일상의 그릇을 중심으로 관요와 유사하거나 또는 지역의 특색이 반영된 새로운 스타일의 백자를 생산한 곳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말기 전국적으로 확대되며 조선백자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문 ‘경주장흥고’명 태호,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문 접시,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호, 조선 15세기,

이 항아리는 1994년 이와여자대학교 신축건물 공사 중 <분청사기 태호>, <분청사기 연화문접시>와 함께 발견되어 주목된다. 함께 출토된 상황이나 만듦새, 질적인 면에서 유사하여 ‘경주장흥고’명이 확인되는 경주 또는 울산에 위치한 요장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상감 연당초문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상감 화문발,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난초문호, 조선 17세기

조선중기 병과 항아리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초화문병, 조선중기, 백자 호, 조선 17~18세기, 경기도 가평 하판리 백자요지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용문호, 조선중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병.호, 조선 17~18세기, 경기도 가평 하판리 백자요지 출토,  백자 호, 조선중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호, 조선중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호, 조선중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병, 조선 17~18세기, 경기도 가평 하판리 백자요지 출토,  백자 호, 조선중기

OLYMPUS DIGITAL CAMERA 백자 호, 조선중기

소품(小品).조선후기 병과 항아리.반상기(飯床器)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고족접시, 조선후기, 백자 접시.발, 조선시대, 흑유 병.주자.발, 조선시대, 백자철화 명문편, 조선 17~18세기, 경기도 가평 하판리 백자요지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연적, 조선 19~20세기초,  백자 발.잔.합, 조선 19세기, 강원도 양구 방산 송현리 수습, 흑갈유 연적, 조선 19~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백자동화 화문병(花紋甁).쌍권문호(雙圈紋壺),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다각호(多角壺).병(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초화문호(草花紋壺),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운용문호, 조선 19~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초화문병, 조선 20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호, 조선후기

해주.회령 항아리

OLYMPUS DIGITAL CAMERA회령요 호, 조선 19~20세기, 백자청화 초화문호, 조선 19~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초화문호, 조선 19~20세기 초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시대 관요에서 만들어진 백자는 주로 왕실에 납품하였다. 백자는 그릇이라는 원래의 용도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왕실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백자들이 남아 있는데 국가 의례에 사용되었던 제기를 비롯하여, 왕실가족의 태를 묻었던 태항아리, 무덤에 같의 묻었던 명기나 묘지석 등에도 백자가 사용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태호, 조선 19세기.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
백자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에는 출생한 아기의 태를 좋은 곳에 묻어야 건강하고 귀하게 성장한다고 믿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아기가 출생하면 국운과 연관지어 태(胎)를 소중히 다루고 좋은 땅에 묻는 안태의식을 치렀고, 이 의식에서 태를 봉안하는 용기로 무늬없는 순백자의 태호(胎壺)를 사용하여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례의 용기로도 백자는 특별 제작되었고 조선 오례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길례(吉禮)에서 제기로 사용되었다. 제기는 보수적 성격을 가지고 금속으로 제작되었다가 도자로 대체되어 생산되기도 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관요지에서 청화.철화로 ‘祭’자 명을 써 넣거나 굽을 높게 한 발과 접시 형태의 백자제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높은 굽을 가진 고족접시는 제사 용도 외에 손님 접대나 연회 등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조상이나 신을 높이 받드는 것과 같이 공경과 존경의 의미를 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백자는 죽음의 의례에서도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왕실을 비롯한 일부 지배계층에서는 명기(明器)와 묘지(墓誌)를 만들어 무덤에 함께 부장하였고,16세기 이후에는 이를 세트로 구성하여 매장하는 관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명기는 인물상이나 그릇 등 생활용기를 작게 만든 것으로, 화려한 기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선의 예제에 따라 무문을 기본으로 하여 드물게 청화.철화 장식이 나타난다. 묘지는 묘주의 생몰연월일과 행적, 무덤에 대한 기록 등을 담고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태항아리(胎壺)

태항아리는 아기의 태를 담는 항아리이다. 조선왕실에서는 아기이 태를 백자항아리에 담아 태봉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왕실가족의 태를 담았던 백자 항아리는 당시 사람들이 소중히 여겼기때문에 조형미나 제작수법이 대체로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태호, 조선 1481년

OLYMPUS DIGITAL CAMERA태지석, 조선 1481년

제기(祭器)

제례에 사용되었던 제기는 백자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남아 있는 백자 제기 중 예술적으로 우수한  것은 많지 않아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조선 19세기(복사본), 제상(祭床).향상(香床), 조선 19세기~2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고족접시,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모사기,향로, 조선 19세기

명기(明器)

명기는 무덤에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를 위해서 같이 묻는 껴묻거리로 옛고분의 토기 등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명기는 실생활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간소하게 만들어져 토기와 마찬가지로 조형미가 우수한 명기는 많지 않아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명기,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명기,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명기, 조선 1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명기, 조선 17세기

묘지(墓誌)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숙의윤씨 묘지, 조선 1568년

연산군 후궁 숙의윤씨(1481~1568)의 묘지로서 3매로 되었고, 뒷면에는 순서를 따라 청화로 ‘第一場’, ‘第二張’, ‘第三張終’이라고 쓰여 있다. 윤씨는 1481년에 출생하였고 1501년(연산군 7년) 연산군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가 되었는데, 중종반정(1506) 후 돌아갈 곳이 없어 조카인 윤씨를 양녀로 삼아 후사를 맡겼다고 적혀 있다. 향년 63세, 1568년에 사망하였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음각 한기 묘지, 조선 1559년,

한기(韓紀)는 성종의 딸 정혜옹주와 결혼하여 청평위가 된 사람이다. 백자의 유조는 난백색을 띤 조선초기의 특징이 나타나며 글씨는 한자 한자 정성드려 썼다. 뒷면에는 순서를 따라 ‘第一’에서 ‘第七’까지의 글가자 음각되어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주형 진주강씨 묘지, 조선후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김효대 묘지합, 조선 1781년 이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제기형 묘지, 조선후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숙의정씨 묘지, 조선 1581년, 백자청화 박제정 묘지, 조선 1885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 궁인 묘지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