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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청도군 관아, 객사인 도주관과 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청도군 관아 건물들이다. 청도군 읍치였던 청도읍성내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도주관, 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얼음창고인 석빙고(보물 323호)가 남아 있다. “도주관(道州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객사는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가운데 정청과 우익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좌익헌을 다시 지어 옛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동헌은 객사 뒷편 초동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데 학교건물로 사용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최근에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읍치였던 화양읍 일대가 원래 청도군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청도역이 있는 청도읍이 중심지로 바뀌었다.

청도군은 대구 남쪽, 경주 서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던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을이었다. 경주로 가는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가 건국하면서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지금의 청도군을 형성하였다. 고려초 현급인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고려 충햬왕 때 청도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말 이후 큰 성씨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졌으며 김일손, 김대유 등 사림파 문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주변에 운문산, 가지산, 천왕산 등 큰 산들이 많으며, 동창천.청도천 등 큰 하천이 밀양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청도군 관아 중심건물이었던 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궐패를 두고 양쪽에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동.서익헌을 두고 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7-20200106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 “도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도주는 청도의 다른 이름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5-20200106정청 내부. 일제강점기 이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청도 청도군 관아 21-20200106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동익헌. 앞면 6칸 규모로 상당히 큰 편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2-20200106옆에서 본 모습.

청도 청도군 관아 20-20200106서익헌. 앞면 6칸 규모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청도 청도군 관아 06-20200106서익헌 앞 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03-20200106객사 뒷편.

청도 청도군 관아 19-20200106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청도 청도군 관아 08-20200106객사 마당 한쪽편에 남아 있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

도주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조주는 청도의 옛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어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동.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는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 38년(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집이며, 동.서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하여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준다. 도주관 앞에는 고종 8년(1871) 병인.신미양요를 치른 뒤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옮겨져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3-20200106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동헌. 앞면 7칸 규모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16-20200106청도군수가 공식 업무를 보던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15-20200106동헌 뒷편으로 2칸 정도 누마루를 달아내어 정자처럼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4-20200106옆에서 본 청도동헌.

청도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관찰사.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1917년 군 청사를 고수동으로 신축 이전함에 따라 동헌건물은 도주학원 및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앞쪽 칸은 퇴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역사성과 관아건축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1-20200106읍성 동문 안쪽에 복원해 놓은 옛 관아 건물인 고마청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ㅇㄹ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도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군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 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0

청도 청도군 관아 10-20200106청도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청도 청도군 관아 09-20200106읍성 동문 밖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전국에 남아 있는 6곳의 석빙고 중 하나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31-20200106읍성 앞에 모아놓은 청도군수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청도 청도군 관아 18-20200106객사 앞으로 옮겨 놓은 구한말에 세운 척화비

청도 청도군 관아 12-20200106옛지도에 나타난 청도군

청도군의 연혁
청도군은 선시시대 유적 중 바위그늘과 지석묘, 석관묘 등의 유적이 각지에서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 12국 중 우유국의 위치가 청도라고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이서국이 청도에 존재했던 초기국가이다. 이서국은 유리왕 19년(42)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나, 유례왕 14년(297) 이서국이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지배체제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솔이산성, 오도산성, 가산성으로 신라에 편입되었고 경덕왕 16년(757) 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으로 개명하고 밀성군(지금의 밀양)의 속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이 되고 – 일명 도주 – 직급이 낮은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곳이었다. 1342년(충혜왕 3) 이곳 출신인 김선장의 공로에 의해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다음해 강등되었으나 김한귀의 청원으로 1366(공민왕 15) 다시 지군사가 되어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의 읍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왔다. 1896년 도제의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고 1900년대 초 대구에 속했던 풍각, 각북, 각초면이 청도군에 편입되고, 외서면은 밀양군에 속하게 되는 등 여러 번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2읍 7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전라도 낙안군 관아

전남 순천시 낙안면.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 등에 있었던 옛 지방 고을이었던 낙안군(樂安郡) 관아이다. 낙안군은 삼국시대 백제의 분차군이었으며, 그 후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었다가 고려 초 낙안군으로 바뀌면서 구한말까지 존재해오다 1908년에 폐지되었다. 원래 읍치는 벌교읍 부근이었으나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낙안읍성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낙안읍성에는 당시 쌓았던 읍성을 비롯하여 관아, 읍치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살았던 오래된 가옥들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낙안군 읍치는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읍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옛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지역의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 읍치였던 낙안읍성. 읍치는 남해안에서는 꽤 넓은 평야였던 낙안들판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순천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승주, 구례를 거 남원과, 서쪽으로는 보성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로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으로 해안에서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 읍성을 쌓아 대비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임경업 장군 선정 비각, 인조 때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경업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중심 건물인 객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관아의 중심이 되는 객사. 조선시대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며 이곳을 방문한 중앙관리가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양쪽에 손님들을 수행했던 인원들이 묵을 수 있는 문간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 안쪽으로 보이는 낙안 객사.

OLYMPUS DIGITAL CAMERA낙악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앞면 3칸 규모의 정청을 두고 양쪽에 각 앞면 2칸씩 익랑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객사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낙안읍성에서 볼 수 있는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정청 건물. ‘낙안지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익랑. 손님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 1칸과 손님과 연회를 할 수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문신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익랑. 무신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낙안객사.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낙안읍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낙안객사.

낙안객사
객사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외국이나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의 숙소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때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세종 32년(1450) 군수 이인이 건립한 후 인조9년(1631)과 철종 8년(1857)에 각각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객사 본전만 남아 있어 전체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는 모두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객사본전은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어 안팎으로 변조된 부분이 많았으나 1982년에 다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붕은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양쪽 날개집은 팔작지붕이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입구에 세워져 있는 문루인 낙민루. 남원 광한루 등과 함께 호남지방에서는 유명한 문루였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 남아 있지 않았는데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민루 앞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고목.

낙민루
낙민루는 조선 헌종 때 군수 민중헌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며 1924년 일부분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오랜 세월동안 희로애락을 나눈 누각이었으나 6.25전쟁 당시 불타 소실되었던 것을 1986년 기존이 초석 위에 17평 규모로 겹처마 팔작집의 누각형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집무를 보던 동헌을 출입하는 문. 양쪽에 행랑채를 두고 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양쪽 행랑채는 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집무를 보던 건물인 동헌. 앞면 5칸으로 양쪽에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앞면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대청마루. 낙안군수가 송사를 다루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군수가 손님을 접견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동헌

OLYMPUS DIGITAL CAMERA마당에 재현해 놓은 재판을 받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곤장을 맞는 모습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읍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헌

동헌(시무당)
이 건물은 조선왕조 때 지방관청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동쪽은 수령이 서쪽방은 관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좌측에 있는 건물은 내아로서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내동헌이라고 한다. 당초 건립 연대나 퇴락한 연대는 기록에 없어 알 수 없으나 문헌을 참고하여 옛 터의 발굴 조사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0년 복원하였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옆에 있는 군수의 생활공간인 내아를 출입하는 문.

OLYMPUS DIGITAL CAMERA생활 공간인 내아. 옛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내아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앞 통로로 사용되었던 툇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온돌방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내아 뒷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읍치 마을 가운데 위치한 옥사.

OLYMPUS DIGITAL CAMERA옥사 건물.

  1.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2. 위키백과,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충청도 청풍도호부 관아, 동헌인 금병헌과 아문인 금남루

충북 제천시 청풍면 읍리 청풍문화재단지에 있는 옛 청풍도호부(淸風都護府) 관아이다. 청풍도호부는 제천시 청풍면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종3품인 부사가 파견되었던 큰 고을이었다. 충주, 단양과 함께 한강유역을 관리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조선 세조때 청풍군이 설치되었다가 조선후기 현종 때 현종비의 관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죽령을 통한 교통로로 한강조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경북지역과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청풍도호부사는 관료들이 선호했던 관직 중 하나였다.

청풍도호부 관아건물로는 부사가 근무했던 동헌인 금병헌, 관아 아문인 금남루, 관아에서 운영했던 정자인 한벽루(보물 528호)와 응청각이 남아 있다. 관아가 있던 읍리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지금은 남한강변에 조성한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져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문화재단지에서 볼 수 있는 옛 청풍도호부 동헌인 금남루. 옛 관아가 있던 읍리가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관아 아문인 금남루(錦南樓)

조선 순조때(19세기 초)에 세워진 관아 아문으로 건물의 내력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앞면 3칸 규모의 문루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2층의 문루를 올려 놓았다. 바깥쪽에는 ‘도호부절제아문’, 안쪽에는 ‘금남루’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고을 수령이나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읍성내 풍경을 살펴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도호부 관아 아문. 비교적 큰 규모의 문루로 2층 계단에 올라서 읍성내 마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아문.

이 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1900년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동헌인 금병헌(錦屛軒)

금병헌은 조선 숙종때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인 1900년에 다시 지어졌다. 외관이나 여러 형태로 볼때에도 구한말에 많이 지어진 한옥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앞면 6칸, 옆면 3칸으로 부사가 근무하던 동헌 건물로서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다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오른편에 큰 대청마루를 두고 왼쪽편에 온돌방 3칸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도호부 동헌인 금병헌. 앞면 6칸 규모로 오른쪽에 대청마루가, 왼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왼쪽편에는 손님을 접견하는 넓은 온돌방과 누마루 용도로 지어진 방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옆에는 도호부사가 일상적으로 집무를 보는 작은 온돌방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에는 민원인을 접견하는 등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바깥경치를 볼 수 있도록 대청마루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 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 사열이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지군사가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 32년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 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이니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누각 건물인 한벽루(寒碧樓, 보물 528호)와 부속건물들

청풍도호부 관아의 핵심 건물인 객사는 남아 있지 않으며, 객사에 딸린 작은 정자 건물인 응청각과 도호부사가 주최하는 공식연회 등을 갖기 위해 지어진 누각건물인 한벽루가 부속건물로 남아 있다.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크고 작은 부속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도호부 관아 객사 옆에 세워졌던 대표적인 조선시대 관아 누각 건물인 한벽루(보물 528호)이다. 관아에서 주최하는 각종 연회와 행사가 치러졌던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 옆에 있던 부속건물인 응청각이다. 청풍도호부를 방문하는 고위 인사들이 묵었던 숙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진 청풍도호부사를 지낸 인물들을 위해 세워진 송덕비들.

청풍도호부 읍성 문루였던 팔영루(八詠樓)

청풍도호부 읍치를 출입하는 성문과 문루이다, 조선초기. 팔영루를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전국적으로 읍성을 구축할 때 처음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팔영루는 2.2 m 기단에 크지 않은 4각형의 출입문을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올려놓고 있다. 성문 문루로서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 이는 전쟁을 대비한 것이라기 보다는 형식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문루 바깥쪽에는 ‘팔영루’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현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팔영루’라는 이름은 청풍팔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청풍이 조선후기에 양반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관동팔경 유람길을 마치고 죽령을 넘어서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있는 고을이라서 유명 인사들이 많이 다녀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팔영루

OLYMPUS DIGITAL CAMERA팔영루 문루.

이 곳은 청풍부를 출입하는 관문이다. ‘현덕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종 7년(1870)에 세운 ‘팔영루 사적비’에 의하면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이 중건하고 현덕문이라 한 것을, 고종 7년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고 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읍리 286번지의 청풍 북쪽에 있었으나, 1983년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2 m의 석축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고, 문천장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기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다락집을 세웠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4.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경상도 성주목 관아, 동헌인 성산관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옛 성주 관아터에 남아 있는 동헌인 성산관이다. 목사가 근무했던 다른 지역 동헌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편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오른쪽 2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주목 관아가 있었던 자리에는 군청이 들어서 있으며, 다른 관아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경북 성주군은 삼국시대 가야연맹체 중 하나인 성산가야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 초에는 성주목이 설치되었으나, 경상감영인 대구와 가까이 있었던 까닭에 성산현으로 강등되었던 시기도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유교적 색채가 짙은 고장으로 성주 향교는 전국 향교 중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가야산 북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국가가 자리잡을 수 있을 정도로 농업생산력이 풍족했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성주참외로 유명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성주목 관아 동헌 건물이었던 성산관. 앞면 5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이다. 조선후기 효종때 성주목사가 현재의 위치에 지은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쪽에 온돌방을 두는 다른 동헌건물과는 달리 왼쪽 3칸을 대청마루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동헌.

OLYMPUS DIGITAL CAMERA성산관 출입문. 원래의 동헌 출입문은 아닌듯 하다.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성산관 앞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성주 성산관,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286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 성주목의 목사가 공적인 일을 처리하던 관아 건물이다. 처음에는 성주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을 조선 효종 8년 (1657)에 목사 최계훈이 현재의 군청사 자리로 옮겨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으며, 1994년 현 군청사 신축공사로 인하여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언덕 위에 남향으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오른쪽에 2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 방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건물 정면의 주춧돌이 기둥모양으로 나열되어 있다. 마루바닥이 지면에서 높게 되어 있는데 지기가 다습한 까닭이라 하며, 습기에 대비한 지혜가 돋보인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울산 울산도호부 관아, 동헌 및 내아

울산시 중구 북정동에 남아 있는 옛 울산도호부 관아 건물이다. 옛 관아터에는 울산부사가 일상적인 근무를 하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가 남아 있다. 조선후기 숙종대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로 일제강점기 이후 울산군청에서 사용하다고 1981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헌은 앞면 6칸 규모로 가운데 2칸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2칸씩 방을 두고 있다. 왼쪽 방 툇마루에는 난간을 두어 누마루처럼 사용하고 있다. 내아는 온돌방, 대청마루, 누마루를 두고 있는 ‘ㄱ’자형 건물이다. 울산도호부 읍치였던 구도심에 있던 관아에는 군청과 초등학교가 들어섰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초등학교와 군청 등은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다.

울산도호부는 울산에 있던 조선시대 지방 행정조직이다. 조선초 울주에 진(鎭)을 두었으며 태종 때 울산군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경주에 있던 경상좌병영을 울산으로 옮기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일진왜란 때 울산에 일어난 의병들이 큰 역할을 하면서 울산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병마절도가 겸 부사를 두었다. 이후 전임 도호부사가 파견되어 구한말까지 이어졌다. 관아건물들 또한 울산도호부가 자리를 잡은 조선후기에 지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산시 중구 북정동에 남아 있는 옛 울산도호부 관아터. 읍치였던 구도심이 있던 지역으로 동헌이 있던 곳은 울산군청에서, 객사는 울산초등학교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시의 확장으로 울산군청과 초등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며 도서관 등 옛 관공서 건물들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산도호부 동헌. 앞면 6칸의 건물로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울산도호부가 자리를 잡은 조선후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그후 여러 차례 중건과 수리를 거쳤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산부사가 재판같은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인 대청마루. 앞면 2칸 규모로 다른 지방 동헌 건물에 비해 좁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왼쪽편 온돌방.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은 방은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바깥쪽에 난간이 있는 누마루처럼 꾸며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앞쪽 통로로 사용되는 툇마루. 왼쪽방 앞은 공간을 넓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아래쪽에 있는 살림집인 내아. 온돌방, 대청마루, 누마루 등으로 구성된 ‘ㄱ’자형 건물이다. 중부지방 관아 건물 내아와는 달리 개방적인 평면 구조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넓은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오른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 사랑방과 누마루. 사랑채에 해당한는 공간으로 ‘-’자형 안채에 덧붙여서 ‘ㄱ’자형 건물을 만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아 앞에서 심어진 고목.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뒷편에 있는 작은 정자와 공덕비들.

울산동헌 및 내아,
울산광역시 중구 동헌길 울산동헌은 옛 울산읍성 안의 중심 건물로 울산도호보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였던 곳이고, 내아는 수령이 살았던 살림집이다. 동헌은 1681년(숙종 7) 울산부사 김수오가 처음 지었고, 1763년(영조 39년) 울산부사 홍익대가 다시 지어 반학헌으로 불렀다. 일제강점기 이후 울주군청 회의실로 사용하다가 1981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헌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에 2칸의 대청을, 좌우에 2칸씩 방을 두었다. 그리고 왼쪽 방 앞의 툇마루 주위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다.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기둥 위에는 익공 형식의 포를 올렸으며, 추녀마루가 길게 뻗은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아는 온돌방 4칸, 대청 2칸, 부엌과 누마루 각 1칸씩을 둔 ‘ㄱ’자형 안채에 사랑방과 누마루를 덧붙인 형식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1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특징이 있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출처>

  1. 울산시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