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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보물), 전탑을 그대로 모방한 석탑

충북 제천시 장락동 절터에 남아 있는 칠층모전석탑(보물)이다. 전탑을 모방하여 만든 모전석탑으로 벽돌처럼 생긴 점판암을 다듬어 쌓아서 다른 모적석탑과는 달리 전탑과 외형이 거의 흡사하다. 탑의 높이는 9.1 m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감실이 있는 1층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층단을 갖춘 전형적인 전탑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석탑의 형태나 제작 수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강 유역과 경북 북부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중국 산동지방 전탑을 모방한 전탑이나 모전석탑 중 하나이다.

이곳은 장락사(長樂寺)가 있던 절터이다. 장락사는 삼국시대에 처음 창건되어 조선중기까지 존속하다가 17세기경에 폐사되었다. 남한강 유역의 다른 절터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으며, 이 시기에 조성된 유물들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보물). 점판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인데 외형이 전탑과 거의 똑같다.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조각수법도 양호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감실이 있는 1층 기단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모퉁이에는 화강암으로 된 돌기둥을 세웠다.

OLYMPUS DIGITAL CAMERA탑신부. 벽돌로 쌓은 전탑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지붕돌은 아래.위층단을 갖추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에서 본 모습.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보물459호, 통일신라 말기, 높이 9.1 m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하여 모전탑이라고 한다. 이 탑은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모전탑으로 현재 높이가 9.1 m이며, 건립연대는 탑의 형식이나 돌 가공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기단은 단층 기단으로서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1층 몸돌 네 귀에 화강암으로 된 돌기둥을 세웠다. 2층 이상의 몸돌이나 지붕돌은 전부 점판암을 잘라서 쌓아 올렸으며, 특히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형식과 같이 상하에서 층단을 이루었다. 전체가 7층에 이르는 높은 탑인데 각 층의 줄임 비율이 적항하여 장중한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의 심한 피해로 무너지기 직전에 있었는데, 1967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이때 7층 지붕돌 위에서 꽃모양이 새겨진 청동편이 발견되어 탑의 꼭대기를 이루는 상륜부는 청동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7년)

  1. 안내문, 제천시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신라 석탑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모전석탑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오층석탑(국보)이다. 탑은 1층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높이 9.6 m의 오층석탑이다. 벽돌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은 전탑양식과 가구식으로 짜맞추어 쌓은 목조건축의 양식이 같이 사용하여 신라 석탑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기단은 1층으로 낮게 만들어 안정감을 주고 있는데 면석의 각면에 기둥을 세운 것은 목조건축물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반면 지붕돌 윗면에 계단처럼 층을 만든 부분에서 전탑을 모방하여 만든 모전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탑이나 모전석탑처럼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두고 있다.  통일신라 초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 중 분황사 석탑 다음으로 오래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신라 석탑 중 분황사 석탑 다음으로 오래된 석탑으로 당나라 산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모전석탑이다. 금성면 소재지 탑리여자중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탑은 낮은 1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는데 탑신 몸돌을 낮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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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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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에서 본 모습>

기단부 면석 옆면과 모서리에 기둥을 세웠는데 별도의 돌기둥으로 만든 점에서 목조건축을 모방한 백제 석탑의 특징도 같이 보여주고 있다.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은 높게 만들었으며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와 감실이 있는 탑신 1층>

후대 신라 석탑과는 달리 지붕돌 윗면에서 전탑을 모방하여 계단식으로 층을 두고 있는 점에서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분류되고 있다. 탑신 2층부터는 몸돌을 낮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전탑 양식을 보여주는 지붕돌>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으로 높이는 9.6 m이다. 각부의 석탑재가 거의 완전하며, 전탑의 수법을 모방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 데 귀중한 유례가 되는 탑이다. 기단부는 14매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석 위에 이루어졌는데, 24매의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하였고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 2개씩의 안기둥이 모두 별석으로 되어 있다. 덮개돌은 8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었는데, 부연은 표시되지 않았으며 덮개돌 상면에는 1단의 굄돌을 놓아 탑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경주 분황사 석탑 다음으로 오래된 석탑으로 한국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안내문, 의성군청, 2017년)

오층석탑이 있는 탑리리는 의성군 금성면 소재지로 삼한시대 진한과 삼국시대 초기에 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경주에서 경북 북부지방을 거쳐 죽령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신라초기에 당나라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지나가던 지역이다. 주변 지역에는 당나라 산동지방 전탑의 영향을 받은 전탑이나 모전석탑 등이 여럿 남아 있는데 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 부재들>

절터에는 석탑을 수리하면서 교체한 석탑 부재들을 전시하고 있다.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과 목조건축을 모방해서 만든 석탑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지붕돌을 구성하고 있던 부재들. 2~3층으로 돌을 깎아서 전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석탑 부재들의 원래 위치와 석탑의 구조.>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교체부재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전탑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2012년 10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실시한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보수공사에서 교체한 석탑 부재를 보존처리하여 현재 위치에 전시하였다. (안내문, 의성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의성군청, 2017년
  2.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7년
  4. 위키백과, 2017년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진흥왕릉 부근에 있는 통일신라 모전석탑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삼층석탑(보물)이다. 흙을 구운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모전석탑이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가공하여 축조한 형식과 크게 가공한 돌을 쌓아서 석탑처럼 만든 형식이 있다. 이 석탑은 후자에 해당한다. 경주 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세부적으로는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석탑 제작기술이 퇴보되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8개의 잘 다듬은 화강석을 2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1층 몸돌에는 문짝을 새겨 감실을 표현하였다. 문의 양쪽에는 인왕상이 새겨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 않으며 지붕돌을 크게 만들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동북쪽에 있는 마을 뒷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진흥왕릉을 비롯한 왕릉들과 크고 작은 고분들이 정비되지 않은 채 산재해 있다. 높이 4.6 m의 모전석탑으로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일반적인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잘 다듬은 여러개의 큰돌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벽돌처럼 생긴 바닥돌 위에 잘 다듬은 8개의 큰 돌을 올려 2층 기단을 만들었다. 기둥모양 같은 장식을 두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다.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겨놓지 않았으며, 지붕돌을 크게 만들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OLYMPUS DIGITAL CAMERA<탑신부>

1층 몸돌 남쪽에는 감실을 표현한 문짝과 인왕상을 새겨놓고 있다.

보물65호_경주 서악동삼층석탑_012-20170209
<문짝과 인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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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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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본 모습>

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군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선도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왕릉을 지키는 원찰 성격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헌안왕릉이 있다. <삼국사기>에 왕릉들 앞에 애공사(哀公寺), 영경사(永敬寺), 공작지(孔雀趾)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석탑을 기준으로 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뒷편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릉>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앙,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지왕이 죽다 ( 579년 07월17일(음) )
〔4년(579)〕 가을 7월 17일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이 유조를 내리고 죽다 ( 857년 09월(음) )
~ 생략 ~ 7일이 지나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헌안왕이 죽다 ( 861년 01월29일(음) )
~ 생략 ~ 이달 29일에 죽으니,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석탑이 세워져 있는 절터>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보물 65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1
이탑은 화강암으로 축조된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모전탑 계열에 속한다. 높이는 4.06 m로 서악서원 뒷편 선도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덩이 여덟개를 2단으로 어긋 물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1층 몸체의 남쪽 문틀 양쪽에 인왕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고 몸돌에 비해 커서 무거운 느낌을 준다. 이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탑 형식의 유형분포를 조사.연구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므로 중요시 된다. 경주 남산리 동탑을 모방한 듯하며 시대와 조각수법에서 다소 떨어진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양 산해리 모전오층석탑(국보), 모전석탑을 대표하는 탑

경북 영양군 산해리 반변천 옆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모전석탑(국보)이다. 봉감모전오층석탑으로도 불렸던 이 석탑은 안동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강변에 홀로 서 있다. 높이 9m의 큰 석탑으로 흙과 돌을 섞어 낮게 쌓은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외형상으로는 전탑처럼 보이지만 작은 돌을 다듬어 벽돌처럼 쌓아올린 모전석탑이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두었는데, 화강석으로 만든 기둥과 이맛돌이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과 마찬가지로 아래와 위에 계단모양을 층을 두고 있다.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세부적인 축조방식도 뛰어난 모전석탑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석탑의 규모로 볼 때 이 곳에는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도로에서 많이 떨어진 강가에 자리잡고 있지만, 경주에서 죽령과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모전석탑은 돌을 가공하여 벽돌로 쌓은 것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벽돌을 굽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신라와 통일신라 때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주로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죽령을 거쳐 한강하류를 통해 중국 당나라와 연결되는 지역에서 주로 조성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영양 산해리 모전오층석탑(국보). 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각부분의 비례가 적절하여 안정적으로 보이며, 벽돌을 다듬고 쌓는 세부적인 수법도 뛰어나다.

SANYO DIGITAL CAMERA1층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만들었으며, 2층 기단은 10여개의 큰 돌로 만들었다. 탑신 1층 몸돌은 높게 만들었으며 가운데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감실 입구의 화강암으로 만든 기둥과 이맛돌이 장식적인 효과를 준다.

SANYO DIGITAL CAMERA감실 내부.

SANYO DIGITAL CAMERA 2층부터는 몸돌 중간에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절터 앞으로는 영양에서 안동으로 흐르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이 흐른다. 이곳은 경주에서 청송을 거쳐 영주로 연결되는 통일신라시대 중국 당나라와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당나라 산동지방의 전탑에서 큰 영감을 받았던 당시 사람들이 세웠던 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이 교통로 주변에 주로 남아 있다.

영양 산해리 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5층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봉감마을에 있기 때문에 봉감탑이라고도 불린다. 평평한 자연석 기단 위에 2단의 탑신 받침을 쌓고 탑신은 수성암(水成岩)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탑신 하반부에는 화강암으로 섬세하게 조각한 문주(門柱)와 미석(眉石)이 있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다. 이 탑은 모전석탑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탑으로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중앙박물관.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국보), 고려시대 모전석탑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함백산 정암사에 있는 수마노탑(국보)이다. 전탑을 모방해서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아 올린 7층 모전석탑이다. 화강암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탑신을 받치기 위 받침을 올려 놓았다. 탑신은 석회암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아 올렸다. 탑신 1층 몸돌에는 불상을 안치하는 감실을 두고 있다. 탑 앞에 있는 연꽃무늬, 안상(眼象) 등이 새겨진 배례석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전탑형식으로 쌓은 석탑으로 외형상 웅장하거나 비례 등에 있어서 안정감을 주고 있지는 않다. 1972년 해체.복원할 때 탑의 내력을 적은 탑지석과 금.은.동으로 만든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정암사(淨巖寺)는 함백산 아래 계곡에 위치한 사찰로 삼국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이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마노석(瑪瑙石)으로 탑을 세웠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암사에는 수마노탑에 부처의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고 있다.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외에는 내력이 깊은 불전이나 요사건물이 없는 암자와 비슷한 규모의 사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함백산 정암사 수마노탑.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석탑으로 정암사 뒷편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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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사 수마노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은 7층 모전석탑이다. 기단부는 화강석으로, 탑신은 석회석을 깎아 만든 벽돌로 쌓았는데 진짜 벽돌처럼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는 화강석을 다듬어서 6단으로 쌓았다. 1층 몸돌 한쪽편에 감실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이외에 특별한 장식은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 1층 몸돌에 있는 감실. 1장의 돌로 문을 만들었으며 가운데 문고리가 달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지붕돌은 1층은 밑면이 1단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 7층은 1단이다. 윗면 또한 1층은 9단이고, 7층은 3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지붕돌에 달려 있는 풍경.

OLYMPUS DIGITAL CAMERA상륜부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앞에 놓여 있는 배례석, 연꽃무늬 장식이나 안상 등이 고려시대 양식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암사 뒷편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언덕에 석탑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마노탑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암사 주변 계곡

정암사 수마노탑, 보물 410호,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이 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서 쌓은 7층석탑이다. 기단부는 화강암을 평면이 점점 좁아지게 6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돌 벽돌을 2단으로 쌓아 탑 몸체부를 받치고 있다. 탑 몸체부를 구성한 돌 벽돌은 회록색을 띠는 석회암인데, 수마노탑으로 불리어 왔다. 1층 몸돌의 남면 중앙에는 화강암으로 문듵을 마련하고, 1매의 넓고 얄팍한 돌을 끼워 쇠문고리를 단 문짝을 만들었다. 지붕돌의 추녀 밑은 살짝 들려 있으며, 추녀 밑 모서리에는 작은 종을 매달았다. 각 층의 위.아래 지붕돌 받침 수는 1층으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상륜부(탑의 맨위에 놓인 장식)는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완전히 남아 있다. 이 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여 적멸보궁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대신, 산 중턱에 세워져서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72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탑의 내부에서 사리 및 관련 기록이 발견되었다. 사적기(史蹟記)에 신라 자장율사가 처음 세웠다고 하나,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와서 1700년, 1778년, 1874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두산백과, 3.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