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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선실1] 조선의 건국과 제도 정비

중앙박물관 조선실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시점부터 대한제국기까지를 전시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전과는 달리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변화를 중심으로 유물을 재배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첫번째로 조선의 건국과 제도정비와 관련된 유물들이다. 조선사회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으로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유교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통치이념이 들어가 있는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법전격인 경국대전과 악학궤범, 국조오례의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주역들의 유물로 태조의 호적과 건국 주역들의 공신녹권 등 조선 건국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물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 전기의 과학업적을 대표할 만한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런 유물이 희귀하다보니 상당수는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태종때 만들어진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관삼감 측우대와 측우기’, ‘훈민정음언해본’ 등은 대표적인 과학기술 유물이지만 그 원본의 가치가 워낙 높고 귀하다보니 중앙박물관에는 복제품을 잘 전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복제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또한 군사유물로 서울시청 공사현장인 엣 군기감터에 발굴된 무기류들 또한 이 곳에 볼 수 있다.

조선실 개관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건국되어 500여 년간 고유한 문화를 꽃 피우고 발전한 나라였다. 현재 전통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에서 비롯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 볼 수 있다. 조선실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시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를 전시대상으로 삼았으며 모두 5개 전시실로 구성하였다. 조선1실은 태조 이성계와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 왕조의 기틀이 되는 제도 정비로부터 세종대의 누부신 과학문화와 한글 창제를 소개하였다. 조선2실에서는 16세기 이후 조선사회를 이끌어 간 사림의 학문과 성장 과정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선비문화를 조명하는 한편,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중국.일본과의 교류와 갈등을 짚어 보았다. 조선3실은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색한 새로운 정치질서와 사호제도 그리고 생활 풍습을 다루었다. 조선4실에서는 영.정조대의 탕평정치, 실학, 지도 제작, 진경산수화의 발달과 같은 학문.예술 방면의 변화와 다양한 계층의 문화를, 마지막으로 조선5실에서는 개항기 척사와 개화를 지향한 움직임과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대한제국기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 조선실1, 조선의 건국과 제도정비

OLYMPUS DIGITAL CAMERA동궐도, 국제249호, 복제품, 1826~1831년,

조선왕조의 여러 왕궁 가운데 가장 크고 으뜸으로 삼은 왕궁은 경복궁이며, 그 별명은 북궐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이후 1867년 복원되기까지 270여 년간 경희궁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왕궁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이 동궐도는 왕궁의 그림을 담당한 관청인 도화서圖畵署의 전문화가인 화원畵員이 그렸다. 왕궁 주위의 산과 언덕은 전통 화법으로 그렸으나 건물표현과 원근 처리에서 일부 서양의 화법도 보인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왕궁의 모습과 궁중 회화의 높은 품격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이후 훼손된 동궐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의 건국과 제도 정비
14세기 후반 고려 내부의 폐단이 심화되고 대외적으로 원.명이 교체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속에서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다.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을 주축으로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 사상에 따라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정치를 지향하였다. 조선의 통치체제는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정비되었다. 이는 고려와는 다른 조선적 특색을 지닌 통치질서였다. 조선 건국 후 100여 년 동안은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에 새 도읍을 건설하여 새로운 왕조의 면모를 드러냈고, 천문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하여 하늘의 명을 받아 땅을 다스리는 왕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독자적인 역법과 천문관측기구, 활자 등을 만들었으며, 조선의 실정을 반영하여 정리한 의서醫書와 약학서藥學書, 농서農書를 간행하여 문화적으로도 활발한 성과를 거두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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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어진, 국보317호, 고종9년(1872), 전주 경기전 소장, 복제품.

어진御眞이란 왕의 초상화를 일컫는 말로, 이 어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전주 경기전 등 전국 여섯 곳에 태조 진전眞殿을 설치하여 태조의 초상화를 봉인하였다. 기록상으로 현재는 태조의 초상화가 26축 제작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경기전의 초상화가 유일하다. 이 초상화는 태종10년(1410) 전주부에 봉안한 것을 영조39년(1763) 한 차례 수리를 거친후 고종9년(1872)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조 이성계 어진

OLYMPUS DIGITAL CAMERA이성계 노비의 호적이 들어 있는 문서,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문서, 국보131호,

고려 공양왕2년(1390). 조선 건국 직전인 고려 공양왕2년(1390)에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화령(지금의 영흥)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이성계의 노비 및 이성계와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40호의 호적이 포함되어 있다. 준원전濬源殿에 대대로 보관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왔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성계와 그의 지지자들이 만든 사리갖춤,

고려 공양왕 2~3년(1390~1391).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이다. 이 사리갖춤은 가장 안쪽의 은제도금탑형사리기銀製鍍金塔形舍利器와 이 사리기를 넣는 은제팔각당형사리기銀製八角堂形舍利器, 동제발銅製鉢, 백자발白瓷鉢의 순으로 겹겹이 포개어 납입되었다. 사리갖춤 곳곳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인 1391년에 부인 강씨를 비롯하여 만여 명과 함께 발원하여 사리갖춤을 만들어 봉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리갖춤은 중국 원으로부터 들어온 라마교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고려말의 실례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이성계와 그의 지지자들이 만든 사리갖춤. 은제도금사리탑과 백자발 등 사리구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당시 이성계 세력의 일면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건국의 공신 진충귀에게 내린 문서 (보물1160호).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에게 내려진 공신녹권은 현재까지 여러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조 4년(1395) 공신도감에서 진충귀를 개국 원종공신에 봉하면서 발급한 기록 문서인 녹권이다. 이때 임명된 원종공신 106명에게는 각각 논밭 30결, 노비 3구와 함께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내리고, 자손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에 오르는 특전을 주고 비를 세워 공로를 기록할 것을 명시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의 즉위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즉위卽位.즉조.등극登極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왕은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 가운데 다움 왕위에 오를 사람을 미리 정하였는데, 이를 세자世子.세손世孫이 다음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세자.세손이 없을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大妃 또는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새 왕을 지목하였다. 이때 왕자가 아닌 왕족이 왕이 되면 그 아버지는 대원군이라 하였다. 왕이 죽으면 대비는 왕과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인 국새國璽를 잠시 보관하였다가 새왕에게 전한다. 왕의 즉위식은 왕궁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을 하는 장소인 정전에서 거행한다. 왕의 즉위식은 왕이 왕과 국가의 상징인 국새를 받고 어좌에 올라가 앉는 의식이다. 다만 국새는 전왕前王의 시신이 안치된 빈전殯殿에서 받았다. 왕이 어좌에 앉으면 신하들은 새 왕의 탄생을 축하하며 천세千歲를 외쳤다. 즉위식을 마치면 조선 왕실은 왕이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한 사실을 이웃 나라에 알렸고, 특히 중국 황제는 전왕의 시호와 함께 새 왕에게 곤룡포袞龍袍 등을 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근정전 닫집, 어좌, 일월오봉도. 궁궐의 닫집은 정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닫집안에는 국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가 있고 뒷편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닫집(唐家)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비바람.태양빛 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신성하고 위엄스럽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 안에 설치한 작은 집이다. 당가唐家,운궁雲宮, 보개천장寶蓋天障이라고도 하였다. 왕궁의 정전이나 왕실의 사당, 사찰 법당의 닫집은 더욱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현재 서울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등 조선 왕궁의 정전에는 크고 화려한 닫집이 전하고 있다. 이 닫집 모형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의 닫집을 61%로 축소한 것이다. 이 닫집 모형에서 보듯 왕궁의 닫집 중앙에는 어좌御座, 용상龍床, 옥좌玉座라고 하는 왕이 앉는 의자가 있다. 어좌 아래, 즉 닫집의 기단은 탑榻 또는 어탑御榻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왕의 어좌 및 왕의 앞은 탑전榻前이라고 불렀다. 닫집의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 두마리를 여의주 구름문양과 함께 그려 놓았다. 어좌의 뒤에 설치된 병풍은 다섯봉우리의 산과 바다.태양.달 등을 그린 그림으로 이름을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라고 불렀다. 닫집과 어좌 그리고 장식 및 문양과 일월오봉도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왕권.왕조를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준花樽, 국왕의 어좌를 장식하는 꽃

나라의 경사스러운 잔치가 열리는 궁전의 정전의 중앙에 어좌가 놓여지고 그 좌우를 장엄하는 것이 화준이다. 이 화준의 채화나무는 태양을 상징하는 홍도화紅桃花와 달을 상징하는 벽도화碧桃花 두 그루가 한 쌍을 이루는데 국왕의 자리에는 일월오봉도를, 왕비의 자리에는 모란도를 가운데 배치하는 것이 관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궁중음악에 쓰이는 악기 편경編磬, 조선후기, 복제품, 국악기 조율의 기준이 되는 악기이다.

석부石部에 속하는 타악기의 하나로 16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의 모양은 모두 같고 두께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정해진다. 문묘제례악, 궁중의 의식이나 연회에서 연주되는 전통음악인 아악雅樂에 사용되었다. 고려 예종11년(1116) 송나라 아악이 들어올 때 편종과 함께 도입되어 조선 세종7년(1425) 박연朴堧이 중심이 되어 조선에 맞게 개량하였다.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국악기 조율의 기준이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악학궤범. 조선의 음악과 악기를 정리한 책. 처용가 등 조선시대까지 전해내려오는 많은 노래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 24년(1493) 왕명에 따라 조선의 예악과 관련된 이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음악, 춤, 악기 등에 대한 내용을 망라하여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다. <정읍사>, <처용가>, <여민락> 등의 한글가사가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의 과학기술과 한글

조선전기 세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은 천문학은 물론 수학, 도량형, 의약학, 농학, 화약과 무기제조 등 모든 과학 기술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발전은 우리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표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한 표음문자를 사용할려는 의도는 신라시대 이두를 비롯하여, 일본어, 북방유목민의 문자인 거란어,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시대가 있었고 실생활에도 많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한글만이 거의 유일하게 민가생활에 깊게 뿌리내리어 오늘날까지 공식적인 문자로 자랑할만한 발자취를 남겨오고 있다.

빛나는 우리한글
조선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발명은 한글이었다. 표의문자인 한자대신 우리말을 소리대로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글자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세종대 집현전을 중심으로 언어와 문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종25년(1443)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어 3년 뒤에는 이를 해설한 책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을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초성의 기본자음인 ‘ㄱ,ㄴ,ㅅ,ㅁ,ㅇ’은 ‘혀,치아,입술,목구멍’ 등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 떠 만들었고, 중성인 ‘·,ㅡ,ㅣ’는 각각 ‘하늘과 땅, 사람’ 삼재三才의 모양을 본 떠서 만든 세 글자를 기본으로 하였다. 초성과 중성 모두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글자를 만들어, 음양오행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훈민정음은 그 원리와 조직이 과학적이고 어떤 소리든 원형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훈민정음을 풀이한 책,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70호, 세종28년(1446), 복제품,  국보 70호인 이 책은 간송미술간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에는 잘 공개하지 않고 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세종28년(1446) 백성에게 반포한 책이다. 세종이 지은 서문에 이어, 해석과 쓰임법인 용례用例,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해례解例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 이름은 ‘훈민정음’이며, 해석과 용례가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므로 보통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오대산 상원사를 다시 세우며 쓴글(복제품), 월정사성보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국보 29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세조이지만 월인석보상절을 비롯하여 한글 사용에 가장 공이 큰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세조10년(1464)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미스님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지은 글이다. 한글로 번역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다. 신미스님이 부처님께 기도한 일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도 신미스님의 기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속활자에 담은 한글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의 간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글 금속활자도 제작되었다. 언해본은 충신.효자.열녀의 모범 사례를 모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비롯하여 사서삼경 등과 같이 조선이 지향한 성리학적 가치를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한 내용이 많았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는 세조7년(1461) 간행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서 한글로 된 활자인 을해자(1455)와 같이 사용된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조의 창업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세종29년(1447),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으로 15세기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왕조가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읊은 노래 가사와 그 배경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비어천가는 궁중 연회에서 불려졌으며 모두 125장이다. 편잔, 간행 경위에 대해서는 정인지(1396~1478)의 서문과 최항崔恒(1409~1474)의 발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을해자로 찍은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세조7년(1461),

세조가 직접 번역하고 세조7년(1461)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능엄경』의 한글 번역본이다. 온전히 불교경전으로는 가장 먼저 언해된 것으로 15세기 국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문 부분은 세조1년(1455) 주조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를 사용하였다. 함께 사용한 한글 활자도 금속으로 제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두보의 시집을 한글로 번역한 책, 두공부시언해杜工部時言解, 성종12년(1481),

유윤겸 등이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번역하고 분류해서 간행한 책이다. 한문 부분은 강희안姜希顔의 글씨체로 세조1년(1455)에 주조한 금속활자인 을해자를 사용하였다. 함께 사용한 한글활자도 금속으로 제작하였다.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예로 초기 한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한글금속활자(왼쪽, 사진), 을해자와 함께 사용된 한글 금속활자(오른쪽), 15세기,

세조7년(1461)에 간행된 『능엄경언해』에 사용된 한글 활자이다. 제작 시기는 을해자가 주조된 세조1년(1455)과 『능엄경언해』를 인쇄한 세조7년 사이로 추정된다. 활자의 글자체가 조선 후기의 것과 다르며, 활자의 모양도 조선 후기와 달리 활자의 뒷면이 평평한 것이 주를 이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활자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시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 시경언해詩經諺解,

숙종30년, 유교의 오경五經 중의 하나인 시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이다. 이 책의 인쇄에 사용된 활자는 현종9년(1668)에 갑인자甲寅字의 글씨체로 네 번째로 주조한 무신자戊申字이며 한글 활자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인 무신자병용 한글활자를 사용하였다. 책의 첫 장에 왕세자를 뜻하는 춘궁春宮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신자와 함께 사용된 한글 금속활자, 17~18세기,

현종9년(1668)에 갑인자甲寅字를 글자본으로 만든 네 번째 금속활자인 무신자로 언해본諺解本을 찍을 때 사용한 한글활자이다. 무신자를 제작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활자는 다섯번째인 갑인자인 임진자壬辰字와 여섯번째 갑인자인 정유자丁酉字로 간행한 언해본에도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생활에 스며든 한글
한글이 창제된 후 문맹 상태에 있던 많은 백성들이 한글을 익히면서 언어생활이 윤택해졌다. 대분의 책과 문서, 편지 등은 한문으로 쓰였으나, 점차 왕실이나 사대부, 특히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꾸준히 한글 사용이 확대되었다. 백성들은 한자라는 언어장벽으로 막혔던 민원을 해소하고, 친지간에 서신을 왕래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적극적으로 한글을 활용하였다. 사대부들이 향유한 한문 문학 외에도 한글로 쓴 시조와 가사, 설화와 소설들이 등장하였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농서나 의학서, 요리법을 적은 책 등도 한글로 간행되었다. 또, 사리기를 싸는 보자기나 여성들의 생활소품, 그릇 등의 뒷면에 한글을 써넣는 등 생활주변의 집기에도 한글을 활용하였다. 이렇듯 한글은 창제 이후 꾸준히 사용되다가 조선후기 한글 문헌의 간행이 활발해지고 사용 범위가 확대되면서 점차 문자생활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원이 엄마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 복제품, 선조19년(1586),

안동시 정상동에 있던 이응태(1556~1586)의 무덤에서 출토된 한글편지이다. 이응태의 부인(원이 엄마)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적어 관 속에 넣어둔 것이다. 이 편지는 함께 출토된 머리카락 삼은 미투리와 더불어 조선시대 부부의 사랑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와 한문편지, 복식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글편지 내용,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련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떠나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루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시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건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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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해안군’이 적혀 있는 청동병, 16세기,

‘해안군’이라는 한글이 새겨진 청동으로 만든 병이다. 해안군海安君이라는 칭호를 가진 인물은 중종의 아들 이희와 선조의 왕손 이억 두명이 있다 병의 형태로 보아 이 청동병은 중종의 아들 해안군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허균許筠(1569~1618), 조선후기,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 적서嫡庶 차별에 대한 비판, 부패한 정치에 대한 개혁 등 저자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홍판서의 서자로 태어나 천대를 받고 자라난 길동이 집을 뛰쳐나와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하고 양반계급을 괴롭히고 가난한 양민을 돕다가 율도국栗島國에 정착해 이상적 왕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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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써 있는 이윤탁 비석 탁본, 중종31년(1536), 보물1524호의 탁본,

묵재 이문건이 아버지 이윤탁의 묘를 어머니 고려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중종31년(1536)에 세운 묘비의 탁본이다. 묘비의 왼쪽에는 한글로, 오른쪽에는 한문으로 묘비를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는 글이 각각 새겨져 있다.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어린이용 한자자습서.

1577년 최세진이 지은 어린이용 한자 자습서이다. 최세진은 당시 한자 학습에 사용된 책들이 실제 사용되는 글자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하여 초목, 자리, 복식 등에 쓰이는 글자들 위주로 이 책을 편찬했다. 상.중.하 각권에 1,120자씩 총 3,360자를 수록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세종대의 과학기술
세종대에는 천문학은 물론 수학과 도량형, 지리학, 의약학, 농학, 화약과 무기제조, 인쇄 등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이는 동양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의 특성을 반영한 세종대의 유산이었다. 특히 천문학은 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학문으로서,대표적인 성과로는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의 완성과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구仰釜日晷, 간의簡儀, 측우기測雨器, 수표水標와 같은 천문.기상 관측기구의 제작을 들 수 있다. 무기 제조 분야에서는 조선식 총통완구와 다연발 로켓발사대인 화차가 개발되었다. 2009년 군기시터로 추정되는 서울시 청사 부지에서 명종18년(1563)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불랑기자포와 승자총통 등이 출토되어 16세기 이후에도 세종대의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이 계승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관상감 측우대와 측우기, 보물 561호, 843호, 복제품,

측우대는 철로 만든 원통형의 측우기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이 측우대는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曆數 등을 맡아 본 관청인 관상감觀象監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복제한 것이다. 측우대 위에 놓여 있는 측우기는 측우대의 구멍에 맞추어 복원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 최초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지도混一康里歷代國地圖, 조선 태종2년(1402),복제품, 조선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현재 전시되고 있는 것은 복제본으로 원본은 일본 류코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당시에 알고 있던 지식을 총망라하여 만든 세계지도로 우리나라를 실제보다 크게 그려 놓고 있다.

태종2년(1402) 권근의 주도 하에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이다. 중국과 일본의 지도를 바탕으로 조선과 세계의 땅에 대한 정보를 집대성하였다. 조선 초의 세계인식을 잘 보여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지명 130여 개를 표시하는 등 당시의 지리정보를 충실히 담아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군사훈련서, 병장도설

성종 23년(1492)에 간행된 군사훈련서인 <진법>을 영조 16년(1742)에 개명하여 재차 간행한 책이다. <진법>은 군제와 군사의 조련에 관한 책인데, 영조 대에 선대의 유업을 널리 펴려는 목적으로 다시 간행하면서 <병장도설>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전기의 중앙군사 조직인 오위제에서 시행한 군사훈련법이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약이 담긴 청동그릇, 조선전기

OLYMPUS DIGITAL CAMERA쇠로만든 큰 화살의 촉과 날개

OLYMPUS DIGITAL CAMERA불랑기포에 실탄을 장전하는 자포인 불랑기자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포로 서양(아마도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것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무기이다. 명중율과 파괴력은 높지 않으나, 운반과 사용의 용이성 등으로 인해서 육상에서 사용된 화포의 주력으로 구한말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청 공사현장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불랑기포는 조선시대 서양에서 전해진 신형 대포의 일종이다. 서울시 신청사 부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홈통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1506년에 75근 8량을 들여 김석년이라는 장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861호 불랑기자포와 제작연대와 형태가 같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휴대용화기인 승자총통. 서울시청사 공사터에서 발굴되었다.

서울 신청사 부지의 한 건물터에서 여러대의 휴대용 화기가 엉겨 붙은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이 건물터는 조선시대 무기의 제작을 맡았던 관청인 군기시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부속시설로는 야로소, 조갑소, 화약감조청, 궁전소 등이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조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 현종2년(1661),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다. 세조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16년(1485) 완성되었다. 조선초기 『경제육전經濟六典』과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만들었다. 조선의 통치체제는 『경국대전』을 바탕으로 정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조 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 태조실록太祖實錄, 국보151호, 복제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공식 역사 기록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고려의 관례에 따라 역대 왕별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정치.외교.국방.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기사를 망라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였다. 『태조실록』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충신.효자.열녀의 바른 생실을 모아 그림으로 엮은 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조선후기,

유교 윤리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인 삼강三綱과 관련된 실제 사례들을 모아 그림과 함께 엮은 책이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명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인물 가운데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의 행실을 뽑아 세종16년(1434)에 편찬되었다. 이후 분량을 줄인 산정본刪定本, 한글 언해본 등이 간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오례의, 국가의 주요 의례를 정리한 책. 오례는 길례(제사),빈례(손님맞이),가례(결혼),군례(군사),흉례(장례)를 말한다.

조선시대 주요 의례와 관련된 기본 규칙과 절차를 오례로 나누어 정리한 책이다. 세종 때 편찬된 <오례의>를 보완하여 성종 5년 신숙주 등이 완성하였다. 함께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에는 오례별로 도설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왕자 금원군의 탄생을 기록한 태지, 중종14년(1519),

조선 중종의 왕자 금원군의 태실에서 나온 태지이다. 태지를 통하여 금원군이 중종8년(1513) 6월9일 오시午時(11~13시)에 태어났고 중종14년(1519) 2월7일 사시巳時(9~11시)에 태실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홍치십이년”인 새겨진 태지와 백자 태항아리, 연산군5년(1499),

홍치11년(1498)에 태어난 왕자 강수 아기씨의 태를 묻은 백자 태항아리와 그 내용을 기록한 태지석이다. 강수 아기씨는 조선 10대왕 연산군의 서자로, 양평군에 봉해졌다. 조선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백자항아리에 태를 담아 밀봉하여 태실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폐비 윤씨의 태항아리, 성종9년(1478).

폐비 윤씨는 1476년 성종의 왕비가 되었다가 1479년 폐출되었다. 그녀의 아들은 성종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다. 폐비윤씨의 태실은 그녀가 왕비로 있을 때 경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 입구의 오른쪽 산에 마련하였다. 여기에 전시된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왕실의 태실을 정비하여 태지와 함께 예천에서 서울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조와 불교

유교국가를 지향한 조선왕조는 억불정책을 근간으로 국가를 운영했지만, 삼국시대부터 국민들의 생활에 깊게 뿌리내린 불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특히, 조선의 개국에 크게 공헌한 무학대사, 월인석보상절을 저술하는 등 불교를 크게 후원한 세조, 조선중기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고 오늘날의 불교를 있게 만든 중종의 계비인 문정황후 등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는 국가적으로 후원을 받은 양주 회암사, 세조가 크게 중장한 오대산 상원사, 왕릉을 지키면서 선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 등을 두어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게 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왕실과 관련된 불교 유물로 회암사 절터에서 출토된 청동금탁, 기와, 잡상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할 유물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유교국가로서의 지향을 뚜렷이 하고 억불정책을 내세웠으나, 생활속에 뿌리내린 불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왕실에서도 원찰을 두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태조 이후 왕실의 후원으로 번성한 경기도 양주 회암사나, 세조와의 인연으로 중창된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가 대표적이다. 세조 대와 명종대에 잠시 성행했던 왕실불교는 성종대 사림의 진출 이후 불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점차 산중불교山中佛敎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불교계는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활약하여 호국불교의 면모를 보이는 등 노력이 이어졌다. 이후 17, 18세기에도 전란과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대규모 법회가 증가하는 등 신앙으로서 불교의 역할은 지속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금탁, 조선 태조3년(1394), 태조3년(1394)에 만든 금탁으로 시주자의 이름을 새겨 놓고 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보광전 터에서 출토되었다. 금탁에는 모두 134자의 명문이 남아 있는데, ‘왕사 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지’로 시작하여 조선이 만세토록 전해질 것을 발원한 내용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문의 조선국왕은 태조, 왕현비는 신덕왕후 강씨, 세자는 태조7년(1398) 왕자의 난에 희생된 방석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왕실의 원찰, 회암사
경기도 양주 천보산 남쪽에 자리잡은 회암사檜巖寺는 태조 이성계의 후원 이래 역대 왕들의 영정과 제사를 모시고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조선왕실의 원찰로서 번성하였다. 회암사 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회암사의 큰 규모와 건축양식, 이곳에서 출토된 명문이 새겨진 청동금탁과 기와, 잡상 등은 조선전기 회암사가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뒷받침하는 한 사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조선왕실의 원찰인 양주 회암사, 양주에 위치한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크게 번성한 사찰이다. 이 곳에서 무학대사가 주지를 지냈으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또한 이곳에서 불교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조선전기에는 크게 번성했다가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에 반감을 가진 유림들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주 회암사지

OLYMPUS DIGITAL CAMERA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기와들, 세종18년(1436), 세조6년(1460), 효령대군 명칭과 ‘정통병진’이라는 글씨와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어 왕실과 관계깊었던 사찰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칭호와 ‘정통병진正統丙辰’(1436) 글씨가 새겨진 기와, ‘天順庚辰’(1460)이 새겨진 봉황무늬 기와와 용무늬 기와들이다. 용과 봉황무늬기와가 함께 사용된 것은 회암사가 왕실 관련 사찰이어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이다. <출추: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천순경진’ 글씨와 함께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 새겨진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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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장식기와, 조선전기,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잡상으로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형 관모를 쓰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잡상은 궁궐이나 왕을 상징하는 건물에만 사용할 수 있는데, 이 곳 회암사에서는 잡상이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SANYO DIGITAL CAMERA양주 회암사지의 무학대사 홍융탑

SANYO DIGITAL CAMERA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크게 중창한 오대산 상원사. 가장오래된 동종인 상원사 동종도 이 시기에 상원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조선왕실에서는 왕릉에 원찰을 두어 선왕의 명복을 빌었다. 서울 강남의 봉은사는 선정릉을 지키는 원찰로서 조선 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문정왕후가 불교의 중심지로 만든 사찰이다. 임진왜란때 승병을 이끌고 크게 활약하여 조선후기 불교를 중흥시킨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이 시기에 배출된 고승이다.

경복궁 치조(治朝), 정전인 근정전(勤政殿)과 조정

치조(治朝)는 궁궐에서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국가적인 행사기 치러지는 정전(正殿), 국왕이 일상적으로 업무를 보는 편전(便殿)을 일컫는다. 그 중 정전은 궁궐내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국가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오례(五禮)라 일컫는 각종 의식을 중요시 여겼으며, 정전은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는 장소이다. 궁궐을 구성하는 다른 영역들은 궁궐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전영역은 정전건물과 품계석이 세워진 조정(朝廷)이라 불리는 넓은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과 출입문으로 구성되고 있다.

근정전(勤政殿) 일원
1867년 중건된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큰 조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를 치루는 정전으로, 사방에 행각을 둘러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앞마당에는 품계석을 두 줄로 세워 벼슬아치들이 도열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아 궁궐 안에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을 이루어졌다. 근정문(勤政門) 바깥에도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금천을 가로 지르는 어도를 제외하고 일절 시설물이 없이 텅비워진 신성한 공간이다. 근정전 내부는 2개층을 터서 높고 웅장한 공간을 만들고 그 가운데 어좌를 놓아 왕의 권위를 공간적으로 상징화했다. 2001년 흥례문(興禮門)과 외행각, 영제교(永濟橋) 등을 복원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에서 중심이 되는 정전영역. 근정전을 중심으로 관리들이 품계에 맞게 도열할 수 있도록 품계석이 세워진 넓은 마당, 이를 둘러싼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정전 출입문인 근정문(勤政門). 2층으로 중층문으로 3개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가운데는 국왕의 가마가 출입하는 문이며, 동쪽은 문반(文班), 서쪽은(武班)이 출입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문 사이로 보이는 근정전과 조정 마당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정전(正殿)

경복궁 근정전(국보223호)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근정전은 1395년(태조4) 경복궁을 창건할 때 처음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던 것을 1867년(고종4)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앞면 5칸의 2층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은 기단에 해당하는 2층 월대에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중앙 뒷편 닫집에 국왕이 앉는 어좌가 있고, 뒷편엔 ‘일원오악도(日月五嶽圖)’ 병풍이 놓여져 있다. ‘근정(勤政)’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으며,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가 있다. 구한말에 중건된 건물이지만 조선후기 건축 기술이 집약된 뛰어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앞면 5칸의 2층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현판.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다포계를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은 사방에 벽이 없고 모두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을 하고 있어, 국가적인 행사때 내부를 개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닫집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비바람.태양빛 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신성하고 위엄스럽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안에 설치한 작은 집이다. 당가(唐家), 운궁(雲宮), 보개천장(寶蓋天障)이라고도 하였다. 왕궁의 정전, 왕실의 사당, 사찰 법당의 닫집은 더욱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현재 서울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등 조선왕궁의 정전에는 크고 화려한 닫집이 전하고 있다. 왕궁의 닫집 중앙에는 어좌(御座), 용상(龍床), 옥좌(玉座)라고 하는 왕이 앉는 의자가 있다. 어좌 아래, 즉 닫집의 기단은 탑 또는 어탑(御榻)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왕의 어좌 및 왕의 앞은 탑전(榻前)이라고 불렀다. 닫집의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 두마리를 여의주 구름문양과 함께 그려 놓았다. 어좌의 뒤에 설치된 병풍은 다섯 봉우리의 산과 바다.태양.달 등을 그린 그림으로 일월오봉도 또는 일원오악도라고 불렀다. 닫집과 어좌 그리고 장식 및 문양과 일월오봉도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왕권.왕조를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내부. 중앙 뒷편 닫집에 국왕이 앉는 어좌가 놓여 있고 뒷편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놓여 있다. 내부바닥에은 구운벽돌인 전돌이 깔려 있으며, 내부에는 가구는 거의 없고 국왕의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과 국왕을 보좌하는 관원(?)이 앉았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쌍용각보개, 용무늬 천장장식, 보개는 궁궐 정전이나 편전, 진전 등 당가가 설치되는 건물의 천장에 설치되었던 장식물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상의 동물로 웅장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왕의 공간을 장식함으로써 왕의 신성과 위엄을 강조하였다. 봉황무늬 천장장식, 봉황각보개,보개는 궁궐 정전이나 편전, 진전 등 당가가 설치되는 건물의 천장에 설치되었던 장식물이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동물로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왕이 머무는 근정전 내부 닫집 위 천장에는 두마리의 용이 새겨진 보개장식이 있다.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경우에는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으나, 경복궁은 용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천장. 우물천장을 하고 있으며 화려한 색감의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지붕을 받치는 다포계 공포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내부에 있는 화려한 색감의 향로. 구한말 중국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법랑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뒤쪽편에서 본 근정전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근정전

OLYMPUS DIGITAL CAMERA사정문에서 본 근정전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근정전과 조정

SANYO DIGITAL CAMERA2009년 경복궁 근정전과 조정

근정전 월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에서 근정전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법전으로 2층으로 된 월대 위에 세워져 있다. 월대 앞으로는 신하들이 하례를 올리는 조정이 있고, 월대를 올려다 보게 하면서 권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대 정면에는 답도가 있는 계단이 있고, 상단 월대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청동향로가, 그 아래로는 화재를 대비한 무쇠 드므가 계단 옆으로 설치되어 있다. 월대 난간 곳곳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상과 12지신상이 놓고 있으며 계단 주위로 상스러운 동물상을 세워 놓고 있다.  궁궐 중요 건물 앞에 마련되는 월대는 전각에는 1층으로 하고, 정전만 2층월대를 하고 있다. 황제를 칭했던 북경 자금성 정전 월대는 경복궁보다 높은 3층 월대를 하고 있다.

궁궐의 월대
월대는 정전과 같은 궁궐의 중요한 건물 앞에 장방형으로 놓이며 높이는 약 1m 전후로 2단으로 놓이는 경우도 있다.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올려 벽면을 구성하고 상부는 전돌이나 박석을 깔며 모서리에 향로와 물을 담아 놓은 화재 방지용 솥인 드므를 올려 놓는다.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는 상하 2단으로, 동.서.남.북 4면에 걸쳐 마련되었는데, 특히 남쪽의 정면 계단에는 상하에 각각 봉황을 새긴 답도를 두고 층계석에도 당초무늬를 새겼다. 월대의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사방에 두르고 난간 기둥에 청룡.주작.백호.현무 등 사신과 쥐.토끼.소.뱀.말.양.원숭이.닭 등 십이지 동물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정전으로 4면에 2층으로 월대가 있으며, 정면 계단에는 국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답도가 있다. 구한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조선후기 법궁이었던 창덕궁 인정전과는 달리 월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다. 근정전 월대에는 돌난간을 사방에 두르고 난간기둥에는 방향을 나타내면서 벽사(僻邪)의 의미를 갖는 사신(四神)과 십이지신상, 석수 등을 배치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근정전 월대를 오르는 정면 계단. 중앙에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가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양쪽 계단 난간 아래아 기둥에는 상서러운 동물인 석수가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답도에는 봉황무늬가 새겨진 소맷돌이 있고, 계단에는 당초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답도 양쪽에는 돌난간 역할을 하는 석수(石獸)가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2층 계단의 답도

OLYMPUS DIGITAL CAMERA답도 소맷돌. 경복궁 답도의 소맷돌에는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단 양끝쪽을 장식하고 있는 서수(瑞獸). 벽사의 의미를 갖는 상서로운 동물인 용이나 해태상을 하고 있다. 경복궁은 계단 아래에 용, 기둥위에는 해태상을 올려 놓고 있다. 광화문 앞에 세워진 해태상과 마찬가지로 관악산 화기(火氣)를 제압하는 의미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근정전은 경복궁 정전으로 조선후기 법궁이었던 창덕궁 인정전 월대와는 달리 월대에 돌난간을 사방에 두르고 있다. 중국 자금성과는 달리 용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배수시설인 석누조(石漏槽)는 배치해 놓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남쪽편 모서리에는 암수 사자 한 쌍이 새끼를 품고 있는 쌍사자상을 조각해 놓고 있다. 모습을 조각하였다. 벽사와 길상의 상징인 사자상은 왕이 있는 공간을 신성한 곳으로 만드는 장식 역할을 한다. 서역의 영향을 받은 상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모서리의 쌍사사장과 석수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월대 모서리에 올려진 서수상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1층 월대. 경복궁에서 공식적인 의례가 있을때 악공이나 무희가 배치되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2층 월대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1층월대. 수행원들이 대기하거나 통로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2층월대. 국왕을 직접 수행하거나 호위하는 인원들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보인다.(?) 중국 자금성의 경우 다향한 예기들이 놓여 있지만, 경복궁 월대에는 청동향로와 드므만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월대에 배치된 청동향로와 드므, 드므는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써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함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월대에 배치된 사신상(四神像) 중 남쪽 계단에 배치된 주작(朱雀)과 북쪽 계단에 배치된 현무(玄武).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에 배치된 청룡(靑龍), 서쪽에 배치된(白虎)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북쪽 계단. 사신상 중 현무와 12지신상 중 쥐가 난간 기둥에 올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월대에는 사신상 외 벽사의 의미를 갖는 12지신상이 난간을 장식하고 있다. 12지신상 중 쥐(子). 토끼(卯).소(丑).뱀(巳).말(午).양(未).원숭이(申).닭(酉) 7가지 동물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그 중 북쪽 계단에는 쥐(子)가 있고 양쪽에 닭과 토끼를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서쪽편 계단 중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계단. 사신상 중 호랑이와 12지신상 중 닭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로 오르는 서쪽계단. 사신상 중 원숭이와 양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계단에 세워진 원숭이와 양.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에 세워진 말과 서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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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에 세워진 뱀과 소.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동쪽편 계단. 사신상 중 청룡과 12지신상 중 토끼가 있다.

근정전 앞 조정(朝廷)과 회랑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 앞 마당을 조정이라고 부르며 국왕이 신하의 하례들 받는 등 공식적인 국왕의 정치가 이루어지느는 곳이다. 근정전 앞 조정 양쪽에는 신하들이 직위에 따라서 서는 위치를 알려주는 품계석이 동.서 양쪽으로 줄지어 있으며 동쪽은 문신, 서쪽은 무신이 서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 조정은 44칸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옛날 사극에 많이 들어수 있는 ‘조정에 출사한다는’ 말에서 나오는 ‘조정’이 품계석이 있는 이 곳을 말한다. 중국 자금성 조정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품계석이 없었다.

근정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조정과 당당한 기품에 점잖은 위엄이 서린 근정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정 중앙에는 삼도(三道)가 있어 근정전까지 어어지는데 가운데 넓고 높은 길은 어도(御道)이며 동쪽이 문관이 이용하는 길, 서쪽이 무관의 길이다. 삼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는 관원의 품계를 나타내는 품계석(品階石)이 줄지어 있다. 동쪽은 문신의 자리이고, 서쪽이 무신의 자리이다. 넓은 조정에는 표면을 다듬지 않은 평평한 박석(薄石)이 깔려 있다.근정문과 근정전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서와 남북으로 각각 대칭을 이루면서 사방으로 둘려있는 행각이다. 행각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이지만 칸을 막아서 공간으로도 활용하였다. 동쪽 행각에는 융문루(隆文樓)가 있다.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행각과 서행각은 44칸으로 이루졌으며 서쪽 행각에는 융무루(隆武樓)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정전 출입문인 근정문을 들어서면 근정전 월대까지 넓은 마당이 있다.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때 신하들이 도열해 있는 마당으로 바닥에는 박석이 깔려 있다. 박석은 거친 화강석으로 만든 판석으로 신하들이 궁궐에서 조심해서 걸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지 않게 하는 기능과 빗물에 미끌어지지 않게 하는 기능도 함께 있다고 한다. 근정문에서 월대까지는 삼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경복궁 품계석(동쪽). 품계석은 정전에서 조회와 같은 공식행사를 할 때 신하들이 품계에 따라 정렬하여 서 있을 수 있도록 세운 돌로 정치의 중심인 조정(朝廷)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품계석은 동.서에 각각 12개씩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관직의 품계는 9품까지 있는데, 품계석은 1~3품까지는 정(正)과 종(從)을 구분하여 6개씩, 나머지는 정,종을 구분하지 않고 6개씩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무반들이 도열해 서 있던 서쪽편 품계석

SANYO DIGITAL CAMERA품계석 중 가장 높은 정1품 품계석. 신하 중 가장 높은 영의정이 도열하는 자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월대에서 내려다 본 조정과 정전 출입문인 근정문

OLYMPUS DIGITAL CAMERA조정 회랑 중 남쪽편 회랑과 근정문. 정전 회랑은 사방이 회랑(행각)으로 둘러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근정문, 북쪽으로는 사정문이 있고, 동쪽에는 융문루(隆文樓), 서쪽에는 융무루(隆武樓)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근정전 동.서회랑은 44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문루와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회랑은 2칸으로 되어 있으며, 통로로 사용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회랑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회랑 출입문. 서쪽에는 궐내각사와 연결되며, 동쪽은 세자의 거처인 동궁과 연결된다. 다른 출입문과 달리 2개의 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행각에 있는 누각인 융무루.

OLYMPUS DIGITAL CAMERA융무루 안쪽. 나무계단을 이용해서 오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회랑 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회랑에 있는 융문루. 융무루와는 달리 출입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는 회랑이 없고, 편전인 사정전 행각이 있다.

[중앙박물관 신라실] 문자로 보는 신라, 신라문화의 지방확산

6세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소갈이와 수리시설의 보급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나라이름을 ‘신라’라 칭하고 ‘왕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경쟁력을 갗추면서 진흥왕때는 영토가 한강유역과 함경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국가로서 신라의 모습은 여러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문자를 새겨놓은 비석들이다.

특히, 진흥왕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이 화장된 영토를 순수하면서 기념으로 새겨놓은 비석들로 당시의 관직체제,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영역을 보여주는 유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진흥왕순수비 이외에도 신라는 국가정책 등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새겨놓은 비석을 많이 활용했는데, 그 내용은 법의 시행, 국왕의 순시, 댐과 성 등 토목사업의 과정과 책임소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비석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영역 전체에 걸쳐고 고루게 분포되고 있어서 국가운영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돌방무덤이나 토기에서 신라문화의 확산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 영역내 지방에서 발견되는 비석이나 목간 등의 문자자료에서도 신라가 정복지 주민에 관직을 주거나 세금을 매기는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자로 보는 신라. 삼국시대 신라인들의 문자생활을 보여주는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한 주요 비석들과 일상생활에 사용한 목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금속유물에 새겨진 문자
5~6세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신라에서 문자가 사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허리띠끝장식과 청동그릇 등에 새겨진 ‘부인대夫人帶’, ‘대부大富’ 등의 글씨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로 된 문자라고 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호우총과 서봉총에서는 ‘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之好太王’이나 ‘태왕太王’ 등과 같이 고구려의 왕을 지칭하는 용어와 제작연대.제작자.용량 등 여러 내용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되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수延壽’명 은그릇, 삼국시대(신라) 454년, 경주 서봉총, 얇은 은판을 두드려 만든 합으로 그릇의 바닥과 뚜껑 안쪽에는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 대왕(大王)이 3근6량을 사용하여 만들다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연수라는 연호는 동아시아에서 확인되지 않는 연호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부大富’명 청동그릇,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오동 무덤, 청동그릇의 바닥에 ‘대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다양한 그릇에 큰복(大福)과 같은 길상과 관련된 내용이 확인되기도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비석
6세기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고 대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소갈이와 수리시설의 보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나라이름을 ‘신라新羅’라 정하고 ‘왕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독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낙동강과 한강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정복한 지역을 신라지방으로 편성하였고 확대된 영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문서행정을 통해 통치하였다. 이렇게 신라인이 남겨놓은 역사의 흔적은 신라인들이 직접 써놓은 문자에서 더욱 뚜렷하게 찾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넓어진 영토에 기념비를 세우다.
신라는 6세기에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법과 문서를 통하여 지방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각지에 세워진 비석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지증왕과 법흥왕대의 비문에는 법을 통하여 정복한 지역을 통치하고 지방의 분쟁을 조정하였으며, 더 나아가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지방의 주민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진흥왕은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단양에는 적성비(赤城碑)를 세워 이를 기념하였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항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德業日新 網羅四方”,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하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3호, 삼국시대(신라) 진흥왕16년(555), 서울 북한산 비봉, 진흥왕의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활약과 강력한 왕권, 당시의 관직제도와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진흥왕 순수비에 적혀 있는 글자들.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비석으로 지금은 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진흥황 16년(555)에 세워진 것으로 진흥왕이 확장된 영토를 순수하면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황초령,마운령,창녕에 4기의 순수비가 있으며, 단양 적성비를 비롯하여 다수의 순수비가 전국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진흥왕 순수비 옆면과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진흥왕 순수비

SANYO DIGITAL CAMERA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 있었던 북한산 비봉

돌에 글을 새겨 세상에 보이다.
6세기 신라에서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금석문이 많이 제작되는데, 앞 시기에 단편적으로 문자를 사용하던 단계와 비교하여 문자 발달사상 중요한 전환기가 된다. 특히 단단한 돌에 글자를 새긴 비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비문의 내용은 나라의 법 시행(律令), 국왕의 지방순시(巡狩), 댐과 성을 만든 과정과 책임소재(築堤, 築城) 등 국가에서 행한 공식적인 일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비문을 새긴 비석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산성이나 댐의 주변, 성벽, 교통로 등에 세웠다. 신라 전 영역에 걸쳐 분포하는 비석은 국가에서 중요한 사안을 돌에 기록하여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영구히 보존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냉수리고분
영일냉수리신라비가 발견된 곳 주변에는 많은 무덤이 있는데 주로 돌방무덤이다. 1990년에 조사된 대형의 돌방무덤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옆방이 딸린 무덤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냉수리무덤과 냉수리비,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성리비 등을 통해 볼 때 포항 일대는 삼국시대 신라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즉 지리적인 위치나 교통로 등 고구려와 접경지면서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로 일찍부터 신라의 성장 과정에서 정치.군서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뚜껑합, 삼국시대(신라), 포항 냉수리 돌방무덤

OLYMPUS DIGITAL CAMERA포항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복제품, 삼국시대(신라) 503년, 포항 냉수리, 503년 신라지배층이 포항 냉수리 지역의 호족이 절거리(節居利)에게 재물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지배귀족이 의논하여 명령을 결정하고 이후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뒤 비석을 세웠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포항 중성리 신라비, 복제품, 삼국시대(신라) 501년, 포항 중성리, 비문 맨 앞에 나오는 ‘辛巳’는 이 비가 건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라 지배층이 포항 중성리 지역 호족에게 명령을 내려, ‘궁宮’, 즉 토지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조정한 내용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부정형의 자연석으로 한 면에만 음각을 하였다. 이 비가 발견된 지점은 ‘영일 냉수리비(국보264호)’가 발견된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댐을 쌓고 논에 물을 대다.
6세기 신라는 소갈이(牛耕)와 댐의 보급을 통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법흥왕대에 전국적으로 댐을 만들거나 보수하는 사업이 시행되었다. 제방을 축조하면서 물의 흐름을 제어하여 하천 주변의 땅을 개발하여 농경지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논농사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영천 청제菁堤를 쌓으면서 기록한 ‘청제비’와 대구에 있는 제방을 만들면서 쓴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 드에 남아 있는데, 청제비가 세워진 곳에는 아직도 저수지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천 청제비 탁본, 삼국시대(신라) 536년, 영천군 금호면 도남동, 영천 청제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비 높이는 130cm 정도이며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의 양면에 각각 다른 시기에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앞면에는 병진년인 법흥왕 23년(536)에 처음으로 청제를 건립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동원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정원貞元 14년인 원성왕 14년(798)에 청제를 새로이 수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체계적으로 지방을 다스리다.
신라는 주변 소국을 점령하여 신라의 지방으로 만들었는데, 6세기에는 전국에 주州와 군郡을 설치하고 성城.촌村(후대의 현縣)까지 군주軍主.나두邏頭.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파악과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지방관은 촌주村主 등 지방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세금을 걷고, 지방민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도성이나 지방의 주요 지역에 성을 축조할 때 전국 각지에서 지방민에게 노동력과 물자를 걷어 공사를 수행하였다. 당시 축성築城과 관련된 남산신성비와 명활산성비에는 도사가 파견된 촌村단위로 작업구역이 할당되어 세밀한 공사가 진행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산신성비 제1비, 복제품, 삼국시대(신라) 591년, 경주 탑동, 남산신성비는 591년(진평왕13) 신라 왕경인과 지방민을 동원하여 경주 남산에 신성을 쌓고 건립한 비석이다.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으며, 비문에는 “신해辛亥 2월21일에 남산신성을 쌓을 때 법에 따라 쌓은지 3년 안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하게 한다.”라는 서약 부분으로 시작하여 성을 쌓은 것과 관련된 사람들과 공사한 거리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1비는 1934년에 발견된 것으로 화강암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비문에는 9행 169자가 새겨져 있다. 지금 함안 일대의 아량阿良촌의 지방민이 남산 신성 축성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의 지방통치 체제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삼국시대(신라) 551년, 경주 안압지

삼국시대를 이야기 할 때 지방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유물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신라에서도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보은의 삼년산성, 여주의 파사산성, 파주의 칠중성 등 남한강 유역을 비롯한 주요 교통로에 쌓은 견고한 산성이나 진흥왕 순수비나 각종 비석에서 지방통치에 대한 여러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산성 이외에는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물로는 경주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산성을 쌓을 때 지역별로 축성책임을 할당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긴 남산신성비에서도 지방의 이름들이 등장하며,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도 각 지역의 조세납부와 관련된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지방통치와 관련하여 많지는 않지만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자와 지방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개의 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과 현을 두는 주군현 체제를 완성했다. 또한 5개의 소경을 설치하여 지방지배를 강화했으며, 말단 행정 구역으로 촌을 설치했다. 촌에는 대략 10여가구 100여 명이 살았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천 주변이나 들판에서 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으며, 소와 말을 키우거나 잣, 호두 등을 재배했다. 촌에 대한 국가의 지배는 촌주의 협력 아래 이루어졌으며, 촌주 중 일부는 후삼국시대에 호족으로 성장해서 새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정비된 지방제도를 바탕으로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게 되고 소경과 주치 등에 귀족들이 이주하면서 왕경 문화는 지방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각지에서 출토되는 문자 자료는 당시 지방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로 보아 당시 지방에서 문자생활이 보편화되었으며 그 수준도 왕경에 버금갔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 문화의 확산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대에 걸쳐 낙동강유역의 가야를 흡수하고, 고구려.백제와 겨루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새롭게 신라 영토로 들어온 지역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미치게 되면서 신라 문화가 들어갔다.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돌방무덤이나 토기는 이 시기 신라의 지방 지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각지에서 발견된 비석이나 목간 등의 문자 자료에도 신라가 정복지의 주민을 흡수하여 관직을 주거나 세금을 매기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신라 문화의 확산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목간木簡, 삼국시대(신라), 함안 성산산성

성산산성은 조남산鳥南山 위 능선을 따라 자연돌 또는 깬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는 약 1,400m이다. 문지門址와 성벽, 내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내부 저수지에서 많은 목간이 출토되어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60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에는 급벌성.감문성.구리벌.고타.추문 등과 같은 이미 알려진 지명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비문과 기록에도 나오는 지명이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경북 북부 일대로 추정되며, 당시 상주上州지역에서 거두어들인 물건을 낙동강을 이용하여 하주下州지역에 있는 성산산성까지 운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꼬리표 목간은 곡물이나 물건을 담은 짐꾸러미를 묶은 끈에 꽂은 것으로 앞부분이 뾰족하거나 양옆에 홈을 내어 고정하게 하였다.
*신라사람들이 사용한 한자 ‘石’에는 두가지 의기가 있었다.
①글자 그대로 돌을 의히하는 ‘석’이라고 발음하며, 한자로 ‘石’을 사용하였다.
②곡물을 세는 단위인 섬을 의미하며, 당시 발음은 확인하기 곤란하나 한자로 ‘丿口’을 사용하였다. 성산산성 목간에 보이는 石은 돌이라기 보다는 섬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급벌성(及伐城), 현지명 경북 영주, 급벌성에 사는 문시이와 조벌척 두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
추문(鄒文), 현지명 충북 단양 부근, 추문군 전나모지촌에 사는 이리습이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곡물). 고타(古陀), 현지명 경북 안동, 고타군 이골리촌 아나마을에 사는 _지와 복지고리 두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를 발송하다.

OLYMPUS DIGITAL CAMERA 구벌(仇伐), 현지명 경북 의성 부근, 구벌군 간호_촌 비시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 구리벌(仇利伐), 현지명 경북 상주, 구리벌군 상삼자촌에 사는 걸리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곡물), 감문(甘文), 현지명 경북 김천, 감문성 아래 보리는 본파군 대촌에서 사는 모리지가 세금으로 낸 (보리) 한 섬

OLYMPUS DIGITAL CAMERA매약촌(買若村), 매약촌에 사는 고광사진우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 물사벌(物思伐), 물사벌성에 사는 두지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

 

[중앙박물관 신라실] 신라의 토기

신라토기는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 영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말한다. 신라토기는 신라가 성립된 이래로 통일신라때까지 만들어진 토기를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신라적인 토기양식을 보여주는 토기는 대체로 5세기부터 삼국이 통일된 7세기까지의 토기를 말한다. 토기의 형태로는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긴목항아리, 짧은목항아리가 기본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다양한 형태의 이형토기도 만들어졌다.

신라토기는 항아리, 굽다리접시, 그릇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그 중 인상적인 부분은 동물.배.수레 등을 본 떠 만든 상형토기이다. 이들 토기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덤의 껴묻거리로 묻혀진 것이 많다. 신라의 토기 겉면에는 무늬를 새기거나 토우 등을 붙여서 꾸미기도 하는데 이들 토우들은 신라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이나 동물이 형태를 간략하면서도 특징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어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그 묘사가 뛰어난 점이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토기들 중 그 작품성이 상당히 뛰어난 국보 91호로 지정된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말탄 사람 토기(기마인물형)’가 있다. 이 토기는 간략하면서 중요한 특징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신라의 말갖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면서 작품으로서 주인공의 심정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외에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여러 상형토기 들을 볼 수 있는데, 내세를 밝힐 등잔, 무덤의 주인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그리스 신화의 장면같은 배모양 토기 등에서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토기
신라토기는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 영역 내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말한다. 그릇의 종류는 항아리와 굽다리접시, 잔, 그릇받침 등으로 다양하며 부드러운 곡선의 가야 토기에 비해 직선적이다. 또 동물.배.수레 등을 본 떠 만든 상형토기도 있다. 토기는 전문 집단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어 무덤과 일상생활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무덤에 많이 묻혔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표적인 신라토기가 전시된 전시실

OLYMPUS DIGITAL CAMERA단지, 삼국시대(신라) 4세기,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이형토기, 삼국시대(신라) 4세기, 포항 옥성동 무덤, 합,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월성로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목항아리,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굽다리접시,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접시, 장군, 짧은목 항아리, 삼국시대(신라) 6세기, 금관총 출토

신라 토기의 장식
신라 토기의 겉면에는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거나 달개, 토우 등을 붙여 꾸미기도 하였다. 토기의 무늬는 겉면을 꾸미거나 토기의 벽을 고르게 하기 위해 두드리는 과정에 이루어진 것도 적지 않다. 또 무늬는 선과 원으로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넣거나 말, 개, 사람 등 여러 가지 물체를 새겨 넣은 것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등잔모양 토기,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OLYMPUS DIGITAL CAMERA새무늬 단지, 삼국시대(신라) 6세기, 포항 학천리, 작은 단지의 어깨에 새, 국화, 짐승얼굴 등 여러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서로 마주 보는 네 쌍의 새가 재잘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부리달린 단지,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OLYMPUS DIGITAL CAMERA합, 목항아리,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동물이 새겨진 항아리,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남 울산

OLYMPUS DIGITAL CAMERA토기에 새겨진 동물문양. 말처럼 보이는 동물이 달리는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말 탄 사람 토기(기마인물형토기), 국보 91호, 6세기,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1쌍의 토기 중 주인의 모습이다. 말 등에 둥근 깔대기와 가슴에는 액체를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있고 속이 비어 있어 주전자와 같다. 중앙박물관에 있는 유물 중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저승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무덤 주인의 모습과 심경을 너무도 잘 묘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무덤 주인의 담담하고 무표정하면서도 비장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말 탄 사람 토기, 신라를 대표하는 토기로 사후세계를 들어가는 사람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말탄사람 토기, 국보91호,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짐을 메고 있다. 오른손에는 방울을 들고 있는데, 방울을 흔드는 장면은 마치 주인의 영혼을 인도하는 하인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방울을 흔들며 주인의 영혼을 인도하는 하인의 모습이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짐을 메었으며 오른손에는 방울을 들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될 당시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인을 표현한 토기와는 달리 말갖춤을 간단하게 갖추고 있다. 약간은 가벼워 보이면서도 주인과 함께 저승으로 여행을 떠나는 하인의 비장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수모양주전자, 보물636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미추왕릉 C지구 3호무덤, 머리와 꼬리는 용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중 현무를 연상시키고 있어 무덤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몸통 속은 비어있고 등에는 깔때기 모양의 주입구가, 가슴부분에는 대통형의 귀때가 달려 있어 주전자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수모양 주전자.

OLYMPUS DIGITAL CAMERA뿔모양 잔, 삼국시대(신라) 5세기, 쇠뿔모양의 잔과 받침으로 의례에 사용된 것이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며 중앙아시아 지역과 관계가 깊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쇠뿔모양의 잔과 받침으로 의례에 사용된 것이다. 각배라고도 불리는 뿔잔은 소뿔 모양으로 만든 토기.도기.금속기 등의 잔을 일컫는 말이다. BC 3000년대 후반 크레타섬에서 만들어진 것이 보이며,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금은으로 만든 뿔잔이 크게 성행하였다. 중앙아시아 스키타이 무덤에서 부장품으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낙동강 유역의 신라 및 가야지방에서 많은 뿔잔들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며 금관을 비롯하여 이들 지역과 스키타이 지역과의 교류를 비롯한 여러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등잔모양 토기,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심지를 꽂을 수 있는 다섯개의 작은 접시가 속이 빈 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이 무덤 속에서도 현세와 같은 밝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출토: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등잔모양토기 또한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사후세계에 불을 밝히는 목적으로 무덤에 묻혀지는 것으로 오늘날 사찰이나 천주교 등에서 보여주는 촛불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우 붙은 항아리, 국보 195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노동동 무덤, 항아리의 목 부분에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 성기를 드러낸 남자 등의 토우가 붙어 있다. 뱀과 성기를 드러낸 남자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뱀이 개구리 뒷다리를 물고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토우

OLYMPUS DIGITAL CAMERA성기를 드러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토우

OLYMPUS DIGITAL CAMERA잔,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OLYMPUS DIGITAL CAMERA배모양 토기, 경주 금령총, 굽다리 위에 올려진 배로, 앞뒤에 달개가 달려 있는 다른 배에 비해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배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악기를 연주하듯 편안한 모습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공이 앉아서 노를 젓고 있다. 남자는 귀가 크고 혀를 내밀고 있으며 성기가 크게 드러나 있다. 배는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기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저승으로 나오는 5개의 강에 있는 배와 뱃사공 카론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교류 등을 통해 비슷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통해 서역의 사후관에 영향을 받은 유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우가 장식된 굽다리접시,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주, 이홍근 기증

OLYMPUS DIGITAL CAMERA사람무늬 목항아리, 삼국시대(신라)

OLYMPUS DIGITAL CAMERA토기에 장식된 사람무늬

신라인의 하루
1,500년 전 신라인의 모습이 정지된 화면처럼 남아 있다. 사람의 얼굴은 윤곽만 표현하였으나, 꾸밈없이 생생한 생활의 모습(사랑, 성, 탄생, 죽음)과 옷 등에 대한 당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라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작은 토우들.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 출산, 남자.여자, 사랑,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 생활, 죽음,

OLYMPUS DIGITAL CAMERA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그 앞에서 춤추는 두 사람

OLYMPUS DIGITAL CAMERA음악, 춤,

신라의 동물원
토우에는 하늘을 날거나 땅 또는 물에 사는 다양한 동물이 있다. 뚜껑에 붙어 있는 많은 동물 토우는 신라의 동물원을 보는 듯 하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원숭이, 개미핥기 등이 만들어진 점이 특이하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물 형상을 하고 있는 토우들

OLYMPUS DIGITAL CAMERA맹꽁이, 말뚝망둥어, 게,

OLYMPUS DIGITAL CAMERA개구리, 메기, 물개,

OLYMPUS DIGITAL CAMERA 뱀, 거북이,

OLYMPUS DIGITAL CAMERA개구리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

OLYMPUS DIGITAL CAMERA용, 토끼, 고양이,

OLYMPUS DIGITAL CAMERA소, 개, 말, 

OLYMPUS DIGITAL CAMERA 새, 가마우지, 

OLYMPUS DIGITAL CAMERA 멧돼지, 호랑이, 원앙,

OLYMPUS DIGITAL CAMERA독수리, 올빼미, 개미핥기, 원숭이,

 

[중앙박물관 신라실] 신라와 실크로드, 무기와 말갖춤

중앙박물관에는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과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신라는 5~6세기 내물왕대 이후 왕성이었던 월성 주변에 많은 돌무지덧널무덤들을 조성했는데 많은 껴묻거리들이 출토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많은 금관이 출토된 신라고분에서는 금속으로 만든 그릇들과 무기류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서 서역에서 들여왔을 것으로 보이는 유리제품들이 출토되고 있어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활발했던 교류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와 실크로드

한무제 시대 중국이 서역과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래로 동.서양은 많은 교류를 가져왔다. 한반도 또한 중국과 교류, 북방 유목민족과의 교류 등을 통해 서역과 교류관계를 가져왔는데 동물문양 장신구, 각배 등 다양한 유물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라는 서기 5~6세기에 조성된 많은 돌무지덧널 무덤에서 서역과의 교류관계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유리그릇이나 유리잔 등은 서아시아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유물들은 비단길 또는 바닷길로 신라에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의 바닷길로는 인도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여러차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삼국시대의 바닷길 교류는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서역에서 만들어진 이런 유물들은 신라가 서역과 직접 교류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의 전파와 함께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는 국방.외교상 서역과 직접 교류할 필요도 있었고, 교류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어서 서역국가와 직접 교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신라는 중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교류했다는 의견의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서역물품들은 신라뿐만 아니라 삼한 이래로 백제, 가야에서 그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신라만의 특징은 아닌 듯 하다.

신라와 실크로드
신라는 중국 등 주변 국가뿐만 아니라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시베리아의 알타이 지역에 분포하는 무덤과 그 구조가 비슷하다. 또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관과 허리띠는 북방 유목 민족 문화와 연결되고 있다. 유리그릇, 장식보검, 뿔모양 잔, 상감 유리구슬 등은 지붕해 주변과 서아시아 지방에서 출토되는 것과 형태나 제작 기법이 비슷하다. 이 유물은 비단길 또는 바닷길로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라와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들. 서아시아나 로마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을 비롯하여 서역 금속공예기법이나 문양들이 들어가 있는 유물들이다.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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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국보 193호, 경주 황남대총에 출토된 문화재이다. 지중해 연안인 로마로부터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수입된 제품으로 설명이 되어 있지만,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유리병은 손잡이에 금실을 감아 수리한 흔적으로 보아 매우 귀한 물품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잔, 유리, 금관총 출토, 유리잔, 보물 624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유리잔으로 아가리부분이 넓게 바깥쪽으로 벌여졌고, 몸통부분은 밥 그릇 모양으로 밑아 약간 넓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잘 볼 수 없는 형태로 서역에서 전해진 유물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잔,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잔,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잔,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진남색의 유리알갱이를 위 아래로 녹여 붙여 반점무늬를 만들었다. 유리의 옅은 녹색과 짙은 코발트색의 조화가 오늘날의 미적 감각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팔찌, 금.옥, 보물 623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표면에 파란색의 터어키석과 회색, 흑색의 보석을 박아 넣고 금 알갱이를 붙여 꾸민 팔찌이다. 형태나 장식 기법으로 보아 서아시아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팔찌 중 유일한 형태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표면에 녹색의 터어키석과 회색.흑색의 보석을 박아 넣고 금 알갱이를 붙여 장식하였다. 형태나 기법으로 보아 서아시아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팔찌는 외형에서도 기존에 많이 출토되는 신라의 금팔찌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장신구 문양과 많이 비슷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은잔, 보물 627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거북등무늬 안에 새.노루.범.말.사람 등의 여러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특히 사람은 큰 눈, 높은 코를 가진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 금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식리총, 신발의 바닥만 남은 것으로, 거북등무늬 안에는 짐승얼굴과 새무늬가 있고, 그 둘레에는 가릉빈가(새 몸에 사람 얼굴).새.기린.날개달린 물고기 등이 새겨져 있다. 11개의 연꽃무늬에는 작은 못(스파이크)를 붙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의 금속그릇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속그릇이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금속 그릇들은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것들을 위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대부분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을 모방하여 만든 부장품이나 청동제 제기인 것으로 보인다. 사발이나 합은 지금 사용하는 것들과 형태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고, 신라나 가야에서 많이 사용한 굽다리접시가 특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청동으로 만든 제기처럼 보이는 초두를 비롯한 그릇들은 중국과 교류가 있었던 고조선 이래로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초기의 청동그릇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라의 청동그릇은 아마도 신라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 그릇에는 다양한 내용의 글자를 새겨넣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금속그릇
신라에서는 흙으로 구워 만든 토기와 금.은.청동 또는 철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다. 금속 그릇은 권위나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 쓰다가 무덤에 함께 묻었다. 사발이나 굽다리접시 같은 작은 그릇은 금.금동.은으로 만들고, 합.초두(鐎斗:액체를 데우는 그릇).항아리 등은 주로 청동으로 만들었다. 그릇의 밑바닥이나 뚜껑에는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나 연호(年號)와 같은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특히 초두와 세발솥은 고구려와 중국과 교류를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당시 지배층에서 사용되었거나 무덤 껴묻거리로 묻혔던 것으로 지배층의 권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발, 금,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금, 보물626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실생활에 사용된 것이라기 보다는 무덤 부장품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토기로 만든 굽다리접시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합, 은, 보물628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은,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사발, 은,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국자, 청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식리총.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표면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실생활에 사용하는 국자라기 보다는 제사에 사용하던 제기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그릇, 청동,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호우총, 새장식 합, 청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식리총

OLYMPUS DIGITAL CAMERA초두, 청동, 금관총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자루솥, 청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식리총, 액체를 데우는 그릇이다. 손잡이는 용, 발은 말발굽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부분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되며, 뚜껑이 있는 것도 있다.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다. 청동으로 만든 초두는 제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이다.

고구려에서 온 그릇
금관총 유물 중 도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 용기 중 하나가 바로 손잡이가 네 개 달린 청동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는 형태나 특징으로 보아 고구려 항아리임이 분명하다. 금관총의 주인공이 사망한 시점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보내 온 물품이었을 것이다. 금관총의 주인공은 고구려와 어떤 관계에 있던 인물어었고, 고구려에서는 이 항아리에 무엇을 담아 보냈을까?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네귀달린 항아리, 청동, 2.청동완, 4.완, 금.은

신라의 무기

신라의 무기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의 무기류와 차이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과 함께 왜.가야 동맹과 큰 전쟁을 치른 5~6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말갖춤은 ’말탄사람토기’에서 잘 살펴볼 수 있으며, 각종 고분에서 금이나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고리자루칼 등이 껴묻거리로 출토되고 있다.

신라의 무기
신라의 무기는 투겁창, 칼, 화살촉 등의 공격용과 갑옷, 투구 등 방어용이 있다. 이 가운데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이나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자루칼은 무기로서의 용도뿐 아니라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특히 세 고리(三環), 세 잎(三葉), 용,봉황 등으로 장식한 고리자루칼은 신라의 지배 아래에 들어온 지방 유력자에게 하사되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라의 무기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칼, 금.은.철,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북 지역(경주 호우총, 경주 구정동 무덤, 경산 임당동)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 큰 칼, 금동, 금관총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투겁창.물미, 철,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북 의성 탑리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신라의 화살과 화살집

OLYMPUS DIGITAL CAMERA화살촉, 철,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북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화살집,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호우총, 복원, 화살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손쉽게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중국의 고서인 『주례』에 귀신을 몰아내는 방상시(方相氏) 모습의 가면으로 알려졌으나 화살집 장식으로 새롭게 알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말갖춤
말갖춤은 말을 안정적으로 타고 내리거나 말을 장식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 안장, 발걸이, 재갈,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이나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말갖춤에는 뛰어난 공예기술이 잘 나타나 있다. 또 말갖춤은 신분을 상징하고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라의 말갖춤

OLYMPUS DIGITAL CAMERA말탄사람토기에서 볼 수 있는 신라의 말갖춤.

OLYMPUS DIGITAL CAMERA말안장꾸미개, 금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식리총, 말 안장의 뒷 가리개에 붙인 금속판으로 좌우에 봉황과 용이 배치되어 있다. 용의 비들이나 발 등이 세밀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말안장꾸미개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말띠드리개, 금동,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북 경

OLYMPUS DIGITAL CAMERA말방울, 청동,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북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 말방울, 청동,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북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말띠꾸미개, 금동,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상도지역

OLYMPUS DIGITAL CAMERA재갈, 금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발걸이, 청동, 삼국시대(신라), 경주 황남대총

일본 열도산 고둥으로 만든 말띠꾸미개
금관총 유물 중 현 일본 규슈 지방 남부와 더 남쪽 바다에 서식하는 ‘이모가이’라는 아열대 고둥 껍데기를 가공해 만든 말띠꾸미개가 있다. 원뿔처럼 생긴 ‘이모가이’의 구멍 주변은 편병하고 소용돌이처럼 둥글게 말려 있는데, 이부분을 다듬어서 말띠꾸미개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데 사용하였다. 금관총 이외에도 황남대총 북분과 천모총 등 신라무덤에서 자주 출토되는 ‘이모가이’는 문헌기록에 나오지 않는 신라와 일본열도 왜의 교류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7.말띠드리개, 금동, 8.말띠꾸매개, 조개,

OLYMPUS DIGITAL CAMERA 9.청동방울, 청동, 구형장식, 금동, 10.말띠꾸미개,금동.유리,

OLYMPUS DIGITAL CAMERA11.말방울, 청동, 12.바둑돌모양 돌,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