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박물관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등운산 고운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2022년 가을 ‘등운사 고운사’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고운사(高雲寺)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최치원이 자신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통일신라말 도선이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후의 사찰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으며 조선중기 이후에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경북지역을 대표하는 5개 사찰 중 하나였다. 소장 유물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가운루, 삼층석탑, 연수전 등이 있다. 전시에는 사찰의 내력을 보여주는 주요 자료들과 함께 고운사에서 머물면서 큰 역할을 했던 고승들의 영정과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1<’등운산 고운사’ 특별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2<고운사 편액 조선말 ~ 근대,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3<대웅전 편액,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4<고금당 편액,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5
<우화루 편액, 조선 1809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6<고운사 중수기 현판, 조선 1887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7<모니극락양전불상개금기, 조선 1858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 중창기 현판, 조선 1902년 추정,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8<계원필경, 조선 1834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계원필경>은 신라 말기 고운사의 중창자인 최치원이 지은 문집으로 총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부터 14건까지는 879년 10월 이후 885년 3월 이전까지의 기록이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천능을 비롯한 중국 각 지역의 반란을 비판한 <토황소격문>이 포함된 글들이 실려 있다. 또한 15권부터 20권까지는 여러 시문 중 불교와 관련한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최치원의 불교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1
<호계첩 목판, 일제강점기 1919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2
<고운사 사적비 탁본,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9<석가불좌상, 조선 전기, 의성 고운사>

고운사 나한전에 봉안된 불상이다. 고운사 나한전은 원래 모니전(牟尼殿)이였으나 1990년대 현재의 대웅보전이 건립되며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참잠한 상호나, 무릎이 낮고 상체가 긴 상의 비례 등으로 보아 조선 전기인 15~16세기 사이에 조성된 상으로 보인다. 석조불좌상과 삼층석탑을 제외하고 17세기 이전의 성보를 찾아보기 힘든 고운사에서 나한전의 석가불좌상은 조선 전기 사찰의 연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찰령 개정에 따른 고운사 재산대장>에는 높이 3자(약 90cm)로 1482년의 제작시기가 남아 있는 석가불좌상 1구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나한전 상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0<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선 1695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 좌상의 주존이다. 신유한의 고운사사적비(1729)에는 1695년(숙종21)에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각승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상의 형식적 특징, 팔각 대좌 내부 천인상의 표 현으로 보아 탁밀 스님의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추정된다.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던 시기의 상이기 때문에 조각승의선정 및 불사 전반에 깊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2<우순풍조만민함락 원패,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이 패는 방형의 패좌에 3엽의 연꽃을 조각하였고, 패두와 패신은 단청으로 채색하였다. 크기가 작고 장엄과 구조면에서 간략화되며, 하나의 나무로 패두와 패신을 제작하고 패좌로 결합하는 형태는 조선 후기 특징을 잘 보여준다. 덧칠된 패액의 붉은 바탕 아래로 ‘세자저하수만세’의 명문이 보이는 부분이 있어 본래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1<왕비전하수제년 전패, 조선 후기, 의성 고운사>

불전 내 불단 위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한 삼전패 중 하나이다. 패두는 왕실을 상징하는 용과 그름무늬를 깊게 새기고 금색.청색.적생 등 화려한 단청으로 마감하였다. 패신은 꽃무늬와 잎사귀문양을 새겼으며, 중앙에는 ‘왕비전하수제년’ 문구를 넣은 후 금칠로 마무리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3<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조선 1670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4<지장보살>

신유한의 고운사중수기(1729)에는 1670년(현종11)에 명부전과 존상들이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장보살상이 두 손을 낮게 두고 있는 점, 정방형의 얼굴에 기다란 귀와 매부리코로 대표되는 상호 표현 등에서 단응 스님의 특징을 보여 조각승을 추정해 볼 수 있다.이 시기는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며 불사를 관장하던 시기로 명부존상의 조성과 신경 스님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시왕상의 착의나 의습선 표현이 화려하며, 의복과 의자 내부에 다양한 인물상이 표현되어 있어 독특하다. 최근 이운 과정에서 지장보살좌상 대좌 하단 좌복의 명문에 1725년(영조1) 지장보살을 중수한 기록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3
<아미타불회도, 조선 1701년, 삼베에 채색,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5<아미타불>

고운사 극락전 아미타불회도로 소영 신경 스님이 증명하고 혜명 스님과 도문 스님이 조성하였다. 이 그림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6위의 보살이 시립해 있고, 두광 주변에는 2위의 타방불,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포함한 19대 제자, 북방다문천왕와 서방광목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고운사의 아미타불회도를 조성한 혜명스님과 도문스님은 17세말부터 18세기 초까지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소용돌이 형태의 금니문양과 오색화문의 표현은 같은 시기에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해웅, 상린, 의균 스님의 특징으로 화풍의 굘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6<사십이수관음보살도, 조선 1828년,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천수천안관음보살은 모든 병과 악업, 중죄를 없애주고 안락과 수명, 부귀를 주는 관음으로 널리 신앙된다. 경전에서는 ‘서수천안’의 형상에 대해 규정하지 않았으나 42개의손으로 표현되며 각 손마다 한 개의 눈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 앞의 손으 ㄴ수인을 결하고 있고, 18쌍의 손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각각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의 양쪽 허리 부근에는 촉지인과 설법인을 취한 화불이 표현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퇴운 신겸 스님은 경상북도 문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불산화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하였다. 활동 후반기에는 고운사에 주석하며 고운사의 불화 전반을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7<쌍수암 영산회상도, 조선 1887년,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쌍수암 영산회상도는 기존 영산회상도와는 다르게 난간을 두른 넓은 육각형의 단 안에 사각형의 대좌를 놓고 석가모니불과 보살, 십육나한을 비롯한 여러 존상들을 배치하였다. 난간 아래에는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을 표현하였다. 화면 전체적으로 적색과 군청색 계통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화기이 기록을 통해 하은 응상 스님을 비롯하여 한규, 범임, 서휘, 소현, 봉화 스님이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사불산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응상 스님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8<불영패, 조선 1696년, 의성 고운사>

불영패는 둥근 놋쇄거울과 불꽃무늬 장식, 대좌의 요소를 갖춘 경대의전형적인 형식을 하고 있으나, 명문에 ‘불영패(佛影牌)’라는 명칭이 있어 부처님의 모습이 어린 패, 즉 불성이 비치는 명경로 볼 수 있다. 이 패의 명문을 통해 업경대와 다른 명경대가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패의 바닥면에는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조각승 탁밀 스님과 보웅 스님이 조성에 참여한 기록이 있어, 불교 의식구와 공양구 제작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운사의 역사와 성보
의성 등운산 고운사(孤雲寺)는 사찰을 관통하는 계곡이 여러 전각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681년 창건된 이후 오랜 기간 법등을 이어 가면서 계곡을 따라 지금의 권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계곡은 현재 일부 복개하였으나, 가운루 아래로 계곡의 모습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고운사의 석조불좌상과 삼층석탑은 사찰의 창건 시기와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17세기부터는 고운사의 확장되는 사세를 살펴볼 수 있다. 1670년 명부전 건립, 1695년 극락전 아미타불좌상, 1701년 아미타불회도 등 고운사를 대표하는 성보들이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고운사는 1835년 큰 화재를 입고 여러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이를 중수하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이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본사로 영남 북주 지역의 사찰을 이끌고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9<각항등록, 조선 1802년, 의성 고운사>

<각항등록>은 1802년 고운사와 고운사의 말사가 조선 왕실과 관아에 다양한 물품을 진상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책의 본문에는 본사인 고운사를 시작으로 수정사, 운람사, 지보사, 주월사 등의 사찰에서 다양한 물품을 관납한 것을 차례로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통해 19세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고운사가 여러 사찰을 관할한 사실과 조선 후기 사원 경제에서 사찰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 파악할 수 있어 의미가큰 자료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0<어회계안, 조선 1895년 추정, 의성 고운사>

범패, 범음, 범무 등 불교 의식 작법을 어산(魚山)이라 칭한다. 어회계는 어장 스님들의 모임으로, <어회계안>은 모임원의 명단을 적어놓은 것이다. 서문에 어산은 공덕을 비롯하여 흥기를 기원하는 발원이 담겨 있으며, 좌목을 두어 스님들의 이름을 적었다. 여러 해에 걸쳐 기록된 듯 첫 좌목에 기입된 스님의 이름 아래에는 열반을 뜻하는 ‘적’이나 탈퇴를 뜻하는 ‘퇴’가 적혀 있으며, 새로 가입한 경우에는 가입한 해와 가입한 스님들의 이름을 적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1<추원록, 조선 1888년, 의성 고운사>

<추원록>은 재(齋)나 불공 시에 명복을 빌기 위한 영기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고운사 운수암에서 사용된 것이다. ‘영각 좌목’이라는 제를 보아 영각(影閣_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사명 유정 스님부터 함흥 치능 스님까지 추원을 비는 선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뒷부분에는 명복을 비는 소를 적어 의례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월 영민 스님
수월 영민(1817~1893) 스님은 함홍 치능 스님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고운사의 고승이다. 영민 스님은 편양 언기 스님의 4세손인 기성 쾌선 스님의 법맥을 이은 스님이다. 스님의 비명에는 수행자로서의 모습이 주로 확인되는데, 남암에서 결사를 조직하여 수행하고, 10년간 면벽수행을 진행하여 생전에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고운사의 산내 암자인 쌍수암에 주석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현대 고승인 용성(1864~1940) 스님에게 지도한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2<수월대사영찬 현판, 대한제국 1898년, 의성 고운사>

영찬은 진영에 기록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수월대사영찬의 경우 별도로 현판을 제작하여 진영화 함께 봉안하였다. 영찬에는 64과의 사리가 출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리학자 방산거사 허훈이 글을 지었으며, 수월당영민대사비 음기에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현판의 뒷면에 1898년 4월에 새겼다는 묵서가 남아 있어 영민 스님이 입적하신 후에 현판이 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4
<수월당대선사영민진영, 근대,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수월 영민 스님의 진영이다. 수월 영민스님은 깨달음의 상징적 결정체인 사리가 생전에 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은 1833년 17세에 의성 고운사로 출가하였다. 10년 동안 면벽 수도를 수행했고,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스승들을 찾아 정진하였다. 끝없는 수행으로 약 64과의 사리가 출현했으며 1893년 세납 71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3<화엄경도,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화엄경도는 80권본 <대방광불화엄경>의 내용을 간략하게 도해한 그림이다. 화면의 중하단부에는 일곱 개의 원 내부에 <화엄경>을 설한 일곱 곳과 37품의 품제, 설주보살이 명기되어 화엄경과 관련된 불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의 외곽부에는 호법신중이, 내부에는 불보살의 명호가 확인되는데, 이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화엄성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운사 소장 화엄경도는 예천 용문사의 화장찰해도(1869)와 같이 19세기 영남 북부지역에 유행했던 화엄 신앙을 반영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5
<함홍당대선사치능진영, 조선후기,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진영에 묘사된 함홍 치능 스님은 먹색 장삼과 홍가사를 수하고 화면 왼편을 바라보며 돗자리 위에 단정히 앉아 있다. 왼손은 주장자를 쥐고 염주를 건 오른손은 여러 경전을 쌓은 경상 위에 올려두었다. 펼쳐진 경전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이다. 영제 바로 옆에는 찬(讚)도 남아 있다. 치능 스님이 직접 지은 찬으로, 찬에는 ‘불자를 든 모습이 7할 쯤 비슷하다.’라고 하였으나 진영 속 스님은 주장자를 쥐고 있어 상이하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6
<차사 창건주의상조사진영, 일제강점기 1915년,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의상 스님은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국내에 10여개의 화엄종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 사상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러한 의상 스님은 681년 등운산 골짜기에 고운사를 창건하였다 전한다. 그림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의상 스님은 먹색 장삼을 입고 왼손에는 붉은색의 주장자를 들고 있다. 스님은 파란 바탕을 배경으로 화문석 위에 가부좌의 자세이며, 가는 필치로 날카로우며 강직한 얼굴이 묘사되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7
<송운당사명대사진영, 조선 1768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사명 유정 스님의 진영이다. 유정 스님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인 휴정 스님에 이어 승병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정 스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 고운사를 식량비축을 비롯해 부상병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승병들의 기지 역할로 이용했다고 전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4<대방광불화엄경소초>

소영 신경 스님
소영 신경(미상~1706) 스님은 환적 의천 스님의 법맥을 이었으며, 문도인 단응, 탁밀 스님 등과 함께 다양한 불사를 진행하였다. 이 스님들은 예천 용문사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84)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보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성보 중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1670), 극락전의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대세지보살상(1695), 아미타불회도(1701)는 신경 스님과 문도들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다. 또한 선종소영대사비가 고운사 승탑원에 남아 있어 신경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경 스님은 불사의 후원자로서 대곡사, 운람사, 광흥사 등 주변 사찰의 성보를 새롭게 조성하거나 중수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6<경복오본산고금기요, 일제강점기 1937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경북오본산고금기요>는 1937년 경북불교협회에서 발행한 책으로, 경상북도 5개 본산인 의성 고운사, 영천 은해사, 대구 동화사, 문경 김룡사, 경주 기림사의 주요 사건을 수록하였다. 각 사찰의 연포.문서.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개 본산의 창건과 중수, 각 사찰에서 입적한 고승들이 비문, 탑.불화.불상의 조성을 시간순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고운사 목에는 사찰의 창건부터 조선후기까지의 역사 자료를 집성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고운사의 연혁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7<청천집 권5, 조선 1770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조선 후기의 문인인 청천 신유한(1681~1752)의 문집이다. <청천집>에는 1729년 고운사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고운사사적비의 비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851년 의상대사가 고운사를 창건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려 초 운주화상과 천우조사의 중수, 1668년 가허루의 중수, 1670년 명부전 건립, 1695년 극락전 보수 등의 내용이 있어 고운사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8<대곡사 소조십육나한상, 조선 1694년, 의성 대곡사>

대곡사 나한전에 봉안된 나한상과 범천상이다. 대곡사 나한전에는 본래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의 삼존과 십육나한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55년 이후 전각이 해체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나한전의 존상배치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대곡사 나한전의 존상 배치와 제작 시기르 추정한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연구에 의하면 나한전의 존상들은 1964년에 소영 신경 스님의 증명으로 탁밀스님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조각승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9<운람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유물, 의성 운람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0<뒷편>

운람사 보광전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로,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11세기)과 더불어 총 27종 165점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중수기는 총 3매가 이어져 있는데, 각각 1602년.1704년.1741년에 불상을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의 중수 가운데 1704년에 거행된 불사에는 증명법사 신경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데, 이는 소영 신경 스님 법명의 다른 한자 표기이다. 신경 스님이 고운사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에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1<한글서간,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신민 스님이 응화원, 밀화원, 웅화원에게 쓴 편지이다. 응화원, 밀화원, 웅화원은 시왕상 발원문에 등장하는 단응, 탁밀, 보웅 스님으로 추정되는데 각 명칭은 친근한 의미로 부르는 호칭이다. 서간인 편지글은 사찰을 혼란스럽게 한 죄인에 대해 죄를 묻고 이를 추궁해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2<광흥사 시왕상 발원문,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광흥사 시왕상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이다. 발원문은 총 2점이 발견되었는데, 시주질에서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같다. 강희 31년(1692) 7월에 광흥사 시왕을 조성하였음을 밝히고 여러 물건의 목록, 시주한 시주자들과 상을 조성한 스님들을 밝혔다. 소영 신경스님을 증명으로 하여 단응, 탁밀 덕륜, 보웅 스님 등이 시왕상을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3<광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광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 명부 존상들은 발원문이 남아 있어, 1692년 7월 그믐날에 안동 학가산 광흥사에서 증명법사 소영 신경 스님과 단용, 탁밀 스님 등 15명의 스님들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운사 명부 존상과 비교하면 세부적인 표현에서 고운사 상의 특징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머리의 크기가 작아지고, 하체 부분이 세장하게 표현되어 신체 비례가 확연하게 변화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함홍 치능 스님
함홍 치능(1805~1878) 스님은 환성 지안 스님과 포월 초민 스님의 법맥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치능 스님은 산내암자인 운수암에 주석하였는데, 고운사에 강원을 열었으며 강백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화엄경도나 <대방광불화엄경소초> 등은 스님이 개설하였던 강원과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4<함홍당집, 조선 1897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함홍당집>은 함홍 치능 스님의 시문을 엮은 문집이다. 문집에 수록된 <행장>에 따르면, 스님은 안동에서 태어나 13세에 고운사에 주석하던 숙부이자 환성 지안 스님의 8세손인 송암 의탄 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스님은 출가 이후에도 유학자에게 경사자집을 수학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문집에는 사대부와도 두루 교유하며 주고받은 서정적인 내용의 시가 다수 남아 있는데, 유불(儒佛)에 통달하였던 스님의 넓은 견문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5<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선사함홍하상헌토기 현판, 조선 1880년, 의성 고운사>

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치능 스님이 지은 시를 현판에 새겼다. 역대 고승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고운사의 영각을 새로 지었는데 이떄의 소회를 밝힌 시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근차판상운 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치능 스님이 우회루 현판의 운을 따라 지은 시이다. 우회루의 이름에서 착안한 듯 이에서는 도교와 관련된 제재도 있어 눈길을 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6<선사함홍하상헌토기 현판, 조선 1880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7<운우삼영각상량문, 1868년, 의성 고운사>

함홍 치능 스님은 고운사으 산내 암자인 운수암과도 인연이 깊었다. <함홍당집>의 <행장>에 따르면 1835년에 소실했던 운수암을 몸소 재건하며 사찰으 기강을 엄숙히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만년을 보낸 만성이라 편액한 전각은 운암 옆이었다고 하였는데, 운암은 운수암으로 추정된다. 운수암영각상량문은 세로로 긴 한 장의 종이에 진한 먹으로 상량을 축원하는 글과 본암질 등을 가지런하게 적어 내렸다. 1868년 3월에 28일에 영각의 기둥을 세우고 4월 2일에 상량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치능 스님이 편찬한 사실도 잘 남아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8<고운사 운수암 등촉,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서문에는 부처님 앞에 등 또는 초를 밝히는 공덕을 설명하고 갑진 12월 환허 지한 스님이 서문을 지은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밖에 성암 우민, 만승 의홍 스님 등 역대 큰스님에게 헌재한 사실과 더불어 두천, 경묵 스님과 재가자인 권영주의 이름이 함께 남아있다. 등촉 공양의 공덕은 물론, 고운사의 법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운사의 고승
고운사는 여러 스님들이 주석하시며 오랜 기간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비롯한 스님들의 기록은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고운사의 사격이 확립되는 17세기 이후의 스님들을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소영 신경 스님은 고운사의 불사를 주관하며 여러 전각을 중수하고 존상을 봉안하였으며, 주변 지역 사찰까지 다양한 불사를 주관하였다. 함흥 치능 스님은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강백이자 문장가로 스님께 배움을 청하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수월 영민 스님은 수행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생전에 몸에서 난 사리가 나온 이적이 알려져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2022년
  2. ‘고운사 (孤雲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고운사’,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에트루리아] 에트루리아인의 삶

에트루리아인이 그리스, 페니키아와 교류를 통해 발전했던 기원전 8~6세기를 동방화시기라고 한다. 이 전사적 성격의 귀족들이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신흥귀족들을 지중해 무역로를 통해 많은 부를 얻었으며  점차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에트루리아인은 수공업이 발달하여 세련된 물건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금속세공이 뛰어났다. 그리스 도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에트루리아 도기들은 명성이 높았으며 부케로는 금속제품이 갖는 특징을 잘 표현하여 에트루리아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손꼽혔다.

OLYMPUS DIGITAL CAMERA
<모자상(Koutrophos Maffei), 기원전 3세기 전반, 대리석,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그리스 양식의 추모용 조각상으로 키톤을 입고 아이를 안은 어머니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던 추모비입니다. 여인의 오른팔에 그녀의 이름인 ‘라르티아 벨키네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문화양식은 에트루리아가 그리스 세계와 접촉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조각상은 볼테라에서 발견된 후, 처음으로 외부에 전시되는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에트루리아인의 삶
에트루리아인들은 문화와 기술 외에도 사회 조직면에서 의미있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초기 빌노바 시기를 지나 그리스, 페니키아와의 교류를 거쳐 왕의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를 동방화 시기(기원전 8~6세기)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귀족들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했고, 근동에서 건너온 화려한 사치품과 문화에 심취했습니다. 에트루리아의 신흥 귀족들은 수로를 따라 이루어진 무역로를 지배하여 많은 부를 얻었으며, 복잡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벽돌지붕 건물에 거주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을 위한 거대한 무덤을 짓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자치권을 지닌 도시국가로 성장해 갔고, 이를 통해 점차 복잡한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거대한 성지를 중심으로 방어벽을 구축하고, 자신들만의 자치적인 사회질서를 도입했습니다. 또한 종교행사를 자주 열었습니다. 에트루리아인의 삶은 축제, 무용, 음악 문화, 교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무역, 항해, 전쟁에 적극적이면서도, 문화적 삶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고대 지중해 문명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에트루리아 알파벳
에트루리아가 그리스나 로마와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에트루리아어는 고대 유럽어의 모체가 된 인도-유럽 어족이 확산되기 이전에, 선사시대 지중해 전체로 퍼진 언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에트루리아 금석문이 번역되었는데, 주로 기증 명문 또는 장례 헌정 글, 종교적인 글, 법적인 글 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알파벳은 에우베이(Eubei)의 고대 그리스 언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기원전 7세기에는 일탈리아 남부로 전해졌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부케로(Bucchero)는 에트루리아에서 생산된 도기이다. 에트루리아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여겨졌던 부케로는 도기를 굽는 독특한 방식으로 광택이 나는 검은 표면이 특징이다. 부케로의 특징 중 하나는 용기의 두께가 매우 얇아 금속용기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새로운 기형의 도기들이 제작되는데 기여했다.

OLYMPUS DIGITAL CAMERA
<1. 스탐노스(Stamnoid Olia), 기원전 7세기 말, 부케로, 토스카나, 시에나, 라폴라노 테르메,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북부 에트루리아 부케로의 형태를 띤 스탐노스입니다. 이러한 도기는 연회장에서 포도주를 마시는데 쓰이는 크라테르처럼 사용되지만, 때로는 유골단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도기는 홈이 세로로 길게 난 손잡이에 넓은 몸통을 지니고 있으며, 어깨 부분에 종려나뭇잎 무늬를, 그 밑으로 물결무늬를 새겨 놓았습니다. 세 마리의 고양이 머리가 뚜껑의 손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2. 히드리아(Hyudria), 기원전 6세기 중반, 부케로, 토스카나 시에나 라폴라노 테르메,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히드리아는 물을 운반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용기입니다. 정교함이 엿보이는 이 유물은 스핑크스, 날개달린 말, 고양이 등 가상과 실재의 다양한 동물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종려나뭇잎 무늬가 몸통에 있고, 사람 머리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했습니다. 뚜껑에는 어린 수탉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북부 에트루리아의 전형적인 부케로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3. 암포라, 기원전 6세기 전반, 부케로, 토스카나 시에나 라폴라노 테르메,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부케로’는 진정한 에트루리아의 도기로 정의될 정도로 에트루리아 장인들이 제작한 가장 고유하고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러한 도기는 산소 공급을 줄이는 가마 제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이 암포라에는 앉아 있는 여성을 향해 이동하는 수레와 행렬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4. 크라테르, 기원전 4세기 말, 흑색도기,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기원전 4세기 말 ~ 기원전 1세기 전반 이탈리아에 널리 퍼졌던 특정 형태의 도기입니다. 그리스 아티카에서 제작하여 지중해에 수출했던 도기의 모조품입니다. 검은색으로 도색한 도기들은 주로 연회용으로 제작되었고, 검은색 도료가 두껍게 칠해져 있습니다. 볼테라는 가장 고급스럽고 세련된 제품을 제작하던 주요 생산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5. 파테라(Patera), 기원전 3세기 중반 ~ 2세기 초, 흑색도기,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중심에 돌기가 있는 얕은 컵으로, 손잡이와 굽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로 술을 마실 때나, 신에게 술을 올릴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덤벽화나 유골함 뚜껑에 새겨진 연회장면 등에 많이 등장합니다.그리스에서는 피알레(Phiale)라 불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에트루리아의 생산품
에크루리아인들은 탁월한 기술로 세련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금속 세공에 뛰어나서 다방면에 걸쳐 정교한 청동제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리스 도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에트루리아 도기들은 기원전 7세기 말부터 널리 알려졌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부케로라 불리는 에트루리아 도기는 일종의 국가 도기로 윤이 나는 검정색으로 도색하여 금속제품이 갖는 특징을 잘 재현하였습니다. 부케로는 포도주와 함께 에트루리아의 주요한 무역 품목이 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에트루리아 무덤에서는 에트루리아 귀족들이 화려했던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부집게, 부삽 같은 난로 도구는 연회의식에서 사용되었던 도구들이다. 연회는 축제 기념일, 결혼, 장례 등 중요한 행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 꼬챙이, 2. 부집게, 3. 부삽, 기원전 7세기, 청동, 토스카나 베툴로니아,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부집게, 부삽, 불꼬챙이 등 난로 도구는 동방화 시기의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이 난로 도구는 연회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에트루리아 귀족들의 호화로운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연회 의식은 그리스 세계와 접촉하면서 에트루리아로 유입된 것 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4. 장작받침대, 기원전 7세기, 철, 옴브리아 오르비에토,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네 다리와 꼬리 등 동물의 모습을 장식한 장작받침대입니다. 이러한 장작 받침대는 동방화시기에 만들어진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구는 불을 피우는 데 사용되는 꼬챙이, 집게발, 부집게, 부삽 등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5. 키아토스, 기원전 4세기 말 ~ 3세기 중반, 청동, 토스카나 포폴로니아,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채, 기원전 4세기 말 ~ 3세기 중반, 청동, 토스카나 포폴로니아,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7. 손잡이 달린 용기, 기원전 4세기 말 ~ 3세기 중반, 청동, 토스카나 포폴로니아,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뚜껑있는 그릇, 청동, 라치오,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9. 솥, 기원전 6세기 후반, 청동, 움브리아, 오르비에토,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청동으로 만든 냄비, 채, 키아토스(국자 겸 잔)는 헬레니즘 시대의 무덤에서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스빈다. 아마도 연회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회 의식은 에트루리아 귀족들이 동맹을 맺고 가족 간 우애를 다지며, 축제, 기념일, 결혼, 장례식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장이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1. 함(Pyx), 기원전 7세기 중반, 청동,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컵, 기원전 7세기 전반, 청동,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3. 아스코스(Askos), 기원전 7세기 전반, 청동,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4. 칼, 5. 쇠창, 기원전 7세기 전반, 철.청동, 토스카나 피사,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네크로폴리스 카살리아 돌방무덤의 출토품입니다. 이 무덤은 처음에 도굴꾼에 의해 발견됐지만, 나중에 정식 발굴되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청동으로 만든 여러 가지 연회용품들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출토품으로 보아 귀족 가문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그 중에서도 작은 드리개가 달린 항아리, 굽이 달린 컵, 얇은 사슬과 드리개들을 장식한 뚜껑달린 용기가 눈에 띕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6. 전차모형, 임파스토기법, 토스카나 피렌체 비센지오, 피렌체 국립고고학박물관>

두세 마리의 말이 끄는 이륜전차는 주로 전장에서 사용되는 빠른 이동수단입니다. 전차 모형이 무덤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망자가 전사였음을 강조한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7. 재갈, 기원전 7세기, 청동, 토스카나 베툴로니아,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재갈과 같은 말갖춤은 동방화시기 에트루리아 귀족의 무덤에서 흔히 발견됩니다. 베툴로니아 지역은 말갖춤 생산의 중심지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귀족사회의 발전
에트루리아 귀족사회에서는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귀족 여성들은 남성과 함께 연회에 참석 하는 등 사회 내에서의 지위가 매우 높았으며, 모계 조상의 이름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을 짓기도 했습니다. 에트루리아 사회에서 연회는 귀족들이 자신들을 과시하는 매우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이들은 왼쪽으로 반쯤 기대어 먹고 마셨는데, 이는 기원전 7세기 그리스와 근동지역에서 유래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에트루리아의 연회는 놀이, 춤, 의례 외에도 서로 동맹을 맺고 우애를 다지는 기회이자 축제, 기념일, 결혼, 장례 등과 같이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인생의 장이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위키백과,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에트루리아] 에트루리아 문명과 신전 건축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19년 가을 <로마이전, 에트루리아>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그리스, 로마와 함께 고대 지중해 문명의 한축이었던 에크루리아(Etruria)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100년경까지 고대 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지방에 있었던 고대문명이다. 에트루리아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리아아인이었다고 하며, 이탈리아 본토사람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출품된 유물들을 통해 에트루리아인들의 생활모습과 세계관, 종교관, 사후관념 등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로마이전, 에트루리아” 특별전>

OLYMPUS DIGITAL CAMERA
<반트(Vanth), 기원전 4세기말, 응회암, 라치오 투스카니아,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저승의 문지기이자, 사후 세계로 향하는 여정에서 죽은 이들을 호위하던 반트의 신상입니다. 짧은 키톤을 허리에 묶어 엉덩이를 가리고, 다리와 배를 드러냈습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스듬히 기울어진 자세로 보아, 아마도 무덤 입구 양옆에 다른 비슷한 조각품과 대칭으로 서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지중해의 가려진 보물, 에트루리아(Historical and Geographical Context, Etruria)
기원전 10세기, 이탈리아의 중북부, 해안을 끼고 있는 광할한 땅에 새로운 문명이 탄생합니다. 로마에 흡수되기까지 약 1천년 간 지중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문명, 바로 ‘에트루리아 문명’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과 교류하였으며, 화려하고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 언어 등을 발달시켰습니다. 에트루리아는 한 때 이탈리아 북부와 코르시카섬까지도 지배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인 신비의 문명이기도 합니다. 에트루리아의 기원에 대해서는 소아시아의 리디아왕국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는 견해와 이탈리아 원주민이 세웠다는 견해가 있지만 아직도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에서 이들을 종종 ‘해적’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아마도 활발한 해상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 인들은 에트루리아인을 가리켜 티르세노이(Tyrsenoi) 혹은 티레노이(Tyrrhenoi)라 불렀으며, 로마인들은 투크키(Tusci) 혹은 에트루스키(Etrusci)라고 불렀습니다. 이말은 오늘날 이탈리아 중부의 대포적인 지방인 ‘토스카나’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에트루리아는 고대 그리스처럼 12개의 도시들이 연맹을 결성했으며 처음에는 왕들이 통치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어떤 왕조는 과두지배체제로 바뀌었다. 엘바섬의 철과 에트루리아의 구리를 바탕으로 금속세공업과 무역이 발달했으며 숙련된 세공기술이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 이집트, 카르타고 등과 무역활동을 했으며 이탈리아반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와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농촌지역이었던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세력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에트루리아 주요 도시>

12개 도시 연합체, 에트루리아(City States and City Associations)
기원전 8세기 후반,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들과 교류하며 번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동방화 시기에는 부유하고 세련된 귀족이 성장했지만, 그 후 아르카익 시기부터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정치 집합체를 구성하여 도시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주요 도시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자, 도시 간에 다양한 연합이 형성되었고 점차 더 큰 연맹체가 등장했습니다. 볼시니(Vosini) 근방의 에트루리아 도데카폴리스(Etruscan Dodecapolis)는 가장 유명한 연맹 중 하나였는데, 이는 ’12개 마을 연합’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곳은 에트루리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였던 볼툼나 성소(Fomum Voltumnae)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지중해를 둘러싼 문화의 교류(Cultural Exchange in the Mediterranean)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대륙에 둘러싸인 바다, 지중해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바닷길을 이용해서 여러 지역의 다양한 정보와 상품이 오고 갔으며,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금과 보석을 수출하였고, 그리스는 올리브를 수출하였습니다. 에트루리아는 올리브와 포도주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치품을 만들어 교역했는데, 특히 엘바 섬의 풍부한 철자원은 에트루리아 번영의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항해술과 금속 다루는 기술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여러 지역과 활발한 문화 교류를 이어 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오디세우스아 사이렌이 묘사된 유골함(Cinerary Urn Sarcophagus: Odysseus and the Sirens), 기원전 2세기 후반, 설화석고,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볼테라 네크로 볼리스의 거대한 돌방무덤에서 발견된 유골단지입니다. 호메로스가 쓴 그리스 서사 <오디세이>의 일화 중 사이렌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을 현혹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한 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이렌과, 이에 맞서 현혹되지 않으려는 오디세우스 일행을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선원에게 귀를 막고 노를 젓게 한 뒤, 자신은 돛대에 묶어 난관을 헤쳐 나가려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1. 코린트식 컵(Corinthian Kotyle), 기원전 6세기 전반, 테라코타,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코린트식 도기는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의 최대 무역품이었습니다. 코린트식 도기는 신화 속 이야기뿐만 아니라 연꽃이나 종려나뭇잎 등 화려한 무늬를 장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코린트식 도기가 에트루리아로 유입되었고, 에트루리아 현지에서는 코린트 양식의 장식무늬와 형태를 재현한 이른바 ‘에트루리아-코린트식 도기’가 탄생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암포라(Amphora)는 고대 유럽에서 쓰이는 특이한 형태의 용기이다. 액체와 고체를 막론하고 다양한 물품을 저장하고 운송하던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포도를 담는데 사용했다.

OLYMPUS DIGITAL CAMERA
<2. 아테나식 흑화 암포라(Attic Amphora with Black Figures), 기원전 530~520, 테라코타,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반대편 모습>

에트루리아에서는 기원전 6세기 전반부터 그리스 아테네에서 생산된 도기를 수입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흑하식 도기가 유행했지만,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적화식 도기가 유행합니다. 아테네에서 생산된 도기 (아티카 도기)에는 주로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의 아내인 아리아드네가 포도가 가득한 곳에서 황소를 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3. 아테네식 적화 스탐노스(Attic Stamnos with Red Figures), 기원전 5세기 전반, 테라코타, 토스카나 시에나 키우시,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반대편 모습>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장면을 담은 스탐노스입니다. 한쪽면에는 디오니소스와 그를 따르는 여신 마이나데스가 양 옆에 서 있습니다. 다른 면에는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두 명의 사티로스 사이에 헤라클레스를 묘사해 놓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에트루리아에서는 고대 그리스처럼 많은 신전들이 세워졌지만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로마시대 기록이나 건물터, 신전모형 등을 통해서 신전은 사각형태로 지어졌는데 오늘날 지붕이 있는 목조건축물과 비슷한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동양건축물과는 달리 ‘人’자 형태를 하고 있는 방향을 정면으로 사용했으며 다양한 구성요소들로 장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에트루리아 신전>

OLYMPUS DIGITAL CAMERA<에트루리아 신전의 구성요소>

  • 출입계단(Entrance stair): 주로 신전 건축물의 앞면에만 위치하는 계단
  • 포디움(Podium): 사각형의 높은 석조 기단
  • 프로나오스(Pronaos): 열주가 세워진 신전 입구
  • 토스카나 기둥(Tuscan colums): 에트루리아 건축의 전형인 토스카나 기둥은 그리스 도리아 양식의 단순화된 형식
  • 셀라(Cellae): 신상을 안치하는 내부 공간
  • 페디먼트(Pediment): 신전 앞면 위의 삼각형 부분
  • 중심 아크테리온(Main acroterion): 페디먼트의 가장 윗부분에 있는 장식물
  • 아크테리온 조각상(Acroterial statues): 지붕 장식물
  • 장식 기와(Antefixes): 지붕의 기와를 꾸미는 세로형의 건축요소

에트루리아 신전 건축의 흔적
에트루리아의 신전은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건물의 기단을 제외하고는 풍화되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그의 저서에 “에트루리아의 신전은 사각형의 행태로 지어졌다. 너비는 길이보다 약간 짧고, 앞부분이 반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뒷부분의 반은 세 명의 신을 위한 세 개의 방으로 나뉜다.”고 적었습니다. 사제들은 정면 계단을 통해 사원을 드나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신전 모양 유골함(Cinerary Urn in the Shape of a Temple), 기원전 3세기, 테라코타, 토스카나 피사 라파르벨로,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사각형 몸체에 경사진 지붕을 갖춘 작은 신전 모양의 유골함입니다. 매끈한 벽과 이오니아식 기둥 머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페디먼트는 개방된 형태로, 수평틀 위에 장식 기와가 일렬로 줄지어 있습니다. 페디먼트의 중앙 윗 부분을 장식한 장식판을 보면 불치의 작은 시전의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신과 인간의 안식처, 신전(The Temple)
신전은 하늘에 있는 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해 땅 위에 지은 성스러운 건물이었습니다. 에트루리아의 신전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성이 중시되었습니다. 계단은 대부분 정면에 설치되었습니다. 돌기둥은 네 개의 기둥만으로 구성되며, 기둥 사이의 간경이 넓습니다. 지붕은 나무로 씌운 후 테라코타로 덮었습니다. 지붕의 마루나 페디먼트에는 큰 장식물이 세워졌습니다. 신전 안에는 다양한 신상을 모셨으며, 이러한 에트루리아 신전 구조는 로마의 신전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고문헌, 신전 터, 장식 기와, 신전 모양의 유골함 등으로 에트루리아 신전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1. 여성 인물이 묘사된 장식 기와, 2. 여성 인물이 묘사된 장식 기와>

OLYMPUS DIGITAL CAMERA<3. 두 인물이 묘사된 장식 기와, 4. 남성 인물이 묘사된 장식기와, 기원전 3~2세기, 테라코타, 토스카나 피사 볼테라,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장식 기와는 신전 지붕보의 가장자리를 보호하거나, 기와의 끝부분을 마감하는 테라코타 장식입니다. 무늬가 새겨진 이 장식 기와는 긴 키톤과 망토를 입은 세 명이 여성과 두쌍의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온전한 상태로 보존된 한 점의 장식 기와에는 왼편에 가슴을 드러낸 남성이 팔로 여성을 잡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 점은 남자 한 명만 남아 있는데, 현재는 다리만 모이는 어떤 인물과 싸우고 있는 장면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5. 멘르바가 묘사된 장식기와, 기원전 2세기 전반, 테라코타, 라치오 볼세나,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기다란 키톤을 입고 투구와 방패로 무장한 멘르바는 몸통은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나 머리는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옆에는 망토를 두른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 소조상 아래의 명문을 살펴보면, 이 인물이 치렌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치렌스는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는 에트루리아의 여신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1.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가 묘시된 장식판, 기원전 3~2세기, 테라코타, 라치오 볼치,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신전의 기둥 윗부분을 장식했던 판입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와 그의 아내 아리아드네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하에 따르면,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는 연인 테세우스가 미로의 괴물을 죽이고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나, 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디오니소스는 그녀를 도와주며, 아내로 맞이합니다. 아리아드네는 나중에 여신으로 추앙받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2~7, 장식기와, 기원전 3~2세기, 테라코타, 라치오 볼치, 필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신전은 우리나라 사찰 불천처럼 나무로 만든 보에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나무로 만든 부분에는 채색된 테라코타로 장식하였다. 불전에서 목재에 화려한 단청무늬로 장식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식물문양과 사람의 모습 등이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7, 장식기와, 기원전 3~2세기, 테라코타, 라치오 볼치, 필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화관을 두르고 그 위로 얼기설기 연결된 종려 나뭇잎이 마치 후광이 비치듯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여서의 머리는 기원전 5~3세기 에트루리아에서 널리 유행하던 양식입니다. 디오니소스와 그의 아내 아리아드네가 묘사된 페디먼트 장식판에 연결됐던 것으로 보아, 이 여성은 이오니소스를 따르는 마인데스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8~15. 장식기와 기원전 3~2세기, 16~20. 장식기와 기원전 3~2세기, 테라코타, 라치오 볼치,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볼치 신전의 페디먼트(Pediment of Volci)
볼치 신전의 페디먼트를 장식했던 테라코타입니다. 에트루리아의 신전은 나무로 제작된 보에 기와 지붕을 얹었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부분은 채색된 테라코타로 마감하여 내구성을 갖추었습니다. 디오니소스와 그의 아내 아리아드네가 표현된 것으로 보아 디오니소스를 위한 신전의 장식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로마이전, 에트루리아” 특별전>

전시를 열며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대 지중해 문명의 한 축이었던 에트루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특별전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를 개최합니다.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100년경까지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입니다.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지중해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역사가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른 태곳적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베일에 싸인 그들의 기원과 언어, 종교는 에트루리아인들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감탄과 매력을 자아냅니다. 로마 문화의 근간을 이루지만 아직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에트루리아. 이번 전시는 에트루리아의 문하를 살피며, 우리의 문화적 시야를 넓히고자 마련 되었습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약 300여점의 전시품에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세계관, 종교관, 사후 관념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천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우리 앞에 펼쳐진 에트루리아의 다양한 유물들은 죽어서도 현재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합니다. 세련되고 신비로운 고대 유럽 문명의 하나로, 로마의 근간을 이룬 에트루리아. 이제 그 문명의 숨결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위키백과, 2022년

 

시안(Xi’an), 섬서역사박물관

  1. [섬서역사박물관] 선사시대 , 앙소문화(仰韶文化)
  2. [섬서역사박물관] 선주(先周), 상대 제후국
  3. [섬서역사박물관] 서주(西周), 예악(禮樂)의 나라
  4. [섬서역사박물관] 서주(西周), 청동 예기(禮器)
  5. [섬서역사박물관] 전국시대, 진(秦)의 건국
  6. [섬서역사박물관] 전국시대, 진(秦)의 성장
  7. [섬서역사박물관] 진(秦), 천하통일
  8. [섬서역사박물관] 진(秦), 여산(驪山)이라 불린 진시황릉
  9. [섬서역사박물관] 한(漢), 수도 장안(長安)
  10. [섬서역사박물관] 한(漢), 농업경제의 발전
  11. [섬서역사박물관] 한(漢), 산업의 발전
  12. [섬서역사박물관] 한(漢), 사회 모습과 기술의 발전
  13. [섬서역사박물관] 한(漢), 대외교류
  14. [섬서역사박물관] 위진.남북조(魏晉, 南北朝), 충돌과 융합
  15. [섬서역사박물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일상생활
  16.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장안성 궁궐과 황릉
  17.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
  18.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금속공예
  19.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당삼채와 자기
  20.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상업의 발달
  21.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복식예술(服飾藝術)
  22.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문화오락
  23.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종교문화
  24. [섬서역사박물관] 수당(隋唐), 실크로드

 

시안(Xi’an), 비림박물관

  1. [시안(Xi'an) 비림박물관] 석대효경 (石臺孝經), 당 현종 글과 글씨가 있는 비석
  2. [시안(Xi'an) 비림박물관] 개성석경(開成石經), 유가 13경전을 새겨놓은 비석
  3. [시안(Xi'an) 비림박물관]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당대 중국에 전파된 기독교를 기록한 비석
  4. [시안(Xi'an) 비림박물관] 도인법사비, 명필 구양통이 글씨를 쓴 비석
  5. [시안(Xi'an) 비림박물관] 황보탄비, 명필 구양순의 대표작
  6. [시안(Xi'an) 비림박물관] 동주삼장성교서비, 명필 저수량이 글씨를 쓴 비석
  7. [시안(Xi'an) 비림박물관] 다보탑감응비(多寶塔感應碑), 명필 안진경의 대표작
  8. [시안(Xi'an) 비림박물관] 2실, 당대 유명 비석들.
  9. [시안(Xi'an) 비림박물관] 사마방잔비(司馬芳殘碑), 예서체
  10. [시안(Xi'an) 비림박물관] 장회각비(藏懷恪碑), 해서체
  11. [시안(Xi'an) 비림박물관] 미원신천시서비(美原神泉詩序碑), 전서체
  12. [시안(Xi'an) 비림박물관] 회소초서천자문(懷素草書千字文), 초서체
  13. [시안(Xi'an) 비림박물관] 3실, 역대 서체들을 살펴볼 수 있는 비석들.
  14. [시안(Xi'an) 비림박물관] 4실, 그림이 새겨진 석각도화(石刻圖畵) 등
  15. [시안(Xi'an) 비림박물관] 석각예술실(石刻藝術室) 동관, 무덤을 장식했던 석물들
  16. [시안(Xi'an) 비림박물관] 석등(石燈), 당나라 사찰을 밝히던 석등
  17. [시안(Xi'an) 비림박물관] 당 경운종(景雲鐘), 시안 종루에 걸려 있던 종
  18. [시안(Xi'an) 비림박물관] 대하석마(大夏石馬), 5호16국시대 유물
  19. [시안(Xi'an) 비림박물관] 전마장(拴馬桩), 말을 묶어 두는 기둥
  20. [시안(Xi'an) 비림박물관] 가성호조비, 공자께 시호를 올린 사실을 알리는 비석
  21. [시안(Xi'an) 비림박물관] 황자안서왕성덕지비, 원나라 송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