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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404호), 영산강 이북 백제 토착세력 무덤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토착세력의 무덤이다. 이곳에는 4개의 큰 봉분이 남아 있으며 발굴.조사결과 32기의 다양한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독무덤, 굴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으로 다양하며 4세기부터 7세기초까지 오랜 세월동안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제신발, 관모, 고리자루큰칼 등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려주는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나주 복암리는 현 나주시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영산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확인된 무덤형태나 유물 등으로 볼 때 영산강 유역으로 진출한 백제세력이 토착세력을 점차 지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404호). 현재 이곳에는 4기의 큰 봉분을 볼 수 있는 옹관묘부터 굴식돌방무덤까지 여러시대의 무덤이 하나의 봉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1호분.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2호분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3호분. 옹관묘, 횡혈식석실묘, 석곽옹관묘 등 7종류의 묘제는 물론 금동신발과 은제관식.큰칼.금귀고리 등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 799점이 출토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4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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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암리 출토 옹관묘

OLYMPUS DIGITAL CAMERA신, 금동, 삼국시대(백제) 6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병,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접시, 삼국시대(백제) 6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칼, 금동.은,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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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복암리 5호분 출토품, 6세기 중엽, 1. 은제 관꾸미개,

OLYMPUS DIGITAL CAMERA2. 은제 허리띠 꾸미개

나주 복암리 고분, 사적 404호,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에는 4기의 고분이 있다. 이 지역은 영산강의 본류를 낀 구릉지대로서 원래 3기 정도가 더 있었으나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3호분에서는 영산강유역에서 확인되는 옹관묘, 횡혈식석실묘, 석곽옹관묘 등 7종류의 묘제는 물론 금동신발과 은제관식.큰칼.금귀고리 등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 799점이 출토되었다. 이와같이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것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복암리 3호분은 옹관(토기 항아리관) 중에서 이른 시기(3세기)에 해당하는 옹관묘를 비롯하여 횡혈식석실분(굴식 돌방무덤) 중에는 7세기 전반끼지 내려오는 묘제가 한분구 안에서 확인되고 있어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까지 400여년간 동일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집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한분구 안에서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는 복합묘제고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이다. 이를 통해서 영산강유역에서 나타나는 다장과 대형분구의 성토방법.과정.각 묘제간의 관계, 옹관묘와 석실분의 변천과정.매장방법 및 부장유물, 일본과의 관계, 영산강유역 토착세력과 백제와의 관계 등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영산강유역 고대사 연구와 규명에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고분이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4. 안내문, 국립중앙박물관

나주 반남고분군(사적 513호), 영산강유역 백제 토착세력 무덤

전남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남아 있는 반남고분군(사적 513호)이다. 영산강 하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 비교적 넓은 지역에 40여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에는 다른지역에서는 없는 대형옹관을 비롯하여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른 시기의 것은 땅을 파서 옹관을 안치한 후 봉분을 쌓았으나 후대에는 봉분을 쌓고 정상부에 옹관을 안치하였다. 옹관고분은 영산강 유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매장방식으로 지역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형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영산강유역 토착세력일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나주국립박물관에 세워졌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에서 내려다 본 반남면 일대(신촌리, 덕산리). 반남고분군은 삼한시대 마한과 삼국시대 백제의 지역 토착세력의 무덤들이다.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평지에 옹관을 묻고 봉분을 조성한 형태이다. 현재까지 약 40여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고분 분포도(안내문, 나주시청, 2009).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동쪽 신촌리에 9기, 덕산리에 14기 이상, 서쪽 대안리에 1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자미산성.

SANYO DIGITAL CAMERA나주 신촌리고분군과 덕산리고분군. 반남초등학교 주변 평지에 여러기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9호분 등이 발굴되었으며 금동관(국보 295호)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금반지, 고리자루칼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분들은 5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종되고 있으며 삼국시대 백제 지방세력의 무덤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신촌리 1호분.

SANYO DIGITAL CAMERA신촌리 2호분, 3호분. 평지에 봉분을 크고 웅장하게 쌓은 것으로 봉분을 먼저 쌓고 그 윗부분에 옹관을 묻었다고 한다.

나주 반남 고분군 사적513호 21-20191011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보 295호).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과정에서 신촌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지역토착세력이 제작한 것인지, 백제에서 지역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인지는 알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1호분. 신촌리 1호분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에 따라서 분류하기는 했지만 동일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2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3호분. 봉분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으로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4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5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6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1호분에서 남쪽으로 700 m 정도 떨어진 곳에 7~11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나주 덕산리 고분군, 전남 나주시 반남면 덕산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 덕산리에 남아 있는 고분들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대의 무덤 가운데 일부가 1930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이 때 무덤의 형태와 성격이 밝혀졌다. 당시 발굴된 고분은 바깥 모습이 하나의 봉토를 이루고 있으면서 내부에는 3개의 옹관(토기 항아리 관)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무덤 가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도랑이 있었다. 당시 출토된 장신구 등의 유물과 옹관묘는 일본 규수지방의 옹관묘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비교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서북쪽에 위치한 대안리 1~3호분. 자미산성 서쪽편에 위치한 대안리 일대에는 1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안리 1, 2호분

SANYO DIGITAL CAMERA봉분의 규모가 큰 3호분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서쪽편 언덕 아래에는 4~9호분이 있는데 그 중 3기만 현재 봉분을 볼 수 있다. 그 중 9호분은 반남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반남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인 9분과 그 앞에 있는 작은 8호분. 9호분에서는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등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대안리 7호분.  그 너머로 4~6호분이 있는데 봉분은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나주 대안리 고분군,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의 고분군은 삼국시대의 것이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바닥이 둥근 원형고분과 사각형인 방대형고분으로 나뉜다. 방대형 고분인 9호분에는 간단한 도랑이 둘려져 있다. 이 고분들의 관을 들여다보면, 도기 항아리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어 묻는 무덤형식으로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관묘이다. 옹관묘는 이 지역의 토착적인 묘제이다. 특이한 것은 원형 고분인 5호분을 발굴한 결과 현실(관을 안치하는 공간)의 4벽과 천상을 판석으로 짠 석실분이라는 것이다. 석실분은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통합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백제 지배계층의 묘제가 일반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여겨진다. 6호분은 인멸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시굴조사를 통해 정비하였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반남고분군
이곳 반남 고분군에는 대형옹관고분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다. 대형옹관고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 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항아리)을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 고분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구별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고분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은 AD 3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3세기동안 영산강유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3세기경에는 옹관절반을 지하에 묻는 반지하식이었으나 4세기 붕반부터는 지상식으로 발전하며 이때에는 분구의 규모가 훨씬 대형화되어 그 규모가 40~50 m에 이른다. 대형옹관고분은 나주 반남 일대는 물론 영암, 함평, 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형성되고 있으며, 이 지역 고대 세력의 묘제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옹관고분의 밀집도로 보아 이곳 반남 지역이 고대 지배세력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옹관고분의 출토유물은 영산강유역 계통의 유물이 주를 이루나 후기에는 백제계, 일본계의 유물이 섞이게 되며 가야계의 특징도 일부 보이고 있다. 당시 사회가 백제,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산강의 고대 수로 조건을 이용한 해상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5세기 말경에는 대형옹관고분이 쇠퇴하고 횡혈식석실분, 전방후원형고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석실은 토착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지역의 고대세력이 능동적으로 횡혈식석실분을 채용하면서 사회발전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관제에 본격적으로 편입하게 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자미산성, 삼한시대 마한 유력세력 근거지에 남아 있는 산성

전남 나주시 반남면 소재지에 있는 산성인 자미산성이다. 영산강 일대 나주평야 중심부에 있는 낮은 야산인 자미봉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둘레는 약 740 m이고 흙으로 다져 쌓은 토축식 산성을 후에 돌로 쌓아 보강하였다. 성안에는 건물터와 샘터, 3곳의 문터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지방세력이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고려,조선시대 기와조각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부근에 삼한과 백제의 무덤유적인 반남고분군(사적 513호)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지역 유력한 세력들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자미산성. 나주시 반남면 소재지에 위치한 나즈막한 야산에 쌓은 작은 산성이다. 낮은 나주평야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어 넓은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요지로 삼한시대부터 지역 유력세력의 근거지였다.

SANYO DIGITAL CAMERA반남면 소재지 마을에서 산성을 오르는 길 입구.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성벽과 성문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정상부 아래에 자미산성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표지석 옆 성벽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

SANYO DIGITAL CAMERA흙을 다져서 토축을 쌓았던 삼국시대 백제의 축성방법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정상부로 오르는 길. 주변지역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반남면 소재지가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남쪽으로 보이는 월출산

SANYO DIGITAL CAMERA동남쪽으로는 보이는 모습. 멀리 장흥군과 화순군의 높은 봉우리들이 보인다. 그 사이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쪽으로 보이는 모습. 멀리 광주까지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 아래 삼한시대 마한 유력세력의 무덤으로  고분들이 덕산리와 신촌리에 분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삼한시대 무덤이 덕산리 고분군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북서쪽 방향, 아래쪽에 대안리 고분군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서쪽. 아래에는 대안리 고분군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정상부 표지석

나주 반남 자미산성,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덕산리
이 성은 영산강 유역에 펼쳐진 나주평야의 중심지에 위치한 98 m(높이)의 소형산성으로 주변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무등산, 금성산, 월출산, 영산강이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산성이다.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마안형의 산등성이를 600 m 정도 흙으로 쌓고 돌로 보강한 테뫼식의 소형산성이며 통일신라기에 축조된 산성으로 판단되며, 일부 기와의 문양이나 제작기법으로 미루어서는 삼국시기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성의 부속시설로는 남.북문지와 건물지 6개소, 북문밖의 샘터 1개소가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대안리 고분군, 덕산리 고분군, 신촌리 고분군 등이 있어서 이 지역의 중심세력이 거처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예산 임존성(사적 90호),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곳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임존성(사적 90호)이다.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산성으로 백제 멸망 후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봉수산(해발 483.9 m)의 봉수산과 동쪽편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둘레 약 3 km로 바깥쪽을 돌로 쌓은 석축성이며 성벽의 높이는 2.6 m 정도이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성문, 수구문, 우물터,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봉우리와 능선을 둘러쌓은 산성으로 내부에 평지는 넓지 않은 편이며, 봉수산 봉우리와 남쪽 봉이리에 약간의 평지가 있으며 건물터 등이 확인되고 있다. 백제가 쌓은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임존성이 위치한 봉수산은 옛 대흥군 관아가 있던 예당저수지 일대가 동쪽편에 있고 예산과 홍성이 연결되는 교통로가 서쪽에 있다.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에서 약 40여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산만을 통해 들어오는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한산 건지산성과 함께 백제멸망후 부흥군의 거점이었던 곳이었으며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옛 대흥군 읍치가 산성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산 임존성(사적 90호). 백제 멸망후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봉수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 약 3 km의 백제가 쌓은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서쪽 성벽. 자동차로 산성 아래까지 올라올 수 있다. 서쪽 성벽은 최근에 보수하여 옛 산성의 웅장함을 재현하고 있다.

사적90호 예산 임존성30-20170912예산 임존성은 삼국간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백제가 쌓은 산성으로 아산만을 통해 침입이 예상되는 고구려군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공주와 부여로 향하는 많은 교통로들이 주위를 지나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바깥쪽에 바깥쪽에 돌로 석축을 쌓고 있다. 백제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 많았는데 삼국간 전쟁이 많았던 후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석축성도 많이 쌓았다. 경사진 지형의 장점이 더해져 공략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는 너비 1.6 m 정도이며 목책을 쌓고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곳. 주위에 곡선으로 성벽을 쌓아 옹성과 같은 효과가 있어 방어에 용이하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성벽. 원래 성벽의 모습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비교적 큰 돌로 견고하게 석축을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성문. ‘ㄱ’ 형태로 출입문을 만들어 성문을 방어하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문.

OLYMPUS DIGITAL CAMERA산성의 남쪽 모퉁이 부분에는 성벽을 높고 견고하게 쌓아 주위을 치성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모퉁이 안쪽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모통이 아래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성벽 안쪽에 있는 약간의 평지. 건물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동 동쪽편 예당 저수지가 있는 지역. 아래쪽에 대흥군 읍치가 있으며 아산만에서 공주와 부여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지나간다. 백제는 이 교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고구려군을 대비하기 위해 산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서쪽으로 예산과 홍성을 연결하는 교통로와 서산을 통해 공주, 부여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대련사. 이곳에 임존성과 봉수산 정상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존성 오르는 등산로.

예산 임존성, 사적 90호,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삼국시대
임존성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상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봉수산(해발 484 m)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성의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었으며 많은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우물이 3곳에 있었다. 둘레는 약 2.8 km로 백제의 성중 최대급 규모였다. 이곳에서 공주와 부여까지의 거리는 90리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한 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 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곳에서 흑치상지는 복신과 함께 나당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고 백제부흥군은 200여개의 백제성을 탈환하며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였다. 8월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뜰리고 물러났다. 663년 백강구 전투로 백제부흥군이 패하며 백제의 다른 성들은 항복하였지만 지수신 등이 지키는 임존성은 신라군의 공격에도 30일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임존성의 험준한 지세와 견고한 성벽, 그리고 풍족한 식량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에 항복한 흑치상지.사타상여 등에 의해 임존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지수신이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끝이 났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출처>

  1. 예산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4. 두산백과

부여 사택지적비(보물 1845호),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비석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전시 중인 사택지적비(보물 1845호)이다. 백제 의자왕 때의 귀족 사택지적이 남긴 비석으로 부여 부소산성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화강암 한면 한면을 다듬어 네모모양의 칸을 만들고 그 안에 글씨를 새겼다. 비석의 오른쪽에 봉황(혹은 삼족오)이 새겨져 있다. 현재 전하는 백제의 유일한 비석이다.

비문은 사택지적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며 금당과 탑을 세운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글의 양식은 두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따로 나누어 운을 맞춘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이다.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에 의자왕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간 대좌평 ‘지적’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도 사택씨였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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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사택지적비(보물 1845호), 현존하는 유일한 삼국시대 백제의 비석이다. 백제말 유력한 귀족이 남긴 비석으로 당시의 세련된 문화를 보여준다.

갑인년 정월 9일 내지성에 사는 사택지적은
몸이 나날이 늙어감을 한탄하여
금속을 다듬어 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탑을 쌓았다
높다란 금당의 자비로운 모양은
신성한 구름을 보내는듯하고
우뚝한 탑의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럽고 밝은 정기를 지니고 비상하는 듯하다.
(중앙박물관, 2011년)

백제 대좌평 사택지적은 누구?
일본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에는 642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대좌평 지적’이 등장한다. 그는 사택지적비에 등장하는 ‘내지성’에 사는 사택지적’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대좌평은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었고 사택 가문은 백제의 유력한 귀족이었다. 지적은 최고 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654년, 절과 탑을 짓고 사택지적비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아름다운 글씨체와 유려한 비문은 이들이 매우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였음을 보여준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자. 네모모양으로 칸을 나누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남조의 영향을 받은 글씨체와 글의 양식을 보여준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글자는 화강암의 한 면을 다듬고 네모모양으로 나누어진 칸에 새겨져 있다. 현재 4행만 남아 있는데, 각 행에는 세로로 14자씩 있다. 비문은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로 그 내용은 사택지적이 금당을 세우고 탑을 쌓은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비문 양식 및 글씨체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중앙박물관, 2011년)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
  5.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