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 석조유물

부여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유물들이다. 불교와 관련된 석탑, 승탑, 석등, 비석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무덤에 세워졌던 석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부여가 사비기 백제의 도읍이었지만 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던 석조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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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 8~10세기, 부여 기탑리. 목조건축물을 모방해서만든 초기 승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받침돌이 연꽃무늬가 새겨진 석조대좌의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연꽃무늬 석등받침, 6~7세기, 부여 기탑리

OLYMPUS DIGITAL CAMERA 연꽃무늬 석등받침, 8~10세기, 부여 석목리

OLYMPUS DIGITAL CAMERA 맷돌, 11~13세기, 부여 금곡리 금강사터

OLYMPUS DIGITAL CAMERA맷돌, 11~13세기, 부여 금곡리 금강사터

OLYMPUS DIGITAL CAMERA문인석,16~18세기, 논산 성동면 우곤리

OLYMPUS DIGITAL CAMERA 동자상, 16~18세기, 출토지 미상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 고려시대 석조불상

국립부여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불상들이다. 백제는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국보 84호), 태안 동문리 삼존불입상(국보 307호) 등 석조 불상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불전에 모시기 위한 석조불상은 많이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과 사비성이 있었던 충남지역에는 삼국시대 석조불상보다는 고려시대 호족들이 만들었던 투박한 형태의 석조불상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이 남아 있다. 논산 관촉사, 부여 대조사, 부여 정림사지 등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불상들은 신체의 비례에 있어서 균형미가 없고, 조각수법도 투박하여 예술적인 수준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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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 부여 동남리 전 천왕서터 부근.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불상으로 투박하면서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떨어지는 편이다.

1933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전천왕사터의 부근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어깨와 하체가 거의 일직선을 이루면서 곧바로 서 있는 자세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품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가 새겨져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이 불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균형미를 잃고 있다.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한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부여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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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불입상, 16~18세기, 출토지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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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보살입상, 11~13세기, 당진 용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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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보살입상, 11~13세기, 부여 고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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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관음보살좌상, 11~13세기, 당진

<출처>

  1. 부여박물관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박물관] 비석과 비석 부재들

국립 부여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비석과 비석부재들이다. 이곳에는 당유인원기공비(보물 21호)와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보물 107호)를 비롯하여 부여 부근에 흩어져 있던 비석 부재 등이 옮겨서 전시되어 있다. 부근 지역은 백제 멸망이후 오래된 고찰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비석들은 많지 않은 편이며 내력을 알 수 없는 거북받침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들로 조각수법이나 제작수법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받침, 보령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터, 통일신라. 성주사 절터에 있던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이다. 사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나 세부적인 조각수법 등 통일신라 전성기 비석받침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있다.

비석받침은 거북 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을 가리킨다. 거북이 잔등에 장방형의 비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우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등 모양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다. 상부에는 비신을 꽂을 수 있는 비좌가 마련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석받침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비머리, 보령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터, 통일신라.

비머리는 이무기를 새긴 비석의 머릿돌로 이수라고 부른다. 비머리는 일찍이 중국 한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당나라에 이르러 절정기를 이룬다. 이 성주사터 발견 비머리는 반룡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석비를 들어올리는 형상이다. 중앙 상단부에는 원형으로 된 제액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각이 섬세한 작품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 비석받침, 11~13세기, 서천 군사리

OLYMPUS DIGITAL CAMERA비석받침, 16~18세기, 부여 구아리

OLYMPUS DIGITAL CAMERA비석받침.

OLYMPUS DIGITAL CAMERA당유인원기공비(보물 21호).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백제 멸망 이후 의자왕 일행의 행적과 백제 부흥운동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보물 107호). 고려말 부여 임천면에 있는 보광사를 크게 중창한 원명국사 충감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출처>

  1. 부여박물관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박물관] 부여지역에 있던 석탑들

국립 부여박물관 야외에 전시중인 석탑들이다. 부여 지역에 남아 있는 3기의 석탑과 석탑 부재들로 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3기의 석탑들은 부여군 동사리와 석목리와 보령시 삼계리 절터에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부여지역 석탑들은 고려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백제 석탑을 계승한 오층석탑이로 조각수법이나 조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보령시에 있던 석탑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성주사지 석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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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동남리석탑. 부여 석목리 절터에서 있던 고려시대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놓은 오층석탑이다. 2층 탑신부터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지는 고려후기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여 석목리 논절마을의 고려시대 절터에 있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몸돌을 올린 석탑이었으나, 아래층 기단의 일부만 남아 있고, 탑몸돌의 4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은 탑몸돌의 1층 몸돌을 과어주는 부분 주위에 넓게 테두리를 두른 뒤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2층 몸돌부터는 갑자기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던 받침돌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 후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석탑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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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리석탑, 부여 세도면 동사리.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놓은 고려시대 오층석탑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위층 기단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은 1층은 높게, 윗층은 낮게 만들었으며, 지붕돌 모서리를 들어 올려 전체적으로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석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몸돌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각면마다 무늬를 얇게 새겼고, 위층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모퉁이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 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탑 양식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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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9~10세기,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다. 기단과 탑신 일부가 남아 있지 않지만 근처 성주사지 석탑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탑몸돌, 11~13세기, 출토지 미상.

OLYMPUS DIGITAL CAMERA탑몸돌, 11~13세기, 출토지 미상. 부조상을 새겼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내부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리 등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 지붕돌,

OLYMPUS DIGITAL CAMERA지붕돌. 16~18세기, 서천 시초면 초현리

OLYMPUS DIGITAL CAMERA지붕돌, 고려시대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 사비기 백제 때 사용되었던 석조

국립부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들이다. 주로 사비기 백제 때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석조들로 현존하는 석조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물들이다. 당시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사적 428호)을 비롯하여 부여 동남리, 현북리, 용정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 형태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의 것들도 있으며, 석연지로 추정되는 둥근 형태의 석조들도 있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만든 큰 구조물로 그 재료의 견고성 등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석조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불국사 석조는 지금도 물을 담아두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6~7세기, 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석조이다. 배모양을 하고 있는 이 석조들은 사찰에서 전해오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석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 높이가 낮고 배모양을 하고 있는 또다른 석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 높이가 낮고 특이한 형태의 석조이다. 한쪽편에 석조로 물이 유입되는 연결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유적(사적 428호). 다수의 석조들이 발견되었는데, 궁궐에서 연꽃을 키웠다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석조 (보물 194호). 사비기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지에서 있었던 것으로 연꽃을 키웠던 석련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동남리, 정사각형 평면을 하고 있는 석조로 높이가 낮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현북리, 높이가 낮고 크기도 작은 석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둥석조, 6~7세기, 부여 용정리, 둥근 원형 평면을 하고 있는 석조이다.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석조(보물 194호)로 연꽃을 키우는 석련지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