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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홍제암(보물), 사명대사가 입적한 유서깊은 암자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에 있는 암자인 홍제암(弘濟庵, 보물)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큰 역할을 했던 사명대사가 머물다 입적한 곳이다. 그의 사후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제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의 사후 영정을 모시기 위해 현 건물이 세워졌으며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불상을 모시는 불전과 생활공간인 요사채를 겸하고 있는 인법당(因法堂) 형식을 하고 있다. 양쪽이 누마루처럼 돌출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工’자형 평면배치를 하고 있다. 가운데 불상을 모시는 불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영정을 모시는 조사전을 비롯하여 여러 기능의 방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툇마루를 통해 연결되고 있다.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한 건물에 있는 독특한 형태의 암자로 건축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합천 해인사 홍제암(보물). 사명대사가 마지막으로 머물다 입적한 유서깊은 암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제암 출입문인 보승문. 유교식 삼문 형식을 하고 있는 출입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제암 건물은 그의 사후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불전과 생활공간이 한 건물에 있는 특이한 형태의 암자로 ‘工’자형 평면배치를 하고 있다. 1970년대에 크게 수리하여 지금은 새로 지은 건물처럼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제암 가운데는 불상을 모신은 불전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홍제암’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제암 내부에 모셔진 불상.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은 앞면 2칸의 누마루처럼 생긴 형태로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자각(影子閣)이라 하며 고승 16명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영조 때 표충사라고 불렀는데 밀양에 표충사가 있어 이후에 이곳을 폐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도 앞면 2칸의 누마루처럼 생겼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제암의 공간들은 툇마루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안쪽에 생활공간인 요사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에서 본 홍제암.

OLYMPUS DIGITAL CAMERA홍제암 서쪽편에 있는 큰 규모의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작은 요사채. 승려들이 머무는 공간이 상당히 많은 편으로 해인사 승려들이 머물기를 선호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제암 동쪽 석장비와 승탑들이 있는 공간과 연결되는 작은 협문.

OLYMPUS DIGITAL CAMERA사명대사 석장비(보물 1301호). 사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훼손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장비와 함께 있는 승탑과 비석들.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 10-20180205홍제암 뒷편 언덕에 있는 사명대사 사리를 모신 승탑(보물 1301호)

홍제암, 보물 1300호
홍제암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가 선조대왕의 하사로 1608년에 창건하여 수도하시다가 입적하신 곳이다. 1614년(광해 6)에 혜구 스님이 양자전을 지어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1674년에 현종께서 홍제당(암)을 사핵하였으며 그동안 6차례 보수하였는데, 현존 건물은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예산 조치로 1979년 10월에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 경내에는 보물 1301호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가 있다. 사명대사 부도 및 탑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1612년(광해 4)에 건립하였고, 1943년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파손하였던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다. 부도는 사명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물로서 1610년 입적하신 해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합천 해인사, 2017년)

<출처>

  1. 안내문, 합천 해인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 불교공예,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구

사리(舍利)는 시신을 화장하여 나온 유골이며, 사리구(舍利具)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의 공양물을 뜻한다. 사리는 일반적으로 유리나 수정용기에 담고, 그 용기는 다양한 재질의 용기에 넣어서 탑에 안치한다. 사리구는 불국사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 미륵사지석탑 등 웬만한 유명한 탑에서는 대부분 발견되고 있다. 발견된 사리구들은 금속세공을 비롯하여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었기때문에 예술적 가치 또한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탑은 해체/보수하기가 쉽지 않고 도굴하기 또한 상당히 어렵고, 불교신앙에서 중용성이 아주 높기때문에 최근까지도 미륵사지석탑의 경우처럼 석탑의 해체/보수과정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탑(塔)은 부처의 사리(舍利)를 모시는 곳으로 불교에서 불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상징이자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석가모니불이 열반에든 뒤 그의 제자와 신도들은 부처의 시신을 화장하여 스투파(탑파,탑)에 안치하였다.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는 탑은 초기 불교 사원인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래 전국적으로 많은 사찰과 탑이 조성되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신앙의 중심이 불상과 불상을 모신 불전으로 바뀌면서 사리를 모신 탑의 조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는 부처의 사리는 그 숫자가 유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리구(舍利具)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이며, 탑 속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용기가 사리구이다. 사리는 불교경전에 따라 금, 은, 동, 석으로 만든 용기에 차례로 넣어 탑에 안치한다. 우리나라에는 6세기 중엽에 사리가 전래되었고, 현재까지 백제와 신라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 차원의 사리봉안이 많았으며 상자모양, 집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사리구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원형과 팔각형, 라마탑형의 사리구가 만들어졌고, 청자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원형합이 많이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감은사터 동탑 사리구(보물 1359호). 경주 감은사. 감은사지 삼층석탑 동탑 해체.수리시 발견된 사리구이다. 조각수법이 상당이 섬세하고 뛰어난 걸작이다. 당시 활동했던 조각가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는 고귀함을 상징하는 닫집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람에는 4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 수법이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과 비슷하다.  사천왕상의 표현 기법은 중앙아시아의 것과 비슷한 형태로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감은사 터 동탑 사리구 (感恩寺址東三層石塔舍利具,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682년경, 보물1359호)
1996년 감은사 동 삼층석탑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것으로 수정사리병-내함-외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리함은 사천왕이 배치된 최초의 사리구이며 탑을 든 북방 다문천왕을 중심으로 방위를 결정한다. 내함의 기단 위에는 화염보주 주위로 사천왕 및 승려상이 있고, 기단에는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팔각당형 사리구(靑銅八角堂形舍利具, 통일신라 9세기, 황룡사지 출토). 팔각형 목조건물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의 건축양식을 추론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빙산사터 오층석탑 사리구(氷山寺址五層石塔舍利具, 통일신라 9세기, 빙산사지 출토)

SANYO DIGITAL CAMERA황복사 터 삼층석탑 사리구 (경주, 통일신라, 692년경). 통일신라 성덕왕이 신문왕, 효소왕, 신목대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이 있는 사리구이다. 성덕대왕신종의 주인공인 성덕왕은 불교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SANYO DIGITAL CAMERA황복사 사리구와 같이 봉안된 고배와 유리구슬

황복사는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효소왕이 세운 절이다. 이 사리갖춤은 효소왕이 사망하자 706년에 성덕왕이 추가로 봉안한 것이다. 이 사리함은 704년 한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태, 금동 외함의 네 면에 99기의 탑이 점선으로 묘사되었다. 뚜껑 안쪽에는 신문왕, 효소왕, 신문왕의 왕비인 신목대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안하였다는 글귀가 남아 있다. 금제 불상 2점, 고배와 녹색 유리구슬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구 외함(통일신라 8세기, 경주출토).  4면에 사천왕상이 음각선으로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리병과 사리.

SANYO DIGITAL CAMERA사리구에는 탑과 불상이 같이 모셔졌다.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인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39호)에서 1996년 출토되었다. 금동 사각 외함의 네 면에 각각의 방위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사리함 안에는 금동제 구층소탑과 여래입상,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종이조각이 있었으며, 사리는 여래입상의 대좌 아래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병.납석제호(金銅舍利甁.蠟石製壺, 고려)

OLYMPUS DIGITAL CAMERA라마탑형 사리구(金製喇嘛塔形舍利具, 고려14세기). 라마교가 번성했던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사리그릇 (부여, 고려 14세기), 부여에 있는 보광사지탑 발굴된 금동제팔각당형사리구와 사리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인사 부도 사리구(보물928호), 조선중기 광해군때에 조성된 봉인사 부도에서 출토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리구로 구성요소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만든 수법이 뛰어나서 조선시대 사리갖춤임에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봉인사 부도 사리구(奉印寺釋迦世尊浮屠舍利具, 조선, 보물928호)
이 사리갖춤은 광해군 때 왕실에서 세운 봉인사 석가세존 부도에서 출토된 것이다. 봉인사 부도는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87년에 되돌아와서 현재 경복궁에 자리하고 있다. 사리는 수정 사리병에 넣어 유제, 은제 그릇에 크기순으로 차례로 담아 마지막으로 대리석제 그릇에 넣고 비단 보자기로 싸 봉인하였다. 은제 그릇 뚜껑에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고 밑바닥에 1620년 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만들었다는 글귀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백자 사리합.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리갖춤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덕5년명 사리갖춤(조선시대, 1510년)

SANYO DIGITAL CAMERA 사리그릇 (조선시대, 16~17세기)

SANYO DIGITAL CAMERA사리갖춤. 경기도 안성에서 출토된 사리구.

SANYO DIGITAL CAMERA탑의 조성내력을 적은 탑지.

이 사리갖춤은 1972년 경기도 안성에 있는 어느 탑에서 수습되었다고 한다. 원통모양의 청동제 사리그릇은 윗단과 아랫단의 2단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 향목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호리병 모양의 사리병은 사리그릇 윗단에서 발견되었으며, 주머니에 넣어져 있었다. 한편 곱돌제의 탑지에 새겨진 글씨에 의해 이 사리갖춤은 997년 장명사의 오층석탑에 봉안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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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에 만들어진 공양탑이다.>

11층 목탑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불전안에 두는 사리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층으로 된 기단부. 앞면 3칸구모의 목조건축물 형태로 각 모서리에 사천왕상을 세워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와를 올려놓은 모습의 탑신부.

OLYMPUS DIGITAL CAMERA상륜부.

OLYMPUS DIGITAL CAMERA계단이 있는 정면과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옆면.

공양탑(金銅多層小塔, 고려전기),
높이 74.5㎝의 금동 소탑으로 불전안에 두는 사리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탑은 사각형의 기단과 11층의 탑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부의 한쪽에 계단을 놓아 탑으로 연결하고 있다. 초층탑신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부착하였다.

 

[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 불교공예, 범음구인 범종과 쇠북

범음구(梵音具)는 불교공예에서 범음(梵音)을 만들어 내는 도구이다. 범음은 부처의 말씀이자. 부처와 보살에게 바치는 모든 소리를 뜻한다. 대표적인 범은구로는 큰 종인 범종, 큰 북인 법고,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목어, 구름 모양의 판인 은판이 있으며 이들 네 가지 범음구를 불교사물(佛敎四物)이라 한다. 범종은 전생과 지옥의 중생을, 법고는 땅 위의 짐승을, 목어는 물속의 중생을, 은판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든 날짐승을 구제하기 위해 울린다고 알려져 있다. 범음구 중 금속을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는 사찰에 걸려 있던 범종과 쇠북을 있다. 

범음구(梵音具)
범음은 부처의 말씀이자 부처와 보살에게 바치는 모든 소리를 뜻하며, 범음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범음구라 한다. 범음구에는 종을 비롯해 큰 북인 법고(法鼓),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목어(木魚), 구름 모양의 운판(雲版)이 있는데 이를 불교사물(佛敎四物)이라 한다. 이외에도 불교의식이나 공양 때 치는 쇠북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범음구란 범음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말한다. 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서는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유물인 범종과 쇠북이 전시되어 있다.

범종(梵鍾)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었던 고동기(古銅器)의 종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지며, 불교의 전래와 함께 서역문화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범종은 학명으로 ‘한국종’이라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규모와 장식하고 있는 조각에서 보여주는 예술성 등을 볼 때 신라금관과 함께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범종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상원사 동종으로 752년에 제작되었으며,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4㎝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범종은 상원사 동종처럼 주로 오래된 사찰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지만, 흥천사 종처럼 폐사지에 있던 것을 성문의 종각에 걸어두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범종으로 통일신라에서 만든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상원사 동종, 고려시대에 만든 흥천사종, 용주사 범종, 조선후기 유명한 승려이자 장인인 사비인구가 만든 범종 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남한산성에 걸어두었던 흥천사 종(국보280호)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범종들이 소장.전시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흥사 종(국보280호). 신라종을 계승한 고려초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위패모양의 틀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범종이다. 원래 천안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 종루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천흥사 종(「天興寺」銘靑銅鐘, 고려 1010년, 국보280호)
통일신라의 동종을 계승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종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보주를 물고 있는 용과 제작연대를 새긴 위패 모양의 틀은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양식적 요소이다. 위패모양의 틀에는 요나라 통화(統和) 28년인 1010년 성거산 천흥사에서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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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녕4년(淸寧四年)’이 새겨진 종 (고려, 1058년, 보물1166호). 경기도 여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범종으로 고려시대 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다. 종의 몸통에 있는 위패모양 안에 ‘창녕4년’이라고 적혀 있어 고려 문종(1058년)에 만들어진 종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SANYO DIGITAL CAMERA몸통 아랫부분에 위패모양의 틀안에 글씨를 새겨놓고 있다.

여주 출토 동종 (驪州 出土 銅鍾), 보물1166호,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67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고철 수집 때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크기는 길이 84㎝, 입지름 55㎝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는 한마리의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6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용통의 각 부분마다 덩굴무늬를 양각하였다. 종의 상단과 하단,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둘러싼 사각형의 유곽에는 가늘게 연이은 구슬 모양의 띠를 돌리고, 그 내부에 모란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유곽내의 유두는 꽃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종 몸통에 있는 비천상은 천흥사종(국보 제280호)과는 달리 4곳에 있으며, 특히 대칭대는 곳에 보관을 쓴 2구의 보살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역시 종 몸통에 보살상과 교대로 4곳에 있다. 종 몸통 아랫부분에는 제작 연대와 중량을 알 수 있는 글이 새겨 있어, 고려 문종 12년(1058)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동종(靑銅鐘, 고려13세기), 용의 몸통을 하고 있는 용뉴와 음통, 유두, 비천상 등 한국종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범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종(靑銅鐘, 고려13세기, 황해도 평산군 월봉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동종(靑銅鐘, 고려 13세기, 경기도 연천군 원당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동종(靑銅鐘, 고려 13세기)

쇠북은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금고(金鼓) 또는 반자(飯子)라고도 불린다. 범종이 아침저녁 예불이나 중요한 의식을 갖는데 사용하는데 비해 쇠북은 단순히 공양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으는 사용된다. 소리는 범종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고음을 낸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함통6년(865년)”이 새겨진 시공사 쇠북이 있다. 쇠북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만들어졌으며 조선후기 만들어진 것은 지금도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쇠북은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금구 또는 반자라고도 한다. 사찰에서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드을 모을떄 사용한다. 북의 옆면이나 뒷면에는 북의 제작연대와 걸려 있던 사찰 이름,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북을 만들며, 빌었던 소망이 새겨진 것이 많다. <출처: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시공사 쇠북(통일신라, 865년). 이 쇠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는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형태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쇠북으로 옆면에 새겨진 ‘함통육세을유’라는 글귀를 통해 865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북은 쇠북의 초기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원형의 테두리 외에는 어떠한 무늬도 없이 간결하다. <출처: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쇠북과 쇠북걸이 (조선, 18~19세기). 공주 갑사에 있는 쇠북과 쇠북걸이 복제품으로 쇠북의 용도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형태이다.

쇠북은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절에서 처마 밑이나 간단한 걸이에 걸어두고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사용한다. 쇠북의 옆면이나 뒷면에는 북이 만들어진 연도와 걸려있던 사찰 이름,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북을 만들어 빌었던 소망이 새겨지기도 한다. 이 걸이는 한국의 쇠북걸이 중 가장 크고 화려한 형태로 해태 받침 위에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다투고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암사 쇠북(「瓊巖寺」銘靑銅盤子, 고려 1073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성연대와 경암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겉면에 장식이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성연대가 새겨진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경암사(瓊巖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073년 경암사라는 사찰에 공양한 쇠북이다. 이 쇠북에는 금고외 또 다른 이름인 반자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중앙에는 연꽃무늬가 있고, 테두리에는 구름무늬가 있는 등 통일신라 쇠북에 비해 무늬가 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쇠북(靑銅金鼓, 고려). 고려후기에 들어가면서 표면 전체를 장식으로 메우고 있다.

앞뒷면이 모두 막히고 옆면에 구멍이 뚫린 특수한 형태의 쇠북이다. 중앙에는 연꽃무늬가 있고, 테두리에는 여의두 무늬가 둘려져 있다. 이처럼 쇠북 무늬는 고려 후기로 가면서 점차 표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 경향을 띤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중앙박물관
4.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