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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박물관] 천안의 불교문화

천안은 중부지방 교통의 요지에 있기는 하나 통일신라 이래 큰 세력이 없었던 지방으로 불교가 발달하지는 않았다. 천안에 지금 남아 있는 큰 사찰로는 차령산맥 줄기 광덕산에 자리잡고 있는 광덕사가 있다. 광덕사는 조선초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자주 찾았던 사찰로 당시의 위상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교통 요지에 크고 작은 사찰이 세워졌던 고려시대의 흔적으로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7호), 천흥사명 동종(국보 280호), 보협인석탑(국보 209호)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선홍경사 갈기비, 국보7호, 고려시대, 복제품. 갈비(碣碑)는 보통 석비보다 규모가 작고 간략화된 것을 말하지만, 이 비석은 머릿돌, 몸돌, 거북받침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석비의 형식을 하고 있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어룡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비석에는 사찰을 세운 내력이 적혀 있다. 글은 당대 학자로 해동공자로 불렸던 최충이 지었고 백현례가 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안시 성환읍 대흥리 1번국도 도로변에 남아 있는 비석과 절터. 이지역은 교통의 요지이지만 마을이 없고 주변에 습지가 많아 도적이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여행객의 안전을 위하여 현종이 절과 숙소인 원(院)을 세웠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서 출토된 유물.

OLYMPUS DIGITAL CAMERA천흥사명 동종, 국보280호, 고려시대, 중앙박물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범종 중 가장 큰 규모로 높이 1.33m이다. 유곽 아래 위패형 틀을 설치하고, 범종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글을 새겨 놓고 있다. 요나라 통화(統和) 28년인 1010년 성거산 천흥사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범종이 있었던 천흥사 절터. 지금도 오층석탑(보물 354호)와 당간지주(보물 99호)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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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협인석탑(寶篋印石塔, 국보 209호)이다. 보협인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의 석탑으로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기단과 탑신을 구별하기 힘들며, 5개의 돌만 남아 있는 것을 조립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복원한 것은 아니다. 천안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동국대박물관으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광덕사 면역사패교지, 보물 1246호, 1457년. 광덕사와 개천사의 잡역을 경감하라는 내용을 담은 교지로 조선 초기 사패교지의 형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설대보부모은중경, 보물 1247호, 1457년, 부모의 은혜를 크게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 공양하며 경전을 읽고 외울 것을 권장하는 불경으로 효령대군이 부인, 아들과 함께 시주하여 제작하였다.

광덕사
광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흥덕왕 7년(832) 진산화상이 중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희묵상인이 중창하였다. 이 곳에는 광덕사고려사경(보물 390호), 조선 세조가 승려들의 부역을 면제한다는 면역사패교지(보물 1246호), 태종의 둘째 아들이 효령대군이 시주한 부모은중장수태골합부 등 사경7점(보물 1247호), 화려한 도솔천의 세계를 구현한 노사나불괘불탱(보물 1261호) 등의 보물이 있다. 지방문화재인 부도, 삼층석탑, 대웅전, 천불전과 천불전 후불탱화도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감지은니묘법연화경, 보물 169호,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감지금니묘법연화경, 보물270호, 조선시대

<출처>

  1. 안내문, 천안박물관,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7년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288호), 백제 창왕 때 조성된 내력이 적혀있는 사리장치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석조사리감(국보 288호)이다. 사비기 백제 왕릉이 있는 능산리 절터 목탑터에서 출토되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치로 높이 74 cm, 가로 50 cm의 불상을 모시는 감실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감실 양쪽에 예서체 글자 10자씩 새겨져 있다. 글자의 내용은 창왕(위덕왕) 때인 567년에 조성되었으며,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 중 하나이자 금석문 자료로서 능산리사지 창건 내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434호)는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군과 백제 나성 사이에서 확인된 사비기 백제의 대표적인 절터이다. 성왕의 아들이 위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서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터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287호)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청자류, 문서에 해당하는 목간들, 다양한 형태의 기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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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288호).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치로 불상을 모시는 감실형태를 하고 있다. 능산리사지 절터 목탑 심초석 부근에서 발견된 것으로 초기 사리장치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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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감 양쪽에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유행한 예서체 형태로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에는 창왕(위덕왕) 13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어 조성연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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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는 공주가 사리를 봉안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백제 창왕명석조 사리감
목탑지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사리감은 아래가 편평하고 위가 둥근 아치형으로 무덤의 입구를 연상시킨다. 앞면에는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년)에 누이인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고 한자로 적혀 있다. 창왕 즉 위덕왕은 성왕의 아들로 백제의 왕릉이 있는 능산리에 절을 세워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불교를 통해 성왕이 이루지 못한 백제 중흥의 꿈을 실현코자 하였다. 이 사리감은 위덕왕의 이러한 간절한 염원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부여박물관, 2012년)

SANYO DIGITAL CAMERA석조사리감이  출토된 능산리사지(사적 434호) 목탑터. 사리감에 적힌 글자의 내용으로 볼 때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사찰을 창건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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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목탑. 건물터의 규모나 정림사지 오층석탑 등을 고려하여 5층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재현해 놓았다. 황룡사지 구층목탑에 비해 그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삼국시대 이후 세워진 전형적인 목탑의 형태나 규모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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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감이 있었던 목탑 심초석

<출처>

  1. 국립부여박물관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앙박물관특별전, 세계유산 백제] 백제의 사찰과 불교문화

1. 도성과 행정2. 건축3. 무기와 전쟁4. 일상생활5. 사찰과 불교문화6. 능묘7.국제교류, 8. 지방통치

백제 불교는 4세기 중국 남조 동진으로부터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전래되면서 시작하였다. 웅진기 백제 때에는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국보 84호),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상(국보 307호)같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지만 공주에는 큰 사찰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백제 불교는 성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정림사를 세우면서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이후 도성에는 왕흥사지, 능산리사지, 부소산성사지 등에 크고 작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무왕 때에는 익산지역에 미륵사, 제석사같은 사찰들이 도성 역할을 했던 왕궁리유적과 함께 세워졌다.

백제의 사찰은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 1금당식의 가림배치를 하고 있으며, 최대 사찰인 미륵사지는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3탑 3금당식 공간배치를 보여준다. 백제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는 중국 남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라와 일본에 전해졌으며 한반도와 일본의 건축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 불탑에 모셔졌던 사리구 등에서는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치미, 7세기, 부여 부소산 사지. 치미는 불상을 모신 대형 불전이나 궁궐 전각을 장식한 대형기와로 당시 불교 건축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 건축에서는 치미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북경 자금성이나 일본 나라의 동대사에서 치미가 사용된 건축의 웅장함을 볼 수 있다.

사찰
사찰은 백제 사람들의 종교와 사상, 염원이 담긴 공간입니다. 백제는 중국의 역사서에 ‘사찰과 불탑이 많은 나라’라고 기록될만큼 불교가 성행했던 나라입니다. 왕실은 주도적으로 사찰을 세웠고, 사리를 공양하는 등 불교의 적극적인 후원자였습니다. 왕흥사지와 미륵사지의 사리장엄국에는 언제, 누가, 무엇을 위해 발원하였는지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백제의 국교였던 불교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완성한 백제의 가람 배치와 불탑의 축조 방식은 주변 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우는데 참여한 아비지(阿非知) 이야기나 일본 최초의 불교 사원인 아스카데라(飛鳥寺) 건립에 참여한 장인 집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풍탁, 7세기, 미륵사지

풍탁은 절, 누각 등의 처마 끝에 다는 경쇠로서, 풍령 또는 풍경이라고도 합니다. 미륵사지 출토 금동풍탁은 종의 형태와 유사하며, 바람을 받아 소리를 내는 바람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백제 풍탁과 바람판은 익산과 부여 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통일신라 풍탁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도가니와 유리가공품, 7세기, 미륵사지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 중 녹색유리구슬, 유리판과 유사한 유리편과 가공품이 동원의 금당지와 목탑지, 그리고 공방지에서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공방지에서는 유리를 제작하는데 사용한 도가니가 함께 출토되어 사찰 내에서도 유리를 자체적으로 제작했음을 알려줍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녹유를 입힌 서까래 기와, 7세기, 미륵사지.

미륵사지에서만 확인되는 서까래 기와는 7개의 연꽃잎이 배치되고, 꽃잎 안에는 다섯 잎의 인동초로 장식되었습니다. 자방 한 가운데에는 서까래에 못으로 고정하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습니다. 막새 옆쪽의 테두리에는 톱니무늬를 두르고 둥근 점을 연속으로 배치했는데, 나무로 만든 바깥틀을 사용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7세기, 미륵사지. 불교적인 의미를 갖는 연꽃문양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백제의 기와이다. 백제는 웅진기에 중국 남조의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사비기에는 여러 사찰의 건축과 함께 기와제작도 활발해졌으며 양식도 다양해졌다. 기와 제작기술은 신라와 왜에도 전해졌는데, 왜에 파견된 와박사는 아스카 기와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7세기, 미륵사지

미륵사지에서는 연꽃잎 안에 꽃술을 장식한 6엽의 수막새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부 수막새에는 주칠을 더해지지도 했으며, 건축물의 위상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8엽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전체의 1%밖에 되지 않지만, 시기적으로 빠른 고식으로 생각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무늬수막새, 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보살상 파편, 7세기. 서역에서 전해진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상이다. 후대 불상과는 달리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미륵사지 중원 서회랑지의 동편 기단 밖 소토층에서 출토된 보살상은 미륵사 창건기 불교조각의 단면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상은 거푸집을 써서 성형한 소조상을 구워낸 이른바 전불(塼拂) 편으로, 아마도 공방에서 대량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전의 내벽을 장엄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사발, 7세기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사적 150호)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입니다. 이 사찰의 가람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 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새로운 형식입니다. 돌로 만든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을 경계로 동원(東院), 서원(西院), 중원(中院)으로 구분됩니다. 지금은 서탑(국보 11호)만 남아 있는데, 목조 건축의 자재를 그대로 돌에 옮겨 놓은 모습입니다. 탑신 내부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는 백제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의 발원문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사리봉영기, 639년, 익산 미륵사지. 2009년 발견된 것으로 미륵사지 석탑 창건 내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이었던 사택(沙澤)씨 출신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리봉영기에 적힌 내용.

사리봉영기는 금판의 앞뒷면에 도자(刀子)를 이용하여 음각하고, 각 획을 따라 주사(朱唦)를 입혀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전체 193자로 앞쪽에는 99자, 뒤쪽에는 94자를 새겼습니다. 좌평(佐平) 사택덕적(沙澤德積)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을 정확히 밝힌 것입니다. 미륵사 서탑 창건의 주체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임이 밝혀져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삼원식(三院式)인 미륵사의 창건에 선화공주를 포함한 서로 다른 발원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OLYMPUS DIGITAL CAMERA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동제 사리 외호와 금제 사리 내호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사리 외호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사리 내호 출토품.

OLYMPUS DIGITAL CAMERA3.금제족집게,

OLYMPUS DIGITAL CAMERA4. 금귀걸이와 금덩이,

OLYMPUS DIGITAL CAMERA5.금판

사리공에서는 모두 18개의 금판이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3개의 금판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하나에는 “중부의 덕솔 지애가 금 1량을 시주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리봉영기와 달리 아마도 사리를 봉안할 당시 급하게 쓴 글씨로 추정됩니다. 글자의 내용은 백제의 행적구역(中部)와 관등(德率, 16품의 관등 중4품), 도량형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1량의 무게는 13.2 g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OLYMPUS DIGITAL CAMERA사리공 바닥에 깔았던 유리판. 사리공 바닥의 너비에 정확히 맞도록 처음부터 주문 제작된 특수 유리판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

OLYMPUS DIGITAL CAMERA3. 소조 나발, 4. 은제 손톱장식, 6. 은덩어리, 7. 은제 허리띠 꾸미개

OLYMPUS DIGITAL CAMERA5. 은제 관 꾸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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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도자(복제품)

진단구
미륵사지 석탑 사리용기가 안치된 심주로 가는 통로의 바닥석 아래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사찰 건물의 기단 등에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진압하기 위하여 기단 하부 축조시에 각종 물건을 공양하는 진단구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소조 나발과 은제 손톱장식은 중국 남조 장간사 탑 사리 공양 중에 탑 아래에 매납했다는 불조발(佛爪髮), 즉 부처의 손톱과 머리카락 봉안 의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OLYMPUS DIGITAL CAMERA청동합과 내부 공양품, 639년, 익산 미륵사지, 1. 청동합

OLYMPUS DIGITAL CAMERA2. ‘상부달솔목근’ 글자를 새긴 청동합

OLYMPUS DIGITAL CAMERA3. 금구슬, 4. 금판, 5. 금못, 6. 곱은옥, 7. 호박구슬, 8.마노구슬, 9. 유리구슬, 10. 진주구슬

미륵사지 사리구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 작업 도중 탑의 심초석 사리공에서 사리호를 포함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습니다. 사리호는 외호와 내호, 사리병의 삼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금동제 외호는 왕흥사의 은제 사리병과 닮아 백제 사리기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금제 내호는 외호와 유사하지만 크기가 작고, 뚜껑과 항아리가 붙은 일체형입니다. 내호 안에 있던 사리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리로 만든 사리기이지만, 발견 당시 뚜껑을 제외하고는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습니다. 사리공 안에서는 구슬, 장신구, 청동합과 같은 다양한 사리공양구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왕궁리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보 123호, 7세기 전반, 익산 왕궁리,

왕궁리 오층석탑의 1층 옥개석 동쪽 사리공에 금동 주칠 사리 외함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외함 안에는 금제 사리 내함이, 그 안에는 연화대좌 위에 놓인 유리 사리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함께 출토된 불상의 연대에 따라 9세기 말 ~ 10세기 초로 알려졌으나, 미륵사지 사리구가 발견되면서 백제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왕궁리 금제 사리 내함과 미륵사지 금동제 사리 외호의 세잎무늬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의장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짧은 선이 채워진 연꽃무늬는 사비도읍기 백제의 국왕과 귀족들이 애용한 문양입니다. 또한 모두 사리를 담은 용기는 유리병을 사용하였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대관관사’ 글자를 찍은 수키와,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OLYMPUS DIGITAL CAMERA‘미력사구’ 글자를 새긴 뚜껑접시, 익산 왕궁리

뚜껑접시의 바닥에 ‘미력사구’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미력사(彌力寺)’는 ‘미륵사(彌勒寺)’의 간자로 백제 토기에서 직접 사찰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한 ‘구(几品)’ 작은 사발을 뜻하는 ‘구(甌)’의 약자로서, 당시 이런 형태의 그릇을 부르는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왕궁리유적(王宮里遺跡)
왕궁리 유적은 본래 도성으로 축조했으나 뒤에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유적 안에 있는 오층석탑(국보 289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의 사찰은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되었으며, 발굴 조사로 현재의 석탑 자리에 원래 목탑이나 장방형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단부 심초석에서 나온 금동여래입상을 근거로 통일신라 고려초기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금당과 강당터에서 백제 수막새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왕궁사(王宮寺)’와 같은 글자가 찍힌 통일신라 기와가 발견되어 석탑을 처음 만든 시기는 백제이고, 통일신라 후기 어느 시점에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보물 1767호, 577년 백제, 1. 청동제 사리합, 2. 은제 사리 외병, 3. 금제 사리 내병. 바깥쪽에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제 사리합, 금제 사리병이 있다. 동, 은, 금으로 만든 용기에 사리를 모시는 백제 사리장엄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사리합 바깥에는 6행 2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찰의 건립시기와 배경,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리장엄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사리엄장구를 확인하는 양식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목탑지 심초석의 사리공에 사리구를 넣고, 주칠로 연꽃넝쿨무늬를 그려 장식한 화강암제 뚜껑을 덮었습니다. 석제 장치 안에 청동합을 넣고, 다시 그 안에 은제 병, 그 안에 사리를 넣는 금제 병을 두었습니다. 석제 장치는 외함으로, 청동합은 내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청동합 몸체에 5자 6행 29자가 음각되었습니다.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혹은 찰주)를 세웠다. 본래 사리가 두 매였는데, 묻을 떄에 신이하게 셋이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사리 공양구, 철제관테, 577년

OLYMPUS DIGITAL CAMERA운모꾸미개, 577년

OLYMPUS DIGITAL CAMERA사리공양구, 1. 은제 허리띠 꾸미개, 2. 철제집게, 3. 성평 오수전, 중국 북제

OLYMPUS DIGITAL CAMERA사리공양구, 577년. 1. 금제 모자모양 꾸미개, 2. 금제 목걸이 꾸미개,

OLYMPUS DIGITAL CAMERA3. 금구슬, 4. 금판,

OLYMPUS DIGITAL CAMERA5. 흑옥구슬,

OLYMPUS DIGITAL CAMERA6. 금실

OLYMPUS DIGITAL CAMERA사리 공양구, 577년. 1. 옥벽 조각, 2. 호랑이 모양 장신구와 진묘수 모양 장신구, 3. 곱은옥

옥벽은 원래의 몸체에서 부채꼴 형태로 잘라낸 것을 다시 이등분하여 매납한 것입니다. 양면에는 음각으로 도철문 혹은 용문을 시문해 넣었습니다. 중국 한 무덤 출토품과 같은 형태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4. 유리구슬

OLYMPUS DIGITAL CAMERA치미, 6세기 후반, 부여 왕흥사지,

왕흥사지 치미는 동쪽 승방지로 판단되는 건물지의 남북 양끝에서 각 1점씩 출토되었습니다. 전체를 한 몸으로 제작한 후, 상.하로 나누어 가마에서 구워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 건물에서 용마루 좌우의 치미 1벌(2점)이 함께 출토된 사례는 처음입니다. 남쪽 치미는 상부만, 북쪽 치미는 하부만 복원되었습니다. 치미의 추정 규모는 높이 123cm, 최대 너비 74 cm로, 중국 남조척(1자=24.5cm 전후)을 적용하면 5자 정도 높이에, 너비는 3자에 해당됩니다. 지붕장식을 화려함과 위엄을 갗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 최고 수준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찰의 중요 건축물에만 치미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알려진 사례와 달리, 승려들이 사용하는 승방건물에까지 치미가 쓰였다는 점에서 당시 승려들의 높은 지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도 주목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와 벽돌, 6세기 후반, 부여 왕흥사지.

왕흥사지 치미의 배 부분에는 톱니무늬를 바탕으로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왕흥사지에서는 동일한 형태의 연꽃무늬 벽돌과 수막새가 출토되었습니다. 같은 기와에서 찍어낸 치미에 부착했음이 분명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왕흥사지
왕흥사지(사적 427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창건(법왕 2년, 600)과 완공(무왕 35년, 634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왕흥(王興)’이라는 글자가 찍힌 기와편이 발견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탑과 금당, 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했으며, 사역(寺域)의 서쪽 경계에 배수로와 진입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목탑 터의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에서 청동, 금, 은으로 만든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청동 사리함에는 ’577년 2월 15일에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리를 공양하고 절을 세웠다’는 글이 남아 있어, 문헌에 기록된 것보다 이른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초석 주변에 8,000점이 넘는 사리공양구가 있었는데, 이는 공주 무령왕릉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 등과 같은 시기의 고분 출토품과 매우 유사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정지원이 만든 일광삼존불, 보물 196호, 백제 혹은 중국 남조, 6세기, 부여 부소산성

불상과 좌우의 보살상이 하나의 공배와 함께 주조된 이른바 일광삼존 형식의 불상으로, 대좌까지 모두 함께 주조되었습니다. 뒷면에는 ‘정지원이 죽은 아내 조사를 위해 금상을 공경되게 조성하오니, 빨리 삼도를 떠나게 하옵소서.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상의 조각수법이 매우 간략하고 광배의 불꽃무늬와 대좌의 연꽃무늬 등은 정교함이 떨어져 백제 불상 특유의 온화하고 세련된 조형감은 부족합니다. 사비기 백제에서 정시나 조씨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아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광배, 7세기 전반, 부여 부소산성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진리와 지혜의 빛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이 광배는 한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어서 불상의 머리 뒤에 있는 촉과 연결하는 두광(頭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얇은 투조판과 금동판을 결합하고, 매우 정교한 투각 기법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뒷면에는 ‘하다의장이라는 승려)’여섯 글자를 새겼습니다. 최근에는 ‘하다의장이 불상을 만들다.)로 읽어 하다의장을 장인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습니다. 현제 전하는 백제 불상의 광배 중에는 가장 온전하고 화려한 작품으로, 백제 불교공예의 수준을 잘 보여줍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1. 마루끝 장식기와, 7세기, 부여 부소산 사지

OLYMPUS DIGITAL CAMERA2. 금동 허리띠 꾸미개, 7세기, 부여 부소산 사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광배, 백제 혹은 북위, 6세기, 부여 관북리

이 광배는 두광과 신광의 주변을 불꽃무늬로 장식한 배 모양의 거신(擧身) 광배입니다. 두광의 중앙은 연꽃잎으로 장식되었으며, 광배 주위는 불꽃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입체감을 더하였습니다. 광배 중앙에는 본존불과 결합시키기 위한 두 개의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 광배의 가장 큰 특징은 광배 외연에 부착된 사각형의 촉입니다. 삼국시대 금동광배 가운데 유일한 사례이며, 중국 북위의 영향 혹은 백제와 북위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소조상 편, 7세기, 부여 부소산 사지

OLYMPUS DIGITAL CAMERA1. 연꽃무늬 수막새, 6세기 후반 ~ 7세기, 부여 능산리 사지

OLYMPUS DIGITAL CAMERA2. ‘자기사’가 쓰인 목간, ’보희사’가 쓰인 목간, 6세기 후반 ~ 7세기, 부여 능산리사지

‘자기사(子基寺)’ 명 목간은 상부에 V자형 홈이 파여 있는 전형적인 부찰(꼬리표)입니다. 자기사란 사찰명만 보이지만 부찰 목간인 것을 보면 자기사와 능산리절 사이에 물품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희사(寶喜寺)’명 목간은 앞면에는 지진 등 보희사의 승려로 보이는 인명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소금 1석을 보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앞면과 뒷면의 글씨 방향이 다르고, 묵서의 필체가 달라 시간적 차이를 두고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3. 등자, 6세기 후반 ~7세기, 부여 능산리 사지

OLYMPUS DIGITAL CAMERA4. 소조상 편, 6세기 후반 ~7세기, 부여 능산리 사지

OLYMPUS DIGITAL CAMERA5. 금동 풍탁 바람판, 6. 유리편, 6세기 후반 ~7세기, 부여 능산리 사지

부소산 사지와 능산리 사지
부소산 남서쪽 기슭에 위치한 부소산 사지는 중문, 목탑, 금당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되었으며, 강당이나 승방, 부속시설이 없어 순수하게 예불만 하는 사찰로 추정됩니다. 왕궁과 인접한데다 대형치미, 마루끝 장식, 허리띠 꾸미개 등이 출토되어 왕실과 직접 관련된 사찰로 보입니다.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 사지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 상에 배치되었으나, 강당은 일반 사찰과는 달리 조상의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축조되었습니다. 목탑지에서 출토된 석조사리감에는 위덕왕 13년(567)에 왕실이 발원한 사찰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공방 터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는 동아시아 고대 금속공얘의 백미로 손꼽힙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시종을 거느린 인물상, 6세기

두상이 훼손된 소조 인물상으로 중앙의 인물이 양팔을 벌리고 양 옆의 시종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복식과 자세가 당 염립본의 <왕회도> 및 공현석굴 등에서 보이는 황제행렬도나 예불도의 장면과 흡사합니다. 정림사를 발원한 백제 성왕이 시종을 거느리고 예불행렬을 나선 모습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소형 소조상 머리, 6세기

소형 소조상으로는 주로 두상이 출토되었습니다. 목의 아랫면에는 심목 구멍이 확인되어, 머리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서로 연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납석으로 만든 삼존불상, 6세기,

1979년 서회랑지 중간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왼쪽의 협시보살은 천의자락이 x자 모양으로 교차되고, 손에는 보주와 같은 지물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양 또는 동위 양식에 가깝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봉보주보살상편, 6세기

정림사지의 서회랑지와 남회랑지가 접하는 지점의 기와 폐기구덩에서 200여 점의 소조상 파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봉보주보살상은 서산 마애삼존불과 함께 백제에서 유행한 보살상으로, 중국 남조 양대와 일본의 아스카시대에 유행한 양식이기도 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서까래 기와,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중국청자, 6세기, 1. 청자연꽃무늬 단지편, 중국 남북조, 2. 청자뚜껑, 중국 남북조~수, 3. 청자단지편, 중국 남북조~당

삼국시대에 수입된 중국의 자기는 성곽과 제사유적, 사지, 그리고 왕이나 귀족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자기는 유적 편년에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정림사지에서 수습된 청자연꽃무늬 단지편은 520년경으로 편년되는 중국 남경 대문산남조묘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여 정림사의 창건 시기를 가늠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4. 벼루, 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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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평백제국비명’탁본

전쟁에서 승리한 당나라 장군 소정방(592~667년)이 백제의 대표적인 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에 자신의 전공을 총 2,126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탑에 새겨진 명문에서 당 고종 현경5년(660) 8월15일에 작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웅진성에서 사로잡은 7월18일에서 멀지 않은 시점입니다. 한편 탑에 새겨진 대부분의 내용의 승자의 입장에서 왜곡되고 과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멸망 당시 백제의 청치 상황과 지방지배 체제, 호구 등의 내용은 후대에 남겨진 문헌을 보충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정림사지
정림사지(사적 301호)는 사비도성의 중심지이자 왕궁의 남쪽에 세운 국가 사찰터입니다. 정림사는 목탑이 금당 앞뜰을 넓게 차지하던 기존의 백제 사찰과는 달리 석탑을 이용해 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줄였습니다.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했으며, 좌우에 회랑과 승방이 있었습니다. 석탑의 하부 기초는 판축토층으로 창건 당시에는 목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탑에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소조상과 자기편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나타냅니다. 오층석탑(국보 9호)의 1층 탑신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새겨 놓은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이 사찰은 ‘정림사(定林寺)’라는 명문이 찍힌 고려시대 기와가 발견되어 정림사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 석굴사원과 벽화, 중앙아시아 사막의 불교문화

석굴사원은 수도자들이 더위와 비를 피하여 명상을 하기 위해 바위로 된 벼랑에 동굴을 파서 만들었다.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소카왕때 처음 생겼으며,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에도 전해졌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앙아시아의 키질, 투루판 베제클릭, 둔황석굴, 중국의 윈강 석굴 등이 규모도 크고 잘 알려진 석굴들이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석 석재로 인공적으로 조성은 석굴암이 대표적이다. 특히, 막고굴이라 불린 둔황 석굴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 이후 전진(前秦)이 지배하던 4세기부터 원나라때까지 끊임없이 조성되었다. 막고굴에는 불상들과 벽화로 꾸며져 있으며, 불경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발견되기도 한다. 20세기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서들이 둔황의 장경동에서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석굴사원의 가치가 재조명되었으며, 이 시기에 서구인들은 벽화를 떼어가는 등 약탈에 가까운 방법으로 석굴사원의 유물들을 반출하여 세계각지의 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중앙아시아 석굴사원에서 약탈한 문화재들을 다수 소장.전시하고 있는데 투루판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초에는 세계적인 중앙아시아 유물 수집의 유행이 있었는데, 이때 일본 교토 니시혼간지의 주지승인 오타니 고즈이라는 사람이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을 동원하여 3차에 걸쳐서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났는데, 현지에서 약탈과 구매 등의 방법으로 무려 5천여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집했으며 이를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있다. 많은 중앙아시아 유물들을 수집한 오타니가 파산을 하게 되면서 이를 구매한 일본 자본가 구하라가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를 위해 조선총독부에 이를 기증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유물이 남아 있다. 오타니 컬렉션은 전체 유물의 1/3은 한국에, 1/3은 중국뤼순에, 1/3은 일본에 남아 있다고 한다.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사원과 토유크 석굴사원에서 수집한 벽화편은 당시의 야만적인 유물수집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들로 벽면에 칠해져 있던 벽화를 떼어내어 옮겨 왔는데, 원본이 손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는 서구 각지의 둔황유물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불도, 千佛圖, 투루판, 6~7세기.

우주에 현재하는 불법 등을 상징하는 천불도의 일부이다. 동일한 크기의 불상을 반복하여 배열하면서, 채색을 달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다른 천불도와 비교할 때, 매우 간략한 표현과 부처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물결무늬가 특징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석굴사원과 벽화
중앙아시아의 종교 유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석굴사원은 서역북도(西域北道)에 집중되어 있다. 투루판지역의 베제클리크, 토유크, 야르호, 셍김아기즈와 쿠차지역의 키질, 쿰트라, 키질가하와 같은 유적이 유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앙아시아벽화 중 대다수는 투루판의 석굴사원에서 가져온 것이며, 쿠차지역의 벽화도 일부 소장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투루판의 야르호 석굴(Yarkhoto Caves, Turpan), 쿠차의 키질 석굴(Kizil Caves, Kucha). 중앙아시아는 뜨거운 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인도에서 조성되었던 석굴사원이 중앙아시아에도 많이 조성되었다. 건조한 기후덕분에 석굴사원에 있던 많은 유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막고굴이라고도 불리는 둔황석굴. 전진(前秦)이 지배했던 4세기부터 원나라때까지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수많은 석굴사원들아 조성되었다. 이 곳 석굴사원 중 하나인 장경동에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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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승려, 行脚僧圖, 둔황, 9~10세기

이 그림은 경전을 짊어지고 여행하는 승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주인공은 노란 점과 붉은 선으로 장식된 검은색 천을 어깨에 걸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왼손에는 주미(麈尾)를 들고 발에는 붉은색 샌들을 신었다. 승려의 머리 위에는 작은 부처가, 다리 사이에는 호랑이가 보인다. 부처 옆 방제의 윗부분은 박락되었고 아랫부분에 “여래불(如來佛)”이라는 글자만 보인다. 그림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현장(玄裝), 보승불(寶勝佛), 티베트 불화에 보이는 18나한(羅漢) 가운데 한명이 달마다라(達磨多羅),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공연하는 이야기꾼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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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이 그려진 번, 菩薩幡, 둔황(敦煌), 10세기

20세기 초 중국 간쑤성(甘肅省)에 위치한 둔황에서는 수많은 문서와 불화가 발견되었다. 이 중에는 좁고 긴 천으로 만들어진 드리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전문용어로는 ‘번’이라고 부른다. 둔황에서 발견된 번에는 2명의 보살이 그려져 있다. 위쪽의 보살은 가사를 걸친 채 왼쪽을 향하고 있고, 아래쪽의 보살은 군의를 입고 천의를 걸친 채 정면을 향해 서 있다. 붉은색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음영을 가해 입체감을 주었다. 보살 옆에는 보살의 이름을 써 넣은 방제가 있는데, 아래 보살의 경우 “나무불휴식보살(南無不休息菩薩)”이라는 글씨가 확인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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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그림 드리개, 菩薩立像幡, 둔황, 10세기.

이 드리개에는 풍만한 신체를 지닌 보살이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같은 변화 있는 선은 중국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그 영향이 이 지역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현재보다 더 길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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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잠긴 승려, 僧像, 둔황, 1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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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잠긴 승려, 僧像, 둔황, 1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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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잠긴 승려, 僧像, 둔황, 10세기

승려를 표현한 부조 3점은 건축물의 벽면에 부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각의 승려는 감실에 앉아 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의 승려들은 명상에 잠긴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를 두건같이 감싸며 몸을 완전히 가리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으며, 그 옷은 승려마다 각기 다른 색을 띤다. 일부 상에는 금칠의 흔적도 보인다.  (출처: 중앙박물관)

사막에 핀 신앙의 꽃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러 교역로를 통해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와 같은 다양한 종교가 중앙아시아로 전해졌다. 종교활동을 위해 세워진 많은 사원은 여러 신의 모습과 종교적 철학, 아상향, 신도 등을 표현한 그림과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10세기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동투르키스탄 지역에서는 불교가 특히 성행하였다. 이곳의 여러 불교 사원에는 헬레니즘 미술과 인도, 페르시아, 중국의 요소가 섞인 불상과 벽화가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토유크(Toyuk, 吐浴溝) 석굴사원. 고창고성에서 동북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 골짜기로 천산산맥의 눈이 녹아내린 물이 투루판분지로 흘러드는 계곡이다. 여기에 있는 46기의 석굴은 5세기 말과 7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문서와 불화도 다수 발견되었다. 지금은 위구르 전통 마을이 남아 있는 외진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막과 황무지로 이루어진 투루판지역에서 그나마 사람의 통행이 많은 교통로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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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이 그려진 번, 觀音普薩幡, 투루판 토유크 석굴, 9~10세기. 가운데 관음보살이 있으며, 그 주위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예배하는 보살과 인물이 여럿 그려져 있다. 관음보살이 쓰고 있는 높은 모자의 정면에는 관음보살이 모시는 부처인 아미타여래가 작게 표현되어 있다.

산산현(鄯善县)에 위치한 토유크 석굴은 46기의 석굴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문서와 불화도 다수 발견되었다. 화면의 중앙에 앉아 있는 보살은 보관에 작은 불좌상이 있어 일찍부터 관음보살로 판명되었다. 보살은 머리 좌우에 원형 장식을 부착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지물을 받치고 있다. 중앙의 관음 보살을 둘러싸고 있는 보살은 원래 3단에 각 2명씩, 모두 6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거의 동일한 크기와 구성을 지닌 그림이 베를린 아시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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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이 그려진 드리개, 菩薩幡, 토유크 석굴사원, 8~9세기,

앞뒷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드리개이다. 상단의 삼각형 공간에는 작은 불좌상이 있고, 그 아래에 몸을 한쪽으로 약간 틀고 있는 보살이 서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어깨에는 휘날리는 천의를 두르고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회화 단편, 繪畵斷片, 투루판 토유크 석굴, 10~11세기. 세명이 인물이 흰옷을 입고 있어 마니교도를 그린 그림으려 알려져 있지만,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는 왼쪽에 있는 문을 향해 세 명의 인물이 나란히 서 있다. 문의 왼쪽에도 또 다른 인물의 윤곽이 희마하게 보인다. 배경은 붉은색이며 오른쪽 윗부분은 여러 개의 검은 점으로 덮여 있다. 흰옷을 입은 세명의 인물을 마니교도(摩尼敎徒)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다만 이들이 쓰고 있는 모자가 투루판 지역에서 출토된 자료에 등장하는 마니교도의 모자와 다른 모양이어서 앞으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 그림은 면에 그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출처: 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베제클리크(伯孜克里克, Bezekllik) 석굴사원, ‘베제클리크’은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는 베제클릭 석굴사원은 서역북도에 위치한 투루판 일대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군이다. 원래 80기 이상의 불교와 마니교 석굴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50기 정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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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변단편, 法華經變斷片,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23굴, 9세기

제23굴 전실에 그려진 <법화경변> 단편이다. 벽화의 윗부분에는 여러 색의 구름으로 이루어진 둥근 구획 안에 보살의 성중(聖衆)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연꽃대좌 위에는 정면을 향해 가부좌(跏趺坐)를 한 보살이 있고, 그 주위로 보관과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를 한 보살이 있다. 벽화의 아랫부분에는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된 인물들이 말, 낙타 등을 이끌고 오른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천불도 단편, 千佛圖斷片,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8굴, 6~7세기

제18굴 회랑에 그려진 천불도 단편이다. “천불”이란 무수히 많은 부처를 가리킨다. 부처는 불법과 동일시되기 때문에, 수많은 부처를 그린 천불도는 불법이 우주에 편재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체로 열과 행에 따라 동일한 형식의 부처가 반복되는 구성이다. 천불도 단편에서 부처는 가는 흰색선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구획 안에 배치되어 있으며, 통견의 법의를 입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큰 얼굴, 명암법, 어두운 배경색은 모두 베제클리크 초기 벽화의 특징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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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상 단편, 惡鬼像斷片,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10~12세기,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중당(中堂)의 네 모퉁이에는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안쪽 좌측 벽에 그려진 사천왕 앞에 앉아 있는 악귀를 그린 것이다. 악귀는 겁에 질린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앞으로 모아 화살 2개를 쥐고 있다. 오른쪽에는 사천왕의 오른쪽 발과 코끼리 머리장식을 한 오른쪽 다리 일부가 보인다. 악귀의 과장된 표정과 근육, 화려한 채색 등이 특징이다.
베제클릭석굴사원, ‘베제클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는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서역북도에 위치한 투루판 일대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군이다. 원래 80기 이상의 불교와 마니교 석굴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50기 정도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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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상단편, 惡鬼像斷片,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 15굴, 10~12세기,

눈이 세개인 악귀가 표현된 벽화 단편이다. 제15굴 중당에는 각 모퉁이에 사천왕이 그려져 있는데, 이 악귀는 입구 좌측에 그려진 사천왕 옆에 그려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녹색 피부의 악귀는 타원형의 얼굴에 눈을 부릅뜨고 있으며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하였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위로 올려 긴 화살통을 들고 있다. 악귀의 색채 구성과 표현방식이 제15굴 중당에 그려진 화두금강(火頭金剛) 단편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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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帳幕壁畵斷片, 투루판 베제클리 석굴사원 제15굴, 10~12세기, 회랑 벽면과 천정이 만나는 부분에 그려진 장식문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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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帳幕壁畵斷片,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제15굴, 10~1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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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가 있는 벽화 단편,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10~12세기. 위구르어와 한자로 쓴 명문이 있는 벽화 단편이다. 공양자의 이름과 발원 시기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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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Vidya-raja),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10~12세기,

분노에 찬 모습을 한 채로 화염에 둘러싸여 있는 명왕의 하반신에 해당하는 벽화이다. 베제클릭 제 20동굴의 중당 벽화에서 확인되는 유사한 도상에 의거하여 볼 때, 이 상은 6개의 팔을 지니고 각각 칼, 도끼, 법륜 등을 든채 오른쪽을 향해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서원화(Pranidhi scene in Bezeklik Caves),
베제클릭 석굴사원, 베제클릭 석굴사원에서 그 형식이 완성되고 널리 그려진 대표적인 벽화로 ‘서원화’가 있다. 석가모니가 각기 다른 전생에서 당시의 부처(현재의 시점에서 볼 떄 과거불)로 부터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 이야기가 한 화면에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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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화 단편, 誓願畵斷片,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33굴, 10~12세기, 복제품, 석가모니가 전생에 상인이었을 때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제33굴 오른쪽 벽 안쪽에서 2번째로 배치된 서원화의 일부분이다. 서원화는 석가모니가 각기 다른 전생에서 당시의 부처, 즉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과거불을 만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이 벽화에는 두 명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공양물이 담긴 화려한 쟁반을 들고 있고, 왼쪽 끝에는 공양의 대상이 되는 과거불의 광배, 발, 옷자락 등의 일부가 보인다. 인물의 얼굴과 복장에 각기 다른 개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차림새로 보아 당시 실크로드에서 상인으로 활약한 소그드인과 위구르인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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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화,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이었을 때,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10~12세기.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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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화,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이었을 때,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10~12세기.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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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화, 석가모니가 전생에 수행자였을 때,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10~12세기,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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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화,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이었을 때,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10~12세기. 복제품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교하고성 대불사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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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도 단편, 千佛圖斷片, 투루판 아르호 석굴 제4굴, 10~12세기

야르호 석굴은 투루판의 교하고성(交河古城) 서쪽면의 암벽을 파서 만들었고, 총7기가 현존한다. 이 벽화는 제4굴에 그려진 천불도의 일부이다. 제4굴의 천불도에는 밝은 바탕색 위에 선묘 위주로 표현된 부처가 그려져 있다. 얼굴, 법의, 연꽃 대좌 모두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표현되었다. 법의의 경우 다리부분은 좌우로 긴 타원형이며, 상의는 U자형 선을 반복하여 묘사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이루어진 광배는 몇겹의 원으로 표현하고 녹색과 함께 붉은 색을 더했다. 이 천불도의 방제에는 “나무(南無)”라는 존칭과 함께 부처의 이름인 “통천불(通天佛)”이 쓰여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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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단편, 壁畵斷片, 투루판, 10~12세기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례 지리산 연곡사, 화려한 승탑문화를 꽃피운 선종 사찰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 피아골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연곡사(鷰谷寺)이다. 이 사찰은 국보급 문화재인 동부도 (국보53호), 북부도(국보54호), 서부도(보물154호)와 동부도탑비(보물153호), 현각대사탑비(보물 152호), 삼층석탑(보물 151호) 등 화려한 승탑문화가 남아 있다 이는 통일신라말 불교의 큰 흐름이었던 선종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구산선문이었단. 남원 실상사,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가 지리산을 중심으로 호남지방에 자리잡고 있다.

연곡사는 삼국시대 연기조사가 처음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 선종사찰로 크게 번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참전하면서 왜군에 의해 사찰이 불타버렸으며, 이후 소요대사 태능을 중심으로 중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고광순의 중심으로 의병활동 때문에, 한국전쟁에서는 빨치산 활동으로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폐사되었던 것으로 1960년대 이후 대웅전을 비롯하고 크고 작은 불전들과 요사채가 들어서면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최근까지 사찰 건물들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원래의 규모에 비해서는 많이 축소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례 지리산 연곡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뒷편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전과 요사채들이 들어서 있고, 앞쪽은 넓은 마당을 이루고 있다. 연곡사는 통일신라 말 선종계열 사찰로 크게 번창했는데, 지리산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많은 승려들이 머물 수 있도록 요사채 건물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구례 지리산 연곡사(鷰谷寺),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는 백제 성왕22년(544)에 인도의 고승인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연기조사가 처음 절의 터를 잡을 적에 이곳에 큰 연못이 있어 물이 소용돌이치며 제비들이 노는 것을 보고 연곡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선종사찰로 번성하였고 도선국사, 현각선사 등 많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연곡사 스님들이 승병활동을 했던 보복으로 왜군에 의해 완전 전소되었으나 임란 이후 소요태능스님이 중창불사를 하여 400여 스님들과 더불어 이곳에 총림을 개설하고 선풍을 일으켰다. 1907년 연곡사가 항일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다시 일본군에 의해 완전 전소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 다시 전소되는 수난을 겪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된 동승탑(국보 53호), 북승탑(국보 54호)과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보물 151호), 현각선사탑비(보물 152호), 동승탑비(보물 153호), 소요대사탑(보물 154호) 등의 석조물만이 유적으로 남아 전해오고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중흥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안내문, 연곡사,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연곡사가 자리잡고 있는 피아골.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골짜기들 중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연곡사도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 상당기간 동안 거의 폐사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곡사 일주문.

OLYMPUS DIGITAL CAMERA일주문 안쪽 넓은 정원에 있는 연못.

OLYMPUS DIGITAL CAMERA경내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삼층석탑. 선종사찰로서 자리잡은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선종 계열 사찰이기는 하지만 삼층석탑의 위치로 볼 때 현재의 건물 배치는 원래의 규모에 비해 크게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강당 건물인 삼홍루. 앞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로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앞에서 본 일주문과 주변 풍경. 지금은 넓은 마당과 정원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여러동의 요사채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곡사 경내. 연곡사는 선종계열 사찰로 크게 번창하기는 했지만, 인근 화엄사의 영향을 받아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계단식으로 터를 조성한 후 건물을 세웠다.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전란으로 불에 타 버려 내력있는 목조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곡사 주불전이 대적광전.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렸던 것을 60년대에 작은 규모로 중건했던 것을 최근에 연곡사의 규모에 걸맞게 큰 건물로 새로 지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적광전 왼쪽편 관음전.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편 명부전.

OLYMPUS DIGITAL CAMERA명부전 뒷편 삼성각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불전들이 있는 곳보다 아래쪽에는 요사채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ㄱ’형으로 담장이 있는 살림집 형태를 하고 있는 무설전.

OLYMPUS DIGITAL CAMERA맞은 편에 위치한 소요당.

OLYMPUS DIGITAL CAMERA범종각.

OLYMPUS DIGITAL CAMERA주불전인 대웅전 뒷편에 연곡사를 대표하는 동승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전남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에 위치한 동 승탑(국보 53호)이다. 목조건축물을 모방해서 만든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승탑이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는 전하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지붕들은 당시 목조건축물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기와, 서까래 등을 새밀하게 새겨 놓고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동 승탑 옆에 있는 탑비(보물 153호)이다. 글이 새겨진 비몸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웅장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조각수법이 떨어지 머릿돌에 용무늬를 생략하는 등 형식적이며 간략해진 고려시대 탑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몸이 없고 탑의 이름을 적어 놓는 머릿돌 가운데 글씨가 남아 있지 않아 탑과 탑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승탑에서 내려다 본 연곡사.

OLYMPUS DIGITAL CAMERA동승탑에서 조금더 걸어오르면 북승탑이 나타난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승탑(국보 54호)은 고려초기에 세워진 승탑으로 승탑의 크기, 구성요소, 조각수법 등에 있어서 동 승탑과 거의 비슷하다. 승탑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아래쪽에 있는 현각선사의 승탑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동 승탑을 모방해서 만들기는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난 걸작으로 고려초기 승탑을 대표할 수 있는 유물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곡사 대웅전 서쪽편에는 고려초 연각사를 크게 중흥시킨 현각선사 탑비와 조선중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한 소요대사 승탑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전남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 경내에 있는 현각선사탑비(보물 152호)이다. 이 탑비는 고려초 활동했던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글이 적힌 비몸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머리와 거북모양의 몸체로 되어 있다. 머릿돌은 여러마리의 용이 다투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세밀하고 힘이 넘친다.

OLYMPUS DIGITAL CAMERA 전남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에 있는 소요대사탑(보물 154호)이다. 연곡사 경내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부도(西浮屠)라고도 불린다. 석종형 승탑이 많이 만들어졌던 조선 중기에 조성된 승탑이지만 통일신라 승탑인 동 승탑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동 승탑이나 북 승탑에 비해 조각수법 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동시대 승탑에 비해서 조형미가 양호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소요대사탑 아래에는 구한말 이지역 의병을 이끌었던 고광순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때 일본군에 의해 연곡사가 불타 버렸다고 한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