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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경내에 남아 있는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이다. 통일신라말 고승 선각대사 형미를 기리기 위해 고려초 (946)에 세운 탑비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비몸, 머리돌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머리에 거북몸을 하고 있는 거북받침돌이다. 비를 받치는 비좌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를 새겼다. 머릿돌에는 비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형태의 공간이 있으며, 그 주위에 구름속의 용의 모습을 조각했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의 행적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면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선각대사 형미(864~918)는 통일신라말 고승으로 보리사 보조선사의 제자이다. 당나라에 14년간 유학했으며 무위사에서 8년간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 통일신라말 당나라 비석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탑비의 형식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용머리에 거북몸을 하고 있는 받침돌. 조각수법이 섬세하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거북받임돌. 비를 받치는 비좌에는 꽃무늬 모양의 안상을 새겨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서 본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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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몸에는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과 최언위가 글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오래된 비석이지만 글자가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머릿돌.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해 놓고 있는데 죽은이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탑의 이름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 볼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보물 507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비는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는 선각대사(864~918)를 기리기 위해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세운 것이다. 대사는 통일신라 말의 명승으로 법명은 형미, 속세의 성은 최씨다. 형미는 무위갑사(현재의 무위사)의 주지로 8년간 머물렀고, 어려울 때 왕건을 도와준 바 있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받침돌의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실성 있게 표현되었다. 몸돌에는 선각대사의 행적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겼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인 뛰어난 작품이다. 비의 높이는 2.35 m, 폭은 1.12 m이다. (안내문, 강진 무위사, 2010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무위사,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

국립광주박물관 중앙 로비에 전시중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103호)이다.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쌍사자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원래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절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반출하려던 것을 회수하여 경복궁 내에 옮겼다가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쌍사자 석등은 2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통일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이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5호),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353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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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103호). 2마리의 사자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석등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쌍사자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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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사실적 표현과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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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사자 석상. 사실적이며 힘이 넘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가 새겨진 평이한 모습의 아래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팔각형으로 4곳에 창을 두고 있다. 특별한 장식이 없으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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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통일신라 9세기 후분, 전남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절터
석등은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빛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는 곳이다. 받침은 두 마리의 사자가 늠름하게 가슴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며,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사자는 갈기가 달린 숫사자로 입과 갈기, 꼬리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불을 켜는 곳에는 창을 댄 못 구멍이 남아 있고, 지붕돌에는 연꽃모양 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의 석등, 박경식, 학연문화사, 2013년

영주 부석사 조사당(국보 19호), 고려 이전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는 전각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 경내에 있는 조사당(국보 19호)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 초상을 모시는 건물로 무량수전 뒷편 언덕 숲길을 따라서 조금 걸어가면 볼 수 있다. 조사당 앞에는 의상대사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 전해지는 어사화가 있고, 동쪽에는 사명대사가 수도했다고 전해지는 취현암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사천왕상 등이 그려진 고려시대 벽화(국보 46호)가 있다.

조사당은 고려 말 (1377년)에 세워졌으며, 여러차례 수리를 거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3칸, 옆면1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을 하고 있는 작은 건물이다. 앞면 가운데에 출입문을 두고 있으며, 양쪽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고려말에 지어졌지만 삼국시대 이래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불전 건축 양식이 많이 남아 있어 건축의 역사에서 중요한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주 부석사 조사당(국보 19호).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 초상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전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앞면 3칸 규모로 주심포 공포를 비롯하여 앞면이 벽으로 되어 있는 등 고려시대 이전 건축 양식이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사당 현판. 세로 쓰기를 하고 장식 등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고려시대 목조 건축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주심포 양식의 공포.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에 출입문을 두고 있는데, 벽면 가운데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고려시대와 이전 건축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쪽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광창을 두고 있다.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배흘림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국보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11-20151009조사당 내부 벽면에 있던 벽화(국보 19호). 사천왕상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벽화는 일제강점기에 떼어내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조사당 앞에 심어진 어사화.

조사당 선비화
선비화의 학명는 골담초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부석사는 통일신라 화엄십찰을 대표하는 사찰로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부석사에는 주불전인 무량수전(국보18호)과 조사당(국보19호) 등 대표적인 불교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건물들은 경사진 언덕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경주 불국사와 함께 한국적인 사찰 건축의 모범이 되었던 곳이다. 예산 수덕사, 안동 봉정사 등 많은 사찰들이 부석사와 비슷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사당 옆에 있는 작은 암자. 사명대사가 수도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모습.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조사당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21년(1490)과 선조 6년(1573)에 다시 고쳤다. 고려 신종 4년인 1201년 단청을 하였다는 기록도 확인된 바 있어 조사당이 세워진 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무량수전과 같이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양식이다. 출입문 좌우 안쪽 벽에는 고려시대에 그려진 제석천과 범천 그리고 사천왕상이 있었는데, 1916년 건물을 수리하면서 떼어 내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원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벽화이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 있는 벽화는 새로 그린 것이다.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출처>

  1.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255호)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에 있는 당간지주(보물 255호)이다. 부석사를 오르는 은행나무길이 끝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깃발을 다는 장대를 지탱해 주는 높이 428 m의 돌기둥이 1 m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기둥사에느는 연꽃장식이 있는 당간을 받치는 받침돌이 있다. 외형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간결하면서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인 외형이나 조각수법 등을 고려해 볼 때 통일신라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부석사는 통일신라 화엄십찰을 대표하는 사찰로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부석사에는 주불전인 무량수전(국보18호)과 조사당(국보19호) 등 대표적인 불교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건물들은 경사진 언덕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경주 불국사와 함께 한국적인 사찰 건축의 모범이 되었던 곳이다. 예산 수덕사, 안동 봉정사 등 많은 사찰들이 부석사와 비슷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255호)

OLYMPUS DIGITAL CAMERA2개의 당간지주 사이에 있는 당간을 받쳤던 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부석사 오르는 길에서 보이는 당간지주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2009년 가을.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255호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 c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당간지주 윗부분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 놓인 정사각형의 받침돌 위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중앙에는 직경 30 cm의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칠 수 있게 하였다. 대체로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간격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부석사, 2017년)

<출처>

  1.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보물 1565호), 가야산 고갯길 입구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

경북 성주군 수류면 백운리 법수사(法手寺)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1656호)이다. 높이 6 m로 비교적 큰 규모로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새겼으며, 위층 기단과 탑신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일반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에 비해 1층 기단이 높게 만들었다. 해인사 부근 월광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한 양식이다. 전체적으로 약간 불안정하게 보이며 전체적인 조형미는 약간 떨어지는 편이다.

법수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때(802년)에 창건된 사찰로 성주에서 해인사로 넘어가는 서성재 고갯길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500 m 정도의 가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산지 사찰로 전망이 좋은 곳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전각들이 있는 큰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었다. 주위에 형성된 마을 규모로 당시 사찰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큰 금당터가 남아 있는데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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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보물 1656호). 높이 6 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삼층석탑이 가야산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 아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아래층 기단을 높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탑신부.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져놓고 있다. 지붕돌은 얇게 만들어졌으며 모서리를 치켜올려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앞에 놓여진 석물. 연꽃모양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석등받침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설명이 없다. 석탑과 너무 가까이 있어 원래 위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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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절터는 가야산 중턱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탑이 있는 주불전 영역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빼어나다. 사찰을 조성할 때 해가 떠는 동쪽을 향해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영주 부석사, 구례 화엄사, 합천 영암사지 등에서 볼 수 있는 공간배치로 화엄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석탑 옆쪽에 남아 있는 큰 규모의 금당터.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에 모아 놓은 절터에 남아 있던 석재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입구에서 본 모습.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을 경계짓는 가야산 줄기가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에서 본 모습. 주위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법수사의 옛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법수사지삼층석탑, 보물 1656호, 경북 성주군 수류면 백운리
이 탑은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사찰인 법수사에 조성된 높이 6 m의 3층석탑이다. 대가람으로 전해지는 법수사(法手寺)는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고 석탑과 금당터의 거대한 석축,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제자인 김황(나주김씨의 비조)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또한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에 1,000여 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대가람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석탑은 이중의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는 파손되었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옥개석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높은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양식상의 변화를 볼 때 신라 말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성주군성,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