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불교문화재

경주 보문사지 석조(보물)

경북 경주시 보분동 보문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石槽, 보물)이다. 큰돌을 파서 만든 물통로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거나 물을 마시는데 주로 사용된다. 특별한 장식을 새겨 놓지 않았으며 아랫단에 물을 빼는 구멍이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보문사지 석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보문동 일대는 신라를 건국한 경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명활산 고야촌이 있던 지역이다.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비부가 되었으며 설(薛)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설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총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 마을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가 남아 있는 보문사지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도심 방향으로 보이는 낭산과 황복사지 절터>

경주 보문리 석조(慶州 普門里 石槽, 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
이 곳은 신라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낭산(狼山)과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이에 형성된 들판으로, ‘보문사(普門寺)’라고 새겨진 기와의 발견을 통해 절 이름이 알려졌다. 부근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金堂址)와 동서의 목탑터,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이 남아 있다. 이 돌 물통(石槽)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아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로로 놓인 직육면체의 돌 안쪽을 파냈으며 외부와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불국사(佛國寺) 안에 있는 4개의 돌 물통을 모두 장식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이 보문리 돌 물통은 뒤편 북쪽 가운데 아랫단에 물을 빼기 위한 구멍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 유물들과 관련지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위키백과, 2021년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옛 미륵대원지(사적) 절터에 석조여래입상(보물)이다. 5개으로 돌로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얇은 돌로 만든 갓을 올렸다. 얼굴 형태 및 세부적인 표현에서 단순하고 투박하면서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초기 여러 지방에서 호족세력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거대 불상 중 하나이다. 불상은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석굴에 모셔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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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미륵대원지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입상(보물). 고려초기에 여러 지방에서 조성되었던 투박한 거대 석조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해체.수리 중인 내부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석굴 벽면 구조물에 사용되었던 석재들

OLYMPUS DIGITAL CAMERA2019년 봄 불상과 석굴은 수리중에 있었다. 불상은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석굴에 모셔져 있었다. 석굴의 건축수법이나 조형미는 석굴암에 비해 상당히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다.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06-20060220
수리하기 전 모습. 지붕과 앞쪽 출입문 등은 목조 구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리 석불입상,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있으며, 본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이다.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며, 거대한 원통에 가까운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옛 미륵대원지(사적)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보물)이다. 불상이 모셔진 석굴사원 앞에 석등과 일렬로 세워져 있다. 석탑은 원래 있던 바윗돌 위에 돌을 올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튀어 나온 부분이 적고 경사가 심해 벽돌로 쌓은 전탑처럼 보인다. 상륜부에는 복발, 찰주 등이 남아 있는데 머리장식 받침을 크게 만들어 6층 지붕돌처럼 보인다.  특별한 장식은 거의 없으며 조각수법이나 조형미는 통일신라 석탑에 비해 떨어지는 편으로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1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등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는 원래 있던 바위 위에 돌을 올렸다.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몸돌과 지붕돌. 1층 지붕돌만 2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좁게 기둥을 새겨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2~5층 몸돌과 지붕돌.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튀어나온 부분이 적어 전탑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불상을 모신 석굴 앞에 석등과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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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석굴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보물95호
높이 6 m의 오층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탑신석을 올려 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옥개석의 너비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 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며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보물)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경내에 남아 있는 선각대사탑비(보물)이다. 통일신라말 고승 선각대사 형미를 기리기 위해 고려초 (946)에 세운 탑비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비몸, 머리돌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머리에 거북몸을 하고 있는 거북받침돌이다. 비를 받치는 비좌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를 새겼다. 머릿돌에는 비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형태의 공간이 있으며, 그 주위에 구름속의 용의 모습을 조각했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의 행적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면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선각대사 형미(864~918)는 통일신라말 고승으로 보리사 보조선사의 제자이다. 당나라에 14년간 유학했으며 무위사에서 8년간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보물). 통일신라말 당나라 비석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탑비의 형식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용머리에 거북몸을 하고 있는 받침돌. 조각수법이 섬세하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거북받임돌. 비를 받치는 비좌에는 꽃무늬 모양의 안상을 새겨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서 본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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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몸에는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과 최언위가 글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오래된 비석이지만 글자가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머릿돌.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해 놓고 있는데 죽은이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탑의 이름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 볼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보물 507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비는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는 선각대사(864~918)를 기리기 위해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세운 것이다. 대사는 통일신라 말의 명승으로 법명은 형미, 속세의 성은 최씨다. 형미는 무위갑사(현재의 무위사)의 주지로 8년간 머물렀고, 어려울 때 왕건을 도와준 바 있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받침돌의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실성 있게 표현되었다. 몸돌에는 선각대사의 행적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겼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인 뛰어난 작품이다. 비의 높이는 2.35 m, 폭은 1.12 m이다. (안내문, 강진 무위사, 2010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무위사,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

국립광주박물관 중앙 로비에 전시중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이다.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쌍사자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원래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절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반출하려던 것을 회수하여 경복궁 내에 옮겼다가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쌍사자 석등은 2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통일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이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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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2마리의 사자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석등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쌍사자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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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사실적 표현과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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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사자 석상. 사실적이며 힘이 넘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가 새겨진 평이한 모습의 아래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사석>

팔각형으로 4곳에 창을 두고 있다. 특별한 장식이 없으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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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통일신라 9세기 후분, 전남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절터
석등은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빛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는 곳이다. 받침은 두 마리의 사자가 늠름하게 가슴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며,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사자는 갈기가 달린 숫사자로 입과 갈기, 꼬리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불을 켜는 곳에는 창을 댄 못 구멍이 남아 있고, 지붕돌에는 연꽃모양 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의 석등, 박경식, 학연문화사,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