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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경패(보물 175호)

순천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경패(보물 175호)이다. 불경을 넣은 나무상자에 달아서 사용했던 일종의 꼬리표이다. 상아패 43점, 목제패 33점으로 총 43점이 남아 있다. 표면에는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겼으며,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조각수법 등으로 볼 때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경패, 보물 175호, 고려

OLYMPUS DIGITAL CAMERA상아로 만든 경패. 불상 등을 돋을새김으로 섬세하게 조각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나무로 만든 경패.

경패는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하여 제작된 경질이나 목함의 곁에 달아 그 안의 경전에 수록된 내용을 식별하기 위해 부착했던 꼬리표이다. 이 경패는 제6세 원감국사께서 강화도 선원사의 거란본대장경을 송광사로 이운할 때 함께 옮겨져 온 것으로 건란본대장경 외부에 달아두었던 것이다. 조각의 정교함이나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유물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중앙박물관 중국실] 중국의 불비상과 불상

1. 예기(禮器)2. 명기와 도용, 3. 신선사상과 도교4. 불비상과 불상5. 도자기6. 중국회화

중국의 불교는 전한(前漢) 때 서역과의 교통로가 열리면서 전래되었다. 중국의 불교는 후한 이후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진출한 남북조시대에 지배층의 후원을 받아 크게 번창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서역의 영향을 받아 많은 운강석불이나 용문석불같은 석굴사원들이 세워졌으며, 많은 불상들이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북조(北朝)의 국가적.주술적.실천적인 성격과는 달리 남조에서는 현학(玄學)적인 성향의 교리중심을 불교가 성행했으며, 인도로부터 참선 중심의 선종(禪宗)이 전래되었다.

수.당시대에는 불교가 통일국가에 걸맞게 체계화.조직화가 진행되었으며 천태종, 화엄종과 같은 다양한 종파가 성립되었다. 또한 인도로부터 밀교가 전해져 크게 유성하였다. 송대 이후에는 중국 불교가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몽골의 원(元)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淸)에서는 티벳불교라 할 수 있는 라마교가 지배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불교의 변화는 한반도나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어 그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중국 남북조~당대에 조성된 불비상. 불비상은 비석형태에 돋을새김으로 불상 등이 새겨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시대 초 충청도지방에서 불비상이 만들어 졌다.

중국인의 고대종교 – 불교
중국의 불교는 동한 명제(58~75년) 때 인도에서 서역을 통하여 처음 전래되었다. 이후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중원지역에 왕조를 세웠던 남북조시대 지배층의 후원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고 불교조각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당대(唐代)의 불교 역시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더욱 발전하여 대규모의 석굴건추과 불상제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교통의 발달로 인도의 굽타 양식의 사실적인 균형미의 불상이 등장하였고, 불경내용을 그린 경변고사화(經變古事畵)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벽화는 석굴불상에도 영향을 미쳐 불상의 상호는 넓고 둥근 중국인의 얼굴로 표현되었다. 당대 이후 불교신앙은 민간에 널리 정착되었다. 특히 송대 이후에는 석굴보다 사찰이 많이 건립되었고, 청대의 사찰에는 도교의 나한상과 시녀상이 나타나면서 불교가 더욱 세속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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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북위 영안 2년(529), 돌. 앞쪽에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아래쪽에 발원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00여명 넘는 발원자가 참여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불비상에 돋을새김으로 새져진 삼존불상.위쪽에 서로 얽혀 있는 용으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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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에 새겨진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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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과 마찬가지로 위쪽에는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고, 중단에 공양자상이 새겨져 있다.

북위 영안 2년(529)에 조성된 불비상이다. 가장 위에는 서로 얽혀있는 용 4마리로 장식했고 상부에는 삼존불과 발원자의 관직이, 중단에는 공양자상, 그리고 하단에는 함께 발원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앞면 중단에는 공양자상 사이에 명문이 있는데, 영안 2년 국주(國主)와 칠세부모(七世父母)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마을의 신앙공동체인 읍의(邑義)의 구성원인 개씨(開氏)와 양씨(梁氏), 왕씨(王氏) 등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발원자가 함께 조성한 불비상이며 10여명의 주요 공양자는 말을 타거나 일산(日傘)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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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북제~수, 돌.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나한, 보살, 신장을 비롯하여 불화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앙한 군상들이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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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2단의 감실 중 윗단 감실에는 반가사유상이, 아랫단 감실에는 오존불이 새겨져 있다. 상단에는 다양한 천인상과 보탑이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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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도 감실을 두고 불상을 새겨놓고 있다.

다양한 군상과 세부가 묘사된 북제의 불비상이다. 앞면에는 앉아 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나한과 보살, 신장이 주위에 둘러 서 있고, 상단에는 꽃줄을 든 천인(天人)과 보탑(寶塔)이, 불상 아래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뒷면에는 2단의 감실에 오존불과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다양한 상들로 가득 채워진 구도와 복잡한 세부표현이 번잡스러우나 인물의 양감있는 묘사와 보살의 허리를 비튼 삼곡(三曲)자세의 표현이 눈에 띈다. 앞면 하단의 명문에는 재주(齋主) 장대보(張大寶) 등 읍의(邑義) 주재자 명단과 공양주(供養主) 장중화 등이 “부모님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부처를 모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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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북제~수, 돌. 높이 162cm의 비교적 큰 불비상이다. 상단과 중단에 오존불과 역사를 새겨놓고 있으며, 위쪽에는 보탑과 천인상을 새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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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는 윗쪽 감실에는 오존불이 있으며, 아래쪽 4개의 감실에는 삼존불을, 그 아래에는향로와 사자, 공양자상을 새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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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도 감실에 여래좌상을 새겨놓고 있다.

 

높이가 162cm에 달하는 비교적 큰 북제의 불비상이다. 앞면에는 역사(力士)가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차게 묘사되었고, 불감 주변에는 다양한 세부가 다듬어진 솜씨로 조각되었다. 뒷면에는 경직된 자세의 불상과 고졸하게 표현된 사자, 그리고 인물이 표현되었다. 앞면에는 상단과 중단에 오존불과 역사가 있고 가장 위에는 보탑과 천인이 조각되었다. 뒷면에는 상단에 용장식과 오존불을, 중단에는 4개의 감실에 각각 삼존불을,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이 있고 가장 아래에는 불비상에 조각된 각각의 상을 공양한 사람의 이름을 새겼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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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당 현경 5년(660), 돌. 당대(唐)에 조성된 불비상이다. 상단에는 의에 앉아 있는 여래상과 양쪽에 협시보실이 있는 삼존불상을 중심으로 천인, 보탑 등이 있으며 중단에는 나무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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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는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여래의 모습을 새겨놓고 있다.

당 현경 5년(660)에 고만해의 일가족이 발원한 불비상이다. 육감적이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한 불, 보살상이 전형적인 7세기 당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구성을 보면, 앞면에는 상단에 의좌(倚坐)의 불상과 협시보살이 있고 그 위로는 보탑과 천인이 있으며, 중단에는 나무를 새겼다. 명문은 앞면의 하단과 중단의 감실 사이에 새겨져 있는데 고만해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형수와 처, 조카, 아들, 딸 등 일가친천이 힘을 모아 불비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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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 새겨진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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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菩薩, 송, 나무에 채색.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목조 보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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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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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모습.

등신대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보살상으로, 여성적인 얼굴과 가는 몸, 그리고 사실적인 세부 묘사에서 송대 보살상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자세는 명상에 잠긴 듯이 보인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몸을 여러 번 감싸는 천의,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의 세부 묘사가 풍부하다. 표면에는 흰색, 붉은색, 녹색, 청색 등의 채색이 남아 있는데 이는 후대 보수 시 더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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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장천왕, 增長天王, 송말원초 13~14세기

이 신상은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불법을 수호하고 사방을 지키는 네 명의 천왕 중 하나인 증장천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 지물이 없어졌지만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쪽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방의 유리 지방을 지키던 증장천왕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검은 유리로 제작된 동공으로 인하여 인상이 매우 강렬해 보인다. 정교한 귀면 문양이 허리에 장식된 갑옷을 입고 어깨부터 드리워진 천의(天衣)가 팔을 휘감고 있어 전체적으로 위풍당당하고 매우 힘이 넘쳐 보인다. 머리카락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봉황형상의 보관 뒤로 끌어당겨져 높게 꼬여진 상투를 틀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 흑색, 청색, 녹색 등의 안료와 도금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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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金銅菩薩立像, 원말명초(13~1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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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金銅佛坐像,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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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鐵造佛座像, 명

명청시대의 도식화된 불상으로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변형된 선정인을 하고 있다. 머리도 도식적인 소용돌이형과 직선형 머리카락이 번갈아 표현되어 있다. 불상 뒷면에 “三十九拵/王妙淸”이란 명문이 있어 왕묘청이 시주한 여러 불상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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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삼면육비상, 金銅三面六臂像, 청. 아수리(阿修羅)는 팔부중의 하나로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귀신이다. 악귀의 세계에서 싸우기를 좋아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숫사자), 명, 대리석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숫사자)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암사자), 명, 대리석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명대(明)의 암수 한 쌍의 사자 조각상이다. 수사자가 발로 누르고 있는 공은 권력을 상징하고 암사자의 새끼 사자는 계승자를 의미하여 자손이 흥성해져서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사자상은 궁궐의 아문이나 대문에 배치되다가 송대(宋) 이후에는 벽사(僻邪)와 길상(吉祥)의 의미로 개인의 주택이나 공원 등에도 세워지게 되었다. 명.청대에 이르러 이와 같이 암수 한 쌍의 사자상을 문 앞에 세우는 형식이 정착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24호), 대표적인 석굴사원이자 불교미술의 걸작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토함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 석굴(국보 24호)이다. ‘석불사’라고 불린 이 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불국사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석굴의 구조는 앞쪽은 전실은 사각형을,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은 원형을 하고 있다. 이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주실에는 그 존재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천부상.보살상.나한상이, 전실에는 인왕상(금강역사)과 팔부중상이, 복도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에 대해서 앉은 자세나 손갖춤 등이 정형화된 불상과는 달라 석가여래라는 의견도 있고, 비로자나여래라는 의견도 있다.

경주 석굴암 석굴, 국보 24호, 경주시 진현동
이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던 김대성이 처음 건립하였는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렸다. 경덕왕때에는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황룡사대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만들어져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룬다. 석굴의 평면구조는 앞쪽이 네모났고 뒤쪽은 둥글다. 석굴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둘레에 천부상.보살상.나한상.거사상.사천왕상.인왕상.팔부신중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과는 달리 화강암을 인공으로 다듬어 조립한 이 석굴은 불교 세계의 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세련된 조각 솜씨가 어우러진 걸작이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둥근 형태의 주실 천장을 교묘하게 축조한 것이다. 이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뛰어난 기술이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석굴암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토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 석굴(국보 24호). 지금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2차례에 걸친 보수공사 결과로 본존불은 유리창안에 있고, 그 앞에는 보호각을 세워져 있다.

석굴암 석굴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석굴사원이다. 석굴사원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대승불교의 전파경로인 아프카니칸.중앙아시.중국을 거져 한국으로 전해진 대표적인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전파의 형태이기도 하다. 인도에는 1,200여개이 석굴사원이 있다고 하며,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의 수행자들이 수도를 하는 곳이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때 만들어진 바라바르 언덕의 석굴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며, 인도의 아잔타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앙아시아의 키질 석굴, 중국 둔황 석굴, 윈강석굴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중국의 석굴들은 바위산에 굴을 파서 석굴을 조성한 것과는 달리 석굴암은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하여 만든 것이다. 이런 형식은 한대(漢代) 이후 중국과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만든 돌방무덤과 비슷한 형태이다. 이를 석굴사원에 응용한 점에서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석굴사원에는 부처의 일생이나 설법내용을 그린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석굴암 석굴에는 화강석을 조각해서 만든 본존불을 비롯하여 많은 조각상들로 석굴 내부가 채워져 있다.

석굴암 석굴석굴암 석굴 내부. 앞쪽 전실 벽면에는 팔부중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복도 입구에는 인왕상이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을 지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의 공간배치.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실 내부(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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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범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대 제작. 석굴암 석굴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 입구 좌.우에 제석천상과 함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범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어졌던 최고의 천신이다. 몸에는 승려와 같은 가사를 입은 뒤 장신구를 착용하였다. 왼손을 내려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쥐었고, 오른팔은 굽혀 먼지떨이인 불자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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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제석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제석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敎)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신앙되었다. 벼락을 무기로 사용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 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석굴암 제석천상은 신들의 제왕답게 몸에는 임금처럼 소매가 길고 화려한 도포식의 옷을 입었고, 왼손바닥 위에는 제석천의 무기인 벼락을 형상화한 금강저(金剛杵)를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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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불 뒷쪽에 배치된 십일면관세음보살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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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입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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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보살입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을 배경으로 수학여행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학생들. 지금도 전형적인 추억의 수학여행 사진이 만들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로 올라가는 계단길 옆에는 석굴암을 수리(1913~1915, 1962~1964) 할 때 교체된 옛 석굴건축부재들과 기타 주변 석물이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감실벽석

OLYMPUS DIGITAL CAMERA감실벽석

OLYMPUS DIGITAL CAMERA감실 천정석

OLYMPUS DIGITAL CAMERA석상받침석

OLYMPUS DIGITAL CAMERA석상받침석

OLYMPUS DIGITAL CAMERA횽예석편, 간석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을 받치는 초석형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 앞으로 올라가는 학생들.

OLYMPUS DIGITAL CAMERA2차례에 걸친 석굴안 석불 수리과정에서 이 석굴사원의 보호를 위해서 세워진 보호각. 오랜세월동안 동해를 바라보고 있던 석굴암 본존불은 지금은 이 보호각으로 시야가 막혀 있다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해 방향의 풍경.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앞 마당. 마당전체에 연등을 달아놓고 초파일 준비에 한창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 앞 마당에 남아 있는 석등 하대석.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에서 내려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내려오는 길에도 석굴암 석재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불전인 수광전.

OLYMPUS DIGITAL CAMERA수광전 앞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 아래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천불소탑, 석굴암 출토, 751년. 천불탑은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탑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유물이다. 탑(Pagoda)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탑파’의 준말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상징물이기도 하다. 서역에서는 사리를 모시는 반구형이 대부분이었으나 중국을 거치면서 목조건축물과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으며 중국에는 벽돌을 쌓은 전탑, 한국에서는 화강암을 깍아 만든 석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출토 수막새.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출토 인왕상(금강역사)

석굴암은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등산로로 3km 정도 떨어진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토함산 정상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본존불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문무왕 수중왕릉인 대왕암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석굴암이 자리한 토함산은 신라천년 고도인 경주 동쪽편에 백두대간에 자리잡고 있는 큰 산으로 해발 745m의 높은 산이다. 토함산이라는 명칭은 바다 가까이에 있어 안개가 자주 끼고, 산이 바다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 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 것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입구 주차장. 토함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범종각.

OLYMPUS DIGITAL CAMERA주차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들어가는 길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일주문.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입구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는 20여분을 걸어들어가는데 숲이 우거져서 그늘이 많고 동쪽편으로 경치도 좋아서 우니나라에서 걷기좋은 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들어가는 길.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불상

신라가 불교를 받아 들인 이후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사찰에는 사리를 모신 불탑과 함께 부처를 표현한 불상을 모신 금당이 세웠졌다. 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삼국시대 황룡사 금당에 모셔진 신라삼보 중 하나였던 장륜존상을 들 수 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하는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2점이 남아 있는 석가모니가가 고민하는 모습을 표현한 반가사유상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굴암에 모셔진 본존불을 들 수 있다. 중국을 통해 서역에서 전해진 신라의 불상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불상은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좁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하지만, 대체로 보살상.신장상 등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불상이라 일컫는다. 원래 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탑이나 보리시, 금강보좌 등이 중심이었으나 이집트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방과 인도의 마투라에서 처음 만들어져 대승불교의 전파경로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초기까지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었으나 후대에 들어서면서 탑보다는 불상을 보신 금당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다.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의 상을 말합니다. 이 자세는 훗날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하기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6~7세기를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불교에서 불상이나 보살상들은 대부분 정면을 바라보고 앉거나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예배 대상으로서의 경건함과 위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성스럽고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진 상들은 참배자들에게 심리적인 거리감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성불하기 이전에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을 자연스러운 자세로 표현한 반가사유상은 인갅거인 친근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유하는 행위는 보는 이들에게 비슷한 경험을 연상시켜 공감하게 하고 동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어떤 경우는 고뇌를 뛰어넘어 인간과 세상을 관조하거나 명상에 빠진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반가사유상이 시대와 종교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이 아닐까요?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아시아 삼국의 반가사유상.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은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와 외형이 거의 비슷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 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에 이른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삼산반가사유상’이라고도 부른다. 반가사유상은 원래는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을 반영하여 미륵불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삼존불 형태로 많이 표현되고 있으나, 삼국시대에는 단독불상으로 주로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눈.코.입등이 표현이 뛰어나 조각품으로서 높은 예술성을 평가받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정화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백제 또는 신라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고류지에 남아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그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78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는 달리 머리에 해와 달이 장식되어 있는 ‘일월신보관’을 쓰고 있다. 이런 양식은 사산조페르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문화로 볼 수 있다. 얼굴과 신체의 표현, 신체 각부분의 비율 등에서 국보83호 반가사유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세련된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약사불좌상, 신라 8세기말~9세기, 경주 낭산

이 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존명이 약사불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약사불은 중생의 몸의 질병과 무지의 병을 고쳐준다고 하여 대의왕불(大醫王佛)로도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재앙도 물리쳐준다고도 믿어져 신라 통일기에는 약사불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 약사불좌상의 오른손은 석굴암 본존불처럼 땅을 짚은 항마촉지인의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항마촉지인을 취한 약사불좌상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신라 통일기 약사불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신라 통일기의 소형 금동불은 기록이 없어 대부분 정확한 존명과 용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하체의 옷주름 형식을 기준으로 크게 Y자형과 U자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대좌와 불신을 따로 주조한 뒤, 발바닥의 촉을 대좌 윗면의 구멍에 꽂아 고정하고, 등 뒤에 촉을 내어 광배를 부착한 상이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상은 불신과 대좌를 함께 주조하기도 하였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불상(9세기), 금동불상(9세기, 감은사터), 금동불상(9세기, 성동동 전랑지), 금동불(8세기, 경남 김해), 금동불(8세기, 경남 하동)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약사불(9세기, 서면 방내리), 금동약사불(8세기, 경북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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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비로자나불, 9세기

비로자나불은 햇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부처로서, 신라 후기에 유행하였습니다. 신라의 비로자나불상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한쪽손으로 반대편 손의 검지를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의 자세를 취하되, 중국이나 일본 밀교의 보살 형상과는 달리, 여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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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약사불, 8세기

신라 후기에는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듯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 신앙이 유행하여 약사불상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약사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다른 불상들과 쉽게 구별됩니다. 신라 통일기의 금동약사불은 대부분 서 있는 입상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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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약사불, 보물 328호, 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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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상, 8세기, 경북 금릉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반가사유상 머래(7세기, 황룡사터), 금동반가사유상(7세기, 성건동)

금동반가사유상 머리, 7세기, 황룡사터
머리에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같은 삼산관(三山冠)을 썼습니다. 오른쪽 뺨 아랫부분에 손가락을 댄 자국이 있어 반가사유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신라 불상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7세기, 성건동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같은 계통으로서, 신라 지역에서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유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상(7세기)과 금동천인상(6~7세기)

금동천인상, 6~7세기
몸에 걸친 천의(天衣)는 앞쪽에서 X자 형으로 교차한 뒤 머리 위로 휘날려 마치 광배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착의 방식과 호리호리한 생김새로 보아 제작시기는 6~7세기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서탑).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서탑)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 신라 9세기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에 있었습니다. 본래 5층 동서 쌍탑의 1층 몸돌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온전한 모습의 탑신석이 동탑, 한쪽면이 결실된 탑신석은 서탑의 일부였습니다. 두탑신석 네면에 부조된 불상의 조각 수법과 자세는 약간씩 다르나, 각각에서 동쪽면으로 비정되는 약사불은 왼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약그릇으로 보이는 둥근 물건을 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 있는 자세의 사면불상은 경주 지역 석탑에서만 보이는 특징으로 주목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국사와 석굴암 – 불국토의 이상향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에 위치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불교문화재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재상을 지냈던 김대성의 발원으로 751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석불사)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지었다고 하니, 이 두절은 그의 깊은 신앙심뿐만 아니라 지극한 효성의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국사는 평지에 세워진 여러 건물의 집합체이고, 석굴암은 산 중턱에 지어진 단일한 인공의 석굴사원이란 점에서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부처의 나라’를 뜻하는 불국사는 여러 부처의 세계가 드넓게 펼쳐진 것과 같습니다. 반면, 석굴암은 우주의 질서를 하나의 불국토로 응집한 작은 결정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조적인 성격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의 원대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함께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완성으로 비로소 신라땅에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경주 불국사는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774년에 완공하였다. 통일신라 전성기때 세운 사찰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삼국시대 이래 평지에 세워진 기존 사찰의 가람배치와는 달리 경사진 지형에 인공으로 축대를 쌓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람배치를 계승함과 동시에 아래쪽에 아마타불을 모신 극락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 등 후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전 중심의 가람배치도 함께 공존하는 독창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가람배치는 후대에 세워진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국사만의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불(국보 24호). 지금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2차례에 걸치 석굴암 보수공사의 결과로 석굴암 본존불은 유리창안에 있고, 그 앞에는 보호각을 만들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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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범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대 제작

범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어졌던 최고의 천신이었습니다. 이 신은 불교가 성립된 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불교에 수용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보호하는 역할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범천상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상입니다. 석굴암 범천상은 둥근 주실 입구의 좌우에 제석천상과 대칭되게 서 있습니다. 몸에는 승려와 같은 가사를 입은 뒤 장신구를 착용하였습니다. 왼손을 내려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쥐었고, 오른팔은 굽혀 먼지떨이인 불자를 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입니다. 이 상은 작품의 형상과 완성도 면에서 8세기 동아시아 범천상의 기준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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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제석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제석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敎)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신앙되었습니다. 벼락을 무기로 사용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 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신도 범천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립된 뒤 불교에 수용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석천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桓因) 천왕과 동일시되어 우리나라에서 중요시 되었습니다. 석굴암 제석천상은 신들의 제왕답게 몸에는 임금처럼 소매가 길고 화려한 도포식의 옷을 입었고, 왼손바닥 위에는 제석천의 무기인 벼락을 형상화한 금강저(金剛杵)를 올려 놓았습니다. 조각상임데도 불구하고 마치 회화를 보는 듯이 자연스러운 자세와 세부 표현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불두, 8세기, 경주 양북면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판불, 보물 1475호, 680년경, 월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삼존판불, 680년경, 월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판불, 680년경, 월지

월지에서 출토된 2구의 삼존상과 8구의 보살좌상으로 이루어진 금동판불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하단에 돌출된 촉과 광배 테두리에 뚫린 구멍으로 보아 본래 불감(佛龕) 같은 곳에 부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존불의 경우,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 이와 같은 설법인(說法印) 즉 전법륜인(轉法輪印)의 손갖춤을 한 아미타불상이 널리 유행하였으므로 본존불은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라 통일기 불교 미술의 국제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679년(문무왕 19)에 태자가 동궁을 지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제작시기는 7세기 말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상과 영험
신라때 불상은 예배 대상으로서 신자와 상호 소통하며 교감하는 인격체처럼 신앙되었습니다. 예컨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생의(生義)라는 승려가 꿈을 꾸고 경주 남산에서 돌미륵을 파내어 삼화령에 모셨다거나, 693년(효소왕 2)에는 북쪽 오랑캐에 끌려갔던 화랑 부례랑이 부모가 백률사 관음상에 기도하자 즉각 귀환하였으며,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분황사의 천수관음상 벽화에 어머니가 빌자 눈 먼 딸이 눈을 떴다는 등 여러 종류의 영험담(靈驗談)이 전합니다. 또한 불상은 승려의 수행을 돕고 계율을 내려주는 역할로 등장하거나, 불교의식에 모셔져 사용되는 등 신이(神異)한 감응을 일으키는 주체로도 인식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이 불상을 대할 때 지녔던 이와 같은 태도나 사고방식은 현재 전하는 수많은 신라 불상들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팔부중이 새겨진 석탑 면석, 경주 남산 창림사터, 신라 9세기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창림사터 주변에서 수습되었습니다. 신라 통일기 후기 석탑의 부조상으로 유행했던 팔부중 가운데 가루라(迦樓羅)를 새긴 상층기단 면석의 일부입니다. 몸에 갑옷을 걸치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구름 위에 유유히 앉아 있습니다. 가루가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속의 새로서 입이 새의 부리 모양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불탑과 사리갖춤

불교에서의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이며, 부처가 깃든 성스러운 곳으로 예배와 수행의 대상이다. 탑을 세우는 것은 부처의 진리를 널리 세상에 보이는 과정이기에 불교의 융성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져 불교미술 조형품의 백미로 자리잡았다. 특히, 통일신라 때 조성된 많은 석탑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탑에는 사리를 모시기 위한 그릇인 사리갖춤이 모셔졌는데 대부분의 유명한 석탑에서는 이런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사리갖춤에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이 포함되는데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탑을 발원한 사람의 바램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와 구성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리갖춤들은 금속세공을 비롯하여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었기때문에 예술적 가치 또한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는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사건을 거치며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후원하면서 7세기 이후에는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습니다. 호국불교 신앙이 본격화된 것도 신라에서였습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호국불교 신앙의 출발점은 신라가 옛날부터 과거의 부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이었습니다. 불교의 토착화에 기여한 이러한 생각은 지금의 신라가 바로 부처의 땅이라는 불국토설로 발전되어 불교문화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전성기 신라의 왕경에 대해 “절이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 가는 듯하다.”라고 묘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불교문화의 융성을 보여줍니다. 8세기 중엽에 조영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그 절정기의 산물이었습니다. 불교미술이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고 ‘문화재’라는 가치가 부여된 것도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그러나 불상이나 불탑 속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여 불법적으로 거래하는 나쁜 풍조가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가 파괴되고 출처를 알 수 없게 되는 등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탑과 장엄
사찰 안의 불교미술은 부처의 세계를 재현하고 장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불상과 함께 불사리를 모신 불탑이 있었습니다. 불탑은 부처의 열반, 즉 윤회를 끊은 영원한 적멸(寂滅)을 상징하므로 가장 본질적이고 성스러운 예배 대상이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634년), 황룡사 구층목탑(645년) 등 다종다양한 형태의 불탑이 조영되었고, 발원자에 따라 불탑에 담은 염원도 저마다 달랐습니다. 내부에 불사리를 모시는 장엄도 똑같은 경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독특하였습니다. 신라 통일기에 세워진 불탑의 상당수는 기복적 성격을 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라 후기의 석탑에 표현되는 다양한 존상이나 장엄의 근거를 이와 같은 조탑경전의 내용에서 찾기도 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사천왕사는 669년(문무왕 9)과 670년에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文豆累秘法)이라는 불교의식을 행하여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내력을 지닌 신라 통일기의 대표적 호국사찰입니다. 이 절터의 동서 쌍탑 주변에서 악귀를 깔고 앉은 녹유신장상 전이 수습되었습니다. 이 전들은 사찰이 창건된 679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각에 능통한 신라의 승려 양지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중을 제작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양지가 이 상들을 만들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신장상 조각들을 복원하면 전의 크기는 높이 90cm, 폭 70cm 가량이 됩니다. 여러 벌의 틀로 찍어낸 뒤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발라 구웠습니다. 근래의 발굴조사에서 이 신장상 전들은 A, B, C, 3종류로 이루어졌고, 탑의 기단부 바깥쪽 네 면에 각 6개씩 총 24개를 설치한 벽전(壁塼)이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상들의 존명에 대해서는 사천왕, 팔부중, 신왕(神王) 등의 여러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당시 사천왕서 서탑터.

OLYMPUS DIGITAL CAMERA사천왕사 목탑터.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에 표현된 그림의 3가지 형태

OLYMPUS DIGITAL CAMERA녹유 신장상 전(塼, A타입).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던 벽돌이다. 사실적이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서역 불교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녹유 신장상 전 조각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B타입).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C타입)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전 조각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 조각.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장식, 7세기, 사천왕사터

1936년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구부러진 장식 끝에 보주가 달린 형태로서, 금관의 세움장식 끝의 보주를 연상케 합니다. 편 한쪽에 ‘東塔西’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천왕사의 쌍탑 가운데 동탑의 서쪽에 설치되었던 장엄물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전, 7세기, 사천왕사터

녹유전은 표면의 광택으로 인해 불교경전에서 서방 극락정토에 있다고 하는 유리전(琉璃塼)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좌우 양쪽을 비대칭의 우아한 능형(菱形) 곡선으로 처리하여 다른 개체와 연속적으로 맞물리도록 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국보 112호). 경주 사천왕사의 목탑과 함께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적용된 쌍탑형식의 가람배치이다.  후대의 석탑과는 달리 각부분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조건축물처럼 여러개의 석재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2개의 탑 모두 해체.수리과정에서 사리엄장구가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엄장구, 보물 366호, 신라 682년경. 사천왕사 건축에 크게 기여한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재위 661~681년)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신문왕(재위 681~692년)이 682년에 완성한 감은사의 동.서석탑에 넣었던 사리기의 일부입니다. 서탑의 사리기는 1959년에, 동탑의 사리기는 1996년에 각각 해제.복원하는 과정에서 3층 몸돌 윗면의 네모난 사리구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리 외함의 네 면에는 갑옷을 입은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리 내함은 전각 모양으로서 중앙의 불사리를 모시는 항아리 주변에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라 통일기 초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조각솜씨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 외함. 외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섬세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39호). 형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이 완성되어 가던 시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9m에 이르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 외함. 겉면에 사천왕상이 선으로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불상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구층 소탑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삼층 소탑

금동사리엄장구,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신라 8세기
1996년 석탑 보수공사 중 3층 지붕돌 윗면에 마련된 사리구멍에서 나왔습니다. 금동 사리함의 표면에는 촘촘히 찍은 둥근 무늬를 바탕으로 사천왕상이 유려하게 선각되어 있습니다. 사리함 안쪽에 별도의 사리 내함은 없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금동과 나무로 만든 작은 소탑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함께 수습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묵서 지편의 내용과 관련있는 것이어서 무구장경 신앙에 의거하여 석탑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장식, 7~9세기, 감은사터

구부러진 꽃술과 연봉우리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끝부분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아 리벳으로 다른 것과 연결하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찰 건축 장엄구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문 장식, 7세기, 고선사터

문에 달린 빗장의 일부였습니다. 덕동댐 건설로 1975년 수몰된 경주 고선사터의 금당터 서북회랑 바깥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끝부분은 세 잎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중간에 수직으로 돌출된 부분은 연꽃처럼 만들어 구멍을 뚫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풍탁, 7~9세기, 감은사터

신라 범종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윗면에는 고리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고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청동 풍탁에 버금갈 정도로 크기가 큰 편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사자머리 모양장식( 7~9세기, 감은사터), 금동 신장상 머리(7세기, 전 인용사터)

끈으로 중간을 묶은 머리, 부릅뜬 큰 눈, 콧수염 등 감은사터 금동사리외함에 부착된 이국적인 호인(胡人)형의 사천왕상 얼굴과 유사합니다. 사리장엄구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자, 7~8세기, 분황사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장식, 8~9세기, 경북 영덕 유금사

세 갈래로 피어나는 식물의 생명력을 형상화한 장식입니다. 신라 후기의 불상 대좌 하대석에 표현된 귀꽃을 연상시킵니다. 어딘가에 부착하여 고정했던 일종의 장엄구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사리함 뚜껑, 706년경,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사리함 뚜껑에 새겨진 글씨

OLYMPUS DIGITAL CAMERA번역된 내용.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아미타불, 국보79호, 706년경,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942년 경주 낭산 동쪽의 구황동 삼층석탑 2층 지붕돌 윗면의 사리구멍에서 수습되었습니다. 금동사리함 안에는 각종 사리장엄굴를 비롯하여 금제불입상과 금제불좌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석탑은 692년에 승하한 신문왕(재위 681~692)을 위해 부인인 신목태후와 아들인 효소왕(재위 692~702)이 세운 것입니다. 700년에 신목태후가, 702년에는 효소왕이 각각 사망하자 효소왕의 동생이 성덕왕(재위 702~737년)이 706년에 불사리 4과와 크기 6촌의 순금제 아마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석탑에 넣고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로써 금제불좌상은 706년에 넣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37호). 삼국통일 이후 정형화되어가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석탑이다. 감은사지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크기는 작아지며, 구성부분의 표현 또한 간략화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함, 863년경,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함.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사면불이다. 통일신라 밀교의 영향을 받은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1층몸돌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민애대왕 사리그릇(보물 741호). 납석으로 만든 그릇으로 당시에 유행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1층 몸돌 윗면의 사리구멍에 들어 있던 금동사리함의 네 면입니다. 원래는 모서리에 뚫린 구멍을 연결하여 네모난 형태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정확한 결합방식과 방향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리함 안에는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민애왕(재위 838~839년)을 기리는 내용의 863년(경문왕3)명 납석제 사리단지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금동 사리함 각 면에는 보관을 쓰고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약합을 든 약사불,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 합장을 한 부처의 삼존상을 타출하였습니다. 이상들에 대해서는 밀교의 사방불을 신라식으로 변형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양양 진전사터 삼층석탑(국보 122호). 지대석 위에 이층의 기단부가 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기단부 2층 몸돌에는 팔부중상을, 탑신 1층 몸돌에는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