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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화원으로 불린 승려들

불교에서 신앙활동과 장엄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불교예술품들은 대부분 승려 장신들이 만든 것이다. 승려 장인은 출가한 승려이자 전문기술과 예술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들은는 수행자로서의 깨달음과 예술가로서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이들은 활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활동해 왔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솔거와 담징, 황룡사 목탑을 건축한 아비지, 석가탑을 만든 석공 아사달,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조각승 양지 등 뛰어난 승려장인들의 흔적이 유물 또는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 공동체를 이루어 사찰에 필요한 기물 대부분을 만들었으며 계보를 이루어 전승이 이루어지면서 표준화된 조성양식 위에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였다.

조각승 연희가 <금강경(金剛經)>을 새긴 목판이다. 석가모니부처가 제자 수보리를 위해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1<1. 각수승 연희가 금강경 내용을 새긴 목판, 금강경변상도 목판, 연희, 조선 1679년, 통도사 성보박물관>

연희는 울산 운흥사에서 약 20년간 15종류의 불교 경전 간행에 참여하며 직접 경전을 새기며 진행 과정을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다잇 사찰을 유람하며 연희와 만났던 문인 정시한은 그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11년째 경전 수천 매를 새기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승려 장인에게는 매 순간 반복된 작업 역시 수행의 일환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 화련인 그린 밑그림이다. 정제된 선으로 다섯 조사와 동자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2<2. 화련이 그린 서른세 명의 높은 경지에 이른 스님, 쌍봉사 삼십조사 밑그림, 조선 1768년, 종이에 먹, 통도사성보박물관>

부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구도자로서 귀감을 보인 조사(祖師) 서른세 명을 그린 밑그림의 일부입니다. 부처와 보살 외에 조사나 나한 같은 수행자도 불교미술의 주된 소재였습니다. 화련은 강약을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굵고 힘 있는 선으로 암석과 나무의 질감을 살리고, 정제된 선으로 부처의 말씀을 이어온 다섯 조사와 동자를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밑그림이지만 완성본을 보는 듯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우리나라 승려 장인의 역사
승려 장인은 시대에 따라 처한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성격과 위상이 바뀌었습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장인은 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을 갖춘 전문가 또는 지식인으로 우대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하면서 승려 장인의 활동도 세분화, 전문화되었습니다. 유교가 국가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조선시대에는 승려 장인의 지위가 이전보다 낮아졌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활동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은 전국의 사찰을 승려 장인이 중심이 되어 재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사찰으 중심으로 전문화된 직능을 갖춘 승려 장인 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조선 후기에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불상과 불화를 조성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은 부처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존재로 불교 12천인 중 한명이다. 인도 신화에서 기술과 공예, 건축의 신이다. 그림에서는 망치와 정을 들고 불상을 조각하는 비수갈마천이 표현되어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3<3. 최초의 불상을 만든 이야기가 실린 책, 석씨원류응화사적 권2, 조선 1673년, 종이에 먹, 동국대하교>

석가모니부처 일대기와 제자들의 행적을 정리한 <석씨원류응화사적>에는 기술과 창조의 신 ‘비수갈마천’이 최초의 불상을 만든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가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잠시 하늘의 천궁에 오르자 지상의 우전왕은 그를 그리워하여 그 모습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때 비수갈마천이 장인으로 변하여 석가모니부처의 초상 조각, 즉 최초의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비수갈마천은 성스러운 부처의 모습을 구현하는 조선시대 승려 장인의 자의식과 정체성 형성에 영감을 주었습니다.<금강경(金剛經)>은 석가모니부처가 제자 수보리를 위해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연희는 그 가르침을 오래 이어가고자 단단한 나무에 부처가 가르침을 펼치는 장면을 새겼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우리는 비수갈마천이다.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은 최초로 불상을 만들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천상과 지상의 호화로운 궁전과 성곽 등을 짓는 건축의 달인이자 신통력을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술과 창조의 신이었습니다. 조선의 승려 장인은 자신들이 제작하는 불상과 불화에도 비수갈마천이 만든 부처의 첫 초상처럼 초월적인 생명력과 성스러움이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수갈마천의 모임’이라는 뜻의 ‘비수회’라고 부르며 종교적 위상을 높였고,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약사십이신장도>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조성한 불화이다. 정교한 필선, 화려한 채색, 회화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문정왕후가 후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5<4. 나라의 안녕을 위해 대비가 발원한 불화, 약사십이신장도, 조선 16세기 후반, 비단에 색, 미국 보스턴미술관>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대비가 솜씨 좋은 장인에게 명하여 조성한 불화 다섯 폭 중 하나입니다. 발원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전기에 불교를 후원한 대표적 왕실 여성인 문정왕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작자는 16세기 왕실 불화를 주도했던 화원 이자실 또는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다른 화원일 수도 있으나 확실치 않습니다. 이 불화는 조선 후기와 달리 시주와 제작에 관련한 이들의 이름이 화기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정교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 풍부한 회화적 묘사가 돋보이는 16세기 왕실 발원 불화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발원기록이나 제작자 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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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밀지 정수사에서 조성한 아미타불상,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조선 1482년, 국립중앙박물관>

1482년 오늘날 경상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다밀지(多密地) 정수사(正水寺)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1910년 경상북도 칠곡 천주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좁은 어깨와 긴 허리, 머리에 솟아오른 육계와 그 위에 볼록한 구슬 모양 계주는 15세기 왕실 발원으로 조성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년)과 유사합니다. 조선 전기 왕실 불사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 소속 화원과 관아 소속 장인들이 함께 참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고려 후기 조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중국 명나라와 교류하며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왕실 발원 기록이나 제작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 불상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국보)>는 1945년 중건된 영주 흑석사 대웅전에 있는 불상이다. 복장유물과 함께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1458년) 법천사 삼존불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복장 유물 중에는 조성내력과 시주자 명단이 있는 <불상조성권고문>, 불교 서적 등이 있어 당시 불상 조성 내력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6<6. 불상 조성을 위해 시주를 권하는 글, 아미타여래삼존상 조성 보권문, 조선 1457년,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지금부터 5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책입니다. 쉽게 구겨지지 않는 딱딱한 장지를 썼고 표지는 초록색 비단을 덮어 공들여 만들었습니다. ‘대공덕소’라는 제목이 있는 면은 아코디언처럼 펼쳐집니다. 제목이 있는 앞표지를 넘기면 불상을 조성하게 된 연유와 공양.보시.채색.칠 등의 시주 항목이 차례로 나옵니다. 1457년 정암산 법천사에 봉안할 불상 제작에 시주를 권하기 위해 만든 이 책에는 시주자로 참여한 의빈 권씨, 명빈 김씨, 효령대군 등 내명부와 왕실 종친 명단, 불상 조성을 주도한 승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상은 이 글이 작성된 후 1년 8개월 뒤에 완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7<7. 불상 제작에 뜻을 모으고 참여한 사람들 명단, 아미타여래삼존상 조성 복장기, 조선 1458년, 명주와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와 명빈 김씨, 효령대군, 세종의 부마 등 왕실인사와 장인, 시주자까지 불상의 발원과 제작 과정에 관여한 인물 275명을 187행에 걸쳐 상세히 기록한 3.8미터 길이의 명단입니다. 이 명단은 명주와 백지를 이어 붙여 만들었습니다. 화원을 비롯한 부금(付金), 금박(金箔), 칠, 각수(刻手), 마조(磨造), 소목(小木) 등 일련의 목조불상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업무 분야가 적혀 있는 보기 드문 자료입니다. 당시 관아에 소속된 장인들이 이 일을 했을 것이며, 여기에 언급된 업무 분야는 <경국대전>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원으로 불린 승려들
승려 장인에게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던 듯하나 불상의 발원문이나 불화의 화기에는 ‘화원’으로 기록된 사례가 많습니다. 본래 화원은 조선시대에 그림에 관한 일을 도맡아 하는 도화서 소속 관원을 이르는 호칭입니다. 승려 장인은 조선 전기에는 도화서 화원과 함께 왕실 불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관영 수공업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궁궐과 성곽 건축을 비롯한 국가의 토목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승려 장인 이름 앞에 어떤 까닭으로 화원이라는 호칭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화원이라는 호칭은 승려 장인이 국가의 공식적인 일에 참여하여 ‘화공승(畵工僧)’, ‘국화승’, ‘화승’ 등으로 불렸던 일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석조지장보살좌상(보물)이다. 높이 33.4cm의 작은 불상으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을 깍아 만든 석조불상으로 몸체는 뚜껍에 도금하였으며 대좌에는 붉은 빛 칠을 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목은 짧으며 다리와 양손을 작게 표현하고 있다. 바위형태 대좌 뒷면에는 불상의 조성경위, 시주자, 제작연대를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9<8. 절학 등 승려 장인이 만든 지장보살, ‘정덕십년’이 새겨진 석조지장보살좌상, 절학 등 2명, 조선 1515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조선 전기인 1515년 승려 장인으로 추정되는 화원 ‘절학’과 산인 ‘신일’이 함께 만든 지장보살상입니다. 한 덩어리 돌을 깎아 울퉁불퉁한 암석 모양 대좌 위에 앉은 지장보살을 표현했고 뒷면에 조성기록을 새겼습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은 조선 전기 지장보살상의 특징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사찰에 필요한 상당수의 것들을 승려 장인이 만들었는데, 조선 전기부터 승려 장인들이 활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의 해체.수리과정에서 탑신,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발견된 묵서에 따르면 성종 때 처음 발원하여 불상들이 조성되었으며 인조 6년 인목대비가 발원하여 조성한 불상이 추가로 납입되어었다고 한다. 탑이 중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0< 9. 수종사 석탑에 봉안된 서로 다른 시대의 불상,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나온 금동불좌상, 조선 15세기 1628년, 불교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 금동석가여래삼존좌상,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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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동불.보살좌상, 성인, 1628년>

이 작은 금동불들은 1483년과 1628년에 왕실 여인들이 발원하여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안에 봉안했습니다. 1583년에 봉안된 석가여래삼존좌상은 제작자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의 후궁이 시주하고 성종의 후궁이 발원했습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글에는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금동석가여래좌상을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1628년의 불상들은 인목대비가 발원하고 조각승 성인이 제작했습니다. 조각승 성인은 1622년 광해군 비인 장렬왕후가 발원한 왕실 불사에도 참여했습니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미소 띤 표정, 목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구부려 웅크린 자세가 앞서 봉안되었던 석가여래삼존좌상과 다릅니다. 같은 탑에서 나온 불상이지만 서로 다른 시기의 불상양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은 종로구 창신동 지장암 대웅전에 있던 불상이다. 높이 117.6cm의 중형 목조불상이다. 광해군의 비 장렬왕후를 비롯하여 왕실 여인들이 발원.시주하여 조성한 불상이다. 조성내력이 적힌 발원문 등에 따르면 당대의 고승과 승려 장인들이 참여한 걸작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2<10. 왕비의 부름으로 현진을 비롯한 전국의 승려 장인이 만든 불상,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현진 등 17명, 조선 1622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광해군 비인 장렬왕후가 발원하여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히기 위해 제작한 불상 열한 구 중 하나입니다. 자수사와 인수사는 왕실 여인들의 말년 출가 수행처로, 권래에 있던 내불당과 달리 궐 밖에 있었습니다. 이 불사를 위해 현진, 응원, 수연, 법령을 비롯한 조각승 열세 명과 철을 다루는 승려장인 네 명이 모여 공동작업을 펼쳤습니다. 이 가운데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평가받는 현진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로 남은 조각가 영장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현진, 응원, 수연 등 조각승 집단을 이끄는 거장들이 협업하여 왕실 사찰의 존상을 만든 사례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왕실의 부름을 받다.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지만 왕실은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세의 평안을 빌기 위해 불교에 의지했습니다. 조선 전기 왕실 불사(佛事)는 도화서 화원과 관청 소속 장인, 주지나 대선사(大禪師)를 지낸 비중 있는 승려 장인이 참여한 것이 특징입니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승려들은 점차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고 경제력을 키워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승려 장인은 왕실 발원 불사를 도맡게 되었습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17세기 전반에는 승려들의 총대장이었던 벽암 각성(1575~1660년)이 왕실의 부름을 받아 전국에서 모인 승려 장인을 이끌고 광해군의 비 장렬왕후가 발원한 자수사와 인수사 불사를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왕실 불사를 맡아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한편 조선의 사찰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가꾸어 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3<11. 불상을 만드는 바람이 담긴글,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조성 발원문, 조선 1622년, 비단에 붉은 먹,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왕실 여인들의 말년 출가 수행처였던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할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며 남긴 바람이 담긴 글(발원문)입니다. 이 글에 따르면 불사의 재원은 왕실 재산인 내탕금으로 마련했고, 뛰어난 장인을 모집해 불상 열한 구와 불화 일곱 폭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발원문 마지막 부분 상단에는 불사가 교리에 맞춰 진행됐는지를 확인하는 증명 역할에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존경받언 고한 희언과 벽암 각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불상을 조각한 화원 13명과 철을 다루는 승려 장인 4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4<불상 안에서 나온 신성한 물건들,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복장물, 조선 1622년 무렵, 국립중앙박물관, 보물><1. 후령통과 오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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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라니>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5
<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6<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7<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9<4. 대방광불화엄경소>

12. 불상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복장물은 불상 조성의 역사도 보여주는 소중한 타임캡슐입니다. 불복장의 핵심인 노란 보자기에 싸인 후령통과 경전을 비롯한 다라니 수백 장으로 이 불상의 내부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5,500명의 부처 이름과 신비한 주문으로 죄를 없애게 한다는 <오천오백불명주제장멸죄경>은 고려대장경을 다시 인출하여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화엄경> 주석서인 <대방광불화엄경소>는 불상 조성 이후인 1629 ~1631년에 연천 용복사에서 만든 목판을 그대로 찍은 것으로, 불상을 만든 다음에 다시 넣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름무늬가 있는 감색 비단으로 표지를 감싸고 다섯개의 구멍을 뚫어 붉은 실로 묶었습니다. 이외에도 <묘법연화경>과 그 주석서인 <묘법연화경요해서>와 같은 경전이 불상 안에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의 타입캡슐: 화기와 발원문
수천 명이 넘는 승려 장인의 흔적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불화 화면 아래에 적은 ‘화기(畵記)’와 불상 안에 넣어 둔 ‘발원문’에는 제작자인 승려 장인을 비롯한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 그리고 그들의 바람이 적혀 있습니다. 화기와 발원문은 보통 불사에 재정 지원을 한 사람들의 명단인 시주질(施主秩)과 승려 장인을 포함하여 제작 실무를 담당한 사람 명단인 연화질(緣化秩) 등으로 구분해서 기록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직접 손으로 만든 작품 속에 이름 두 자로 삶의 흔적을 남겼고, 마치 타임캡슐처럼 조선 역사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이 불사를 주도했던 조선과는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문 장인이 제작하였다. 이들 출가한 수행자가 아니고 혈연관계나 사제관곌르 통해 기술과 명성을 이어온 장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오늘날까지 이런 장인집단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불화는 화려한 색채감이나 섬세한 세부표현이 돋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31<명나라 황실에서 조성한 영혼을 위로하는 불사, 수화, 중국 명 1454년, 비단에 색,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13. 수륙화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영혼을 구원하는 불교 의식인 수륙회(水陸會)에 사용한 불화입니다. 각 폭에는 부처와 보살, 나한, 명왕, 천중(天衆)과 신중(神衆)을 비롯해 옛 제왕과 문무관, 민가의 여러 영혼이 구름을 타고 의식 공간에 강림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수륙화는 1454년에 중국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황제 전용 가구를 제작하던 여용감의 태감(환관) 상의와 왕근 등이 감독하고 조성했습니다. 명나라 황실 내부에 공식적인 궁정 화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인지전이나 무영전 등에 궁정화가를 두고 황실과 조정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이 그림은 불법을 지키는 여러 수호신을 그린 것입니다. 밝고 화사한 색감과 더불어 황실 발원 불화답게 섬세한 인물묘사가 돋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가마쿠라 시대(13세기) 가이케이파 양식을 따르고 이는 목조아미타여래 입상은 경주 백율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8세기)와 크기나 형태 등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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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가이케이(快慶)’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 목조아미타여래입상, 일본 가마쿠라시대, 13세기, 일본 도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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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백률사 약사여래입상(국보), 8세기>

일본 카마쿠라 시대 게이파(慶派) 불사의 계보를 잇는 가이케이의 ’3척 아미타’양식을 충실히 따른 목조아미타여래 입상입니다. 가이케이는 자신이 만든 1미터 남짓의 아마타여래입상에 법명인 ‘안아미타불(安阿彌陀佛)’을 마치 서명처럼 사용하여, “교장안아미타불 가이케이(솜씨가 교묘한 장인 안아미타불 가이케이)”라는 묵서를 남겼습니다. 이 상도 왼쪽 발 아래, 상을 대좌에 고정하는 부분에 흐릿한 묵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케이가 만든 다른 상보다 크기가 약간 작으면서, 둥글고 사실감이 떨어지는 얼굴 표현 등으로 보아 가이케이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게이 파의 다른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이웃 나라의 불교미술 제작자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존속한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황실이나 민간 발원 구분없이 화사 혹은 화공이라 불리는 전문화가가 불화를 그렸습니다. 불상도 주로 전문 장인이 제작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예부터 불상을 제작하는 장인을 ‘불사(佛師)’라고 불렀고 최고의 불사에게 승려 직위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불사는 혈연과 사제 관계를 바탕으로 기술과 명성을 이어간 장인에 가까웠고 조선의 승려 장인처럼 출가한 수행자는 아니었습니다. 사찰에 필요한 상당수의 기물을 승려 장인이 직접 만든 문화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자적인 문화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20<중앙박물관 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조선의 승려장인
1. 승려장인은 누구인가?
승려 장인은 불교의 신앙 대상을 비롯하여 건축, 불구(佛具) 또는 장엄물 등 사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전문 기술을 갖춘 출가 수행승을 말합니다. 승려 장인의 전통은 성스러운 존재를 형상화하여 스스로 수행함과 동시에 중생 구제를 추구하는 불교 특유의 사상과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승려 장인의 활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가에는 승려 장인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찰에 필요한 기물 대부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승려 장인은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그중에서도 예배의 중심인 불상을 조성하는 ‘조각승’과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 법맥을 이어 가듯 자신들의 계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승려 장인들은 선배들이 일구어 낸 표준화된 조형 양식의 기반 위에서 각자 개성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의 색채가 뚜렷한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행승이자 예술가
승려 장인은 깨달음의 길을 걷는 출가 수행승인 동시에 사찰에 필요한 기물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라는 서로 다른 두가지 정체성을 지닙니다. 승려 장인 중에는 사찰의 주지로 있거나 대선사(大禪師)의 위치까지 올라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이도 있었습니다.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할 때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 증명의 역할도 겸하며 높은 경지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불상과 불화의 상징성을 극대화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종교적 위엄을 갖춘 이상적 모습의 불상과 불화를 만들지 고민하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사찰에 필요한 불사에 임하는 정성 어린 태도와 숙련 과정은 수행자로 하여금 장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순천 송광사 경패(보물)

순천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경패(보물)이다. 불경을 넣은 나무상자에 달아서 사용했던 일종의 꼬리표이다. 상아패 43점, 목제패 33점으로 총 43점이 남아 있다. 표면에는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겼으며,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조각수법 등으로 볼 때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경패, 보물 175호, 고려

OLYMPUS DIGITAL CAMERA상아로 만든 경패. 불상 등을 돋을새김으로 섬세하게 조각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나무로 만든 경패.

경패는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하여 제작된 경질이나 목함의 곁에 달아 그 안의 경전에 수록된 내용을 식별하기 위해 부착했던 꼬리표이다. 이 경패는 제6세 원감국사께서 강화도 선원사의 거란본대장경을 송광사로 이운할 때 함께 옮겨져 온 것으로 거란본대장경 외부에 달아두었던 것이다. 조각의 정교함이나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유물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중앙박물관 중국실] 중국의 불비상과 불상

1. 예기(禮器)2. 명기와 도용, 3. 신선사상과 도교4. 불비상과 불상5. 도자기6. 중국회화

중국의 불교는 전한(前漢) 때 서역과의 교통로가 열리면서 전래되었다. 중국의 불교는 후한 이후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진출한 남북조시대에 지배층의 후원을 받아 크게 번창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서역의 영향을 받아 많은 운강석불이나 용문석불같은 석굴사원들이 세워졌으며, 많은 불상들이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북조(北朝)의 국가적.주술적.실천적인 성격과는 달리 남조에서는 현학(玄學)적인 성향의 교리중심을 불교가 성행했으며, 인도로부터 참선 중심의 선종(禪宗)이 전래되었다.

수.당시대에는 불교가 통일국가에 걸맞게 체계화.조직화가 진행되었으며 천태종, 화엄종과 같은 다양한 종파가 성립되었다. 또한 인도로부터 밀교가 전해져 크게 유성하였다. 송대 이후에는 중국 불교가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몽골의 원(元)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淸)에서는 티벳불교라 할 수 있는 라마교가 지배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불교의 변화는 한반도나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어 그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중국 남북조~당대에 조성된 불비상. 불비상은 비석형태에 돋을새김으로 불상 등이 새겨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시대 초 충청도지방에서 불비상이 만들어 졌다.

중국인의 고대종교 – 불교
중국의 불교는 동한 명제(58~75년) 때 인도에서 서역을 통하여 처음 전래되었다. 이후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중원지역에 왕조를 세웠던 남북조시대 지배층의 후원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고 불교조각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당대(唐代)의 불교 역시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더욱 발전하여 대규모의 석굴건추과 불상제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교통의 발달로 인도의 굽타 양식의 사실적인 균형미의 불상이 등장하였고, 불경내용을 그린 경변고사화(經變古事畵)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벽화는 석굴불상에도 영향을 미쳐 불상의 상호는 넓고 둥근 중국인의 얼굴로 표현되었다. 당대 이후 불교신앙은 민간에 널리 정착되었다. 특히 송대 이후에는 석굴보다 사찰이 많이 건립되었고, 청대의 사찰에는 도교의 나한상과 시녀상이 나타나면서 불교가 더욱 세속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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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북위 영안 2년(529), 돌. 앞쪽에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아래쪽에 발원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00여명 넘는 발원자가 참여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불비상에 돋을새김으로 새져진 삼존불상.위쪽에 서로 얽혀 있는 용으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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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에 새겨진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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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과 마찬가지로 위쪽에는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고, 중단에 공양자상이 새겨져 있다.

북위 영안 2년(529)에 조성된 불비상이다. 가장 위에는 서로 얽혀있는 용 4마리로 장식했고 상부에는 삼존불과 발원자의 관직이, 중단에는 공양자상, 그리고 하단에는 함께 발원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앞면 중단에는 공양자상 사이에 명문이 있는데, 영안 2년 국주(國主)와 칠세부모(七世父母)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마을의 신앙공동체인 읍의(邑義)의 구성원인 개씨(開氏)와 양씨(梁氏), 왕씨(王氏) 등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발원자가 함께 조성한 불비상이며 10여명의 주요 공양자는 말을 타거나 일산(日傘)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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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북제~수, 돌.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나한, 보살, 신장을 비롯하여 불화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앙한 군상들이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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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2단의 감실 중 윗단 감실에는 반가사유상이, 아랫단 감실에는 오존불이 새겨져 있다. 상단에는 다양한 천인상과 보탑이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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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도 감실을 두고 불상을 새겨놓고 있다.

다양한 군상과 세부가 묘사된 북제의 불비상이다. 앞면에는 앉아 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나한과 보살, 신장이 주위에 둘러 서 있고, 상단에는 꽃줄을 든 천인(天人)과 보탑(寶塔)이, 불상 아래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뒷면에는 2단의 감실에 오존불과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다양한 상들로 가득 채워진 구도와 복잡한 세부표현이 번잡스러우나 인물의 양감있는 묘사와 보살의 허리를 비튼 삼곡(三曲)자세의 표현이 눈에 띈다. 앞면 하단의 명문에는 재주(齋主) 장대보(張大寶) 등 읍의(邑義) 주재자 명단과 공양주(供養主) 장중화 등이 “부모님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부처를 모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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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북제~수, 돌. 높이 162cm의 비교적 큰 불비상이다. 상단과 중단에 오존불과 역사를 새겨놓고 있으며, 위쪽에는 보탑과 천인상을 새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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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는 윗쪽 감실에는 오존불이 있으며, 아래쪽 4개의 감실에는 삼존불을, 그 아래에는향로와 사자, 공양자상을 새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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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도 감실에 여래좌상을 새겨놓고 있다.

 

높이가 162cm에 달하는 비교적 큰 북제의 불비상이다. 앞면에는 역사(力士)가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차게 묘사되었고, 불감 주변에는 다양한 세부가 다듬어진 솜씨로 조각되었다. 뒷면에는 경직된 자세의 불상과 고졸하게 표현된 사자, 그리고 인물이 표현되었다. 앞면에는 상단과 중단에 오존불과 역사가 있고 가장 위에는 보탑과 천인이 조각되었다. 뒷면에는 상단에 용장식과 오존불을, 중단에는 4개의 감실에 각각 삼존불을,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이 있고 가장 아래에는 불비상에 조각된 각각의 상을 공양한 사람의 이름을 새겼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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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佛碑像, 당 현경 5년(660), 돌. 당대(唐)에 조성된 불비상이다. 상단에는 의에 앉아 있는 여래상과 양쪽에 협시보실이 있는 삼존불상을 중심으로 천인, 보탑 등이 있으며 중단에는 나무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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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는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여래의 모습을 새겨놓고 있다.

당 현경 5년(660)에 고만해의 일가족이 발원한 불비상이다. 육감적이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한 불, 보살상이 전형적인 7세기 당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구성을 보면, 앞면에는 상단에 의좌(倚坐)의 불상과 협시보살이 있고 그 위로는 보탑과 천인이 있으며, 중단에는 나무를 새겼다. 명문은 앞면의 하단과 중단의 감실 사이에 새겨져 있는데 고만해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형수와 처, 조카, 아들, 딸 등 일가친천이 힘을 모아 불비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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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 새겨진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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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菩薩, 송, 나무에 채색.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목조 보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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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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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모습.

등신대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보살상으로, 여성적인 얼굴과 가는 몸, 그리고 사실적인 세부 묘사에서 송대 보살상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자세는 명상에 잠긴 듯이 보인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몸을 여러 번 감싸는 천의,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의 세부 묘사가 풍부하다. 표면에는 흰색, 붉은색, 녹색, 청색 등의 채색이 남아 있는데 이는 후대 보수 시 더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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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장천왕, 增長天王, 송말원초 13~14세기

이 신상은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불법을 수호하고 사방을 지키는 네 명의 천왕 중 하나인 증장천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 지물이 없어졌지만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쪽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방의 유리 지방을 지키던 증장천왕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검은 유리로 제작된 동공으로 인하여 인상이 매우 강렬해 보인다. 정교한 귀면 문양이 허리에 장식된 갑옷을 입고 어깨부터 드리워진 천의(天衣)가 팔을 휘감고 있어 전체적으로 위풍당당하고 매우 힘이 넘쳐 보인다. 머리카락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봉황형상의 보관 뒤로 끌어당겨져 높게 꼬여진 상투를 틀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 흑색, 청색, 녹색 등의 안료와 도금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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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金銅菩薩立像, 원말명초(13~1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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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金銅佛坐像,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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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鐵造佛座像, 명

명청시대의 도식화된 불상으로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변형된 선정인을 하고 있다. 머리도 도식적인 소용돌이형과 직선형 머리카락이 번갈아 표현되어 있다. 불상 뒷면에 “三十九拵/王妙淸”이란 명문이 있어 왕묘청이 시주한 여러 불상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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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삼면육비상, 金銅三面六臂像, 청. 아수리(阿修羅)는 팔부중의 하나로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귀신이다. 악귀의 세계에서 싸우기를 좋아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숫사자), 명, 대리석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숫사자)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암사자), 명, 대리석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명대(明)의 암수 한 쌍의 사자 조각상이다. 수사자가 발로 누르고 있는 공은 권력을 상징하고 암사자의 새끼 사자는 계승자를 의미하여 자손이 흥성해져서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사자상은 궁궐의 아문이나 대문에 배치되다가 송대(宋) 이후에는 벽사(僻邪)와 길상(吉祥)의 의미로 개인의 주택이나 공원 등에도 세워지게 되었다. 명.청대에 이르러 이와 같이 암수 한 쌍의 사자상을 문 앞에 세우는 형식이 정착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대표적인 석굴사원이자 불교미술의 걸작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토함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 석굴(국보)이다. ‘석불사’라고 불린 이 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불국사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석굴의 구조는 앞쪽은 전실은 사각형을,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은 원형을 하고 있다. 이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주실에는 그 존재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천부상.보살상.나한상이, 전실에는 인왕상(금강역사)과 팔부중상이, 복도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에 대해서 앉은 자세나 손갖춤 등이 정형화된 불상과는 달라 석가여래라는 의견도 있고, 비로자나여래라는 의견도 있다.

석굴암 석굴(국보)은 지금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2차례에 걸친 보수공사 결과로 본존불은 유리창안에 있고, 그 앞에는 보호각을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 석굴>

석굴암 석굴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석굴사원이다. 석굴사원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대승불교의 전파경로인 아프카니칸.중앙아시.중국을 거져 한국으로 전해진 대표적인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전파의 형태이기도 하다. 인도에는 1,200여개이 석굴사원이 있다고 하며,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의 수행자들이 수도를 하는 곳이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때 만들어진 바라바르 언덕의 석굴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며, 인도의 아잔타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앙아시아의 키질 석굴, 중국 둔황 석굴, 윈강석굴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중국의 석굴들은 바위산에 굴을 파서 석굴을 조성한 것과는 달리 석굴암은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하여 만든 것이다. 이런 형식은 한대(漢代) 이후 중국과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만든 돌방무덤과 비슷한 형태이다. 이를 석굴사원에 응용한 점에서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석굴사원에는 부처의 일생이나 설법내용을 그린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석굴암 석굴에는 화강석을 조각해서 만든 본존불을 비롯하여 많은 조각상들로 석굴 내부가 채워져 있다.

석굴암 석굴 내부는 앞쪽 전실 벽면에 팔부중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복도 입구에는 인왕상이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을 지키고 있다.

석굴암 석굴<석굴암 석굴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의 공간배치>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실 내부(2004년)>

범천상은 석굴암 석굴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 입구 좌.우에 제석천상과 함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범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어졌던 최고의 천신이다. 몸에는 승려와 같은 가사를 입은 뒤 장신구를 착용하였다. 왼손을 내려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쥐었고, 오른팔은 굽혀 먼지떨이인 불자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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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범천상 복제품(탁본)>

제석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敎)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신앙되었다. 벼락을 무기로 사용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 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석굴암 제석천상은 신들의 제왕답게 몸에는 임금처럼 소매가 길고 화려한 도포식의 옷을 입었고, 왼손바닥 위에는 제석천의 무기인 벼락을 형상화한 금강저(金剛杵)를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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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제석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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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불 뒷쪽에 배치된 십일면관세음보살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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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입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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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보살입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을 배경으로 수학여행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학생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로 올라가는 길.>

석굴암 석굴로 올라가는 계단길 옆에는 석굴암을 수리(1913~1915, 1962~1964) 할 때 교체된 옛 석굴건축부재들과 기타 주변 석물이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석굴건축부재들과 기타 주변 석물>

OLYMPUS DIGITAL CAMERA<감실벽석>

OLYMPUS DIGITAL CAMERA<감실벽석>

OLYMPUS DIGITAL CAMERA<감실 천정석>

OLYMPUS DIGITAL CAMERA<석상받침석>

OLYMPUS DIGITAL CAMERA<석상받침석>

OLYMPUS DIGITAL CAMERA<홍예석편, 간석>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을 받치는 초석형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 앞으로 올라가는 학생들.>

2차례에 걸친 석굴암 석불 수리과정에서 이 석굴사원의 보호를 위해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오랜세월동안 동해를 바라보고 있던 석굴암 본존불은 지금은 이 보호각으로 시야가 막혀 있다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보호각>

이로 인하여 감동된 바가 있어, 자비의 대원(悲願)이 더 두터워졌다. 이에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고,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스러운 스님을 청하여 각각 머물게 하고, 거대한 불상을 설치하고, 또 양육한 노고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날에도 또한 듣기 드물었다. 착하게 베푼 효과로 가히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石佛)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감실의 뚜껑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돌이 갑자기 셋으로 깨졌다. [대성은] 분노하여 아무렇게나 잠들었다. 밤 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다 만들고는 돌아갔다. 대성은 잠자다가 일어나서 남쪽 고개로 쫓아가, 향나무를 불에 태워 천신에게 바쳤다. 까닭에 그 땅의 이름을 향령(香嶺)이라 하였다. 그 불국사의 사다리(雲梯)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새긴 업적이 경주의 여러 사찰 중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삼국유사 권 제5 제9 효선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해 방향의 풍경>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앞 마당. 마당전체에 연등을 달아놓고 초파일 준비에 한창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 앞 마당에 남아 있는 석등 하대석.>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에서 내려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내려오는 길에도 석굴암 석재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불전인 수광전>

OLYMPUS DIGITAL CAMERA<수광전 앞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굴 아래 요사채>

천불탑은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탑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유물이다. 탑(Pagoda)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탑파’의 준말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상징물이기도 하다. 서역에서는 사리를 모시는 반구형이 대부분이었으나 중국을 거치면서 목조건축물과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으며 중국에는 벽돌을 쌓은 전탑, 한국에서는 화강암을 깍아 만든 석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불소탑, 석굴암 출토, 751년>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출토 수막새>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출토 인왕상(금강역사)>

석굴암은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등산로로 3km 정도 떨어진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토함산 정상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본존불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문무왕 수중왕릉인 대왕암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석굴암이 자리한 토함산은 신라천년 고도인 경주 동쪽편에 백두대간에 자리잡고 있는 큰 산으로 해발 745m의 높은 산이다. 토함산이라는 명칭은 바다 가까이에 있어 안개가 자주 끼고, 산이 바다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 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 것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입구 주차장. 토함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범종각>

OLYMPUS DIGITAL CAMERA<주차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주>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들어가는 길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일주문>

석굴암 입구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는 20여분을 걸어들어가는데 숲이 우거져서 그늘이 많고 동쪽편으로 경치도 좋아서 우니나라에서 걷기좋은 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들어가는 길>

경주 석굴암 석굴, 국보, 경주시 진현동
이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던 김대성이 처음 건립하였는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렸다. 경덕왕때에는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황룡사대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만들어져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룬다. 석굴의 평면구조는 앞쪽이 네모났고 뒤쪽은 둥글다. 석굴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둘레에 천부상.보살상.나한상.거사상.사천왕상.인왕상.팔부신중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과는 달리 화강암을 인공으로 다듬어 조립한 이 석굴은 불교 세계의 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세련된 조각 솜씨가 어우러진 걸작이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둥근 형태의 주실 천장을 교묘하게 축조한 것이다. 이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뛰어난 기술이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석굴암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불상

신라가 불교를 받아 들인 이후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사찰에는 사리를 모신 불탑과 함께 부처를 표현한 불상을 모신 금당이 세웠졌다. 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삼국시대 황룡사 금당에 모셔진 신라삼보 중 하나였던 장륜존상을 들 수 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하는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2점이 남아 있는 석가모니가가 고민하는 모습을 표현한 반가사유상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굴암에 모셔진 본존불을 들 수 있다. 중국을 통해 서역에서 전해진 신라의 불상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불상은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좁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하지만, 대체로 보살상.신장상 등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불상이라 일컫는다. 원래 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탑이나 보리시, 금강보좌 등이 중심이었으나 이집트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방과 인도의 마투라에서 처음 만들어져 대승불교의 전파경로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초기까지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었으나 후대에 들어서면서 탑보다는 불상을 보신 금당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아시아 삼국의 반가사유상.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은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와 외형이 거의 비슷하다.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의 상을 말합니다. 이 자세는 훗날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하기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6~7세기를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불교에서 불상이나 보살상들은 대부분 정면을 바라보고 앉거나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예배 대상으로서의 경건함과 위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성스럽고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진 상들은 참배자들에게 심리적인 거리감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성불하기 이전에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을 자연스러운 자세로 표현한 반가사유상은 인갅거인 친근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유하는 행위는 보는 이들에게 비슷한 경험을 연상시켜 공감하게 하고 동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어떤 경우는 고뇌를 뛰어넘어 인간과 세상을 관조하거나 명상에 빠진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반가사유상이 시대와 종교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이 아닐까요?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

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에 이른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삼산반가사유상’이라고도 부른다. 반가사유상은 원래는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을 반영하여 미륵불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삼존불 형태로 많이 표현되고 있으나, 삼국시대에는 단독불상으로 주로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눈.코.입등이 표현이 뛰어나 조각품으로서 높은 예술성을 평가받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정화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백제 또는 신라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고류지에 남아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그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78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는 달리 머리에 해와 달이 장식되어 있는 ‘일월신보관’을 쓰고 있다. 이런 양식은 사산조페르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문화로 볼 수 있다. 얼굴과 신체의 표현, 신체 각부분의 비율 등에서 국보83호 반가사유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세련된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약사불좌상, 신라 8세기말~9세기, 경주 낭산

이 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존명이 약사불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약사불은 중생의 몸의 질병과 무지의 병을 고쳐준다고 하여 대의왕불(大醫王佛)로도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재앙도 물리쳐준다고도 믿어져 신라 통일기에는 약사불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 약사불좌상의 오른손은 석굴암 본존불처럼 땅을 짚은 항마촉지인의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항마촉지인을 취한 약사불좌상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신라 통일기 약사불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신라 통일기의 소형 금동불은 기록이 없어 대부분 정확한 존명과 용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하체의 옷주름 형식을 기준으로 크게 Y자형과 U자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대좌와 불신을 따로 주조한 뒤, 발바닥의 촉을 대좌 윗면의 구멍에 꽂아 고정하고, 등 뒤에 촉을 내어 광배를 부착한 상이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상은 불신과 대좌를 함께 주조하기도 하였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불상(9세기), 금동불상(9세기, 감은사터), 금동불상(9세기, 성동동 전랑지), 금동불(8세기, 경남 김해), 금동불(8세기, 경남 하동)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약사불(9세기, 서면 방내리), 금동약사불(8세기, 경북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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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비로자나불, 9세기

비로자나불은 햇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부처로서, 신라 후기에 유행하였습니다. 신라의 비로자나불상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한쪽손으로 반대편 손의 검지를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의 자세를 취하되, 중국이나 일본 밀교의 보살 형상과는 달리, 여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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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약사불, 8세기

신라 후기에는 사회적 불안정을 반영하듯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 신앙이 유행하여 약사불상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약사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다른 불상들과 쉽게 구별됩니다. 신라 통일기의 금동약사불은 대부분 서 있는 입상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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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약사불, 보물 328호, 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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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상, 8세기, 경북 금릉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반가사유상 머래(7세기, 황룡사터), 금동반가사유상(7세기, 성건동)

금동반가사유상 머리, 7세기, 황룡사터
머리에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같은 삼산관(三山冠)을 썼습니다. 오른쪽 뺨 아랫부분에 손가락을 댄 자국이 있어 반가사유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신라 불상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7세기, 성건동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같은 계통으로서, 신라 지역에서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유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상(7세기)과 금동천인상(6~7세기)

금동천인상, 6~7세기
몸에 걸친 천의(天衣)는 앞쪽에서 X자 형으로 교차한 뒤 머리 위로 휘날려 마치 광배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착의 방식과 호리호리한 생김새로 보아 제작시기는 6~7세기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동탑)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서탑).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서탑)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 신라 9세기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에 있었습니다. 본래 5층 동서 쌍탑의 1층 몸돌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온전한 모습의 탑신석이 동탑, 한쪽면이 결실된 탑신석은 서탑의 일부였습니다. 두탑신석 네면에 부조된 불상의 조각 수법과 자세는 약간씩 다르나, 각각에서 동쪽면으로 비정되는 약사불은 왼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약그릇으로 보이는 둥근 물건을 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 있는 자세의 사면불상은 경주 지역 석탑에서만 보이는 특징으로 주목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국사와 석굴암 – 불국토의 이상향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에 위치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불교문화재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재상을 지냈던 김대성의 발원으로 751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석불사)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지었다고 하니, 이 두절은 그의 깊은 신앙심뿐만 아니라 지극한 효성의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국사는 평지에 세워진 여러 건물의 집합체이고, 석굴암은 산 중턱에 지어진 단일한 인공의 석굴사원이란 점에서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부처의 나라’를 뜻하는 불국사는 여러 부처의 세계가 드넓게 펼쳐진 것과 같습니다. 반면, 석굴암은 우주의 질서를 하나의 불국토로 응집한 작은 결정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조적인 성격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의 원대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함께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완성으로 비로소 신라땅에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경주 불국사는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774년에 완공하였다.>

통일신라 전성기때 세운 사찰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삼국시대 이래 평지에 세워진 기존 사찰의 가람배치와는 달리 경사진 지형에 인공으로 축대를 쌓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람배치를 계승함과 동시에 아래쪽에 아마타불을 모신 극락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 등 후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전 중심의 가람배치도 함께 공존하는 독창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가람배치는 후대에 세워진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국사만의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암 석불(국보)>

지금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2차례에 걸치 석굴암 보수공사의 결과로 석굴암 본존불은 유리창안에 있고, 그 앞에는 보호각을 만들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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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범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대 제작

범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어졌던 최고의 천신이었습니다. 이 신은 불교가 성립된 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불교에 수용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보호하는 역할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범천상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상입니다. 석굴암 범천상은 둥근 주실 입구의 좌우에 제석천상과 대칭되게 서 있습니다. 몸에는 승려와 같은 가사를 입은 뒤 장신구를 착용하였습니다. 왼손을 내려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쥐었고, 오른팔은 굽혀 먼지떨이인 불자를 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입니다. 이 상은 작품의 형상과 완성도 면에서 8세기 동아시아 범천상의 기준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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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제석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제석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敎)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신앙되었습니다. 벼락을 무기로 사용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 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신도 범천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립된 뒤 불교에 수용되어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석천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桓因) 천왕과 동일시되어 우리나라에서 중요시 되었습니다. 석굴암 제석천상은 신들의 제왕답게 몸에는 임금처럼 소매가 길고 화려한 도포식의 옷을 입었고, 왼손바닥 위에는 제석천의 무기인 벼락을 형상화한 금강저(金剛杵)를 올려 놓았습니다. 조각상임데도 불구하고 마치 회화를 보는 듯이 자연스러운 자세와 세부 표현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불두, 8세기, 경주 양북면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판불, 보물 1475호, 680년경, 월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삼존판불, 680년경, 월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판불, 680년경, 월지

월지에서 출토된 2구의 삼존상과 8구의 보살좌상으로 이루어진 금동판불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하단에 돌출된 촉과 광배 테두리에 뚫린 구멍으로 보아 본래 불감(佛龕) 같은 곳에 부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존불의 경우,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 이와 같은 설법인(說法印) 즉 전법륜인(轉法輪印)의 손갖춤을 한 아미타불상이 널리 유행하였으므로 본존불은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라 통일기 불교 미술의 국제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679년(문무왕 19)에 태자가 동궁을 지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제작시기는 7세기 말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상과 영험
신라때 불상은 예배 대상으로서 신자와 상호 소통하며 교감하는 인격체처럼 신앙되었습니다. 예컨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생의(生義)라는 승려가 꿈을 꾸고 경주 남산에서 돌미륵을 파내어 삼화령에 모셨다거나, 693년(효소왕 2)에는 북쪽 오랑캐에 끌려갔던 화랑 부례랑이 부모가 백률사 관음상에 기도하자 즉각 귀환하였으며,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분황사의 천수관음상 벽화에 어머니가 빌자 눈 먼 딸이 눈을 떴다는 등 여러 종류의 영험담(靈驗談)이 전합니다. 또한 불상은 승려의 수행을 돕고 계율을 내려주는 역할로 등장하거나, 불교의식에 모셔져 사용되는 등 신이(神異)한 감응을 일으키는 주체로도 인식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이 불상을 대할 때 지녔던 이와 같은 태도나 사고방식은 현재 전하는 수많은 신라 불상들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팔부중이 새겨진 석탑 면석, 경주 남산 창림사터, 신라 9세기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창림사터 주변에서 수습되었습니다. 신라 통일기 후기 석탑의 부조상으로 유행했던 팔부중 가운데 가루라(迦樓羅)를 새긴 상층기단 면석의 일부입니다. 몸에 갑옷을 걸치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구름 위에 유유히 앉아 있습니다. 가루가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속의 새로서 입이 새의 부리 모양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