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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불탑과 사리갖춤

불교에서의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이며, 부처가 깃든 성스러운 곳으로 예배와 수행의 대상이다. 탑을 세우는 것은 부처의 진리를 널리 세상에 보이는 과정이기에 불교의 융성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져 불교미술 조형품의 백미로 자리잡았다. 특히, 통일신라 때 조성된 많은 석탑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탑에는 사리를 모시기 위한 그릇인 사리갖춤이 모셔졌는데 대부분의 유명한 석탑에서는 이런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사리갖춤에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이 포함되는데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탑을 발원한 사람의 바램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와 구성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리갖춤들은 금속세공을 비롯하여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었기때문에 예술적 가치 또한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당시 사천왕서 서탑터.

신라는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사건을 거치며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후원하면서 7세기 이후에는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습니다. 호국불교 신앙이 본격화된 것도 신라에서였습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호국불교 신앙의 출발점은 신라가 옛날부터 과거의 부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이었습니다. 불교의 토착화에 기여한 이러한 생각은 지금의 신라가 바로 부처의 땅이라는 불국토설로 발전되어 불교문화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전성기 신라의 왕경에 대해 “절이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 가는 듯하다.”라고 묘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불교문화의 융성을 보여줍니다. 8세기 중엽에 조영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그 절정기의 산물이었습니다. 불교미술이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고 ‘문화재’라는 가치가 부여된 것도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그러나 불상이나 불탑 속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여 불법적으로 거래하는 나쁜 풍조가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가 파괴되고 출처를 알 수 없게 되는 등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불탑과 장엄
사찰 안의 불교미술은 부처의 세계를 재현하고 장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불상과 함께 불사리를 모신 불탑이 있었습니다. 불탑은 부처의 열반, 즉 윤회를 끊은 영원한 적멸(寂滅)을 상징하므로 가장 본질적이고 성스러운 예배 대상이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634년), 황룡사 구층목탑(645년) 등 다종다양한 형태의 불탑이 조영되었고, 발원자에 따라 불탑에 담은 염원도 저마다 달랐습니다. 내부에 불사리를 모시는 장엄도 똑같은 경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독특하였습니다. 신라 통일기에 세워진 불탑의 상당수는 기복적 성격을 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라 후기의 석탑에 표현되는 다양한 존상이나 장엄의 근거를 이와 같은 조탑경전의 내용에서 찾기도 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사천왕사는 669년(문무왕 9)과 670년에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文豆累秘法)이라는 불교의식을 행하여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내력을 지닌 신라 통일기의 대표적 호국사찰입니다. 이 절터의 동서 쌍탑 주변에서 악귀를 깔고 앉은 녹유신장상 전이 수습되었습니다. 이 전들은 사찰이 창건된 679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각에 능통한 신라의 승려 양지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중을 제작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양지가 이 상들을 만들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신장상 조각들을 복원하면 전의 크기는 높이 90cm, 폭 70cm 가량이 됩니다. 여러 벌의 틀로 찍어낸 뒤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발라 구웠습니다. 근래의 발굴조사에서 이 신장상 전들은 A, B, C, 3종류로 이루어졌고, 탑의 기단부 바깥쪽 네 면에 각 6개씩 총 24개를 설치한 벽전(壁塼)이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상들의 존명에 대해서는 사천왕, 팔부중, 신왕(神王) 등의 여러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천왕사 목탑터.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에 표현된 그림의 3가지 형태

OLYMPUS DIGITAL CAMERA녹유 신장상 전(塼, A타입).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던 벽돌이다. 사실적이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서역 불교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녹유 신장상 전 조각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B타입).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C타입)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전 조각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신장상 전 조각.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장식, 7세기, 사천왕사터

1936년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구부러진 장식 끝에 보주가 달린 형태로서, 금관의 세움장식 끝의 보주를 연상케 합니다. 편 한쪽에 ‘東塔西’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천왕사의 쌍탑 가운데 동탑의 서쪽에 설치되었던 장엄물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녹유전, 7세기, 사천왕사터

녹유전은 표면의 광택으로 인해 불교경전에서 서방 극락정토에 있다고 하는 유리전(琉璃塼)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좌우 양쪽을 비대칭의 우아한 능형(菱形) 곡선으로 처리하여 다른 개체와 연속적으로 맞물리도록 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국보 112호). 경주 사천왕사의 목탑과 함께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적용된 쌍탑형식의 가람배치이다.  후대의 석탑과는 달리 각부분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조건축물처럼 여러개의 석재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2개의 탑 모두 해체.수리과정에서 사리엄장구가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엄장구, 보물 366호, 신라 682년경. 사천왕사 건축에 크게 기여한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재위 661~681년)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신문왕(재위 681~692년)이 682년에 완성한 감은사의 동.서석탑에 넣었던 사리기의 일부입니다. 서탑의 사리기는 1959년에, 동탑의 사리기는 1996년에 각각 해제.복원하는 과정에서 3층 몸돌 윗면의 네모난 사리구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리 외함의 네 면에는 갑옷을 입은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리 내함은 전각 모양으로서 중앙의 불사리를 모시는 항아리 주변에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라 통일기 초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조각솜씨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 외함. 외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섬세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39호). 형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이 완성되어 가던 시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9m에 이르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 외함. 겉면에 사천왕상이 선으로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불상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구층 소탑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삼층 소탑

금동사리엄장구,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신라 8세기
1996년 석탑 보수공사 중 3층 지붕돌 윗면에 마련된 사리구멍에서 나왔습니다. 금동 사리함의 표면에는 촘촘히 찍은 둥근 무늬를 바탕으로 사천왕상이 유려하게 선각되어 있습니다. 사리함 안쪽에 별도의 사리 내함은 없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금동과 나무로 만든 작은 소탑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함께 수습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묵서 지편의 내용과 관련있는 것이어서 무구장경 신앙에 의거하여 석탑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장식, 7~9세기, 감은사터

구부러진 꽃술과 연봉우리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끝부분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아 리벳으로 다른 것과 연결하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찰 건축 장엄구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문 장식, 7세기, 고선사터

문에 달린 빗장의 일부였습니다. 덕동댐 건설로 1975년 수몰된 경주 고선사터의 금당터 서북회랑 바깥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끝부분은 세 잎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중간에 수직으로 돌출된 부분은 연꽃처럼 만들어 구멍을 뚫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풍탁, 7~9세기, 감은사터

신라 범종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윗면에는 고리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고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청동 풍탁에 버금갈 정도로 크기가 큰 편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사자머리 모양장식( 7~9세기, 감은사터), 금동 신장상 머리(7세기, 전 인용사터)

끈으로 중간을 묶은 머리, 부릅뜬 큰 눈, 콧수염 등 감은사터 금동사리외함에 부착된 이국적인 호인(胡人)형의 사천왕상 얼굴과 유사합니다. 사리장엄구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자, 7~8세기, 분황사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장식, 8~9세기, 경북 영덕 유금사

세 갈래로 피어나는 식물의 생명력을 형상화한 장식입니다. 신라 후기의 불상 대좌 하대석에 표현된 귀꽃을 연상시킵니다. 어딘가에 부착하여 고정했던 일종의 장엄구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 사리함 뚜껑, 706년경,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사리함 뚜껑에 새겨진 글씨

OLYMPUS DIGITAL CAMERA번역된 내용.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아미타불, 국보79호, 706년경,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942년 경주 낭산 동쪽의 구황동 삼층석탑 2층 지붕돌 윗면의 사리구멍에서 수습되었습니다. 금동사리함 안에는 각종 사리장엄굴를 비롯하여 금제불입상과 금제불좌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석탑은 692년에 승하한 신문왕(재위 681~692)을 위해 부인인 신목태후와 아들인 효소왕(재위 692~702)이 세운 것입니다. 700년에 신목태후가, 702년에는 효소왕이 각각 사망하자 효소왕의 동생이 성덕왕(재위 702~737년)이 706년에 불사리 4과와 크기 6촌의 순금제 아마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석탑에 넣고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로써 금제불좌상은 706년에 넣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37호). 삼국통일 이후 정형화되어가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석탑이다. 감은사지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크기는 작아지며, 구성부분의 표현 또한 간략화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함, 863년경,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리함.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사면불이다. 통일신라 밀교의 영향을 받은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1층몸돌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민애대왕 사리그릇(보물 741호). 납석으로 만든 그릇으로 당시에 유행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1층 몸돌 윗면의 사리구멍에 들어 있던 금동사리함의 네 면입니다. 원래는 모서리에 뚫린 구멍을 연결하여 네모난 형태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정확한 결합방식과 방향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리함 안에는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민애왕(재위 838~839년)을 기리는 내용의 863년(경문왕3)명 납석제 사리단지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금동 사리함 각 면에는 보관을 쓰고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약합을 든 약사불,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 합장을 한 부처의 삼존상을 타출하였습니다. 이상들에 대해서는 밀교의 사방불을 신라식으로 변형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양양 진전사터 삼층석탑(국보 122호). 지대석 위에 이층의 기단부가 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기단부 2층 몸돌에는 팔부중상을, 탑신 1층 몸돌에는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공주박물관 선사고대문화실] 백제와 충남지역 불교 문화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때(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東晉)으로부터 들여왔다. 백제의 지배층이 사회통합차원에서 국가적으로 불교를 적극 수용하게 된 것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공주로 도읍을 옮긴 웅진백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왕은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불교 경전을 받고 기술자를 초빙하여 각처에 사찰을 세우고 등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태안과 서산의 삼존불상 등을 볼 때 중국 산동지방 불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박물관에는 공주와 주변지역에서 출토된 불상을 비롯하여 불교문화재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실제 웅진백제기 유물들은 거의 없는 편이며, 사비기 백제(7세기경)때 만들어진 공주의당보살입상(국보), 통일신라시대 공주지역의 독특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계유명천불비상(국보)과 서혈사 절터에서 출토된 석불좌상(보물) 등이 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공주가 지역의 중심지로 백제불교를 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입상, 국보 247호, 공주 송정리, 백제.>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으로 안정된 표현기법과 구슬장식, 연꽃무늬 대좌양식 등에서 7세기 백제 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불교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1년(384)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전래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제의 왕실과 지배귀족들은 고대국가체제 정비를 위한 새로운 사회통합의 방법으로 불교를 적극 수용하였다. 본격적인 불교의 발전과 장려는 웅진시대부터이며 사비시기에 크게 융성하게 된다. 특히 성왕은 공주와 부여에 대통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을 세우고 541년에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의 경전을 요청하여 백제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후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 법왕, 무왕 등도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고 백제 전역에 능사, 미륵사, 왕흥사와 같은 많은 사찰을 세웠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공주 능암사지,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도제불상대좌, 청양 본의리, 백제. 높이 1m의 거대한 불상받침으로 세련된 제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불상대좌 양식은 일본 불상받침에 전승되었다고 한다.

1986년 청양군 본의리에 있는 백제시대 가마터에서 파편 상태로 수습되었으며, 복원결과 높이 100cm, 폭280cm의 초대형 불상받침으로 밝혀졌다. 좌우 대칭의 옷자락이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주름처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법륭사 금당석가삼존 등 일본의 불상 받침에 전승되고 있어 당시 백제 불교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제작시기는 백제 말기인 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공주 공산성,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금산 음지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입상, 공주 명곡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공주 공산성.당진 용연리, 통일신라.

불비상(佛碑像)
불비상은 비석처럼 돌을 다듬어 앞면이나 옆면에 부처를 조각하고 발원문을 새겨 놓은 불상을 말한다. 불비상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시작하여 당나라까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통일신라 초기의 충남 연기군 일대에서 성행하여 ‘연기파불비상’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국내에 불비상은 국립공주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포함해서 7점이 알려져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계유명천불비상’은 충남 연기군의 한 암자에서 발견되었고 국립 청주박물관에 전시된 ‘계유명불상’과 ‘기축명불비상’, ‘반가사유사상’ 등 8점은 연기군 비암사 석탑 상층부에서 1966년 발견되었다. 이 외에 연기군 연화사에 2점, 동국대박물관에 1점 소장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계유명 천불비상, 국보108호, 연기 서광암, 통일신라. 비석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으로 공주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불비상은 특히 통일신라초기에 연기지역에서 성행하였다고 하며 청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계유명천불비상’과 함께 7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지붕모양을 한 덮개돌과 연꽃무늬받침. 몸체를 각각 따로 만든 비석모양이며, 앞면에 작은 불상들이 수없이 새겨져 있다하여 천불비상이라 한다. 불비상의 아래쪽에 있는 삼존불의 좌우에는 “계유(癸酉,673)년 4월15일에는 백제 유민 250명이 국왕대신, 7세부모, 법계중생을 알리기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 초기 백제 옛 땅에 백제불교와 미술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혈사지 석불좌상, 보물979호, 공주 서혈사지,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불상이다.

공주시 웅진동 서혈사터에서 발견된 부처상이다.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여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린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대좌는 여덟잎의 연꽃을 표현하였으며, 대좌를 받치는 지대석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과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 가릉빈가를 새겼다. 전체적인 자세와 세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위치를 느끼던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한다. 백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하였지만, 백제 방어군을 격파하고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킨 뒤 웅진성을 포위한 신라.당 연합군에게 결국 항복하고 만다.(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충신들과 각 지방의 세력들은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첨으로 군사를 일으켜 한때 200여 성을 회복하며 4년간 활동하였으나 결국 신라.당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어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백제의 옛 땅을 지배하려 했디만 결국 신라에 의해 밀려나고 충남 지역을 비롯한 백제의 영토는 신라에 편입된다. 이로서 이 지역에는 백제 문화의 잔영 위에 신라의 문화가 이입된 새로운 문화가 융성하게 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도깨비 얼굴모양 기와,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공주 주미사지, 공주 서혈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조각,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보상화무늬 수막새, 공주 금학동,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암막새, 공주 금학동,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넝쿨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치미,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충남의 통일신라 토기
충남지역 곳곳에서 발굴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이 시기 무덤에서는 백제의 무덤에 많이 부장되었던 항아리, 바리, 개배 대신 당시 유행하던 도장무늬로 장식된 합, 병, 완 등 다양한 신라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보령 진죽리와 공주 가교리에서는 도장무늬로 장식된 토기를 만들었던 통일신라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어 백제지역에서도 본격적인 신라 문화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충남지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토기

OLYMPUS DIGITAL CAMERA굽항아리, 연기 와촌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합, 공주 소학동. 공주 금성동,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인화문 병, 인화문 완, 아산 명암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병, 공주 귀산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병, 보령 진죽리,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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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지도, 조선, 종이에 수묵

계룡산을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개화식의 구도로서 계룡산의 주요 봉우리와 사찰, 촌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산봉우리는 진한 묵으로 윤곽을 표현하고, 마른 붓질을 반복하여 명암을 주었으며, 대둔산은 엷은 묵으로 처리하였다. 그림 아래에는 계룡산의 어원 및 풍수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목 지도, 복제품, 조선 1872년, 종이에 채색

채색 공주목 지도이다. 지도와 지리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사례로서 산천, 창고, 사찰, 고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공산성의 성벽과 중군영 등 조선시대에 만든 군사시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고지도 중 공산성의 모습을 가장 자세히 표현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돌곰, 공주 웅진동, 백제

무령왕릉 맞은 편 남쪽 구릉의 경사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선명하지 않은데, 본래부터 강한 선으로 조각되지 않은 것 같다.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약간 위로 향하고 있으며,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를 구부려서 앉아 있는 모양이다. 입을 다물고 양쪽 눈은 뜨고 있으며, 양쪽 귀는 뒤로 붙어 있다. 곰나루와 가까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곰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만히 남아 있다. 이 돌곰이 출토된 곳이 바로 곰사당이 있던 자리로 생각된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

반가사유상은 불상 중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을 무릎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된채 생각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불상을 일컫는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시절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상의 협시보살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단독 불상의 형태로 바뀐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남북조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5세기말 운강지역에서 미륵불과 삼존상의 협시보살이 형태로 나타나며, 6세기 북제(北齊)에서 크게 성행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백제의 서산 용현리마애삼존여래상(국보84호)에서 왼쪽 협시불로 나타나고 있다. 단독불상으로 만들어진 국보78호,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삼산관’과 ‘일월식보관’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출토되는 다른 반가사유상 또한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으로 당시에 성행했던 미륵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국보83호 반가사유상과 거의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은 석굴암 본존불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015년 가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에서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반가사유상(국보 78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한다리를 다른 쪽 무릎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된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을 한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 같은 여러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7세기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 시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국 남북조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형태로 좌우의 보살들이 중앙의 반가사유상을 모시고 있는 형태이다. 조각수법은 떨어지는 편이며, 신체의 특징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국 산동지방에서 출토된 것으로 북제(北齊,563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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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소’롤 잘 알려진 서산 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국보84호) 중 왼쪽에는 미소띤 얼굴을 하고 있는 보살로 삼국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나 관음보살을 표현한 불상이 많다. 중국 북위때 협시불로 나타났다가 신라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시대 불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와 일본의 반가사유상이 유명하며, 협시불로 표현된 이 불상에서 반가사유상이 중국에서 유래하여 백제를 통해 신라와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삼국시대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삼산관 또는 연화관이라 한다.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고 있다. 다리를 감싸며 대좌를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상은 신라계 승려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고류사의 붉은 소나무로 만든 반가사유상과 비교해 볼 때 신라에서 만든 것을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균형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솜씨로 미루어 백제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cm에 이른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삼산반가사유상’이라고도 부른다. 반가사유상은 원래는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을 반영하여 미륵불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삼존불 형태로 많이 표현되고 있으나, 삼국시대에는 단독불상으로 주로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눈.코.입등이 표현이 뛰어나 조각품으로서 높은 예술성을 평가받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정화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백제 또는 신라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고류지에 남아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그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3.2cm, 무게 37.6kg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 관에는 해와 달 장식이 있어 ‘일월식보관’이라 한다. 이렇게 해와 달이 새겨진 관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관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인 조화, 처의 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등에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는 또 다른 세련된 조각 양식을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보 78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는 달리 머리에 해와 달이 장식되어 있는 ‘일월신보관’을 쓰고 있다. 이런 양식은 사산조페르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문화로 볼 수 있다. 얼굴과 신체의 표현, 신체 각부분의 비율 등에서 국보83호 반가사유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세련된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복제
일본 고류지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닯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에 상주함녀서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미륵보살은 종종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 가운데 왜와 긴밀한 협력돤계를 이루었으며, 멸망한 뒤에도 백제유민 일부가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교를 비롯해 백제의 다양한 문물이 왜로 전해져 일본 곳곳에는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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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외형의 거의 비슷한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복제)이다. 백제 또는 신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고류지는 신라계 승려가 창건한 사찰이며 불상을 새긴 목재는 경상도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붉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세련된 조각솜씨로 볼 때 백제불상이라는 견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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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가유상 (삼국시대,7세기전반, 보물 331호). 신체가 사실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불상으로 정교한 세부표현과 추상성이 특징이다. 4각형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를 놓고 있는데 보살상에 비해 크게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보인다. 이 불상의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슬장식이나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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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7세기,왼쪽). 전형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그만 금동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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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반가사유상(삼국시대, 7세기전반,오른쪽).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 손가락을 뺨에 살짝대고 있는데 비해 이 반가사유상은 손바닥 전체로 뺨을 감싸듯이 받치고 있다. 머리 윗부분에는 광배를 결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구멍이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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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머리에 넝쿨무늬가 표현된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 반가사유상으로 콧수염이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머리 뒤쪽에 꽂이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부처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가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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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반가사유상, 경남 양산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신체가 사실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불상으로 정교한 세부표현과 추상성이 특징이다. 4각형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를 놓고 있는데 보살상에 비해 크게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보인다.

반가사유상의 자세를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표현한 상이다. 넝쿨과 꽃모양으로 장식한 보관과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온화한 미소와 살포시 댄 손가락, 유려한 옷주름은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머리 뒤에는 광배꽂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