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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장항리사지 석조불입상과 석조대좌

경북 경주시 장항리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불입상과 석조대좌이다. 불상은 하반신은 남아 있지 않고 상반신만 있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높이 2.5 m인데, 원래는 4.8 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석가모니의 키가 1장 6척(4.8 m)라는 내용을 구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각수법이나 표현방식, 지역 등을 고려해볼 때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상은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여 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불입상(石造佛立像), 경주 장항리 절터 출토, 통일신라 8세기 높이 2.5 m>

장항리사지 절터에는불상을 놓았던 대좌(臺座)가 남아 있다.  아래 돌에는 여덟 방향에 안상(眼象)을 두고 있는데 네 곳에는 동물을, 다른 네 곳에는 신장상을 새겨놓고 이다. 위에 얹은 돌에는 연꽃을 16송이씩 조각하였다. 불상 대좌 윗부분에 불상을 꽂기 위한 촉구멍이 있어 불상이 입상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대좌>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천인상>

OLYMPUS DIGITAL CAMERA<안상에 새겨진 동물상>

OLYMPUS DIGITAL CAMERA<안상에 새겨진 동물상>

경주 양북면 장항리의 한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장항리 절터에는 오층석탑 2기와 불상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이 불상은 하반신이 없는데도 서 있는 불상(立像)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크기는 대략 4.8 m로 옛날 척도로는 1장(丈) 6척(尺)에 달하는 매우 큰 불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들여 불상을 크게 만든 이유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부처의 키가 1장 6척 ‘이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만들었을까요? 불상이 언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대개의 불상은 언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불상은 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과 얼마나 같고 다른가에 따라 대체로 시기를 결정합니다. 어느 한 시기, 특정 지역에서는 비슷비슷한 불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이 불상과 비교할 수 있는 불상은 바로 8세기 중엽에 만든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근엄한 얼굴, 건장한 신체, 사실적인 옷 주름 등 어딘지 모르게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안내문,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경북 경주시 율동에 있는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이다. 벽도산 서쪽 바위를 깎아 만든 마애불상이다. 서방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하고, 왼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이 있는 삼존불상이다. 후대에 조성된 마애불상에 비해 돋을새김이 입체적이고 표현이 사실적이다.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과 조각수법이나 양식의 거의 비슷하다.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자연석에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조각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거치면서도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 불상을 새기던 장인들의 바위재질에 대한 지식과 뛰어난 조각기술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본존불 얼굴과 광배>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는 연꽃 모양의 받침에 서 있으며, 머리는 크고 입체감있게 돋을새김을 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광배를 새겨놓고 있다. 양어깨를 감싸는 옷은 얇게 표현되어 있으며 몸의 굴곡을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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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아마타여래>

왼쪽편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꺠 위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알려진 보살로,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민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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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관세음보살>

오른편에는 대세지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다. 협시보살이라고 불리는 대세지 보살을 지혜와 광명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불상 뒤에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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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대세지보살>

OLYMPUS DIGITAL CAMERA<왼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에서 본 모습>

경주와 대구를 연결해주는 옛 도로에서 부근 두대리 마을을 지나서 산길로 조금 들어오면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 올라 올 수 있다. 불상 앞에는 작은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에서 들어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

OLYMPUS DIGITAL CAMERA<불전 겸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산신각>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경주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석조관음보살입상이다. 높이 3.76 m로 비교적 큰규모의 불상이다. 원래 문무왕을 화장한 장소로 추정되는 낭산 서쪽 능지탑 부근에 있던 것으로 옮겨온 것이다. 머리, 몸통, 연꽃대좌가 따로 발견되었는데 같은 불상임이 확인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하였다. 통일신라 전성기 때 조성된 불상으로 조형미나 조각수법은 양호한 편이나 형식적인 면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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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 통일신라 8~9세기>

경주 낭산은 경주 도심 동남쪽 넓은 벌판 한가운데에 누에가 누워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낭산 남쪽언덕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그 아래에 문무왕을 추도하기 위해 세운 사천왕사가 있다. 북쪽에는 황복사 절터에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능지탑은 낭산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낭산 능지탑지>

석조관음보살입상, 경주 낭산 출토, 통일신라 8~9세기 높이 3.76 m
원래 보살상의 머리와 몸체는 각각 따로 있었는데, 머리는 일찍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몸체는 경주 낭산(浪山) 서쪽 기슭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5년에 몸체를 조사하였는데, 그 마을에 살던 노인에게서 이 불상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에서 가져갔는데, 그 모양새가 여느 불상과 달리 길쭉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전시 중이던 보살가 낭산에 있는 보살 몸체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1997년 4월에는 몸체가 묻혀 있던 부근에서 연꽃 대좌를 발견하게 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관음보살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개 되었을까요? 우선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자비를 상징합니다. 이 보살은 자비를 실천하 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대개 보관에 작은 불상인 화불이 새겨져 있고, 정병(淨瓶)을 들고 있습니다. 이 불상 같은 경우, 보관 화불은 마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금동불상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이다. 이 불상은 경주 백률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경주박물으로 옮겨졌다. 높이 1.7 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금동불상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현재는 약단지를 쥔 손이 없지만, 옛 사진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남아 있다. 원래는 금도금을 하였던 것을 후대에 금도금이 없어지고 채색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으며 얼굴을 단정하고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으나 이전 불상에 비해 사실적인 표현이나 생동감은 줄어 들었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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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신체의 표인히 평면적이며 도식적인 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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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은 신체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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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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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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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병을 든 손이 남아 있던 옛 사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중군 남북조시대에는 불상이 토착화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보살상과는 달리 장신구가 많지 않으며, 얇은 천의를 ‘U’자형으로 늘어뜨린 모습이다. 비슷한 형태의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도식적인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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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불상, 북제, 칭저우 용흥사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백률사>

약사불(金銅藥師佛立像, 국보),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통일신라 8세기 후반
이 약사불은 원래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柏栗寺)에 있던 것인데,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소금강산은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쥔 손이 없는 데도 무슨 이유로 약사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이 부처를 약사불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외형 틀과 내형 틀을 고정하기 위한 틀잡이(型持) 자국이 있습니다. 뒷면에는 머리 한 곳과 몸체 세 곳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데, 모두 턱이 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별도의 구리판을 끼워 마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곳에 붉은색, 푸른색, 녹색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부처의 몸에서 금빛이 난다는 경전의 내용을 쫓아 금도금하였을 것이지만, 점차 도금이 없어지자 어느 때인가 불상에 채색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체의 양감量感이 두드러졌던 8세기 중엽 불상과 달리 다소 밋밋해졌지만, 입가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8세기 중엽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 숭고미崇高美가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대표적인 통일신라 사방불

경북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굴불사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사면불상(보물)이다. 이 불상은 큰 바위 에 불상을 새겼는데 서쪽에는 아미타여래, 동쪽에는 약사여래, 북쪽에는 미륵보살, 남쪽에는 석가모니를 새긴 사방불(四方佛)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8세기에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했을 때 염불소리가 들려 땅을 파보니 큰 돌이 나와 4면에 불상을 새기고 불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입체감과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뺴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부족하며 조화를 잘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사방불(四方佛)이란 각 방위마다 불국토가 있고 그곳에 상주하며 네방위를 패표하는 부처를 형상화한 불상이다. 불국토 신앙과 오악숭배사상, 호국사상 등이 결합되어 통일신라 떄 성행하였다. 불교경전엔 약 5세기경에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시대와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서쪽은 아미타여래 삼존상을 표현하고 있다. 아미타여래는 바위에 몸통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를 조각해 올려 놓았다. 좌우에는 별도로 보살상을 조각해 세워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아미타여래 삼존상>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는데 양발을 무릎위에 올리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과 신체가 세련되고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약사여래좌상>

OLYMPUS DIGITAL CAMERA<약사여래 얼굴>

북쪽면 오른쪽에는 입체감있게 조각한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팔이 달린 관음보사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면 관음보살과 미륵보살>

남쪽면에는 석가여래삼존상을 표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상과 가운데 본존상 머리를 떼어갔다고 한다. 4면에 새겨진 불상 중 조각수법이 제일 나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면 석가여래삼존상>

OLYMPUS DIGITAL CAMERA<굴불사지 절터와 석조사면불상(보물)>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보물), 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 4
이 불상은 경주의 북쪽 산인 소금강산(小金剛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약 3m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 (四方佛)형태이다. 불상은 서쪽면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동쪽면에는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남쪽면에는 삼존입상(二等立像)이, 북쪽면에는 보살상(菩薩像) 두 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북쪽면 보살상 중 한 분은 얼굴이 열하나, 팔이 여섯 달린 관세음보살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불렀다고 한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고(金鼓)에는 굴석사 (石寺)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안내문, 2012년, 경주시청)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