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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척화비, 구한말 서양세력을 배척하고자 전국적으로 세운 비석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에 있는 척화비이다.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이를 경고하고자 서울과 전국 중요 도로변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이다. 긴 직육면체를 하고 있는 단순한 형태의 비석에 글을 새겨놓고 있다. 척화비는 1871년 전국적으로 동시에 많이 세워졌는데 대부분 철거되고 몇기만 남아있다. 시대상황과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청도 척화비 01-20200106청도군 관아 객사 앞에 세워져 있는 청도 척화비. 화강석 기둥에 글씨를 새져 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청도 척화비 02-20200106척화비가 세워져 있는 청도군 객사 도주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청도 척화비,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이 비는 조선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화 고종 8년(1871)의 신미양요를 겪은 후 서양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들에게 경고하고자 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세운 척화비이다. 이 비는 당시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웠던 척화비 중에 하나인데 도로변에 세워져 있던 것을 도주관 내로 올며 놓은 것이다. 비신의 높이는 155 cm이고 폭은 45 cm이며 두꼐가 25 cm인 작은 비석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고 쓰여 있다. 이 비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한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는 역사자료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보물 316호), 고려중기 승려 학일의 탑비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 경내에 있는 원응국사비(보물 316호)이다. 고려중기 승려 원응국사 학일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탑비이다. 받침돌과 머릿돌은 남아 있지 않고 비몸만 3조각으로 잘라져 있던 것을 복원해 놓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윤언이가 짓고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승려 탄연이 쓴 것이라 한다.

원응국사 학일(1051 ~ 1144년)은 송나라에 유학하였으며,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선종을 지켰다고 한다. 법주사, 구산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운문사에 머물다 1144년 93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사후 인종은 그를 국사로 책봉하고 비를 세우게 하였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보물316호01-20200106청도 운문사 경내에 있는 원응국사비.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고 비문이 새겨진 비몸 만 3조각으로 부서져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해 놓고 있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보물316호03-20200106
비석 앞면. 윗부분에 “원응국사비명”이란 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앞면에는 그이 행적이 적혀 있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보물316호04-20200106
앞면 아랫부분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보물316호05-20200106
뒷면에는 제자들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보물316호02-20200106운문사 출입문인 범종루를 들어서면 안쪽에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가운데 비석이 원응국사비이다.

원응국사비, 보물 316호
고려 중기의 승려인 원응국사 학일의 운문사 중창과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고려 인종 22년(1144) 학일왕사가 93세로 입적하자 인종은 국사로 책봉하고 원응이라는 시호를 내려 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 비는 높이 2.3 m, 폭 0.9 m로 비석머리와 받침돌은 없어졌고 현재는 3편으로 절단되어 있는 비편을 연결하여 하나의 비신으로 구성하였다. 해서체로 쓰여진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의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분의 작성자는 윤언이이며 글씨는 고려중기의 명필, 탄연스님이 썼다.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 운문사,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영천 청제비(보물 517호), 삼국시대 신라가 저수지를 쌓고 세운 비석

경북 영천시 도남동에 있는 청제비(보물 517호)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이곳에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쌓으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직사각형 화강암 판석에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앞면에는 536년(신라 법흥왕 23)에 제방을 처음 쌓을 때 새긴 것이고 뒷면에는 798년(통일신라 원성왕 14) 제방을 수리하면서 새겼다.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원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다. 비석에 새긴 내용으로 신라의 수리시설, 통일신라 행정체제, 공사 동원 방식 등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청제비 서쪽에는 1688년(숙종 14)에 세운 ‘청제중립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최일봉 등이 파손되어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고대비석의 해독과 보존 등 금석학에 대한 큰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1-20200105영천 청제비(보물 517호). 삼국시대에 세운 청제비와 그 옆에 조선후기에 청제비를 다시 세우면서 세운 청제중립비가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9-20200105청제비 앞면. 신라 법흥왕 때(536년) 이곳에 청못을 쌓으면서 그 경위 등을 새겨놓고 있다. 비석의 높이는 130 cm 정도이며 판석형태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천 청제비 탁본, 삼국시대(신라) 536년, 영천군 금호면 도남동,

영천 청제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비 높이는 130 cm 정도이며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의 양면에 각각 다른 시기에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앞면에는 병진년인 법흥왕 23년(536)에 처음으로 청제를 건립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동원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정원貞元 14년인 원성왕 14년(798)에 청제를 새로이 수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2-20200105청제비 뒷면. 통일신라 원성왕 때(798년) 무너진 청못을 수리하면서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8-20200105청제중립비. 조선후기 숙종 때(1688년) 지역 선비들이 땅속에 묻혀 있던 옛 비석의 내용을 확인하고 수리하여 다시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의 금석학에 대한 큰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3-20200105청제중립비 뒷면.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7-20200105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바깥쪽에서 본 모습.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5-202001052기의 비석은 원래 다른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은 청못 앞 한쪽편 비각에 보관되어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4-20200105영천 청못.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진 인공 저수지로 그 규모나 형태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 517호, 경북 영천시 도남동
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 있는 양면비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14 cm, 폭 94 cm, 두께 16 cm이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한면은 병진년 (법흥왕 23년, 536년)의 간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것이다. 다른 면은 정원 14년(원성왕 14년, 798년)의 절대 연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청제비 서쪽에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효종 4년(1653)에 비가 두 동강이 나서 땅속에 매몰되어 그 고적이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사람이 다시 세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위의 비문들은 1960년 12월 신라 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보물 16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옛 억정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대지국사탑비(보물 16호)이다. 이 비석은 고려말 활동한 승려 대지국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승탑과 함께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머릿돌은 없고 단순한 형태의 몸돌과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에는 해서체로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글씨가 온전히 잘 남아 있다. 근처 청룡사지에 남아 있는 보각국사탑비와 그 형태가 비슷하다.

대지국사 찬영(1328~1390)경기도 양주 출신이다. 14세에 서울 삼각산 중흥사에서 출가하여 보우의 제자가 되었다. 중흥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말년에 충주 억정사에서 은둔하면서 수행하다가 입적하였다. 조선 태조는 대지국사라는 시호와 지감원명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비(보물 16호). 고려말에 활동한 대지국사의 행적일 기록한 비석이다. 단순한 형태의 조선 초기 비석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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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새겨진 비몸. 비교적 글씨가 잘 남아 있어 일반인도 읽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윗부분에 비석의 제목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씨. 해서체로 비문을 썼는데 글자가 선명하다. 비문은 박의중이 짓고, 승려 선진이 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서 내려다 본 들판. 충주와 원주를 연결하는 옛길이 지나가고 있다. 교통요지에 세워졌던 고려시대 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큰 길에서 보이는 절터.

억정사 대지국사비, 보물 16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고려말 고승인 대지국사의 비로 조선 태조 2년(1393)에 세워졌다. 비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비의 건립 연대 및 대지국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대지국사는 양주 한씨로 본명은 찬영이며, 고려 충숙왕 15년(1328) 충주에서 태어나, 14세에 중흥사에 들어가 32세부터 62세로 입적한 공양왕 2년(1390)까지 고려 왕실을 가까이서 섬겼다. 이 비는 거북모양 및 용머리가 없는 14세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와 모양이 같다. 주변에 기와조각이 많이 나오고 있고 석재 등이 흩어져 있어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대지국사의 부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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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보물 1395호)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 도갑사 경내에 있는 도선국사.수미선사비(보물 1395호)이다. 조선중기에 조성한 비석으로 통일신라 때 활동한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활동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 조성한 비석이지만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전통적인 당나라 비석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얼굴과 거북의 몸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글자가 적혀있는 비몸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양쪽에 용과 구름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고 있다. 비문은 앞면에 2개, 뒷면에 1개가 각각 독립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을 지은 사람과 비석에 새긴 사람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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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도갑사 경내에 있는 도선국사.수미선사비(보물 1395호). 조선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통일신라 때 승려 도선국사와 조선시대에 활동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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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적이며 섬세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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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새긴 비몸과 머릿돌. 비봄은 대리석으로 조성했는데 옆쪽에 용과 구름을 생동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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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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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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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돌. 뒷부분에 2마리의 용이 엉켜있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그 아래에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적혀 있다.

도갑사 도선수미비, 보물 1395호
이 석비는 1653년에 건립된 것으로 우선 규모 면에서 다른 비석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각부의 양식에서 귀부는 다른 예와는 달리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비신 역시 조성재료가 대리석이라는 점 외에도 양 측면에 조각된 운룡문은 매우 힘찬 기상과 율동감을 지니고 이어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석비의 건립기간이 18년임을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 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아가 대부분의 석비가 1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도선과 수미선사를 표방하고 있어 이 역시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한편 건립연대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비문이 각가 독립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찬지는 물론 쓴 사람과 각자한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은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석비를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3년의 모금활동과 건립기간 18년을 포함한 21년간에 걸친 건립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2번째 비문에는 앞선 비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며, 석재의 채취로부터 이동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3번째 비문에서는 음기를 청탁받은 사실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석비의 건립과정에서 3개의 비문에 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이 석비는 규모의 거대함과 더불어 건립에 소요되는 기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아울러 미술사적으로 볼 때도 조선후기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도선과 수미선사 등 2인이라는 점과 글씨 역시 서예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 판단된다. (안내문, 영암도갑사)

<출처>

  1. 안내문, 영암 도갑사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