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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문익점 효자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문익점 효자비이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과 함께 목화를 재배했던 마을에 남아 있는 비석이다. 문익점은 모친이 돌아가신 후 묘곁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이곳을 침범했던 왜적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 알려져 고려 우왕 때(1383) 그에게 표창을 내리고 마을을 ‘효자리’라 이름하도록 하였다. 비석은 윗변을 살짝 둥글게 다음은 단순한 형태로 ‘孝子里’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앞쪽에 최근에 다시 세운 비석이 같이 놓여 있다.

산청 문익점 효자비 03-20220222
<산청 문익점 효자비>

산청 문익점 효자비 01-20220222<효자비 비각>

산청 문익점 효자비 02-20220222<최근에 세운 비석>

산청 문익점 효자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삼우당 문익점(1329 ~ 139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원래 문익점 선생이 살던 마을이었다. 선생이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하고 있을 때 왜적이 침범해 왔다. 지나는 곳마다 분탕질이 심하여 모두 피난을 갔지만, 선생은 홀로 여막을 지키며 평소와 같이 곡하고 있었는데, 왜적도 이를 보고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고 써서 세웠기에 일대가 모두 평안하였다 한다. 2383년(우왕9)에 정려를 내리고 이마을을 효자리라 이름지었다. 크기는 세로 160cm, 가로 50cm이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통영 두룡포기사비

경남 통영시 세병로 삼도수군통제영 유적에 남아 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이다.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건설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비를 세운 경위,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긴 이유, 이경준의 행적 등이 적혀 있다. 인조 때(1625년) 19대 통제사 구인후가 세운 것으로 원래는 남문 밖 바닷가에 있었는데 190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통영 두룡포기사비 01-20220221<통영 두룡포기사비>

통영 두룡포기사비 04-20220221
<비석>

머릿돌에는 구름과 두미리의 용을 조각해 놓고 있다. 일반적인 공덕비에 비해 화려하게 장식해 놓고 있다.

통영 두룡포기사비 02-20220221<머릿돌>

이경준은 선조 때 6대, 광해군 떄 9대 통제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산군수로 재직하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당시 호종하였으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통제사를 역임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통영 두룡포기사비 03-20220221<비몸에 새겨진 글자>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한 제6대, 제9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사적비’로 인조 3년(1625년)에 제19대, 제25대 구인후(具仁) 통제사가 세웠다. 두룡포는 원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경준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옴으로써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이 비석은 받침대 없이 비신(碑身)과 머릿돌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비문은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의 부사(府使)였던 박홍미가 지었다. 비문은 아랫부분이 마멸되어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그 내용은 확인된다.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함께 통제사 이경준의 약력(略歷)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하늘을 오르며 하나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 비석은 원래 통제영의 영문(營門) 자리에 세웠던 것을 190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성덕왕릉 귀부(거북받침돌)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거북받침돌이다. 성덕왕릉에 100 m 떨어진 곳에 있는 성덕왕비(聖德王碑) 거북받침돌이다. 글자를 새긴 비몸과 머릿들은 남아 있지 않다. 성덕왕의 아들인 형인 효성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 때(745년) 세워졌다.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덕대왕 신종(국보)을 주조하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성덕왕릉 귀부(거북받침돌)>

거북받침돌은 목이 부려져 남아 있지 않다. 발은 앞으로 나아갈려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 무늬가 새져져 있으며 비몬을 올려놓았던 홈이 파여 있다. 당나라 능묘제도가 받아들여지면서 왕릉 앞에 세워졌던 비(碑)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불국사가 세워졌던 8세기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뒷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앞발>

OLYMPUS DIGITAL CAMERA<뒷발>

OLYMPUS DIGITAL CAMERA<등에 새겨진 육각형 무늬>

OLYMPUS DIGITAL CAMERA<비몸을 올려 놓았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성덕왕릉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신라 33대 성덕왕릉>

성덕왕릉 귀부, 경북 경주시 조양동 666
이 귀부는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능비에 세웠던 받침돌이다. 거북머리는 깨어져 없지만, 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형상이다. 등에는 육각 귀갑(龜甲)무늬가 새겨졌고, 가운데에 비몸[碑身)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여기에 새겨진 거북 등무늬나 당초문은 8세기의 신라 왕릉에 건립된 귀부의 제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신과 머릿돌은 없어졌지만 경덕왕(景德王)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귀부는 6세기 이후부터 8세기 사이의 귀부 양식을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경주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이다. 고려중기 명종 때(1182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유교적 사회체제를 보여주는 정려비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유물이다. 당시 동경유수가 손시양의 효행을 국왕께 보고하여 마을 정문에 정려비를 세우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비석은 글자가 새겨진 비몸만 있고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다. 사각기둥형태의 화강석 돌기둥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고 크게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손시양의 효행내용과 비석을 세운 경위를 글자로 새겨놓았다. 비문은 당시 동경유수였던 채정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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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리(孝子里)’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앞면>

경주황남리효자손시양정려비
<효행 내력과 비를 세운 경위를 적은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세워진 황남동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골목길>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 (孝子孫時揚族間磚, 보물), 경북 경주시 황남동 240-3번지
정려비란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 명종 12년 (1182)에 세워진 정려비이다. 화강암을 네모기둥 모양으로 치석한 것인데, 비몸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은 없다.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 쓰고, 뒷면에는 5행 130자로 손시양(孫時揚)의 효행 내용과 비를 세운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손시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돌아 가시자 3년씩 초막을 짓고 묘소를 지킴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사실을 동경유수(東京留守)가 국가에 보고하자, 왕이 그 효행을 기쁘게 여겨 정문(雄門)을 만들어 주고 포상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 달리 네모기둥 모양으로, 고려시대에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숭복사 쌍거북비석받침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경주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이다. 이 비석받침은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 절터에 남아 있던 것이다. 숭복사는 원성왕릉 원찰 역할을 했던 사찰로 <삼국유사>에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마리의 거북이 비석을 받치고 있는 형태는 흔치가 않은데 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경주 창림사지와 무장사지에 비슷한 형태의 거북받침돌이 있다고 한다.  높이 0.77 m, 너비 1.8 m 규모이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조성된 것으로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崇福寺雙龜跌), 경주 숭복사터, 통일신라 9~10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숭복사지비 조각, 896년, 경주 숭복사지>

OLYMPUS DIGITAL CAMERA<숭복사지비 조각, 896년, 경주 숭복사지>

두 마리 거북이 붙어 있는 이 비석받침은 경주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 터에 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능은 토함산 서쪽 골짜기 곡사(승복사)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써 승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 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 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받침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승복사 외 에도 경주 배리에 있는 창림사 터와 경주 암곡동 무장사 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비석과 달리 쌍거북 받침일까요?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절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승복사는 원성왕 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고,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왕실과 관련된 비석을 좀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지 않았을까요?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