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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보물 1395호)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 도갑사 경내에 있는 도선국사.수미선사비(보물 1395호)이다. 조선중기에 조성한 비석으로 통일신라 때 활동한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활동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 조성한 비석이지만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전통적인 당나라 비석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얼굴과 거북의 몸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글자가 적혀있는 비몸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양쪽에 용과 구름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고 있다. 비문은 앞면에 2개, 뒷면에 1개가 각각 독립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을 지은 사람과 비석에 새긴 사람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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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도갑사 경내에 있는 도선국사.수미선사비(보물 1395호). 조선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통일신라 때 승려 도선국사와 조선시대에 활동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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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적이며 섬세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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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새긴 비몸과 머릿돌. 비봄은 대리석으로 조성했는데 옆쪽에 용과 구름을 생동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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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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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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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돌. 뒷부분에 2마리의 용이 엉켜있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그 아래에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적혀 있다.

도갑사 도선수미비, 보물 1395호
이 석비는 1653년에 건립된 것으로 우선 규모 면에서 다른 비석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각부의 양식에서 귀부는 다른 예와는 달리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비신 역시 조성재료가 대리석이라는 점 외에도 양 측면에 조각된 운룡문은 매우 힘찬 기상과 율동감을 지니고 이어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석비의 건립기간이 18년임을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 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아가 대부분의 석비가 1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도선과 수미선사를 표방하고 있어 이 역시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한편 건립연대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비문이 각가 독립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찬지는 물론 쓴 사람과 각자한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은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석비를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3년의 모금활동과 건립기간 18년을 포함한 21년간에 걸친 건립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2번째 비문에는 앞선 비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며, 석재의 채취로부터 이동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3번째 비문에서는 음기를 청탁받은 사실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석비의 건립과정에서 3개의 비문에 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이 석비는 규모의 거대함과 더불어 건립에 소요되는 기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아울러 미술사적으로 볼 때도 조선후기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도선과 수미선사 등 2인이라는 점과 글씨 역시 서예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 판단된다. (안내문, 영암도갑사)

<출처>

  1. 안내문, 영암 도갑사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0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313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진각국사비(보물 313호)이다. 고려중기에 활동한 진각국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은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로 머릿돌은 없다. 거북받침돌은 구슬을 물고 있는 용의 얼굴에 네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는 표현이 돋보이다. 비문은 고려중기 문장가 이규보가 지은 것이라 전하는데 비몸에 새겨진 글씨는 마모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나 고려초에 비해 비석제작 기술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나, 조각수법이나 세부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은 고려중기에 활동한 승려로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이다.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송광사 2대 국사로 불교개혁을 이끌었다. 그의 사호 고려 고종은 진각국사라는 시호와 원소지탑이라는 부도이름을 내렸다. 이규모가 지은 비문은 『동국이상국집』 등에 그 글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313호). 송광사 2대 진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고려중기 문장기 이규보가 비문을 지었다.

SANYO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며 힘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여의주를 물고 있는 얼굴.

SANYO DIGITAL CAMERA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듯한 힘이 넘치는 표현이 돋보이는 발.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서 본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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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몸(앞면). 글자가 마모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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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몸 뒷면에는 약간의 글씨가 남아 있으나 거의 알아보기 힘들다.

월남사지 진국국사비, 보물 313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비는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석은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국사(1178~1234)를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고종 37년(1250)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이규보(1168~1241)가 지었고, 글씨는 서예가로 이름난 탁연이 왕명을 받아 썼다. 진국국사의 속세의 성은 최씨이고 법명은 혜심으로 화순 사람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문하에서 선학을 닦았고, 송광사 16국사 중 제2조인 고승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몸돌을 올린 형태이다.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물었는데, 그 모습이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현재 비의 전면은 떨어져 나가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으나, 후면은 상당한 부분이 남아 있어 많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경내에 남아 있는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이다. 통일신라말 고승 선각대사 형미를 기리기 위해 고려초 (946)에 세운 탑비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비몸, 머리돌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머리에 거북몸을 하고 있는 거북받침돌이다. 비를 받치는 비좌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를 새겼다. 머릿돌에는 비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형태의 공간이 있으며, 그 주위에 구름속의 용의 모습을 조각했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의 행적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면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선각대사 형미(864~918)는 통일신라말 고승으로 보리사 보조선사의 제자이다. 당나라에 14년간 유학했으며 무위사에서 8년간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 통일신라말 당나라 비석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탑비의 형식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용머리에 거북몸을 하고 있는 받침돌. 조각수법이 섬세하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거북받임돌. 비를 받치는 비좌에는 꽃무늬 모양의 안상을 새겨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서 본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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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몸에는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과 최언위가 글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오래된 비석이지만 글자가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머릿돌.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해 놓고 있는데 죽은이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탑의 이름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 볼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보물 507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비는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는 선각대사(864~918)를 기리기 위해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세운 것이다. 대사는 통일신라 말의 명승으로 법명은 형미, 속세의 성은 최씨다. 형미는 무위갑사(현재의 무위사)의 주지로 8년간 머물렀고, 어려울 때 왕건을 도와준 바 있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받침돌의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실성 있게 표현되었다. 몸돌에는 선각대사의 행적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겼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인 뛰어난 작품이다. 비의 높이는 2.35 m, 폭은 1.12 m이다. (안내문, 강진 무위사, 2010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무위사,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강진 백련사 사적비(보물 139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남아 있는 사적비(보물 1396호)이다.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높의 447 cm 의 전형적 형태의 비석이다.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받침돌은 고려시대에. 비몸과 머릿돌은 조선후기 숙종 때 만들어진 특이한 내력을 가진 비석이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형태로 입체감있게 조각된 고려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몸돌과 머리돌은 조선후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거북받침돌은 고려중기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었던 원묘국사비를 받치던 것을 다시 사용하였다. 비문의 작성에는 숙종 관리 등을 지낸 지역 유력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의 내용 등이 적혀있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비석 중에는 그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 또한 뛰어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백련사 사적비(보물 1396호). 고려중기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원묘국사비에 사용되었던 거북받침돌 위에 조선후기에 사적비를 세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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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용머리를 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릿돌을 얹은 전형적인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원묘국사비에 사용되었던 것을 조선후기 사적비를 세우면서 재사용하였다. 힘찬 기상과 섬세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고려전기 거북받침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면에서 본 거북받침돌. 등에는 당초문을 조각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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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만든 몸돌과 머릿돌. 당시 지역 유력자들이 참여하여 비문을 짓고 글씨를 적었다. 내용은 백련사를 중건하게 된 경위,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에 관한 내용 등의 적혀 있다. 머릿돌에는 겹처마가 서까래가 새겨져 있는 등 조선후기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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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비몸 옆면에는 초화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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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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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2010년 비각을 세우기 전 모습.

백련사 사적비, 보물 139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백련사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비 등 여러 개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백련사 사적비만 남아 있다. 이 비는 1681년(숙종 7) 5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1631~1690)가 찬하고, 낭성군 이우(1637~1693)가 글씨를 썼으며 동생인 낭원군 이간(1640~1699)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모두 19행으로 이루어졌으며 1행은 45자로 구성되었다. 비의 앞면에는 백련사 중수, 원묘국사 행적, 백련결사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72명의 승려명과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백련사에 원래 원묘국사비가 있었으나 이수(머릿돌)와 비신(비의 몸돌)은 유실되었고 귀부(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전해졌다고 한다. 이후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면서 귀부는 옛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즉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시대의 귀부에 17세기 후반의 이수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 셈이며, 1기의 비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8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보물 1301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부속암자인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 석장비(보물 1301호)이다. 홍제암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선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명대사가 머물다 입적한 유서깊은 곳이다. 사명대사탑은 홍제암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승탑 양식을 계승한 석종양식을 하고 있다.

석장비는 사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홍제암 옆 공간에 여러 승탑, 탑비들과 함께 있다.비석은 광해군 때 세워졌는데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군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은 문장이 빼어나며 사명대사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렸던 것을 수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합천 해인사 홍제암 옆 마당에 세워져 있는 사명대사 석장비.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당나라 전통 비석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4조각으로 깨졌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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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몸. 허균이 비문을 지었는데 문장이 뛰어나며 행적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용과 구름을 입체감있게 조각해 놓은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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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사명대사 석장비와 함께 있는 승탑과 비석들.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 10-20180205사명대사 사리를 모신 승탑은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명대사가 머물다 입적했던 홍제암. 건물은 그가 죽은 후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보물 1301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과 사리를 봉안한 부도이다. 해인사의 부속암자인 홍제암 경내에 있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1608년에 선조의 하사로 창건하여 말년까지 수도하다 입적한 곳이다. 부도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1610년에 만들어졌고, 비석은 1612년에 건립되었다가 1943년에 일본인이 깨트린 것을 1958년에 복원한 것이다. 부도는 고려의 승탑 형식을 계승하여 3단의 연화대좌와 종모양의 탑신, 둔중한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안내문, 합천 해인사, 2017년)

<출처>

  1. 안내문, 합천 해인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