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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정족산 사고(史庫)

정족산사고는 조선후기에 설치된 4곳의 외사고(外史庫)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지 않았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사고본을 인조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관하던 곳이다. 정족산 사고는 실록과 중요한 문서들을 보관하는 장서각과 왕실으로 족보인 선원보를 같이 보관하는 선원보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오대산사고나 전주사고와는 달리 정족산 사고는 창고 건물처럼 지어졌다. 전국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정족산사고 또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큰 전투가 있어 강화유수부에 보관하던 외규장각 도서와 같은 위험에 처할뻔 하기도 했다. 정족산성내에 있는 전등사는 사찰의 기능도 있지만, 오대산 월정사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지키고 관리하던 승병의 역할도 수행했던 사찰이다.

사고(史庫)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과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이나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고려는 개국 직후부터 사관을 두고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고종대인 1227년부터는 개경 이외에 해인사에 한부를 보관하였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개경에 있던 사고(史庫)를 한양으로 옮겨 춘추관(春秋館)으로 개칭하였으며, 충주에서 외사고(外史庫)를 두었다. 세종대에는 전란이나 화재 등에 대비하여 충주 외에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별도의 사고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자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의 4곳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였다. 인조대에는 청나라 위협을 피해 묘향산 사고를 강화 마니산사고로 옮겨다가 이후 정족산성으로 옮겼다. 정족산 사고에 보관하던 문서들은 1908년부터 규장각 관할하에 두어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전주사고에서 보관했던 실록을 비롯한 문서들을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이곳으로 다시 옮겼다. 전국의 사고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그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실록을 보관하던 건물인 장사각(藏史閣). 2층 누각형태를 하고 있는 전주사고나 오대산사고와는 달리 단층 건물로 지어졌다. 앞면 4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창고 형태의 건물이다. 습기 등으로 문서가 훼손되지 않도록 벽면 아래쪽에 환기구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고 출입문. 환기를 위해 헐겁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조 실록(복제본). 정족산사고에는 원본이라고 할 수 임진왜란 당시 피해를 입지 않은 전주사고본 실록과 의궤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 산릉 조성 의궤(명성황후 산릉 조성 의궤), 1895~98년, 정족산사고본

1895년(고종 32) 8월부터 1897년 11월까지 명성황후의 산릉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처음에는 동구릉 숭릉 옆에 ‘숙릉’이라는 능호로 산릉을 조성하다가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1896년 12월 다시 국장이 재개되었다. 1897년 고종이 능호를 ‘홍릉’으로 고치면서 다시 청량리로 산릉을 옮겼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장사각 옆에는 앞면 3칸규모의 작은 건물이 선원보각(璿源寶閣). 이곳에는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를 보관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

OLYMPUS DIGITAL CAMERA사고 옆에 위치한 건물. 사고를 관리하는 관원들과 군사들의 거처하는 곳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족산성을 지키며 사고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던 전등사.

OLYMPUS DIGITAL CAMERA전등사에서 사고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정족산 사고

정족산 사고,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임진왜란(1592)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 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로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 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권 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출처:강화군청>

전주사고(全州史庫), 임진왜란 중 유일하게 화(禍)를 면했던 실록을 보관했던 곳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慶基殿) 동쪽에는 옛 전주사고 실록각(實錄閣)이 복원되어 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문화재로서 가치는 별로 없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인 실록각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2층 누각건물이다. 전주사고를 보지못했을때는 꽤 큰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건물크기가 의외로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2층 누각에 보관하여 습기 등으로 실록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부근에 사고를 두어 철저한 유지.관리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국왕의 통치를 정리한 실록을 편찬하고 이를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설치.운영하였다. 실록은 4부를 발간하여 한양의 춘추관(春秋館) 사과와 충주, 전주, 성주 관아에서 보관하게 하였다.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들은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전화(戰禍)를 면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산중에 사고를 짓고 사찰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들은 강화 정족산 사고에 보관하고 다시 4부를 복사하여 오대산, 태백산, 적장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전주사고는 건물은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의 기능은 없어졌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전할 수 있게 한 의미있는 장소이다.

SANYO DIGITAL CAMERA전주시 풍남동 경기전 동쪽편에 위치한 전주사고 실록각. 임진왜란 이전에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사고 설치되었던 곳이다. 전주사고는 임진왜란 이후 새로 설치한 사고로 실록 등을 옮기 이후 그 기능을 잃었다. 원래 사고가 있었던 터에 최근에 실록각 건물을 복원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실록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환기 등을 고려하여 1층은 사용하지 않고 2층에 실록 등을 보관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에서 사고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실록각이 있는 마당. 경기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태조실록(복제본), 숙종실록(복제본). 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실록 중 전주사고에 보관하던 것만 전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전주사고본을 복사하여 전국 5곳에 설치된 사고에 보관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 전등사 옆 정족산 사고. 전주사고에서 보관 중이던 실록은 인조대에 이곳 정족산사고로  옮겨졌다.

전주사고(全州史庫)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時政)을 기록하였다.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13년(세종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태종의 3조 실록 각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1부씩 분장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춘추관.충주.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孫弘祿),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관,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151호)은 190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출처:문화재청>

평창 오대산 사고(史庫, 사적),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하던 곳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계곡에 위치한 오대산 사고(史庫, 사적)이다. 이곳에 오대산 사고가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6년(선조39)이다. 처음에는 상원사가 선정되었으나 이후 월정사 부근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오대산 사고를 책임지는 관리로 참봉(參奉)을 두었으나 실제로는 월정사 주지가 사고 수호의 책임을 맡고 승병들을 배치하여 사고를 지켰다고 한다. 오대산 사고에는 실록각.선원각.별관 건물과 수호사찰인 영감사(靈鑑寺)가 있었으며, 참봉 2명과 군인60명, 승려 20명이 사고를 관리하고 지켰다. 건물들은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타버렸으며, 1992년에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을 복구하였다. 오대산 사고에는 1606년 태조부터 명종까지 실록을 봉안한 이후 ‘선조실록’을 비롯하여 후대 왕들의 실록들과 중요한 문서 등을 보관하였다. 오대산 사고에는 소장되었던 실록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일본 동경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보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이때 대출되었던 45책만이 화를 면했으며, 일부인 27책은 서울대학교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 역사를 기록한 ‘실록(實錄)’은 조선전기에는 서울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전주.성주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불타 없어져 버렸으며, 1606년(선조39)에 다시 인쇄하여 춘추관.태백산.묘향산.마니산.오대산에 사고를 짓고 다시 보관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손실된 것을 다시 인쇄하여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에 보관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실록은 태백산과 정족산에 있던 것이며, 적상산에 있던 것은 한국전쟁 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던 것은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후기 5대 사고 중 한곳이 오대산사고. 월정사에서 4km정도 떨어진 높은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물.불.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으로 여져졌다. 처음에는 상원사가 선정되었으며, 풍수지리난 지형여건상 이곳이 양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를 수호하는 책임은 월정사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사고사(史庫寺)라 불렸던 영감사에서 그 책임을 맡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앞쪽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을 뒷쪽에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을 두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대산 사고로 들어오는 길. 월정사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고 출입문. 1칸짜리 작은 협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역대왕의 통치를 기록한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다. 문서가 습기 등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바람이 잘 통하는 2층에 보관한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은 앞면 4칸, 2층은 앞면 2칸으로 되어 있다. 환기를 고려하여 판벽으로 사방을 막아두고 있으며,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서를 보관하던 2층 사고 내부.

일제 강점기 도서정리사업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도서정리사업 또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먼저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직전 통감부를 통해 홍문관, 집옥재, 시강원, 북한산 이궁, 강화 정족산 사고 등이 보유하고 있던 도서들을 규장각으로 모았다. 그리고 원래 있었던 규장각 소장 도서들과 함께 ‘제실도서’로 명명하고 면밀한 도서 정리 작업을 실시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에서 이를 강제로 인수하고 태백산 사고, 오대산 사고, 적장산 사고 등의 도서들도 점유하였다. 이로써 서울의 규장각과 지방의 사고, 외규장각 등으로 철저하게 관리되던 조선 전통의 왕실도서 관리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1912년 취조국의 폐지 이후, 일제는 참사관분실 등에서 도서목록작성, 도서카드 작성, 일부 도서 해제 등의 도서정리사업을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식민 정책 수립의 기초 자료를 구축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약 788책이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74책만 남았다. 1932년 당시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으로 27책이 이관되었고 나머지 47책은 동경대에 보관하고 있었다. 2006년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위원회’가 출범하여, 그 해 7월에 나머지 47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기증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종대왕실록과 성종대왕실록. 일제강점기 동경대학으로 반출되었던 것이다. 오대산사고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대출되었던 74책이 남았다. 일제강점기와 2006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반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종대왕실록은 조선 11대왕 중종의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1506년 10월부터 1544년 12월까지 중종 재위 38년 3개월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정식 이름은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이다. 성종대왕실록은 조선 9대왕 성종의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1469년 11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성종 재위 25년2개월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정식 이름은 ‘성종강정대왕실록’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왕과 왕세자의 도장 제작에 관한 의궤(보인소도감의궤), 1876년(고종13), 오대산사고본. 사고에는 실록 외에도 의궤를 비롯한 중요한 문서들이 같이 보관되어 있었다.

1876년(고종13) 11월 4일에 경복궁의 큰 화재로 인해 소실된 왕과 왕세자의 보인(도장)을 새로 만들거나 보수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보인소’는 왕이나 관청의 보인을 제작하는 임시기관이다. 새로 제작된 11종의 보인에 대한 제작 과정, 형태 및 세부 규격, 제작에 필요한 물품과 경비, 기간, 인력 등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사각.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엔 조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건물인 선원보각이 있다. 건물의 규모나 형태난 앞쪽 사각과 비슷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원보각 1층은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원보각 2층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실 족보(선원계보기략), 1883년(고종20). 선원보는 왕실의 족보로 매우 중요시 된 문서이다.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에 따라 1966년 먼저 반환된 도서 163종 852점 중의 하나이다. ‘통감부 채수본’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실 족보 중의 하나로 1679년(숙종5)부터 1932년까지 약 250여 년 동안 114회나 간행되었다. 그 중 이 도서는 1883년(고종20)에 간행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선원보각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오대산 사고.

OLYMPUS DIGITAL CAMERA사고 뒷편에는 이곳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영감사(靈鑑寺)가 자리잡고 있다. 645년 자장(慈藏)이 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사찰로 사고 설치 이후에는 사고사(史庫寺)라 불렀다.

 오대산 사고(史庫), 사적 37호,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이곳은 조선시대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보관하던 사고(史庫)가 있던 자리이다. 오대산 사고는 1606년(선조39)에 이곳이 물.불.바람의 재화(災禍)를 막을 수 있는 길지(吉地)라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역사서를 보관하기 적절한 곳이라 하여 건립되었다.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 등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서 모두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92년에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하여 복원된 것이다. 부근에는 역사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사고사(史庫寺)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초기에 춘추관(春秋館).충주.전주.성주에 1부씩 보관되었으나 임진왜란(1592) 때 전주실록만 내장산으로 옮겨져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버렸다. 1606년(선조39) 3부가 다시 제작되어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 보관되었고, 전주본은 강화 마니산에, 그리고 교정본은 이곳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그후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1624년)으로 인하여 춘추관본.마니산본이 물에 타거나 파손되었으므로, 다시 사부의 실록이 작성되어 강화도 정족산.태백산.무주 적장산.오대산에 1부씩 보관되었다. 오대산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져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거의 불타 버렀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