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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동학삼사(숙모전, 삼은각, 동계사)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 옆에 있는 동학삼사(東鶴三祀)이다. 동학삼사는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지(招魂閣祉)에 세워진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를 말한다. 이곳은 고려가 망한 직후 길재가 고려 태조,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그후 매월당 김시습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을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 또한 신라 박제상의 충절을 기려 고려초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공주 동학삼사 20230727_01<공주 동학삼사>

동학삼사(숙모전.삼은각.동계사)
동학삼사(東鶴三祀)는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지에 세워진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를 말한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이색, 길재, 그리고 조선의 단종과 사육신 등 신라, 고려, 조선 3왕조의 충절 인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특히 숙모전은 신분과 관계없이 국왕, 재상, 관료, 학자, 서민, 노비 등 충절인 351위를 기리면서 왕을 모신 ‘전(殿)이라는 명칭이 갖는 권위가 있으며 유교와 불교가 어울려 제사하는 특별한 전통을 지닌 곳이다.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숙모전은 단종을 모신 사우이다. 동무.서무에는 당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며 절의를 지킨 사육신과 생육신, 육종영(왕실 6인 종친), 그리고 세조가 직접 이름을 내린 280여명을 포함하여 충절인 351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04년 고종이 ‘숙모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공주 동학삼사 20230727_02<숙모전>

공주 동학삼사 20230727_04<동무>

공주 동학삼사 20230727_03<서무>

공주 동학삼사 20230727_05<숙모재>

숙모전(肅募殿)
숙모전은 초혼각이 있던 자리에 조선시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모신 사우이다. 동무.서무에는 당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며 절의를 지킨 사육신과 생육신, 육종영(왕실 6인 종친), 그리고 세조가 직접 이름을 내린 280여명을 포함하여 충절인 351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세조 2년(1456) 김시습이 찾아와 통곡하며 초혼단을 설치하여 사육신의 초혼례를 지냈고, 세조 3년에는 세조가 이곳을 들러 혼령들을 위로하고 유교를 믿는 이나 불교를 믿는 이가 함께 제사하도록 하고 건물을 짓게 하여 초혼각이라 부르게 하였다. 조선후기에 초혼각이 불에 타 없어졌으나, 고종 6년 3칸 건물을 세우고 고종 20년(1883)에 건물을 증축하여 전각의 모습을 갖추었다. 광무 8년(1904)에 고종이 ‘숙모전’이라 사액하여 국가 인정으로 격상되었다.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삼은각은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불렸던 정몽주, 이색, 길재)를 모신 사당이다. 고려가 망한 직후 길재가 고려 태조,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낸곳으로 조선초 정종 때 공주목사가 초혼각을 세우면서 이색의 제사를 지냈으여 이후 길재를 함께 모시면서 삼은각이라 하였다.

공주 동학삼사 20230727_07<삼은각>

삼은각(三隱閣)
삼은각은 고려말의 충신인 삼은(三隱,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모신 곳이다. 조선 태조 3년(1394)에 길재가 승려 운선과 함께 단을 쌓고 고려 태조,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정종 1년(1399) 류방택이 초혼단을 고쳐지어 이색의 제사를 지냈고 정종 2년에 공주목사 이정간이 초혼각을 세웠다. 그 후 류백순이 길재를 추배하여 삼은각이라 이름붙게 되었다. 광해 13년(1621) 류방택을 추배하고, 1924년 이숭인과 나계종을 추배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6인을 제사 지내고 있다.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동계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모신 사당이다. 고려 태조 때 초혼제를 지내고 왕명으로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공주 동학삼사 20230727_08<동계사>

동계사(東雞祀)
동계사는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박제상은 신라 19대 눌지왕 2년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고 일본에서 순절하였다. 고려 태조 19년(936) 류차달이 박제상의 충절을 기려 이곳에 초혼 제사를 시작한 후 왕명으로 동계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1956년에 고쳐 짓고 류차달을 추배하였다.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보물), 퇴계 이황을 모신 사당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에 있는 상덕사 및 삼문(보물)이다. 상덕사(尙德祠)는 퇴계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 지어졌다. 퇴계를 모신 서원은 원래 안동 월곡면에 있던 호계서원이었으나, 지역 사람들의 요청으로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새로이 건립하게 되었다. 호계서원에서는 유성룡과 김성일을 같이 위패를 모셨는데 당시 지역민들 사이에 유성룡과 김성일의 사에 위상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가 같이 빠지면서 제자로서는 조목만 남게 되었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보물) 02-20221029<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보물)>

상덕사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에 제사 준비 공간인 퇴간을 두고 있다.  상덕사 경내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고 담장너머로만 그 모습을 살짝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보물) 01-20221029<안동 도산서원 상덕사(보물)> 

SANYO DIGITAL CAMERA<퇴간>

상덕사
<사당 내부>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보물) 04-20221029<상덕사 마당과 삼문>

상덕사 삼문은 사당을 세울때 같이 지어졌다. 경사진 언덕에 있어 앞면 기둥은 다른 기둥보다 높게 했다. 원래 흙담장이 있었는데, 1970년대 수리하는 과정에서 돌담장으로 바뀌었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보물) 03-20221029<상덕사 삼문>

도산서원<도산서원 공간배치>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보물
상덕사(尙德祠)는 퇴계와 제자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삼문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덕사는 1574년에 지었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게 맞배지붕으로 짓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을 얹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받드는데 3일전부터 준비하여 당일 오전 11시에 지낸다. 사당에는 퇴계의 제자인 조목이 종향되어 있다. 삼문은 상덕사와 같은 때에 지어졌다. 가운데 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쓰지 않고,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온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2. 도산서원 홈페이지, 202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연천 숭의전(사적), 고려 왕조의 종묘 역할을 하는 곳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에 있는 숭의전(崇義殿, 사적)이다. 고려 태조를 비롯한 4왕과 16 공신들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고려왕조의 종묘(宗廟) 역할을 하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고려 왕조 종묘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 왕조 종묘를 세웠다. 이후 고려왕조 대한 예우와 민심을 고려하여 태조 왕건을의 원찰이었던 이곳에 태조 왕건을 모시는 사당(廟殿)을 세웠다. 이후 정종 때(1399년) 고려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 충렬왕, 공민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문종 때(1452년) 건물을 고쳐지으면서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와 고려 공신 16명을 함께 모시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왕씨 후손으로 하여금 전각의 수호와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복구하였다.

연천 숭의전 (사적) 10-20220726<연천 숭의전(사적)>

숭의전이 있는 이곳은 태조 왕건이 기도를 올리던 앙암사(仰庵寺)가 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고려 왕조 종묘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면서 전조에 대한 예우를 한다는 명분과 개경에서 고려왕조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숭의전 주변은 임진강변 단애절벽(斷崖絶壁)이 있는 명승지로, 수목이 울창한 곳이다. 숭의전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늑하고 풍치좋은 곳에 강변 언덕 위에 자리잡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헐고, 그자리에 새 종묘를 짓도록 하다
고려 왕조의 종묘(宗廟)를 헐어버리고 그 땅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3일 신유 3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의정부에서 왕씨의 후사가 봉사하는 조건을 의논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봉사(奉祀)하는 조건을 의논하기를,
“1. 건국 초기에 왕씨(王氏)를 마전(麻田)의 앙암사(仰庵寺)에서 제사지냈는데, 사우(祠宇)가 좁고 누추하여, 신묘(神廟)에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기사년312) 에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고쳐 건축하도록 하였으나, 지금까지 성취되지 못하여 빗물이 새어 무너졌으니, 선대(先代)를 존숭(尊崇)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기지(基地)를 살펴 정하고 묘사(廟祠)를 고쳐 세우게 하소서.  — < 중략 > —-

하니, 그대로 따라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법을 제정하게 하였다.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3월 18일 신해 2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SANYO DIGITAL CAMERA<연천 당포성에서 보이는 숭의전 주변 임진강>

SANYO DIGITAL CAMERA<숭의전 입구 홍살문>

연천 숭의전 (사적) 03-20220726<숭의전 들어가는 길>

 왜 연천의 마전에 숭의전을 세웠을까?
연산군의 폭정에 조강에 몸을 던진 당대의 뛰어난 시인 정희량이 마전의 한 객관에 머물며 남긴 시를 보면 당시까지만 하여도 마전은 매웅 궁벽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임을 알 수 있다. 왜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임진강변의 외딴 시골마을에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을 세웠을까? 이는 마전의 앙암사가 고려 태조 왕건이 자주 들러 기도를 드리던 기도처(원찰)이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개경에서 철원 궁성으로 가는 길은 180리로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마전에 이르면 날이 저물어 하루를 쉬어가야 했다. 임진강변의 잠두봉 중턱에 자리잡은 앙암사는 개경에서 딱 90리 지경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한적하여 기도처로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조 왕건은 하루를 쉬어가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종묘를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마천군의 앙암사에 두게 함으로써 전조를 예우한다는 명분과 개경 밖으로 전조의 흔적을 지워 유폐시킴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예방하는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숭의전은 임진강변 절벽에 세워져 있어 경치가 좋다. 앞쪽에는 조선 문종 때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를 볼 수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02-20220726<연천 숭의전>

연천 숭의전 (사적) 23-20220726<숭의전 앞 느티나무와 임진강>

고려 왕실을 지키는 나무(느티나무)
이 느티나무(550년)는 조선 문종 2년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으로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들이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숭의전은 고려의 왕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종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일반적인 문중 사당과는 격을 달리하지만, 실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건물은 고려 태조를 비롯한 4왕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과 공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 위패를 임시로 모실 수 있는 이안청(移安廳),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앙암재와 전사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의전에 비해서 공신들을 모신 배신청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이는 공신들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도 크게 번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천 숭의전 (사적) 01-20220726<연천 숭의전>

연천 숭의전 (사적) 05-20220726<숭의전 삼문>

숭의전 정전은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규모이다. 서원에 모셔신 인물들의 사당과 비슷한 규모로 멸망한 왕조의 비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22-20220726<숭의전 정전>

연천 숭의전 (사적) 15-20220726<정전 툇간>

조선초 태조 때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와 동상과 함께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세종 때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고려 왕조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안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는 4왕의 위패만 모셔져 있다. 31대 공민왕의 위패는 서울 종묘에 별도로 모시고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14-20220726<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신 곳>

SANYO DIGITAL CAMERA<문이 열린 모습, 위패와 영정사진이 내부에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12-20220726<8대 현종의 위패를 모신 곳>

연천 숭의전 (사적) 13-20220726<11대 문종, 24대 원종의 위패를 모신 곳>

숭의전 연혁
역성혁명를 통해 왕조를 찬탈하였지만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이 개국하자 후대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대사헌 민개의 주청으로 개경 내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의 왕족들은 개경에서 쫒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 두번째 항목에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며 공양왕의 아우 왕우와 두 아들 조와 관에게 경기도의 마전을 주고 귀의군에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개경에서 고려태조의 위패와 동상을 마전으로 옮긴 후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함으로써 고려조 8대왕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중시했던 태조 이성계가 죽자 전조에 대한 신하들의 예우는 점전 더 소흘해져 갔다. 심지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에는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안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고 봄, 가을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52년 문종 대에 이르러 허물어가는 사당을 고쳐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함께 사당 내에 배향하도록 하니 비로서 역대시조제의 하나인 숭의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정전 옆에 있는 이안청(移安廳)은 정전 건물을 수리할 때 위패를 임시로 모시는 공간이다.

연천 숭의전 (사적) 18-20220726<위패를 임시로 모시는 공간인 이안청>

배신청(陪臣廳)은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공신 중에는 고려 종묘에 개별 국왕의 배향공신으로 모셔졌던 인물도 있지만 일부는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국난극복에 큰 역할을 했던 점을 인정받아 배신청에 모셔진 인물도 있다.  후손들은 조선시대에도 대부분 크게 번창하여, 종묘 공신당과 마찬가지로 배신청의 존재가 후손들에게 크게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천 숭의전 (사적) 17-20220726<배신청>

배신청에 모셔진 인물 중 복지겸, 홍유,신숭겸, 배현경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개국공신이다. 서희/강감찬/윤관/김취려/조충은 거란을 비롯한 북방민족의 침입을 물리친 인물이며   안우, 이방실,김득배는 공민왕 때 홍건적과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그리고 김부식/김방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21-20220726<복지겸, 홍유신, 신숭겸, 유금필>

연천 숭의전 (사적) 20-20220726<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연천 숭의전 (사적) 19-20220726<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SANYO DIGITAL CAMERA<위패>

숭의전 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과 앙암재(仰巖齋)가 있다. 앙암재는 재실 건물로 향, 축문, 폐백, 제복 등을 보관하고 제례 전반에 대한 준비를 하는 곳이다.

연천 숭의전 (사적) 06-20220726<앙암재>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보통 양반 집안의 재실에 비해서도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연천 숭의전 (사적) 07-20220726<앙암재>

고려 종묘의 제사를 숭의전으로 옮겨오면서 종묘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세종 때 동상과 진영(초상화)를 위패로 대신하게 되면서 동상은 개경의 현능 옆에 매장되었다. 최근 북한에서는 현틍 정비공사 과정에 태조 왕건 동상이 발견되었다.

연천 숭의전 (사적) 08-20220726<앙암재에서 볼 수 있는 태조 왕건 동상과 현릉 사진>

숭의전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
왕건의 동상은 본래 고려의 도읍인 개경에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개경의 고려 종묘를 헐고 연천의 마전 앙암사에서 전조의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대에 이르러 주자가례에 입각한 제례법의 개혁으로 동상과 진영(초상화)를 목주(위패)로 대신하게 되자 잠시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세종 11년 현능 곁에 매장하였다. 최근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능 정비 공사때 발견되었으나 처음에는 북한 학자들이 금동불상으로 잘못 판단하여 개성박물관에 보관해 오다 1997년 개성박물관을 방문한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왕건의 동상임을 알아내어 현재는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아내문, 연천군청, 2022년)

 

전사청은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숭의전은 종묘와 마찬가지로 생식제례를 올리기때문에 전사청에는 굴뚝이 없다.

연천 숭의전 (사적) 09-20220726<전사청>

연천 숭의전, 사적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나라를 부흥시킨 4명의 왕들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조선 초기 처음 사당이 건립되어, 1451년(문종1)에 숭의전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후로 숭의전의 관리와 절례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겨졌다. 숭의전의 설치 배경에는 조선이 유교국가로서 역대 시제의 의례체계를 정비한 과정과 더불어 고려 왕족 및 고려 유민 등에 대한 회유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숭의전 건립 이래 수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가 이우어져 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숭의전의 복원은 1972년부터 1986년 까지 수번에 걸쳐 이루어져 오늘에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숭의전 대제가 이어지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시대 옛 왕조의 영광과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재청,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통영 충렬사(사적), 충무공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

경남 통영시 여황로에 있는 통영 충렬사(사적)이다.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선조 때(1606년) 왕명에 의해 7대 통제사 이운용이 창건했으며 현종 때(1663년)에 남해 충렬사와 함께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직접 운영했던 곳으로 교육중심의 서원과는 달리 제사를 올리는 제향 중심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산 현충사,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무공을 모시는 대표적인 사당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폐지되지 않았던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명조팔사품’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내리면서 직접 지어내린 제문 등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당이다.

통영 충렬사 (사적) 18-20220221<통영 충렬사>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사적
통영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 39년(1606)왕의 명령에 따라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세웠다. 현종 4년(1663)에 임금으로부터 ‘충렬사’ 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사당이 된 이래로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렬사는 정당, 내삼문, 동재, 서재, 중문, 숭무당, 경충재, 외삼문, 강한루, 유물전시관, 정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 졌다. 경내에는 숙종 7년(1681)에 세워진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와 충무공 후손 통제사 비각이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에는 정조의 명에 의해 발간한 <충무공전서>와 정조가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 8년 (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오고 있는 이충무공 사당으로는 통영충렬사가 유일하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으로 제사를 모시는 제향 중심의 공간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누각인 강한루, 외삼문, 제사를 준비하는 강당 성격의 숭무당과 경충재가 공간, 중문과 동,서재가 있는 공간, 내삼과 위패를 모신 정당이 있는 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과는 달리 동,서재와 강당 건물의 규모가 크지 않아 교육기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1-20220221<강한루와 충렬사 들어가는 길>

통영 충렬사 (사적) 02-20220221<강한루에어 내려다 보이는 모습>

외삼문 양쪽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항복이 비문을 지은 충렬공비이며 충무공 후손으로 통제사를 지낸 인물들을 기리는 비석 등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3-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05-20220221<오른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04-20220221<왼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19-20220221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은 광해군 6년(1614)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고, 비석의 위쪽에 ‘통제사 충무이공 충렬묘비명(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이라고 되어 있는 전서체의 글씨는 김수향이 썼다. 비문의 끝부분에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송시열이 기록한 것이다. 이후 숙종 7년(1581)에 제60대 통제사 민섬이 머릿돌과 거북받침대를 갖추어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공훈에 대한 칭송과 그에 대한 존경과 사몽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5-20220221<외삼문과 비각들>

외삼문을 들어서면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 있는 일반적인 서원이나 사당과는 달리 양쪽에 강당 성격 건물인 숭무당과 경충재가 자리잡고 있다. 통영 앞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경관을 고려한 공간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7-20220221<경충재>

통영 충렬사 (사적) 08-20220221<숭무당>

강당 건물들이 있는 공간을 지나면 안쪽에 일반적인 서원과 마찬가지로 양쪽에 기숙사 건물이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6-20220221<중문>

통영 충렬사 (사적) 10-20220221<동재>

통영 충렬사 (사적) 11-20220221<서재>

위패를 모신 정당은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같이 모신 인물은 없다. 국가 주도로 세워진 충렬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당 내부에는 충무공 영정과 팔사품을 그린 병풍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9-20220221<내삼문>

내삼문(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 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神門)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향이 시작되기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 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唱:제 향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2-20220221<위패를 모신 정당>

통영 충렬사 (사적) 13-20220221<정당 내부>

정당(正當)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 (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단법인 통영충렬 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 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 여운형 · 신익희 등 많은 광복 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驚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 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麟:천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 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 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4-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16-20220221<충렬사 동백나무>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동백나무는 열대 및 아열대에서 자라는 차나뭇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일본, 중국, 한국 등지에서도 따뜻한 지역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꽃은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매우 아름답다. 대게 이른 봄에 피지만 가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개화시기에 따라 동백꽃을 춘백, 추백, 동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열매는 늦가을에 붉게 익는다. 열매의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머리에 바르거나 등잔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약으로도 쓰였다. 이 동백나무들은 충렬사 입구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본래 네 그루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나무들은 키와 둘레가 각각 6.3 m, 1m 이다. 또 사방으로 넓게 퍼진 가지는 지름이 7 m나 될 만큼 큰 나무이다. 나이는 4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곳 통영에서는 음력 3월이면 거세 바닷바람을 달래기 위해 풍신제인 ‘할만네’를 지냈다. 그때 동네 아낙들이 정한수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우는 풍습이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숭덕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 제사를 모시는 재실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숭덕전(崇德殿)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곳으로 오릉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초 세종 떄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떄(1600년) 중건하였으며 숙종 때(1694) 다시 수리하였다. 경종 때(1723년)에 숭덕전이라 불렀으며 제사를 모시는 참봉을 두게 되었다. 경주에는 신라 왕위에 오른 김씨, 박씨, 석씨의 시조로 오릉 숭덕전, 미추왕릉 앞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 앞에 숭신전이 있다. 조선시대 각 문중에서 세웠던 많은 사당이나 재실 중에 하나이지만 신라시조를 모시는데 그 의의가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오릉(사적)>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 상현재와 동재가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건물이 여러 동 있다.  숭덕전 뒷편으로는 연못이 있고, 그 뒤편에 박혁거세왕의 비가 태어났다는 우물인 알영정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덕전 외삼문>

OLYMPUS DIGITAL CAMERA<내삼문과 사당>

OLYMPUS DIGITAL CAMERA<신도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

OLYMPUS DIGITAL CAMERA<재실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예빈관>

재실 뒷편으로는 박혁거세 알영왕비 탄생지인 알영정과 작은 연못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알영정>

OLYMPUS DIGITAL CAMERA<알영정 연못>

재신(宰臣)을 파견하여 신라 시조(新羅始祖)의 숭덕전(崇德殿)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숭덕전은 경주(慶州)에 있는데,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치제하도록 주청하고, 또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바야흐로 명을 받들고 도내(道內)에 있으니, 재신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한다면 더욱 성덕(聖德)이 빛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인해서 치제한 뒤에 그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 1월 11일 기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숭덕전(崇德殿), 경북 경주시 탑동 77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조선 세종(世宗) 11년(1429)에 지었으나 선조 (宣祖) 25년(1592)에 불탔다. 동왕(同王) 34년(1601)과 광해군 10년(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肅宗) 30년(1704)에 고쳤다. 경종(景宗) 3년(1723) 숭덕전이라 편액을 걸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영조(英祖) 11년(1735)에 고친 것이다. 홍살문(紅箭門) 안쪽으로 영숭문(永門)과 숙경문(肅敬門)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인 맞배집이다. 왼쪽에 상현재(象賢齋), 오른쪽에 동재 (東齋)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숭덕전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 (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뒤에는 알영정(關英井)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 1월 11일 기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