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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충렬사(사적), 충무공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

경남 통영시 여황로에 있는 통영 충렬사(사적)이다.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선조 때(1606년) 왕명에 의해 7대 통제사 이운용이 창건했으며 현종 때(1663년)에 남해 충렬사와 함께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직접 운영했던 곳으로 교육중심의 서원과는 달리 제사를 올리는 제향 중심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산 현충사,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무공을 모시는 대표적인 사당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폐지되지 않았던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명조팔사품’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내리면서 직접 지어내린 제문 등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당이다.

통영 충렬사 (사적) 18-20220221<통영 충렬사>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사적
통영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 39년(1606)왕의 명령에 따라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세웠다. 현종 4년(1663)에 임금으로부터 ‘충렬사’ 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사당이 된 이래로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렬사는 정당, 내삼문, 동재, 서재, 중문, 숭무당, 경충재, 외삼문, 강한루, 유물전시관, 정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 졌다. 경내에는 숙종 7년(1681)에 세워진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와 충무공 후손 통제사 비각이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에는 정조의 명에 의해 발간한 <충무공전서>와 정조가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 8년 (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오고 있는 이충무공 사당으로는 통영충렬사가 유일하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으로 제사를 모시는 제향 중심의 공간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누각인 강한루, 외삼문, 제사를 준비하는 강당 성격의 숭무당과 경충재가 공간, 중문과 동,서재가 있는 공간, 내삼과 위패를 모신 정당이 있는 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과는 달리 동,서재와 강당 건물의 규모가 크지 않아 교육기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1-20220221<강한루와 충렬사 들어가는 길>

통영 충렬사 (사적) 02-20220221<강한루에어 내려다 보이는 모습>

외삼문 양쪽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항복이 비문을 지은 충렬공비이며 충무공 후손으로 통제사를 지낸 인물들을 기리는 비석 등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3-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05-20220221<오른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04-20220221<왼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19-20220221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은 광해군 6년(1614)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고, 비석의 위쪽에 ‘통제사 충무이공 충렬묘비명(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이라고 되어 있는 전서체의 글씨는 김수향이 썼다. 비문의 끝부분에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송시열이 기록한 것이다. 이후 숙종 7년(1581)에 제60대 통제사 민섬이 머릿돌과 거북받침대를 갖추어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공훈에 대한 칭송과 그에 대한 존경과 사몽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5-20220221<외삼문과 비각들>

외삼문을 들어서면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 있는 일반적인 서원이나 사당과는 달리 양쪽에 강당 성격 건물인 숭무당과 경충재가 자리잡고 있다. 통영 앞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경관을 고려한 공간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7-20220221<경충재>

통영 충렬사 (사적) 08-20220221<숭무당>

강당 건물들이 있는 공간을 지나면 안쪽에 일반적인 서원과 마찬가지로 양쪽에 기숙사 건물이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6-20220221<중문>

통영 충렬사 (사적) 10-20220221<동재>

통영 충렬사 (사적) 11-20220221<서재>

위패를 모신 정당은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같이 모신 인물은 없다. 국가 주도로 세워진 충렬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당 내부에는 충무공 영정과 팔사품을 그린 병풍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9-20220221<내삼문>

내삼문(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 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神門)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향이 시작되기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 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唱:제 향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2-20220221<위패를 모신 정당>

통영 충렬사 (사적) 13-20220221<정당 내부>

정당(正當)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 (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단법인 통영충렬 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 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 여운형 · 신익희 등 많은 광복 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驚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 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麟:천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 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 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4-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16-20220221<충렬사 동백나무>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동백나무는 열대 및 아열대에서 자라는 차나뭇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일본, 중국, 한국 등지에서도 따뜻한 지역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꽃은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매우 아름답다. 대게 이른 봄에 피지만 가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개화시기에 따라 동백꽃을 춘백, 추백, 동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열매는 늦가을에 붉게 익는다. 열매의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머리에 바르거나 등잔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약으로도 쓰였다. 이 동백나무들은 충렬사 입구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본래 네 그루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나무들은 키와 둘레가 각각 6.3 m, 1m 이다. 또 사방으로 넓게 퍼진 가지는 지름이 7 m나 될 만큼 큰 나무이다. 나이는 4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곳 통영에서는 음력 3월이면 거세 바닷바람을 달래기 위해 풍신제인 ‘할만네’를 지냈다. 그때 동네 아낙들이 정한수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우는 풍습이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숭덕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 제사를 모시는 재실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숭덕전(崇德殿)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곳으로 오릉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초 세종 떄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떄(1600년) 중건하였으며 숙종 때(1694) 다시 수리하였다. 경종 때(1723년)에 숭덕전이라 불렀으며 제사를 모시는 참봉을 두게 되었다. 경주에는 신라 왕위에 오른 김씨, 박씨, 석씨의 시조로 오릉 숭덕전, 미추왕릉 앞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 앞에 숭신전이 있다. 조선시대 각 문중에서 세웠던 많은 사당이나 재실 중에 하나이지만 신라시조를 모시는데 그 의의가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오릉(사적)>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 상현재와 동재가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건물이 여러 동 있다.  숭덕전 뒷편으로는 연못이 있고, 그 뒤편에 박혁거세왕의 비가 태어났다는 우물인 알영정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덕전 외삼문>

OLYMPUS DIGITAL CAMERA<내삼문과 사당>

OLYMPUS DIGITAL CAMERA<신도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

OLYMPUS DIGITAL CAMERA<재실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예빈관>

재실 뒷편으로는 박혁거세 알영왕비 탄생지인 알영정과 작은 연못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알영정>

OLYMPUS DIGITAL CAMERA<알영정 연못>

재신(宰臣)을 파견하여 신라 시조(新羅始祖)의 숭덕전(崇德殿)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숭덕전은 경주(慶州)에 있는데,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치제하도록 주청하고, 또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바야흐로 명을 받들고 도내(道內)에 있으니, 재신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한다면 더욱 성덕(聖德)이 빛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인해서 치제한 뒤에 그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 1월 11일 기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숭덕전(崇德殿), 경북 경주시 탑동 77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조선 세종(世宗) 11년(1429)에 지었으나 선조 (宣祖) 25년(1592)에 불탔다. 동왕(同王) 34년(1601)과 광해군 10년(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肅宗) 30년(1704)에 고쳤다. 경종(景宗) 3년(1723) 숭덕전이라 편액을 걸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영조(英祖) 11년(1735)에 고친 것이다. 홍살문(紅箭門) 안쪽으로 영숭문(永門)과 숙경문(肅敬門)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인 맞배집이다. 왼쪽에 상현재(象賢齋), 오른쪽에 동재 (東齋)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숭덕전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 (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뒤에는 알영정(關英井)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 1월 11일 기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양산재, 경주 6부 촌장을 모신 사당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양산재(楊山齋)이다. 신라를 건국한 경주 5부촌장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경주 6촌은 북천 북쪽 알천양산촌(경주 이씨), 남천 북쪽 돌산고허촌(경주 최씨), 월성 동쪽 취산진지촌(경주 정씨), 모량천 유역 무산대수촌(경주 손씨), 북천 북쪽 백률사 부근 금산가리촌(경주 배씨), 보문사 부근 명활산고야촌(경주 설씨)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주요 성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촌은 유리왕9년(32)에 6부로 개편되면서 이들 6촌에 성씨를 내렸다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사용한 시기는 그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OLYMPUS DIGITAL CAMERA<6부 촌장을 모신 양산재 사당>

6부의 이름을 바꾸고 성씨를 내리다 ( 32년 (음) )
9년(32) 봄에 6부(六部)의 이름을 바꾸고, 성씨(姓氏)를 사여하였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라고 하고 성(姓)은 이(李)로 하였으며,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라고 하고 성은 최(崔)로하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라고 하고 성은 손(孫)으로 하였으며,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라고 하고 성은 정(鄭)으로 하였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라고 하고 성은 배(裵)로 하였으며,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라고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1 유리 이사금,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蘿井, 사적)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70년대에 건립된 곳으로 유적지라기 보다는 신라의 건국을 설명해 주는 장소이자 여섯 성씨의 조상을 함께 모신 공간이다. 양산재는 6부촌장을 모신 사당과 앞쪽에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건물, 양산재를 관리하는 살림집으로 구성되어 있데 서원의 공간배치와 비슷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양산재>

OLYMPUS DIGITAL CAMERA<외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재사를 준비하는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관리인 거처로 보이는 한옥>

OLYMPUS DIGITAL CAMERA<양산재에서 보이는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사적)>

양산재(楊山齋), 경북 경주시 탑동
양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이 재각건물(齋閣建物)은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6부촌장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特山珍支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 (明活山高耶村)의 여섯 촌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기전 57년에 알천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여섯 촌장이 추대하여 신라의 첫 임금이 되게 하니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建國年)이 되었다. 그후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촌장들의 신라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을 내리게 되니 바로 양산촌은 이씨(李氏), 고허촌은 최씨(崔氏), 대수촌은 손씨(孫氏), 진지촌은 정씨(鄭氏), 가리촌은 배씨(裵氏), 고야 촌은 설씨(薛氏)이다. 이로써 신라에 여섯 성씨(姓氏)가 탄생되었고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 사당은 1970년 이들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숭혜전과 계림세묘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입구에 있는 숭혜전이다. 경주 김씨 중 처음으로 왕이된 13대 미추왕과 삼국통일을 이룬 30대 문무무왕과 마지막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으나 구한말 고종 때 사당을 크게 짓고 미추왕과 문무왕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 맞은편에는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를 모시는 사당인 계림세묘(桂林世廟)가 있다. 이곳은 경주김씨를 비롯하여 김알지의 후손이라 일컫는 많은 성씨들이 함께 조상을 모시는 공간이다. 조선후기에 시조를 모시는 공간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경주오릉 숭덕전과 수로왕릉의 예를 따라 구한말에 기능을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탈해왕을 모신 숭신전도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숭혜전>

OLYMPUS DIGITAL CAMERA<숭혜전 신문>

OLYMPUS DIGITAL CAMERA<위패를 모신 숭혜전>

OLYMPUS DIGITAL CAMERA<제기고>

숭혜전 신문 앞 마당에는 서원 동.서재와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로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육재>

OLYMPUS DIGITAL CAMERA<경모재>

OLYMPUS DIGITAL CAMERA<영육재 뒷편 부속건물>

미추왕은 김알지의 6대손으로 조문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에 백제와의 약간의 충돌은 있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던 시기이다. 미추왕의 뒤를 이어 석씨인 유례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이런 형태의 왕위계승은 내물왕대까지 이어졌다. 내물왕 이후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대부분 기간 왕위를 계승했다. 경순왕의 후손인 경주 김씨를 비롯하여, 안동김씨, 광산김씨 등 600여개의 성씨가 후손들이다. 숭혜전 뒷편 대릉원에 미추왕릉이 있는데 다른 고분과는 달리 삼문과 담장을 두고 이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미추왕릉>

숭혜전 앞 마당에는 경순왕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남쪽에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를 모시는 계림세묘(桂林世廟)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혜전 앞 광장>

OLYMPUS DIGITAL CAMERA<경순왕 신도비>

OLYMPUS DIGITAL CAMERA<계림세묘로 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계림세묘 삼문>

OLYMPUS DIGITAL CAMERA<계림세묘>

SANYO DIGITAL CAMERA<경주 계림(사적)>

숭혜전(崇惠殿), 경북 경주시 황남동 216
숭혜전 건물내에는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인 13대 미추왕(味鄒王)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30대 문무대왕, 그리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위패를 모셨다. 원래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처음 월성(月城)에 사당을 지어 영정(影)을 모시고 제향했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인조 5년(1627) 동천동에 새로 사당을 지어 동천묘(東界)라 하고 경순왕의 위패를 모셨다. 경종 3년(1723) 경순왕전으로 고치고 정조 18년(1794)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황남전(皇南殿)이라 고쳤다. 그 후 고종 24년(1887)에 미추왕의 위패를 모시고, 이듬해 문무대왕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 이때 고종황제가 사당을 크게 짓게 하고 숭혜전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앞면 5칸, 옆면 3칸인 맞배집으로 왼쪽에 영육재(永育齋), 오른쪽에 경모재(景慕齋)가 있다. 앞에는 경순왕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길 건너에 계림세묘(桂林世廟)가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두산백과, 2021년

경주 양동마을 영당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는 사당인 영당(影堂)이다. 수졸당 이의잠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636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3칸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앞쪽에는 제사를 위한 공간인 퇴간을 두고 있다. 전형적인 사당건물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영당 앞에는 재실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있으며 뒷편에는 이의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자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양동마을 영당>

OLYMPUS DIGITAL CAMERA<영당 담장과 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영당 앞 재실로 보이는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재실 앞 살림집>

OLYMPUS DIGITAL CAMERA<동호정에서 보이는 영당>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