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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보원사지(사적), 통일신라 화엄십찰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지(사적) 절터이다. 보원사(普願寺)는 삼국시대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멀지 않은 곳에 마애여래삼존상(국보)이 있다.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에 따르면 부석사 등과 함께 통일신라 화엄종을 대표하는 10대 사찰인 화엄십찰 중 한곳이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 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7<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사적), 2009년>

가람배치는 석교를 지나 중문, 석등,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과 강당 좌우로 회랑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례 화엄사나 영주 부석사처럼  가람배치가 해가 따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금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여래좌상도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 형태도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것으로 볼 때 동시대 화엄종 사찰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서산 보원사지(사적)>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5<동쪽을 향하고 있는 보원사 가람배치>

절터에서는 대형 철조불상 2구가 출토되었으며 삼국시대 백제 시기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오층석탑(보물), 통돌을 파서 만는 석조(보물), 975년 이곳에서 입적한 법인국사의 승탑(보물), 탑비(보물), 사찰 입구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보물) 둥이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1<멀리서 보이는 보원사지 절터>

절터 앞으로는 가야협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이 불전이 있는 신성한 영역과 바깥 세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해 준다. 개울 동쪽으로는 사찰입구입을 알리는 당간지주과 신도들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마련된 석조(보물)이 배치되어 있다. 서산과 홍성, 예산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사찰 바깥에는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고려시대 원(院)과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3<당간지주가 있는 입구에서 보이는 모습>

당간지주(보물)는 절터 동쪽 개울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2개의 기둥이 70cm 정도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다. 기둥 안쪽에는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 넓은 띠를 새겼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지만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웅장한 멋을 지니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5<당간지주(보물)>

당간지주 오른편으로 석조가 있고, 그 사이에 넓은 공터가 있다. 아마도 이곳에 여행객을 위한 시설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8<당간 지주 오른 쪽으로 보이는 석조(보물)>

석조(보물)는 물을 담는 그릇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 사원, 사찰 입구에 놓여 있다. 석조에 담긴 물로 손을 씻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석조는 화강석 내부를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 석조 양식을 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23<보원사지 석조(보물)>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고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다. 원래 돌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 사찰 경내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6<당간지주에서 보이는 보원사지 절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0<사찰 앞을 흐르는 개천과 가야협 계곡>

개울을 건너면 주불전이 있는 중심영역을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중심영역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경주 불국사와 비슷한 공간배치이다.  약 1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조성하였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2<보원사 중문을 오르는 계단>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3<남쪽편 석축>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4<북쪽편 석축>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9<주불전이 있는 공간>

오층석탑(보물)은  고려초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9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석탑이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사자상을, 윗층 기단에는 팔부중상을 새겨놓고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게 만들었다.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백제 석탑의 특징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8<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1<뒷편에서 본 모습>

오층석탑 뒷편으로 철조불상을 모셨던 금당터가 있다. 금당터에는 불상이 모셔졌던 자리와 건물 기둥이 놓였던 주춧돌, 기단석 등이 남아 있다. 금당 좌우에는 회랑으로 연결된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 뒷편에는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54<보원사지 금당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3<기단을 쌓았던 석재>

금당지
오층석탑에서 서쪽으로 9.2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2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루어졌고 근래까지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금당의 규모는 남북 18.0m, 동서 16.0m의 장방형으로 확인되었다. 기단 구조는 할석을 각 기단의 바깥면에 맞추고 4~5단으로 축조하였다. 내부에는 불상대좌의 보호각인 닷집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초석 4기가 확인되며, 금당지 하부에는 남북 18.0m, 동서 2.1m만 남아 있는 기단이 확인된다. 기단에서 서쪽으로 90cm 내에는 할석을 2~3줄로 정연하게 만든 뒷채움시설이 확인되고, 연화문수막새, 당초문암막새, 무문전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년)

금당터 가운데에는 불상이 모셔졌던 닫집을 받치는  건물초석을 볼 수 있다. 절터에서는 2구이 철조불상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통일신라 때, 다른 하나는 고려초에 조성된 불상이다. 어떤 불상이 이곳에서 모셔졌는지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때 조성된 불상이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52<불상이 모셔졌던 닫집을 받치는 초석>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2<뒤에서 본 모습>

금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된 철조여래좌상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형태나 양식적으로 거의 유사한 불상이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상으로 현재 출토된 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부처. 철조불좌상, 통일신라 8세기,서산 운산면)>

두 손은 없어졌지만 손목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보인다. 몸에 비해 큰 머리, 부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투박하면서, 호족세력의 힘을 과시하는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철불 20220803_01<서산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 고려 11세기, 2022년>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0<금당터 뒷편 강당과 회랑이 있던 자리>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6<앞쪽 회랑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4<보원사지 절터>

강당 뒷편에는 축대로 약간 높게 공간을 조성되어 있다. 고려초 국사와 왕사를 지냈으며 이곳에서 입적했던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신 승탑과 탑비가 모셔져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북한산 장의사에서 불경 등을 배웠으며, 고려 광종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 때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광종은 ‘법인(法印)’이라 시호와, ‘보승(寶乘)’이라는 탑이름을 내렸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2<법인국사탑과 탑비>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6<보원사지 법인국사탑(보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8<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보물)>

보원사지 절터는 2006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절터에서는 발굴,조사결과 출토된 건물 주춧돌 등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5<절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20<주춧돌과 기단 석재>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8<주춧돌>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6<건물 기단 석재 등>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9<기와 조각>

SANYO DIGITAL CAMERA<발굴당시 모습(당간지주 부근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중문 주변>

SANYO DIGITAL CAMERA<중문 안 회랑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북쪽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남쪽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남쪽 건물터>

서산 보원사지, 사적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조,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백제 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의 철조여래좌상도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안내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5. 위키백과, 2023년

 

서산 해미읍성(사적), 충청병영이 있었던 읍성

충남 서신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해안지역을 침입하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 중 하나이다. 조선 태종 때(1471년)에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옮기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종 때 (1421년)에 완공하였다. 조선후기 효종 때(1652년)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지역 군사 거점이었다. 이후에도 무관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인근지역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70년대 이후 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등 유적지를 재정비하여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과 성문 등 주요 시설들이 잘 남아 있어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읍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1<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해미읍성(사적), 2009년>

해미읍성은 북동쪽의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넓은 평지에 성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1,5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다. 읍성은 서산 천수만 바다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있다. 남쪽으로 해미천, 동쪽으로는 황락천, 서쪽으로는 반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북쪽을 통해 가야산(해발 678m) 주변 산맥과 연결된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 주변 위성사진, 2023년>

 성벽의 높이는 4.9m이며 상부의 폭은 약 2.1m정도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큰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위쪽는 작은 돌을 사용했으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팠으며 주위에 탱자를 돌려 심어 방어를 보완하였다. 성벽 위에 조총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6<해미읍성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6<아래쪽 큰 돌로 쌓은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8<안쪽 흙으로 쌓은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 위>

해미읍성<성벽 바깥 해자>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천수만 바다가 있는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초에 쌓은 읍성의 성문으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옹성은 없다. 출입문은 돌로 쌓은 홍예가 있으며 그 위에 문루를 두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2<진남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7<안쪽에서 본 모습>

진남문은 마차 1대정도가 지나갈 정도이다. 읍성 성문의 평균적인 도로폭으로 보인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5<홍예>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4<성문 앞에 세워진 공덕비>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2009년>

성문 안쪽에는  1491년(홍치 4년)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축성연대를 기록해 놓은 글씨>

해미읍성은 조선초에 쌓은 읍성으로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천수만 바다를 향하고 있는 서남쪽에 2곳에 치성을 두고 있다. 규모는 약간 큰 편으로 포대를 설치할 수 있는 규모이나 이를 위한 방어시설은 없고 누각만 올려져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3<진남문 서쪽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문루 옆 성벽과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진남문과 성벽>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성벽과 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과 주변 성벽>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안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옆 성벽에서 보이는 관아와 청허정이 있는 동산>

SANYO DIGITAL CAMERA<서남쪽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문루>

서문은 1974년 읍성을 정비할 때 복원되었다. 서문에는 지성루(枳城樓)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었던 사실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에 옹성이나 치성 등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문>

SANYO DIGITAL CAMERA<서문 남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4<서문과 주변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0<안쪽에서 본 서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1<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9<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2<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3<북서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8<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0<북동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2<동문>

SANYO DIGITAL CAMERA<동문 문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3<동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5<동문 남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4<동문 남쪽 성벽>

읍성 내부에는 해미읍성이 폐지된 후 관아와 많은 민가들이 모여 있다. 객사는 초등학교로, 동헌은 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1970년대 읍성 복원공사를 하면서 민가들은 읍성 바깥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민가 몇채가 복원되어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9<진남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읍성 내부>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6<읍성 내부>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0<해미현 관아>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1<동헌>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2<객사>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4<동문에서 본 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5<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읍치>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7<청허정>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6<청허정에서 멀리 보이는 천수만 바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에서 보이는 민가>

SANYO DIGITAL CAMERA<민가>

서산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시대 충청도의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를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 한다. 이곳은1652년(효종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

경남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사적)이다.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으로 고성읍 무기산에 1~7호 무덤과 11, 12호 무덤이, 북쪽을 300m 떨어진 기월리에 8,9,10호 무덤이, 동쪽에 13, 14호 무덤이 있으며, 도심에 제2송학동 고분군으로 불렸던 무덤이 있다. 1호 무덤은 겉모습이 일본의 전방후원형 무덤을 닮았으나 발굴,조사 결과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방무덤을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을 하고 있다. 무덤들은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에서는 토기류와 금동귀걸이, 금동장식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소가야는 3세기까지 변한 12개국 중 고자미동국, 고자국으로 불렸던 세력이 성장한 것이다. 삼한시대 사천 늑도 등과 함께 한.중.일 해상교역로에서 중요 거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금관가야와 경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송학동 고분군, 내산리 고분군, 율대리 고분군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고성 송학동고분군<고성 송학동 고분군 위성사진>

1호분은 외관상 북쪽에 원형고분, 남쪽에 전방후원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발굴조사 결과 모두 13개의 돌덧널과 돌방이 있는 독립된 원형 고분이 모여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축성방법에서도 인공적으로 흙을 다져 쌓은 가야 고분의 축성양식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501<큰칼, 6. 고성 송학동 1C호분,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301<발걸이, 5~6세기, 고성 송학동 1A-1호묘, 10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381<말방울, 5세기,  1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5<뚜껑접시(스에키계 토기), 5세기, 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6<신라토기, 1. 고성 송학동 1B-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합천 옥전 3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15<청동 굽다리접시, 6세기, 5. 고성 송학동 1C호묘, 고성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2<말띠드리개, 6세기, 1.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서쪽에 있는 2기의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무덤 옆에 있는 작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동쪽 아래에 있는 3기의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 아래 작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제일 아래에 있는 무덤>

고성 송학동 고분은 도심과 가까운 작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도심과 당항포가 있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북쪽 방향>

원래 동쪽 도심에 있는 무덤들은 송학동 제2고분군으로 불렸는데 기월리고분군과 함께 통합하여 송학동 고분군으로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심에 있는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고성 송학동고분군, 사적, 경남 고성군 송학동
고성읍 북쪽의 무기산 일대에 위치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7기 가량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소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에는 겉모양이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닮았다 하여 한일양국 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제1호분도 위치하고 있다. 199년부터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분군의 특징과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첫째, 모든 고분의 봉토는 인공을 다져 쌓아 올려졌다. 언덕 위를 평평하게 고른 뒤 한 켜씩 다져가며 쌓아 올린 판축의 기술이 확인되었다. 둘째, 1호분은 모두 13개의 돌덧널과 돌방으로, 3개의 독립된 둥근 봉토를 가진 고분이 합쳐진 것으로 판명되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다른 모양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셋째,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B-1호 돌방은 전통적 가야고분과는 다른 모양인데, 입구.돌벽.천정에 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넷째,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금동귀걸이, 마구, 금동장식, 큰칼, 청동제높은잔,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어 소가야 왕릉의 면모를 짐작케 해 주었다. 넷째,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통해 고분군은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고분군이 자리한 고성군은 소가야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작은 가야’가 가야인들 자신이 불렀던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이 많이 나는 ‘쇠가야’가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고성 내산리 고분군(사적),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

경남 고성군 동해면에 있는 내산리 고분군(사적)이다. 원래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60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봉분의 크기가 10m 정도인 중간규모의 무덤이 40여기 이며, 15m 이상 대형 무덤도 20기가 있다. 소가야는 남해안 상교통로에 자리잡고 교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지역 금관가야와는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다투는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에는 해상무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성 내산리 고분군(사적)>

내산리고분군은 당항포가 있는 내해 바다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다. 소가야 중심지인 고성과 남해 먼바다를 연결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언덕에는 60여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고성 내산리고분군(사적)<내산리 고분군 무덤 분포(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위쪽 1호무덤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무덤은 위쪽부터 1호 무덤이 있으며 동쪽 마을 부근에 60호 무덤이 있다. 앞쪽 소나무 주위에 있는 29호 무덤부터 시작하여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중간에 보이는 무덤(5~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입구에 있는 소나무>

OLYMPUS DIGITAL CAMERA<2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6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8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중앙에 위치한 무덤들(5 ~1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위쪽에 있는 무덤(1~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무덤 부근에서 보이는 아래쪽 무덤들>

OLYMPUS DIGITAL CAMERA<정비되기 전 무덤(14~1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무덤(18~1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 위치한 무덤(30~32호)>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40~60호 무덤이 있는 지역>

내산리고분군을 지나 고개를 넘아가면 당항포 부근 바다를 볼 수 있다. 이 바다는 다리가 놓여진 좁은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태풍이나 폭풍우를 피해서 배를 정박하기에 좋다. 소가야가 번성했들 때는 배들이 이 곳에 쉬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당항포 앞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목걸이,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6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731
<쇠투겁창, 4~6세기, 1. 고성 내산리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2.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고령 지산동 75호묘,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521<화살촉, 4~6세기, 7. 고성 내산리 21-1호묘,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7<신라토기, 2. 고성 내산리 8호묘, 국립전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1.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구멍단지, 2.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굽다리항아리, 3.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
<그릇받침, 5.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고성 내산리 고분군, 사적, 경남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고성군 동해면의 북쪽 끝에 위치하여 마산방면의 진해만에 근접해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28기 정도이지만, 61기 가량의 봉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래는 100여기의 고분이 있었다 하나, 많은 도굴과 파괴의 피해를 입었다. 1997년부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연차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군의 특징이 알려지게 되었다. 대형봉토분인 제8호분과 제34호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확인되었다.첫째, 고분의 봉토는 인공적으로 다져 쌓아 올려져, 지역적 고분축조의 특색을 나타낸다. 둘째, 중앙의 주곽(제8호분)과 돌방(제34호분)을 중심으로 봉토 내에 여러기의 돌덧널이 함께 만들어져 있어, 고성 송학동고분군과 함께 이 지역 가야고분의 특색을 보여준다. 셋째, 고리장식대부장경호와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 큰칼과 철호살촉 등의 철기, 귀걸이와 팔찌 등의 금은장신구, 발걸이와 운주 등의 마구들이 출토되었다. 넷째, 제34호분에서 출토된 은팔찌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며 굴식돌방무덤의 모양도 백제와 동일한 특색을 보여준다. 제8호와 제34호분은 출토된 토기와 마구로 보아 6세기 전반에서 중엽 경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가야세력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일 것이다.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3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금관가야 생활유적

경남 김해시 봉황동 일대에 있는 봉황동유적(사적)이다. 김해 구도심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 남쪽에 있는 봉황대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있는 조개더미(패총)과 무덤유적 등이다. 조개더미에서는 토기, 뼈나 뿔로 만든 도구, 석기, 가락바퀴, 불탄쌀, 중국 동전,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동전은 왕망의 신나라 때(기원전 14년)에 만든 것으로 유적이 형성된 시기와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언덕 서쪽에서는 가야 토성과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남쪽에서는 가야시대 배가 발견되어 해반천을 통해 선박이 왕래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청동기시대 이래 사람이 살았던 곳이 금관가야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조개더미인 회현리패총과 봉황대 일대의 주거유적을 합쳐 봉황동유적(사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봉황대 남쪽으로는 넓은 김해평야와 낙동강이 펼쳐 있고, 북쪽으로는 분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평야지대 낮은 구릉에 목책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 고대 성읍국가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봉황대 서쪽에는 해반천이 흐르고 있어 낙동강을 통해 중국, 일본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김해 봉황동유적<유적 일대 위성 사진>

봉황동 유적은 집터와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곳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유물은 없지만, 가야 고상가옥 등을 복원하여 도심 공원으로 조성해 놓고 있다. 봉황대는조선시대 김해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이 봉황의 모습을 닯았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언덕>

봉황대 서쪽 해반천 옆에는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유적과 선박접안시설 등이 발견되어 금관가야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은 옛가야의 생활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고상가옥과 가야선박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박 접안시설을 재현해 놓은 연못>

봉황대 남쪽 옛 봉황초등학교 부근에서 가야시대 선박이 발견되었다. 연못에는 당시 선박을 재현해 놓은 배를 볼 수 있다. 좁은 수로를 항해할 수 있도록 날렵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야의 배>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1<배모양 토제품,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가야의 배
가야는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한 정치체이며 수로와 해로를 통하여 왜와 한사군에도 철기를 수출하였다. 가야의 배는 현재까지 실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으나, 가야시대의 배를 본떠 만든 배모양토기가 여러 점 남아 있어 구조와 형태, 크기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복원된 배는 호림박물관에 서장된 배모양토기를 토대로 당시의 항해술과 선박의 구조 등을 고려하여 제작한 것으로, 가야시대 조선술과 선박구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연못 옆에는 다수의 고상가옥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당시 교역에 필요한 물품들을 저장하는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상가옥 건물터와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집모양토기를 참조하여 고상가옥을 복원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상가옥>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고상건물지와 가야시대 집모양토기를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건물바닥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인데,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가야시대의 접안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반천변에 입지한 조건이나 구조 및 열을 지어 다량으로 분포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곳에서 발굴된 고상가옥들은 대외교역을 위한 창고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망루>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해반천>

봉황대 정상에는 황세바위, 여의각 등이 있으며, 황세바위 앞에는 가락국의 천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김해 도심과 주변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황세바위>

OLYMPUS DIGITAL CAMERA<천제단>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북쪽 분산성(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반천>

봉황대 동남쪽은 생활유적인 회현리 조개더미(패총)가 확인된 곳이다. 이곳에는 주변에서 확인된 집터와 가야토기를 참조하여 고상가옥과 주거지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상가옥과 주거지를 재현해 놓은 곳>

수혈주거 가옥은 난방을 위해서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이며, 고상가옥은 곡식 등을 저장했던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수혈주거 가옥>

OLYMPUS DIGITAL CAMERA<수혈주거 가옥>

OLYMPUS DIGITAL CAMERA<집모양토기, 전 대구 달성, 삼국시대(가야) 5~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고상가옥>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9 <집모양토기, 4~5세기, 1. 창원 석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2.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3. 김해 봉황동 유적,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고상가옥과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재현해 놓은 목책>

OLYMPUS DIGITAL CAMERA<산책로>

OLYMPUS DIGITAL CAMERA<목책>

봉황대 동남쪽에 위치한 회현리 패총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중국 왕망시대의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회현리 패총>

OLYMPUS DIGITAL CAMERA<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
<김해 회현리 패총(단면)>

OLYMPUS DIGITAL CAMERA<항아리, 김해 봉황동, 삼국시대 가야>

김해 회현리 패총
김해 회현리 패총은 1907년 이후 어려 번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봉황대 유적과 함께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가야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토기, 동물뼈, 뼈조각품과 함께 ‘화천(貨泉)’이라고 불리는 중국 동전과 거울조각, 일본 야요이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김해 봉황동유적, 사적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2001년 2월 5일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이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장국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2002년 ~ 2005년 해상포구, 고상가옥, 수혈주거, 망루, 목책 등을 복원 정비하였으며 1999년 3월 부산대 박물관에서 회현리 패총을 재발굴하여 2006년 단면전시관 형태로 개관하였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