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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정총국(사적), 구한말 우편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 사적)이다. 구한말 근대적인 우편업무를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1884년 갑신정변의 현장이었던 이유로 폐쇄되었다가 1893년 이후 전우총국이라는 이름으로 우편업무는 재개되었다. 옛 사진을 참고하여 건물을 복원하였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 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옛 관아 건물 중에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현재 우정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갑신정변은  근대적인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그 업무를 담당하기 위한 우정총국을 설립하면서 그 기념식에서 김옥균을 위시한 개혁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사건을 말한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2<서울 우정총국(사적)>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4<’우정총국’ 현판>

이곳에는 도화서, 전의감 등 기술과 관련된 관청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도로에 있다. 건물은 구한말의 전형적인 관청의 모습을 하고 있어 당시 관청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1<정면에서 본 모습>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50<옆에서 본 모습>

내부는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 원래 업무를 보던 모습은 살펴볼 수 없다. 현재 우정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표와 문헌,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5<체전부, 전선부의 의복, 모자, 모표>

한국 최초 집배원과 집배원이 착용한 의상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6<옛 집배원 모습>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7<괘판>

1900년대 우체사에서 사용된 사무용 서식자를 인쇄하던 나무판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9<날짜 도장>

1900년대 경상북도 안동, 전라북도 남원, 충청남도 홍주, 전라북도 전주, 경상남도 진주 우체사에서 사용한 날짜 도장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0<저울과 자>

1900년대 우편물의 중량고 규격 측정을 위해 사용되던 도구이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1<우체요금표>

1900년도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제정한 국내외 우체요금표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3<고종황제 즉위 40주년 우표><태극우표>

태극우표
1895년 우정사업 재개와 함께 사용된 4종의 우표로, 5푼, 1돈, 2돈 5푼, 5돈 등의 단위로 발행되었다. 미국 워싱턴 앤드류 비그래이엄 조폐창에서 인쇄되었으며, 태극기 문양이 들어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4<이화우표>

1900년 대한제국 농상공부 인쇄국에서 발행한 14종의 우표로, 최초의 국산 우표이다.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 문양이 들어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5<매우표>

1903년 프랑스 정부 체신청 인쇄국에서 발행된 13종의 우표로, 근대 한국의 우표 중 가장 큰 크기의 우표이다. 대한제국이 본격적인 국제우편 업무 실시에 대비하여 프랑스에 발주, 위탁 제조한 우표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51
<우전선로도본>

대한제국기 전국의 우체사, 전보사의 위치와 선로가 표기된 지도이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시 우편물의 배송 경로와 소요시간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통신권이 일본에 넘어가기 전인 1905년까지의 철로, 전보선로, 전화선로, 수로 상황도 함께 표기되어, 당시 대한제국이 주도적으로 이룩한 근대화 정책의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8<우체사 관인>

서울 영등포, 경남 창원, 진주, 전북 옥구, 충남 은진 등 다섯 곳의 우체사에서 사용했던 관인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한걸음의 의미
조선의 개화정책은 갑신정변으로 잠시 위기를 맞고, 우정사업 역시 중단된다. 하지만 우정총국의 개설과 근대 우정사업의 실현은 그 자체로 조선이 이룩한 최초의 개화 성과로서 의미가 있다. 더불어 조선이 전세계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발자취이다. 이후로도 조선은 세계 속의 조선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갔다. 그 결과 우정사업 창설 초기부터 목표했던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여, 당당한 독립국으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바람을 이루어 낸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0<만국 우편연합 위임장 및 여권>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 총회에 참석한 전권위원 민상호의 위임장과 여권이다. 만국우편연합의 가입은 조선 최초의 국제기구 가입이며, 이를 통해 조선은 독립국으로서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1<만국우편연합 상징조형물>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2<문위우표 5종>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다섯 종으로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의 단위로 발행되었다. 특히 국제우편에 필요한 100문의 고가 우표를 통해 국제우편 업무가 우정사업 개시 당시부터 계획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4<코리안 포스탈 가이드>

1897년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배포한 영문 우체업무설명서이다. 우정사무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외국인에게 홍보와 안내 작업을 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6<일안(日案)>

1884년 11월 우정 업무를 개시하면서 일본 공사관에 통지한 공문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8<미안(美案)>

1884년 11월 우정 업무를 개시하면서 미국공사관에 보낸 공문이다. 조선 정부는 각국 공사관에 ‘우정규칙’을 송부하고 우정사무 개시를 통지하였으며, 미국 공사관측은 업무 개시에 대한 축하 인사를 답변으로 보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1<한성순보>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2<대조선국 우정국사무장정>

1884년 우정국 설치 당시 제정한 사무장정이다. 우정국은 서울 본국과 인천분국이 함께 설치되었으며, 서울 본국에는 관리사무를 관장하는 규획과 중앙우정국의 업무를 담당하는 발착과,, 경리사무를 담당하는 게산과 등 세 개의과를 두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3<대조선국 우정규칙, 우정규칙적요>

우정국 개설과 함께 마련된 우정사업 관련 규칙이다. 우편물의 종류와 요금 등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5<경성내 우정집신분전 구역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6<승정원일기>

1884년 4월 국왕 고종이 우정총국 창설 교서를 반포하고 그 취지를 밝힌 기사이다. 우정총국의 설치는 공사 간 이득을 취한 것임을 명시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근대 우정제도가 조선에 도입되다
1880년대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 속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각종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아간다. 새로운 근대제도와 문물을 하루 빨리 도입하고자 하는 활발한 움직임 중에서도 우정사무의 개시는 그 핵심사업이었다. 이에 1882년 본격적인 우정사무의 개시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한편, 근대 신문물에 낯선 반응을 보이는 백성을 설득하기 위한 홍보 작업도 진행한다. 마침내 1884년 4월 우정총국을 창설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조선에 근대 우정제도가 실시된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9<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장정>

1882년 개화정책 담당기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반포한 우정사 업무규정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우정업무의 개시가 공식적으로 선언된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0<우정총국 옛 전경(1906년경)>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2<우정총국 초대총판 홍영식>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4<보빙사>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조선사절단 보빙사의 모습이다. 보빙사 시찰을 통해 조선은 서양의 근대제도와 문물을 직접 확인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6<조미조약>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서구 사회와 직접 교류하는 첫 걸음을 내디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7<홍영식복명문답기>

홍영식이 보빙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국왕 고종에게 올린 귀국보고이다. 이 자리에서 홍영식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우정과 전신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장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8<일본문견사건>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보고서 중 일본의 근대 우정에 대한 탐방 기록이다. 근대화된 일본의 변화상 중 우정 분야에 대한 조선의 관심을 볼 수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9<일본공부성>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보고서 중 일본의 근대 전신에 대한 탐방 기록이다. 우정과 함께 전신 분야에 대한 조선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2. ‘사적 우정총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강원도 강원감영(사적),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

강원 원주시 일산동에 남아 있는 강원감영(사적)이다. 강원도 26개 부,목, 군현을 관할하던 강원감영이 있던 곳이다. 조선 태조 때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건물들은 임진왜란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1634년 원주목사가 재건하기 시작하였으며, 1895년에는 55동에 이르는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청 등 관공서 건물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강원감영 정청 건물이었던 선화당과 살림집인 내아, 출입문인 포정루가 남아 있다. 2000년대 이후 우체국이 들어섰던 후원에 건물과 연못 등을 복원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1<원주 강원감영(사적)>

조선전기 관찰사는 관할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근무하는 순력이 중심이어서 감영 건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조선후기에는 지방을 통치하는 상설기관으로 바뀌면서 많은 건물들이 필요하였다. 감영에 설치된 건물로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객사가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관찰사가 집무공간인 선화당, 숙소인 내아가 있었고 감영에 소속된 관리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등과 호적 등 서류를 보관하던 창고 등 설치되었다. 감영은 대도시에 소재했기 때문에 상업지역이나 관공서로 바뀌어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전라감영 전주객사, 공주 충청감영 선화당,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등이 대표적인 감영 관아 건물들이다.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2<강원감영 읍성 및 관아 건물 배치>

원주 강원감영<강원감영 건물배치, 위성사진>

강원 원주목(여지도)
<원주목지도, 여지도, 18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8<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강원감영의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총 17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과 원주목 관아에서 관찰사와 목사로 재잭하였던 관인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선정비는 관찰사와 목사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나 목사를 경계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었다. 원주지역 곳곳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원주목사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사라져 찾기가 어렵고 강원감영을 복원하면서 일부 남아있던 선정비를 옮겨왔다. 이 중 2기의 비석은 후원 권역에 있던 원주우체국을 철거하면서 찾은 것이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은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공간으로 일반적인 지방 관아에서는 동헌이 있는 영역이다. 옛 건물로는 관찰사 집무공간인 선화당(보물), 포정루가 남아 있다. 2000년대 이후 강원감영(사적)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내아를 비롯하여 중삼문, 내삼문, 행각, 책방 등의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이외에도 보선고, 비방청, 호적고, 약방 등 실무관리들이 근무하던 사무실과 창고 등이 선화당 권역에 있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4<선화당 권역 출입문인 포정루>

포정루는 강원감영 선화당을 출입하는 문루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전형적인 2층 문루 건물이다. 1층 가운데 칸에 널문을 달았으며 2층은 난간을 두르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6<안쪽에서 본 포정루>

포정루(布政樓)
포정루는 강원감영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출입문이다. ‘포정’이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로 중국 명나라의 지방관청이 포정사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된 이후, 원주 진위대가 강원감영을 사용했을 때는 ‘선위루’라 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라고 하였다.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근거하여, 1995년 조선시대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로 편액을 바뀌 달았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포정루를 지나면 두번째 출입문인 중삼문이 있다. 건물터만 있던 것을 복원한 건물이다. 주변의 담장과 부속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은 앞면 5칸 규모로 양쪽에 작은 문간방이 있다. ’관동관찰사영(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이름이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5<중삼문>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20<안쪽에서 본 모습>

중삼문(中三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루.중삼문.내삼문이 있다. 중삼문은 진입공간의 배치상 가운데 위치한 문으로 포정루를 지나온 사람들이 중삼문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중삼문은 ‘관동관찰사영(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안내문, 2023년, 원주시청)

내삼문은 선화당 마당을 출입하는 문으로 ‘징청문’이라는 이름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강원도 관찰사가 근무하는 공간인 선화당 건물이 보인다. 내삼문에서 선화당까지는 박석이 깔린 길이 연결되어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9<내삼문>

내삼문(內三門)
내삼문의 고유한 이름은 징청문(澄淸門)으로, 포정루.중삼문을 지나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직접 연결되는 문이다. 내삼문은 강원감영의 진입공간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문자는 이곳에서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절차를 거쳤다. 징청문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방문자는 문을 들어서면서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관찰사를 만나러 온 방문객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하여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들이 새겨야 할 덕목이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선화당(보물)은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강원감영 정당(正堂) 건물이다.  1664년 경에 건립된 건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 위치에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실물이 그대로 계승되어 왔으며 조선시대 감영 선화당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21<강원감영 선화당(보물)>

내부는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온돌시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1칸씩은 누마루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부공간 배치로 볼 때 판결 업무가 많았던 지방관아 동헌과는 달리 관찰사는 감영에 속한 지방관 등과 회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부처 정청과 비슷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3<선화당 내부>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2<선화당 앞 측우대(복원품)>

내아는 관찰사가 기거하는 살림집이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가족없이 단신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고 임기도 짧으며 관할지역을 돌아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화당에 비해 건물규모가 상당히 작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3<내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22<내아 툇마루>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6<뒷편에서 본 모습>

내아(內衙)
내아는 관찰사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건물로, 오랫동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대은당’으로, <관동지>에 실린 강원감영지 기록에는 ‘내아’로 기록되어 있다. 내아는 17세기 후반에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살펴보던 유영(留營)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선화당 뒷편에는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책방이 있다. 조선시대 감영에서는 산하 고을에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는 기능과 함께 도서의 수집과 보급, 인쇄와 출판의 기능이 있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5<책방>

책방(冊房)
책방은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책방에는 감영에서 수집한 도서자료 외에,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온라온 인구.세금.날씨 등에 대한 보고자료, 분쟁.갈등에 대한 소송관계 문서 등이 보관되었다. 대구 경상감영의 사례로 볼 때, 강원감영에서도 도서의 수집.보급, 인쇄.출판 등이 책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관찰사의 수행비서격인 책사가 선화당과 가까운 거리인 책방에 근무하면서 관찰사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강원감영 선화당 영역에서 실무관리들이 근무했던 여러 행각 건물들이 있었다. 확인된 건물로는 보선고(補繕庫), 공고(工庫) 등이 있다.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1<행각>

행각
행각은 궁궐의 중심건물인 정당(正堂)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보조 건물을 말한다. 강원감영도에는 선화당 왼편으로 세 채의 건물이 확인되는데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행각, 보선고(補繕庫), 공고(工庫)가 자리해 있다. 2000년 강원감영터 발굴 당시에는 행각의 건물 흔적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몇개의 건물구조가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행각 자리와 좌측의 공방고지 일대는 옛 지도 기록에서 보이는 행각, 보선고, 공방고지의 여러 건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행각의 건물 복원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이루어졌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7<공방고 터>

공방고터(工房庫 址)
조선시대 강원감영에는 행정업무를 수행하던 육방(六房)이 있었다. 그중 공방은 공용지를 관리하고, 건축물을 짓거나 보수하는 역할을 했다. 공방고 터는 공방이 있던 자리로 고(庫)는 창고보다는 기관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강원감영은 원주목과 같은 관아를 사용했는데, 공방고 또한 원주목과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당시, 바닥에서 온돌시설 일부가 드러나 공방고에 난방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은 감영의 업무가 이루어지던 공간이다. 선화당 권역 안에는 중심건물인 선화당, 진입공간에 해당하는 포정루.중상문.내삼문, 그밖에 내아.공방고 터.행각.책방 등이 있다. 감영의 본청인 선화당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선화당 권역은 진입 공간과 집무 공간으로 나뉘는데, 강원감영의 진입 공간은 포정루에서 시작해서 중상문.내삼문으로 연결되는 삼문(三門)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강원감영을 찾아온 손님들은 각 문을 지날 때마다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중삼문에서 꺾어서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선화당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방식은 경기.전라.황해감영에서도 볼 수 있다. 집무공간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농정.조세.민원.군사.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고, 17세기 중반부터 선화당을 비롯하여 관찰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객사 권역

감영 동쪽편에는 객사를 중심으로 강원감영에 속했던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군사시설인 중영(中營), 화약고(火藥庫), 군기고(軍器庫), 군향고(軍餉庫) 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羅將)이 일하는 군뇌방(軍牢房),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司倉)이 이 객사 앞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원주의 대표적인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심 상업지구에서 볼 수 있는 옛지도를 표현한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상업지구로 변한 객사 주변 지역>

후원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뒷편에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인 후원이 있다. 후원에는 큰 연못을 조성하고 3개의 섬을 조성하여 삼신산을 구현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후원에는 원주우체국이 자리하였는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끝나면 옛 후원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7<강원감영 후원 권역>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8<영주관>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0<봉래각>

봉래각(蓬萊閣)
봉래각은 강원감영 후원의 건물들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1684년 관찰사 신완이 연못 북쪽에 처음으로 봉래각을 세웠다. 그러나 물이 넘쳐 누각이 여러 차례 허물어지자, 1704년에 관찰사 홍만조가 기존 봉래각을 헐어내고 섬을 견고하게 만들어 그 위에 봉래각을 새로 지었다. 봉래각을 처음 건립한 관찰사 신원은 <봉래각상량문>에 ‘봉래’가 강원도에 있으므로 강원도를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1<채약오>

채약오(採藥塢)
채약오는 신선이 먹는 불로초를 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봉래산을 비롯한 삼신산에는 영험한 약인 불로초가 있다는 신선세계의 전설을 따른 것이다. 1771년 관찰사 서명선이 연못 속에 6개의 기둥을 세워 건립하였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2<뒷편에서 본 후원>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9<후원에서 보이는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후원 권역
강원감영의 후원 권역은 관찰사의 사적인 공간으로, 후원에는 연못을 조성하여 봉래.영주관 등을 건립하고 손님 접대와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못 가운데와 한쪽 끝에는 정자를 세워 연못을 내려다보며 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원감영의 후원에서는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산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전각을 짓고, 모두 신선 세계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봉래산’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의 후원에 이에 어울리는 신선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관찰사들은 후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봉래주인’, 즉 신선세계의 주인이라 칭했다. 강원감영의 후원은 일제강점기까지는 유지되었으나 이후 후원 자리에는 한때 원주우체국이 자리했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아름다운 후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적,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원주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으로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왕조는 태조4년(1395)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강원감영을 설치하여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원주가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지리적으로 수도인 한양과 가까워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찰사는 행정과 군사의 최고 책임자로, 왕의 명령으로 파견되어 각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을 올바르게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감영에 잠시 머물면서 강원도 각 지역을 돌아보는 순력(巡歷) 체제로 업무가 이루어졌다.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게 되고, 관찰사는 강원감영에 머물면서 때때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돌아보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留營)이라고 한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원이 다시 짓기 시작한 이후 여러 목사와 관찰사들이 계속하여 다시 지었다. 강원감영은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보선고.내아.비장청.호적고 등 40여 동에 달하는 웅장한 모습으로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역할을 수행했으나, 1895년에 8도 제도가 23부 제도로 바뀜에 따라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1900년 이후 강원감영은 원주의 지방군대인 진위대 본부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한때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강원감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2023년, 원주시청)

<출처>

  1. ‘사적 원주 강원감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2.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3. 안내문, 원주 강원감영사료관, 2023년

서산 보원사지(사적), 통일신라 화엄십찰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지(사적) 절터이다. 보원사(普願寺)는 삼국시대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멀지 않은 곳에 마애여래삼존상(국보)이 있다.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에 따르면 부석사 등과 함께 통일신라 화엄종을 대표하는 10대 사찰인 화엄십찰 중 한곳이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 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7<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사적), 2009년>

가람배치는 석교를 지나 중문, 석등,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과 강당 좌우로 회랑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례 화엄사나 영주 부석사처럼  가람배치가 해가 따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금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여래좌상도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 형태도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것으로 볼 때 동시대 화엄종 사찰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서산 보원사지(사적)>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5<동쪽을 향하고 있는 보원사 가람배치>

절터에서는 대형 철조불상 2구가 출토되었으며 삼국시대 백제 시기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오층석탑(보물), 통돌을 파서 만는 석조(보물), 975년 이곳에서 입적한 법인국사의 승탑(보물), 탑비(보물), 사찰 입구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보물) 둥이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1<멀리서 보이는 보원사지 절터>

절터 앞으로는 가야협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이 불전이 있는 신성한 영역과 바깥 세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해 준다. 개울 동쪽으로는 사찰입구입을 알리는 당간지주과 신도들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마련된 석조(보물)이 배치되어 있다. 서산과 홍성, 예산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사찰 바깥에는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고려시대 원(院)과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3<당간지주가 있는 입구에서 보이는 모습>

당간지주(보물)는 절터 동쪽 개울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2개의 기둥이 70cm 정도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다. 기둥 안쪽에는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 넓은 띠를 새겼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지만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웅장한 멋을 지니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5<당간지주(보물)>

당간지주 오른편으로 석조가 있고, 그 사이에 넓은 공터가 있다. 아마도 이곳에 여행객을 위한 시설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8<당간 지주 오른 쪽으로 보이는 석조(보물)>

석조(보물)는 물을 담는 그릇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 사원, 사찰 입구에 놓여 있다. 석조에 담긴 물로 손을 씻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석조는 화강석 내부를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 석조 양식을 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23<보원사지 석조(보물)>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고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다. 원래 돌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 사찰 경내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6<당간지주에서 보이는 보원사지 절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0<사찰 앞을 흐르는 개천과 가야협 계곡>

개울을 건너면 주불전이 있는 중심영역을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중심영역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경주 불국사와 비슷한 공간배치이다.  약 1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조성하였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2<보원사 중문을 오르는 계단>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3<남쪽편 석축>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4<북쪽편 석축>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9<주불전이 있는 공간>

오층석탑(보물)은  고려초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9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석탑이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사자상을, 윗층 기단에는 팔부중상을 새겨놓고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게 만들었다.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백제 석탑의 특징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8<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1<뒷편에서 본 모습>

오층석탑 뒷편으로 철조불상을 모셨던 금당터가 있다. 금당터에는 불상이 모셔졌던 자리와 건물 기둥이 놓였던 주춧돌, 기단석 등이 남아 있다. 금당 좌우에는 회랑으로 연결된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 뒷편에는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54<보원사지 금당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3<기단을 쌓았던 석재>

금당지
오층석탑에서 서쪽으로 9.2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2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루어졌고 근래까지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금당의 규모는 남북 18.0m, 동서 16.0m의 장방형으로 확인되었다. 기단 구조는 할석을 각 기단의 바깥면에 맞추고 4~5단으로 축조하였다. 내부에는 불상대좌의 보호각인 닷집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초석 4기가 확인되며, 금당지 하부에는 남북 18.0m, 동서 2.1m만 남아 있는 기단이 확인된다. 기단에서 서쪽으로 90cm 내에는 할석을 2~3줄로 정연하게 만든 뒷채움시설이 확인되고, 연화문수막새, 당초문암막새, 무문전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년)

금당터 가운데에는 불상이 모셔졌던 닫집을 받치는  건물초석을 볼 수 있다. 절터에서는 2구이 철조불상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통일신라 때, 다른 하나는 고려초에 조성된 불상이다. 어떤 불상이 이곳에서 모셔졌는지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때 조성된 불상이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52<불상이 모셔졌던 닫집을 받치는 초석>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2<뒤에서 본 모습>

금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된 철조여래좌상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형태나 양식적으로 거의 유사한 불상이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상으로 현재 출토된 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부처. 철조불좌상, 통일신라 8세기,서산 운산면)>

두 손은 없어졌지만 손목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보인다. 몸에 비해 큰 머리, 부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투박하면서, 호족세력의 힘을 과시하는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철불 20220803_01<서산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 고려 11세기, 2022년>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0<금당터 뒷편 강당과 회랑이 있던 자리>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6<앞쪽 회랑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4<보원사지 절터>

강당 뒷편에는 축대로 약간 높게 공간을 조성되어 있다. 고려초 국사와 왕사를 지냈으며 이곳에서 입적했던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신 승탑과 탑비가 모셔져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북한산 장의사에서 불경 등을 배웠으며, 고려 광종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 때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광종은 ‘법인(法印)’이라 시호와, ‘보승(寶乘)’이라는 탑이름을 내렸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2<법인국사탑과 탑비>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6<보원사지 법인국사탑(보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8<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보물)>

보원사지 절터는 2006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절터에서는 발굴,조사결과 출토된 건물 주춧돌 등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5<절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20<주춧돌과 기단 석재>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8<주춧돌>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6<건물 기단 석재 등>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9<기와 조각>

SANYO DIGITAL CAMERA<발굴당시 모습(당간지주 부근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중문 주변>

SANYO DIGITAL CAMERA<중문 안 회랑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북쪽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남쪽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남쪽 건물터>

서산 보원사지 불상 20220803_01<금동불입상, 서산 보원사터 출토, 삼국시대 6세기 중엽, 국립중앙박물관>

서산 보원사지, 사적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조,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백제 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의 철조여래좌상도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안내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5. 위키백과, 2023년

서산 해미읍성(사적), 충청병영이 있었던 읍성

충남 서신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해안지역을 침입하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 중 하나이다. 조선 태종 때(1471년)에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옮기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종 때 (1421년)에 완공하였다. 조선후기 효종 때(1652년)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지역 군사 거점이었다. 이후에도 무관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인근지역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70년대 이후 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등 유적지를 재정비하여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과 성문 등 주요 시설들이 잘 남아 있어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읍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1<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해미읍성(사적), 2009년>

해미읍성은 북동쪽의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넓은 평지에 성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1,5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다. 읍성은 서산 천수만 바다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있다. 남쪽으로 해미천, 동쪽으로는 황락천, 서쪽으로는 반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북쪽을 통해 가야산(해발 678m) 주변 산맥과 연결된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 주변 위성사진, 2023년>

 성벽의 높이는 4.9m이며 상부의 폭은 약 2.1m정도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큰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위쪽는 작은 돌을 사용했으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팠으며 주위에 탱자를 돌려 심어 방어를 보완하였다. 성벽 위에 조총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6<해미읍성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6<아래쪽 큰 돌로 쌓은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8<안쪽 흙으로 쌓은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 위>

해미읍성<성벽 바깥 해자>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천수만 바다가 있는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초에 쌓은 읍성의 성문으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옹성은 없다. 출입문은 돌로 쌓은 홍예가 있으며 그 위에 문루를 두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2<진남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7<안쪽에서 본 모습>

진남문은 마차 1대정도가 지나갈 정도이다. 읍성 성문의 평균적인 도로폭으로 보인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5<홍예>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4<성문 앞에 세워진 공덕비>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2009년>

성문 안쪽에는  1491년(홍치 4년)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축성연대를 기록해 놓은 글씨>

해미읍성은 조선초에 쌓은 읍성으로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천수만 바다를 향하고 있는 서남쪽에 2곳에 치성을 두고 있다. 규모는 약간 큰 편으로 포대를 설치할 수 있는 규모이나 이를 위한 방어시설은 없고 누각만 올려져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3<진남문 서쪽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문루 옆 성벽과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진남문과 성벽>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성벽과 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과 주변 성벽>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안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옆 성벽에서 보이는 관아와 청허정이 있는 동산>

SANYO DIGITAL CAMERA<서남쪽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문루>

서문은 1974년 읍성을 정비할 때 복원되었다. 서문에는 지성루(枳城樓)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었던 사실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에 옹성이나 치성 등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문>

SANYO DIGITAL CAMERA<서문 남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4<서문과 주변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0<안쪽에서 본 서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1<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9<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2<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3<북서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8<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0<북동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2<동문>

SANYO DIGITAL CAMERA<동문 문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3<동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5<동문 남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4<동문 남쪽 성벽>

읍성 내부에는 해미읍성이 폐지된 후 관아와 많은 민가들이 모여 있다. 객사는 초등학교로, 동헌은 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1970년대 읍성 복원공사를 하면서 민가들은 읍성 바깥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민가 몇채가 복원되어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9<진남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읍성 내부>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6<읍성 내부>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0<해미현 관아>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1<동헌>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2<객사>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4<동문에서 본 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5<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읍치>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7<청허정>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6<청허정에서 멀리 보이는 천수만 바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에서 보이는 민가>

SANYO DIGITAL CAMERA<민가>

서산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시대 충청도의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를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 한다. 이곳은1652년(효종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

경남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사적)이다.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으로 고성읍 무기산에 1~7호 무덤과 11, 12호 무덤이, 북쪽을 300m 떨어진 기월리에 8,9,10호 무덤이, 동쪽에 13, 14호 무덤이 있으며, 도심에 제2송학동 고분군으로 불렸던 무덤이 있다. 1호 무덤은 겉모습이 일본의 전방후원형 무덤을 닮았으나 발굴,조사 결과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방무덤을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을 하고 있다. 무덤들은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에서는 토기류와 금동귀걸이, 금동장식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소가야는 3세기까지 변한 12개국 중 고자미동국, 고자국으로 불렸던 세력이 성장한 것이다. 삼한시대 사천 늑도 등과 함께 한.중.일 해상교역로에서 중요 거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금관가야와 경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송학동 고분군, 내산리 고분군, 율대리 고분군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고성 송학동고분군<고성 송학동 고분군 위성사진>

1호분은 외관상 북쪽에 원형고분, 남쪽에 전방후원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발굴조사 결과 모두 13개의 돌덧널과 돌방이 있는 독립된 원형 고분이 모여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축성방법에서도 인공적으로 흙을 다져 쌓은 가야 고분의 축성양식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501<큰칼, 6. 고성 송학동 1C호분,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301<발걸이, 5~6세기, 고성 송학동 1A-1호묘, 10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381<말방울, 5세기,  1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5<뚜껑접시(스에키계 토기), 5세기, 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6<신라토기, 1. 고성 송학동 1B-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합천 옥전 3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15<청동 굽다리접시, 6세기, 5. 고성 송학동 1C호묘, 고성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2<말띠드리개, 6세기, 1.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서쪽에 있는 2기의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무덤 옆에 있는 작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동쪽 아래에 있는 3기의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 아래 작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제일 아래에 있는 무덤>

고성 송학동 고분은 도심과 가까운 작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도심과 당항포가 있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북쪽 방향>

원래 동쪽 도심에 있는 무덤들은 송학동 제2고분군으로 불렸는데 기월리고분군과 함께 통합하여 송학동 고분군으로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심에 있는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고성 송학동고분군, 사적, 경남 고성군 송학동
고성읍 북쪽의 무기산 일대에 위치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7기 가량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소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에는 겉모양이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닮았다 하여 한일양국 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제1호분도 위치하고 있다. 199년부터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분군의 특징과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첫째, 모든 고분의 봉토는 인공을 다져 쌓아 올려졌다. 언덕 위를 평평하게 고른 뒤 한 켜씩 다져가며 쌓아 올린 판축의 기술이 확인되었다. 둘째, 1호분은 모두 13개의 돌덧널과 돌방으로, 3개의 독립된 둥근 봉토를 가진 고분이 합쳐진 것으로 판명되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다른 모양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셋째,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B-1호 돌방은 전통적 가야고분과는 다른 모양인데, 입구.돌벽.천정에 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넷째,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금동귀걸이, 마구, 금동장식, 큰칼, 청동제높은잔,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어 소가야 왕릉의 면모를 짐작케 해 주었다. 넷째,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통해 고분군은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고분군이 자리한 고성군은 소가야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작은 가야’가 가야인들 자신이 불렀던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이 많이 나는 ‘쇠가야’가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