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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남원읍성(사적 298호), 정유재란 때 큰 전투가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

전북 남원시 동충동에 남아 있는 옛 남원읍성(사적 298호)이다. 통일신라 때 남원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성을 처음 쌓았다고 하나 그 흔적은 남아 있다. 현재의 읍성은 1597년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의 둘레는 2.4 km 정도이고 성벽 높이는 약 4 m 정도이다.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해서 쌓은 일반적인 조선시대 읍성과는 달리 정사각형을 하고 있으며 성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바둑판처럼 큰 길이 있다. 성벽 바깥쪽은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쪽은 흙으로 토축을 쌓고 있는 전형적인 읍성 형태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북서쪽에 일부 성벽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고쳐지은 것이지만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은 여장이 없으며 전통적인 방어시설인 치성 외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지 않고 있다. 아마도 당시 서둘러서 성벽을 수리하면서 전통적은 읍성축성 방식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1957년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양원을 비롯한 명군 3000 여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관군 1000여명이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왜군은 고니시를 중심으로 56000여명의 대병력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성으로 집결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만여명의 민.관.군이 희생되었다. 남원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를 무혈입성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했으나 명랑해전으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읍성(사적 298호). 둘레 2.5 km 규모의 읍성으로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쌓은 것이라 한다. 중국읍성을 모방하여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읍성 축성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왜군_남원성_침공_작전도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가와가미 후사쿠니(川上久國)가 그린 남원성 침공 작전도(사진출처: 위키백과). 임진왜란 당시 남원성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중국식 읍성을 모방해서 만든 사각형 형태의 읍성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가 구성되어 있고,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있다. 성곽 바깥에는 해자를 파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은 잘 다듬을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쪽에는 흙으로 토축을 쌓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 축성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조총을 처음 접했던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 석축.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전통적인 방어시설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북쪽 모퉁이. 별도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읍성 북쪽으로 보이는 교룡산성. 읍성과 상호 연계하여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다. 한반도에서의 전통적인 방어전술은 지세가 험난한 산성을 이용하는 것이 적정하나 당시 읍성에 주력부대가 주둔하여 왜군의 대병력과 맞섰기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원성, 사적 298호, 전북 남원시 동충동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조선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 따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규모는 2.5 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 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오만 육천여 왜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만 여명에 달하는 성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 남았다고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조상들의 기상을 간직해 온 남원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 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4. 위키백과, 2019년

남원 만인의총(사적 272호),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이 함께 묻힌 곳

전북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만인의총(사적 272호)이다. 이곳은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이 전투에서 만여명의 조.명연합군과 백성들이 희생되었는데 임진왜란 직후 시신을 한곳에 묻었으며 광해군 때 (1612년) 충렬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무덤은 원래 남원역 부근에 있었는데 196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성역화하였다. 유적지에는 시신을 묻은 봉분, 죽은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세운 조형물, 기념관 등이 있다.

남원전투는 1957년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였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양원을 비롯한 명군 3000 여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관군 1000여명이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왜군은 고니시를 중심으로 56000여명의 대병력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성으로 집결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만여명의 민.관.군이 희생되었다. 남원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를 무혈입성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했으나 명랑해전으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 만인의총(사적 272호).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희생된 만여명이 함께 묻힌 무덤이다. 원래 주택가에 있었는데 1964년 사당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성역화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전투에서 희생된 8충신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처음 세워졌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내부

SANYO DIGITAL CAMERA만인의총 무덤.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만여명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SANYO DIGITAL CAMERA1964년에 세워진 ‘만인의총’ 비석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앞 기념 조형물

SANYO DIGITAL CAMERA만인의총 기념 비석

SANYO DIGITAL CAMERA전투가 벌어졌던 남원읍성(사적 298호).

만인의총, 사적 272호, 전북 남원시 향교동
이곳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을 합장한 무덤이다. 남원은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선조 30년(1597) 8월 오만 육천의 왜군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안에서는 정기원.이복남의 지휘 아래 민.관.군이 굳게 뭉쳐 성을 방어 하였다. 결국 성이 함락되어 거의 만명에 달하는 주민과 관.군이 죽음을 맞았다. 파괴 또한 극심하여 성안에는 겨우 민가 17가구만이 남았다. 난이 끝난 뛰에 순절한 이들을 한곳에 묻고 그들을 추무하는 사당을 지었다. 광해군이 이 사당을 충렬사라고 이름지었다. 근래에 무덤과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였다.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한 의로운 선조의 강직한 절개가 새삼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4. 위키백과, 2019년

전라도 김제군 관아, 동헌과 내아 (사적 482호)

전북 김제시 교동에 위치한 옛 김제군 관아이다. 관아터에는 김제군수가 근무하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 동헌에 딸린 작은 정자인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관아근처에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은 조선중기 숙종 때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으로 지방 관아 건물 중 비교적 큰 편이다. 살림집은 내아는 ‘ㄷ’자형 안채만 남아 있다. 피금각은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것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전남 담양에 있는 정철 후손들이 지은 송강정과 비슷하다.

김제는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특히 조선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다. 유력한 정치세력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파견된 지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관아 건물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내 서원이 많지 않아 향교도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시 도심에 남아 있는 옛 김제군 관아. 지방 관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군수 집무공간인 동헌.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헌 건물로 중앙부처나 감영 동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겹처마와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건축수법이나 자재가 고급스럽다. 농업생산력이 풍부했던 김제군 관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동헌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면. 한쪽에만 온돌방을 두고 있다.

김제동헌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맡아보던 청사로 동헌이라 하였다. 김제동헌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워 근민헌이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아 2007년 7월 3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근민헌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동헌 앞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피감각. 가운데 작은 온돌방을 두고 툇마루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군수로 재직할 때 지은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피금각.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편 김제군수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ㄷ’자형을 하고 있는 안채만 남아 있다. 가운데 중문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동헌 방향으로 방문과 툇마루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는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방관아 내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작은 부엌. 일반 주택에 비해 부엌이 작은 편이다.

김제 내아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관아는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이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이다. 김제 내아는 내동헌으로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문화재로서 현재는 동쪽이 트인 <ㄷ>자형 안채 건물 하나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내아로서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김제 관아에서 약 1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제향교. 중등교육기관을 담당하던 곳이다. 김제 지역에는 유력 양반세력이 없어 서원이 발달하지 않아 오랜 기간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제 옛 관아(동헌.내아), 사적 482호, 전북 김제시 교동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로서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현재 김제관에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실례가 되고 있다.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의 경우 1667년(현종 8) 김제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이라 칭하였으며,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1667년 이전에 이미 김제 동헌에 대한 시문이 전해지고 있어, 건립시기는 수령의 살림채인 내아(내동헌)과 함께 150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633년(인조 11)에 지어진 피금각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 재임 시 동헌에서 업무를 마친 후 가야금과 바둑, 서책을 읽으며 휴식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김제 관아는 현존하는 동헌, 내아, 피금각 이외에 외삼문과 내삼문, 호적고, 사령층 등이 김제지방도(1872년)에 보이며 외삼문의 경우 중층 문루형식에 상층엔 징벽루, 하층엔 벽지아문이라 편액하였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

김제 벽골제(사적 111호), 삼국시대 수리시설 유적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있는 벽골제(사적 111호)이다. 제천 의림지, 밀량 수산제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농업용 저수지로 금산사가 모악산에서 흘러 내려온 원평천이 동진강과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약 7 km 정도 떨어진 넓은 평야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비류왕 때(330)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때(790), 고려 현종과 인종 (1143)에 고쳐 쌓았으며, 조선 초 태종 때인 1415에 다시 쌓은 이후 무너져 사용하지 않고 있다.

현재 벽골제 유적지에는 약 3 km 정도의 제방과 수문 흔적 2곳이 남아 있다. 제방은 일제강점기에 농사에 필요한 수로를 만들때 고쳐 사용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 제방을 쌓은 이래 여러차례 수리를 하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 사용해 왔던 유서깊은 곳으로 당시의 높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 벽골제(사적 111호).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중 하나로 지금은 그 모습이 일부 바뀌기는 했지만 당시에 쌓은 토축의 일부가 잘 남아 있는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내문. 벽골제는 장생거가 있는 현위치 부근에서 남쪽 월승리 명승산까지 약 3.3 km에 이르는 큰 규모 제방을 쌓고 조성한 저수지였다. 장생거, 경장거를 비롯하여 5개의 수문이 있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제방. 흙으로 쌓은 토축으로 높이 3.3 ~ 4.3 m이며 상단폭은 10 m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절단하여 수로를 조성하면서 그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바깥쪽 제방을 쌓은 토축은 삼국시대에 조성한 것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5곳의 수문 중 남아 있는 수문 흔적인 장생거. 나머지 한곳 경장거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문은 길이 5.5 m 돌기둥을 4.2 간격으로 세우고 돌기둥 안쪽에 홈을파서 목제 둑판을 넣어 수위를 조절하는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수문 모형. 양쪽 제방 위에 올라 동시에 물레를 돌리면 수문이 열린다.

장생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의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한다. 그 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 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 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 1980년데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벽골제중수비 기록에 지방의 단면과 수문구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처럼 바라 보였다. … 또 양쪽 석주심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 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분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 13년(1415)이다. …”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제방 윗부분. 너비 10 m 정도이다. 일제강점기에 반으로 잘라 수로를 조성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원래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쪽. 넓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쪽 물을 가두어 두었던 저수지. 조선 초 세종 때 (1420년) 홍수로 무너진 후 복구하지 않고 농토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북쪽 끝 부분. 서해로 흘러드는 원평천과 만나는 지점이다. 현재 사용하는 있는 수문이 보인다.

김제 벽골제 사적111호21-20150807
벽골제 중수비. 조선초 벽골제를 다시 쌓으면서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지금은 닳아서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앞에 조성된 공원. 옛 수시시설 모형들을 설치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평야지대 논에서 사용되는 관개시설인 무자위이다. 염전에서는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공원 광장에 옮겨놓은  월촌입석.

월촌입석
입석은 마을의 입구에 세우져 재앙을 막아주는 수문신이자,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겨진 큰돌 문화재이다. 입석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남녀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임석에 감아둔 동아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 하여 다음 제사 때까지 1년 동안 손을 대지 않는다. 이 입석은 사각기둥형 자연석이며 높이는 210 cm, 폭 62 cm, 두께 40 cm이다.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매년 지평선축제 때 이곳 벽골제에서 입석줄다리기를 재현하고 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공원에서 볼 수 있는 ‘아리랑 문학비’

김제 벽골제, 사적 111호,
김제를 옛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렀다. 이는 벼의 골이라는 뜻으로 도향의 이름이다. 이러한 지명의 연유로 벽골제는 우리 고어로 벼골의 둑이 한자로써 벽골제라 표기된 것에 기한한 듯 하다. 국내 최고최대의 저수지인 벽골제는 금만평야를 비롯하여 정읍시, 부안군 등 1만 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제방의 길이는 3.3 km, 둑의 높이는 5.7 m, 상단폭 10 m, 하단폭 21 m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 관련문헌에 따르면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 고려 현종 (1010 ~ 1031년), 고려 인종 21년(1143), 조선 태종 15년(1415) 등 4차례에 걸쳐 개축하였으나 조선 세종 2년(1420) 홍수로 무너졌다. 그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였던 벽골제는 1963년 사적 111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기에 이르렀고, 1991년부터 벽골제개발사업이 착수되어 2만여평의 부지에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 단야각, 단야루, 테마연못, 되배미 등을 조성하였고, 수문은 5개 중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두 곳의 수문 석주가 남아 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정읍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과 만석보 옛터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와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만석보 옛터이다.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1894년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거한 후 백산으로 진출하였는데 전라감사가 보낸 관군과 이곳 황토현에서 대치하였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은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국내 및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적지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사당과 기념관, 기념물 등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읍 황토현전적(사적 295호).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황토현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고부읍치 북쪽 넓은 들판을 내려보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기념관과 사당 등이 전적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사당.

SANYO DIGITAL CAMERA동학농민운동 기념관

황토현 전적지, 사적 295호,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 곳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농민군은 1894년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응징했다. 그러나 사태 진정시키러 온 정부관리는 모든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리며 그들을 탄압했다. 이에 수만 명의 농민군은 고부 북쪽의 백산에 집결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한다는 기치 아래 번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농민군은 1894년 5월 11일 새벽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이곳은 동학 농민군이 남긴 정신과 함께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참뜻을 전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8년)

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었던 보가 있던 곳이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보를 쌓고 물세를 거두어 들였다. 당시 고부군수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만석보를 때려 부수고 조병갑을 응징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류쪽에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었는데 조병갑이 수세를 걷기 위해 이곳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쌓았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상류쪽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조감도.

SANYO DIGITAL CAMERA동진강 제방

SANYO DIGITAL CAMERA제방 바깥쪽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호남평야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

만석보터,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1893)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水稅)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에서 서쪽으로 4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봉준 고택(사적 293호)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