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사적

순천 낙안읍성(사적 302호), 왜구 침입을 대비하여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읍성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사적 302호)이다. 조선시대 옛 낙안관 읍치를 둘러싸고 전형적인 읍성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로 처음에는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이었으나, 세종대 이후 돌로 다시 쌓았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큰 길을 중심으로 북쪽에 관아와 부속 건물들이, 남쪽에 향리계층을 비롯하여 읍치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의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다.  읍성의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며, 객사를 비롯한 관아건물들과 민가들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낙안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둘레 1,410 m이며, 동서로 직선 거리 약 500 m, 남북으로 약 400 m 정도이다. 동.서.남문을 두고 있으며, 성문 앞에는 적의 공격을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옹성을 두고 있다. 성벽 바깥쪽에는 해자를 두고 있으며, 동문 양쪽에 2개씩 돌출된 방어시설인 치성을 두고 있고, 남문 서쪽편 언덕이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읍성내에는 비상시 식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큰 우물과 연못을 두고 있다. 성문 주위를 제외하고는 성벽 위에 조총공격에 대비한 여장을 두지 않는 등 조선전기 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동문과 문루인 낙풍루. 목조건축물인 문루를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거식 성문이다. 성문 앞에 옹성을 쌓아 개거식 성문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배치도. 전체적으로 서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성문으로는 동.서.남문을 두고 있다. 동문 좌.우와 모퉁이에 바깥으로 돌출된 치성 4곳을 두고 있다.남문 서쪽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는데 전투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을 나서면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동문 옆 성벽. 성벽은 커다란 돌을 잘 다듬어 석축을 쌓은 석성이다. 성문 주위를 제외하고는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앞쪽에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물이 흐를 수 있는 해자를 파서 방어력을 보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앞 해자를 건너는돌다리.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안쪽에서 본 낙풍루.

OLYMPUS DIGITAL CAMERA낙풍루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동문에서 서문으로 연결되는 큰길. 낙풍루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큰길 북쪽으로 관아 등이, 남쪽으로 민가들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편 성벽과 치성. 성벽 위에 방어시설인 여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조선전기 읍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북쪽편 성벽. 성문 옆에는 깃발을 세워둔 여장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북쪽편에 있는 바깥으로 돌출된 방어시설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치성에서 보이는 동문과 주위 성벽. 성벽 앞으로 해자를 파 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고 방어력을 보완하고 있다. 성벽과 해자 사이에 서민들이 살았던 작은 초가집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북동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낙안읍성은 동문 방향이 왜구의 예상 침입로인 벌교 방향과 연결되기 때문에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동문 주위에만 4곳의 치성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북쪽 성벽. 관아 뒷편으로 성문을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으로는 군사훈련을 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넓은 공간이 있다. 동문 주위와는 달리 해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벽. 안쪽에서도 돌로 쌓은 견고한 석축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성벽 바깥으로는 순천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관아 건물인 객사. 관아 건물 중 원형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사적지로 바뀌면서 복원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뒷편 성벽. 성벽길 너비가 꽤 넓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뒷편을 지나 서문으로 연결되는 성벽길. 멀리 장대로 사용되었던 언덕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서문. 원래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문루를 두고 있지는 않다. 방어시설로 성문 앞에 옹성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문에서 장대역할을 했던 서남쪽 언덕으로 연결되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서문. 양쪽에 성벽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 안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언덕으로 오르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중 가장 높은 곳에서 위치한 언덕. 보통 이곳에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를 두는데 낙안읍성에는 장대를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언덕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양쪽으로 낙안읍성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의 민가들이 보인다. 낙안읍성을 대표하는 명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 성벽에서 보이는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남문과 문루인 쌍청루. 전형적인 개거식 성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쪽에는 상당히 견고한 옹성을 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문루인 쌍청루.

OLYMPUS DIGITAL CAMERA성문의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성문 앞에 쌓은 옹성.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앞쪽으로는 낙안벌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치성에서 보이는 성밖 마을과 장대역할을 했던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동남쪽 모서리로 이어지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남쪽 성벽. 멀리 모퉁이에 설치해 놓은 치성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남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성벽 안쪽으로는 비상시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연못과 우물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못 한쪽편에 있는 우물.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바깥으로 물길을 연결시켜주는 작은 수문.

낙안읍성, 사적 302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대리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들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된 곳으로 특히 성 안에는 전통적인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읍성은 고려 후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어 조선 태조 6년(1397)에 흙으로 쌓았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6년(1424)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아 성의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 전체 모양은 장방형이며 길이는 1,410 m이다. 동.서.남쪽 3곳에는 성 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4군데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 안에는 90여 가구의 민가들이 있는데, 보통 1가구당 2~3채의 초가집과 마당, 텃밭으로 구성되었다. 초가집들은 3칸 정도의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그리고 농기구 등을 보관하거나 외양간으로 겸용하는 헛간채와 재래변소로 이용하는 잿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대화 물결에 따라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변형되기 시작하였고, 성의 일부가 점진적으로 붕괴 소실됨에 따라 1983년 사적 제302호로 지정하고 읍성의 종합적인 보존사업을 시작하였다. 특히 백성들이 살던 초가집들 가운데 보존가치가 가장 높은 9동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였고, 일부 변형되었거나 낡은 집들은 복원.수리하였다. 관청터에서는 관아와 객사 주변의 담장.월대.삼문 등을 발굴.복원하고 성곽과 문루 등을 복원하였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이 마을 중앙에는 선정을 베풀었던 군수 임경업(1594~1646)의 선정비가 있고, 600여년 이상된 노거수 은행나무가 마을을 수호한다고 믿고 매년 추모.당제를 지내고 있다. 동문 밖 1 km거리에는 낙안향교가 있어 예전에는 이 지역 선비들을 양성하였으나, 지금은 당시의 풍속과 생활문화를 전하고 있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1.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순천 조계산 송광사(사적 506호), 고려중기 불교개혁 이후 한국 불교를 이끌어 온 승보사찰

전남 순천시 조계산 자락에 위치한 송광사(松廣寺, 사적 506호)이다.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와 함께 3대사찰로 여겨지며 수행을 중시하는 승보사찰로 불리우고 있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길상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었는데, 고려중기 보조국사가 불교개혁 운동인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송광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유서깊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탑이나 불상같은 조형미가 뛰어난 불교 예술품들은 많지 않은 반면,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국사전을 비롯하여 고려 이후 불교 관련 유물들을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송광사는 크고 작은 불전들이 불전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크거나 유서깊은 내력을 가진 불전은 많지 않다. 반면에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인 승방이나 요사채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를 대표하는 국사전(국보 56호)도 원래는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었으며, 고려말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는 하사당(보물 263호) 또한 승려들이 수행했던 공간이다. 전성기 때 송광사에는 많은 승방들과 사찰 관련 일을 보던 사람들이 살던 건물들로 아주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송광사의 많은 전각들은 1842년의 화재와 한국전쟁 등으로 많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여러차례 중창을 통해 옛규모를 찾아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는 조계산 계곡 내 비교적 평탄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가운데 대웅전을 비롯한 부처님을 모신 불전이 있으며 그 주위로 수행공간들이 고루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가람배치 모형. 남향을 하고 있지만 축대를 쌓아 공간을 조성하여 질서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사찰 가람배치와는 달리 동.서로 흘러내리는 계곡을 중심으로 전각을 배치하여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주고 있다. 입지조건이나 가람배치 등에 있어 수행중심 공간으로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송광사지도.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이 지도는 <송광사사적>에 실려있는 가람배치도이다. 조선후기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뒷편 언덕에 있는 보조국사 감로탑. 고려중기 불교개혁 운동을 이끈 보조국사 지눌의 승탑이다. 조형미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불교역사에서 차지하는 지눌의 승탑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제1세 보조국사 지눌(1158 ~ 1210) 영정.

국사는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성은 정씨고, 자호는 목우자이다. 8세 때 종휘선사에게 출가하였다. 길상사에서 정혜결사 운동을 하며 불교계의 중흥을 이끌었고, 산 이름을 조계산, 절 이름을 수선사로 고쳤다. 진영 상단에 ‘원력수행해동불일보조국사’라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원력수생, 즉 대승보살행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하단의 화기를 통해 1780년 16국사의 진영을 완성하여 영당에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국사의 탑은 송광사 관음전 뒤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
조계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僧寶宗刹)의 근본도량으로서, 한국불교와 역사를 함께해온 유서 깊은 고찰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되어 송광산 길상사라고 하였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9년 동안의 중창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도량으로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후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해 16분의 국사가 주석했던 선종사찰로, 오늘날까지도 승보종찰로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사찰로 여겨지고 있다. 그 동안 정유재란 및 임인년(헌종 8년, 1842년)의 대화재,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8차례의 대규모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불교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국보 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43호), 국사전(국보 56호), 금동요령(보물 179호), 하사당(보물 263호) 소조사천왕상(보물 1467호) 등을 비롯해 총 8천여점의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들어가는 길

송광사는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진 숲길을 걸어서 들어 갈 수 있다. 들어가는 길은 수목이 우거지고, 옆으로는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고즈넉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주는 길로 사찰 들어가는 길 중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길이다. 일주문은 사찰을 출입하는 통로인 삼청교 앞에 세워져 있으며, 사찰 앞을 흐르는 개울이 송광사와 속세와 분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울 바깥쪽에는 세속적인 의미를 갖는 공간인 세월각과 척주당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입구 매표소. 원래부터 사찰에 있던 공간은 아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들어가는 길. 계곡을 따라 10여분을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울창한 숲과 계곡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계곡.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경내 입구. 멀리 첫번째 출입문인 일주문이 보이고, 주변에 당간지주,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조계문. 일주문은 보통 매표소 부근에 위치있는데 송광사에서는 천왕문을 들어가기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 19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사찰 일주문 중에서는 꽤 오래된 편이다. 양쪽에 담장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조계문 안쪽에 있는 작은 사당 형태의 건물인 세월각과 척주당. 토속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사찰영역 바깥쪽이라 할 수 있는 계곡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

세월각.척주당, 19세기초
일주문 안쪽에 죽은 자의 위패를 두고 그 영혼이 속세의 때를 벗는 관욕처(관욕: 불교에서 재를 올릴 때 영혼을 정화하는 일)로 세월각과 척주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혼백을 목욕시켰으며, 세월각은 여자 영가, 척주당은 남자 영가의 관욕처로 사용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작은 건물이다. 두 건물의 내부는 비어 있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삼청교와 우화각 주변

송광사에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천왕문 앞 홍예가 설치된 다리인 삼청교 주변일 것이다. 삼청교는 홍예 형태로 쌓은 돌다리로 건축수법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계곡과 주위 건물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삼청교를 건너면 사찰 출입문인 천왕문이 있으며 왼쪽에는 요사채인 임경당이, 오른쪽에는 강당건물인 사자루가 배치되어 있다. 두 건물 모두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손꼽히는 삼청교 주변. 사찰이라기 보다는 선비들이 경치좋은 곳에 세워 풍류를 즐겼던 정자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경내 출입문인 천왕문 앞 개울에 세워진 돌다리. 그 위에 지붕이 있는 건물을 올려 정자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돌다리 위에 세워진 건물인 우화각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삼청교 위쪽으로는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강당 건물인 사자루가 있다. 강당은 대웅전 앞에 문루 형태로 세우는 것이 보통인데, 송광사에서는 천왕문 오른편에 강당을 배치하고 있다.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계곡 옆에 기둥 세우고 건물을 올렸다.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사자루. 원래는 신도들이 잠시 앉아 쉬거나 강론을 듣는 공간인데, 지금은 평상시 문이 닫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청교 아래쪽에 위치한 요사채인 임경당. 계곡으로 돌출된 누마루를 두고 있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건물이다. 선비들이 즐기던 정자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로 이곳을 찾은 고위 인사들의 숙소로 지어진 건물로 여겨진다.

OLYMPUS DIGITAL CAMERA경내를 출입하는 천왕문. 내부에는 소조사천왕상(보물 1467호)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복장유물(보물 1468호)가 발견되었다.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불전들

송광사는 고려중기 이후 수행도량으로 한국 불교를 이끌어온 사찰이다. 그러나 사찰의 명성이나 내력, 규모 등에 비해 불전의 규모는 크지 않은편이며 오래된 내력을 보여주지도 않고 있다. 대웅전 앞 작은 불전인 약사전(보물 302호), 영산전(보물 303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근에 중창되었으며, 그 규모 또한 크지 않은 편이다. 불전들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승보전과 지장전, 앞쪽에 약사전과 영산전, 뒷편에 관음전이 배치되어 있다. 불전의 공간배치에 있어 규칙성은 거의 없는 편이며, 당시의 필요에 따라 불전들이 자연스럽게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는 문루형태의 출입문인 범종각. 일반적인 사찰의 공간배치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주불전인 대웅보전. 최근에 크게 중창한 불전으로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평지보다 약간 높게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웅장함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 수행사찰로서 특징을 잘 보여주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왼쪽편에 있는 승보전. 원래 대웅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현재의 대웅전을 크게 중창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석가모니를 비롯하여 나한, 비구 등을 모시는 불전으로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불전이다. 나한전과 비슷한 성격의 불전으로 볼 수 있다.

송광사 승보전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제가, 16나한을 비롯한1250몀의 스님을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대웅전을 송광사 7차 중창 당시에 복원하면서 지어졌으나 송광사 8차중창때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국사전.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마당 한쪽편에 있는 약사전(보물 302호)과 영산전(보물 303호). 공간을 분리하는 담장은 없지만 대웅전 영역과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약사전(보물 302호).  앞면과 옆면이 각 1칸씩으로 현존하는 불전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건물 형태 등으로 볼 때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영산전(보물 303호).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와 영산대회 그림(보물 1368호)를 모시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중기 인조 때(1639년)에 지어졌으며 그후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관음전. 구한말 왕실 기도처로 지어진 건물로 지금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한말 건축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건물이다.

송광사 관음전
관음전은 본래 성수전(聖壽殿)이라 하여 1903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린 황실 기도처로 건축되었으나 1957년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세음 보살님을 옮겨 모시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세음보살 좌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고 내부 벽화에 문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불단을 향해 서 있다. 또한 내외벽에는 화조도, 산수화 등이 그려져 일반 사찰의 벽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송광사 관음전의 특징이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국사전을 비롯한 수행공간

송광사는 수행도량이라는 사찰의 성격에 걸맞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크고 작은 요사채 건물들을 두고 있다. 대웅전 뒷편 언덕에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국사전(국보 56호)를 중심으로 하사당(보물 263호), 상사당, 응진당, 시자실, 설법전 등 유서깊은 요사채 건물들이 모여 있는데 이 공간은 담장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수행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웅전 서쪽으로 대지전, 중현당,도성당,응향각,응현당 등 많은 요사채 건물들이 있으며 사찰 바깥으로도 여러동의 요사채 건물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 대웅전 뒷편 언덕에는 국사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요사채들이 모여 수행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국사전 국보56호 02-20181219송광사 국사전(국보 56호). 고려말 승방으로 지어진 건물로 지금은 고승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주심포계인데, 고려말 주심포에서 익공형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뒷편으로 보이는 설법전.

OLYMPUS DIGITAL CAMERA국사당과 함께 승보사찰로서 송광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건물인 하사당(보물 263호)이다. 송광사의 많은 요사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븡을 하고 있는데, 부엌 위에 환기구를 두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국사당과 함께 조선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승려들이 수행했던 공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수행공간. 하사당, 상사당, 응진당, 시자실, 설법전, 수선사 등 승려들이 수행하는 크고 작은 승방 건물들이 모여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하사당 뒷편 우물.

OLYMPUS DIGITAL CAMERA지장전 뒷편 수행공간을 들어가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지장전 뒷편에 있는 요사채인 해청당.

OLYMPUS DIGITAL CAMERA영산전 앞쪽에 모여 있는 요사채들. 정혜사를 비롯하여 여러동의 요사채들이 모여 있다. 강당인 사자루와 함께 송광사를 찾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약사전 앞 마당에 있는 2칸짜리 작은 요사채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승보전 뒷편에 모여 있는 요사채들. 국제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바깥쪽에 있는 큰 규모의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의 명소 중 한곳인 해우소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송광사에 많은 승려들이 머물면서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인 비사리구시.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찾은 손님들을 위해 밥을 담아두는 곳이다. 약 4천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비사리구시
송광사 비사리구시는 1724년 남원에서 태풍에 쓰러진 싸리나무를 옮겨와 만들어 졌다고 하나 사실은 보성군 문덕면 내동리 후곡(너문골) 봉갑사 인근 마을의 느티나무(귀목)이다. 그 쓰임새는 국가 제사시에 대중을 위해 밥을 담아 두는 것으로, 쌀 7 가마(4천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송광사 이외에도 비슷한 용도를 지닌 구시가 있으나 많은 사찰들에서는 종이를 만드는 일에 지통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상광사의 경우에는 여러 근거로 지통이 아니라 밥통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송광사 3대 명물로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가 있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 정유재란 말 조.명연합군 수군이 주둔했던 곳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있는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114호)이다. 이곳은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 충무공이 이끌었던 조선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진을 치고 머물렀던 곳으로 사실상 조.명연합군의 해군본부였다. 현재는 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인 충무사와 그가 죽은 후 잠시 묻혔던 가묘터가 남아 있다. 묘당도는 고금도 끝에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의 일부분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진린이 세웠던 관왕묘가 있었다. 정유재란 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진린은 그의 유해를 이곳에 모시시고 장례를 치렀다. 이후 17세기부터 관왕묘에 이순신장군과 진린장군을 같이 모시고 제사를 올려왔다.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없어지고 제사가 중단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사당을 세우고 충무공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 고금도 동쪽끝에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고금도의 일부부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무공 가묘 유허,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서 전사후 관음포에 올려졌고 남해 충렬사에 잠시 묻혔다가 이곳을 거쳐 충남 아산으로 옮겨졌다. 조.명연합군 수군 본영이 있었던 것으로 명나라 수군을 이끌었던 진린이 주도하여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가묘 유허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을 임시로 안장하였던 터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고금도에서 수군본영을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고 전선을 건조.수리하는 등 군비를 재정비하여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다.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본영이었던 이곳에 80여일간 안장한 후 이듬해에 충남 아산으로 옮겼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가묘 유허 아래에 있는 재실로 보이는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앞 바다. 앞쪽에 작은 섬들이 막고 있어 파도가 거의 없어 파도를 피하기 좋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북쪽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으로 보이는 바다. 사방이 섬으로 둘러 싸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충무사 외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충무공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원래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으며, 그 앞쪽에 충무공과 진린을 모신 동.서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없어지고 지금은 해방 이후 다시 세운 충무공만을 모신 사당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무사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에 딸린 건물.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관왕묘비. 이곳에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석은 숙종 39년(1713)에 세운 것으로, 관왕묘의 창건 이후의 내용을 기록한 비로, 명나라 수장이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여기서 경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53 cm, 폭 93 cm, 두께 20 cm이다. 비각은 정.측면 1칸의 팔작집으로 원형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충무사 사당 아래 해안. 울창한 상록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114호,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묘당도 일원은 본래 진린 장군이 건립한 ‘관왕묘’였으며, 관우 장군을 사당에 모시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던 곳이다.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이곳 (월송대)에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1666년, 동무에 진린 장군을 모셨으며, 1683년에 서무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 1791년 정조가 관왕묘에 ‘타보묘’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1792년 동무에 명나라 부총관 등자룡 장군을 함께 모셨다. 일제강점시기(1940년대 초)에 유물이 훼손되고 제사가 중단되었으며, 사당이 황폐화 되었다. 1947년 11월 19일 사당에 이신신 장군만을 모시고 다시 제향하기 시작했다. 1953년 사당을 증건하고, 사당 명칭을 ‘충무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당 내에는 숙종 39년 건립한 관왕묘비가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명나라 진린 장군이 혈서로 애도문을 쓰고 명나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영주 소수서원(사적 55호), 안향을 모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55호)이다.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웠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국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중국 당나라 때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답게 건물이 크고 그 숫자다 많은 편이다. 경사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강학공간과 제향향공간이 배치되는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죽계천변에 옛 절터에 여러 건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강학공간을 동쪽에, 제향공간을 서쪽에 두고 있는 동학서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의 중심에는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학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와 서고, 전사청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안향 등 을 모신 사당인 문성공묘가 배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주 소수서원(사적 55호). 숙수사란 사찰이 있던 곳에 강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해 유행들이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이 크고 많은 편이다.

소수서원 들어가는 길

소수서원은 안향이 머물렀던 숙수사란 절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동쪽으로 죽계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나즈막한 언덕이 있으며, 학자수라 불리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솔밭길에는 절터임을 말해주는 당간지주를 볼 수 있으며, 죽계천 너머로 옛사람들이 쉬었던 취한대란 작은 정자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소수서원 입구.

SANYO DIGITAL CAMERA소수서원 서쪽 낮은 둔덕에는 학자수라 불리는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원 들어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59호).

SANYO DIGITAL CAMERA서원 동쪽으로 흐르는 죽계천. 고려말 유학자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되는 하천이다.

SANYO DIGITAL CAMERA죽계천 옆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취한대.

SANYO DIGITAL CAMERA소수서원 출입문. 후대 서원과는 달리 솟을삼문이나 문루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작은 협문을 두고 있다. 그 앞에은 제사에 올리던 제물을 잡던 성생단이 있다.

진입영역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가 있다. 서원 정문인 지도문 앞 잔듸 제단은 성생단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경령점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 황기로의 현판이 남아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강학공간

소수서원은 후학양성을 위해 세워진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강당 건물인 강학당(보물 1403호)를 중심으로 여러동의 건물들을 두고 있다. 유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는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문의 단계에 따라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평상시 많은 유생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강학공간 한쪽편에는 도서관 격인 장서각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강학당(보물 1403호). 앞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궁궐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겹처마를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당 내부.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이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의 건의로 국왕으로 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SANYO DIGITAL CAMERA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 중 가장 낮은 단계인 지락당. 앞면 3칸 건물로 온돌방 1칸, 마루 2칸으로 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두번째 단계인 학구재. 앞면 3칸짜리 건물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 1칸씩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3번째와 4번째 단계 유생들이 머무는 일신재와 직방재이다. 앞면 6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SANYO DIGITAL CAMERA서적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서각.

SANYO DIGITAL CAMERA일영대.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자연속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강학영역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보물 1403호)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제향공간

소수서원은 고려 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인 문성공묘(보물 1402호)과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후대 서원과는 달리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에 사당을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사당 뒷편에는 안향초상(국보 111호)와 주세붕초상(보물 717호)를 모시기 위한 건물인 영정각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원 동쪽편에 위치한 사당인 문성공묘(보물 1402호).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도 소박하며 공간도 넓게 쓰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뒷편에 있는 전사청.

SANYO DIGITAL CAMERA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영정각. 1970년대에 세워진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료대와 관세대.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들이다.

제향영역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보물 1402호)와 전사청, 영정각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의 제사를 지낸다. 문성공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안향초상(국보 111호)과 주세붕초상(보물 717호) 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서원 뒷편에 있는 사료관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받았다. 서원은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 등의 건물이 있고 제향공간에는 문성공묘, 전사청, 영정각 등이 있다.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서원 안팎으로 당간지주 등 숙수사 유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안동 도산서원(사적 170호),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건축을 대표하는 서원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170호)이다. 퇴계 이황을 모시기 위해 조선중기 선조 7년(1574)에 세워진 서원으로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선조는 명필 한석봉이 쓴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때 월천 조목이 배향되었다. 퇴계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류성룡, 김성일이 있는데 이들 또한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처음에는 이들과 함께 인근 호계서원에 모셔졌으나 두사람의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 지역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어 류성룡은 하회마을 인근의 병산 서원에, 김성일은 임천서원에 따로 모셨다.

도산서원은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한곳이다. 1970년에 성역화 사업으로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 도서관인 광명실에는 약 5000여권의 장서가 있었으며, 장판각에는 2790여판의 목판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전시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동 도산서원(사적 170호). 퇴계 이황을 모신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장소이면서도 서원 건축을 대표하는 곳으로도 의미가 큰 곳이다.

주요 건물로는 퇴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상덕사(보물 211호), 강학공간 중심건물로 강당인 전교당(보물 210호). 기숙사인 동.서재. 서적을 보관하는 광명실과 장판각, 이황이 직접 세웠으며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부속 건물 등이 있다. 선현을 모시고 후진을 양성하는 서원 본래의 기능에서도 대표적인 서원이면서도, 서원 건축 측면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곳이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계단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서원내 어디에서든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들어가는 길.

낙동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학문을 수양하는 서원으로서는 입지가 상당히 좋은 곳에 있다.  민가와는 상당이 떨어져 있는 숲속에 있으면서도 낙동간 너머 넓은 벌판이 있어서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세상을 보면서 치세를 고민할 수 있는 장소이다.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원 들어가는 숲길.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

SANYO DIGITAL CAMERA낙동강 너머로 꽤 넓은 벌판이 있고, 민가들이 많은 마을도 볼 수 있다. 마을과는 낙동강으로 막혀 있어서 멀리 떨어진 듯 하면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낙동강 건너편에는 조선후기 정조 때 이곳 시행한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시사단을 볼 수 있다.

시사단
강 건너편 비각은 조선시대 지방별과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조대왕께서 퇴계 이황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그 16년(1792)에 관원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다음날 이곳 송림에서 어제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는 7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체재공이 지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 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의 자리를 표해두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원 앞 마당. 서원의 오랜 내력을 말해주는 고목들을 여럿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마당에 있는 우물인 열정.

열정(冽井)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로 역경의 정괘 ‘정렬한천식’에서 의미를 취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도 옮겨가지도 못하고, 퍼내어도 줄지 않는다. 이처럼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해야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고목. 퇴계 이황이 산책을 했던 길이 고목 뒷편에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고목 뒷편 퇴계 이황이 산책을 즐겼던 언덕인 천연대.

천연대
퇴계 선생께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고 심성수양을 위해 산책하시던 곳이다. 『시경』 중의 ‘하늘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에서 인용하여 천연대라 이름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서원 출입문. 누각이나 솟을삼문이 있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서원의 풍경을 가리지 않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당, 퇴계 이황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

정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중심영역으로 강학공간까지는 계단식으로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퇴계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는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도산서당이 있고 서쪽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소인 하고직사, 강당 역할을 했던 역락서재가 있다. 후에 도산서원으로 바뀔때 옛 건물들은 그대로 두고 뒷편에 강학공간과 사당을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정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을 대표하는 장면인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진 전교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길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쪽편에 자리한 도산서당. 퇴계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직접 지은 건물로 앞면 3칸 규모의 소박한 건물이다. 왼쪽에 퇴계가 주로 머물렀던 작은 온돌방이 있으며, 오른편에 대청마루가 있다.

도산서당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라 하였고, 마루는 ‘암서헌’이라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당 대청마루.

SANYO DIGITAL CAMERA마당 한편에 있는 연못인 ‘정우당’. 퇴계선생은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우당
퇴계 선생은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당 마당에 있는 작은 우물인 ‘몽천’.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당 동쪽편에 있는 작은 화단. ‘절우사’라고 불리우며 이 곳에 매,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퇴계선생이 직접 가꾸셨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절우사에서 본 도산서당.

SANYO DIGITAL CAMERA서쪽편에 있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농운정사이다. 도산서원은 강당인 전교당 아래에 동.서재가 있지만, 이 곳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서원내에는 농운정사외에도 역락서재라는 별도의 건물이 있으며, 다른 서원에 비해서 고직사 건물또한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아마도 전국각처에서 도산서원을 찾아온 선비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농운정사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자 모양으로 짓도록 하였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라 하였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농운정사 옆쪽에 있는  역락서재. 퇴계가 도산서당에 머물때 제자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서원을 찾은 손님들이 묵는 장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락서재
퇴계 선생께서 도산서당에서 학물을 강론할 때 정사성을 비롯한 제자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출입문에서 내려다 본 모습. 건물배치와 정원이 아름답다.

강학공간

도산서원 강학공간은 서원 뒷편 높은 곳에 있는데 상덕사를 앞쪽에는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멀리까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당건물인 전교당(보물 210호)를 비롯하여 동.서재, 도서관에 해당하는 많은 서적들을 보관했던 동.서광명실,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강학공간 건물들은 퇴계가 직접 세운 것은 아니고 그의 사후 서원으로 바뀌면서 지어졌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출입문인 진도문.

SANYO DIGITAL CAMERA진도문 동쪽에 있는 누각 형태의 건물인 동광명실. 서적을 보관하던 도서관 건물로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주위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었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서쪽편에 있는 서광명실.

광명실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었다. 광명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 준다.”는 뜻이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중심건물인 전교당(보물 210호). 앞쪽에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멀리 낙동강의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온돌방 1칸과 앞면 3칸의 넓은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도산서원’이라 적힌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로 선조가 내린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전교당 대청마루. 앞쪽에 문을 달고 있지 않아 바람이 시원하며 멀리 낙동강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출입문 지붕을 크게 만들어 경치를 약간 가리고 있는데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SANYO DIGITAL CAMERA맞은편 서재.

동.서재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편 건물을 ‘박약재’라 하고, 서편 건물을 ‘홍의재’라 한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동재 뒷편에 있는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

장판각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선조어필, 퇴계선생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제향공간

상덕사(보물 211호)는 도산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인 조목 선생의 위패와 같이 모셔져 있다. 원래 퇴계 이황선생의 모신 서원은 안동 월곡면에 있었던 호계서원이었으나, 지역 유림들의 발의로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상덕사 출입문. 도산서원이 세워질 때 지어진 건물로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에 제사 준비를 하는 공간인 퇴간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옆에 있는 전사청.

고직사, 서원 관리인이 머무는 살림집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인 고직사는 강학공간 옆에 있는 상고직사와 농운정사 뒷편에 있는 하고직사가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 규모도 크고 방의 숫자 또한 많은편이다. 서원이 주변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지방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묵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옆에 있는 상고직사. ‘ㅁ’자형 평면배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살림집 형태이다.

SANYO DIGITAL CAMERA상고직사에는 제사 준비를 하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양쪽으로 제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많은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상고직사 출입문과 문간방.

SANYO DIGITAL CAMERA상고직사에서 내려다 본 풍경.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다.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당 기숙사였던 농운정사 뒷편에 있는 하고직사. 손님들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원에서 1.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퇴계종택

<출처>

  1.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