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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구지봉(사적), 금관가야 건국 설화가 있는 곳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사적)이다. 김해박물관 뒷편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가야 건국 설화가 있는 곳이자 우리나라 최초 서사시인 <구지가(龜旨歌)>의 무대이다. 구지봉은 뒷편에 있는 산과 함께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목부분에 수로왕비릉(사적)이 자리잡고 있다. 구지봉 정상에는 청동기시대 남방식 고인돌이 있어 오랜세월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 상석에는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해 구지봉(사적)>

금관가야<위성사진>

구지봉은 낮은 봉우리로 김해박물관 마당이나, 수로왕비릉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정상부에 올라가면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남근석과 한석봉 글씨가 있는 고인돌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왕왕비릉 옆에서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릉(사적)>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정상 아래>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고인돌>

구지봉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지하에 깬 돌로 쌓거나 돌판을 상자를 짠 무덤칸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작은 받침돌로 큰돌을 지탱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구지봉 정상부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규모는 240 x 210 x 100 cm 로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 수 없으나, 주변엔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 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에 새겨진 구지봉석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구지봉은 김해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 옆에 자리잡고 있다. 지배층 무덤인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군, 주거 유적인 봉황대가 해반천을 따라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박물관에서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해반천 옆에서 멀리 보이는 구지봉>

가락국기(駕洛國記)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身長)은 아홉 자나 되었으니 은(殷)의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처럼 생겼으니 한(漢)의 고조(高祖)와 같고, 눈썹에는 팔채(八彩)가 있으니 당(唐)의 요(堯)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으니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한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 <생략> –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가락국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김해구지봉, 사적, 경남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龜首峯), 구봉(龜峰) 등으로도 불리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 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개의 알을 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지 10여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을 세운 분으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금관가야 수로왕비의 무덤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사적)이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다. 수로왕비는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배를 타고 건너와 왕비가 되었으며,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은 허씨 성을 주었으며 김해허씨는 그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무덤 옆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돌로 세워진 파사석탑이 남아 있다. 도심에 있는 수로왕릉과는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수로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생략 ~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註 496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 생략 ~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생략 ~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가락국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능역은 조선초 세종 때(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성역화되어다. 봉분의 규모가 크지 않으며 봉분을 두른 호석은 없다. 능비와 상석은 조선 중기 인조 때(1647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고 한다. 무덤 주위에는 높이 5m 정도의 담장이 있다. 왕릉에 속하지만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능역>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무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능역내에서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과 관리인이 머무는 고직사가 부속건물로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재실과 고직사>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바다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종류의 돌이라고 한다. 인근 사찰에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파사석탑 보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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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원래 바다를 항해할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배의 바닥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과학적 분석결과 파사석은 붉은 빛이 도는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암질인 것이 밝혀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4<정면에서 본 모습>

파사석탑
이 석탑은 <삼국유사> 등 고서에 수로왕비 허황옥이 48년(수로왕 7)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탑의 부재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으로 불리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으나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註 183 호계사(虎溪寺)註 184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DB주석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註 185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註 186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 아도(阿道) 눌지왕(訥祇王)의 시대로 법흥왕대의 전이다.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註 187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금관성파사석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수로왕비릉은 금관가야 건국설화  “구지가”와 관련된 구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이며, 수로왕비릉이 자리한 위치는 목부분에 해당한다. 남쪽의 수로왕릉과는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 구지봉을 지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에서 보이는 수로왕비릉>

김해 수로왕비릉, 사적, 경남 김해시 구산동
김해시내 북단에 위치한 이 곳은 가락국 수로왕비의 능이다. 분산(盆山)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동쪽 100m 지점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있다. 조선시대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된 것이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이라 새겨져 있다.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 홍살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이 석탑음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에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데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들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사적)이다. 금관가야 무덤들로 길이 약 300m, 높이 20m 정도의 낮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데  다른 가야 고분과는 달리 봉분을 크게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조성된 무덤들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중국제 거울, 북방계 말갖춤, 방패형동기, 호랑이모양 띠고리, 청동솥 등이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은 당시 한.중.일 문화교류에서 금관가야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대성동 고분군은 구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 동쪽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평지 또는 해발 20m의 낮은 구릉꼭대기에 크지 않은 규모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무덤(수로왕릉)이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무덤들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 북쪽에는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대성동박물관이 있다. 금관가야 중심부인 봉황대 유적(사적)이 남쪽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해반천 옆 도로에서 보이는 대성동 고분군>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유적지 북쪽 평지에서 발견된 29호분과 39분은 발굴되었던 상태로 복원하여 노출전시관으로 조성해 놓고 있다. 29호 무덤은 3세기 후반에, 39호분은 이보다 100년 늦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29호 무덤은 가야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회청색의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오르도스형 청동솥 등이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내부의 29호분과 39호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0<김해 대성동 29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3세기,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대성동 29호묘(3세기)
김해 양동리 고분이 2세기 가락국(구야국)의 중심이었다면 3세기에는 김해 대성동으로 중심이 이동합니다. 대성동에서 확인된 첫 번째 왕의 무덤이 29호묘입니다. 내부에서는 북방의 오르도스동복,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등이 처음으로 확인이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OLYMPUS DIGITAL CAMERA<39호 무덤 부곽과 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9호 무덤>

노출전시관
노출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무덤 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 전시하여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축조 방법과 유물 부장상태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29호분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왕묘로 추정되는 주요한 무덤이며 청동솥, 최초의 가야 도질토기 등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39호분은 이보다 100년 정도 늦은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29호분을 일부 파괴하고 축조하였다. 이러한 무덤간의 중복축조는 대성동고분을 비롯한 금관가야 무덤축조 방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세력교체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대성동고분군의 무덤들은 대부분 구릉 정상부에 조성되어 있다. 노출전시관 뒷편으로는 23~24호 무덤(4~5세기)이 발굴조사된 구역이 있다. 이곳에서는 사신문양거울, 굽은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뒷편>

OLYMPUS DIGITAL CAMERA<23호, 24호 무덤>

이곳은 2기(23, 2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사신문양거울, 굽은칼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7
<사신 격자무늬 거울, 4세기, 2. 김해 대성동 23호묘, 김해 양동리 44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은 칼, 삼국시대 5세기, 김해 대성동 무덤>

구릉 정상부 바로 아래에는 18기(5~22호)무덤이 발굴된 구역이 있다. 호랑이모양띠고리, 방패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5~22호 무덤이 발굴된 구역>

이곳은 18기(5~22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호랑이모양띠고리, 방패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5~22호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0<바람개비모양 동기, 4세기, 1.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김해 대성동 1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일본 고분시대의 문물로 방패나 화살통에 붙인 청동 꾸미개로 추정됩니다. 일본 기나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가나가와현 오즈카 고분, 서로는 후쿠오카현 마루쿠야마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4<8. 가락바퀴모양 석제품, 4세기, 대성동 18호묘, 8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2<왜계(하지키) 토기, 4세기, 1. 김해 대성동 13호묘, 2. 김해 구지로 33호묘, 3. 마산 현동 8호묘, 4. 김해 부원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구릉 정상부에는 4기(1~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이 있다. 판갑옷, 재갈, 물미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1~5호 무덤>

이곳은 4기(1~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판가봇, 재갈, 물미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65
<갑옷,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231<말머리 가리개, 4~5세기. 1. 김해 대성동 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251<재갈, 4~5세기, 3.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1<3. 통모양 동기,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39호묘, 88호묘, 9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일본의 경우 44기의 무덤에서 59점이 출토되었습니다. 기나이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사이타마현 구마노신사 고분, 남으로는 구마모토현 시미즈 고분에서 출토되는 등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1<유리목걸이, 4세기, 3,5. 김해 대성동 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군 남쪽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대성동박물관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성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박물관내부에서 재현해 놓은 가야시대 기마무사>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2 <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발견되며, 제사와 의례 행위를 하기 위해 무기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의 심장부인 기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제사와 의례용으로 청동 방울을 제작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3<청동그릇, 4세기, 1.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국 서진의 청동그릇입니다. 유사한 것들이 삼연을 비롯한 북방에서도 확인되어, 서진과의 직접 교류, 삼연을 통한 유입 등 유입경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4<청동솥, 4세기, 대성동 4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5<재갈, 4세기, 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6<말방울, 4세기, 5.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삿갓모양 말방울은 대성동유적에서만 출토되었습니다. 중국 조양(朝陽) 원대자 벽화 무덤, 안양(安陽) 효민둔 154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 북방의 유목국가(모용선비)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7<허리띠 꾸미개, 4세기, 1. 김해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에 부장한 중국식(서진) 허리띠 꾸미개입니다. 중국에서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한 허리띠 꾸미개는 황제나 왕족이 착용한 최고급 위세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8<금동말띠 꾸미개, 4세기, 2,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말머리 꾸미개, 4세기, 3.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9<유리잔, 4~5세기, 1. 김해 대성동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경주 금관총, 국립경주박물관(비교자료)>

김해_대성동_76호분_출토_목걸이<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2<유리목걸이, 4. 김해 대성동 88호묘, 5, 김해 대성동 3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2<왜계무기, 3~4세기, 김해 양동리, 대성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4. 창, 5. 돌화살촉, 6. 청동촉>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061<철기 만드는 도구, 4세기, 1. 끌,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111<덩이쇠, 4~5세기, 김해 대성동 94, 95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7.경남 김해 대성동, 1992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8<신라토기, 4. 김해 대성동 73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5.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7<빗모양 장신구, 4세기, 5.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9<6. 손칼, 4세기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20<사슴뿔 머리장식, 4세기,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원 광장에 있는 조형물>

대성동고분군 무덤배치의 특징
본 대성동고분군에서는 2차에 걸쳐 분묘들이 중복축조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제1차는 3세기말, 제2차는 5세기 초의 일이다. 이러한 분묘의 중복축조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례가 없는, 김해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제1차 분묘중복축조는 이 무렵 김해로 갑자기 대거 유입된 순장.도질토기.북방계 갑옷과 투구.기승용말갖춤 등의 북방문화를 근거로, 이 문화를 소유한 북방주민이 김해로 이주함에 따라, 전시기의 분묘를 파기하고 그들의 무덤을 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특정 북방주민의 이주설이다. 그 외 분묘중복은 친족관계에 있는 분묘들이라는 견해와 묘역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제2차 분묘축조현상은, 이후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하여 김해지역에서는 지배자의 무덤이 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쇠퇴를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하다. 이곳 노출전시관의 부지에서도 많은 무덤들이 중복축조되어 있었으며, 29호분과 39호분의 목곽묘도 그러한 중복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14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금관가야 무덤

경남 김해시 대동면에 있는 예안리 고분군(사적)이다. 낙동강 서쪽 대동리 들판에 위치하고 있는 금관가야의 무덤들로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널무덤,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 독무덤,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 등 총 212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다. 가야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매장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회백색와질, 적갈색연질, 회청색경질 토기류가 있으며 철정, 가위, 재갈등의 철기류가 발견되고 있다. 각 무덤에서는 사라 뼈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예안리고분군(사적)>

예안리고분군은 금관가야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과 가까운 들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김해만 해안가였던 곳이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예안리 고분군 위치(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앞 들판>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표지석>

김해 예안리고분군에서는 북방계와 남방계 사람의 특징, 편두를 가진 인골 등이 발견되어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5 <머리뼈, 4~5세기,  1.남방형질, 2.북방형질,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6<머리뼈, 4~5세기,  3.발치,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4. 편두, 김해 예안리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복제품>

변한인의 성형풍습
인간이 타고난 본래의 모습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화장 또는 문신을 하거나 장식품을 걸치기도 한다. 이것은 인체를 변형시키지 않고 인체의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 혹은 감추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며, 신분.계급.종족.성별을 구분하기 위한 치장이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인체의 특정 부분을 변형시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는 유아의 이마부위를 강제로 눌러 두개골을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 이를 뽑는 발치, 도구를 넣어 아래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방법등이 행해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성형수술이었다. 이마를 눌러 편평하게 만든 편두는 변한인의 인체변형의 풍속의 하나였다. (안내문, 부산박물관, 2013년)

미늘쇠는 칼 모양의 몸통에 미늘같은 뾰족한 날이 서 있으며, 아래에는 투겁이 있어 자루를 끼울 수 있다. 지배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식용 도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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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쇠, 김해 예안리 무덤,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5<2. 이득지(二得知)를 적은 토기, , 5~6세기, 김해 예안리고분, 국립김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경남 김해 예안리, 1980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세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늬가 있는 토기조각, 김해 예안리, 중앙박물관>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김해시에서 서낙동강을 따라 상동으로 가는 도로 가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도로 건너에는 예안리 패총이 있다. 1947년경까지 다수의 돌덧널들이 노출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 있다. 고분군은 서북의 까치산에서 동쪽의 마산으로 길게 연결된 습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대학교박물관이 5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덧널무덤 59기, 구덩식돌넛무덤93기, 독무덤 17기, 앞트기식 돌방무덤 12기 등 총 181기의 고분이 조사되었고, 토기류 1,100여점, 철기류 660점, 구슬류 180여점, 귀걸이 41쌍, 골촉 60여점 등 총 2,000여점이 출토되었다. 4~6세기에 걸쳐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고분군은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모든 형식의 고분이 중복되고 있어, 가야의 묘제가 덧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돌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해가던 과정을 알수 있다. 삼국지는 3세기경의 가야사회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편두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예안리 고분군에서는 두개골 성형으로 앞이마가 심하게 후퇴한 10개체의 두개골이 출토되어, 이러한 풍습이 가야사회에서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무려 190여개체의 인골이 확인된 예안리 고분군은 가야인 내지는 고대 한국인의 형질을 살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편두를 포함하여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안내문, 부산박물관, 2013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

경남 김해시 주촌면에 있는 양동리 고분군(사적)이다. 가야 고분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 50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다.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양동리 마을 뒷산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고, 그 면적은 3만여평 정도이다. 발굴, 조사된 무덤은 무덤양식의 변천과 연대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은 시기별 가야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가야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 교역을 하고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오랜 세월동안 조성된 무덤들이 모여있다.  옛 사진에는 발굴중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일반적인 유적지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정상부>

김해_양동리_고분군_전경_3
<최근 모습(2021년)>

양동리는 금관가야 중심지였던 김해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삼각주에 형성된 김해평야와 산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상무역에 종사했던 선박들이 정박했던 항구이자 물류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 양동리고분(사적)1<김해 양동리고분군 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양동리 마을>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청동거울과 투겁창 등 중국 및 일본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무덤 주인들은 중국, 일본과의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제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는 금관가야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세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각종 토기와 다양한 철제 무기, 갑옷과 마구, 철제농기구, 청동제 단검과 거울, 청동제 솥 등이 발굴되었으며, 특히 유리.수정.마노.호박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어 해상교역을 통해서 축적된 경제력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6<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2세기, 동의대학교 박물관>

김해 양동리 162호묘(2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2세기 후반 무렵에 한(韓)과 예(濊)가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강성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동리 162호 무덤은 이 시기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나무덧널무덤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6<쇠도끼, 1~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여러장의 긴 철판을 연결하고, 고사리 문양을 붙여 만든 갑옷과 투구이다. 갑옷에 고사리 문양이나 새 문양을 붙이는 것은 가락국 갑옷의 특징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70
<갑옷과 투구, 4세기, 김해 양동리 7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보여주는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1<청동 꺽창과 투겁창, 2~4세기, 1.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내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2<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4<검, 2세기, 1.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5<검, 2세기, 2.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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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쇠, 김해 양동리 무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6<사신격자 무늬 거울, 1세기, 3. 전 김해 양동리, 부산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8<3. 본뜬 거울,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수정 목걸이는 당시 가락국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구슬이다. 양동리고분군에서는 다량의 목걸이가 출토되었는데 그중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보물), 322호분 출토목걸이(보물)가 가장 화려하면서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3
<수정 목걸이, 3세기 1. 김해 양동리 27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보>

김해_양동리_322호분_출토_목걸이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4
<목걸이, 2~3세기, 2.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5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6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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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2~4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청동세발솥은 입술부분에 글자가 적혀 있다. 제작 시기는 1세기로 추정되는데 양동리고분군의 조성시기를 밝혀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7<1. 청동 세발솥, 3세기, 김해 양동리 32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8<1. 쇠솥, 2~3세기, 김해 양동리 31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가야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니던 흔적은 토기의 그림뿐 아니라 실제 사용한 말갖춤으로도 확인이 되고 있다. 후기 가야유적에서는 말갖춤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6<3. 말탄 사람을 새긴 단지, 3~5세기, 김해 양동리 195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3.경남 김해 양동리, 1996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세기>

OLYMPUS DIGITAL CAMERA<12.굽다리접시, 경남 김해 양동리(1990년 발굴)>

김해 양동리 고분군, 사적,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양동리 가곡부락 뒷산(해발 90m)에 위치한 이 고분군은 삼한~삼국 시대의 무덤 유적으로, 유적의 전체면적은 3만여 평 정도이다. 이 유적은 1969년에 이곳에서 우연히 출토된 유물로 인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정식 발굴 조사는 문화재 연구소(1984년)와 동의대학교 박물관(1990~1996년)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 이곳에서는 모두 55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5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좁은 범위 안에 매우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오랜 기간동안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서로 겹쳐지는 것들도 많았다. 조사된 무덤의 종류는 나무널무덤, 나무곽무덤, 구덩식 들곽무덤, 독무덤,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등으로, 이들 무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후 5세기까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각종 토기와 다양한 철제 무기, 갑옷과 마구, 철제 농기구와 공구, 청동제 단검과 거울, 청동제 솥, 통형동기, 유리.수정.마노.호박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 중에는 중국이나 낙랑, 일본 등 외국과의 교류나 교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들도 많다. 이 고분군은 낙동강 하류의 여러 가야 고분 중에서도 특히 가야의 묘제나 유물의 변천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가야 문물의 진수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가야사회의 성장과정이나 국가적 성격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2.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