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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있는 이충무공유적(사적)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을 지휘했던 곳이다. 충무공은 한산대첩 후 이곳에 운주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 본영으로 삼았다. 이후 정유재란 때 칠전량에서 조선수군이 크게 패하면서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영조 때(1739년) 통제사 조경이 유허비를 세우고 운주당이 있던 자리에 제승당중건하면서 이충무공의 업적을 기렸다. 이후 197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크게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한산도<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한산도(閑山島)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약간 규모의 섬으로 약 610세대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한산도 앞 바다에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산도 앞바다에는 거북선 모양의 등대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여객선에서 보이는 한산도>

SANYO DIGITAL CAMERA<거북등대>

통영항에서 한산도 유적지까지는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으며 선착장에서 유적지까지는 해안길을 따라 약 800m 정도 걸으면 된다.

SANYO DIGITAL CAMERA<여객선 선착장>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입구>

유적지에는 1976년에 크게 중건한 제승당을 중심으로 이순신 장군의 <진중시>로 유명한 수루,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활터인 한산정이 있다. 또한 조선후기 영조 때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세우면서 이곳이 한산도 수영 운주당이 있었음을 기록한 유허비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제승당>

제승당(制勝堂)
제107대 조경 통제사가 운주당 자리에 현 건물을 복원하면서 제승당이라 이름한 이곳은 현대의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 곳이다. 충무공은 1593년 7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한양으로 붙잡혀 가기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영을 여기에 설치하였다. 승리를 만드는 건물의 이륵과 같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도 짜고, 총통과 같은 신문기의 제작과 보급에 힘쓰는 등 모든 군무를 관장하던 곳이었다. 총 1,491일 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가 여기에서 쓰여졌고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의 제승당은 충무공이 떠난 뒤 폐허가 되었다가 1739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한 것을 197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수루는 적의 동태를 관측하는 일종의 망루이다. 조선후기 영조 떄 김천택의 시조집 <청구영언>에 실린 <진중시>의 배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한산섬 수루>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청구영언>

SANYO DIGITAL CAMERA<수루에서 보이는 한산도 앞바다>

이 수루는 일종의 망루로서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이곳에 자주 올라 왜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우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하던 곳이다. 또 이곳에는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을 연결, 봉화.고동.연등을 이용하여 남해안 적 동태를 파악하였다. 이 건물은 1976년 정화사업 떄 한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현 위치에 고증을 통해 신축한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충무사는 이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76년에 크게 중건한 사당이다.

SANYO DIGITAL CAMERA<충무사 홍살문>

SANYO DIGITAL CAMERA<충무사>

유적지에는 1739년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지으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와 통제사 이규석이 다시 세운 유허비가 있으며 입구에는 이충무공의 후손으로 통제사나 부사로 역임했던 이들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들을 모아놓았다.

SANYO DIGITAL CAMERA<제승당 유허비>

SANYO DIGITAL CAMERA<제승당 유허비>

제승당 유허비
왼쪽 비석은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작전지휘소로 세웠던 곳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아 타 없어졌었다. 이 비석은 무른 사암으로 제작되어 마모가 심하다. 오른쪽 비석은 충무공의 후손으로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이 새로 세운 것으로 전에 있었던 비석을 묻은 곳이라는 표식이 있다. 가운데 비석은 오른쪽 비석의 뒷면을 한글로 풀어 새겨 놓은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SANYO DIGITAL CAMERA<후손통제사 행적비>

SANYO DIGITAL CAMERA<후손통제사 행적비>

후손통제사행적비
이 비들은 충무공의 후손으로 통제사나 부사로 부임했던 이들의 선행을 기념하기 위해 한산도와 거제도의 주민들이 약 240 ~ 130년 전에 세웠던 송덕비를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오른쪽부터 제121대 통제사 이태상(5세손), 제138대 통제사 이한창(6세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8세손), 부사 이태권(8세손), 제203대 통제사 이규안(10세손)의 송덕비가 늘어서 있다. 이한창 통제사의 송덕비에는 ‘섬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준 공덕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고 새겨져 있는데, 나머지도 비슷한 내용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한산정은 이충무공이 활을 쏘던 곳으로 표적과의 거리는 145m이다. 과녁은 바다를 끼고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한산청>

SANYO DIGITAL CAMERA<과녁>

한산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2년 임진왜란 때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치른 장소이다. 여기에 집무실 겸 작전지휘본부였던 운주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다. 이곳은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국난을 극복한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운주당은 1597년에 건물이 없어졌으나 142년 후인 1740년 통제사 조경이 다시 짓고 이 사실을 비에 적어 남겼다. 1959년 정부가 사적으로 지정한 이래로 여러 차례 보수하여 왔으나 민족의 영웅을 모시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였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둘러본 후 이순신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높은 뜻을 후손만대에 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지를 확장하고 보수하여 1976년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이곳에는 이순신이 생전에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곳인 제승당을 비롯하여 공의 존영을 모신 충무사와 유허비, 공덕비, 한산정, 수루 등 부속 건물들이 말끔히 복원되어 수려한 주변 경관과 더불어 당시 조선 수군 본영의 면모를 되찾아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갔어도 나라 사랑하던 마음은 출렁이는 푸른 바다와 함께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조국 수호의 영원한 횃불이 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우리는 다 같이 옷깃을 여미고 공의 공적을 가슴 깊이 되새겨 영광된 통일 조국의 기반이 되기를 다짐하자.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위키백과, 2022년

 

 

산청 덕천서원(사적), 남명 조식을 모신 서원

경남 산청군 사천면 원리에 있는 덕천서원(德川書院)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1501 ~ 1572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선 선조 때(1576년)에 제자들이 처음 건립하였으며 광해군 때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을 국가로부터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평가받았으며 덕천서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북인세력으로 광해군 집권시 주도세력으로 인조반정 때 대부분 실각했으며 그 영향이 구한말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01-20220222<산청 덕천서원(사적)>

산청 덕천서원<산청 덕천서원 공간배치>

덕천서원은 앞쪽에 강당인 경의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진덕재와 수업재가 배치되어 있으며 뒷편에 사당인 숭덕사가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강당공간 건물들의 크고 공간을 넓게 배치하고 있어 조선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의 학품을 따르는 교육 중심의 서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18-20220222<시정문>

경의당은 앞면 5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강당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교육 중심의 서원 강당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05-20220222<강당인 경의당>

산청 덕천서원(사적) 07-20220222<대청마루>

산청 덕천서원(사적) 08-20220222<왼쪽 온돌방>

산청 덕천서원(사적) 09-20220222<오른쪽 온돌방>

강당공간 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생활공간인 진덕재(進德齋), 수업재(修業齋)가 위치하고 있다. 두 건물은 그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각각 앞면 5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중심지 역할을 했던 덕천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03-20220222<동재인 진덕재>

산청 덕천서원(사적) 02-20220222<서재인 수업재>

산청 덕천서원(사적) 04-20220222<수업재 마루>

산청 덕천서원(사적) 15-20220222<강학공간 마당>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는 강당 뒷편에 배치되어 있는데 소박하면서도 간소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덕천서원은 광해군 때(1609년) ‘덕천’이라는 이름을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남명 조식(1501 ~ 1572년)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상도 삼가현 출신으로 명종과 선조 때 여러차레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주로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제자들로는곽재우, 정인홍,정구 등이 있으며 광해군 때 집권세력인 북인 정파를 형성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11-20220222<사당 내삼문>

산청 덕천서원(사적) 12-20220222<숭덕사>

산청 덕천서원(사적) 14-20220222<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직사>

산청 덕천서원(사적) 10-20220222<장판각으로 보이는 건물>

남명 조식 유적(사적)으로는 덕천서원과 세심정, 산천재 등이 있다. 덕천서원은 지리산 중산리 계곡에서 발원한 사천이 덕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16-20220222<덕천서원 앞을 흐르는 사천>

산청 덕천서원(사적) 17-20220222<덕천서원 홍살문과 은행나무>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조선시대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산청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남명 조식(1501 ~ 1572)의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덕천’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를 국가로부터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서원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을 중심으로 그 앞에 유생들이 생활공간인 진덕재(進德齋), 수업재(修業齋)가 있고 뒤편에 제례를 지내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은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경’과 그것을 실천하는 ‘의’를 중요시하였던 남명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경의당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현재도 봄, 가을에 두 차례의 향례를 올리고 있으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를 지내고 있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대한민국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2년

산청 목면시배 유지(사적),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곳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목면시배 유지(사적)이다. 고려 공민왕 때(1363년) 중국 원나라를 사신으로 방문했던 문익점이 목화 씨앗을 붓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온 후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이 태어난 이곳 마을에는 목화를 처음 심었다고 알려진 백여평 밭에는 지금도 그의 업적을 기려 목화를 재배해 오고 있다. 유적지에는 문익점을 기리는 부민각이라는 건물과 그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가 남아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1-20220222<산청 목면시배 유지(사적)>

목화를 재배했던 밭 옆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처럼 보이는 ‘부민각’이라는 현판이 있는 한옥이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그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7-20220222<부민각>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8-20220222<부민각에 모셔진 초상화>

부민각과 목화밭 사에는 ‘문익점 효자비’를 볼 수 있다. 문익점은 모친이 돌아가신 후 묘곁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이곳을 침범했던 왜적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 알려져 고려 우왕 때(1383) 그에게 표창을 내리고 마을을 ‘효자리’라 이름하도록 하였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9-20220222<효자비 비각>

유적지에는 이곳이 목면시배 유지임을 알려주는 2기의 비석과 그의 업적을 알려주는 기념관이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4-20220222<유적지 출입문>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5-20220222<2기의 비석>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2-20220222<전시관>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3-20220222<전시관 내부>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이곳은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면화 씨앗을 구해왔다. 그 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면화재배에 성공하였다. 면화로부터 얻어지는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을 향상시켜 백성들의 의생활에 혁명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거제 둔덕기성(사적), 견내량을 지키는 통일신라 산성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둔덕기성(屯德岐城, 사적)이다. 거제도 섬의 관문이자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이 견내량이 내려다 보이는 우봉산(해발 325 m)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7세기 신라 때 처음 쌓았으며 고려 때 보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상사리(裳四里)’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때 설치된 상군(裳郡)과 경덕왕 때 거제군의 치소(治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 무신란 때 폐위된 의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폐왕성(廢王城))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 기록에 남아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를 통제하기 위해 주요 거점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1-20220221<거제 둔덕기성(사적)>

둔덕기성은 우봉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26 m 정도이다.성벽의 높이는 최고 4.95 m 정도로 중간크기의 납작한 돌을 촘촘히 쌓은 통일신라 산성의 축성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 서, 남문 3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서문은 통일신라 산성에서 볼 수 있는 현문식 산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루을 올렸던 초석들이 성문터에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사적)<둔덕기성 공간배치>

거제 둔덕기성 (사적) 03-20220221<둔덕기성 내부로 올라가는 탐방로>

거제 둔덕기성 (사적) 04-20220221<복원작업하는 과정에서 만든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성문터는 아님)>

동문과 남문 사이 성벽 일부를 복원했는데 판석 형태의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신라 산성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에는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5-20220221<복원된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6-20220221<복원된 동남쪽 성벽(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0-20220221 <복원된 성벽 끝부분>

거제 둔덕기성 (사적) 09-20220221<남문 부근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2-20220221<남문 부근>

남문은 동쪽으로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과 한산대첩이 있었던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거림리 일대에서 성안으로 출입하는 성문인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 때 성벽을 보수하면서 성문을 새로 낸 것으로 밝혀졌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석이 확인되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4-20220221<남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5-20220221<남문과 주위 성벽(바깥쪽)>

남문지
둔덕기성의 남문지는 동쪽으로는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 일대가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지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밝혀 졌다. 둔덕기성 남문의 경우, 고려시대에 삼국시대 성벽 바깥쪽으로 성벽 일부를 확장하면서 새로 문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문지는 허튼층쌓기하여 삼국시대 문지에 비해 정교함은 떨어 진다. 통로부 내측에 전면 1칸, 측면 1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작은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지와 서문지 사이의 간문(間門)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 남문지 안쪽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성벽은 바른층쌓기 하였으며, 하부에는 성벽 보강시설인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6-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3-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안쪽)>

서문은 서쪽 견내량과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고려 때 성을 수리하면서 성문을 크게 하고 문루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큰 문루가 있었던 초석이 남아 있다. 견내량과 통영 방향에서 성안을 출입할 때 사용된 성문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8-20220221<서문 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9-20220221<서문과 문루 건물 초석>

거제 둔덕기성 (사적) 17-20220221<서문 남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0-20220221<서문 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1-20220221<서문과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6-20220221<서문 북쪽 성벽(안쪽)>

서문지(西門址)
둔덕기성 서문지는 서쪽으로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서문지는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 (1170년)를 전후하여 동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부의 고려시대 계단시설 아래에 삼국시대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서문지도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고려시대에 수축하여 사용 하였는데, 출입이 용이한 평문식으로 조사되었다. 문지는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 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웅장한 문루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서문 북쪽으로는 주위를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장대역할을 정상부가 있다. 정상부에는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몽돌을 모아 놓은 석환군과 식량 등을 저장했던 저장고가 있다. 정상부 전망대에 북쪽으로 고성 앞바다와 견내량 해협, 서쪽으로는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한산대첩 당시 견내량을 지나는 배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5-20220221<정상부 전망대>

거제 둔덕기성 (사적) 28-20220221<북쪽 고성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9-20220221<견내량과 통영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4-20220221<석환군>

석환군(石丸群)
석환은 인근 바닷가의 몽돌을 투석용 무기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성내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대부분 직경 10~20cm 크기의 원형 및 타원형 몽돌로서 성내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특히, 성내 정상부 암반의 남쪽에 연접한 장타원형의 넓은 범위에서 약 2,000여 개 정도로 추산되는 석환군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삼국 ~ 조선시대 성곽에서 성내 농성시 방어용 투석자로 사용된 석환이 흔히 발견되는데 이와 같이 대량으로 확인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남해 임진산성에서 석환군이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우리나라 산성 중 성내에 성황당을 짓고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사례도 있어 둔덕기성의 제사장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주변에서 출토된 기와 및 도기편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30-20220221<저장고 터>

저장고
둔덕기성의 성내 최북단에 위치하는 저장고는 성내에서 소요되는 여러 가지 식품류와 경작 등을 위한 씨앗류 등의 지장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장고는 먼저 고려시대 북쪽 성벽 하부의 자연암반층 및 기존 대지조성 층을 1~1.7m 깊이까지 방형으로 굴착한 후, 굴착면에 덧대어 방형석축을 조성하였다. 그 후 바닥과 사방에는 0.6~0.7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방온、방습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내부 에는 정방형으로 ‘田’자 형태의 목곽을 설치하고, 내부에 ‘十’ 자상으로 구획된 4개 의 공간에는 평평한 할석을 깔아 바닥면을 조성하였다. 저장고는 크게 1회 이상 수리, 보수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기와류 등으로 보아 삼국 ~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둔덕기성 저장고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인근의 고령 주산성 의 저장고(목곽고)와도 동일한 구조 및 성격을 보이고 있어 삼국시대 산성의 성내 저장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동문은 조선시대 오양역이 설치되었던 북쪽의 오량성과 남쪽 거림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안으로 들오은 출입문이다. 동문은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출입하는 현문식 성문 구조가 남아 있다. 성문 안쪽에는 고려 때 문루를 설치했던 초석들이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31-20220221<동문과 남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6-20220221<동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41-20220221<현문식 성문>

거제 둔덕기성 (사적) 35-20220221<동문 북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7-20220221<동문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2-20220221<동문 남쪽 성벽(바깥쪽)>

동문지
둔덕기성 동문지는 북쪽의 오량리와 남동쪽의 거림리에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종착지로서, 삼국 ~ 고려시대의 거제 치소지가 위치하는 거림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주요 통로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 되었 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 거제도 (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서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문지 아래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동문지는 사다리 등을 통해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현문(懸門, 일명 다락문) 구조이다. 통로부 너비는 약 8.8m에 이르며, 문지의 성벽 두께도 7~9m로 주변 성벽보다 훨씬 두껍게 축조하였다. 외벽은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축조 하였으며, 기저부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기단보축시설로 보강하였다. 고려시대의 동문지는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수축하여 현문식으로 사용하였다. 문지 성벽은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상당히 웅장한 문루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둔덕기성은 통일신라때 거제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내부에는 통일신라와 고려 때 치소역할을 했던 건물터가 있으며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모아 두었던 연못 형태의 집수조가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1-20220221<둔덕기성 내부>

거제 둔덕기성 (사적) 32-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3-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9-20220221<복원된 집수조>

성내 건물지
성내 건물지는 둔덕기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로서 둔덕기성 운용 당시의 정치, 행정, 생활, 제의 등과 관련된 시설로 구분된다. 특히, 성내 중심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기성의 핵심시설이 위치할 것으로 추정되어 2016년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국 ~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건물지의 기단석열, 초석 및 적심, 수혈 등의 유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40-20220221<둔덕기성 남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거제 둔덕기성(屯德崎城)은 7세기 신라 시대 축조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懸門式) 구조인 동문지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 시대에 보수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 인화문 토기, ‘상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청자 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이 성은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및 경덕왕대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는 등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등면과 둔덕면의 경계가 되는 우봉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526 m이고 최고 높이가 4.85 m이다. 성 안에는 여러 곳에 건물터와 연못 터가 남아 있고, 북쪽에는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던 수로 변에는 아직도 ‘전하도목(殿下渡目)’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으며 ‘고려골’이라 부는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왕을 받들어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둔덕면에 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거제현 관아(사적)

경남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거제현 관아(사적)이다. 거제현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섬을 비웠다가 조선 초 세종 때(1423년) 피난갔던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사등면에 사등성을 쌓고 관아를 설치하였다다. 이후 지형적인 조건 등으로 읍치를 고현성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고현성이 함락되고 주요 관아건물들이 사라졌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영 겸 경사좌수영이 통영으로 옮기면서 통영과 가까우면서 방어에 유리한 현재의 위치로 관아를 옮겼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거제시의 중심이 고현성이 있는 신현읍으로 옮기면서 작은 시골 면소재지가 되었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1-20220221<거제 거제현 관아(사적)>

거제현 관아터에는 객사였던 기성관(보물)과 하급 실무자들의 업무공간인 질청이 남아 있으며, 동헌과 내아가 있던 자리에는 면사무소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객사는 구한말 이후 초등학교로, 질청은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거제현 관아는 ‘진입로-관아 건물-계룡산(수정봉)’이 남서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동헌이 객사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거제현 관아<거제현 관아 공간 배치>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2-20220221<객사 출입문>

객사인 기성관(보물)은 조선후기 현종 때 관아가 있던 고현성을 폐쇄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1665년) 지어졌다. 이후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1909년까지 관아 건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초등학교 교시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76년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해체수리과정에서 상량묵서와 상량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내력 등의 내용이 잘 남아 있다. 관아객사이지만 내부는 전체가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어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국보)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4-20220221<거제 기성관(보물)>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5-20220221<기성관 내부>

객사 마당에는 조선후기 이후 거제현에 흩어져 있는 역대 고을 수령들의 송덕비들을 모아 놓고 있다. 모두 14기의 비(碑)가 있는데 그중 6기는 철비(鐵碑)이며, 8기는 석비(石碑)이다. 다른 고을에 비해 송덕비는 많지 않은 편이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3-20220221<거제현 관아 송덕비군>

거제현 관아 송덕비군 (巨濟縣 官衙 頌德碑群)
현재의 거제면은 거제구읍(巨濟舊邑)으로, 옛 거제현의 치소(治所)가 자리하였던 곳이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조선초 거제 현민들은 거창, 진주, 영선 등지로 피난을 갔었는데 1422년(세종 4) 돌아와 사등성(沙等城)을 수축하였으나 협소하고 물이 귀해 이듬해 고현으로 옮겨 9년 만에 고현성(古縣城)을 낙성하여 거제 현아(縣衙)를 두었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되고, 1664년(현종5) 현재의 거제면으로 현아를 옮겨 조선말까지 거제부의 치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현재 거제현 관아지에 남아있는 기성관(岐城館), 질청(秩廳), 향교 유적 등은 모두 고현에서 이건한 것이다. 원 거제현 관아에는 다수의 송덕비가 있었으나 세월의 변천에 따라 대부분 산실되었고, 현존하는 14기는 향교 입구와 동상리, 서정리 등에 있던 것을 1970년 거제유림과 거제면민이 합심하여 옮겨 모은 것이다. 비들은 1974~1976년 기성관 해체 복원 작업 시 기성관 안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6기는 철비(鐵碑)이며, 8기는 석비(石碑)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 거제의 역사를 반영하는 기념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객사인 기성관 앞쪽에는 하급 실무자들이 사용했던 관아 건물이 질청(秩廳)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건물은  ‘ㄷ’자형인데 27칸으로 지방관아 건물 중에는 큰 편이다. 건물은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ㅉ고에 작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가 넓은 것으로 볼 때 회의 등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6-20220221<질청 출입문>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ㄷ’ 형태를 하고 있는데 원래는 ‘ㅁ’자형 이었다고 한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8-20220221<질청>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9-20220221<대청마루>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7-20220221<작은 마루와 온돌방이 있는 왼쪽 날개채>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10-20220221<오른쪽 날개채>

질청(秩廳)
거제현 관아는 조선시대 거제현의 일반 행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기 위한 지방 행정기구이다. 그 중에서 질청(株廳)은 하급 관리들의 사무실이나 서재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1926년부터는 등기소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4년에 해제 복원한 것이다. 질청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해도 27칸이 넘는 대규모의 건물이며, 전체가 ‘ㄷ’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거제현 지도에는 ‘ㅁ’자형으로 나와 있어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화 과정에서 도로와 맞닿은 앞부분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질청 건물의 중앙부에는 사무를 보는 큰 대청이 있고 양쪽에는 주거용 방이 있다. 기성관처럼 화려한 장식이 없지만 검소하면서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거제현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던 질청은 기성관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의 전형적인 기능적, 구조적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동헌과 내아가 있던 자리는 현재 면사무소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그 앞에 크고 오래된 고목이 남아 있어 이곳이 관아터였음을 알 수 있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12-20220221<동헌이 있던 자리>

거제현 관아는 남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 있기는 하나 왜구가 없었던 임진왜란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기때문에 읍성을 쌓지 않았다. 구한말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방어를 읍성 축성을 추진했으나 승인받지 못하고 읍치 뒷편에 산성을 쌓아 이를 보완하였다.

거제 옥산성 30-20220221<거제 옥산성>

거제현 관아(巨濟縣 官衙), 사적 제484호
거제현 관아는 조선시대 거제현의 일반 행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기 위한 지방행정기구이다. 주요 건물은 객사인 ‘기성관’,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헌’, 하급 관리가 업무를 보던 ‘질청’ 등이 있다. 현재는 기성관과 질청이 남아 있으며, 지금 거제면 사무소가 있는 곳에는 당시 동헌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 말 왜구침략으로 인한 공도정책으로 행정상 공백지였던 거제에 조선시대 세종 4년(1422) 피난 갔던 거제백성들이 돌아오면서 거제현관아가 설치되었다. 최초로 현재 수월동에 설치 되었으며, 사등성을 거쳐 단종 1년(1453)에 고현성으로 거제현관아가 이전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되어 관아의 주요 건물이 사라짐에 따라 현종 5년(1664)에 지금의 위치에 새로 지었다. 거제현 관아는 ‘진입로-관아 건물-계룡산(수정봉)’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서울의 ‘광화문-경복궁-백악산’과 유사한 지형적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 관아의 전형적인 건물 구조와 배치 등을 보여주는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