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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내산리 고분군(사적),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

경남 고성군 동해면에 있는 내산리 고분군(사적)이다. 원래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60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봉분의 크기가 10m 정도인 중간규모의 무덤이 40여기 이며, 15m 이상 대형 무덤도 20기가 있다. 소가야는 남해안 상교통로에 자리잡고 교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지역 금관가야와는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다투는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에는 해상무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성 내산리 고분군(사적)>

내산리고분군은 당항포가 있는 내해 바다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다. 소가야 중심지인 고성과 남해 먼바다를 연결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언덕에는 60여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고성 내산리고분군(사적)<내산리 고분군 무덤 분포(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위쪽 1호무덤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무덤은 위쪽부터 1호 무덤이 있으며 동쪽 마을 부근에 60호 무덤이 있다. 앞쪽 소나무 주위에 있는 29호 무덤부터 시작하여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중간에 보이는 무덤(5~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입구에 있는 소나무>

OLYMPUS DIGITAL CAMERA<2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6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8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중앙에 위치한 무덤들(5 ~1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위쪽에 있는 무덤(1~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무덤 부근에서 보이는 아래쪽 무덤들>

OLYMPUS DIGITAL CAMERA<정비되기 전 무덤(14~1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무덤(18~1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 위치한 무덤(30~32호)>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40~60호 무덤이 있는 지역>

내산리고분군을 지나 고개를 넘아가면 당항포 부근 바다를 볼 수 있다. 이 바다는 다리가 놓여진 좁은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태풍이나 폭풍우를 피해서 배를 정박하기에 좋다. 소가야가 번성했들 때는 배들이 이 곳에 쉬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당항포 앞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목걸이,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6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731
<쇠투겁창, 4~6세기, 1. 고성 내산리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2.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고령 지산동 75호묘,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521<화살촉, 4~6세기, 7. 고성 내산리 21-1호묘,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7<신라토기, 2. 고성 내산리 8호묘, 국립전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1.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구멍단지, 2.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굽다리항아리, 3.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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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받침, 5.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고성 내산리 고분군, 사적, 경남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고성군 동해면의 북쪽 끝에 위치하여 마산방면의 진해만에 근접해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28기 정도이지만, 61기 가량의 봉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래는 100여기의 고분이 있었다 하나, 많은 도굴과 파괴의 피해를 입었다. 1997년부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연차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군의 특징이 알려지게 되었다. 대형봉토분인 제8호분과 제34호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확인되었다.첫째, 고분의 봉토는 인공적으로 다져 쌓아 올려져, 지역적 고분축조의 특색을 나타낸다. 둘째, 중앙의 주곽(제8호분)과 돌방(제34호분)을 중심으로 봉토 내에 여러기의 돌덧널이 함께 만들어져 있어, 고성 송학동고분군과 함께 이 지역 가야고분의 특색을 보여준다. 셋째, 고리장식대부장경호와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 큰칼과 철호살촉 등의 철기, 귀걸이와 팔찌 등의 금은장신구, 발걸이와 운주 등의 마구들이 출토되었다. 넷째, 제34호분에서 출토된 은팔찌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며 굴식돌방무덤의 모양도 백제와 동일한 특색을 보여준다. 제8호와 제34호분은 출토된 토기와 마구로 보아 6세기 전반에서 중엽 경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가야세력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일 것이다.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3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금관가야 생활유적

경남 김해시 봉황동 일대에 있는 봉황동유적(사적)이다. 김해 구도심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 남쪽에 있는 봉황대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있는 조개더미(패총)과 무덤유적 등이다. 조개더미에서는 토기, 뼈나 뿔로 만든 도구, 석기, 가락바퀴, 불탄쌀, 중국 동전,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동전은 왕망의 신나라 때(기원전 14년)에 만든 것으로 유적이 형성된 시기와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언덕 서쪽에서는 가야 토성과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남쪽에서는 가야시대 배가 발견되어 해반천을 통해 선박이 왕래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청동기시대 이래 사람이 살았던 곳이 금관가야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조개더미인 회현리패총과 봉황대 일대의 주거유적을 합쳐 봉황동유적(사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봉황대 남쪽으로는 넓은 김해평야와 낙동강이 펼쳐 있고, 북쪽으로는 분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평야지대 낮은 구릉에 목책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 고대 성읍국가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봉황대 서쪽에는 해반천이 흐르고 있어 낙동강을 통해 중국, 일본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김해 봉황동유적<유적 일대 위성 사진>

봉황동 유적은 집터와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곳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유물은 없지만, 가야 고상가옥 등을 복원하여 도심 공원으로 조성해 놓고 있다. 봉황대는조선시대 김해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이 봉황의 모습을 닯았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언덕>

봉황대 서쪽 해반천 옆에는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유적과 선박접안시설 등이 발견되어 금관가야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은 옛가야의 생활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고상가옥과 가야선박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박 접안시설을 재현해 놓은 연못>

봉황대 남쪽 옛 봉황초등학교 부근에서 가야시대 선박이 발견되었다. 연못에는 당시 선박을 재현해 놓은 배를 볼 수 있다. 좁은 수로를 항해할 수 있도록 날렵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야의 배>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1<배모양 토제품,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가야의 배
가야는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한 정치체이며 수로와 해로를 통하여 왜와 한사군에도 철기를 수출하였다. 가야의 배는 현재까지 실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으나, 가야시대의 배를 본떠 만든 배모양토기가 여러 점 남아 있어 구조와 형태, 크기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복원된 배는 호림박물관에 서장된 배모양토기를 토대로 당시의 항해술과 선박의 구조 등을 고려하여 제작한 것으로, 가야시대 조선술과 선박구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연못 옆에는 다수의 고상가옥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당시 교역에 필요한 물품들을 저장하는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상가옥 건물터와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집모양토기를 참조하여 고상가옥을 복원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상가옥>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고상건물지와 가야시대 집모양토기를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건물바닥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인데,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가야시대의 접안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반천변에 입지한 조건이나 구조 및 열을 지어 다량으로 분포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곳에서 발굴된 고상가옥들은 대외교역을 위한 창고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망루>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해반천>

봉황대 정상에는 황세바위, 여의각 등이 있으며, 황세바위 앞에는 가락국의 천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김해 도심과 주변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황세바위>

OLYMPUS DIGITAL CAMERA<천제단>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 북쪽 분산성(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반천>

봉황대 동남쪽은 생활유적인 회현리 조개더미(패총)가 확인된 곳이다. 이곳에는 주변에서 확인된 집터와 가야토기를 참조하여 고상가옥과 주거지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상가옥과 주거지를 재현해 놓은 곳>

수혈주거 가옥은 난방을 위해서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이며, 고상가옥은 곡식 등을 저장했던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수혈주거 가옥>

OLYMPUS DIGITAL CAMERA<수혈주거 가옥>

OLYMPUS DIGITAL CAMERA<집모양토기, 전 대구 달성, 삼국시대(가야) 5~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고상가옥>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9 <집모양토기, 4~5세기, 1. 창원 석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2.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3. 김해 봉황동 유적,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고상가옥과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재현해 놓은 목책>

OLYMPUS DIGITAL CAMERA<산책로>

OLYMPUS DIGITAL CAMERA<목책>

봉황대 동남쪽에 위치한 회현리 패총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중국 왕망시대의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회현리 패총>

OLYMPUS DIGITAL CAMERA<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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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회현리 패총(단면)>

OLYMPUS DIGITAL CAMERA<항아리, 김해 봉황동, 삼국시대 가야>

김해 회현리 패총
김해 회현리 패총은 1907년 이후 어려 번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봉황대 유적과 함께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가야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토기, 동물뼈, 뼈조각품과 함께 ‘화천(貨泉)’이라고 불리는 중국 동전과 거울조각, 일본 야요이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김해 봉황동유적, 사적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2001년 2월 5일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이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장국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2002년 ~ 2005년 해상포구, 고상가옥, 수혈주거, 망루, 목책 등을 복원 정비하였으며 1999년 3월 부산대 박물관에서 회현리 패총을 재발굴하여 2006년 단면전시관 형태로 개관하였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김해 수로왕릉(사적),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무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사적)이다. 가야국을 건국한 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 무덤이다. 금관가야 주거유적인 봉황대(사적)와 지배층 무덤이 모여 있는 대성동 고분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 때가 왕릉의 보존상태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세종 때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로서 왕릉에 걸맞는 수준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지봉유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는데 당시 순장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무덤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이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수로왕릉(사적)>

수로왕릉 능역은 조선시대 왕릉에 준하는 수준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 수로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선전이 세워졌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역대 금관가야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이 추가되면서 종묘와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외에 안향각, 신도비각, 제기고, 전사청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김해 수로왕릉1<수로왕릉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을 출입하는 숭안문>

OLYMPUS DIGITAL CAMERA<실제 능역이 시작되는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가락루>

출입문인 가락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수로왕릉이 보이고, 왼쪽에는 수로왕릉에 대한 내력 등을 적은 신도비가, 오른쪽에는 영정을 모신 숭정각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릉 능역>

신도비각는 금관가야의 역사와 숭전전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기록된 비(碑)이다. 비각은 1885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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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OLYMPUS DIGITAL CAMERA<숭정각>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 영정>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비 영정>

OLYMPUS DIGITAL CAMERA<제물을 준비하는 시생대>

수로왕릉은 납릉(納陵)으로도 불리며 지름 22m, 높이 6m 규모의 원형봉토분이다. 왕릉 앞에는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은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파사석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물고기 그림이 유명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인 납릉심문>

OLYMPUS DIGITAL CAMERA<납릉심문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파사석탑과 물고기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릉 봉분>

OLYMPUS DIGITAL CAMERA<문무인석>

OLYMPUS DIGITAL CAMERA<마양호석>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가락국기(駕洛國記) > 수로왕과 왕후가 죽다(0189년 03월 01일(음))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수로왕릉 동쪽에는 역대 수로왕과 역대왕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과 숭안전이 있다. 숭선전은 구한말 고종때 이름이 내려졌으며, 숭안전은 일제강점기 이후 추가되었다. 금관가야의 종묘와 같은 성격을 갖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향공간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제향공간 영역>

숭선전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과 왕후 허씨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거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경주의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 미추왕릉 앞쪽에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 앞에 숭신전 등이 비슷한 성격의 전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숭선전과 안향각>

숭선전
가락국 시조 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 가락국 제2대 도왕 원년(199년)에 창건되어 1698년에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1792년 4칸으로 중건. 1878년에 숭선전으로 선액 되면서 3칸으로 건립되었다. 1926년과 1954년 두번에 걸쳐 중수되고 1973년에 보수되었으며 1987년 능 전면에서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숭안전은 역대 금관가야 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종묘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후 김해김씨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숭안전>

OLYMPUS DIGITAL CAMERA<제기고>

OLYMPUS DIGITAL CAMERA<전사청>

대호군(大護軍) 허전(許傳)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효휘전(孝徽殿)께서 돌아가시고 역월(易月)의 상제가 어느덧 지나갔습니다. 장사를 지낼 날짜가 정해져 묘혈(墓穴)을 팔 날이 점점 가까워지니 성상의 슬픔과 애통함은 뭇사람들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구조(舊朝)의 신하로서 늙고 완고하기만 한 채 죽지 않고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세상일에 대하여 함부로 간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한마디 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성명께서는 조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 <생략> _
이에 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지엄하신 성상께 아뢰는 것이니, 천지 부모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가락국 수로왕릉에 특별히 전호(殿號)를 내려 주고 아울러 삼국의 여러 능과 같이 능관을 두어 한편으로는 전성(前聖)의 성대한 법을 따르고 한편으로는 고국(故國)의 영령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은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승정원일기, 고종 15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수로왕릉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崇善殿)과 숭안전(崇安殿), 안향각(安香閣),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에는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모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13년(1580)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 능비를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수로왕릉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는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숭선전제례는 경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4. 승정원일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김해 구지봉(사적), 금관가야 건국 설화가 있는 곳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사적)이다. 김해박물관 뒷편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가야 건국 설화가 있는 곳이자 우리나라 최초 서사시인 <구지가(龜旨歌)>의 무대이다. 구지봉은 뒷편에 있는 산과 함께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목부분에 수로왕비릉(사적)이 자리잡고 있다. 구지봉 정상에는 청동기시대 남방식 고인돌이 있어 오랜세월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 상석에는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해 구지봉(사적)>

금관가야<위성사진>

구지봉은 낮은 봉우리로 김해박물관 마당이나, 수로왕비릉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정상부에 올라가면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남근석과 한석봉 글씨가 있는 고인돌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왕왕비릉 옆에서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릉(사적)>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정상 아래>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고인돌>

구지봉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지하에 깬 돌로 쌓거나 돌판을 상자를 짠 무덤칸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작은 받침돌로 큰돌을 지탱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구지봉 정상부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규모는 240 x 210 x 100 cm 로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 수 없으나, 주변엔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 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에 새겨진 구지봉석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구지봉은 김해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 옆에 자리잡고 있다. 지배층 무덤인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군, 주거 유적인 봉황대가 해반천을 따라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박물관에서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해반천 옆에서 멀리 보이는 구지봉>

가락국기(駕洛國記)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身長)은 아홉 자나 되었으니 은(殷)의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처럼 생겼으니 한(漢)의 고조(高祖)와 같고, 눈썹에는 팔채(八彩)가 있으니 당(唐)의 요(堯)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으니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한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 <생략> –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가락국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김해구지봉, 사적, 경남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龜首峯), 구봉(龜峰) 등으로도 불리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 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개의 알을 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지 10여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을 세운 분으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금관가야 수로왕비의 무덤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사적)이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다. 수로왕비는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배를 타고 건너와 왕비가 되었으며,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은 허씨 성을 주었으며 김해허씨는 그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무덤 옆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돌로 세워진 파사석탑이 남아 있다. 도심에 있는 수로왕릉과는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수로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생략 ~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註 496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 생략 ~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생략 ~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가락국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능역은 조선초 세종 때(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성역화되어다. 봉분의 규모가 크지 않으며 봉분을 두른 호석은 없다. 능비와 상석은 조선 중기 인조 때(1647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고 한다. 무덤 주위에는 높이 5m 정도의 담장이 있다. 왕릉에 속하지만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능역>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무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능역내에서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과 관리인이 머무는 고직사가 부속건물로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재실과 고직사>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바다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종류의 돌이라고 한다. 인근 사찰에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파사석탑 보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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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원래 바다를 항해할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배의 바닥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과학적 분석결과 파사석은 붉은 빛이 도는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암질인 것이 밝혀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4<정면에서 본 모습>

파사석탑
이 석탑은 <삼국유사> 등 고서에 수로왕비 허황옥이 48년(수로왕 7)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탑의 부재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으로 불리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으나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註 183 호계사(虎溪寺)註 184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DB주석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註 185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註 186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 아도(阿道) 눌지왕(訥祇王)의 시대로 법흥왕대의 전이다.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註 187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금관성파사석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수로왕비릉은 금관가야 건국설화  “구지가”와 관련된 구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이며, 수로왕비릉이 자리한 위치는 목부분에 해당한다. 남쪽의 수로왕릉과는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 구지봉을 지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에서 보이는 수로왕비릉>

김해 수로왕비릉, 사적, 경남 김해시 구산동
김해시내 북단에 위치한 이 곳은 가락국 수로왕비의 능이다. 분산(盆山)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동쪽 100m 지점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있다. 조선시대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된 것이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이라 새겨져 있다.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 홍살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이 석탑음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에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데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