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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들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사적)이다. 금관가야 무덤들로 길이 약 300m, 높이 20m 정도의 낮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데  다른 가야 고분과는 달리 봉분을 크게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조성된 무덤들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중국제 거울, 북방계 말갖춤, 방패형동기, 호랑이모양 띠고리, 청동솥 등이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은 당시 한.중.일 문화교류에서 금관가야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대성동 고분군은 구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 동쪽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평지 또는 해발 20m의 낮은 구릉꼭대기에 크지 않은 규모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무덤(수로왕릉)이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무덤들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 북쪽에는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대성동박물관이 있다. 금관가야 중심부인 봉황대 유적(사적)이 남쪽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해반천 옆 도로에서 보이는 대성동 고분군>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유적지 북쪽 평지에서 발견된 29호분과 39분은 발굴되었던 상태로 복원하여 노출전시관으로 조성해 놓고 있다. 29호 무덤은 3세기 후반에, 39호분은 이보다 100년 늦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29호 무덤은 가야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회청색의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오르도스형 청동솥 등이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내부의 29호분과 39호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0<김해 대성동 29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3세기,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대성동 29호묘(3세기)
김해 양동리 고분이 2세기 가락국(구야국)의 중심이었다면 3세기에는 김해 대성동으로 중심이 이동합니다. 대성동에서 확인된 첫 번째 왕의 무덤이 29호묘입니다. 내부에서는 북방의 오르도스동복,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등이 처음으로 확인이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OLYMPUS DIGITAL CAMERA<39호 무덤 부곽과 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9호 무덤>

노출전시관
노출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무덤 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 전시하여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축조 방법과 유물 부장상태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29호분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왕묘로 추정되는 주요한 무덤이며 청동솥, 최초의 가야 도질토기 등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39호분은 이보다 100년 정도 늦은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29호분을 일부 파괴하고 축조하였다. 이러한 무덤간의 중복축조는 대성동고분을 비롯한 금관가야 무덤축조 방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세력교체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대성동고분군의 무덤들은 대부분 구릉 정상부에 조성되어 있다. 노출전시관 뒷편으로는 23~24호 무덤(4~5세기)이 발굴조사된 구역이 있다. 이곳에서는 사신문양거울, 굽은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뒷편>

OLYMPUS DIGITAL CAMERA<23호, 24호 무덤>

이곳은 2기(23, 2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사신문양거울, 굽은칼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7
<사신 격자무늬 거울, 4세기, 2. 김해 대성동 23호묘, 김해 양동리 44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은 칼, 삼국시대 5세기, 김해 대성동 무덤>

구릉 정상부 바로 아래에는 18기(5~22호)무덤이 발굴된 구역이 있다. 호랑이모양띠고리, 방패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5~22호 무덤이 발굴된 구역>

이곳은 18기(5~22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호랑이모양띠고리, 방패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5~22호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0<바람개비모양 동기, 4세기, 1.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김해 대성동 1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일본 고분시대의 문물로 방패나 화살통에 붙인 청동 꾸미개로 추정됩니다. 일본 기나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가나가와현 오즈카 고분, 서로는 후쿠오카현 마루쿠야마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4<8. 가락바퀴모양 석제품, 4세기, 대성동 18호묘, 8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2<왜계(하지키) 토기, 4세기, 1. 김해 대성동 13호묘, 2. 김해 구지로 33호묘, 3. 마산 현동 8호묘, 4. 김해 부원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구릉 정상부에는 4기(1~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이 있다. 판갑옷, 재갈, 물미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1~5호 무덤>

이곳은 4기(1~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판가봇, 재갈, 물미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65
<갑옷,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231<말머리 가리개, 4~5세기. 1. 김해 대성동 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251<재갈, 4~5세기, 3.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1<3. 통모양 동기,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39호묘, 88호묘, 9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일본의 경우 44기의 무덤에서 59점이 출토되었습니다. 기나이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사이타마현 구마노신사 고분, 남으로는 구마모토현 시미즈 고분에서 출토되는 등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1<유리목걸이, 4세기, 3,5. 김해 대성동 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군 남쪽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대성동박물관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성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박물관내부에서 재현해 놓은 가야시대 기마무사>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2 <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발견되며, 제사와 의례 행위를 하기 위해 무기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의 심장부인 기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제사와 의례용으로 청동 방울을 제작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3<청동그릇, 4세기, 1.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국 서진의 청동그릇입니다. 유사한 것들이 삼연을 비롯한 북방에서도 확인되어, 서진과의 직접 교류, 삼연을 통한 유입 등 유입경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4<청동솥, 4세기, 대성동 4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5<재갈, 4세기, 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6<말방울, 4세기, 5.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삿갓모양 말방울은 대성동유적에서만 출토되었습니다. 중국 조양(朝陽) 원대자 벽화 무덤, 안양(安陽) 효민둔 154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 북방의 유목국가(모용선비)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7<허리띠 꾸미개, 4세기, 1. 김해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에 부장한 중국식(서진) 허리띠 꾸미개입니다. 중국에서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한 허리띠 꾸미개는 황제나 왕족이 착용한 최고급 위세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8<금동말띠 꾸미개, 4세기, 2,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말머리 꾸미개, 4세기, 3.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9<유리잔, 4~5세기, 1. 김해 대성동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경주 금관총, 국립경주박물관(비교자료)>

김해_대성동_76호분_출토_목걸이<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2<유리목걸이, 4. 김해 대성동 88호묘, 5, 김해 대성동 3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2<왜계무기, 3~4세기, 김해 양동리, 대성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4. 창, 5. 돌화살촉, 6. 청동촉>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061<철기 만드는 도구, 4세기, 1. 끌,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111<덩이쇠, 4~5세기, 김해 대성동 94, 95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7.경남 김해 대성동, 1992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8<신라토기, 4. 김해 대성동 73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5.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7<빗모양 장신구, 4세기, 5.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9<6. 손칼, 4세기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20<사슴뿔 머리장식, 4세기,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원 광장에 있는 조형물>

대성동고분군 무덤배치의 특징
본 대성동고분군에서는 2차에 걸쳐 분묘들이 중복축조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제1차는 3세기말, 제2차는 5세기 초의 일이다. 이러한 분묘의 중복축조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례가 없는, 김해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제1차 분묘중복축조는 이 무렵 김해로 갑자기 대거 유입된 순장.도질토기.북방계 갑옷과 투구.기승용말갖춤 등의 북방문화를 근거로, 이 문화를 소유한 북방주민이 김해로 이주함에 따라, 전시기의 분묘를 파기하고 그들의 무덤을 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특정 북방주민의 이주설이다. 그 외 분묘중복은 친족관계에 있는 분묘들이라는 견해와 묘역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제2차 분묘축조현상은, 이후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하여 김해지역에서는 지배자의 무덤이 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쇠퇴를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하다. 이곳 노출전시관의 부지에서도 많은 무덤들이 중복축조되어 있었으며, 29호분과 39호분의 목곽묘도 그러한 중복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14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금관가야 무덤

경남 김해시 대동면에 있는 예안리 고분군(사적)이다. 낙동강 서쪽 대동리 들판에 위치하고 있는 금관가야의 무덤들로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널무덤,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 독무덤,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 등 총 212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다. 가야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매장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회백색와질, 적갈색연질, 회청색경질 토기류가 있으며 철정, 가위, 재갈등의 철기류가 발견되고 있다. 각 무덤에서는 사라 뼈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예안리고분군(사적)>

예안리고분군은 금관가야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과 가까운 들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김해만 해안가였던 곳이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예안리 고분군 위치(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앞 들판>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표지석>

김해 예안리고분군에서는 북방계와 남방계 사람의 특징, 편두를 가진 인골 등이 발견되어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5 <머리뼈, 4~5세기,  1.남방형질, 2.북방형질,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6<머리뼈, 4~5세기,  3.발치,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4. 편두, 김해 예안리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복제품>

변한인의 성형풍습
인간이 타고난 본래의 모습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화장 또는 문신을 하거나 장식품을 걸치기도 한다. 이것은 인체를 변형시키지 않고 인체의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 혹은 감추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며, 신분.계급.종족.성별을 구분하기 위한 치장이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인체의 특정 부분을 변형시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는 유아의 이마부위를 강제로 눌러 두개골을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 이를 뽑는 발치, 도구를 넣어 아래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방법등이 행해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성형수술이었다. 이마를 눌러 편평하게 만든 편두는 변한인의 인체변형의 풍속의 하나였다. (안내문, 부산박물관, 2013년)

미늘쇠는 칼 모양의 몸통에 미늘같은 뾰족한 날이 서 있으며, 아래에는 투겁이 있어 자루를 끼울 수 있다. 지배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식용 도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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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쇠, 김해 예안리 무덤,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5<2. 이득지(二得知)를 적은 토기, , 5~6세기, 김해 예안리고분, 국립김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경남 김해 예안리, 1980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세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늬가 있는 토기조각, 김해 예안리, 중앙박물관>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김해시에서 서낙동강을 따라 상동으로 가는 도로 가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도로 건너에는 예안리 패총이 있다. 1947년경까지 다수의 돌덧널들이 노출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 있다. 고분군은 서북의 까치산에서 동쪽의 마산으로 길게 연결된 습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대학교박물관이 5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덧널무덤 59기, 구덩식돌넛무덤93기, 독무덤 17기, 앞트기식 돌방무덤 12기 등 총 181기의 고분이 조사되었고, 토기류 1,100여점, 철기류 660점, 구슬류 180여점, 귀걸이 41쌍, 골촉 60여점 등 총 2,000여점이 출토되었다. 4~6세기에 걸쳐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고분군은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모든 형식의 고분이 중복되고 있어, 가야의 묘제가 덧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돌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해가던 과정을 알수 있다. 삼국지는 3세기경의 가야사회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편두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예안리 고분군에서는 두개골 성형으로 앞이마가 심하게 후퇴한 10개체의 두개골이 출토되어, 이러한 풍습이 가야사회에서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무려 190여개체의 인골이 확인된 예안리 고분군은 가야인 내지는 고대 한국인의 형질을 살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편두를 포함하여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안내문, 부산박물관, 2013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

경남 김해시 주촌면에 있는 양동리 고분군(사적)이다. 가야 고분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 50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다.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양동리 마을 뒷산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고, 그 면적은 3만여평 정도이다. 발굴, 조사된 무덤은 무덤양식의 변천과 연대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은 시기별 가야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가야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 교역을 하고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오랜 세월동안 조성된 무덤들이 모여있다.  옛 사진에는 발굴중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일반적인 유적지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정상부>

김해_양동리_고분군_전경_3
<최근 모습(2021년)>

양동리는 금관가야 중심지였던 김해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삼각주에 형성된 김해평야와 산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상무역에 종사했던 선박들이 정박했던 항구이자 물류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 양동리고분(사적)1<김해 양동리고분군 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양동리 마을>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청동거울과 투겁창 등 중국 및 일본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무덤 주인들은 중국, 일본과의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제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는 금관가야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세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각종 토기와 다양한 철제 무기, 갑옷과 마구, 철제농기구, 청동제 단검과 거울, 청동제 솥 등이 발굴되었으며, 특히 유리.수정.마노.호박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어 해상교역을 통해서 축적된 경제력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6<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2세기, 동의대학교 박물관>

김해 양동리 162호묘(2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2세기 후반 무렵에 한(韓)과 예(濊)가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강성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동리 162호 무덤은 이 시기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나무덧널무덤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6<쇠도끼, 1~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여러장의 긴 철판을 연결하고, 고사리 문양을 붙여 만든 갑옷과 투구이다. 갑옷에 고사리 문양이나 새 문양을 붙이는 것은 가락국 갑옷의 특징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70
<갑옷과 투구, 4세기, 김해 양동리 7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보여주는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1<청동 꺽창과 투겁창, 2~4세기, 1.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내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2<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4<검, 2세기, 1.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5<검, 2세기, 2.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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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쇠, 김해 양동리 무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6<사신격자 무늬 거울, 1세기, 3. 전 김해 양동리, 부산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8<3. 본뜬 거울,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수정 목걸이는 당시 가락국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구슬이다. 양동리고분군에서는 다량의 목걸이가 출토되었는데 그중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보물), 322호분 출토목걸이(보물)가 가장 화려하면서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3
<수정 목걸이, 3세기 1. 김해 양동리 27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보>

김해_양동리_322호분_출토_목걸이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4
<목걸이, 2~3세기, 2.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5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6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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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2~4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청동세발솥은 입술부분에 글자가 적혀 있다. 제작 시기는 1세기로 추정되는데 양동리고분군의 조성시기를 밝혀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7<1. 청동 세발솥, 3세기, 김해 양동리 32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8<1. 쇠솥, 2~3세기, 김해 양동리 31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가야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니던 흔적은 토기의 그림뿐 아니라 실제 사용한 말갖춤으로도 확인이 되고 있다. 후기 가야유적에서는 말갖춤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6<3. 말탄 사람을 새긴 단지, 3~5세기, 김해 양동리 195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3.경남 김해 양동리, 1996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세기>

OLYMPUS DIGITAL CAMERA<12.굽다리접시, 경남 김해 양동리(1990년 발굴)>

김해 양동리 고분군, 사적,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양동리 가곡부락 뒷산(해발 90m)에 위치한 이 고분군은 삼한~삼국 시대의 무덤 유적으로, 유적의 전체면적은 3만여 평 정도이다. 이 유적은 1969년에 이곳에서 우연히 출토된 유물로 인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정식 발굴 조사는 문화재 연구소(1984년)와 동의대학교 박물관(1990~1996년)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 이곳에서는 모두 55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5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좁은 범위 안에 매우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오랜 기간동안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서로 겹쳐지는 것들도 많았다. 조사된 무덤의 종류는 나무널무덤, 나무곽무덤, 구덩식 들곽무덤, 독무덤,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등으로, 이들 무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후 5세기까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각종 토기와 다양한 철제 무기, 갑옷과 마구, 철제 농기구와 공구, 청동제 단검과 거울, 청동제 솥, 통형동기, 유리.수정.마노.호박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 중에는 중국이나 낙랑, 일본 등 외국과의 교류나 교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들도 많다. 이 고분군은 낙동강 하류의 여러 가야 고분 중에서도 특히 가야의 묘제나 유물의 변천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가야 문물의 진수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가야사회의 성장과정이나 국가적 성격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2.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창원 다호리 고분군(사적), 삼한시대 지방유력 세력 무덤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에 있는 다호리 고분군(사적)이다. 삼한시대 고대국가 형성기에 낙동강 습지와 그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 생활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다. 가야초기 널무덤 70여기와 삼국시대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동검, 청동거울, 오수전, 철검, 손칼, 쇠도끼, 쇠갑옷 등 철기제품과 칼집, 활, 화살, 붓, 부채 등 칠기제품, 그리고 민무늬 토기, 와질 도티 등이 있다. 청동거울과 오수전 같은 유물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에서 1세가 후반 사이 유적임을 알려주고 있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목널은 다른 지역과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문자생활의 증거인 붓과 현악기 등이 나왔으며, 청동거울과 오수전을 통해 중국, 낙랑과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창원 다호리고분군(사적)>

창원 다호리고분<다호리고분군 유적 분포>

다호리 1호 무덤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속을 파낸 통나무널이다. 널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청동검, 철검, 쇠도끼, 중국거울, 붓 등이 남겨진 대나무 바구니를 묻었다. 이 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무덤 형태로 삼한시대 해상교역을 통해 번성했던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이 발견된 지역(도로 건너편)>

다호리 널무덤이 발견된 곳은 다른 지역 가야 고분과 달리 실제로 눈으로 보이는 봉분은 없다. 늪지가 논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거의 없고 논이었다가 유적이 발굴된 지역임을 알려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늪지에 있어 유물이 훼손되지 않아 무덤의 구조는 물론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 유적지 조망장소>

OLYMPUS DIGITAL CAMERA <창원 다호리 1호 무덤(나무널 무덤), 기원전 1세기,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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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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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투겁창>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6<쇠도끼>

쇠도끼는 당시 철이 많이 생산되었던 변한지역에서 교역을 위한 화폐대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7<쇠도끼>

붓은 나무판에 글을 쓰고, 칼은 나무를 깎아 지우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자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8<손칼과 붓>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9<붓글씨 재현품>

청동거울과 칠기 등의 유물들은 중국 한나라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낙랑을 통해 중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0<청동 허리띠 부속구>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1<청동거울(성운문경)과 청동방울>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토기, 칠기, 목기, 대나무 등 여러 재질의 유물에 칠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칠기법은 같은 시기 낙랑이나 중국의 그것과 달라 독자적인 칠문화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2<칠그릇>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4<칠부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3<유리구슬>

중국 동전은 교류를 위해 바닷길을 오가던 이들이 남긴 중요한 유물로 이 무덤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경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0<1. 오수전>

이 청동고리는 각각의 무게가 5.25g, 10.25g, 11.55g, 22.73g이다.  무게의 배율이 1:2의 비율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양팔저울의 추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고리>

유력개인의 등장
주남저수지에 인접한 다호리 유적은 평지에서부터 구릉 정상부까지 목관묘, 옹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무덤이 분포한다. 목관묘는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속을 파서 만든 통나무관과 판재를 조립하여 만든 관이 있다. 통나무관은 1호 무덤에서 실물이 나왔다. 1호무덤은 통나무관 아래에 껴묻거리 구덩이가 있었고, 여기서 청동검, 쇠칼, 여러가지 형태의 쇠도끼, 중국거울, 동전 등 금속기류와 붓, 부채, 검집, 화살통 등 칠기류가 나왔다. 청동과 쇠로 만든 검은 그 형태가 비슷하다. 이것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붓은 2,000년 전 우리나라에서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중국거울과 동전은 당시 중국과 교역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런 유물을 소유한 무덤 주인은 당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부를 통해 권력을 지녔던 사람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호리 유적은 삼국이 형성되기 전에 집단 내에서 개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여러기의 널무덤이 출토된 지역>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 유적지>

창원 다호리는 낙동강 하류 습지인 주암저수지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이북 밀양과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 금관가야 중심지 김해와 항구가 있는 마산과 육로와 낙동강 수로를 통해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습지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적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하고 배를 이용한 낙동강 수운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때문에 무역거점으로 발전한 것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옆 습지>

OLYMPUS DIGITAL CAMERA<인근 주남저수지>

창원 다호리집단의 성장
가야가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2세기 경, 남해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교역항은 사천 늑도 유적입니다. 이곳에서는 일본 야오이 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낙랑토기와 한문화, 중국 동북 지역의 토기 등 다양한 문화가 확인됩니다. 한편 내륙지역에서는 창원 다호리 집단이 두각을 드러내어 변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현재까지 100기 이상의 널무덤이 조사되었으며, 중국 한대의 청동거울과 동전, 철기, 칠기, 왜계토기 등 국제적인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2세기 이후에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이후 이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유적지에서 출토된 집모양토기를 통해 습지에서 살았던 다호리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집은 구덩이를 파서 만든 움집과 다락집이 있는데  움집은 보통사람들의 살림집으로, 다락집은 창고 또는 지배자의 거처로 추정된다. 다락집은 높은 기둥을 세워 만드는데 이것은 짐승과 습기로부터 곡물을 보호하거나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나라 유물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의 출토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집모양 토기(복원품)>

OLYMPUS DIGITAL CAMERA<창원 다호리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다호리마을 유물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다호리 마을>

기원전 1세기경 민무늬토기의 제작전통에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이 더해져 와질토기라는 독창적인 토기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로는 회전판, 굴가마, 환원염소성, 타날 등이 있다. 와질토기로 밀폐된 굴가마에서 구워 회색을 띤다. 형태는 민무늬토기에서 변화된 것이 많으나 점차 굽다리가 붙는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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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질토기>

OLYMPUS DIGITAL CAMERA<주머니호>

OLYMPUS DIGITAL CAMERA<주머니호, 항아리>

OLYMPUS DIGITAL CAMERA<손잡이바리, 주머니호>

OLYMPUS DIGITAL CAMERA<야요이 토기>

의창 다호리고분군(사적 237호), 창원시 동읍 다호리
선사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의 수많은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1988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널과 함께, 칠기, 청동기, 철기의 생활용품과 무기류들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삼한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밝혀 주었다. 이 유적에서 목재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수분이 많은 지형적 특징때문이었다. 철새도리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 같은 많은 습지는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칠기는 낙랑과의 교류를 다시 증명해 주었으며, 청동기와 철기는 이 지역의 가야사를 되살리고, 기원전.후부터 이 지역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안내문, 창원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창원시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안동 도산서원(사적),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이다. 퇴계 이황을 모시기 위해 조선중기 선조 7년(1574)에 세워졌다.  선조는 명필 한석봉이 쓴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때 월천 조목이 배향되었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도산서원은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한곳이다. 1970년에 성역화 사업으로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 도서관인 광명실에는 약 5000여권의 장서가 있었으며, 장판각에는 2790여판의 목판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전시되고 있다. 2019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01-20221029<안동 도산서원(사적)>

도산서원<도산서원 공간배치>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직접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던 공간으로 도산서당(보물)을 중심으로 여러 부속 건물 등이 있다. 도산서원은 사당을 중심으로 한 배향공간과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서원 공간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선현을 모시고 후진을 양성하는 서원 본래의 역할 뿐 아닐, 서원 건축에서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마을에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나 낙동강 너머로 들판과 마을이 보인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계단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서원내 어디에서든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4-20221029<서원 출입문>

도산서원은 누각이나 솟을삼문이 있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서원의 풍경을 가리지 않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정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진 서원으로 오르는 계단길을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0-20221029<출입문 안으로 보이는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당, 퇴계 이황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

출입문을 들어서면 서원 강학공간까지는 계단식으로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양쪽에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퇴계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는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도산서당(보물)이 있고 서쪽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농운정사(보물)와 관리소인 하고직사, 별채 건물인 역락서재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1-20221029<도산서당(보물)>

도산서당(陶山書堂, 보물)은 퇴계 이황이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중기(1561년)에 지어졌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공부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퇴계가 머물던 방은 완락재(玩樂齋이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주자(朱子)의 글에서 인용한 이름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당이 점차 확장되면서 서원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2-20221029<도산서당(보물)>

퇴계는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3-20221029<마당 한편에 있는 연못인 ‘정우당’>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에 있는 작은 연못 속에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글자 뜻대로 한다면 ‘깨끗한 법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므로, 퇴계는 절의를 지키는 정결한 군자의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당 동쪽편에 있는 작은 화단은 ‘절우사’라고 불리우며 이 곳에 매,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퇴계가 직접 가꾸었다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0-20221029<도산서당 동쪽편 화단>

작은 우물인 ‘몽천’은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9-20221029<도산서당 아래 마당에 있는 작은 우물인 ‘몽천’>

몽천(蒙泉)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퇴계가 <역경>의 몽괘(蒙卦)에서 의미를 취해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를 뜻한다. 한 방울 샘물이 수많은 어려움 끝에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뜻을 이루라는 의미를 담았다. 퇴계는 이 샘물을 도산서당의 터를 잡은 이유의 하나로 꼽았다. 이 지역의 자연 배경이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농운정사(濃雲精舍, 보물)는 도산서당을 세울 때 제자들이 묵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조선중기(1561년)에 지은 건물로 그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건물은 ‘工’자 형태를 하고 있는데 공부가 성취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건물 양쪽에는 돌출된 형태의 마루가 있는데 제자들이 모여 공부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퇴계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건물로 다른 서원이나 향교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1-20221029<도산서당 앞 정원에서 보이는 농운정사>

안동 도산서원 (사적) 37-20221029<농운정사(보물)>

건물은 ‘工’자 형태의 도토마리 양식을 하고 있는데, 도산서당 건립을 맡았던 승려 법연의 구상에 따른 것이라 한다. 건물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쪽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여 공부를 하는 곳이고 서쪽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이라 하여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동쪽마루는 문을 열면 퇴계가 거처했던 도산서당이 바로 보인다. 가운데에는 온돌방이 있으며 뒷편에 돌출된 형태로 부엌과 창고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6-20221029<농운정사 온돌방>

안동 도산서원 (사적) 35-20221029<농운정사 뒷편>

도산서당에는 농운정사 외 ‘역락서재’라는 별도의 건물이 있다.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있는 독립된 건물로 퇴계가 도산서당에 머물때 제자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유생들이 묵는 숙소라고 하나 서원을 찾은 손님들이 묵는 장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서원에 비해 고직사 또한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아마도 전국각처에서 도산서원을 찾아온 선비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5-20221029<역락서재>

안동 도산서원 (사적) 46-20221029<역락서재>

안동 도산서원 (사적) 48-20221029<바깥에서 본 역락서재>

역락서재(亦樂書齋)
역락서재는 농운정사와 같이 도산서당의 기숙사이다. 1561년 정사성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 정두가 제자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하고직사는 도산서당 관리인들이 머물거나 식사를 하는 장소이다. 원래 도산서당에 딸린 고직사 건물이었는데 도산서원을 건립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아마도 손님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과 부엌 등이 배치된 ‘ㄷ’자형 건물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4-20221029<하고직사>

도산서원,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퇴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상덕사(보물)와 전사청이 배향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며 강학공간은  강당건물인 전교당(보물)과 유생들의 기숙사, 장판각, 광명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 서쪽편에 관리인의 숙소인 상고직사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1-20221029<서원 영역 앞 마당>

강학공간은 서원 뒷편 높은 곳에 있는데 앞쪽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멀리까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학공간 출입문인 진도문을 들어서면 전교당(보물)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기숙사인 박약재와 홍의재가 배치되어 있으며 진도문 양쪽에 누각형태의 건물인 서광명실이 있으며 동쪽 박약재 뒷편에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8-20221029<도산서원 강학공간>

강학공간 출입문은 진도문(進道門)이라 부르며, 양쪽에 많은 동,서 광명실이 있다.  진도문을 지붕을 크게 만들어 경치를 약간 가리고 있는데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2-20221029<진도문>

안동 도산서원 (사적) 21-20221029<강당에서 내려다 본 모습>

전교당(典敎堂, 보물)은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에 지은 건물로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사당인 상덕사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낙동강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진 매우 간소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대청마루 앞 현판에 적힌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글씨는 선조가 도산서원에 이름을 내리면서 명필 한석봉이 선조 앞에서 쓴 글씨라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7-20221029<도산서원 전교당(보물)>

안동 도산서원 (사적) 16-20221029<옆에서 본 모습>

온돌방 문을 들어올리면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며 많은 유생들이 학문을 논했던 서원 강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내부에는 전교당(典敎堂)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으며 이곳을 찾은 유력 인사들이 남긴 글이 적힌 액자들이 걸려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0-20221029<전교당 내부>

안동 도산서원 (사적) 25-20221029<뒷편에서 본 모습>

강학공간 마당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 부른다. 두 건물 모두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앞쪽에 툇마루를 달아 내었다. 선배들은 동재를, 후배들은 서재를 사용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5-20221029<동재인 박약재>

안동 도산서원 (사적) 19-20221029<서재인 홍의재>

동.서재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편 건물을 ‘박약재’라 하고, 서편 건물을 ‘홍의재’라 한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광명실은 누각 형태의 건물로 적을 보관하던 도서관 해당하는 건물이다. 건물로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주위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었다. 동광명실은 조선후기 순조 때(1819년), 서광명실은 일제강점기 때(1930년) 지어진 건물이다. 동광명실은 역대 왕들이 내려준 서적들과 퇴계가 직접 보던 서적들을, 서광명실에는 국내유학자들의 문집 등을 보관하였다. 보관중이던 서적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3-20221029<동광명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2-20221029<서광명실>

광명실(光明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고 열람을 하던 곳으로, 이름에 포함된 의미는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이다. 습기로 책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으로 높게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장판각은 책을 찍어내었던 목판을 보관했던 곳이다. 벽체를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앞면 위쪽에는 살창을 설치하여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보관해오던 목판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장판각>

장판각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선조어필, 퇴계선생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상덕사(尙德祠)는 퇴계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 지어졌다. 퇴계를 모신 서원은 원래 안동 월곡면에 있던 호계서원이었으나, 지역 사람들의 요청으로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새로이 건립하게 되었다. 호계서원에서는 유성룡과 김성일을 같이 위패를 모셨는데 당시 지역민들 사이에 유성룡과 김성일의 사에 위상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가 같이 빠지면서 제자로서는 조목만 남게 되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6-20221029<상덕사 내삼문>

상덕사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에 제사 준비 공간인 퇴간을 두고 있다.  상덕사 경내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고 담장너머로만 그 모습을 살짝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2-20221029<상덕사>

상덕사 옆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이 있다. 동쪽은 제수를, 서쪽 은 제주를 보관하던 건물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4-20221029<제수를 보관하던 동쪽 건물>

안동 도산서원 (사적) 23-20221029<제주를 보관하던 서쪽 건물>

전사청
전사청은 사당인 상덕사에서 향사를 받들 때 제주와 제수를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 건물은 제수를 보관하고 서쪽건물은 제주를 보관하던 주고(酒庫)이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인 상고직사는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 규모도 크고 방의 숫자 또한 많은편이다. 서원이 주변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지방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묵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9-20221029<상고직사>

상고직사에는 제사 준비를 하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양쪽으로 제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많은 편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0-20221029<상고직사 출입문과 문간방>

안동 도산서원 (사적) 28-20221029<상고직사로 들어오는 길>

고직사(庫直舍)
고직사는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전교당과 도산서당 왼쪽에 각각 상고직사와 하고직사가 있다.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하고직사는 도산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상고직사는 뒤편의 전사청과 앞쪽의 하고직사와 바로 연결되어 관리인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낙동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학문을 수양하는 서원으로서는 입지가 상당히 좋은 곳에 있다.  민가와는 상당이 떨어져 있는 숲속에 있으면서도 낙동간 너머 넓은 벌판이 있어서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세상을 보면서 치세를 고민할 수 있는 장소이다.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서원 앞에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넓은 마당이 있으며, 서원의 유서깊은 내력을 보여주는 우물과 오래된 고목들이 심어져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09-20221029<서원 앞 넓은 마당>

안동 도산서원 (사적) 02-20221029<서원의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고목>

안동 도산서원 (사적) 06-20221029<향나무>

안동 도산서원 (사적) 03-20221029<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는 고목>

안동 도산서원 (사적) 05-20221029<서원 입구에 있는 고목>

서원 앞에 있는 우물인 열정(冽井)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세웠을 때부터 사용했던 우물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08-20221029<열정>

열정(冽井)
열정은 도산서당이 있을 떄부터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이란 이름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리고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말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라며 열정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마실 수 있다. 이와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에는 낙동강변에 절벽이 있는데 퇴계는 서쪽을 천광운영대, 동쪽을 천연대라 불렀다. 주변의 절경과 자연의 이치를 벗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51-20221029<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SANYO DIGITAL CAMERA<천연대>

안동 도산서원 (사적) 52-20221029<천연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

천광운영대
도선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는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고 불렀다. 천광운영대는 주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 뛰노네’라는 구절에서 하늘 천(天)과 연못 연(淵)을 따서 지었다. 두 이름에는 주변의 절경과, 퇴계가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낙동강 너머로 꽤 넓은 벌판이 있고, 민가들이 많은 마을도 볼 수 있다. 마을과는 낙동강으로 막혀 있어서 멀리 떨어진 듯 하면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낙동강 건너편에는 조선후기 정조 때 이곳 시행한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시사단을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50-20221029<시사단>

시사단
시사단(詩士壇)은 조선시대 특별 과거시험을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 있는 곳이다. ‘시사(詩士)’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1792년 정조는 평소 존경하던 퇴계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열고 영남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시험 응시자만 7천여 명에 이르렀고 문과급제 2명 등을 선발하였다.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이곳에 단을 마련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있던 자리에 10m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뒤 옛 건물과 비석을 원행대로 옮겨 지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퇴계 종택은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북쪽 언덕길을 따라 1.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있던 종택은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후손인 하정공이 옛 종택 규모를 짐작하여 새로 지은 집이다

SANYO DIGITAL CAMERA<퇴계 종택>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운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림의 발의로 1574년 도산서당 뒤편에 세우기 시작하여 1575년 낙성이 되자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576년에는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그 후 도산서원은 19세기 후반 서원철폐령에도 영남 유학의 중심 역할을 해 온 중요성을 인정받아 철거되지 않았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비롯하여 퇴계 사후에 만든 전교당, 상덕사, 전사청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박약재와 홍의재, 서원에서 만든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서원 관리인의 숙소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다. 도산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출처>

  1. 도산서원홈페이지, 도산서원, 2022년
  2.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