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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

경남 김해시 주촌면에 있는 양동리 고분군(사적)이다. 가야 고분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 50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다.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양동리 마을 뒷산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고, 그 면적은 3만여평 정도이다. 발굴, 조사된 무덤은 무덤양식의 변천과 연대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은 시기별 가야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가야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 교역을 하고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오랜 세월동안 조성된 무덤들이 모여있다.  옛 사진에는 발굴중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일반적인 유적지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정상부>

김해_양동리_고분군_전경_3
<최근 모습(2021년)>

양동리는 금관가야 중심지였던 김해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삼각주에 형성된 김해평야와 산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상무역에 종사했던 선박들이 정박했던 항구이자 물류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 양동리고분(사적)1<김해 양동리고분군 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양동리 마을>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청동거울과 투겁창 등 중국 및 일본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무덤 주인들은 중국, 일본과의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제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는 금관가야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세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각종 토기와 다양한 철제 무기, 갑옷과 마구, 철제농기구, 청동제 단검과 거울, 청동제 솥 등이 발굴되었으며, 특히 유리.수정.마노.호박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어 해상교역을 통해서 축적된 경제력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6<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2세기, 동의대학교 박물관>

김해 양동리 162호묘(2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2세기 후반 무렵에 한(韓)과 예(濊)가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강성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동리 162호 무덤은 이 시기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나무덧널무덤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6<쇠도끼, 1~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여러장의 긴 철판을 연결하고, 고사리 문양을 붙여 만든 갑옷과 투구이다. 갑옷에 고사리 문양이나 새 문양을 붙이는 것은 가락국 갑옷의 특징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70
<갑옷과 투구, 4세기, 김해 양동리 7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보여주는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1<청동 꺽창과 투겁창, 2~4세기, 1.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내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2<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4<검, 2세기, 1.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5<검, 2세기, 2.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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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쇠, 김해 양동리 무덤,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6<사신격자 무늬 거울, 1세기, 3. 전 김해 양동리, 부산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08<3. 본뜬 거울,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수정 목걸이는 당시 가락국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구슬이다. 양동리고분군에서는 다량의 목걸이가 출토되었는데 그중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보물), 322호분 출토목걸이(보물)가 가장 화려하면서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3
<수정 목걸이, 3세기 1. 김해 양동리 27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보>

김해_양동리_322호분_출토_목걸이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4
<목걸이, 2~3세기, 2.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5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6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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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2~4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청동세발솥은 입술부분에 글자가 적혀 있다. 제작 시기는 1세기로 추정되는데 양동리고분군의 조성시기를 밝혀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7<1. 청동 세발솥, 3세기, 김해 양동리 32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8<1. 쇠솥, 2~3세기, 김해 양동리 31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가야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니던 흔적은 토기의 그림뿐 아니라 실제 사용한 말갖춤으로도 확인이 되고 있다. 후기 가야유적에서는 말갖춤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6<3. 말탄 사람을 새긴 단지, 3~5세기, 김해 양동리 195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3.경남 김해 양동리, 1996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세기>

OLYMPUS DIGITAL CAMERA<12.굽다리접시, 경남 김해 양동리(1990년 발굴)>

김해 양동리 고분군, 사적,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양동리 가곡부락 뒷산(해발 90m)에 위치한 이 고분군은 삼한~삼국 시대의 무덤 유적으로, 유적의 전체면적은 3만여 평 정도이다. 이 유적은 1969년에 이곳에서 우연히 출토된 유물로 인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정식 발굴 조사는 문화재 연구소(1984년)와 동의대학교 박물관(1990~1996년)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 이곳에서는 모두 55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5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좁은 범위 안에 매우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오랜 기간동안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서로 겹쳐지는 것들도 많았다. 조사된 무덤의 종류는 나무널무덤, 나무곽무덤, 구덩식 들곽무덤, 독무덤,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등으로, 이들 무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후 5세기까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각종 토기와 다양한 철제 무기, 갑옷과 마구, 철제 농기구와 공구, 청동제 단검과 거울, 청동제 솥, 통형동기, 유리.수정.마노.호박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 중에는 중국이나 낙랑, 일본 등 외국과의 교류나 교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들도 많다. 이 고분군은 낙동강 하류의 여러 가야 고분 중에서도 특히 가야의 묘제나 유물의 변천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가야 문물의 진수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가야사회의 성장과정이나 국가적 성격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2.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창원 다호리 고분군(사적), 삼한시대 지방유력 세력 무덤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에 있는 다호리 고분군(사적)이다. 삼한시대 고대국가 형성기에 낙동강 습지와 그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 생활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다. 가야초기 널무덤 70여기와 삼국시대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동검, 청동거울, 오수전, 철검, 손칼, 쇠도끼, 쇠갑옷 등 철기제품과 칼집, 활, 화살, 붓, 부채 등 칠기제품, 그리고 민무늬 토기, 와질 도티 등이 있다. 청동거울과 오수전 같은 유물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에서 1세가 후반 사이 유적임을 알려주고 있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목널은 다른 지역과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문자생활의 증거인 붓과 현악기 등이 나왔으며, 청동거울과 오수전을 통해 중국, 낙랑과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창원 다호리고분군(사적)>

창원 다호리고분<다호리고분군 유적 분포>

다호리 1호 무덤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속을 파낸 통나무널이다. 널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청동검, 철검, 쇠도끼, 중국거울, 붓 등이 남겨진 대나무 바구니를 묻었다. 이 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무덤 형태로 삼한시대 해상교역을 통해 번성했던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이 발견된 지역(도로 건너편)>

다호리 널무덤이 발견된 곳은 다른 지역 가야 고분과 달리 실제로 눈으로 보이는 봉분은 없다. 늪지가 논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거의 없고 논이었다가 유적이 발굴된 지역임을 알려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늪지에 있어 유물이 훼손되지 않아 무덤의 구조는 물론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 유적지 조망장소>

OLYMPUS DIGITAL CAMERA <창원 다호리 1호 무덤(나무널 무덤), 기원전 1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1
<한국식 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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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투겁창>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6<쇠도끼>

쇠도끼는 당시 철이 많이 생산되었던 변한지역에서 교역을 위한 화폐대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7<쇠도끼>

붓은 나무판에 글을 쓰고, 칼은 나무를 깎아 지우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자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8<손칼과 붓>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9<붓글씨 재현품>

청동거울과 칠기 등의 유물들은 중국 한나라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낙랑을 통해 중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0<청동 허리띠 부속구>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1<청동거울(성운문경)과 청동방울>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토기, 칠기, 목기, 대나무 등 여러 재질의 유물에 칠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칠기법은 같은 시기 낙랑이나 중국의 그것과 달라 독자적인 칠문화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2<칠그릇>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4<칠부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23<유리구슬>

중국 동전은 교류를 위해 바닷길을 오가던 이들이 남긴 중요한 유물로 이 무덤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경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0<1. 오수전>

이 청동고리는 각각의 무게가 5.25g, 10.25g, 11.55g, 22.73g이다.  무게의 배율이 1:2의 비율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양팔저울의 추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고리>

유력개인의 등장
주남저수지에 인접한 다호리 유적은 평지에서부터 구릉 정상부까지 목관묘, 옹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무덤이 분포한다. 목관묘는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속을 파서 만든 통나무관과 판재를 조립하여 만든 관이 있다. 통나무관은 1호 무덤에서 실물이 나왔다. 1호무덤은 통나무관 아래에 껴묻거리 구덩이가 있었고, 여기서 청동검, 쇠칼, 여러가지 형태의 쇠도끼, 중국거울, 동전 등 금속기류와 붓, 부채, 검집, 화살통 등 칠기류가 나왔다. 청동과 쇠로 만든 검은 그 형태가 비슷하다. 이것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붓은 2,000년 전 우리나라에서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중국거울과 동전은 당시 중국과 교역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런 유물을 소유한 무덤 주인은 당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부를 통해 권력을 지녔던 사람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호리 유적은 삼국이 형성되기 전에 집단 내에서 개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여러기의 널무덤이 출토된 지역>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 유적지>

창원 다호리는 낙동강 하류 습지인 주암저수지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이북 밀양과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 금관가야 중심지 김해와 항구가 있는 마산과 육로와 낙동강 수로를 통해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습지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적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하고 배를 이용한 낙동강 수운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때문에 무역거점으로 발전한 것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옆 습지>

OLYMPUS DIGITAL CAMERA<인근 주남저수지>

창원 다호리집단의 성장
가야가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2세기 경, 남해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교역항은 사천 늑도 유적입니다. 이곳에서는 일본 야오이 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낙랑토기와 한문화, 중국 동북 지역의 토기 등 다양한 문화가 확인됩니다. 한편 내륙지역에서는 창원 다호리 집단이 두각을 드러내어 변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현재까지 100기 이상의 널무덤이 조사되었으며, 중국 한대의 청동거울과 동전, 철기, 칠기, 왜계토기 등 국제적인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2세기 이후에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이후 이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유적지에서 출토된 집모양토기를 통해 습지에서 살았던 다호리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집은 구덩이를 파서 만든 움집과 다락집이 있는데  움집은 보통사람들의 살림집으로, 다락집은 창고 또는 지배자의 거처로 추정된다. 다락집은 높은 기둥을 세워 만드는데 이것은 짐승과 습기로부터 곡물을 보호하거나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나라 유물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의 출토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집모양 토기(복원품)>

OLYMPUS DIGITAL CAMERA<창원 다호리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다호리마을 유물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다호리 마을>

기원전 1세기경 민무늬토기의 제작전통에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이 더해져 와질토기라는 독창적인 토기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로는 회전판, 굴가마, 환원염소성, 타날 등이 있다. 와질토기로 밀폐된 굴가마에서 구워 회색을 띤다. 형태는 민무늬토기에서 변화된 것이 많으나 점차 굽다리가 붙는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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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질토기>

OLYMPUS DIGITAL CAMERA<주머니호>

OLYMPUS DIGITAL CAMERA<주머니호, 항아리>

OLYMPUS DIGITAL CAMERA<손잡이바리, 주머니호>

OLYMPUS DIGITAL CAMERA<야요이 토기>

의창 다호리고분군(사적 237호), 창원시 동읍 다호리
선사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의 수많은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1988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널과 함께, 칠기, 청동기, 철기의 생활용품과 무기류들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삼한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밝혀 주었다. 이 유적에서 목재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수분이 많은 지형적 특징때문이었다. 철새도리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 같은 많은 습지는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칠기는 낙랑과의 교류를 다시 증명해 주었으며, 청동기와 철기는 이 지역의 가야사를 되살리고, 기원전.후부터 이 지역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안내문, 창원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창원시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안동 도산서원(사적),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이다. 퇴계 이황을 모시기 위해 조선중기 선조 7년(1574)에 세워졌다.  선조는 명필 한석봉이 쓴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때 월천 조목이 배향되었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도산서원은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한곳이다. 1970년에 성역화 사업으로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 도서관인 광명실에는 약 5000여권의 장서가 있었으며, 장판각에는 2790여판의 목판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전시되고 있다. 2019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01-20221029<안동 도산서원(사적)>

도산서원<도산서원 공간배치>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직접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던 공간으로 도산서당(보물)을 중심으로 여러 부속 건물 등이 있다. 도산서원은 사당을 중심으로 한 배향공간과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서원 공간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선현을 모시고 후진을 양성하는 서원 본래의 역할 뿐 아닐, 서원 건축에서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마을에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나 낙동강 너머로 들판과 마을이 보인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계단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서원내 어디에서든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4-20221029<서원 출입문>

도산서원은 누각이나 솟을삼문이 있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서원의 풍경을 가리지 않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정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진 서원으로 오르는 계단길을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0-20221029<출입문 안으로 보이는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당, 퇴계 이황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

출입문을 들어서면 서원 강학공간까지는 계단식으로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양쪽에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퇴계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는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도산서당(보물)이 있고 서쪽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농운정사(보물)와 관리소인 하고직사, 별채 건물인 역락서재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1-20221029<도산서당(보물)>

도산서당(陶山書堂, 보물)은 퇴계 이황이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중기(1561년)에 지어졌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공부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퇴계가 머물던 방은 완락재(玩樂齋이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주자(朱子)의 글에서 인용한 이름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당이 점차 확장되면서 서원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2-20221029<도산서당(보물)>

퇴계는 꽃 중의 군자라는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3-20221029<마당 한편에 있는 연못인 ‘정우당’>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에 있는 작은 연못 속에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글자 뜻대로 한다면 ‘깨끗한 법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므로, 퇴계는 절의를 지키는 정결한 군자의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당 동쪽편에 있는 작은 화단은 ‘절우사’라고 불리우며 이 곳에 매,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퇴계가 직접 가꾸었다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0-20221029<도산서당 동쪽편 화단>

작은 우물인 ‘몽천’은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하여 몽천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9-20221029<도산서당 아래 마당에 있는 작은 우물인 ‘몽천’>

몽천(蒙泉)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퇴계가 <역경>의 몽괘(蒙卦)에서 의미를 취해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를 뜻한다. 한 방울 샘물이 수많은 어려움 끝에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뜻을 이루라는 의미를 담았다. 퇴계는 이 샘물을 도산서당의 터를 잡은 이유의 하나로 꼽았다. 이 지역의 자연 배경이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농운정사(濃雲精舍, 보물)는 도산서당을 세울 때 제자들이 묵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조선중기(1561년)에 지은 건물로 그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건물은 ‘工’자 형태를 하고 있는데 공부가 성취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건물 양쪽에는 돌출된 형태의 마루가 있는데 제자들이 모여 공부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퇴계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건물로 다른 서원이나 향교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1-20221029<도산서당 앞 정원에서 보이는 농운정사>

안동 도산서원 (사적) 37-20221029<농운정사(보물)>

건물은 ‘工’자 형태의 도토마리 양식을 하고 있는데, 도산서당 건립을 맡았던 승려 법연의 구상에 따른 것이라 한다. 건물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쪽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여 공부를 하는 곳이고 서쪽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이라 하여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동쪽마루는 문을 열면 퇴계가 거처했던 도산서당이 바로 보인다. 가운데에는 온돌방이 있으며 뒷편에 돌출된 형태로 부엌과 창고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6-20221029<농운정사 온돌방>

안동 도산서원 (사적) 35-20221029<농운정사 뒷편>

도산서당에는 농운정사 외 ‘역락서재’라는 별도의 건물이 있다.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있는 독립된 건물로 퇴계가 도산서당에 머물때 제자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유생들이 묵는 숙소라고 하나 서원을 찾은 손님들이 묵는 장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서원에 비해 고직사 또한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아마도 전국각처에서 도산서원을 찾아온 선비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45-20221029<역락서재>

안동 도산서원 (사적) 46-20221029<역락서재>

안동 도산서원 (사적) 48-20221029<바깥에서 본 역락서재>

역락서재(亦樂書齋)
역락서재는 농운정사와 같이 도산서당의 기숙사이다. 1561년 정사성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 정두가 제자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하고직사는 도산서당 관리인들이 머물거나 식사를 하는 장소이다. 원래 도산서당에 딸린 고직사 건물이었는데 도산서원을 건립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아마도 손님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과 부엌 등이 배치된 ‘ㄷ’자형 건물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4-20221029<하고직사>

도산서원, 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퇴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상덕사(보물)와 전사청이 배향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며 강학공간은  강당건물인 전교당(보물)과 유생들의 기숙사, 장판각, 광명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 서쪽편에 관리인의 숙소인 상고직사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1-20221029<서원 영역 앞 마당>

강학공간은 서원 뒷편 높은 곳에 있는데 앞쪽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멀리까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학공간 출입문인 진도문을 들어서면 전교당(보물)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기숙사인 박약재와 홍의재가 배치되어 있으며 진도문 양쪽에 누각형태의 건물인 서광명실이 있으며 동쪽 박약재 뒷편에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8-20221029<도산서원 강학공간>

강학공간 출입문은 진도문(進道門)이라 부르며, 양쪽에 많은 동,서 광명실이 있다.  진도문을 지붕을 크게 만들어 경치를 약간 가리고 있는데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2-20221029<진도문>

안동 도산서원 (사적) 21-20221029<강당에서 내려다 본 모습>

전교당(典敎堂, 보물)은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에 지은 건물로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사당인 상덕사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낙동강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진 매우 간소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대청마루 앞 현판에 적힌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글씨는 선조가 도산서원에 이름을 내리면서 명필 한석봉이 선조 앞에서 쓴 글씨라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7-20221029<도산서원 전교당(보물)>

안동 도산서원 (사적) 16-20221029<옆에서 본 모습>

온돌방 문을 들어올리면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며 많은 유생들이 학문을 논했던 서원 강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내부에는 전교당(典敎堂)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으며 이곳을 찾은 유력 인사들이 남긴 글이 적힌 액자들이 걸려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0-20221029<전교당 내부>

안동 도산서원 (사적) 25-20221029<뒷편에서 본 모습>

강학공간 마당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 부른다. 두 건물 모두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앞쪽에 툇마루를 달아 내었다. 선배들은 동재를, 후배들은 서재를 사용한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15-20221029<동재인 박약재>

안동 도산서원 (사적) 19-20221029<서재인 홍의재>

동.서재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편 건물을 ‘박약재’라 하고, 서편 건물을 ‘홍의재’라 한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광명실은 누각 형태의 건물로 적을 보관하던 도서관 해당하는 건물이다. 건물로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주위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었다. 동광명실은 조선후기 순조 때(1819년), 서광명실은 일제강점기 때(1930년) 지어진 건물이다. 동광명실은 역대 왕들이 내려준 서적들과 퇴계가 직접 보던 서적들을, 서광명실에는 국내유학자들의 문집 등을 보관하였다. 보관중이던 서적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3-20221029<동광명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2-20221029<서광명실>

광명실(光明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고 열람을 하던 곳으로, 이름에 포함된 의미는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이다. 습기로 책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으로 높게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장판각은 책을 찍어내었던 목판을 보관했던 곳이다. 벽체를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앞면 위쪽에는 살창을 설치하여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보관해오던 목판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장판각>

장판각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선조어필, 퇴계선생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10년)

상덕사(尙德祠)는 퇴계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 지어졌다. 퇴계를 모신 서원은 원래 안동 월곡면에 있던 호계서원이었으나, 지역 사람들의 요청으로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새로이 건립하게 되었다. 호계서원에서는 유성룡과 김성일을 같이 위패를 모셨는데 당시 지역민들 사이에 유성룡과 김성일의 사에 위상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가 같이 빠지면서 제자로서는 조목만 남게 되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6-20221029<상덕사 내삼문>

상덕사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에 제사 준비 공간인 퇴간을 두고 있다.  상덕사 경내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고 담장너머로만 그 모습을 살짝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2-20221029<상덕사>

상덕사 옆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이 있다. 동쪽은 제수를, 서쪽 은 제주를 보관하던 건물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4-20221029<제수를 보관하던 동쪽 건물>

안동 도산서원 (사적) 23-20221029<제주를 보관하던 서쪽 건물>

전사청
전사청은 사당인 상덕사에서 향사를 받들 때 제주와 제수를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 건물은 제수를 보관하고 서쪽건물은 제주를 보관하던 주고(酒庫)이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인 상고직사는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 규모도 크고 방의 숫자 또한 많은편이다. 서원이 주변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지방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묵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29-20221029<상고직사>

상고직사에는 제사 준비를 하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양쪽으로 제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많은 편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30-20221029<상고직사 출입문과 문간방>

안동 도산서원 (사적) 28-20221029<상고직사로 들어오는 길>

고직사(庫直舍)
고직사는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전교당과 도산서당 왼쪽에 각각 상고직사와 하고직사가 있다.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하고직사는 도산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상고직사는 뒤편의 전사청과 앞쪽의 하고직사와 바로 연결되어 관리인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낙동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학문을 수양하는 서원으로서는 입지가 상당히 좋은 곳에 있다.  민가와는 상당이 떨어져 있는 숲속에 있으면서도 낙동간 너머 넓은 벌판이 있어서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세상을 보면서 치세를 고민할 수 있는 장소이다.

SANYO DIGITAL CAMERA<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서원 앞에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넓은 마당이 있으며, 서원의 유서깊은 내력을 보여주는 우물과 오래된 고목들이 심어져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09-20221029<서원 앞 넓은 마당>

안동 도산서원 (사적) 02-20221029<서원의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고목>

안동 도산서원 (사적) 06-20221029<향나무>

안동 도산서원 (사적) 03-20221029<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는 고목>

안동 도산서원 (사적) 05-20221029<서원 입구에 있는 고목>

서원 앞에 있는 우물인 열정(冽井)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세웠을 때부터 사용했던 우물이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08-20221029<열정>

열정(冽井)
열정은 도산서당이 있을 떄부터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이란 이름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리고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말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라며 열정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마실 수 있다. 이와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에는 낙동강변에 절벽이 있는데 퇴계는 서쪽을 천광운영대, 동쪽을 천연대라 불렀다. 주변의 절경과 자연의 이치를 벗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51-20221029<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SANYO DIGITAL CAMERA<천연대>

안동 도산서원 (사적) 52-20221029<천연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

천광운영대
도선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는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고 불렀다. 천광운영대는 주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 뛰노네’라는 구절에서 하늘 천(天)과 연못 연(淵)을 따서 지었다. 두 이름에는 주변의 절경과, 퇴계가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낙동강 너머로 꽤 넓은 벌판이 있고, 민가들이 많은 마을도 볼 수 있다. 마을과는 낙동강으로 막혀 있어서 멀리 떨어진 듯 하면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낙동강 건너편에는 조선후기 정조 때 이곳 시행한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시사단을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사적) 50-20221029<시사단>

시사단
시사단(詩士壇)은 조선시대 특별 과거시험을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 있는 곳이다. ‘시사(詩士)’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1792년 정조는 평소 존경하던 퇴계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열고 영남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시험 응시자만 7천여 명에 이르렀고 문과급제 2명 등을 선발하였다.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이곳에 단을 마련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있던 자리에 10m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뒤 옛 건물과 비석을 원행대로 옮겨 지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퇴계 종택은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북쪽 언덕길을 따라 1.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있던 종택은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후손인 하정공이 옛 종택 규모를 짐작하여 새로 지은 집이다

SANYO DIGITAL CAMERA<퇴계 종택>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운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림의 발의로 1574년 도산서당 뒤편에 세우기 시작하여 1575년 낙성이 되자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576년에는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그 후 도산서원은 19세기 후반 서원철폐령에도 영남 유학의 중심 역할을 해 온 중요성을 인정받아 철거되지 않았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비롯하여 퇴계 사후에 만든 전교당, 상덕사, 전사청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박약재와 홍의재, 서원에서 만든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서원 관리인의 숙소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다. 도산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양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출처>

  1. 도산서원홈페이지, 도산서원, 2022년
  2.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강원도 영월부 관아(사적)

강원도 영월군 중앙로(영월읍)에 있는 영월부 관아(사적)이다. 영월부(寧越府)는 조선시대 영월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관청이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서 내성군을 서러치했으며 고려떄는 원주의 속현이었다가 고려말에 영월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후기 숙종 때(1698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승되고 장릉으로 천릉하면서 영월부로 승격하였다. 영월부 관아는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 청령포에 머물다 홍수가 나면서 관아 객사 동익헌(관풍헌)에 머물렀던 유서깊은 곳이다. 관아터에는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객사와 단종이 자주 올라서 시를 지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규루(子規樓)가 남아 있다.

영월부 관아 (사적) 01-20220822<영월부 관아(사적)>

보물_월중도(제7면_읍치)<영월부 관아 지도, 월중도(보물)>

영월을 부사로 승격하고 김시습에게 증직과 사제를 행하도록 명하다
“장릉(莊陵)의 헌관(獻官)은 의당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차정(差定)하여야 하니, 영월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사체(事體)를 높이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2월 10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월부 객사는 조선초 태조 때(1396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면 정조 때(1791년)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청은 앞면 3칸, 서익헌은 앞면 4칸 규모이며 단종이 머물렀다는 동익헌(관풍헌)은 앞면 5칸 규모이다. 다른 지방의 객사 건물과는 달리 동익헌은 온돌시설이 있어 단종이 머물렀던 숙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월중도(보물)에 그려진 객사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과 동일하여 조선후기 중수 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월 영월부 관아(사적) 11-20220822<영월부 객사>

영월부 관아 (사적) 03-20220822<관풍헌>

영월부 관아 (사적) 04-20220822<정청>

영월부 관아 (사적) 05-20220822<서익헌>

관풍헌(觀風軒)
영월객사의 동헌으로서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께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어하시어 머무르시다가 1457년(세조 3) 10월 24일 승하하셨다. 1997~1998년 드잡이 및 번와 등 전면보수를 하였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관아 앞쪽에 위치한 자규루(子規樓)는 조선초 세종 때(1428년) 처음 창건된 누각 건물이다. 단종이 청령포를 떠나 영월군 관아에 머물 때 자주 올르 자규시를 읊은 것을 계기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단종이 복위된 조선후기 이후에 다시 중건했다.

영월부 관아 (사적) 02-20220822<자규루>

자규루(子規樓)
이 누각은 세종 10년(1428)에 창건, 신숙근이 중근. 신숙근은 연산조에 영월군수를 역임하였다. 후에 단종께서 관풍헌으로 이어하시어 머무시는 동안 이 누각에 오르시어 자규사 및 자규시를 읊으신 것이 계시가 되어 자류루로 불리게 되었음. 그후 선조 36년(1605) 큰 홍수로 인하여 이 누각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과 영월부사 이동욱이 의논하여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영월부 관아(사적)<영월부 관아 위성사진>

영월부 관아(寧越府)
영월 객사와 관풍헌 및 자규로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이곳에 유배되어 노산군으로 강봉된 채 17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해진다. 세조 3년(1457)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게 되자 당시 영월부 객사의 동익헌이었던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로(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이 배어 있는 시를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숙종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월 정양산성(사적)

강원도 영월읍 정양리에 있는 정양산성(사적)이다.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정양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축조연대는 알 수 없지만 축성방법이나 위치, 지형 등을 고려해 볼 때 인근 온달산성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에서 충돌했던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은 외성과 내성이 있으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는데 최고 높이는 11.5m에 달한다.

영월 정양산성(사적) 01-20220822<영월 정양산성(사적)>

내성동문터(성밖에서)<산성 성벽>

영월 정양산성(사적)<영월 정양산성 공간 배치>

영월 정양산성(사적) 02-20220822<산성 오르는 길에서 보이는 남한강(상류방향)>

영월 정양산성(사적) 03-20220822<정양산성과 남한강>

영월 정양산성(사적) 05-20220822<정양산성 아래에 있는 정조 태실>

영월 정양산성(사적) 04-20220822<도로에서 보이는 정양산성>

정양산성, 사적
정양산성은 영월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4개 (태화산성, 완택산성, 대야성)의 산성중 우두무리 주성에 해당되는 고산성으로 왕검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성은 삼국이 한강유역을 다투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성벽과 문터, 곡성과 치성, 그리고 후대의 외성과 차단벽을 갖춘 유일한 산성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있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