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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이다. 갑사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대전과 가까운 동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으며 삼성각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들은 최근에 중수된 것이다. 통일신라 때 회의화상이 상원조사가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곳에 청량사라는 절을 짓고 남매탑을 세웠다. 현재의 사찰은 고려초에 도선이 절을 중창하면서 고려 태조를 모시는 원당을 세웠다. 사찰 옆에 신라 시조와 박제상을 모시는 사당인 동학사가 세워지면서 절의 이름도 동학사로 바뀌었다.남매탑의 전설이 있는 사찰답게 청도 운문사와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과 삼성각이 있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1<공주 계룡산 동학사>

공주 동학사<동학사 공간배치>

대웅전이 있는 중심영역

공주 동학사 20230727_03<동학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06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17세기 전반 활동한 조각승 석준(釋俊), 각민(覺敏) 등이 불상 조성에 참여했다고 한다. 삼세불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형식이다. 임진왜란 이후 비로자나삼불상과 함께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9<대웅전 내부,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삼층석탑은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통일신라 때 조성되었다고 전하나 탑의 형태나 조각수법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4<대웅전 앞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동학사 삼층석탑
동학사 삼층석탑은 계룡산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전설에는 신라 성덕왕 22년(723)에 동학사를 지을 때 함께 만들어졌다고 하나, 탑의 모습으로 볼 때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원래 탑의 1층과 2층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2008년에 기단부와 3층을 복원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층 한 면에 자물쇠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삼성각은 산신.칠성.독성을 모시는 곳으로 우리나라 전통신앙과 관련된 공간이다.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찰 삼성각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이다. 동학사 불전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그 내력을 알 수 없지만 구한말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7<동학사 삼성각>

공주 동학사 20230727_06<삼성각에 모셔진 불화 중 칠성(칠원성군)을 표현한 그림>

동학사 삼성각
삼성각은 우리나라의 전통 신앙과 불교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공간으로, 산신.칠성.독성을 일컫는 삼성을 모시는 곳이다. 삼성 중 가운데 칠성은 별들의 우두머리이다. 인간의 복과 수명을 맡은 신으로 여래와 보살이 함께 있다. 산신은 재물을 담당하는 우리 민족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령의 모습니다. 독성은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는 존재로 지팡이, 염주, 불로초를 들고 있거나 어린 동자가 곁에 있기도 하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동학사 전각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에 중건되었다. 불전이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운문사와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수행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5<승려들의 수행공간>

공주 동학사 20230727_02<종무소가 있는 수행공간, ‘육화료’라고 한다.

동학삼사(숙모전, 삼은각, 동계사)

동학삼사(東鶴三祀)는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지(招魂閣祉)에 세워진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를 말한다. 이곳은 고려가 망한 직후 길재가 고려 태조,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그후 매월당 김시습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을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 또한 신라 박제상의 충절을 기려 고려초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13<동학삼사>

공주 동학사 20230727_15<숙모전>

공주 동학사 20230727_16<삼은각과 동계사>

동학삼사(숙모전.삼은각.동계사)
동학삼사(東鶴三祀)는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지에 세워진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를 말한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이색, 길재, 그리고 조선의 단종과 사육신 등 신라, 고려, 조선 3왕조의 충절 인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특히 숙모전은 신분과 관계없이 국왕, 재상, 관료, 학자, 서민, 노비 등 충절인 351위를 기리면서 왕을 모신 ‘전(殿)이라는 명칭이 갖는 권위가 있으며 유교와 불교가 어울려 제사하는 특별한 전통을 지닌 곳이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들어가는 길

동학계곡은 입구에서 관음봉고개까지 약 3.5km의 계곡을 말한다. 계곡은 숲이 울창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봄 동학, 가을 갑사라하여 계룡 5경으로 손꼽힌다. 계곡에는 사찰 출입문인 일주문과 함께 사당 출입문인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계곡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암자인 <길상암>, <관음암>, <미타암>, <문수암>이 있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25<동학사 입구 계곡>

공주 동학사 20230727_23<홍살문>

공주 동학사 20230727_22<동학사 일주문>

공주 동학사 20230727_21<일주문을 지나 동학사 들어가는 길>

공주 동학사 20230727_20<동학사 계곡>

공주 동학사 20230727_19<관음암>

공주 동학사 20230727_18<길상암>

공주 동학사 20230727_17<동학사와 동학삼사>

공주 동학사 20230727_12<동학사 앞 계곡>

동학계곡 신록
학바위 앞에서 관음봉고개에 이르기까지 약 3.5km의 동학계곡은 푸른숲에 둘러싸여 맑은 물소리, 새소리가 청량하다. 계곡의 입구 노거수속을 신선처럼 걷노라면 비구니의 강원이 있는 동학사에 이르고 바로 그 아래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충의 절신을 모신 삼은가, 숙모전, 동계사가 자리하고 있다. 동학사 앞에 눈을 높이면 멀리 쌀개능선과 서북능선이 시계에 다가서며, 계곡을 1.5km쯤 거슬러 오르면 산수의 조화미를 자랑하는 은선폭포에 이른다. 은선폭포를 지나 관음봉 고개까지 다소 가파르나 신록이 피어나는 봄의 계곡이 으뜸이며, 예로부터 봄 동학, 가을 갑사로 널리 알려져 있어 계룡산의 제 5경으로 일컫는다.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동학사(東鶴寺)
동학사는 713년 당나라 스님 상원조사가 지은 상원암(上院庵)에 연원을 두고있다. 상원암은 은혜를 갚으려는 호랑이 덕분에 여인을 만난 상원조사가 여인과 의남매를 맺고 함께 도를 닦았던 곳이다. 성덕왕 23년(724) 회의화상이 두 분을 기리기 위해 쌓은 탑이 현재 상원사지에 남아 있는 남매탑(보물)이다. 고려 태조 3년(920)에 도선국사가 지금의 동학사 자리에 사찰을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이 되었다. 고려 태조 19년(936), 신라가 망하자 류차달이 이곳에 신라의 시조와 박제상을 제사하기 위해 동학사(東鶴祀)를 건축하였고, 이후 사찰이 번창하자 절 이름도 동학사로 바꾸었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영조 4년(1728) 신천영의 난으로 사찰과 사당 모두가 소실된 것을, 순조 14년(1814) 월인선사가 신축하였으며, 고종 원년(1864) 만화 보선선사가 중창하였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2.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3. ‘동학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동학사;, 위키백과, 2023년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등운산 고운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2022년 가을 ‘등운사 고운사’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고운사(高雲寺)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최치원이 자신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통일신라말 도선이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후 사랓르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으며 조선중기 이후에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경북지역을 대표하는 5개 사찰 중 하나였다. 소장 유물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가운루, 삼층석탑, 연수전 등이 있다. 전시에는 사찰의 내력을 보여주는 주요 자료들과 함께 고운사에서 머물면서 큰 역할을 했던 고승들의 영정과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1<’등운산 고운사’ 특별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2<고운사 편액 조선말 ~ 근대,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3<대웅전 편액,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4<고금당 편액,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5
<우화루 편액, 조선 1809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6<고운사 중수기 현판, 조선 1887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7<모니극락양전불상개금기, 조선 1858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 중창기 현판, 조선 1902년 추정,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8<계원필경, 조선 1834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계원필경>은 신라 말기 고운사의 중창자인 최치원이 지은 문집으로 총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부터 14건까지는 879년 10월 이후 885년 3월 이전까지의 기록이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천능을 비롯한 중국 각 지역의 반란을 비판한 <토황소격문>이 포함된 글들이 실려 있다. 또한 15권부터 20권까지는 여러 시문 중 불교와 관련한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최치원의 불교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1
<호계첩 목판, 일제강점기 1919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2
<고운사 사적비 탁본,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9<석가불좌상, 조선 전기, 의성 고운사>

고운사 나한전에 봉안된 불상이다. 고운사 나한전은 원래 모니전(牟尼殿)이였으나 1990년대 현재의 대웅보전이 건립되며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참잠한 상호나, 무릎이 낮고 상체가 긴 상의 비례 등으로 보아 조선 전기인 15~16세기 사이에 조성된 상으로 보인다. 석조불좌상과 삼층석탑을 제외하고 17세기 이전의 성보를 찾아보기 힘든 고운사에서 나한전의 석가불좌상은 조선 전기 사찰의 연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찰령 개정에 따른 고운사 재산대장>에는 높이 3자(약 90cm)로 1482년의 제작시기가 남아 있는 석가불좌상 1구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나한전 상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0<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선 1695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 좌상의 주존이다. 신유한의 고운사사적비(1729)에는 1695년(숙종21)에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각승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상의 형식적 특징, 팔각 대좌 내부 천인상의 표 현으로 보아 탁밀 스님의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추정된다.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던 시기의 상이기 떄문에 조각승의선정 및 불사 전반에 깊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2<우순풍조만민함락 원패,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이 패는 방형의 패좌에 3엽의 연꽃을 조각하였고, 패두와 패신은 단청으로 채색하였다. 크기가 작고 장엄과 구조면에서 간략화되며, 하나의 나무로 패두와 패신을 제작하고 패좌로 결합하는 형태는 조선 후기 특징을 잘 보여준다. 덧칠된 패액의 붉은 바탕 아래로 ‘세자저하수만세’의 명문이 보이는 부분이 있어 본래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1<왕비전하수제년 전패, 조선 후기, 의성 고운사>

불전 내 불단 위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한 삼전패 중 하나이다. 패두는 왕실을 상징하는 용과 그름무늬를 깊게 새기고 금색.청색.적생 등 화려한 단청으로 마감하였다. 패신은 꽃무늬와 잎사귀문양을 새겼으며, 중앙에는 ‘왕비전하수제년’ 문구를 넣은 후 금칠로 마무리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3<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조선 1670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4<지장보살>

신유한의 고운사중수기(1729)에는 1670년(현종11)에 명부전과 존상들이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장보살상이 두 손을 낮게 두고 있는 점, 정방형의 얼굴에 기다란 귀와 매부리코로 대표되는 상호 표현 등에서 단응 스님의 특징을 보여 조각승을 추정해 볼 수 있다.이 시기는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며 불사를 관장하던 시기로 명부존상의 조성과 신경 스님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시왕상의 착의나 의습선 표현이 화려하며, 의복과 의자 내부에 다양한 인물상이 표현되어 있어 독특하다. 최근 이운 과정에서 지장보살좌상 대좌 하단 좌복의 명문에 1725년(영조1) 지장보살을 중수한 기록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3
<아미타불회도, 조선 1701년, 삼베에 채색,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5<아미타불>

고운사 극락전 아미타불회도로 소영 신경 스님이 증명하고 혜명 스님과 도문 스님이 조성하였다. 이 그림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6위의 보살이 시립해 있고, 두광 주변에는 2위의 타방불,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포함한 19대 제자, 북방다문천왕와 서방광목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고운사의 아미타불회도를 조성한 혜명스님과 도문스님은 17세말부터 18세기 초까지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소용돌이 형태의 금니문양과 오색화문의 표현은 같은 시기에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해웅, 상린, 의균 스님의 특징으로 화풍의 굘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6<사십이수관음보살도, 조선 1828년,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천수천안관음보살은 모든 병과 악업, 중죄를 없애주고 안락과 수명, 부귀를 주는 관음으로 널리 신앙된다. 경전에서는 ‘서수천안’의 형상에 대해 규정하지 않았으나 42개의손으로 표현되며 각 손마다 한 개의 눈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 앞의 손으 ㄴ수인을 결하고 있고, 18쌍의 손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각각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의 양쪽 허리 부근에는 촉지인과 설법인을 취한 화불이 표현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퇴운 신겸 스님은 경상북도 문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불산화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하였다. 활동 후반기에는 고운사에 주석하며 고운사의 불화 전반을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7<쌍수암 영산회상도, 조선 1887년,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쌍수암 영산회상도는 기존 영산회상도와는 다르게 난간을 두른 넓은 육각형의 단 안에 사각형의 대좌를 놓고 석가모니불과 보살, 십육나한을 비롯한 여러 존상들을 배치하였다. 난간 아래에는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을 표현하였다. 화면 전체적으로 적색과 군청색 계통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화기이 기록을 통해 하은 응상 스님을 비롯하여 한규, 범임, 서휘, 소현, 봉화 스님이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사불산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응상 스님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8<불영패, 조선 1696년, 의성 고운사>

불영패는 둥근 놋쇄거울과 불꽃무늬 장식, 대좌의 요소를 갖춘 경대의전형적인 형식을 하고 있으나, 명문에 ‘불영패(佛影牌)’라는 명칭이 있어 부처님의 모습이 어린 패, 즉 불성이 비치는 명경로 볼 수 있다. 이 패의 명문을 통해 업경대와 다른 명경대가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패의 바닥면에는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조각승 탁밀 스님과 보웅 스님이 조성에 참여한 기록이 있어, 불교 의식구와 공양구 제작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운사의 역사와 성보
의성 등운산 고운사(孤雲寺)는 사찰을 관통하는 계곡이 여러 전각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681년 창건된 이후 오랜 기간 법등을 이어 가면서 계곡을 따라 지금의 권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계곡은 현재 일부 복개하였으나, 가운루 아래로 계곡의 모습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고운사의 석조불좌상과 삼층석탑은 사찰의 창건 시기와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17세기부터는 고운사의 확장되는 사세를 살펴볼 수 있다. 1670년 명부전 건립, 1695년 극락전 아미타불좌상, 1701년 아미타불회도 등 고운사를 대표하는 성보들이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고운사는 1835년 큰 화재를 입고 여러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이를 중수하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이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본사로 영남 북주 지역의 사찰을 이끌고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9<각항등록, 조선 1802년, 의성 고운사>

<각항등록>은 1802년 고운사와 고운사의 말사가 조선 왕실과 관아에 다양한 물품을 진상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책의 본문에는 본사인 고운사를 시작으로 수정사, 운람사, 지보사, 주월사 등의 사찰에서 다양한 물품을 관납한 것을 차례로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통해 19세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고운사가 여러 사찰을 관할한 사실과 조선 후기 사원 경제에서 사찰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 파악할 수 있어 의미가큰 자료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0<어회계안, 조선 1895년 추정, 의성 고운사>

범패, 범음, 범무 등 불교 의식 작법을 어산(魚山)이라 칭한다. 어회계는 어장 스님들의 모임으로, <어회계안>은 모임원의 명단을 적어놓은 것이다. 서문에 어산은 공덕을 비롯하여 흥기를 기원하는 발원이 담겨 있으며, 좌목을 두어 스님들의 이름을 적었다. 여러 해에 걸쳐 기록된 듯 첫 좌목에 기입된 스님의 이름 아래에는 열반을 뜻하는 ‘적’이나 탈퇴를 뜻하는 ‘퇴’가 적혀 있으며, 새로 가입한 경우에는 가입한 해와 가입한 스님들의 이름을 적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1<추원록, 조선 1888년, 의성 고운사>

<추원록>은 재(齋)나 불공 시에 명복을 빌기 위한 영기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고운사 운수암에서 사용된 것이다. ‘영각 좌목’이라는 제를 보아 영각(影閣_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사명 유정 스님부터 함흥 치능 스님까지 추원을 비는 선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뒷부분에는 명복을 비는 소를 적어 의례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월 영민 스님
수월 영민(1817~1893) 스님은 함홍 치능 스님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고운사의 고승이다. 영민 스님은 편양 언기 스님의 4세손인 기성 쾌선 스님의 법맥을 이은 스님이다. 스님의 비명에는 수행자로서의 모습이 주로 확인되는데, 남암에서 결사를 조직하여 수행하고, 10년간 면벽수행을 진행하여 생전에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고운사의 산내 암자인 쌍수암에 주석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현대 고승인 용성(1864~1940) 스님에게 지도한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2<수월대사영찬 현판, 대한제국 1898년, 의성 고운사>

영찬은 진영에 기록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수월대사영찬의 경우 별도로 현판을 제작하여 진영화 함께 봉안하였다. 영찬에는 64과의 사리가 출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리학자 방산거사 허훈이 글을 지었으며, 수월당영민대사비 음기에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현판의 뒷면에 1898년 4월에 새겼다는 묵서가 남아 있어 영민 스님이 입적하신 후에 현판이 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4
<수월당대선사영민진영, 근대,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수월 영민 스님의 진영이다. 수월 영민스님은 깨달음의 상징적 결정체인 사리가 생전에 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은 1833년 17세에 의성 고운사로 출가하였다. 10년 동안 면벽 수도를 수행했고,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스승들을 찾아 정진하였다. 끝없는 수행으로 약 64과의 사리가 출현했으며 1893년 세납 71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3<화엄경도,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화엄경도는 80권본 <대방광불화엄경>의 내용을 간략하게 도해한 그림이다. 화면의 중하단부에는 일곱 개의 원 내부에 <화엄경>을 설한 일곱 곳과 37품의 품제, 설주보살이 명기되어 화엄경과 관련된 불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의 외곽부에는 호법신중이, 내부에는 불보살의 명호가 확인되는데, 이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화엄성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운사 소장 화엄경도는 예천 용문사의 화장찰해도(1869)와 같이 19세기 영남 북부지역에 유행했던 화엄 신앙을 반영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5
<함홍당대선사치능진영, 조선후기,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진영에 묘사된 함홍 치능 스님은 먹색 장삼과 홍가사를 수하고 화면 왼편을 바라보며 돗자리 위에 단정히 앉아 있다. 왼손은 주장자를 쥐고 염주를 건 오른손은 여러 경전을 쌓은 경상 위에 올려두었다. 펼쳐진 경전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이다. 영제 바로 옆에는 찬(讚)도 남아 있다. 치능 스님이 직접 지은 찬으로, 찬에는 ‘불자를 든 모습이 7할 쯤 비슷하다.’라고 하였으나 진영 속 스님은 주장자를 쥐고 있어 상이하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6
<차사 창건주의상조사진영, 일제강점기 1915년,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의상 스님은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국내에 10여개의 화엄종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 사상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러한 의상 스님은 681년 등운산 골짜기에 고운사를 창건하였다 전한다. 그림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의상 스님은 먹색 장삼을 입고 왼손에는 붉은색의 주장자를 들고 있다. 스님은 파란 바탕을 배경으로 화문석 위에 가부좌의 자세이며, 가는 필치로 날카로우며 강직한 얼굴이 묘사되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7
<송운당사명대사진영, 조선 1768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사명 유정 스님의 진영이다. 유정 스님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인 휴정 스님에 이어 승병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정 스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 고운사를 식량비축을 비롯해 부상병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승병들의 기지 역할로 이용했다고 전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4<대방광불화엄경소초>

소영 신경 스님
소영 신경(미상~1706) 스님은 환적 의천 스님의 법맥을 이었으며, 문도인 단응, 탁밀 스님 등과 함께 다양한 불사를 진행하였다. 이 스님들은 예천 용문사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84)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보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성보 중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1670), 극락전의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대세지보살상(1695), 아미타불회도(1701)는 신경 스님과 문도들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다. 또한 선종소영대사비가 고운사 승탑원에 남아 있어 신경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경 스님은 불사의 후원자로서 대곡사, 운람사, 광흥사 등 주변 사찰의 성보를 새롭게 조성하거나 중수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6<경복오본산고금기요, 일제강점기 1937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경북오본산고금기요>는 1937년 경북불교협회에서 발행한 책으로, 경상북도 5개 본산인 의성 고운사, 영천 은해사, 대구 동화사, 문경 김룡사, 경주 기림사의 주요 사건을 수록하였다. 각 사찰의 연포.문서.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개 본산의 창건과 중수, 각 사찰에서 입적한 고승들이 비문, 탑.불화.불상의 조성을 시간순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고운사 목에는 사찰의 창건부터 조선후기까지의 역사 자료를 집성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고운사의 연혁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7<청천집 권5, 조선 1770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조선 후기의 문인인 청천 신유한(1681~1752)의 문집이다. <청천집>에는 1729년 고운사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고운사사적비의 비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851년 의상대사가 고운사를 창건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려 초 운주화상과 천우조사의 중수, 1668년 가허루의 중수, 1670년 명부전 건립, 1695년 극락전 보수 등의 내용이 있어 고운사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8<대곡사 소조십육나한상, 조선 1694년, 의성 대곡사>

대곡사 나한전에 봉안된 나한상과 범천상이다. 대곡사 나한전에는 본래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의 삼존과 십육나한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55년 이후 전각이 해체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나한전의 존상배치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대곡사 나한전의 존상 배치와 제작 시기르 추정한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연구에 의하면 나한전의 존상들은 1964년에 소영 신경 스님의 증명으로 탁밀스님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조각승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9<운람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유물, 의성 운람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0<뒷편>

운람사 보광전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로,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11세기)과 더불어 총 27종 165점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중수기는 총 3매가 이어져 있는데, 각각 1602년.1704년.1741년에 불상을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의 중수 가운데 1704년에 거행된 불사에는 증명법사 신경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데, 이는 소영 신경 스님 법명의 다른 한자 표기이다. 신경 스님이 고운사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에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1<한글서간,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신민 스님이 응화원, 밀화원, 웅화원에게 쓴 편지이다. 응화원, 밀화원, 웅화원은 시왕상 발원문에 등장하는 단응, 탁밀, 보웅 스님으로 추정되는데 각 명칭은 친근한 의미로 부르는 호칭이다. 서간인 편지글은 사찰을 혼란스럽게 한 죄인에 대해 죄를 묻고 이를 추궁해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2<광흥사 시왕상 발원문,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광흥사 시왕상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이다. 발원문은 총 2점이 발견되었는데, 시주질에서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같다. 강희 31년(1692) 7월에 광흥사 시왕을 조성하였음을 밝히고 여러 물건의 목록, 시주한 시주자들과 상을 조성한 스님들을 밝혔다. 소영 신경스님을 증명으로 하여 단응, 탁밀 덕륜, 보웅 스님 등이 시왕상을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3<광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광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 명부 존상들은 발원문이 남아 있어, 1692년 7월 그믐날에 안동 학가산 광흥사에서 증명법사 소영 신경 스님과 단용, 탁밀 스님 등 15명의 스님들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운사 명부 존상과 비교하면 세부적인 표현에서 고운사 상의 특징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머리의 크기가 작아지고, 하체 부분이 세장하게 표현되어 신체 비례가 확연하게 변화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함홍 치능 스님
함홍 치능(1805~1878) 스님은 환성 지안 스님과 포월 초민 스님의 법맥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치능 스님은 산내암자인 운수암에 주석하였는데, 고운사에 강원을 열었으며 강백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화엄경도나 <대방광불화엄경소초> 등은 스님이 개설하였던 강원과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4<함홍당집, 조선 1897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함홍당집>은 함홍 치능 스님의 시문을 엮은 문집이다. 문집에 수록된 <행장>에 따르면, 스님은 안동에서 태어나 13세에 고운사에 주석하던 숙부이자 환성 지안 스님의 8세손인 송암 의탄 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스님은 출가 이후에도 유학자에게 경사자집을 수학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문집에는 사대부와도 두루 교유하며 주고받은 서정적인 내용의 시가 다수 남아 있는데, 유불(儒佛)에 통달하였던 스님의 넓은 견문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5<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선사함홍하상헌토기 현판, 조선 1880년, 의성 고운사>

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치능 스님이 지은 시를 현판에 새겼다. 역대 고승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고운사의 영각을 새로 지었는데 이떄의 소회를 밝힌 시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근차판상운 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치능 스님이 우회루 현판의 운을 따라 지은 시이다. 우회루의 이름에서 착안한 듯 이에서는 도교와 관련된 제재도 있어 눈길을 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6<선사함홍하상헌토기 현판, 조선 1880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7<운우삼영각상량문, 1868년, 의성 고운사>

함홍 치능 스님은 고운사으 산내 암자인 운수암과도 인연이 깊었다. <함홍당집>의 <행장>에 따르면 1835년에 소실했던 운수암을 몸소 재건하며 사찰으 기강을 엄숙히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만년을 보낸 만성이라 편액한 전각은 운암 옆이었다고 하였는데, 운암은 운수암으로 추정된다. 운수암영각상량문은 세로로 긴 한 장의 종이에 진한 먹으로 상량을 축원하는 글과 본암질 등을 가지런하게 적어 내렸다. 1868년 3월에 28일에 영각의 기둥을 세우고 4월 2일에 상량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치능 스님이 편찬한 사실도 잘 남아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8<고운사 운수암 등촉,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서문에는 부처님 앞에 등 또는 초를 밝히는 공덕을 설명하고 갑진 12월 환허 지한 스님이 서문을 지은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밖에 성암 우민, 만승 의홍 스님 등 역대 큰스님에게 헌재한 사실과 더불어 두천, 경묵 스님과 재가자인 권영주의 이름이 함께 남아있다. 등촉 공양의 공덕은 물론, 고운사의 법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운사의 고승
고운사는 여러 스님들이 주석하시며 오랜 기간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비롯한 스님들의 기록은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고운사의 사격이 확립되는 17세기 이후의 스님들을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소영 신경 스님은 고운사의 불사를 주관하며 여러 전각을 중수하고 존상을 봉안하였으며, 주변 지역 사찰까지 다양한 불사를 주관하였다. 함흥 치능 스님은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강백이자 문장가로 스님께 배움을 청하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수월 영민 스님은 수행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생전에 몸에서 난 사리가 나온 이적이 알려져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2022년
  2. ‘고운사 (孤雲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고운사’, 위키백과, 2023년

 

[일본 삿포로, 홋카이도 개척촌] 구 류운지 절(旧龍雲寺), 작은 농촌 사찰

일본 삿포로시 홋카이도 개척촌에 있는 ‘구 류운지 절(旧龍雲寺)’이다. 삿포로시 북쪽 농촌 지역에 있던 사찰 건물이다. 19세기 홋카이도에 이주하여 농촌에 정착한 농민들이 1893년 세운 사찰 건물이다. 연면적 38평 정도로 목조 단층 건물이다 내부는 비교적 넓은 편이다. 가운데 안쪽에 불단이 배치되어 있으며, 양쪽에는 위패를 모시는 감실이 있다. 홋카이도 이주 초기에 세워졌던 농촌 사찰 건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8<구 류운지 절(旧龍雲寺)>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1<출입공간>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2<내부 모습>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3<불상을 모신 불단>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4<왼쪽 공간>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5<오른쪽 공간>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6<안쪽에서 본 모습>

일본 홋카이도 개척촌 류운지 절 20230529_07<종루>

구 류운지 절(旧龍雲寺)
시노로산 류운지 절은 1886년경, 주민이 노력으로 창건된 정토종의 절이다. 이 건물은 1893년경에 신축 준공된 본당으로 홋카이도 개척기의 농촌 사원 건축물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면 입구의 참배공간은 다이쇼시대에 증축된 것이다.  (한국어판 가이드, 홋카이도 개척촌, 2023년)

<출처>

  1. 한국어판 가이드, 홋카이도 개척촌, 2023년
  2. 홈페이지, 野外博物館 北海道開拓の村, 2023년

* 옛 소재지: 札幌市北区篠路

원주 치악산 구룡사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위치한 사찰인 구룡사(龜龍寺)이다. 치악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영서지방을 대표하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하며 도선, 무학 등 이름있는 고승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석탑이나 불전 등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조선후기 숙종 때 대웅전과 보광루 등을 중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사찰 계곡 입구에는 조선시대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어 예로부터 울창한 숲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1<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아홉마리 용이 사는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상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용들과 도술시합을 하여 사는 용들을 물리치고 절을 지었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구룡사(九龍寺)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 사찰이 퇴락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찾아와 절 입구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진 것이라 하여 바위를 깨 버렸으나, 이후 절은 더욱 쇠약해져 갔습니다. 이때 한 도승이 나타나 절이 쇠약해진 것은 거북바위를 깨서 혈맥이 끊겼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그때부터 거북바위를 살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지금의 구룡사(龜龍寺)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안내문, 국립공원공단, 2023년)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은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과 보광루가 마주 보고 있으며 아래쪽에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사천왕문이 자리잡고 있다. 마당 서쪽에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으며 대웅전 양쪽으로 관음전, 응진전, 지장전 등 불전들이 자리잡고 있다.

원주 구룡사<구룡사 가람배치>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8<계곡에서 보이는 구룡사>

들어가는길/치악산 계곡

치악산은 16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비로봉(1,288m)를 중심으로  많은  봉우리들과 가파른 계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는 비교적 험한편이며 계곡의 수량은 풍부하다. 구룡사가 있는 계곡은 비로봉 북쪽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숲이 울창하고 맑고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6<주차장에서 구룡사로 들어가는 입구>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5<구룡사 계곡>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4<일주문>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3<국사단>

구룡사는 출입문은 사천왕문이다. 앞면 3칸의 2층 건물로 상당히 큰 편이다. 대형 사찰에서도 보기 힘든 규모로 최근에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1<사천왕문>

보광루는 구룡사 경내를 출입하는 문루이자 강당 역할을 했던 건물이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2층 문루 건물이다. 강당 역할을 하고 있는 2층 누각은 대웅전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후기 숙종 때(1707년) 다시 지은 건물이라 한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0<사천왕문에서 보이는 보광루>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1<보광루>

구룡사 중심영역

중심영역에는 대웅전과 보광루가 마주보고 있으며, 대웅전 양쪽으로 관음전 등 여려 불전들을 두고 있다.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들은 주로 마당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3<구룡사 중심영역>

주불전인 대웅전은 앞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후기 중건할 때 지었던 옛 건물은 2003년 화재로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원형에 맞게 복원한 것이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5<대웅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7<대웅전 내부>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8<대웅전에서 보이는 보광루>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6<보광루에서 보이는 대웅전>

대웅전 오른편에는 관음전, 응진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뒤로 독립된 형태의 요사채가 있다. 왼편에는 지장전과 삼성각이 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2<관음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7<관음전 내부>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6<응진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4<지장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9<삼성각>

대웅전 앞 마당 오른쪽에는 심검당, 설선당, 적묵당 등 요사채들이 자리집고 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8<마당 왼쪽 요사채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3<마당 오른쪽 요사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5<관음전 뒷편 요사채>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는 원주 8경중 제1경으로 유서깊은 사찰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이 668년(문무왕 8년) 창건하였다고 하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 절터의 깊은 연못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이 못을 메우고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비를 내려 온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물이 말라버리고 용 아홉 마리는 도망쳤다고 한다. 의상은 철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청건 이후 도선.무학.휴정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으뜸 사찰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우러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며,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06년(숙종 32년) 중수되었고, 여지도서 원주목조에는 ‘구룡사는 85칸이다. 치악산 북쪽에 있다. 절 앞에 용연이 있는데 홍순 가뭄이 들 때마다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구룡사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안석경의 삽교집에는 지금은 볼 없는 대승암과백련당, 월봉암 등 선승들이 살았던 암자와 호랑이를 만난일 등 구룡사 주변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절의 지정문화재는 강원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던 대웅전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보광루가 있다. 대웅전은 2003년 화재로 불에 타고 지금 대웅전은 2004년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그밖의 건물은 삼성각.심검당.설선당.적묵당.천왕문.종루.일주문.국사단 등 모두 19동이 있다. 구룡사에 이르는 길에는 곧게 자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와 관련이 있다. 매표소 부근에 있는 황장금표는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지하는 표시로, 구룡마을 입구와 치악산 정상 부근에 황장외금표가 함께 남아 있는데 이러한 예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안내문, 원주 구룡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원주 구룡사, 2023년
  2. ‘원주구룡사’, 위키백과, 2023년
  3. ‘구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세종 비암사, 통일신라 불비상 3점이 있던 사찰

세종시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사찰인 비암사(碑岩寺)이다. 1960년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에 계유년에 국왕 및 대신, 칠세부모를 위하여 절을 짓고 아미타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비롯한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적혀 있어 삼국통일 직후 백제유민들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도선(道詵)이 중창했으며 그 이후에도 크게 번창하지는 않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지도인 <여지도>에도 비암사(碑岩寺)가 표시되어 있다. 발견된 3점의 불비상은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경내에는 극락보전(보전), 삼층석탑,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세종 비암사 20230406_01<세종 비암사>

비암사는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마당을 조성한 후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삼층석탑과 극락보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요사채와 함께 주불전이 있는 영역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서쪽편에 축대를 높게 쌓고 극락보전과 명부전을 배치하였다. 산 정상부 아래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교적 마당이 넓은 편이다. 축대를 쌓은 사찰 입구에는 수령 10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어 사찰의 오랜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세종 비암사<비암사 가람배치(위성사진)>

세종 비암사 20230406_02<비임사 오르는 길과 느티나무>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 20230406_08<비암사 전경>

삼층석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고려시대 석탑이다. 몸돌 모서리에 기둥을 새긴 것 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등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통일신라 때 백제유민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3점의 불비상이 발견되었다.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 20230406_05<비암사 삼층석탑>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은 4각의 긴 돌 각면에 불상과 글씨를 새겨 놓고 이다. 정면에는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했다. 본존물은 부처가 설법할 때 손모양을 강조하고 있어 삼국시대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시보살상은 얼굴에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으나 머리에 둥근 광배가 남아 있다. 주위에 나한상, 인왕상, 작은부처, 비천상 등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유명전씨아마타불비상(국보)>

옆면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앉아 있는 작은 부처의 모습을 조각했으며 불상 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이 불비상을 조성하게 된 경위가 새겨져 있는데 계유년에 국왕 및 대신, 칠세부모를 위하여 절을 짓고 아미타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비롯한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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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새겨진 옆면>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정면에 새긴 불상은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반가상을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하고 있는 보살상을 표현하고 있는데 뒷면에 보탑을 크게 새긴 것으로 볼 때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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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 보물, 통일신라(7세기), 연기 비암사>

기축명아미타불비상(보물)은 앞면에 본존불인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고, 주변에 여러 자세의 불상들이 나열되어 있다. 본존불 좌우에는 보살상이 있고 나한상, 인왕상, 야차상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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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이 새겨진 아마타불과 보살, 보물, 통일신라(689년), 연기 비암사>

극락보전(보물)은 조선후기 17세기에 지어진 불전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일반적인 불전 건물과는 달리 옆면 2칸을 하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 형식적으로 간략화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는데 옆면을 1칸 줄였기때문에 내부는 협소한 편이다. 앞면 창호는 문설주 기둥이 있는 조선중기 이전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조선후기 불전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 비암사 20230406_11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보물)>

 세종 비암사 20230406_06<극락보전에서 본 마당>

세종 비암사 20230406_03<극락보전 앞 요사채>

대웅보전은 1996년에 새로 지어진 불전으로 주불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옆에는 명부전이 있으며, 뒷편에는 산신각이, 앞마당에는 큰 요사채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극락보전이 있는 마당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마당을 넓게 쓰고 있다.

세종 비암사 20230406_09<대웅보전이 있는 공간>

세종 비암사 20230406_05<대웅보전>

세종 비암사 20230406_10<명부전>

세종 비암사 20230406_07<대웅보전 앞 마당>

세종 비암사 20230406_08<요사채>

<출처>

  1. 안내문, 세종 비암사, 2023년
  2. “비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비암사”,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세종시, 2023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