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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태화산 마곡사, 충남지역 중심 사찰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있는 사찰인 마곡사(麻谷寺)이다.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고려중기 보조국사가 크게 중건했다고 한다. 국사당에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을 열었던 승려 범일을 모시고 있어 선종 사찰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세조가 이곳을 다녀가 ‘영산전’ 현판 글씨를 남겼으며, 임진왜란 이후 공주 충청감영의 지원을 받아 크게 중건하였다.  오늘날 수덕사와 함께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조계종 사찰로 약 70여개의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7곳의 사찰 중 하나이다.

공주 마곡사20230406_01<공주 마곡사>

마곡사는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 사찰로 가람의 배치에 형식적인 요소가 별로 없으며, 승려들의 수행을 위한 요사채 건물들을 많이 두고 있다.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대웅보전과 대광본이 있는 화엄신앙 공간을 북원이라고 하고, 남쪽의 영산전이 있는 선(禪) 수행 공간을 남원이라고 한다. 가람배치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비슷하다.

공주 마곡사<공주 마곡사 위성사진, 2023년>

들어가는 길

마곡사는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 온양과 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온양온천과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의 중간 지점 쯤에 있어 지역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마곡사를 하루정도 묵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입구 주차장에서 마곡천을 따라 연결되는 길은 중간에 일주문이 있어 사찰 경내를 오가는 길로 보이지만 원래는 공주와 온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2<마곡사 일주문>

공주 마곡사20230406_13<마곡천과 북원>

공주 마곡사20230406_14<남원>

마곡사는 출입문으로 해탈문과 천왕문을 두고 있다. 해탈문과 천왕문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해탈문 내부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동자상을 모시고 있는데, 이런 경우 보통 금강문이라고 부르는데 마곡사에서는 해탈문이라고 한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3<마곡사 입구>

공주 마곡사20230406_16<해탈문>

공주 마곡사 해탈문
마곡사의 정문으로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를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중앙 통로 양편에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 동자상을 모시고 있다. 고종 1년(1864)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공주 마곡사20230406_24<천왕문>

공주 마곡사 천왕문
천왕문은 해탈문에 이어 마곡사의 두번째 대문으로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안쪽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天上界)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할하는 신적 존재로,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이 불도를 따라 사는지 살피어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대웅보전과 석탑이 있는 북원 앞으로 마곡천이 흐르고, 그 위에 극락교라는 지나 북원으로 들어간다. 북원 입구에 누마루가 있는 강당을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별도 건물없이 넓게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5<마곡천과 극락교>

공주 마곡사20230406_26<계곡에서 보이는 남원>

공주 마곡사20230406_02<계곡에서 보이는 북원>

공주 마곡사20230406_04<북원 마당에서 보이는 극락교>

공주 마곡사20230406_40<대웅보전 아래 계곡>

공주 마곡사20230406_03<마곡사 극락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는 한반도 남쪽 지방에 위치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7개 산지승원을 일컫는 것이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창건된 이들 7개 사찰은 신앙과 수행,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 선불교의 특징인 자금자족이 가능한 사찰 관리, 승려 교육, 수행과 교리 학습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무형적, 역사적 측면도 확인할 수 있다. 경내에는 한국의 다양한 불교신앙이 수용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수의 구조물과 전각, 유물, 문서 등은 한국불교의 표용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산사는 조선시대 억압과 전란으로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성한 장소로서,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이 살아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북쪽 권역(북원), 교화공간

북원은 고려시대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에 응진당, 조사당 등 불전을, 동쪽에 요사채인 심검당 등을 두고 있다. 고려 때 중건한 전각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으며, 조선후기 효종 때 크게 중건하여 현재와 같은 가람배치를 이루었으며 그뒤 화재로 다시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0

공주 마곡사20230406_30<마곡사 북원>

마곡사 오층석탑(보물)은 2층 기단 위에 오층 탑신을 올려 놓은 오층석탑이지만 세부적으로는 기존 석탑과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탑신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고 있으며, 청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은 중국 원나라 또는 청나라에서 세운 라마교 불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고려말 원나라와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로서 의미가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7<마곡사 오층석탑(보물)>

대광보전(보물)은 마곡사의 주불전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화려한 다포계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내부 불단은 서쪽에 배치되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닫집을 꾸며 엄숙함을 더해주고 있다. 대광보전의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알 수 없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 순조 때(181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5<마곡사 대광보전(보물)>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단독으로 모시고 있는데 동쪽을 향하고 있다.  불상을 모시는 불단에는 닫집을 설치하였다. 전체적인 내부 모습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연상시킨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7<대광보전 내부>

대웅보전(보물)은 조선후기 효종 때(1651년) 각순대사가 마곡사 불전들을 중건할 때 다시 지은 건물이다. 불교 경전을 모시는 대장전으로 지은 건물인데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보시는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건물내부는 뚫려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넓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8<대웅보전(보물)>

공주 마곡사20230406_39<대웅보전 내부>

응진전은 선종 사찰을 성격을 잘 말해주는 수행을 하고 있는 승려들을 중요시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곡사는 크고 작은 암자들을 많이 두고 있으며, 다른 사찰에 비해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를 상당히 많이 두고 있다. 마곡사와 같은 선종 사굴산문 계열인 순천 송광사와 비슷하다. 응진전 현판은 강세황이 쓴 글씨라고 한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4<응진전과 조사당이 있는 공간>

공주 마곡사20230406_32<응진전>

공주 마곡사 응진전
이 건물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16나한은 중생에게 복을 주며, 중생을 바른 법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성자를 말한다. 철종 3년(185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면에만 창호를 달아 출입하도록 하고, 나머지 삼면은 회사벽으로 마감한 특징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공주 마곡사20230406_33<응진옆 요사채인 백범당>

조사전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불전이다. 원래 국사당에 모셔던 자장, 범일, 도선, 보조국사 영정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6<조사전>

요사채 건물인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 마당 동쪽편에 있는 ‘ㄷ’자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후기 상류층이 살았던 살림집을 연상시킨다. 마당을 향하고 있는 본채는 앞면 5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들이 있는 날개채가 달려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물 형태로 볼 때 거의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며 큰 사찰 요사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8<심검당>

OLYMPUS DIGITAL CAMERA<뒤쪽에서 본 모습>

고방은 2층으로 된 창고 건물로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방>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안쪽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앞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템플스테이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 공간>

공주 마곡사 북쪽 권역(북원)
마곡사 북원은 대광보전과 오층석탑이 있는 교화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태화산 산골짜기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내에는 모두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는데, 그 위치에 따라 남원과 북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마곡사는 약 8000여 평의 면적에 경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마곡천 계곡을 사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어 마치 두 개의 사찰이 자리한 듯 보인다. 이 중 북쪽 권역인 북원에는 대웅보전, 대향각, 응진전, 범종각이 있고, 승려들의 생활하는 공간인 심검당, 고방, 요사 및 백범 김구의 자취가 남아 있는 백범당과 향나무 등이 있다. 마곡사의 가람이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배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을 보면, 1650년 각순 스님이 공주목사 이태연의 도움을 받아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지어 북쪽 구역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예산 안곡사에서 범종을 보내왔고, 1741년에 법당의 중종을 만들었다. 오층석탑의 북쪽에 대광보전을 짓고, 다시 축대 위에 대웅보전이 자라한 ‘일탑쌍금당’식의 배치는 매우 휘귀한 사례이다. 마곡사는 한때 승려가 천 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하였지만 1782년에 화재로 대법당을 비롯한 천여 칸의 건물이 불아 타는 사건이 있었다. 그 다음 해에도 화재가 일어나 대광보전도 소실된 채 탑과 불상, 대웅보전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제봉당 채규 스님이 중심이 되고 충청도관찰사 심풍지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785년에 대광보전을 다시 세우고 1788년에 표암 강세황이 쓴 ‘대광보전의 현판을 걸었다. 대웅보전은 본래 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전’이었는데 이 시기에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 1791년 응진전, 1789년에는 심검당도 지었다. 그 후 수차례의 보수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남쪽 권역(남원), 수행공간

마곡사 남원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강당들이 배치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주불전에 해당하는 영산전에는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맞은편에는 큰 규모의 강당인 흥성루가 있다. 마당 양쪽으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남쪽 건물은 수선사, 북쪽 건물을 매화당인데 북쪽 건물의 규모가 큰 편이다. 매화당 뒷편 마당에는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명부전이 있으며 그 뒷편 언덕에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계곡방향으로 열려 있는 북원과는 달리 담장이 둘러져 있다. 흥성루 아래 큰 길은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5<마곡사 남원>

영산전(보물)은 조선후기 효종 때(1651년) 각순대사가 마곡사를 중건할 때 다시 지은 불전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으로도 불린다. 마곡사 남원(남쪽영역)에서 주불전 역할을 하고 있다. 영산전에 모셔진 칠불좌상은 조선후기 단응과 열아홉명의 조각승의 제작한 작품으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8<공주 마곡사 영산전(보물)>

내부에는 칠불좌상과 천불상이 모셔져 있다. 칠불좌상은 수조각상 단응이 1681년 2월부터 6월까지 열아홉 명의 조각승을 이끌고 제작한 불상이다. 일곱 부처 중 석가모니로 불리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오른손을 무릎에 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크기도 다른 여섯구의 불상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더 크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9<영산전 내부>

강당건물인 흥성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다. 보통 강당 건물은 법회가 열리는 공간이자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수행공간에 있는 마곡사 강당은 신도들보다는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주로 사용하는 장소로 보인다.  누각처럼 바깥 계곡과 큰 길을 내려다 볼 수 있지만 주로 판문으로 닫혀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2<마곡사 흥성루>

공주 마곡사20230406_17<바깥에서 본 모습>

매화당은 ‘ㄷ’형 건물로 앞면 6칸, 옆면 6칸의 상당히 규모이다. 승려들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0<매화당>

공주 마곡사20230406_06<뒷편에서 본 모습>

공주 마곡사20230406_09<바깥에서 본 매화당>

수선사는 마당 남쪽에 있는 요사채 건물로 ‘ㄱ’자형 한옥 형태를 하고 있다. 일반한옥과는 달리 부엌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1<수선사>

공주 마곡사20230406_10<바깥에서 본 수선사>

매화당 뒷편 마당에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이 있으며 언덕에는 산신각이 있다. 명부전과 산신각은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매화당과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05<명부전>

공주 마곡사 명부전
이 건물은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 곳으로 1939년에 건립되었다.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구원의 상징으로, 모든 인간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보살이다. 시왕은 인간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죄가 크고 작음을 가리는 10명의 왕으로 염라대왕은 그 중 다섯 번째 왕이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명부전 뒷편 언덕에는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자장, 범일, 도선, 보조국사를 모신 국사당이었는데 북원에 조사당을 지으면서 산신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08<마곡사 산신각>

공주 마곡사 국사당(산신각)
마곡사 국사당은 자장.범일.도선.보조(지눌) 등 신라~고려 시대 최고의 승려인 국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조선후기까지 ‘삼국사명당’이라 하여 세 분의 국사만 모시다 보조국사의 영정을 더하였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마곡사를 지은 후 도선이 보수하였으며 신라 말에 범일이 절을 다시 세웠다는 설화에도 나타나듯 모두 마곡사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고려 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은 폐허가 되어 도둑들이 숨어 지내던 마고사 터에 와 춤을 추며 “금방울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울린다.”라는 시를 읊고 절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마곡사의 승려들이 옛 고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개울 서남쪽에 작은 사당을 세운 것이 국사당의 기원이다. 지금의 건물은 1796년에 지은 것이며, 1868년에 ‘삼국사당’ 현판을 걸었다가 현대에 산신도를 두면서 ‘산신각’으로 바뀌었다. 국사당 옆에 천 년이 된 잣나무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바람에 쓰러져 그 나무를 영은암의 기둥으로 썼다고 한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공주 마곡사20230406_07<산신각에서 내려자 보이는 북원>

공주 마곡사 남쪽 권역(남원)
마곡사 남원은 영산전이 있는 수행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의 두 공간으로 나뉜다. 북원의 대광보전과 남원의 영산전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사찰이 두개인 것처럼 보인다. 북원과 남원 양쪽에 불전, 요사, 누각 등 사찰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건물이 각각 배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남원은 마곡사의 입구로 오른쪽은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연결되고 왼쪽은 영산전과 명부전,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가람 배치는 1920년에 발간된 <고적조사보고>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의 배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남원은 영산전을 주불전으로 삼고 있다. 영산전의 앞에는 ‘홍성루’가 있고 북쪽에는 매화당, 남쪽에는 연향각이 있다. 매화당과 연향각은 각각 건물을 담장으로 둘러싸서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현재와 비교해 보면 훨씬 동쪽에 있다. 즉, 현재의 종각 부근에 다리가 있어 천왕문을 지나면 동쪽으로 이동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은 높이 11m, 너비 7m에 이르는 대형 괘불로 17세기에 조성된 작품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대형 화면에 가득히 그려져 있다. 남아 있는 글에 따르면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했으며 석가탄신일과 수륙재, 49재에 쓰였던 그림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형태, 화려한 색채 등이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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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

마곡사의 연혁
마곡사는 100여 개에 이르는 충남.대전.세종 지역 조계종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개 사찰 중 하나이다. 태화산에 자리를 잡은 마곡사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곳은 산과 물이 ‘쌍태극’을 이루는 명당이라 전란이나 흉년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도 하고 신라의 보조선사 체징이 세웠다고도 한다. ‘마곡’이란 말의 유래는 보철화상이 설법할 때 계곡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치 삼밭을 이룬 것 같아 ‘삼골’, 즉 ‘마곡(麻谷)’이라 하였다는 설과 신라의 고승 무염이 중국 마곡사의 법을 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 시대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의 본존불이 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 불교는 힘을 잃었지만, 마곡사에는 왕실의 손길이 이어졌다. 1465년경 세조가 찾아와 직접 쓴 ‘영산전’이란 글을 내리며 타고 왔던 가마를 남겨 주었고, 공주목사와 충청감사는 재물을 지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의 집결지이기도 했는데 전란으로 절이 황폐해지자 1650년에 ‘각순’이란 스님이 절을 다시 세워 제 모습을 찾았다. 이때 승려들을 모아 놓고 종이를 생산해 나라에 진상하고 기와를 구워 살림을 꾸려갔다. 1782년 큰불이 나서 건물이 모두 탔지만 조정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제 모습을 찾았다. 1970년 정조의 아들 순조가 태어났을 때에는 마곡사에서 천일기도를 올린 덕분이라 하여 승려들을 힘들게 했던 종이를 진상하는 공역을 없애는 동시에 충청도의 으뜸 사찰로 지정하였다. 그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전국 31본산 중 하나가 되었다. 이곳 마곡사에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1898년에 23세의 백범 김구도 마곡사를 찾아와 자취를 남겼다. 마곡사에는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다. 마곡천 물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영산전 등 수행 공간이 있고 북쪽에는 대광보전 등 교화 공간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마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위키백과, 2023년

공주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에 있는 심검당(尋劍堂)과 고방(庫房)이다.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 마당 동쪽편에 있는 ‘ㄷ’자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후기 상류층이 살았던 살림집을 연상시킨다. 마당을 향하고 있는 본채는 앞면 5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들이 있는 날개채가 달려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물 형태로 볼 때 거의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며 큰 사찰 요사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 마곡사 심검당과 고방 20230406_01<공주 마곡사 심검당, 2023년>

OLYMPUS DIGITAL CAMERA<공주 마곡사 심검당, 2011년>

심검당은 승려들이 생활하면서 수행하는 공간이다. 마곡사 심검당은 조선후기 부유층이 살았던 대저택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은 ‘ㄷ’자형으로 부엌과 마루,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뒤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북쪽편에서 본 모습>

고방은 2층으로 된 창고 건물로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마곡사 고방>

OLYMPUS DIGITAL CAMERA<윗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2층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에서 보이는 목판>

공주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심검당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스님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방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ㄷ’자형으로 온돌방과 부엌 및 마루를 만들어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기둥은 네모기둥과 둥근기둥을 혼합하여 세웠고, 마루 한편에는 효종 5년(1654) 충청도 대흥 안곡사에서 만들어진 마곡사 동종과 목어 등이 있다. 고방은 심검당 북쪽에 있는 2층으로 된 창고이며,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방 위층에는 조선시대 문신인 조익(1579~1655)과 그의 셋째아들인 송곡 조복양(1609~1671)의 문집 목판인 포저유서 및 송곡문집 판각 등이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에는 심검당 외에도 많은 요사채들을 두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나 사찰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많은 방들을 두고 있다. 심검당 앞 뒤로 작은 요사채가 있고 바깥쪽에 템플스테이를 위한 큰 건물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북쪽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입구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 템플스테이를 하는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큰 요사채 건물>

 <출처>

  1.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당진 신암사(申庵寺)

충남 당진시 송악읍에 있는 사찰인 신암사(申庵寺)이다. 고려후기 능성구씨 4대손인 구예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가족들이 부인 아주신씨가 창건한 사찰이다. 신씨가 세운 암자라 하여 신암사라 불렀으며 그 이후 내력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창건 당시인 14세기에 조성된 금동여래좌상(보물)이 모셔져 있어 사찰이 내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진 신암사 20230316_01<당진 신암사>

당진 신암사 20230316_04<극락전>

당진신암사금동불좌상
<당진 신암사 금동여래좌상(보물)>

당진 신암사 금동여래좌상
신암사에 모신 불상으로 고려 충숙왕 때 능성구씨의 4대 손인 구예가 가교리에 터를 잡으면서 가문의 원찰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상체가 장대하고, 얼굴은 잔잔한 미소르 띄고 있으며, 귀가 길게 내려와 있다. 하체의 넓고 당당한 모습은 얼굴 및 상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법의가 양 어깨에서 내려와 들고 있는 오른손에 걸려 배로 이어지고 있으며, 왼쪽 법의 속에 드러나 있는 장식 달린 옷과 배 앞에는 나비형 띠매듭이 있다. 이 불상은 14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서산 문수사나 청양 장곡사의 불상과 비슷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안내문, 당진 신암사, 2023년)

당진 신암사 20230316_03<산신각>

당진 신암사 20230316_07<요사채>

당진 신암사 20230316_08<사찰 앞 연못>

<안내문>

  1. 안내문, 당진 신암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신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당진 영탑사, 옛 면천군 읍치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찰

충남 당진시 면천면에 있는 영탑사(靈塔寺)이다.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중기에 보조국사가 5층석탑을 세운 뒤 영탑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말 무학대사가 유광전 내부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게 하면서 절을 중건하고 5층석탑을 뒷편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뒤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면천군 읍치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 중심사찰로 호국사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며 자료 사진과 현재의 전각 등을 비교해볼 때 대웅전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소장 유물로는 금종비로자나불 삼존좌상(보물), 칠층석탑, 약사여래상 등이 있다.

당진  영탑사 20230316_01<당진 영탑사>

영탑사 전각은 동쪽편 언덕에 무학대사가 불상을 새겨 모시게 한 불전인 유리광전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산신각이 있고 아래쪽에 주불전인 대웅전과 금동비로자나불 삼존좌상(보물)을 모신 인법당, 요사채인 적묵당 등이 있다.

당진 영탑사<영탑사 가람배치>

당진  영탑사 20230316_03<영탑사 입구>

당진  영탑사 20230316_02<영탑사 들어가는 길>

당진  영탑사 20230316_04<영탑사>

유리광전에는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높이 3.5m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고려말 무학대사가 이곳에 불상을 조각하고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읍성이 남아 있는 면천군은 조선시대 서해안 연안물류의 중심지로 조선초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바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진  영탑사 20230316_10<유리광전과 요사채>

주불전인 대웅보전은 최근에 새로 크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옆으로 작은 불전건물인 인법당이 있다. 인법당에는 고려시대 불상인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보물)이 모셔져 있다.

당진  영탑사 20230316_06<주불전인 대웅전>

당진  영탑사 20230316_09<불상이 모셔진 인법당>

당진  영탑사 20230316_21<창문 안으로 보이는 삼존불상(보물)>

보물_당진_영탑사_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_20160728-02_문화재대관(보물-불교조각1)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 삼존좌상(보물)>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 삼존좌상, 보물
영탑사에 모셔진 불상으로서 8각형 연꽃무늬의 대좌 위로 본존불인 비로자나 부처님과 문수, 보현의 좌우 협시보살이 함께 주조되어 있다, 본존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얼굴 상호(相好)는 볼이 풍성한 모습의 네모진 형태를 띄고 있으며 가늘게 내려 뜬 눈, 오똑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 등이 전형적인 고려 불상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은 모습과 손 모양의 수인이 동일하며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삼존불의 받침인 좌대는 연꽃 모양으로서 좌대에서 나온 두 개의 연꽃 줄기는 좌위 협시보살의 좌대를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안내문, 당진 영탑사, 2023년)

당진  영탑사 20230316_11<인법당과 뒷편 요사채>

당진  영탑사 20230316_07<맞은편 요사채인 적묵당>

당진  영탑사 20230316_05<영탑사에서 보이는 들어오는 길>

<출처>

  1. 안내문, 당진 영탑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영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예천 용문산 용문사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에 있는 용문사(龍門寺)이다. 통일신라 경문왕 때(870년) 승려 두운이 창건한 사찰로 절을 창건할 때 용이 영접하였가고 하여 용문사(龍門寺)라 하였다. 고려 중기 의종 때(1165년) 승려 조응이 크게 중건하였다고 하며 윤장대가 있는 대장전(국보)는 이때 처음 조성되었다고 한다. 티벳불교에 볼 수 있는 마니차(摩尼車)와 같은 형태인 윤장대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나라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성종의 폐비 윤씨와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의 태실이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전각들이 크게 중건되었다. 한국 불교의 큰 업적을 남긴 승려를 배출한 곳은 아니지만 교통요지에 위치하고, 지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번창했던 사찰로 보인다. 소장유물로는 대장전과 윤장대(국보), 감역교지(보물),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팔상탱(보물), 괘불탱(보물) 등이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01<예천 용문사>

용문사는 산정상 아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공간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출입문인 회전문, 문루인 해운문, 주불전인 보광명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동쪽에 대장전을 비롯한 불전들이, 서쪽에 요사채들이 주로 배치되어 있다.

예천 용문사<용문사 가람배치>

예천 용문사 20221130_024<용문사 경내>

예천 용문사 20221130_014<응진전 앞에서 보이는 모습>

예천 용문사 20221130_020<관음전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용문사는 예천군 용문면소재인 금당실마을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용문면 일대는 양반들이 많이 살았던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경제력이 높은 고장이다. 사찰은 용문산(해발 770m) 중턱 400m 정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마을과 가까워 예로부터 신도들이 많이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 출입문으로는 일주문, 회전문이 있으며 신도들을 위한 공간인 큰 문루가 2곳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28<용문사 일주문>

예천 용문사 20221130_029<회전문>

예천 용문사 20221130_030<회전문에 모셔진 사천왕상>

주불전이 있는 경내를 출입하는 문루인 해운루는 앞면 5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사찰을 찾는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강당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소백산 용문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31<해운루>

예천 용문사 20221130_032<해운루 옆 석축>

해운루 동쪽에는 대장전과 마주보고 있는 누각인 자운루가 별도로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백성들이 짚신을 만들었던 유서깊은 건물이라 한다. 해운루와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05<자운루>

예천 용문사 자운루
용문사 자운루(慈雲樓)는 용문사 경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장전을 마주 보고 있는 누각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자엄대사가 고려 의종 20년(1166)에 처음 세웠고, 조선 명종 16년(1561) 및 광해군 13년(1621) 두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후 1979년에 다시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운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이층 누각 건물로, 위층과 아래층에 둥근 기둥을 각각 따로 세웠다. 전체적인 건축 양식은 조선 중.후기의 기법으로 보인다. 처음 건립 당시의 모습에서 다소 변화는 있으나, 장식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익공계 수법으로 꾸몄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의 회담 장소였으며, 백성들이 승병들을 돕기 위해 짚신을 만들었던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안내문, 예천 용문사, 2022년)

용문사의 주불전은 비로자나불과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를 모신 보광명전이다. 그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은 1515년에 중수했다는 발원문이 발견되었으며 조형미나 조각수법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24<용문사 중심 영역>

예천 용문사 20221130_004<주불전인 보광명전>

예천 용문사 20221130_027<보광명전 내부>

대장전은 불경을 보관하는 불전으로 내부에는 불경을 보관하는 윤장대가 있다. 고려 명종 때(1173년) 조응대선사가 처음 조성했으며 그후 여러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크게 수리한 것으로 발원자와 건립시기, 건립목적이 기록으로 정확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26<대장전(국보)>

내부에는 조선후기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상(보물)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이 모셔져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21<바깥에서 보이는 내부 모습>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과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은 17세기에 단응(端應)을 비롯한 9인의 조각승이 공동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목조아마타여래삼존상은 가운데는 아미타여래, 왼쪽은 관세음보살, 오른쪽은 대세지보살을 표현하고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08<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윤장대는 불경을 보관하는 일종의 책장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윤장대를 돌리면 불경을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본다고 여겼다. 고려중기 이후 원나라를 통해 전해진 티벳불교에 볼 수 있는 마니차(摩尼車)와 같은 형태이다. 오른쪽에 있는 윤장대는 여덟면을 빗살면으로 꾸몄는데 내부에 경전이 모셔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왼쪽은 8면에 각기 다른 꽃살문으로 장식하고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07<오른쪽 윤장대(국보)>

예천 용문사 20221130_006<왼쪽 윤장대(국보)>

이외의 불전으로는 석가모니 제자들을 모신 응진전,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천불전, 산신각 등을 두고 있다. 건물들은 대부분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10<명부전>

예천 용문사 20221130_011<명부전 내부>

예천 용문사 20221130_012<응진전>

예천 용문사 20221130_013<응진전 내부>

예천 용문사 20221130_016<관음전>

예천 용문사 20221130_017<관음전 내부>

예천 용문사 20221130_019<천불전>

예천 용문사 20221130_018<산신각>

용문사는 신도들이 많이 찾는 사찰로 수행하는 승려들이나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많은 요사채를 두고 있다. 적묵당은 인조 때 지었다고 하며 응향각, 진영당, 감로당, 동향각, 서향각 등 여러채의 요사채 건물들이 있다. 대부분 최근에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09<대장전 옆 진영당>

예천 용문사 20221130_015<대장전 뒷편 만월당>

예천 용문사 20221130_003<영남제일강원>

성보박물관에는 감역교지(보물), 팔상탱(보물), 영산회 괘불탱(보물) 등 문화재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예천 용문사 20221130_023<성보박물관과 요사채들>

예천_용문사_감역교지(醴泉_龍門寺_減役敎旨)<예천 용문사 감역교지(보물)>

예천용문사영산회괘불탱
<예천 용문사 영산회 괘불탱(보물)>

예천용문사팔상탱<예천 용문사 팔상탱(보물)>

 <출처>

  1. 안내문, 예천 용문사,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