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산성

거제 둔덕기성(사적), 견내량을 지키는 통일신라 산성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둔덕기성(屯德岐城, 사적)이다. 거제도 섬의 관문이자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이 견내량이 내려다 보이는 우봉산(해발 325 m)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7세기 신라 때 처음 쌓았으며 고려 때 보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상사리(裳四里)’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때 설치된 상군(裳郡)과 경덕왕 때 거제군의 치소(治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 무신란 때 폐위된 의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폐왕성(廢王城))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 기록에 남아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를 통제하기 위해 주요 거점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1-20220221<거제 둔덕기성(사적)>

둔덕기성은 우봉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26 m 정도이다.성벽의 높이는 최고 4.95 m 정도로 중간크기의 납작한 돌을 촘촘히 쌓은 통일신라 산성의 축성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 서, 남문 3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서문은 통일신라 산성에서 볼 수 있는 현문식 산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루을 올렸던 초석들이 성문터에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사적)<둔덕기성 공간배치>

거제 둔덕기성 (사적) 03-20220221<둔덕기성 내부로 올라가는 탐방로>

거제 둔덕기성 (사적) 04-20220221<복원작업하는 과정에서 만든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성문터는 아님)>

동문과 남문 사이 성벽 일부를 복원했는데 판석 형태의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신라 산성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에는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5-20220221<복원된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6-20220221<복원된 동남쪽 성벽(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0-20220221 <복원된 성벽 끝부분>

거제 둔덕기성 (사적) 09-20220221<남문 부근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2-20220221<남문 부근>

남문은 동쪽으로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과 한산대첩이 있었던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거림리 일대에서 성안으로 출입하는 성문인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 때 성벽을 보수하면서 성문을 새로 낸 것으로 밝혀졌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석이 확인되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4-20220221<남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5-20220221<남문과 주위 성벽(바깥쪽)>

남문지
둔덕기성의 남문지는 동쪽으로는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 일대가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지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밝혀 졌다. 둔덕기성 남문의 경우, 고려시대에 삼국시대 성벽 바깥쪽으로 성벽 일부를 확장하면서 새로 문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문지는 허튼층쌓기하여 삼국시대 문지에 비해 정교함은 떨어 진다. 통로부 내측에 전면 1칸, 측면 1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작은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지와 서문지 사이의 간문(間門)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 남문지 안쪽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성벽은 바른층쌓기 하였으며, 하부에는 성벽 보강시설인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6-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3-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안쪽)>

서문은 서쪽 견내량과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고려 때 성을 수리하면서 성문을 크게 하고 문루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큰 문루가 있었던 초석이 남아 있다. 견내량과 통영 방향에서 성안을 출입할 때 사용된 성문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8-20220221<서문 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9-20220221<서문과 문루 건물 초석>

거제 둔덕기성 (사적) 17-20220221<서문 남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0-20220221<서문 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1-20220221<서문과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6-20220221<서문 북쪽 성벽(안쪽)>

서문지(西門址)
둔덕기성 서문지는 서쪽으로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서문지는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 (1170년)를 전후하여 동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부의 고려시대 계단시설 아래에 삼국시대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서문지도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고려시대에 수축하여 사용 하였는데, 출입이 용이한 평문식으로 조사되었다. 문지는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 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웅장한 문루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서문 북쪽으로는 주위를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장대역할을 정상부가 있다. 정상부에는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몽돌을 모아 놓은 석환군과 식량 등을 저장했던 저장고가 있다. 정상부 전망대에 북쪽으로 고성 앞바다와 견내량 해협, 서쪽으로는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한산대첩 당시 견내량을 지나는 배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5-20220221<정상부 전망대>

거제 둔덕기성 (사적) 28-20220221<북쪽 고성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9-20220221<견내량과 통영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4-20220221<석환군>

석환군(石丸群)
석환은 인근 바닷가의 몽돌을 투석용 무기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성내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대부분 직경 10~20cm 크기의 원형 및 타원형 몽돌로서 성내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특히, 성내 정상부 암반의 남쪽에 연접한 장타원형의 넓은 범위에서 약 2,000여 개 정도로 추산되는 석환군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삼국 ~ 조선시대 성곽에서 성내 농성시 방어용 투석자로 사용된 석환이 흔히 발견되는데 이와 같이 대량으로 확인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남해 임진산성에서 석환군이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우리나라 산성 중 성내에 성황당을 짓고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사례도 있어 둔덕기성의 제사장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주변에서 출토된 기와 및 도기편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30-20220221<저장고 터>

저장고
둔덕기성의 성내 최북단에 위치하는 저장고는 성내에서 소요되는 여러 가지 식품류와 경작 등을 위한 씨앗류 등의 지장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장고는 먼저 고려시대 북쪽 성벽 하부의 자연암반층 및 기존 대지조성 층을 1~1.7m 깊이까지 방형으로 굴착한 후, 굴착면에 덧대어 방형석축을 조성하였다. 그 후 바닥과 사방에는 0.6~0.7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방온、방습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내부 에는 정방형으로 ‘田’자 형태의 목곽을 설치하고, 내부에 ‘十’ 자상으로 구획된 4개 의 공간에는 평평한 할석을 깔아 바닥면을 조성하였다. 저장고는 크게 1회 이상 수리, 보수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기와류 등으로 보아 삼국 ~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둔덕기성 저장고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인근의 고령 주산성 의 저장고(목곽고)와도 동일한 구조 및 성격을 보이고 있어 삼국시대 산성의 성내 저장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동문은 조선시대 오양역이 설치되었던 북쪽의 오량성과 남쪽 거림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안으로 들오은 출입문이다. 동문은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출입하는 현문식 성문 구조가 남아 있다. 성문 안쪽에는 고려 때 문루를 설치했던 초석들이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31-20220221<동문과 남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6-20220221<동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41-20220221<현문식 성문>

거제 둔덕기성 (사적) 35-20220221<동문 북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7-20220221<동문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2-20220221<동문 남쪽 성벽(바깥쪽)>

동문지
둔덕기성 동문지는 북쪽의 오량리와 남동쪽의 거림리에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종착지로서, 삼국 ~ 고려시대의 거제 치소지가 위치하는 거림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주요 통로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 되었 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 거제도 (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서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문지 아래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동문지는 사다리 등을 통해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현문(懸門, 일명 다락문) 구조이다. 통로부 너비는 약 8.8m에 이르며, 문지의 성벽 두께도 7~9m로 주변 성벽보다 훨씬 두껍게 축조하였다. 외벽은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축조 하였으며, 기저부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기단보축시설로 보강하였다. 고려시대의 동문지는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수축하여 현문식으로 사용하였다. 문지 성벽은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상당히 웅장한 문루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둔덕기성은 통일신라때 거제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내부에는 통일신라와 고려 때 치소역할을 했던 건물터가 있으며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모아 두었던 연못 형태의 집수조가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1-20220221<둔덕기성 내부>

거제 둔덕기성 (사적) 32-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3-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9-20220221<복원된 집수조>

성내 건물지
성내 건물지는 둔덕기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로서 둔덕기성 운용 당시의 정치, 행정, 생활, 제의 등과 관련된 시설로 구분된다. 특히, 성내 중심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기성의 핵심시설이 위치할 것으로 추정되어 2016년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국 ~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건물지의 기단석열, 초석 및 적심, 수혈 등의 유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40-20220221<둔덕기성 남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거제 둔덕기성(屯德崎城)은 7세기 신라 시대 축조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懸門式) 구조인 동문지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 시대에 보수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 인화문 토기, ‘상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청자 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이 성은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및 경덕왕대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는 등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등면과 둔덕면의 경계가 되는 우봉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526 m이고 최고 높이가 4.85 m이다. 성 안에는 여러 곳에 건물터와 연못 터가 남아 있고, 북쪽에는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던 수로 변에는 아직도 ‘전하도목(殿下渡目)’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으며 ‘고려골’이라 부는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왕을 받들어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둔덕면에 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옥산성, 거제현 읍치를 지키는 작은 산성

경남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옥산성(玉山城)이다. 거제현 관아가 있는 동상리 뒷편 수정봉(141m) 정상부에 쌓은 산성으로 둘레 778.5 m이다. 외형상 삼국시대에 쌓은 작은 산성처럼 보이지만 구한말 고종 때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곳에 있는 비석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1873년) 거제부사가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한 읍치를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쌓으려 했으나 조정의 허락을 받지 못해 관아 뒷편 수정봉에 산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했다고 한다. 성안에는 큰 우물과 군사업무 목적으로 지은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었던 구한말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거제 옥산성 13-20220221<거제 옥산성>

성문은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과 서문의 규모가 크고 형태도 잘 보존되어 있다. 서문은 관아가 있는 읍치와 연결되는데 약 700 m 정도 떨어져 있다.

거제 옥산성<거제 옥산성>

거제 옥산성 3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3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12-20220221<서문 내부>

동문을 들어서면 옥산성 정상부에 세워진 작은 정자가 보인다. 원래 사방을 감시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약간의 평지와 내성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낮은 성벽이 남아 있다.

거제 옥산성 01-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2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서문>

거제 옥산성 03-20220221<옥산성 내부에 있는 낮은 성벽>

거제 옥산성 02-20220221<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남쪽 성벽에는 작은 암문으로 보이는 성문이 보인다.

거제 옥산성 05-20220221<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5-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4-20220221<남쪽 성벽 아래 지역>

옥산성 동쪽편에 약간의 공간이 있으며, 군사업무를 위한 건물이나 창고 등은 동문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거제 옥산성 1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1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08-20220221<동문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06-20220221<동문 안쪽 건물터가 있는 곳>

거제 옥산성 0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동문>

거제 옥산성 14-20220221<동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옥산성 내부>

거제 옥산성 16-20220221<건물터>

2019년 도지정문화재 보수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돌로 쌓은 기단과 계단을 갖춘 초석이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높이가 약 1m정도인 기단은 처음 축조된 기단석에 덧붙여 한차례 증축한 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계단은 기단부 앞쪽에 3개가 설치되었다. 확인된 초석으로 보아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지로 규모는 길이 17.5m 너비 5.6m, 면적 98m2이다. 건물지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고, 벽의 기초부에 회백색의 점토를 발라서 미장하였으며,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출토된 기와로 보아 건물지의 축조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판단되며, 이 건물지 왼쪽에 세워져 있는 ‘옥산금성축성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 건물은 벽에 회를 발라 미장한 점, 바닥에 박석을 깐 점, 그리고 난방시설인 온돌 시설이 없는 점으로 보아 주거시설이라기 보다는 행정 또는 사무 등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옥산성 15-20220221<옥산성 정상부로 오르는 길>

옥산성 정상부에는 장대 역할을 했던 자리에 작은 정자가 있다. 정자 동쪽로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우물과 건물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옥산성 18-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17-20220221<우물>

거제 옥산성 19-20220221<발굴  현장>

거제 옥산성 23-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거제현 읍치>

거제 옥산성 26-20220221<옥산성 북쪽>

거제 옥산성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28-20220221<북쪽 성벽>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경주 명활성(사적), 신라 경주를 방어하는 주요 산성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명활성(明活城, 사적)이다. 이 성은 경주 동쪽 명활산에 있는 둘레 약 6 km의 신라 산성이다.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이다. 성을 쌓은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405년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처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선덕여왕 때 비담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명활성은 경주에서 동해안 감포와 연결되는 도로와 불국사를 통해 울산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지나가는 주요 교통로에 있다. 동쪽에서 신라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았던 오래된 신라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명활성(사적)>

명활산은 신라 6촌 중 명활산고야촌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높지 않은 산이나 북쪽 악산과 함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북천이 흐르고 있다. 교통로를 지나가는 군사들을 제압하기 용이한 곳에 산성을 쌓고 있다. 동해안을 통해 경주를 공격하는 왜(倭)를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의 압력이 심했던 5세기에는 궁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주 명활성 (사적)
<경주 명활성 위치>

명활성을 수리하다 ( 473년 07월(음) ), [16년(473)〕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였다.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 475년 01월(음) ), 18년(475) 봄 정월에 왕이 명활성(明活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자비 마립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명활성, 또 신월성(新月城)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6보였다.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제3 지리- 신라 명활성,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는 월성 남쪽의 남천, 서쪽의 형산강, 북쪽의 알천이 자연스럽게 해자를 형성하고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쉬운 지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과 북천(알천)>

성벽은 6세기 이전에 처음 쌓았으며 후대 여러차례 보수를 하면서 견고한 신라 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방어가 용이한 능선에는 초기 성벽 형태인 토성을 그대로 두고 계곡이나 방어에 취약한 곳을 석축으로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  계곡에 있는 성벽(복원)>

명활성은 성벽을 쌓은 석축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남아 있던 일부성벽을 보완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석축은 꽤 큰 자연석을 다듬어서 2층으로 쌓았는데, 석성과 토성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성 석축>

2012년 당시 명활성은 복원이 진행중이었는데 주변에 석축을 쌓은 많은 석재들을 볼 수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이 진행중인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옛 모습을 복원하고 있는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복원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구역, 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능선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도 석축을 쌓고 있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이어지는 명활성 성벽에는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초기에 쌓았던 토축을 계속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으로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토축으로 보이는 경사진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에서 보이는 명활산>

명활성은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확장되어다. 진흥왕 때(544년) 다시 쌓았으며 진평왕 때(593년) 성벽을 확장했다. 진흥왕 때 성벽을 다시 쌓으면서 그 내역을 기록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으며 안압지에서 ‘명활산성비’로 추정되는 비석조각이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경주 명활산성비, 551년, 경주 명활산성>

551년 11월 중에 명활산성을 쌓고, 거기에 관여한 지방관, 역부를 동원한 지방의 촌주, 공사의 실무자와 공사내용, 비의 위치, 공사기간, 비문을 작성한 사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비는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나오는 최초의 것으로 군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통일기 이전 신라의 신분제와 관등제, 역역동원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삼국시대(신라) 551년, 경주 안압지>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산 334
이 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하는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토성(5km)과 석성(4.5km)이 함께 있다. 신라 실성왕(實聖王) 4년(405)에 왜병(倭兵)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산성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자비왕(慈悲王) 18년(475)에는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가 소지왕(昭知王) 1년(479)부터 월성(月城) 으로 다시 옮겼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는 비담(硏)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金碩信)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1988년 성 주변에서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만든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를 발견하여 당시의 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

 

 

서울 호암산성(사적), 통일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쌓은 산성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호암산성(사적)이다.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호암산(해발 347 m) 남쪽 정상부에 둘레 1,250 m 의 성벽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안양천을 따라 안양에서 한강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와 멀리 대부도와 인천 사이의 서해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쌓은 한강유역에 쌓은 산성 중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다음으로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호암산성은 현재 약 300 m 정도이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내에는 한우물이라 불리는 큰 연못과 정상부의 작은 연못, 4곳의 건물 등이 남아 있으며 우물 근처에서 개모양의 석수상이 발견되어 북문터 안쪽에 세워져 있다. 우물에서는기와, 청동숟가락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1-20191203호암산 정상부 아래 능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호암산성(사적). 그 너머로 금천구, 구로구와 경기도 광명시, 시흥시 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2-20191203호암산성 북문터. 호암산 정상에서 능선길을 따라서 내려오면 북문을 통해 산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1-20191203산성을 들어서면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개모양의 석수상을 볼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0-20191203전시해 놓은 석구상.

석구상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경기읍지』의 「시흥읍지」에 있다. ‘호암’이라는 바위가 현의 진산인 금지산(금주산, 지금의 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의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해태상이라 부르기도했으나 그 형태가 개에 가깝다고 하여 석구상이라고 부른다. 또 1990년 제1우물지 발굴조사 당시 조선시대 건축물에서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 m, 폭 0.9 m, 높이 1.0 m 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2-20191203석구상을 지나면 통일신라 때 쌓은 석축이 남아 있는 약 300 m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1-20191203남쪽 장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어지는 성벽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3-20191203호암산성 동쪽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 장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4-20191203이곳에서 보이는 호암산성 동쪽편. 관악산과 삼성산 등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주변지역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5-20191203남쪽 건물 등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길. 이 부근 성벽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6-20191203호암산성 내 건물이 있었던 곳. 정상부에 약간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8-20191203건물터임을 알려주는 안내문.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7-20191203반대쪽에는 작은 우물터가 있다.

제2우물지는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2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이다. 길이 18.5 m, 너비 10 m 이상, 추정깊이 2 m 이상의 규모이다. 길이 50 cm, 너비 35 cm, 높이 25 cm 가량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ㅔ단(높이 1.75 m)까지 쌓았는데 두 번에 걸쳐 15 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된다. 바닥조성이나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등이 제1우물과 유사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에는 ‘잉벌내역지내말’이라는 글자가 새겨자 있는데 숟가락의 ‘잉벌내’는 고구려시대의 금천구 지명인 ‘잉벌노’와 유사하다.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지명은 여전히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잉벌노를 쓰던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벌내(한주 율진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금천지역)에 사는 내말, 즉 나마 벼슬을 한 역지라는 인물이 사용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7-20191203북문터 안쪽 서쪽편에는 약간 넓은 공간이 있으며 헬기착륙장이 표시되어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8-20191203헬기착륙장을 지나면 큰 우물이 있으며 그 옆에 작은 암자가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6-20191203호삼산성 큰 우물. 한우물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산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교적 큰 규모의 연못이다. 통일신라 때 처음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약간 증축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호암산성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한우물(제1우물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이라는 뜻으로 서울 호암산성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길이 17.8 m, 너비 13.6 m, 깊이 2.5 m의 규모로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길이 22 m, 너지 12 m, 깊이 1.2 m의 규모로 증축하였다.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통일신라 시기의 것이며, 1991년 2차 보수정비공사에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두 시기의 연지를 함께 복원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떄에는 선거이 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시대 건국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이라는 설도 있으며 가물 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벽 상단에서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5-20191203한우물 옆에 있는 작은 암자.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4-20191203암자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금천구, 구로가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호암산성 안양천을 따라 형성된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쌓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3-20191203암자에서 호암산 서쪽 성벽 아래로 이어지는 정상로.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2-20191203호암산성 서문이 있었던 자리 부근. 성벽과 성문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통일신라, 서울 금천구 시흥동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해발 347 m) 정상을 둘러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 1,547 m, 면적 133,790 ㎡이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축하여 군사적 전략 거점 및 행정치소(기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서측에서 보면 소래와 남양만까지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지리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해 연안과 한강수로, 내룍 교통로의 중간 지점인 한강 이남 중심에 있어 삼국시대 양천고성.행주산성.오두산성을 잇는 거점 성곽이었으며, 당시 한강 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가운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등에 이어 네번째로 길었다. 고려시대에는 한강 수로를 통한 중국 무역의 경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가 주둔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서남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축조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을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했다. 현재 동벽의 북쪽 성벽이 잘드러나 있으며, 원형을 포함해 남아 있는 성벽은 1,016 m이다. 산성내의 시설로는 한우물(제1우물지)과 제2우물지, 건물지(터), 석구상이 있으며 많은 기와와 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칠곡 가산산성(사적), 칠곡도호부 읍치가 설치되었던 큰 산성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가산산성(사적)이다. 경주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가산(902 m) 정상부 아래 계곡에 쌓은 큰 규모의 산성이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18년(1640)에 남쪽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관찰사 이명웅의 건의로 내성을 처음 쌓았으며 1700년 (숙종26)에 외성이, 1741년(영조 17)에 중성을 쌓았다. 내성 완공 후 칠곡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성내에는 읍치를 두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성안에 있던 많은 건물 등은 없어졌으며 지금은 주민들은 살지 않고 작은 사찰이 남문 안쪽에 있다. 인근에는 송림사를 비롯하여 유서깊은 사찰이 많이 있어 예로부터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내성에는 동.서.북문과 8개의 암문을 두고 있으며, 중성에는 중성문을 두었다. 외성의 둘레는 11.1 km에 이른다. 외성 남문만 두고 있으며 붕.동.남쪽에 암문이 설치되었다. 내성내에는 객사를 비롯한 관아와 부속 건물들, 장대 등이 설치되었으며 중성 안에는 인근 고을의 군량미 창고를 두었다. 성벽에는 치성, 곡성, 포루 등 다양한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남한산성처럼 방어를 위해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큰 규모의 산성을 쌓고 읍치를 두고 주민을 이주시켜 유사시 적의 공격에 대비한 조선후기 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칠곡 가산산성(사적). 가산(해발  902 m) 정상 아래 계곡에 큰 산성을 쌓고 그 안에 읍치를 두었다.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쌓은 큰 규모의 산성으로 조선후기 산성 축성방식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외성의 유일한 출입문인 남문. 해발 400 m 정도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성은 가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잘다듬은 큰 돌로 성벽을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설치한 전형적인 조선후기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옆 계곡을 막고 있는 성벽. 남문 옆에는 계곡물이 흐르는 수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에서 본 남문.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토축을 쌓은 석축성이다. 조총의 공격에 대비하여 총안이 있는 여장을 설치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사진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보이는 남문 부근 바깥쪽 성벽.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공략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사진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일제강점기 이후 훼손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상당히 심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이 무너진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험준한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정상부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등산로처럼 이어지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치성으로 보이는 돌출된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내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주민은 거의 살지 않는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안쪽에 있는 사찰. 조선시대 산성을 지키고 보수하는 일은 승병들이 주로 맏았는데 아마도 승병들이 머물렀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주불전. 사찰은 가산산성의 규모에 걸맞게 비교적 큰 편이다.

칠곡 가산산성 사적216호 20200120-21
가산 정상부 부근 성벽

칠곡 가산산성, 사적 216호
칠곡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은 후 국방수호의 절실함을 인식하고 1639년(인조 17) 9월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장정 10만여 명을 동원해 내성을 쌓기 시작하여 1640년(인조 18) 4월에 완공하였다. 그 후로 1649년(인조 27) 관찰사 이만과 부사 이지형이 내성을 보수.정비하였으며, 1701년(숙종 27)에 관찰사 이세재가 외성을 완공하였고, 1741년(영조 17)에 관찰사 정익하가 내성 가운데 중성벽을 쌓으면서 전체적으로 삼중곽 형태의 산성이 완성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가산산성 내성 완공 후 이곳은 성주목 팔거현에서 칠곡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성내에 읍치를 두었으며, 군사적으로 의성.군위.의흥.신녕.하양.경산 지역을 관할하였다. 1985년(고종 32) 폐성 뒤 한국전쟁과 1954년 대홍수로 성내의 많은 건물 및 성벽이 무너졌으나 아직 그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가산산성 둘레는 11.1 km, 면적은 2.2 ㎢로 대규모 산성에 속한다. 성벽을 따라가며 성문.암문.수문.곡성.치성.포루 등 100여 개의 시설이 잔존하며, 관아.군영.빙고.창고.사찰.마을유적이 성내 곳곳에 남아 있다. 또 가암.삼층암.외성암괴류.복수초 군락지 등 자연유산이 산성과 잘 어우러져 있다. (안내문, 칠곡군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칠곡군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