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산성

예산 임존성(사적),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곳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임존성(사적)이다.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산성으로 백제 멸망 후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봉수산(해발 483.9 m)의 봉수산과 동쪽편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둘레 약 3 km로 바깥쪽을 돌로 쌓은 석축성이며 성벽의 높이는 2.6 m 정도이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성문, 수구문, 우물터,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봉우리와 능선을 둘러쌓은 산성으로 내부에 평지는 넓지 않은 편이며, 봉수산 봉우리와 남쪽 봉이리에 약간의 평지가 있으며 건물터 등이 확인되고 있다. 백제가 쌓은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임존성이 위치한 봉수산은 옛 대흥군 관아가 있던 예당저수지 일대가 동쪽편에 있고 예산과 홍성이 연결되는 교통로가 서쪽에 있다.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에서 약 40여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산만을 통해 들어오는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한산 건지산성과 함께 백제멸망후 부흥군의 거점이었던 곳이었으며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옛 대흥군 읍치가 산성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산 임존성(사적). 백제 멸망후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봉수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 약 3 km의 백제가 쌓은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서쪽 성벽. 자동차로 산성 아래까지 올라올 수 있다. 서쪽 성벽은 최근에 보수하여 옛 산성의 웅장함을 재현하고 있다.

사적90호 예산 임존성30-20170912예산 임존성은 삼국간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백제가 쌓은 산성으로 아산만을 통해 침입이 예상되는 고구려군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공주와 부여로 향하는 많은 교통로들이 주위를 지나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바깥쪽에 바깥쪽에 돌로 석축을 쌓고 있다. 백제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 많았는데 삼국간 전쟁이 많았던 후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석축성도 많이 쌓았다. 경사진 지형의 장점이 더해져 공략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는 너비 1.6 m 정도이며 목책을 쌓고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곳. 주위에 곡선으로 성벽을 쌓아 옹성과 같은 효과가 있어 방어에 용이하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성벽. 원래 성벽의 모습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비교적 큰 돌로 견고하게 석축을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성문. ‘ㄱ’ 형태로 출입문을 만들어 성문을 방어하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문.

OLYMPUS DIGITAL CAMERA산성의 남쪽 모퉁이 부분에는 성벽을 높고 견고하게 쌓아 주위을 치성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모퉁이 안쪽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모통이 아래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성벽 안쪽에 있는 약간의 평지. 건물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동 동쪽편 예당 저수지가 있는 지역. 아래쪽에 대흥군 읍치가 있으며 아산만에서 공주와 부여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지나간다. 백제는 이 교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고구려군을 대비하기 위해 산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서쪽으로 예산과 홍성을 연결하는 교통로와 서산을 통해 공주, 부여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대련사. 이곳에 임존성과 봉수산 정상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존성 오르는 등산로.

예산 임존성, 사적 90호,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삼국시대
임존성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상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봉수산(해발 484 m)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성의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었으며 많은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우물이 3곳에 있었다. 둘레는 약 2.8 km로 백제의 성중 최대급 규모였다. 이곳에서 공주와 부여까지의 거리는 90리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한 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 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곳에서 흑치상지는 복신과 함께 나당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고 백제부흥군은 200여개의 백제성을 탈환하며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였다. 8월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뜰리고 물러났다. 663년 백강구 전투로 백제부흥군이 패하며 백제의 다른 성들은 항복하였지만 지수신 등이 지키는 임존성은 신라군의 공격에도 30일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임존성의 험준한 지세와 견고한 성벽, 그리고 풍족한 식량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에 항복한 흑치상지.사타상여 등에 의해 임존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지수신이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끝이 났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7년)

<출처>

  1. 예산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4. 두산백과

부여 가림성(사적), 백제 동성왕이 금강 하류 요충지에 쌓은 산성

충남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가림성(사적)이다. 이곳은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정상부를 둘러 쌓은 테뫼식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백제 동성왕이 수도 방어를 위해 금강하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산성의 형태는 돌과 흙을 같이 사용하고 있는데 백제 고유의 토성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석성의 형태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적정한 수의 군사로 침입하는 적의 길목을 제압할 수 있는 요새와 같은 곳이다.

부여 가림성은 성흥산성으로도 불리웠으며 해와 달이 뜨는 풍경이 아름다운 아름다운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가로 지르는 백마강 하류쪽과 주변 논산 주변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삼국시대 이후에도 군사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 아래에는 후삼국시대 고려의 명장 유금필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부여 가림성(사적). 백제 동성왕이 웅진을 방어하기 위해 금강 하류 군사적 요충지에 쌓은 산성이다. 토성이 주를 이루는 일반적인 벡제 성곽과는 달리 돌과 흙을 섞어 산성을 쌓았다. 한성기 백제 이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산성 아래에서 볼려다 보이는 성흥산. 해발 260 m 정도의 낮은 산이지만 주위에 높은 산이 없어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SANYO DIGITAL CAMERA가림성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가림성 성벽. 경사진 지형에 흙과 돌을 섞어서 산성을 쌓았다. 성흥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공략하기 힘들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가림성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SANYO DIGITAL CAMERA가림성 내부. 우물터,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가림성 남쪽편 성벽.

SANYO DIGITAL CAMERA금강을 바라보는 망루와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고목. 수령이 400여년 된 나무로 ‘사랑나무’라 불린다. TV드라마 배경되기도 했던 곳으로 일출.일몰 장면이 아름다운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가림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금강하류 강경읍 일대.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가림성 아래에 있는 사당. 후삼국시대 고려의 명장 유금필이 이곳에 머무를 때 빈민구제를 했음을 기리는 사당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가림성 아래에 위치한 백제 고찰 대조사(大鳥寺)에는 이 사찰을 크게 중건혐서 고려초에 조성한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217호)이 있다. 고려초 금강하구를 장악했던 유력한 호족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흥산성(사적 4호)
이 성은 본래 가림성으로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백제의 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금강 하류의 요충지인 이곳에 돌로 쌓은 성으로 옛 지명과 축성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성의 둘레는 1,500 m 이고 성벽의 높이는 대략 3~4 m 이며 성의 외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호를 파서 그 흙으로 석축의 경사지에 붙여 쌓았다. 금강하류 일대를 한눈에 관망할 수 있는 요충지로 서기 662년 백제 부흥운동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도 성이 견고하여 두려워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성내에는 3개소의 우물과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초석 등이 남아 있으며 성흥산의 동남쪽 중터에는 고려초기 천연암석을 이용하여 만든 높이 10 m의 미륵보살입상(보물 217호)과 황금새의 전설로 유명한 대조사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익산 토성(사적), 백제 무왕이 왕궁리 궁성과 함께 세웠던 산성

전북 익산시 금마면 오금산에 있는 익산 토성(사적)이다. 해발 100 m 정도인 오금산 정상과 남쪽 계곡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오금산성 또는 보덕성이라 불렀다. 7세기 초 백제 무왕이 익산 왕궁리에 궁성을 조성할 때 같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둘레 690 m로 넓지 않은편이다. 원래 백제식 토성으로 쌓았다가 이후에 석축을 보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백제 사비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익산은 백제 왕실이 멸망하기까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던 지역으로 왕궁리유적.쌍릉.미륵사지.제석사지 등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의 천도설과 관련된 곳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쌍릉은 7세기에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부장된 나무널은 무령왕릉 나무널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세워진 당대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토성(사적). 백제 무왕이 익산 왕궁리에 궁성을 건설할 때 같이 축성했던 것으로추정되는 곳이다. 원래 흙을 다져서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후에 석축을 쌓아 보강하였다.

산성 아래에는 익산 쌍릉이 있으며, 동남쪽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왕궁리유적과 제석사지가, 북쪽으로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미륵사지가 위치하고 있다. 백제 무왕이 익산지역을 경영하기 위해 이 산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 있는 미륵산성, 용화산성 등과 함께 호남지방에서 부여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지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토성 남쪽 고도리에서 본 익산 토성. 나즈막한 동산으로 서쪽편에 익산 쌍릉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토성 남문으로 오르는 길. 익산 쌍릉 앞을 지나는 길을 따라 약 1 km 정도 들어가면 토성을 오르는 입구에 도착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으로 오르는 길. 산성은 100 m 정도 높이의 오봉산 아래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마을에서 10여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남문 아래에 있는 연못.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성벽. 성벽의 높이는 약 4 m이고 너비는 5.5 ~6 m이다. 남쪽편 성벽은 바깥쪽으로 약간 내어 석축을 쌓아 보강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중간쯤에 남문 터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은 처음 쌓은 성벽의 토루를 잘라 만들었는데, 서쪽편에는 토성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문터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토성 내부. 둘레 690 m 로 내부 면적이 넓지는 않은 편이다.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장기적으로 농성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서남쪽 모서리에서 본 남쪽편 성벽. 백제 토성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구조이다. 백제가 쌓은 산성 중에서는 흔치 않은 형태인 계곡을 중심으로 산성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누대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남쪽 모서리에서 내려다 본 서쪽편 풍경. 아래쪽에 익산 쌍릉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금산 정상부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산의 경사진 지형을 활용하고 있으며 토축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성벽 안쪽으로는 약간의 평탄한 공간이 있다.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기와같은 건춝부재 들이 출토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서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북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오금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성벽. 인공적으로 토축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몽촌토성 등에서 볼 수 있는 백제계 토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멀리 미륵사지 석탑을 수리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하얀천막을 하고 있는 구조물과 미륵사지가 있는 미륵산이 보인다. 미륵산에도 산성이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내 건물터 등이 남아 있는 오금산 정상부.

OLYMPUS DIGITAL CAMERA오금산 정상부. 주변의 산성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 왕궁리 유적지와 제석사지 등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남동쪽 모서리. 부근에서 기와와 토기 등이 출토되어 누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동쪽 모서리에서 본 남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쌍릉 부근에서 본 익산 토성.

익산 토성, 사적92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익산 평야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오금산 구릉 위에 쌓은 이 성은, 흙과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690 m 정도이다. 오금산에 자리잡고 있어 「오금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고구려 왕족 안승을 보덕국왕에 임명하고 이곳에 살도록 하였다고 하여 「보덕성」으로도 부른다. 이 성은 1980년과 1984년의 발굴 조사로 성의 규모와 구조가 대략 밝혀졌는데, 토성으로 축조하고 남문이 있는 골짜기에 석축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말기와 통일신라의 기와와 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 때에 처음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은 삼년산성(사적),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산성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 있는 삼년산성(사적)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산성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인 5세기 소지왕 때(470년) 쌓았다. 삼년산성이 위치한 보은읍은 상주와 청주,대전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중요한 교통로 중 한곳이며 삼국이 한강유역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백제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를 직접 공략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길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주변에는 1,600여기에 이르는 많은 고분들이 남아 있어, 당시 신라가 이곳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3년에 걸쳐서 성을 쌓았다고 하여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삼국시대 태조 왕건이 이곳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임진왜란 때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삼년산성은 성벽이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전체 길이는 1,680m에 이른다. 축성방식은 중간크기의 납작한 돌을 촘촘하게 쌓은 석축식 산성이다. 고구려 산성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신라 고유의 축성방식이 보인다. 능선을 따라서 성벽을 쌓고 있는데, 4개의 성문 7개의 치성, 물무물터, 물이 흘러라가는 수구(水口) 등의 시설을 두고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깥쪽에만 돌로 쌓은 석축성의 형태를, 남쪽과 북쪽은 돌로 쌓은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13~20m에 달하며, 폭 8~10m 이를 정도로 상당히 넓다.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산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은 삼년산성, 사적 235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12년(470)에 축조되었고, 소지마립관 8년(486)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규모로 수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축성을 시작한지 3년만에 완성하여 삼년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 삼국통일 전쟁 때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였고,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둘레 1,680m, 폭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다수의 건물터가 남아 있고, 산성 인접지역에 대규모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반원형 치성과 성내 배수를 위한 수구 등 특이한 축성양식과 축성 및 수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아미지 인접 암각 군에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김생의 글씨체로 전해오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보은 삼년산성(사적 235호). 삼국시대 신라가 한강유역을 진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통로에 쌓은 산성이다. 고구려 산성의 영향을 받았지만 신라 산성 고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전경. 보은읍 방향으로 흐르는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배치도. 보은읍 방향의 서문을 주출입문으로 하고 있으며, 남.동.북문을 두고 있다.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능선 정상부 등에 치성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마을에서 본 삼년산성.

OLYMPUS DIGITAL CAMERA마을에서 보이는 삼년산성. 돌로 쌓은 석축이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서문으로 들어가는 길.

서문지(西門址)
삼년산성의 주 출입문으로 추정되는 서문지는 산성 문지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 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낀 지점의 북쪽 경사면에 있어 성 박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또한 서문지를 중심으로 남북을 2개의 치성이 배치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80년 보은 지역의 대홍수로 후대 문지 아래층에서 1차 문지로 추정되는 자취가 노출됨에 따라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서문은 2단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차 문지는 기둥홈과 문설주 홈, 문확 홈이 파인 신방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 225cm, 폭 422cm의 규모로 되어 있다. 특히 문지방석에서 폭 166cm의 마차 바퀴 마멸 흔적이 발견되어 무척 큰 마차가 통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일반적인 성문의 구조와 다르게 외부로 열리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2차 문지는 2차 문지가 매몰된 후 안쪽으로 들여 조성하였는데 수해로 남쪽의 신방석이 위치가 바뀌어 문구부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2차 문지는 1차 문지와는 반대로 성문이 안으로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서문터. 마차가 출입했던 바퀴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앞 물을 배출하는 수문.

OLYMPUS DIGITAL CAMERA성안에서 보이는 성문. 서문 주변으로는 돌로 쌓은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 폭이 상당히 넓고 건고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치성이 있는 북서쪽 봉우리로 연결되는 성벽. 상벽 안쪽에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암각자(岩刻字)
삼년산성 내 연못 맞은 편 암석지대에 새겨진 글자들을 말한다. 가장 아랫부분에는 아미지(蛾眉池), 윗부분에는 유사암(有似巖)과 옥필(玉筆), 그리고 보은사 쪽 앞벽에 남술(南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 가운데 ‘아미지’는 규모도 크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당초의 연못이 점차 줄어들어 서쪽 성벽 근처에 마치 반달 모양으로 남아 있던 모습을 보고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 2m, 너비 3.5m 크기의 수직 암벽에 높이 66cm, 폭 19cm로, 신라의 명필가 김생의 글씨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아미지’가 새겨진 암석 위에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평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산성 경관을 조망하거나 적을 감시하려고 지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바위에 글자가 새겨진 암각자. 연못 이름인 ‘아미지(蛾眉池)’라 새겨진 글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산성내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한 연못인 아미지(蛾眉池).

OLYMPUS DIGITAL CAMERA서문 동쪽편 성벽. 넓적한 중간크기의 돌로 촘촘히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신라 산성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능선 중간쯤에 성문을 방위하기 위해 쌓은 치성이 있다. 일반적인 산성의 치성과는 달리 곡선적인 반원형 치성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 남쪽편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이 있는 능선으로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너머로 보이는 보은읍 소재지. 비교적 넓은 농지들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 주변 성벽. 서문 북쪽편과 봉우리에 치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축의 폭이 상당히 넓다. 여장이 있는 조선후기 산성과는 달리 석축위에 목책을 설치했다.

남문지
남문지는 남쪽 성벽 서쪽 끝에 위치하며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된 성위에서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지은 치성(雉城)이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며 서쪽 성벽과 연결된다. 문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반원형 치성이 설치되어 있어 남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지의 규모는 너비 3.6m, 길이 10.8m이고 높이는 서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약 5m, 동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9m에 이른다. 문의 형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으로 두세 차례 개축하다가 결국에는 문 입구를 폐쇄하였으며, 남문지 부근의 성벽도 두세 차례 개축했다. 문지 터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바닥 확쇠 한쌍과 문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는 못과 철제 광주정이 출토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남쪽편 모서리에 위치한 남문. 병사들이 출입하는 통로라기보다는 모서리부분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치성 성격을 갖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남문. 성문이 좁은 편이며, 사다리를 이용해서 출입하는 현문식 성문이다. 출입문 기능이 없는 곳을 여러차례 폐쇄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서쪽편 성벽. 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았으며 그 너머로 보은읍 지역이 내려다 보인다.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의 성격을 갖는 지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분에서 산성 동남쪽 봉우리에 있는 치성으로 연결되는 성벽. 원래 성벽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동남쪽 봉우리에 위치한 남동치성. 상주에서 보은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감시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 성격을 갖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에서 연결되는 성벽.

보은 대야리 고분군
이 고분군은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보은읍 어암리, 대야리, 성주리, 길상리, 풍취리, 강신라와 탄부면 평각리에 분포하고 있다. 오정산을 중심으로 비탈진 지역 곳곳에 볼 수 있으며 600ha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봉분의 지름이 15~2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168개소, 10m 내외의 중형 고분이 141개소, 소형 고분이 1,225개소로 모두 1,644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몇 개의 무리를 이루어 분포하며 대야리와 평각리 경계 지역에서는 신라 고분군 중 지름 20m에 달하는 대형 봉토분이 많이 조사되었는데 이렇게 많은 수가 조사된 유적은 영남 지방을 제외하고는 보은 삼년산성 고분군이 유일하다. 고분의 구조와 주변에 수습된 유물로 볼 때, 삼년산성이 축조 시기가 5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사이에 신라인이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야리 고분군은 산성과 고분군이 함께 분포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중부 지역 최대의 신라 고분군으로서, 신라 묘제와 토기 편년 연구 및 신라 지방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남동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지역. 상주에서 보은으로 들어오는 교통로이다. 부근에는 1,600여기의 신라 고분이 확인되고 있는 대야리고분군이다. 신라가 이곳에 산성을 쌓으면서 많은 인원들을 이주시킨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동치성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사실상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이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바깥쪽에만 돌로 석축을 쌓은 석축성 형태를 하고 있다.

동문지
동문지는 산성에서 가장 긴 동쪽 성벽의 중앙에 있으며, 이곳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수구(水口)가 있다. 동문지의 원래 모습은 성벽의 안쪽 약 절반 정도가 다른 곳보다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ㄹ’자형으로 돌아야만 통행이 가능한 형태였다. 지표에 남은 모습을 보아 동문지는 적이 공격해 올 때 방어를 겸비한 특이한 성문 구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동문지는 적어도 서너 차례에 걸쳐 수축하고 개축했으며 ‘ㄹ’형 구조는 후대에 문지 조성 과정에서 축조된 구조물로 밝혀졌다. 발굴 조사 결과, 동문지 인접 성벽 위쪽에서는 삼국시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이 발견되었고, 안쪽의 평평한 곳에서는 방아확, 돼지 모양의 기와조각, 목제 망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주위 성벽. 동문은 속리산 말티자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경북 상주로 연결되는 25번 국도가 지나간다. 성문 아래쪽으로는 비교적 경사가 심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동문. 멀리 속리간 법주사로 연결되는 말티재고개와 주변 산들이 보인다. 성문 안쪽은 옹성처럼 ‘ㄹ’자 형태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주변 성벽. 경사가 심한 지역에 성벽을 쌓아 외부에서 성벽을 공략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능선을 따라 석축성을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북동쪽.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길들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쪽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치성. 산성 북동쪽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삼년산성 동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와 비슷한 기능을 갖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북동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보은읍치 서북쪽 들판.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북동치성에서 서북치성으로 이어지는 성벽. 중간에 북문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치성에서 보이는 삼년산성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북문 주변 성벽.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북문지
북문지는 성문 밖으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어 북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성문 양식으로 보았으나, 발굴 조사 결과 차단벽으로 추정되던 시설은 후대에 축조된 치성으로 밝혀졌으며 현재의 성문은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북문지 입구에는 처음 쌓은 성벽이 붕괴된 후 성벽의 채움석을 정리한 후 문구부를 설치하였고 바닥면은 바깥쪽으로 경사지도록 하였다. 규모는 폭은 3.5~3.6m, 길이는 7~7.5m에 이르며 문부 안쪽으로 성안으로 통할 수 있는 6m 너비의 계단이 1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후대에 조성된 치성은 처음 쌓은 성벽의 바깥 면에 빗대어 축조한 것으로 길이 6.6~7m, 너비 12~13m의 규모이며 양쪽 측벽과 모서리 부분이 심하게 붕괴되어 있다. 또한 치성 상부에서는 4개의 초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는 정면 5~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북문.

OLYMPUS DIGITAL CAMERA서북치성으로 연결되는 성벽.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안쪽에 있는 작은 사찰. 현재의 사찰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 산성을 관리하던 승병들이 이곳에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앞에서 보이는 남동치성과 주위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삼년산성 전경.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양주 대모산성(사적), 임진강과 한강 사이 교통로를 지키는 군사요지.

경기도 양주시 백성읍 방성리에 있는 대모산성(大母山城, 사적)이다. 파주 칠중성이 있는 적성면을 통해 임진강와 의정부를 거쳐 중량천을 따라 한강유역과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 동쪽과 북쪽 지역을 관장하던 양주목 관아가 있던 양주시 유양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한강유역 장악에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어적 기능뿐만 아니라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주청된다. 현재의 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축성하였으며, 그 이전에 백제가 수도인 위례성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주둔시키거나 산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까지 수리.보수를 하면서 계속 사용되어 왔다.

산성은 대모산(해발 213m) 정상부에 석축을 쌓았는데 둘레 410m 정도의 규모이다. 성벽은 잘 다듬을 돌로 약 7.5m의 석축을 쌓았으며, 바깥쪽에 4~5m 정도 보축을 덧대었다. 성문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현문식 성문을 하고 있는데, 신라가 쌓은 산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1980년 이후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청동팔찌, 청동도장, 각종 농구류, 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대모산성은 『삼국사기』의 매초성(買肖城)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매초성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는 대모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통일 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당나라군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결정적 승리였던 매초성전투가 벌어졌던 매초성은 정확한 위치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초까지 양주목 읍치였던 양주시 고읍동이라는 의견과 연천군 대전리산성이라는 견해도 있다. 매초성은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20만 대군을 끌고 주던하고 있던 곳으로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당시 당나라군은 보급을 임진강 수로에 크게 의존했다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이곳 대모산성이 유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주 대모산성(사적 526호).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산성으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보수하면서 사용했던 산성이다. 중간크기의 돌을 다듬어 촘촘하게 쌓은 석축, 사다리를 이용한 현문식 성문 등 신라 산성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많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이 있는 대모산. 임진강의 주요 교통로인 파주 적성면 일대에서 중랑천을 따라 한강유역 아차산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213m의 나즈막한 야산이지만, 북쪽 불곡산과 남쪽 호명산 사이의 통로를 막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모산성 올라가는 길. 역사유적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길이 잘 정비되지 않은 편이며, 서쪽편 방성리 마을에서 산성까지 연결되는 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방성리 마을에서 보이는 대모산성.

OLYMPUS DIGITAL CAMERA대모산성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대모산성 서쪽 출입문. 이곳에 성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이곳을 통해 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양쪽으로 대모산성 석축을 볼 수 있다. 석축들은 조선시대까지 보수하면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있다. 정비되지 않은 산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다리를 이용해 출입할 수 있는 현문식 성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북쪽편 석축. 아래쪽 바깥에 보축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석축을 쌓았다. 전체적으로 성벽이 높고 안정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안쪽에 서면 백석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호명산에서 멀리 파주와 고양지역까지 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안쪽에 넓지는 않지만 평탄한 공터가 있다. 우물 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남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북쪽. 멀리 감악산이 보이며, 불곡산(해발 465m)이 북쪽을 막고 있다. 임진강 중류 적성현 일대 교통요지인 칠중성에서 이곳까지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남동쪽으로 중량천을 따라 한강유역과 연결된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신라가 산성을 쌓기 이전에 백제군의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북문터.

OLYMPUS DIGITAL CAMERA북문 주변 성벽. 성을 쌓은 석축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대모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부 부근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모산성 북동쪽 양주시 유양동 일대. 조선시대 양주목 관아가 있던 곳이다. 대모산성이 조선시대까지 이 지역을 다스리는 치성(治城)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주목은 이곳부터 한양 동쪽 아차산성이 있는 곳까지 다스렸던 상당히 큰 규모의 지방고을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모산성 남동쪽으로 보이는 의정부시 일대.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남동쪽 성문터.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으로 연결되는 성벽.

양주 대모산성, 사적 526호, 경기도 양주시 백성읍 방성리
이 성은 일명 양주산성(揚州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대모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다. 이곳은 북서 방향의 유일한 통행로인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의정부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현재의 석축 성벽은 삼국시대 때 신라에 의하여 쌓여져 고려.조선 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문 터 북쪽에서는 백제계 토기가 많이 출토되어 석축 성벽이 축조되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는 토루나 목책 등의 방어시설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