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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와 청못,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오래된 수리시설

경북 영천시 금호읍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가 처음 쌓은 제방인 청제(菁堤)이다. 청못이라 불리는 저수지 앞에 있는 청제비(보물 517호)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때(536년) 처음 쌓았다. 청제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통일신라 원성왕 때(798)에 연인원 1만명 이상을 동원하여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수리한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후기 숙종 때 지역사람들이 이곳에서 땅에 묻힌 청제비를 발견하고 다시 세웠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에도 저수지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제방은 길이 243.5 m로 흙으로 쌓았으며 이 지역에서 용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천 청제 01-20200105영천 청제. 삼국시대 신라가 제방을 쌓아 만든 저수지로 현존하는 신라가 쌓은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이다.

영천 청제 06-20200105현재의 제방은 일제강점기 이후 수리된 것으로 보이며 흙으로 쌓은 높이 12.5 m  정도이다.

영천 청제 07-20200105청못이라 불리는 저수지. 현재의 기준으로도 비교적 큰 규모의 저수지로 지역에서 중요한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영천 청제 09-20200105수문 주위의 제방.

영천 청제 05-20200105저수지 수문.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영천 청제 08-20200105저수지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영천 청제 04-20200105저수지 수문 앞에 있는 비각. 삼국시대 청제를 쌓은 후 이를 기념하여 세운 청제비와 숙종때 세운 청제중립비가 비각 안에 있다.

영천 청제 02-20200105영천 청제비(보물 517호, 오른쪽)와 청제중립비.

영천 청제, 경북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이 저수지는 보물 제517호인 영천 청제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 법흥왕 23년(536) 이전에는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종 지지류.청제문부 등의 자료를 통해 수차례의 수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시대에 축조된 수리시설 중 현존하는 최고의 제언 중의 하나이다. 현재 제방의 길이는 243.5 m이며 높이는 12.5 m로 흙으로 쌓은 저수지이다. 저수 면적은 110,000 ㎡ 이고 저수량은 약 590,000 ton이며 현재도 이 지역 일대의 중요한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 농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영천 청제비(보물 517호), 삼국시대 신라가 저수지를 쌓고 세운 비석

경북 영천시 도남동에 있는 청제비(보물 517호)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이곳에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쌓으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직사각형 화강암 판석에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앞면에는 536년(신라 법흥왕 23)에 제방을 처음 쌓을 때 새긴 것이고 뒷면에는 798년(통일신라 원성왕 14) 제방을 수리하면서 새겼다.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원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다. 비석에 새긴 내용으로 신라의 수리시설, 통일신라 행정체제, 공사 동원 방식 등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청제비 서쪽에는 1688년(숙종 14)에 세운 ‘청제중립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최일봉 등이 파손되어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고대비석의 해독과 보존 등 금석학에 대한 큰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1-20200105영천 청제비(보물 517호). 삼국시대에 세운 청제비와 그 옆에 조선후기에 청제비를 다시 세우면서 세운 청제중립비가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9-20200105청제비 앞면. 신라 법흥왕 때(536년) 이곳에 청못을 쌓으면서 그 경위 등을 새겨놓고 있다. 비석의 높이는 130 cm 정도이며 판석형태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천 청제비 탁본, 삼국시대(신라) 536년, 영천군 금호면 도남동,

영천 청제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비 높이는 130 cm 정도이며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의 양면에 각각 다른 시기에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앞면에는 병진년인 법흥왕 23년(536)에 처음으로 청제를 건립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동원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정원貞元 14년인 원성왕 14년(798)에 청제를 새로이 수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2-20200105청제비 뒷면. 통일신라 원성왕 때(798년) 무너진 청못을 수리하면서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8-20200105청제중립비. 조선후기 숙종 때(1688년) 지역 선비들이 땅속에 묻혀 있던 옛 비석의 내용을 확인하고 수리하여 다시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의 금석학에 대한 큰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3-20200105청제중립비 뒷면.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7-20200105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바깥쪽에서 본 모습.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5-202001052기의 비석은 원래 다른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은 청못 앞 한쪽편 비각에 보관되어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4-20200105영천 청못.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진 인공 저수지로 그 규모나 형태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 517호, 경북 영천시 도남동
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 있는 양면비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14 cm, 폭 94 cm, 두께 16 cm이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한면은 병진년 (법흥왕 23년, 536년)의 간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것이다. 다른 면은 정원 14년(원성왕 14년, 798년)의 절대 연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청제비 서쪽에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효종 4년(1653)에 비가 두 동강이 나서 땅속에 매몰되어 그 고적이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사람이 다시 세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위의 비문들은 1960년 12월 신라 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경산 병영유적(사적 218호), 삼국시대 신라의 군사훈련장

경북 경산시 압량읍 일대에 있는 병영유적(사적 218호)이다. 삼국시대 김유신이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유적은 압량리, 내리, 진량읍 선화리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데 1~ 3 km 정도 떨어져 있다. 3곳 모두 나즈막한 구릉에 흙으로 토축을 쌓아 넓은 광장을 만들고 한쪽편에 군사훈련을 지휘할 수 있는 고대를 두고 있다. 훈련장은 직경 100 m 이내의 타원형을 하고 있다. 외관상 토성처럼 보이지만 그 규모가 작고 내부가 평탄하여 군사훈련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훈련장이 있는 3곳 모두 두룩산이라 부르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인근에 있는 임당토성과 비슷한 입지조건과 형태를 갖추고 있어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산 병영유적(사적 218호) 중 압량면 압량리에 소재한 훈련장. 금호강 남쪽 압량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령장은 구릉에 높이 7 m 정도이 토축을 쌓았는데 외견상 토성과 비슷해 보인다. 인근에 있는 신라 지방세력 압독국 근거지였던 임당토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원래 토성이었던 곳을 훈련장으로 바꾸었다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축. 외형이나 입지조건 등으로 볼 때 토성과 비슷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 내부. 둘레 300 m 정도의 타원형 형태의 넓은 광장이 있고 남쪽끝에 지휘소 역할을 하는 장대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장 남쪽 끝에 있는 장대.

OLYMPUS DIGITAL CAMERA장대에 올라서 내려다 본 모습. 이곳에서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지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축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장대와 토축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에 내려다 보은 북쪽 들판. 멀리 팔공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 남쪽편.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이곳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압량읍 내리 훈련장이 있으며,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진량읍 선화리 훈련장이 있다.

경산 병영유적 사적218호21-20200129국가문화유산포탈에 있는 병영유적 옛 사진. 넓은 들판에 병영유적이 우뚝 솟아 있다. 지금은 주변이 공장으로 바뀌었다.

경산 병영유적, 사적218호, 경북 경산시 압량읍 압량리
김유신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당시 백제를 공략하고 나아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초기지이자 군사를 모아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훈련시키던 군사훈련장이었다는 구전을 전하고 있는 3곳의 토성모양 축조물을 합하여 압량유적이라 한다. 이들은 각각 경산시 압량면 압량리와 내리, 그리고 진량읍 선화리에 위치하는데, 서로 1.2 ~ 3.2 km 떨어져 삼각형의 배치상을 보이고 있다. 압량유적은 금호강 이남의 넓은 압량벌 중심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각각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 선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압량리유적은 얕은 구릉 위에 높이 7 m로 토축하고 윗면을 평탄하게 하여 원형 광장을 축조한 것으로 둘레가 300 m 가량되며 동남쪽에 치우쳐 높이 10 m의 토루가 있다. 내리 유적은 구릉 자연면에 약간의 보축을 지름 80 m, 둘레 270 m 광장을 마련하였으며,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 15 m 가량의 토루를 쌓았는데, 토루의 동남부분이 크게 파괴되어 토루의 모습을 잃고 있다. 선화리유적은 구릉 말단부에 높이 10 m 토축의 원형광장(지름 80 m)을 구축하고 그 북쪽에 치우쳐 높이 2 m, 윗면지름 13 m의 토루를 쌓았다. 이 유적은 자연구릉상에 얼마간 토축이 이루어져 외견상 토성처럼 보이지만 토성으로 보기에는 소규모이고, 윗면이 평탄하여 광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광장 한쪽에 치우쳐 도루가 있다는 점에서 장대가 있는 군사훈련장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경산 조영동 고분군(사적 516호), 삼국시대 초기 신라 지방세력 무덤

경북 경산사 조영동 일대에 있는 고분군(사적 516호)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은 근거지였던 임당동 일대에 분포한 고분군 중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삼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있었는데 발굴.조사 후 4 ~ 6세기에 조성된 8기의 대형 봉토분이 남아 있다. 발굴.조사 결과 대형 봉토분에서는 금, 은, 금동 등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쪽 임당동고분군과의 사이에 있는 저습지에서도 다양한 생활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지로 평가 받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산 조영동고분군(사적 516호). 임당동고분군과 함께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을 무덤을 추정되는 8기이 대형봉토분이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당동고분군이 있는 서쪽방향. 금호강이 대구를 향해 흐르고 있으며 주택지가 형성된 저습지에서 생활유적과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분군 북쪽으로는 금호강이 영천에서 대구로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멀리 팔공산 일대 산악지대가 장벽을 형성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는 영천방향으로 금호강을 따라 넓은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 아파트 부근에 부적리고분군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아래에 있는 2기의 대형봉토분. 하나의 봉토분에 여러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끝에 있는 대형봉토분. 여러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분군 가운데 있는 3기의 대형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주택가 옆에 있는 3기의 봉토분.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봉분들.

경산 조영동 고분군, 사적 516호
이 고분군은 임당동 구릉에 분포하는 고분들 가운데 중앙부인 ‘성말괭이’라고 부르는 곳에 위치한 봉토분이다. 이 무덤들 가운데 일부가 1987년 임당동 주택지 개발지역에 포함됨으로써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조산단에 의하여 2년에 걸친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에서 독(항아리)무덤(옹관묘),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돌널무덤(석관묘) 등 우리나라 원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는 많은 무덤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큰 무덤들에서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 은, 금동 등으로 만든 각종 유물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무덤들은 삼국시대 초기 고대 국가 중 하나인 압독국에 속한 지배계급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고분군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고대국가 형성 및 발달에 관한 새로운 연구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는 목책을 이용한 성곽, 각종 주거지, 대형 건물지, 저습지 등의 생활 유적지 등이 조사됨으로써 고대인들의 생활전반에 관한 연구의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경산 임당토성과 저습지 유적, 신라 지방세력 압독국 생활유적

경북 경산시 임당동에 있는 임당토성이다. 삼국시대 신라 지방세력 무덤인 임당동고분군(사적 516호) 뒷편에 있는 토성이다. 해발 60 m 정도의 낮은 구릉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데 둘레는 950 m 정도이다. 흙을 다져서 쌓는 평편다짐기법으로 토축을 쌓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 m 정도이다. 토성은 4세기에 처음 쌓은 후 6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임당동고분군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압독국 관련 내용 등으로 볼 때 지방세력의 근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성의 입지조건이나 쌓은 방식 등은 삼국초기에 쌓은 토성인 대구 달성이나 경주 반월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같은 문화권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성 북쪽과 금호강 사이 임당저습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다양한 생활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토기, 목기, 골각기, 철제유물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신라 지방세력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산 임당토성. 영천과 대구사이를 흐르는 금호강 일대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쌓은 토성으로 대구 달성, 경주 반월성과 비슷한 입지조건 등을 갖추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앞에는 10여기의 무덤이 있는 임당동고분군(사적 516호)가 자리잡고 이다. 이곳에서 금동관,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어 신라초기 압독국이라 불렸던 지방세력의 근거지임을 알 수 이다. 남쪽으로 경산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흙을 인공적으로 다져서 토축을 쌓은 토성으로 현재 높이 1.5 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고, 바깥쪽은 자연지형을 활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안쪽 구릉 정상부에는 평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 지배세력 생활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서쪽편 성벽. 그 위로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은 북쪽으로 금호강과 1 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그 주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토성 바깥쪽에는 주민들 살았던 주거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북쪽 저습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생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당동 유적 발굴.조사 현황도. 토성 북쪽 낮은 저습지 일대에서 생활유물들이 발굴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동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동남쪽 성벽 안 생활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임당토성 남쪽 성벽.

임당토성
임당토성은 임당동 고분군 북쪽에 있는 방어시설로 1995년에 발굴되었다. 토성은 임당 유적 중 가장 높은 곳(해발 59 ~ 65 m)에 있으며, 주변에 있는 임당 뜰과 금호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외부의 침입을 막기에 유리한 입지를 갖추었다. 토성의 동쪽과 서쪽 부분 250 m 정도가 발굴되었다. 토성의 성벽은 순수하게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지름 30 ~ 50 cm의 기둥구멍에 나무 기둥인 영정주를 1 m 간격으로 두 줄을 세운 후, 양 기둥 사이 4.5 m 정도의 공간을 평편다짐기법으로 쌓아 올렸다. 그 다음 성벽 바깥 부분도 흙으로 덧붙여 쌓아 완성하였다. 남아 있는 토성의 높이는 1.5 m인데, 이러한 시설을 바탕으로 본래 토성의 전체적인 규모는 동서 길이 120 m, 남북길이 350 m, 둘레 950 m 정도의 타원형이었으며, 토성의 벽은 아래쪽 너비 8.5 ~ 9.5 m, 위쪽 너비 4.5 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토기를 분석한 결과, 토성은 기원후 4세기 전반에 처음으로 만들어져 6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간은 임당 유적에서 신라에 편입된 과거 압독국 유력자들의 무덤인 고총을 만든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토성은 신라에 통합되었으나 세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이 지역 유력자들의 생활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토성의 근처에 있는 임당 저습지 유적에서는 토성과 같은 시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일상생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이로써 당시의 마을을 확인할 수 있어 토성과 주변 마을의 모습과 생활상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2. 경산 임당 저습지유적 발굴조사, 영남문화재연구원,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