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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사적 111호), 삼국시대 수리시설 유적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있는 벽골제(사적 111호)이다. 제천 의림지, 밀량 수산제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농업용 저수지로 금산사가 모악산에서 흘러 내려온 원평천이 동진강과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약 7 km 정도 떨어진 넓은 평야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비류왕 때(330)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때(790), 고려 현종과 인종 (1143)에 고쳐 쌓았으며, 조선 초 태종 때인 1415에 다시 쌓은 이후 무너져 사용하지 않고 있다.

현재 벽골제 유적지에는 약 3 km 정도의 제방과 수문 흔적 2곳이 남아 있다. 제방은 일제강점기에 농사에 필요한 수로를 만들때 고쳐 사용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 제방을 쌓은 이래 여러차례 수리를 하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 사용해 왔던 유서깊은 곳으로 당시의 높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 벽골제(사적 111호).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중 하나로 지금은 그 모습이 일부 바뀌기는 했지만 당시에 쌓은 토축의 일부가 잘 남아 있는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내문. 벽골제는 장생거가 있는 현위치 부근에서 남쪽 월승리 명승산까지 약 3.3 km에 이르는 큰 규모 제방을 쌓고 조성한 저수지였다. 장생거, 경장거를 비롯하여 5개의 수문이 있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제방. 흙으로 쌓은 토축으로 높이 3.3 ~ 4.3 m이며 상단폭은 10 m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절단하여 수로를 조성하면서 그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바깥쪽 제방을 쌓은 토축은 삼국시대에 조성한 것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5곳의 수문 중 남아 있는 수문 흔적인 장생거. 나머지 한곳 경장거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문은 길이 5.5 m 돌기둥을 4.2 간격으로 세우고 돌기둥 안쪽에 홈을파서 목제 둑판을 넣어 수위를 조절하는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수문 모형. 양쪽 제방 위에 올라 동시에 물레를 돌리면 수문이 열린다.

장생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의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한다. 그 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 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 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 1980년데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벽골제중수비 기록에 지방의 단면과 수문구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처럼 바라 보였다. … 또 양쪽 석주심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 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분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 13년(1415)이다. …”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제방 윗부분. 너비 10 m 정도이다. 일제강점기에 반으로 잘라 수로를 조성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원래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쪽. 넓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쪽 물을 가두어 두었던 저수지. 조선 초 세종 때 (1420년) 홍수로 무너진 후 복구하지 않고 농토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북쪽 끝 부분. 서해로 흘러드는 원평천과 만나는 지점이다. 현재 사용하는 있는 수문이 보인다.

김제 벽골제 사적111호21-20150807
벽골제 중수비. 조선초 벽골제를 다시 쌓으면서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지금은 닳아서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앞에 조성된 공원. 옛 수시시설 모형들을 설치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평야지대 논에서 사용되는 관개시설인 무자위이다. 염전에서는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공원 광장에 옮겨놓은  월촌입석.

월촌입석
입석은 마을의 입구에 세우져 재앙을 막아주는 수문신이자,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겨진 큰돌 문화재이다. 입석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남녀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임석에 감아둔 동아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 하여 다음 제사 때까지 1년 동안 손을 대지 않는다. 이 입석은 사각기둥형 자연석이며 높이는 210 cm, 폭 62 cm, 두께 40 cm이다.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매년 지평선축제 때 이곳 벽골제에서 입석줄다리기를 재현하고 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공원에서 볼 수 있는 ‘아리랑 문학비’

김제 벽골제, 사적 111호,
김제를 옛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렀다. 이는 벼의 골이라는 뜻으로 도향의 이름이다. 이러한 지명의 연유로 벽골제는 우리 고어로 벼골의 둑이 한자로써 벽골제라 표기된 것에 기한한 듯 하다. 국내 최고최대의 저수지인 벽골제는 금만평야를 비롯하여 정읍시, 부안군 등 1만 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제방의 길이는 3.3 km, 둑의 높이는 5.7 m, 상단폭 10 m, 하단폭 21 m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 관련문헌에 따르면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 고려 현종 (1010 ~ 1031년), 고려 인종 21년(1143), 조선 태종 15년(1415) 등 4차례에 걸쳐 개축하였으나 조선 세종 2년(1420) 홍수로 무너졌다. 그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였던 벽골제는 1963년 사적 111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기에 이르렀고, 1991년부터 벽골제개발사업이 착수되어 2만여평의 부지에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 단야각, 단야루, 테마연못, 되배미 등을 조성하였고, 수문은 5개 중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두 곳의 수문 석주가 남아 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제천 청풍 망월산성, 삼국시대 남한강변에 쌓은 산성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망월산성이다. 망월산(해발 373 m) 정상부를 돌로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495 m이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신라와 고구려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시기에 쌓은 산성 중 하나이다. 성벽은 대부분 옛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한 것이지만 서남쪽에는 원래 쌓았던 석축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을 쌓은 양식이나 형태가 보은 삼년산성과 비슷하며, 신라가 쌓은 산성으로 보인다.

망월산성은 죽령 고갯길 아래에 위치한 단양과 중요 거점이었던 충주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남한강이 돌아 흐르는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청풍호가 망월산성을 감싸고 있다. 망월산의 높이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남북으로 흐르는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오고가는 배들과 주변지역을 감시하기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가 쌓은 여주 파사산성, 충주 장미산성, 단양 적성산성과 온달산성과 비슷한 성격의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청풍 망월산성. 남한강 내륙수운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망월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풍 문화재단지에서 망월산성으로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성문 아래에서 보이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성문은 원래 모습은 아닌듯하고 출입이 편리하도록 계단을 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중간 크기의 돌을 다듬어 촘촘히 쌓았다. 남서쪽에 남아 있는 성벽을 참조하여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가 쌓은 대표적인 산성인 보은 삼년산성과 비슷한 양식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폭이 상당히 넓은 편이며, 조선시대 산성과는 달리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는 방어를 위해 목책을 쌓아두는 전통적인 산성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안 망월산 정상부에 있는 작은 정자.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의 높이는 높은 곳이 4 m 정도이며, 경사진 지형과 성벽이 더해져 공략하기 쉽지않은 요새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망월산 정상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성 내부. 약간의 평지가 있지만 공간은 넓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망월산성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하류방향), 아래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청풍도호부 관아가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강 상류 방향. 아래쪽에 청풍문화재단지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풍문화재단지에서 보이는 망월산성.

OLYMPUS DIGITAL CAMERA남한강 북쪽에서 보이는 망월산성

청풍 망월산성,
이 산성은 옛 청풍소재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망월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500 m이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4 m이다. 청풍문화재 단지에 인접되어 있으며, 본래는 남한강이 돌아 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청풍호가 감싸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청풍은 삼국시대 사열이현이며,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사열이산성을 늘려 쌓았다고 하였으나 이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황산과 <충청도읍지>의 태산이 군의 동쪽 3리에 있다고 하여 이 산성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최근에 성벽을 보수하고 있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제천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합천 옥전 고분군(사적 326호), 삼국시대 대가야 지배층 무덤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있는 옥전 고분군(사적 326호)이다. 낙동강 지류인 황강변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힜는 삼국시대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들이다. 총 1,000여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중 합천박물관 뒷편 언덕에 봉분의 형태를 갖춘 18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 이 곳은 고령군과 합천군의 경계와 가꾸우며 낙동강과 황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약 7 km 정도 떨어져 있다. 대가야 중심지였던 지산동 고분군이 있는 고령군과 함께 대가야를 주요 세력이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들은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 굴식 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가야의 철기문화를 대표하는 철갑옷, 투구, 장신구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말안장 뒤에 깃발을 꽂는 기꽂이, 고구려 투구를 연상시키는 투구와 철제 말투구 등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신라고분에서 주로 출토되는 로마 유리잔이 이곳에서도 출토되어 신라와의 교류관계도 같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자를 무덤으로 보이는 M2호분에서는 화려한 장신구들이 출토되어 발달된 가야의 금속 세공기술을 보여주기도 한다.

SANYO DIGITAL CAMERA합천 옥전고분군(사적 326호). 삼국시대 대가야 지배층 무덤으로 황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서 멀지 않은 낮은 구릉에 위치학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출토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합천박물관에서 27기의 큰 무덤이 남아 있는 구릉으로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입구 주변에 있는 무덤들. 고령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이나 다른 지역 가야 고분에 비해 봉분의 크기는 작은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황강 주변으로 비교적 넓은 농지가 있으며, 낙동강이 가까워 내륙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고분군 중 위쪽에 있는 M1호분과, M2호분. M1호분에서는 무기류 등이 많이 출토되어 남자가, M2호분에서는 장신구 등이 많이 출토되어 여자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M1호분. 이곳에는 각종 철제무기를 비롯하여 로마에서 만들어진 유리잔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서 출토된 로마제 유리잔. 경주 고분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출토되었다.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옥전고분군 M1호분
봉분의 지름은 동서 19.5 m, 남북 21.4 m로 평면상 타원형을 이룬 반지하식의 덧널무덤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그 가운데에 격벽을 만들어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구분하였다. 주위에는 3기의 순장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고령 지산동고분의 순장곽은 호석안에 포함되어 있음에 비해 이곳에서는 호석의 바깥에 연하여 축조된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경상대학교 박물관의 제3차 조사(1989. 5. 8 ~ 1989. 7. 2)때까지도 전혀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 처녀분이었으나 1991년 봄 안타깝게도 대규모의 도굴피해를 입었다. 유물은 각종 토기를 비롯하여 무구류와 말갖춤, 금동장허리띠 등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여기서 발견된 로만글라스는 경주의 신라고분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출토예로는 유일한 것으로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합천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옆에 있는 봉분의 크기가 비교적 작은 M2호분, 금제귀걸이, 팔찌 등 다양한 장신구들이 출토되었으며, 고분속에 남아 있는 인골도 여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서 출토된 목걸이. 이곳에서는 2,000여 개가 넘는 구슬과 구슬을 만들었던 옥마저석이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뛰어난 금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

OLYMPUS DIGITAL CAMERA금팔찌

옥전고분군 M2호분
봉분의 지름이 동서 13.4 m, 남북 14.5 m의 타원형을 이루는 반지하식 덧널무덤이다. 유물은 금제귀걸이와 팔찌, 구슬목걸이 등 장신구, 말띠드리개, 발걸이, 안교 등의 말갖춤과 각종 토기가 부장되었다. M1호분과 M2호분은 출토유물을 통해 거의 같은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M1호분에서는 무구와 마구가 주로 부장되고 장신구류는 전혀 없는 데 비해 M2호분에서는 반대로 무구는 한 점도 없고 대신 마구와 다양한 장신구류만 발견되었으며, 고분 속에 남아 있었던 인골 감정 결과 여성의 뼈였으므로 M1호분은 남성, M2호분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합천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M3호분. 이곳에서는 최고 지배자의 상징인 용봉무늬와 봉황무늬, 용무늬가 새겨진 고리자루칼 4자루가 출토되었다. 말을 탈 때 깃발을 꽂았던 기꽂이도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용.봉황장식 고리자루칼, 김해박물관, 칼 손잡이 끝에 달린 둥근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이 장신된 것으로 가야 무덤 중에서도 규모가 큰 곳에서 나온다.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여 장식대도라고도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말안장의 뒤쪽에 붙여 기를 꽂는 것이다. 무사의 위엄과 화려함을 더해주며, 고구려의 무덤벽화에서도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M4호분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크고 작은 무덤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M11호분.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무덤들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으로  M23호분을 비롯하여 여러 고분들이 모여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작은 크기의 무덤.

SANYO DIGITAL CAMERA옥전고분군에 있는 무덤 중 제일 아래쪽에 있는 무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말투구, 중앙박물관,  말투구는 복천동 고분군과 일본에서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는 5점이 출토되었다.

옥전고분군, 사적 326호,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이 유적은 황강변 야산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유구는 고총고분 27기를 포함하여 고분의 총 수는 약 1,000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유적은 1985년 겨울부터 1992년 봄까지 5차에 걸쳐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고분은 모두 146기인데,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의 갑옷과 투구, 각종 무기, 말갖춤, 귀걸이와 목걸이 등 무려 2,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의 주인공은 『양직공도』와 「일본서기」에 전하는 다라국의 지배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고분 연구를 통해 다라국 또는 가야사 전반에 대한 재구성이 어느 정도 가능하며, 출토자료의 대부분이 일본의 중기고분에서 출토되는 것과 유사하여 향후 한일고분문화의 비교연구와 이를 토대로 한 한일고대사의 재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안내문, 합천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합천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중앙박물관, 2014년
  5. 김해박물관, 2012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비화가야 점령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이다. 신라가 창녕지역을 편입한 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은 자연석 앞면에 비문을 새겨두고 있다. 앞부분은 닳아서 잃을 수 없지만 뒷부분은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순수비처럼 이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통치이념 등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반부에는 수행하던 신하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문 내용중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단양 적성비와 함께 척경비로 일컫고 있으나, 비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의 순수비와 동일한 성격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척경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기 1년 전으로 대가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도심 만옥정공원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영토에 편입시킨후 이 지역을 다녀간 후 기념으로 남긴 비석이다. 원래 화왕산성 아래 산기슭에 있던 비석을 발견한 후 이곳으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은 높이 1.8 m 정도의 큰 돌에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글자를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SANYO DIGITAL CAMERA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 진흥왕을 수행했던 인물들의 관직과 이름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등을 밝혀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 창녕 만옥정공원. 화왕산 등산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심공원으로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때 만든 삼층석탑, 창녕객사, 창녕 척화비 등 문화재가 공원내에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1일 입”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이 없고 인명과 관등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 비석 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준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 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 부분은 관련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 줄은 3자이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8 cm, 폭 175 cm, 두께 약 30 cm이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 발견하였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송현동 고분군(사적 514호), 삼국시대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송현동 고분군(사적 514호)이다. 창녕읍에서 화왕산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삼국시대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들이다. 아래쪽에 있는 교동고분군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무덤의 성격은 거의 비슷하여 지금은 2개의 고분군이 통합되어 사적5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으며 발굴된 유물들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사이에는 농경지로 바뀐 곳이 많아 두 지역이 분리된 것 처럼 보인다.

창녕지방에 자리잡았던 비화가야는 가야연맹체 중에서 특이하게 낙동강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세력이다. 가야연맹체의 일원이라기 보다는 신라와 관계가 깊었던 세력으로 여겨지며, 신라의 영향을 받은 각배, 철제무기류 등이 많이 출토된다. 주요 유적지로는 창녕 교동 고분군, 계성동 고분군 등이 있다. 신라 진흥왕이 561년에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워놓았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송현동 고분군. 교동교분군 남쪽 화왕산 입구에 큰 규모의 봉분들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이 고분군은 교동교분군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농경지 등으로 훼손되어 지금은 봉분 형태가 남아 있는 큰 무덤들만 17기 정도 확인되고 있다. 봉분 주위에 호석으로 둘러져 있는 무덤과 그렇지 않은 무덤들이 섞여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송현동 고분군 입구.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봉분이 큰 무덤.

SANYO DIGITAL CAMERA2호 무덤. 호석이 둘러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3호무덤

SANYO DIGITAL CAMERA4호무덤

SANYO DIGITAL CAMERA호석이 없는 5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뒷쪽편에 있는 무덤.

SANYO DIGITAL CAMERA2개의 무덤이 있어 쌍분처럼 보이는 안쪽에 있는 무덤. 아래쪽에는 농경지로 바뀌었다.

SANYO DIGITAL CAMERA송현동 고분군과 교동고분군 사이에도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농경지로 바뀌면서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교동교분군.

SANYO DIGITAL CAMERA교동고분군에서 보이는 송현동고분군.

창녕 송현동고분군, 경남 창녕군 송현리
창녕박물관 남쪽에서 목마산 쪽으로 무리지어 있는 가야 시대 고분군이다. 원래 80여 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17기 정도의 봉토분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일제시대에 89.91호분이 발굴되어 엄청난 양의 유물이 반출되었고, 2000년 2월부터 6월까지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현황파악을 위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일제시대의 정식 발굴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축조시기, 무덤형식, 부장유물 등에서 북쪽에 인접한 교동고분군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지름 20 m정도의 대형무덤(1~7호분, 15호분)은 구릉의 높은 줄기를 따라 배치되었고, 소형무덤(8,9,11~14호분)은 합쳐져 표주박 모양으로 보이고 있다. 교동고분군과 마찬가지로 비화가야의 왕릉과 지배층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일제의 파괴, 그리고 후대의 경작과 도굴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000
  2. 안내문, 창녕박물관,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