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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

경남 김해시 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이다. 삼국시대 가야 무덤인 부산 복천동고분군(사적)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없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통형 그릇받침 위에 목이 낮은 도기 항아리가 놓여져 있다. 그릇받침과 항아리의 규모가 크고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그릇받침 표면에 유약이 발라져 있다. 그릇받침은 11단으로 나누어 투창을 새겨 놓고 있으며 가운데 거북모양의 토우가 붙어 있다. 삼국시대 가야를 대표하는 도기로 손꼽을 수 있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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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

부산-복천동-고분군사적-01-20211125<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출처>

  1.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가야시대 지방세력 무덤들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에 있는 복천동 고분군(사적)이다. 동래읍성 북문 안쪽 구릉에 위치하고 가야시대 무덤들이다. 1969년 주택공사 중 우연히 무덤이 확인되어 여러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 땅속에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 땅속에 시신을 바로 묻는 널무덤 등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형식의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토기들, 철제갑옷과 투구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구한말까지 부산지역의 중심지였던 동래지역이 고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유적지 뒷편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복천박물관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1-20211125<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3-20211125<복천동 고분군(아래쪽)>

무덤들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구름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가며 만들어졌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8차에 걸쳐서 발굴,조사되었는데 191기의 무덤과 토기, 철기 등 12,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복천동 고분군 무덤 배치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9-20211125<복천동 고분군 입구>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0-20211125<무덤들이 있는 능선으로 들어가는 길>

복척동 고분군 능선 중앙에 위치한 전시관을 기준으로 위쪽에 위치한 무덤들이 먼저 발굴, 조사되었다. 1969년 처음 발견된 1호 무덤을 비롯하여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보물)이 출토된 7호분, 금동관(보물)이 출토된 10, 11호분, 청동칠두령이 출토된 21, 22호분, 많은 양의 철제갑옷(보물)이 출토된 38호 분 등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1-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4-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1-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1-20211125<금동관,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2-20211125<금동관,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1-20211125<말띠드리개, 5세기, 36호,15호,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3-20211125<신발모양토기, 5세기, 3호, 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4호분>

이 금동관은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에 비해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出’자 모양을 하고 있는 신라 금관과는 달리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판재를 잘라서 모양을 만들고 정으로 두드려 문양을 만드는 단순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5-20200212
<금동관, 보물, 10.11호 무덤,>

11호 무덤은 토기와 장식대도 등에서 신라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금동관은 신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와 가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가 모두 있다. 또한 당시 부산 지역은 대체적으로 5세기 이후 신라의 영향이 크게 미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8-20211125<고리자루 칼, 5세기 11호 무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4세기부터 대형무덤을 중심으로 말갖춤새의 모든 종류가 출토되고 있다.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신라의 영향으로 장식적인 금동제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9-20211125<가야 무사, 출토유물 형태로 복원한 모습>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6-20211125<투구,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7-20211125<목가리개,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2-20211125<갑옷, 5세기 10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9-20211125<팔뚝가리개,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2-20211125<말안장, 5세기, 10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3-20211125<발걸이, 5세기, 10호, 22호,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4-20211125 <재갈, 5세기, 10호, 69호, 111호 무덤>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는 1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가야시대 토기로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없어 보전상태가 양호하다. 그릇받침 가운데에는 거북모양 토우 한마리가 붙어 있는데 삼국시대 토기 중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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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 보물, 김해박물관 소장>

복천동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21.22호분은 돌덧널무덤으로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의 수량이 다른 무덤에 비해 상당히 많다. 청동제 칠두령(보물)을 비롯하여 고리자루큰칼, 철모, 목가리개, 말갖춤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5세기 전반 부산 동래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9-20211125<21호, 22호 무덤 내부(모형)>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6-20200212<청동 칠두령, 보물, 5세기, 22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5-20211125<투구,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8-20211125<목가리개,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0-20211125<허리가리개,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3-20211125<화살통, 22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3-20211125<복숭아모양 토기, 22호, 134호 무덤>

복천동 21.22호분
복천동 고분 구릉의 남쪽 정상부에 위치하는 21.22호분은 딸린덧널이 있는 돌덧널무덤으로, 복천동고분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규모나 부장품의 양이 다른 분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으뜸덧널은 길이 680cm, 너비 640cm, 깊이 290cm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475x160x160cm 가량의 석곽을 쌓아 4매의 뚜껑돌로 덮고 밀폐한 구조이다. 무덤구덩이와 석곽 사이를 흙과 활석으로 채워 보강해 나가면서 네 벽을 동시에 쌓아 올렸고, 바닥에 조그마한 깬돌을 깔고 가운데 부분에 나무로 만든 덧널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이 있었던 자리에는 20매의 대형 덩이쇠와 함께 3점의 고리자루큰칼, 목걸이, 귀걸이, 청동제 칠두령과 토기, 철모, 곡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남쪽에서는 굽다리접시, 항아리받침대, 복숭아모양토기 등 각종 토기류, 호록금구, 철촉군, 마구류, 목가리개, 전복, 명주개량조개 등이, 북쪽에서는 각종 토기류와 함께 철촉군, 도끼,낫, 보습 등의 농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 주인공 발치 아래에서 순장된 3명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에서 약 50cm 가량 북쪽에 만들어졌으며, 길이 630cm, 폭 420cm, 깊이 270cm 가량의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나무로 만든 곽을 설치한 구조이다. 북쪽에서는 대형의 발형 그릇받침과 밑이 둥근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토기류가 남쪽에서는 낫, 창, 손칼 등 철기류, 동쪽에서는 철제 투구와 목가리개, 허리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복천동 21.22호분은 다량으로 출토된 부장풍과 그 성격으로 볼 때, 5세기 전반 무렵 동래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무덤이다. (안내문, 복천박물관, 2021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5-20211125<귀때토기, 5세기, 34호 무덤>

38호 무덤은 복천동고분군 중 최초의 딸린덧널이 있는 무덤이자 바닥을 갖추고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 무덤이다. 철로 만든 판갑옷, 비늘갑옷, 투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철제 갑옷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유물로 볼 때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전환기 무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8-20211125<38호 무덤 내부(모형)>

부산 복천동 38호분 철제갑옷은 가야 초기인 4세기에 만들어진 철제 갑옷이다. 투구, 목가리개, 갑옷으로 구성되어 있다. 갑옷을 구성하고 있는 철판들을 두드려 얇게 만들었으며 철판들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였다. 철제갑옷 구성품이 온전이 남아 있으며 철제품임에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1-20211125<복천동 38호분 출토 철제갑옷, 보물>

철제갑옷 일괄은 복천동고분군 제5차 발굴조사(1993~1995년)시 복천동 38호분의 으뜸덧널에서 출토되었다. 판갑옷은 세로로 긴 철판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였고, 목가리개 역시 긴 철판을 연결한 형태이며 가죽끈 흔적으로 보아 판갑옷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투구는 ‘S’자형으로 긴 철판 20매를 엮어 만들었으며 그 위에 작은 복발을 얹었다. 아랫부분에는 각각 2매의 철판을 엮어 볼가리개를 만들었다. 갑옷의 몸통 앞쪽에는 보수를 위해 작은 철판을 덧댄 흔적이 있어 판갑옷이 실전용 갑옷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복천동 38호 갑옷은 일괄로 확인되어 삼국시대 갑옷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기준이 된다. 또한 철제 방어구의 가장 빠른 사례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판갑 중 가장 가깝게 복원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야의 뛰어난 금속제련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복천박물관, 2021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0-20211125<통형동기, 5세기, 38호, 60호 무덤>

복천동 38호분
복천동 38호분은 고분의 남쪽 구릉에 위치하는 부곽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으로 복천동고분군에서 묘광의 길이가 가장 길다. 봉분의 규모는 자세하지 않으나 토층상태로 보아 덧널 위에 점토와 모래, 파낸 흙을 얇게 깔아 층층이 쌓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으뜸덧널은 길이 750cm, 너비 150cm 정도 크기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두께 10cm 가량의 나무판 수십매를 사용하여 535x250cm의 목곽을 만든 구조이다. 또 긴 벽을 따라 너비가 25cm 가량 되는 사각기둥을 세워 목곽을 튼튼하게 보강하였다. 곽과 구덩이 사이의 공간은 모래가 섞인 흙과 점토를 번갈아 가면서 채웠다. 무덤 바닥에는 점년에 크고 작은 깬돌을 깔고 길이방향으로 큰 돌을 놓아 단면 형태가 凹자형이다. 돌을 놓은 가운데 부분에는 멍석을 깔고 400점 가량의 화살촉을 나란히 엮어 5열로 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북쪽 모서리에 돌이 깔리지 않은 공간에는 순장자가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천동 38호분은 복천동고분군 최초의 딸린덧널무덤이자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바닥시설을 갖추고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 무덤이다. 또 가죽이나 나무가 아니 철로 만든 판갑옷, 비늘갑옷, 투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철제 방어용 무구를 갖추고 있다. 뿌리가 없는 화살촉과 함께 단면 삼각형의 화살촉이, 단면 마름모꼴의 짧은 창과 함께 고사리장식이 달린 긴 창 등, 이 고분에는 구식무기와 신식 무기가 함께 부장되었다. 즉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를 부장하고 있는 것이다. 복천동 38호분은 무덤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과거의 요소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전환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부산지역의 고대사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안내문, 복천동박물관, 2021년)

무덤들이 있는 능선 중앙 53, 54호분 무덤 자리에는 전시관을 설치하여 무덤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전시관 아래는 43~51호 무덤이 확인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2-20211125<무덤 내부를 볼 수 있는 전시관>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4-20211125<특이한 모양의 항아리 받침대, 5세기, 53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7-20211125<등잔모양토기,5세기, 53호 무덤>

능선 아래쪽은 대부분 1990년대 이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총 28기의 묘가 추가 확인되었다. 정상부에 있는 무덤들은 부곽이 대형묘가, 옆쪽으로는작은 규모의 무덤들이 배치되어 있다. 무덤이 주요 지점에는 화양목을 심어 그 위치를 표시해 놓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8-20211125<전시관 아래 43 ~ 51호 무덤 무덤이 확인된 자리>

아래쪽으로 73호, 69호, 71호, 78호 무덤 등이 표시되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7-20211125<아래쪽에 있는 무덤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2-20211125<아래쪽에 있는 무덤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8-20211125<능선 아래 탐방로(동쪽)>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21-20211125<아래쪽 끝부분, 83호, 84호 무덤이 확인된 자리>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7-20211125<56호, 57호, 64호, 65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2-20211125<능선 아래 탐방로(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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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57호B>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4-20211125<투구, 5세기, 93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3-20211125<판갑, 5세기, 112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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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164호분>

복천동 고분군은 옛 동래읍의 주산인 마안선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동래부 읍치가 있던곳으로 동래읍성이 고분군을 둘러싸고 있다. 고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지였으며 부산항에서 울산을 거쳐 경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는 거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5-20211125<능선 뒷편으로 보이는 동래읍성>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6-20211125<동래읍성 북문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4-20211125<동래읍성 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 고분군과 동래부 읍치>

1996년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이 개관되어 이곳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6-20211125<복천박물관>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옛 동래읍의 주산인 마안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낮은 구릉 위에 있다. 6.25 전쟁 이후 복천동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에는 판잣집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는데 1969년 주택 개량공사 중 우연히 무덤이 확인되어 긴급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수차례의 수습 및 시굴조사와 8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2세기 전반부터 7세기 초에 해당하는 200여 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구릉의 정상부에는 주로 4~5세기에 속하는 딸린덧널을 갖춘 대형의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 10,000여 점에 이르며 철제 유물이 많다. 특히, 단일 유적으로는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의 철제 갑옷이 출토되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잘 보여준다. 주요 유물로는 복천동 7호분 출토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보물), 10.11호분 출토 금동관(보물), 21.22호분 출토 청동칠두령(보물), 38호분 출토 철제갑옷 일괄(보물), 10.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 등이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안내문, 부산 복천박물관, 2021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

경주 월성(사적),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경주 월성(月城, 사적)이다. 삼국시대 신라 5대 파사왕이 110년에 성을 쌓고 도성을 옮긴 이래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궁성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남천 북쪽 초승달처럼 생긴 지형에 성을 쌓았다. 동,서,북쪽에는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으며, 남천이 흐르는 남쪽은 자연지형을 활용했다. 북쪽과 동,서쪽 성벽 아래에는 방어시설로 해자를 만들었다. 성곽의 입지요건이나 축성방법 등에서 대구 달성,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삼국시대 이전 삼한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월성(사적)>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년 11월(음) )
탈해(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功)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南解王) 5년(8)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년(10)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寡人)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탈해(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을 쌓다 ( 101년 02월(음) )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 101년 07월(음) )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은 둘레 2,400 m, 동서길이 900 m, 남북길이 260 m 규모로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半月城), 신월성(新月城)이라 불렀으며 궁궐이 있어 재성(在城)으로도 불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왕 때 성을 쌓고 궁성을 옮겼으며 문무왕 때 동궁과 월지, 첨성대 일대가 궁성에 편입되면서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원래는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었는데 후대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특유의 석축성으로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경주 반월성<경주 월성(사적)>

경주 시가지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을 따라 쌓은 삼한시대 토성(土城)이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월성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흘러 형산강과 합류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경주 월성(동쪽)>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월성(서쪽)>

OLYMPUS DIGITAL CAMERA<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과 남쪽 성벽>

월성에는 많은 성문이 있었는데 현재는 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와 월정교와 연결되는 서문터가 확인되고 있다. 동문터 발굴조사 결과 앞면 1칸, 옆면 3칸의 성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 출입문으로는 작은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신라와 백제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성벽은 너비 40 m, 높이 10 m 이상의 상당히 큰 규모이다. 성벽의 재료는 볏집, 점토, 건물벽체 등 다양하나 재료를 사용했으며 윗쪽에는 자연석을 견고히 쌓고 있다.  월성은 4세기 소지왕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고구려 산성 축성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문 옆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부근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으로 옮겨 놓은 석빙고>

SANYO DIGITAL CAMERA<작은 성문처럼 보이는 북쪽 성벽>

월성 북쪽에서 계림과 대릉원으로 출입하는 성문처럼 보이는 출입문을 볼 수 있는데 설명자료 등에는 성문터였다는 내용은 없다

SANYO DIGITAL CAMERA<북쪽 성문 부근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안쪽에서 본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북쪽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북쪽 출입문 서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성벽과 해자>

성안에는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 옮겨온 석빙고(보물)도 있다. 건물로는 월상루, 망덕루등의 누각과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과 내성 등이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성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월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성벽에 위치한 석빙고(보물)>

SANYO DIGITAL CAMERA<월성 내부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성문 부근 건물터>

월성은 남쪽을 흐르는 남천이 해자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쪽, 북쪽,ㅡ 서쪽으로는 인공적으로 도랑을 파서 해자를 조성했다. 해자는 월성을 크게 수리한 소지왕 때(5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월성이 동궁과 첨성대 일대로 확장되면서 조경적인 역할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남쪽, 복원이 완료된 석축해자>

월성해자는 1980년대 이후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람을 묻은 인골을 비롯하여 목간, 토기, 기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해자는 약 500년 동안 땅을 파서 만든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음이 확인되었다. 월성 부변에는 해자가 10개 이상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연못이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북쪽 성벽 아래 발굴과 복원이 진행중인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아래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에서 본 모습>

북쪽 성벽 아래 4호 해자는 동서의 길이가 약 80 m, 남북 약 40 m에 달하는 장타원형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둥근 형태의 강돌들을 이용하여 석축 해자를 조성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그 안쪽으로 쌓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비가 완료된 4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2호 해자, 3호 해자, 정비되기 이전 모습>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1호 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때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동궁(東宮)을 처음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궁궐이 월성 밖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월성 해자 북쪽에서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첨성대는 궁궐에서 창경궁 관천대와 비슷한 역할과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 679년 08월(음) )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SANYO DIGITAL CAMERA<1호 해자와 계림 사이 계림 남편 건물터>

월성 북쪽편에는 계림 남쪽과 북쪽, 첨성대 남쪽에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내물왕릉과 계림 부근, 첨성대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제의시설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보이는 계림 북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월성에서 대릉원으로 연결되는 길>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첨성대 남쪽편 건물터>

 

경주 월성(慶州 月城), 사적, 경북 경주시 인왕동 387-1
이 곳은 신라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 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月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 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후 파사왕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 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었고, 동쪽 · 북쪽 ·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도랑인 해자(子)를 팠다. 남문, 북문, 인화문 등과 임해전(臨海殿)으로 통하던 임해문이 있었으며, 그 밖에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 얼음창고인 석빙고가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계림(사적), 김알지 탄생설화가 있는 곳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계림(桂林, 사적)이다.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아래에 있는 신성한 숲으로 원래는 시림(始林)으로 불렸는데 김알지가 태어난 후 계림으로 불렀다고 한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으며 내물왕 이후 김씨의 후손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계림은 느티니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수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계림(사적)>

알지가 태어나고 계림을 국호로 삼다 ( 65년 03월(음) )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1의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월성 북쪽 출입문을 나서면 서쪽편에 작은 숲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문화재로 분류할 수 있는 유적,유물이 발굴된 장소는 아니지만 신라 천년을 이끌어온 김알지 탄생 설화가 있는 숲이다. 계림은 오래된 고목들이 많고 종류도 다양해 독특한 숲을 이루고 있다. 계림 끝부분에는 경주김씨 세습 체제를 구축한 내물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월성에서 계림으로 내려오는 길>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볼 수 있는 고목들>

SANYO DIGITAL CAMERA<계림 숲>

계림에는 조선후기 순조 때(1803년)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 비각>

계림 끝에는 김알지 후손으로 왕위에 올른 내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내물왕릉(사적)이다. 신라는 내물왕 이후 김씨와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계림 바깥쪽으로는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인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보이는 고분들>

SANYO DIGITAL CAMERA<내물왕릉(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첨성대 부근에서 보이는 계림>

OLYMPUS DIGITAL CAMERA<계림 야경>

대릉원 입구에는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를 모시는 계림세묘(桂林世廟)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림 세묘>

경주 계림 (慶州 桂林), 사적, 경북 경주시 교동 1
이 숲은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탤해왕)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계림)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5.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황남대총, 화려한 유물들이 발굴된 무덤

경북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에 있는 경주 대릉원 98호 무덤인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길이 120 m의 거대한 쌍분인 이 무덤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 되었다. 먼저 조성된 남분이 왕의 무덤이며, 나중에 덧붙여진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목재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조가구를 먼저 설치하고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수많은 껴묻거리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고분 중에서 그 수량이 많으면서 수준도 높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도 많으며 서역이나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된 것도 있다. 4~5세기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989호 무덤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과 95호 무덤 사이로 보이는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과 98호 무덤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천마총에서 보이는 황남대총>

무덤의 구조는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나무로 널과 덧널을 짜고,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바깥에는 흙을 높게 쌓은 구조이다. 황남대총은 남분을 먼저 조성하고 북분을 다시 잇대어 쌓아 표주박 모양의 쌍분이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무덤 구조>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북분) 발굴 당시(1974년) 모습>

장송은 무덤에서 시작된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로 널과 덧널을 짜고, 그 주위에 강돌로 돌무지를 쌓고, 가장 바깥에 흙을 높게 덮은 무덤입니다. 나무로 짠 널과 덧널은 그 형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돌무지는 덧널이 썩으면 한순간에 흐트러집니다. 봉분은 흙을 기계에 다져 쌓지 않았으므로 표면에 따로 찰흙을 입히지 않으면 금방 흘러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무지덧널무덤은 생전에 만들어 두기 어렵고, 그러한 증거가 지금까지 발견되지도 않았습니다. 황남대총에는 봉우리가 두개인데, 그 이유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돌무지 덧널무덤 2기를 잇대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자를 모신 남분을 먼저 만들고, 이후에 여자를 모신 북분을 남분에 붙여 만들었습니다. 이들 주인공은 신라 적석목곽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황금 장신구로 저장한 점 등으로 보아 왕인 마립간과 왕비인 부인임에 분명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은 높이 27.5 cm이며, 드리개는 길이 13~ 30.3 cm이다.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삼단으로 쌓아 올린 나무모양을 3개 두고 있으며, 뒷쪽에는 사슴뿔모양을 하고 있는 장식 2개을 두고 있다. 금관드리개는 좌우에 대칭적으로 3개씩 굵은 고리에 매달아 늘어뜨렸다. 안쪽 끝부분에는 푸른색의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국보191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황남대총 북분 은제관식(보물)은 날개모양의 조익형관식(鳥翼形冠飾) 1점과 나비모양 접형관식(蝶形冠飾) 2점이 출토되었다. 금제관식에 비해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은제관식(보물)>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국보)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 금속판을 붙인 것으로 길이 120 cm이며 28장의 판으로 만들어졌다. 허리띠 아래에는 13개의 띠드리개가 연결되어 있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모양, 주머니모양, 쪽집게모양 등이 달려 있는데, 북방유목민들이 생활습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192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허리띠, 5세기,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굴된 은제 허리띠 끝장식에  ‘夫人帶’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의 주인공을 여성(왕비)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부인대’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 끝장식,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허리띠 끝장식, 5세기,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팔찌는 지름 7.5 cm 정도 크기로 몸에 착용한 채로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가 발견되었다. 반지는 지름 1.8 cm로 모두 19개가 발견되었다. 서역풍의 장식문양을 하고 있어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보물623호-01-20200212<팔찌(보물)>

보물623호-02-20200212<반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드리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제드리개(황남대총 북분), 금귀걸이(황남대총 북분), 금귀걸이(황남동 442번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황남대총 북분), 금제 드리개(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나뭇가지모양 장식,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띠,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투조판, 5세기,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보물)은 높이 7 cm, 윗부분 지름 10.5 cm 크기이다. 받침에 약간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외형이나 유리의 무늬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볼 수 없는 형태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유물이다.

보물624호-02-20200212<유리잔, 경주 황남대총 북분, 삼국시대(신라) 6세기, 보물>

황남대총 북분 은잔(보물)은 높이 3.5 cm, 지름 7 cm 크기로 표면에 특이한 장식을 새겨놓고 있다. 사람머리를 하고 있는 새, 용 등 상상속의 동물을 표현하고 있는데 페르시아에서 전래되어 중국 남북조시대 유행했던 형식이라 한다.

보물627호-01-20200212<황남대총 북분 은잔(보물)>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보물)는 높이 10 cm, 지름 10 cm, 무게 169g로 이전부터 토기로 만들어졌던 굽다리접시와 같은 형태인데 나뭇잎 모양 장식 7개가 붙여져 있다. 실제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무덤에 껴묻거리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보물)>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보물)은 3가지 종류로 높이 8 cm, 지름 10 cm의 은제합, 높이 5.5 cm, 지름 10.5 cm의 은제완, 높이 4.5 cm, 지름 11 cm의 금제완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굽다리접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은제 굽다리접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청동 세발솥, 5세기, 황남대총 북분>

SANYO DIGITAL CAMERA<청동긴목 항아리>

신라 무덤의 청동그릇은 대부분 고구려에서 온 것이나, 몇몇은 그 계보가 뚜렷하지 않다. 황남대총의 청동제 긴목항아리는 신라 질그릇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목이 곧게 길며 바닥이 둥글다. 이는 고구려의 항아리가 나팔처럼 벌어진 목과 편평한 바닥인 점과 비교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마량’명 칠기 (복원품)>

황남대총에서 칠기는 남분에서 총9점, 북분에서는 300여개로 추정되는 분량의 칠기 파편들이 출토되었다. 이 중 남분에서 바닥에 ‘마량’글자가 있는 칠기가 출토되었다. 칠기들의 표면에는 물결무늬와 불꽃무늬 등이 그려져 있고, 그 외에 달리는 사금과 말, 날개를 펼친 봉황과 비상하고 있는 용 등으로 추정되는 동물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뿔모양 장식, 은제 뿔모양 장식, 은제 뿔잔 마구리>

마립간, 황금의 나라 신라를 열다.
4세기 중반에 고구려는 이미 북방평원을 아우르는 거대 왕국이었고, 백제는 한반도 중부에서 서남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튼실한 왕국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즈음인 356년 신라에서 미추이사금의 조카이자 사위인 내물(內物)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내물은 앞서 사용하던 이사금이란 왕호를 가장 높은 지위란 뜻을 지닌 ‘마립간(麻立干)’이라 바꾸었습니다. 마립간이란, 앞선 삼한시기부터 지역소국을 이끌던 지배자인 干(Khan)보다 한층 더 높은 통치자를 일컫는 신라 고유의 왕호입니다. 이 통치자는 황금에 주목하였고, 황금을 통해 나라의 위계를 새로 만들어갔습니다. 마립간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속하는 왕족은 황금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였습니다. 방계로 멀어진 왕족과 지방의 전통적인 족장세력은 금동 혹은 은으로 꾸민 복식을 사용하였습니다. 복식을 꾸민 장신구는 재질만 다를 뿐 모양이 마립간의 것과 같았는데, 모두가 신라 사람이라는 표시였던 듯합니다. 황금의 나라, 신라는 마립간이 다스리던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은  높이 17.2 cm, 지름 16.6 cm 크기로 머리띠 위에 3개의 가지가 있는 장식이 있다. 가운데에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은판을 붙였으며 좌우에는 깃털이 있는 반달모양의 은판을 붙였다. 신라 관모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보물631호-01-20200212<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

은제 관모는 황남대총 남분의 부장궤에서 출토되었다. 앞쪽에는 금동제 맞새김판을 덧댄 오각형의 은판을 붙였는데, 간략화된 용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은제관모, 5세기,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관모, 남분,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백화수피제 고깔, 남분>

황남대총 남분 금제관식(보물)은 관모에 끼워 장식하는 것으로, 새 날개를 본떠 만든 것이다. 날개가 달려있어 화려하며 날아갈 듯한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45 cm, 날개 끝 너비 59 cm 크기로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山자 모양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꾸미개, 금, 삼국시대 5세기, 황남대총, 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관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남분 금제허리띠(보물)는 길이 99 cm이며 띠드리개는 작은것 18 ~ 22 cm, 큰 것은 79.5 cm이다. 허리띠는 문양이 뚫린 사각형 판과 나뭇잎 장식을 연결하였다. 장식 아래에는 7줄의 띠 드리개가 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다른 금제허리띠에 비해 형태는 단순하고, 매달린 드리개 수와 종류도 적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허리띠 드리개, 5세기,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는 곱은옥 모양의 금 구슬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의 금 구슬을 연결하였다. 금사슬, 금 구슬, 곱은옥이 비례와 구성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인다. 푸른색의 곱은옥을 사용하지 않고 금으로 곱은옥 모양을 만든것이 특이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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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

가슴꾸미개는 목걸이와는 달리 가슴 앞부분과 어깨, 등부분까지 꾸며준다. 왕릉금 무덤인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확인되며, 잠자리구슬이라고도 불리는 청령옥, 금구슬, 곱은옥 등 다양한 구슬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꾸미개,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유리목걸이,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곱은옥,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유리 목걸이(5세기, 황남대총 남분)와 유리구슬(5세기,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금속제 구슬(황남대총 남분), 금속제구슬(황오동 무덤), 금제달개(천마총), 금제장식(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보물)이다. 갑옷 중 전투시 팔뚝을 보호하는 팔뚝가리개로 길이 35 cm이다. 팔목을 끼우는 부분에 경첩을 위아래로 달았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 중 은으로 만든 유일한 팔뚝가리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보물),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남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말은 신라 무덤에서 나온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닥판, 발등을 감싸는 부분, 발뒷축을 감싸는 부분 등 3매의 금동판을 접합하여 만들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신발,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장식구,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장식구,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달개,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허리띠 끝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국보)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유리병 1점과 유리잔 3점이다. 유물들은 파손된 채 발견되었으나 원형을 알 수 있게 복원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국보193호-01-20200212
<봉황모양유리병, 경주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국보193호-02-20200212
<유리잔,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국보>

국보193호-03-20200212<유리잔,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은제국자,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대롱이 달린 작은 단지, 5세기, 황남대총 남분>

마립간시기 신라에 도입된 최초의 말갖춤은 중무장기병과 관련이 있습니다. 처음에 실전무구였던 말갖춤은 4세기말 이후 귀금속 장식이 더해져 지위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이를 장식마구라 부를 수 있습니다. 금빛과 비단벌레의 화려함이 어우러진 신라 마립간시기의 말갖춤은 역사상 어디의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마립간을 위해 만든 화려한 말갖춤은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최상의 물품이었습니다. 황남대총 남분에는 최소한 7벌의 말갖춤이 있고, 이 가운데 장식마구가 최소 4벌입니다. 서로 겹쳐 일렬로 둔 화려한 말갖춤은 요즘 방식으로 리무진 4대를 가지런하게 주차해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은제말안장꾸미개와 목심, 황남대총 남분>

화려한 말안장꾸미개로 전체를 은으로 장식하고 있다. 물자가 풍부한 현대에서 이런 화려한 말안장을 사용하지는 않는 매우 화려한 말안장이다.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장식 안장 장식구, 북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장식 말띠드리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빈단벌레 장식 안장 장식구,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장식 재갈, 북분, 금동제 말띠꾸미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허리띠, 남분>

SANYO DIGITAL CAMERA<말안장 꾸미개>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꾸미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장식, 북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꾸미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솟을장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재갈, 금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발걸이, 청동, 삼국시대(신라), 경주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은제 수식부 삼각형 장식,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드리개>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드리개>

SANYO DIGITAL CAMERA<청동말방울, 금동제 복발형 말갖춤>

환두대도라고도 불리는 허리띠에 매달고 다닐 수 있는 고리가 달린 칼이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칼의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큰칼, 황남대총 남분>

SANYO DIGITAL CAMERA<장식손칼, 남분>

황남대총에서는 엄청난 양의 철제 도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동북아시아에서 손꼽을 정도로 많은 양이라 한다. 출토된 유물로는 대장간 연장과 덩이쇠, 무기류, 농기구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쇠화살촉,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쇠투겁창,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큰투겁창,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큰칼,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덩이쇠,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사각형 쇠막대,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큰덩이쇠,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쇠도끼, 5세기, 황남대총 남분>

나라의 힘은 쇠에서 나왔다.
쇠는 거의 모든 물건으로 만들수 있으며, 그 무엇보다 단단하게도 날카롭게도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재료입니다. 쇠로 만든 연모나 무기는 이를 장악한 세력에게 엄청난 힘을 몰아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철 생산을 바탕으로 고대의 나라들은 세워지고 커질 수 있었습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대장간 연모와 덩이쇠는 신라가 제철의 강국이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발굴된 철제품의 물량은 단연 동북아시아에서 손꼽을 정도입니다. 신라의 왕은 쇠를 기반으로 나라의 힘을 키웠고, 쇠로 만든 농기구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쇠로 만든 무기로 나라를 지켜갔습니다. 왕릉의 대장간 연모와 철제품은 국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토기들(큰 항아리, 그릇쟁반과 뚜껑굽다리접시,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뚜껑, 기목항아리)은 무덤의 주인이 사후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껴묻거리로 묻었던 생활용품이다. 실제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껴묻거리 용도로 만든 것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토기들>

OLYMPUS DIGITAL CAMERA<그릇쟁반과 뚜껑굽다리접시,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황남대총 남분>

SANYO DIGITAL CAMERA<토기들>

무덤을 통해 확인되는 물품은 거의대부분 썩지 않는 재질뿐입니다. 황남대총에는 지금은 알 수 없는 귀한 물건이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칠기는 물론 각종 비단옷과 펠트로 만든 카펫 등이 가득했을 듯 합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일본에 수출한 주요 물품에 이것들이 있기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무엇보다 황남대총에서 빛나는 것은 귀금속과 그릇들입니다. 질그릇 모양의 것도 있고 칠기를 본 뜬 것도 있습니다. 귀금속 그릇은 순전히 왕족만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왕릉에는 그 어떤 무덤보다 많이 넣어 두었음을 황남대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은 내물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무덤으로 당시는 신라와 고구려가 협력하던 시기였다. 출토 유물 중에는 고구려에 전해진 유물도 있고, 고구려적인 특징을 가진 것이 많다.

SANYO DIGITAL CAMERA<청동합, 은합, 남분>

뚜껑에 ‘+’자 모양 손잡이를 단 금속으로 만든 합은 고구려에서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집안 칠성산 96호 무덤 출토품이다. 신라에서 황남대총 남분, 서봉총, 천마총, 은련총, 경산 조영동 1~2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은제와 청동제가 있는데, 황남대총 남분과 서봉총 출토품은 은으로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청동솥, 청동초두, 남분>

남분출토 허리띠꾸미개의 몽황무늬와 금동제 장식에 들어간 문양들이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남분 출토 허리띠꾸미개와 금동제 장식>

SANYO DIGITAL CAMERA<허리띠꾸미개와 화실집꾸미개, 집안 마선구1호 벽화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황남대총에서는 당시에 많이 볼 수 없는 쇠거울과 조문박국경이라는 청동거울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에서 들여온 것을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쇠거울(북분)과 청동거울(남분)>

북분에서는 흑갈유반구병이 나왔다. 고리가 어깨에 세로로 달렸고, 목이 그리 길지 않으며, 나팔모양으로 입이 벌여졌으나 터이 없다. 동진 초기인 4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SANYO DIGITAL CAMERA<흑갈유반유병, 북분>

지금까지 실크로드를 거쳐 왔다고 본 물품들 중에는 정작 동북아시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중국대륙의 산물로 보아야 합니다. 짙은 청색을 띠는 유리그릇과 육각 구획속에 다양한 동물이 표현된 은잔이 대표적입니다. 이밖에 흑갈색의 작은 도자기 병은 중국 남조의 산물입니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거쳐온 물품과 함께 신라사신이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이모가이 장식 금동제 말띠꾸미개>

‘이모가이’라고 부르는 원뿔처럼 생긴 고둥의 구멍 주변은 편평하여 흡사 소용돌이처럼 둥글게 말려있다. 이는 일본열고 규슈 지방의 남부와 더 남쪽 바다에 서식하는 아열대 고둥이다. 특이한 형태 때문에 들여온 듯 하여, 다듬어서 말띠꾸미개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데 사용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야광조개국자>

황남대총에는 왜에서 온 물품이 있는데, 대부분 물건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일본열도 남쪽의 아열대에서 사는 고둥의 껍데기는 말갖춤을 꾸미는 재료와 금동으로 입술을 감싼 아름다운 국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울러 곱은 옥의 재료인 경옥도 수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경옥은 비취라고도 하는데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채굴지는 일본 니이가타현 이토이가와 유역입니다. 곱은옥의 원류는 청동기시대에 천하석으로 만든 것이 있으므로 한반도가 분명합니다. 다만 신라무덤에 있는 경옥제 곱은옥은 광석 또는 완제품으로 일본열도에서 수입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지구<경주 대릉원(사적) 미추왕릉지구 주요 무덤들>

황남대총(皇南大塚)이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이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는 쌍무덤입니다. 남쪽 무덤(남분)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북분)을 잇대어 만들었습니다. 무덤의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밝혀졌습니다. 남분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분에는 여자가 묻혔으며, 이들은 부부로 추정됩니다. 남북 길이가 120 m이며 동서 지름이 80 m인데, 높이가 남분은 21.9 m이고, 북분은 22.6 m입니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5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남분의 주인공이 당시에 마립간이라는 칭호로 불린 신라의 왕이었겠지만,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6.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7. Cultural Heritage Wiki,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