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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도비산 부석사, 서해바다 경치가 아름다운 사찰

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島飛山) 중턱에 위치한 전통사찰인 부석사(浮石寺)이다. 화엄십찰 중 하나인 영주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사찰의 이름도 같다. 의상대사와 부석바위에 얽힌 전설 또한 서로 비슷하다. 이는 부석사가 있는 서산 천수만과 태안반도 일대가 중국과의 해상교류 창구였기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 무학대사가 크게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려때 이곳에 조성된 금동관음보살상이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도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석사는 도비산(해발 352m) 중턱에 호수로 바뀐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 뒷편 언덕에 부석바위와 비슷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고 도비산 또한 산이 바다에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을 중심으로 산신각, 심검당, 요사채 등의 건물과 강당 건물인 안양루 등이 있다. 극락전에 모셔졌던 아미타불은 1980년 도난 당했으며, 대마도에 있던 불상 또한 고려말 왜구가 약탈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도비산 중턱에 자리잡은 서산 부석사. 영주 부석사처럼 사찰 건물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준다.

천년고찰 기도영험도량 부석사,  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부석사는 신라의 대표적 고승 의상대사(625~702년)가 서기 677년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심검당 보수과정에서 나온 상량기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중국에 갔다 온 인연으로 부석사를 창건한 이래로’라는 내용으로 보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는 오랫동안 전해져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상대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쌍벽을 이루던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는 왕족출신으로 경주 황복사에서 20세에 스님이 되었다. 당시는 불교가 전래된 지얼마되지 않아 불교의 교학이 미천하여 불교학의 선진국인 당나라에 구법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오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이에 의상과 원효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진덕여왕 4년, 605) 처음에 시도한 여정은 고구려를 통해 요동반도로 들어가는 길이었으나 고구려 병사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을 받아 고초를 겪은 이후 경주로 다시 남하하게 된다. 이후 재차 당나라 구법유학의 길을 나서는데 이번에 선택한 길은 바닷길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항성(경기도 화성)을 통해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게 되는 인연으로 깨친 바 있어 되돌아오고 의상은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했다. 이 떄는 의상의 나이 36세 되던 해(660년)의 일이었다. 도착한 곳은 당나라 등주(登州)였는데 한 신도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 때 그 집의 선묘라는 딸이 의상에게 반하여 사모의 정을 품었으나 끝내 대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에 선묘는 “세세생생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께 필요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라며 소원을 말하고 마음을 미루어 두었다. 세월이 흘러 의상이 종남산의 지장사에서 지엄게게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그 신도의 집에 들러 지난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때 선묘는 의상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난 후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지며 이 내 몸이 용이 되어 저배를 무사히 귀국하게 할 것이라는 발원을 하였다. 귀국 후 의상은 선묘의 넋을 천도하기 위한 절을 지을 명당 자리를 찾아 나서는데 대사의 발길이 멈춘 곳은 당나라를 마주하고 있는 서해 바닷가 천하의 3대 명당자리 도비산이었다. 도비산이란 이름은 마치 섬이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3대 명당자리에 속하는 곳이다. 의상대사는 이곳이야말로 법륜을 새길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은 백제의 멸망후 아직 백제의 유민들의 민심이 흉흉하던 지역이라 사람들의 반대가 많았다. 항상 의상을 따라 다니던 선묘는 곧 의상의 뜻을 알아채고는 허공중에 커다란 바위들을 띄워 사람들을 물리친뒤 바다에 그 돌을 띄워 놓으니 감히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였다. 이래서 지역주민들은 바다에 떠 있던 돌을 부석 혹은 검은여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일년에 한 번 재를 지내게 된다. 이후 부석사는 무학대사가 중창하고 근세에는 참선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선사가 제자인 만공선사와 머물렀던 절로 호서지방의 명찰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서산 부석사,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서산 부석사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일주문이 사자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아래에 서해안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높은 누각을 세워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누각에서 내려다 본 천수만.  1980년대 간척사업으로 방조제가 막히면서 지금은 호수로 바뀌었고 많은 부분이 간척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석사 들어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부석사 입구에서 내려다 본 누각.

OLYMPUS DIGITAL CAMERA부석사 경내. 앞쪽에 작은 강당인 안양루가 있고, 주불전이 극락전과 요사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요사채 건물이 누운 암소처럼 생겼다고 하며, 그 아래 샘물이 유명하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석사 주불전인 극락전. 이곳 모셔졌던 아미타여래좌상은 1980년대 도난당했으며, 지금은 후불탱화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석사 요사채인 심검당. 승려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이곳을 찾는 손님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강당 건물인 안양루. 영주 부석사와 같은 이름이며,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 또한 매우 훌륭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안량루 옆 마당.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 또한 영주 부석사와 비슷하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 또한 뛰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언덕에는 산신각과 부석바위, 토굴, 마애불상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뒷편에는 최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신각.

OLYMPUS DIGITAL CAMERA산신각 뒷편 바위. 영주 부석사의 부석바위와 비슷하게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신각에 내려다 본 부석사 경내.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언덕에는 부석사라는 느낌을 주는 바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뒷편 토굴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승려 만공이 수행했다는 토굴.

<출처>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두산백과

서산 간월암(看月庵), 천수만 풍경이 아름다운 작은 암자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작은 암자인 간월암(看月庵)이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하는 큰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 달을 보고 도를 깨쳐다고 하여 간월암이라 부른다. 또한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난 굴로 만든 어리굴젓을 태조에게 진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해오는 이야기 외에 사찰의 내력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구한말에 폐사된 것을 일제강점기에 승려 만공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간월암은 서산 천수만 가운데 작은 섬에 있는 암자로 주변 섬들과 해가 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간월암은 밀물 때는 섬이 되었다가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되는 특이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찾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느낌을 준다. 1980년대 천수만에 제방을 쌓고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안면도를 들어가는 교통로에 자리잡게 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안면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어리굴젓과 함께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산 간월암. 밀물때는 물에 잠겨 섬이 되는 특이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암자이다. 호수같은 천수만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간월암 뒷마당에 조성해 놓은 나무로 만든 조각상들. 기복적인 면을 보이는 조각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간월암은 건물이름이 없는 불전과 요사채 건물 몇동이 있는 작은 암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섬에 있는 암자이지만 산신을 모신 산신각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수만 바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은 불전.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마당에 있는 수령 250년 된 사찰나무.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동자승 인형들.

OLYMPUS DIGITAL CAMERA간월암 아래 천수만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

OLYMPUS DIGITAL CAMERA간월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천수만. 넓은 호수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수만 풍경.

OLYMPUS DIGITAL CAMERA간월암 뒷편. 80년대 간척사업으로 방조제가 연결되어 있다. 안면도를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간월암 입구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간월암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간월도 입구 방파제

간월암의 유래
간월암은 과거 피안도(彼岸島) 피안사(彼岸寺)로 불리며 밀물 시 물위에 떠 있는 연꽃 또는 배와 비슷하다 하여 연화대(蓮花臺) 또는 낙가산(落伽山) 원통대(圓通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던 중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고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이라 하고, 섬이름도 간월도라 하였다.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이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바로 그 후에 광복을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간월암은 밀물과 썰물 때 섬과 육지로 변화되는 보기 드문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주변의 섬들과 어우러진 낙조와 함께 바다위로 달이 떠올랐을 때의 경관이 빼어나다. <출처: 간월암>

<출처>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