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서예

동제 염거화상탑지(보물 1871호), 염거화상탑의 조성내력을 기록한 탑지

강원도 춘천시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동제염거화상탑지(1871호)이다. 이 탑지는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지 절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염거화상탑(국보 104호)에서 발견되었다. 통일신라때 승려 염거화상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얇은 동판에 해서체로 글씨를 새겨놓았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글씨체는 당시 서체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염거화상탑의 조성 내력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유물이다.

염거화상(廉居和尙, ?~844)은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2대조로 도의선사의 제자이다. 주로 설악산에 머물면서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으며, 보조선사 체징이 그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
동제 염거화상탑지(보물 1871호). 얇은 동판에 염거화상탑을 조성한 내력을 짧은 글로 기록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탑지가 발견된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OLYMPUS DIGITAL CAMERA염거화상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원주 흥법사지.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산동성박물관 불교조각실] 석비(石碑)와 석당(石幢)

불교 유물 중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많이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비(石碑)와 석당(石幢)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절터에서도 남아 있는 당간지주나 비석이 많이 볼 수 있다. 석비는 승려의 업적을 기록하거나 사찰 등의 조성 내력이 적혀 있으며, 석당은 사찰에서 깃발을 걸어두기 위해 만든 돌기둥이다. 석비나 석당에는 불상이나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각품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금석학적인 측면에서 글씨체의 변천과정이나 사찰 내력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
불상이 있는 비석 (造像碑, Stele with Buddas), 북제~수, 앞면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뒷면 비석을 조성한 사람, 경위 등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불상이 새겨진 석당(造像幢, Statue pillar), 송대, 당(幢)은 사찰에서 깃발을 꽂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2개의 돌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당간지주와는 달리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 나무기둥을 꽂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불상이 새겨진 석당(造像幢, Statue pillar), 당대, 8각형 기둥에 작은 불상이 새겨져 있다. 팔부중상이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
불상이 새겨진 석당(造像幢, Statue pillar), 송대,

OLYMPUS DIGITAL CAMERA
불상이 새겨진 석당(造像幢, Statue pillar), 북제 천보7년(556)

OLYMPUS DIGITAL CAMERA북위때 만든 조각상 탁본, 손보희(孙宝憘)라는 사람이 조성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위때 승려 도휴(道休)가 조성했다는 내용이 적힌 글씨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

경당(经幢,Dharani pillar), 오대 958년. 후이민현(惠民县) 개원사(开元寺)에 세워져 있던 경당이다. 경당은 불호나 경문을 조각한 육각형(또는 원형) 돌기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당대(唐代)에 사문탑천불애(四门塔千佛崖)에 새겨진 글씨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탑에 새겨진 글씨, 탑을 조성한 내력을 적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상에 새겨진 기원문, 동위, 불상 등에 새겨진 글씨는 고대 중국의 필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음상에 새겨진 글, 북제 하청 2년(563), 손정(孙静)이라는 사람이 조성했다.

OLYMPUS DIGITAL CAMERA미륵불상에 새겨진 글, 북조, 장도과(长道果)라는 사람이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륙불상에 새겨진 글, 북제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비석, 북위 정광5년(534). 북위때 승려 손료(孙辽)가 쓴 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탁본

OLYMPUS DIGITAL CAMERA불상에 새겨진 글, 북제 569년, 조경략(曺景略)이라는 사람이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탑기(塔記), 북제 천통3년(567), 천경략(天景略)이라는 사람이 탑을 조성한 내력을 기록한 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탑기 글씨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비로자나불상(毘卢舍那佛坐像)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글, 북제 560년

 

[중앙박물관테마전, 중국법첩] 법첩속의 중국 서예(당~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인 서예는 예로부터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교양의 하나로 여겨졌다. 아름다운 글씨는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고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 글씨를 열씸히 써야 할 뿐만 아니라 학문을 깊이 공부하고 인격을 닦아서 고결한 정신을 갖추어여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예의 시대적 특징과 발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으며, 왕희지를 비롯하여 큰 족적을 남긴 당태종, 구양순, 미불, 소식, 조맹부, 옹방강 등 역대 명필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서성(書聖)으로 일컬어는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서예를 예술적으로 완성시켰으며, 당(唐)대에는 태종의 비호 아래 구양순, 저수량 등 일세를 풍미한 서예가들이 서예미(書藝美)의 표준을 제시하였으며, 당중기에는 강한 개성을 표현하는 초서(草書)가 크게 발전하였다. 송(宋)의 서예는 소식(蘇軾), 미물(米芾) 등과 같은 문인이자 개성있는 서예가들이 시문학과 결합하여 높은 격조를 보여주었다. 또한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모은 순화각첩(淳化閣帖, 992년)과 같은 법첩이 간행되었다.

원.명대에는 고전(古典)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전되었는데,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본질로 회귀하는 복고를 추진하였고, 동기창은 서예의 본질과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에는 상업적인 법첩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청대(淸代)에는 서예의 과거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이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고대 비석 중심의 서예를 연구하였다. 이시기에는 원형에서 멀어진 법첩에 대한 평가는 낮아지고, 비석을 탑본한 비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서예미의 표준을 제시한 당(唐) 서예가
당(唐)은 서예의 발전이 가장 활발하던 때였다. 서예 문화를 주도한 당 태종(太宗, 599~649년)의 비호 아래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우세남(虞世南, 558~638년), 저수량(貯水量, 596~658년) 등 굴지의 초당대 서예가들은 아름다운 글씨로 일세를 풍미하며 서예미의 표준을 제시하였다. 당 중기 이후에는 안진경(顔眞卿, 709~758년)과 같은 개성이 강한 서예가가 등장하여 다음 시대를 예고하였다. 대부분 비석으로 세워진 이들의 글씨는 비첩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진사명(晋祠銘), 당 646년, 당태종(599~649년), 행서. 당태종은 고려시대 비석에서 집자비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뛰어난 명필이었다고 한다.

태종의 대표적인 글씨로 정관 22년(646년)에 새겨졌다. 필치는 담담하면서도 무인의 활달함이 있는데, 변화가 크지 않은 균일하고 정제된 맛을 보여준다. 초당대의 일반적인 서풍 경향과 견주어 볼 때 개성이 강하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당 632년,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해서. 구양순은 당초기에 활동했던 서예가로 왕희지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서예가이다. 모든 서체를 잘하였으며, 특히 해서가 뛰어 났다고 한다.

구양순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쓴 비문이다. 정관 6년(632년) 태종이 구성궁(별궁)으로 피서를 왔을 때 메마른 별궁 안에서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한 내용을 담았다. 당의 해서를 대표하는 글씨로 매우 단정하고 절제된 필법을 보이며 글자의 따임새가 긴밀하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황보탄비(皇甫誕碑), 당 정관 연관(627~649년), 구양순, 해서

정권쟁탈 과정에서 죽은 수(隨)의 대신 황보탄을 위해 아들인 황보무일(皇甫無逸)이 당의 재상 우지녕(于志寧, 588~641년)에게 글을, 구양순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세운 비석이다. 구양순의 글씨는 단정한 글자 형태, 짜임새가 긴밀한 결구(結句), 엄격한 점획과 날카로운 운필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벽락비(碧落碑), 당 670년, 전서

산시성 용흥사(龍興寺)에 있는 비석으로 원래의 이름은 <이훈등위망부모조대도존상>이다. 당 고종 총장 3년(670년)에 이훈, 이의, 이찬, 이심 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세웠다. 글씨는 전서와 대전(大篆)이며 고격을 갖춘 중요한 글씨로 평가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초서(草書)에서의 새로운 개성 분출과 자유표현
당(唐) 중기에 접어들며 서예는 점차 강한 개성 표현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초서에서 두드러졌다. 장지(張芝)와 왕의지(王羲之)에 이어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에 의해 당의 초서는 자유롭고 격정적인 광초(狂草)의 새 경지를 열었다. 휘몰아치듯이 변화가 많은 필선은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상징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자서첩(自敍帖), 당 777년, 회소(懷素, 725~785년), 초서, 복제본

OLYMPUS DIGITAL CAMERA자서첩 글씨. 회소(懷素)는 원래 승려로 술을 좋아해 만취한 상태로 붓을 놀려 쓴 글씨인 광초(狂草)를 잘 썼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초서를 대표한 글씨이다.

회소는 당의 승려로 변화와 흥취 그리고 기운이 뛰어난 자유분방한 초서를 썼는데, 이를 광초(狂草)라고 한다. 자서첩은 회소 자신의 삶과 글씨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는데, 몰아치는 붓의 기세로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변화가 큰 글씨를 써서 초서 예술의 최고 경지로 평가된다. 이 글씨는 자서첩의 면모를 잘 재현해 놓은 복제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자서첩(自敍帖), 당 777년, 회소, 초서

법첩은 서예작품을 모사하여 만든다. 특히 탑본 법첩은 글씨가 흰색으로 보이는 반전(反轉) 효과로 인해 일반 서예 작품과 다른 인상을 준다. 이것은 회소의 자서첩을 탑본하여 법첩으로 만든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쟁좌위고(爭坐位稿), 당 764년, 안진경(顔眞卿, 706~785년), 행서. 안진경(顔眞卿)은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로 남성적인 박력과 균제미(均齊美)를 발휘한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당대 이후 중국 서도(書道)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진경은 국가 법요 때 환관들의 횡포와 아첨하는 조정대신들의 태도에 분노하여 당시 책임자인 곽영예(郭英乂)에게 항의문을 보내는데, 이것은 그 항의문 서간의 초고이다. 단슴에 자유자재로 휘두른 필획에서 풍부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중후함과 격조가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다보탑비(多寶塔碑), 당 752년, 안진경, 해서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 건립된 비석으로 안진경이 44세 때 쓴 글씨이다. 안진경 특유의 굵은 필획과 터질듯한 서풍이 보이기 전의 초기 글씨로, 단정한 자형에 정밀하고 변화가 큰 필획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개성있는 서예 표현과 법첩의 제작
송(宋)의 서예는 자유롭고 담백하게 개성을 표현하였고 시문학과 결합되어 높은 격조를 지녔다. 소식(蘇軾, 1037~1101년), 황정견(黃庭堅, 1045~1105), 미불(米芾, 1051~1107년) 등 개성있는 서예가들이 활동하였다. 또한 《순화각첩(淳化閣帖)》(992년)과 같은 법첩이 간행됨으로써 서예는 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강엄의 시(江淹詩), 북송 1080년, 미불(米芾), 행서, 미불은 송(宋)대 서예가이자 화가이다. 문장.서(書).시(詩).고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소식(蘇軾) 등고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산수화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미점법(米點法)이라는 독창적임 점묘법을 창시하였다.

남조 양(梁, 502~557년)의 시인 강엄의 시 「종관군건평왕등노산향로봉」을 쓴 것이다. 미불의 글씨는 소식(蘇軾)에 비해 날카롭지만 먹선의 조절과 변화가 큰 필획으로 표현하여, 감각적인 개성이 넘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취옹정기(醉翁亭記), 북송 11세기, 소식, 해서.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소식이 쓴 글씨이다.

취옹정기는 취옹정의 유래와 경치 및 삶의 정취를 담은 글로, 북송의 문장가 구양순(歐陽脩, 1007~1072년)가 지었다. 이는 소식이 중대자(中大字)의 행가(行氣)가 넘치는 해서로 박력있게 썼는데, 그는 왕희지의 서법을 추구하면서 안진경의 글씨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글씨를 창출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전통 고전(古典) 서예의 재현
원(元)과 명대(明代)에는 전통 고전(古典) 서예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전되어 이전보다 한층 더 깊이 있는 서예 표현이 이뤄졌다. 서예가들은 모두 문인의 품격을 지닌 서예를 펼쳤다. 조맹부(趙孟頫, 1254~1322년)는 왕희지 글씨의 본질로 회귀하는 복고를 추구하였다. 왕희지에 대한 존숭은 문징명(文徵明, 1254~1322년)과 동기창(董其昌, 1555~1636년)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동기창은 형식을 넘어 서예의 본질과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때에는 법첩 제작이 더욱 활성화되었고 상업적인 법첩의 출판도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적벽부(赤壁賦), 원 13세기 후반, 조맹부, 해서, 원(元)대 활동한 화가이자 서예가로 왕희지, 구양순과 함께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서예에서 왕희지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복고주의에 앞장섰다.

조맹부는 옛 글씨의 심도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요체를 깨닫고 이를 자신의 글씨로 소화하여 송설체(松雪體)를 이루었다. 소식의 「전前 적벽부(赤壁賦)」를 쓴 것으로, 단정하면서도 날카로운 풍모를 갖추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증도가(證道歌), 원 1316년, 조맹부 해서

「증도가」는 당(唐) 영가대사(永嘉大師) 현각(玄覺:665∼713)이 지은 것으로, 육조 혜능을 배견(拜見)하고 깨우친 선종의 깨들음을 표현한 글이다. 조맹부의 해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연우 3년(1316) 조맹우가 균헌선사(筠軒禪師)를 위해 쓴다는 발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 명 16세기, 동기창, 행서. 동기창은 명(明)대 말에 활동한 문인, 화가, 서예가이다. 문학에 능통하였으며 명대 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받았다.

당의 문학가 왕발(王勃, 650~676년)이 지은 「석가여래성도기」를 동기창이 쓴 것이다. 동기창은 안진경과 왕희지를 통해 자신의 글씨를 이루었다. 이 글씨는 글자의 형태뿐 아니라 유유(幽幽)한 필획과 정취가 빼어난 글씨로 평가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지상편(池上篇), 명 16세기, 동기창, 행초서

백거이(白居易, 772~846편)의 시 「지상편(池上篇)」을 행초서로 쓴 것으로, 서예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변화있고 매끄럽게 쓴 글씨는 유려함과 동기창 자신의 깊은 문학적 소양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전통 서예의 재조명
청대(淸代)에는 서예의 과거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이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첩학(帖學)은 왕희지(王羲之) 서예 중심의 보수적 전통을 추구했고, 비학(碑學)은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을 기반으로 한 고대 비석 중심의 서예를 연구하였다. 청대에는 명필이었던 황제 건륭제(乾隆帝, 1711~1799)를 비롯하여 비학과 첩학 두 영역을 아우른 옹방강(翁方綱, 1733~1799년), 비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완원(阮元, 1764~1849) 및 예서의 대가 등석여(鄧石如, 1743~1805년) 등 수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였다. 한편 모각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원형에서 멀어진 법첩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낮아졌지만, 비석을 탑본한 비첩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강반야바라밀경, 청 1801년, 옹방강, 해서, 옹방강은 추사 김정희 스승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옹방강은 청대 제일의 서예가이자 감식가로 비학과 첩학을 모두 아울렀는데, 특히 비학의 출발점이 되는 인물이다. 이는 가경 6년(1801)에 쓴 것을 법첩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의 글씨는 김정희의 젊은 시절 서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진재법첩(詒晉齋法帖), 청 1796~1798년, 성친왕(成親王, 1752~1824년), 해서

성친왕은 부친 건륭제의 재능을 이은 명필로, 조맹부와 동기창의 글씨를 중심으로 전형적인 고전 서풍을 이룬 첩파(帖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느 가정 3년(1798) 가당(駕堂) 선생을 위해 쓴 글로 알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금영련휘각(古今楹聯彙刻), 청 1900년, 여러 서체

이 법첩은 건물 기둥의 옛 영련(楹聯, 주련) 글씨를 모아 엮은 것으로 자집(子集)에서 해집(亥集)까지 총12권이다. 각각의 주련 글씨를 일관된 크기로 축소하여 간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서예 감상의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테마전, "중국법첩"] 법첩속의 중국 서예(~남북조시대)

법첩(法帖)이란 옛 명필의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모범이 되는 글씨의 모사본이나 탑본(榻本) 등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10세기 중엽 중국 남당(南唐)에서 처음 법첩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유명하면서 오래된 것은 송나라때 왕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순화각첩(淳化閣帖)』이다. 이는 역대 제왕과 명신, 진나라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실제로는 왕희지의 글씨를 감상하고 익히는 서예 교본이었다. 법첩은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품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법첩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문체계로 발전했으며, 이런 분위기는 명.청대까지 이어졌다. 청나라때에는 법첩이 오랜 세월 동안 글씨가 모각을 되풀이하면서 원형에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원본에 가까운 고대 중국 비석(碑石)을 연구하는 비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쇄술의 발달로 더이상 전통적인 법첩은 제작되지 않고 있지만, 서예를 익히는데는 아직까지 많이 활용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014년 겨울 “중국법첩(中國法帖)”이라는 제목을 특별전시를 개최하였다. 전시에서는 왕희지를 비롯하여 중국 역대 명필들이 쓴 글씨와 대표적인 법첩인 『순화각첩(淳化閣帖), 북송 992년』을 비롯하여 다양한 법첩을 살펴볼 수 있다. 전국시대 돌에 새겨진 가장 오래된 글씨인 “석고문(石鼓文)”을 비롯하 다양한 글씨체와 서예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명필들의 글씨를 체계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역대 중국 서예가들의 글씨를 담은 법첩을 엄선하여 테마전 “서예의 길잡이, 중국법첩”을 마련합니다. 법첩은 모범이 되는 글씨의 모사본(模寫本)이나 탑본(榻本) 등을 옮겨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책 모양으로 장정(裝幀)한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법첩은 중국 역대 명필을 담은 것이며, 우리 조상이 서예를 공부하는 데 있어 늘 가까이 한 것들입니다. 법첩은 현재에도 서예 학습 교재로 사용되며 감상의 대상으로서 수장(收藏)과 보존으 가치를 지닙니다. 선대의 명필은 법첩을 통하여 후대로 전승되며, 원본이 없어지게 되더라도 법첩으로 옛 글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친필을 대하듯 우리 선조가 아끼고 사랑하며 연마했던 중국법첩을 통해 서예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014년 겨울 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테마전 “서예의 길잡이, 중국법첩”. 서예 발전의 역사를 쉬우면서도 간략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전시회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중국의 서예가.

서예의 길잡이, 중국법첩(中國法帖)
법첩(法帖)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사하거나 탑본하여 만든 서첩이다. 법(法)은 ‘모범’, ‘모범으로 삼다’는 뜻이며, 첩(帖)은 무엇을 붙이거나 써넣기 위해 묶은 책을 뜻한다. 법첩은 명필의 글씨를 안전하게 보존하며 감상하기 위해 글씨를 모사(模寫)하여 부본(副本)을 만드는 것으로, 이를 보다 편리하게 감상하고 보관할 수 있도록 책 모양으로 만들면서 발전하였다. 법첩을 통해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이 없어졌을 때에는 진품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어 옛날에 만든 법첩일수록 특히 수장(收藏) 가치가 높다. 또한 법첩은 서예의 중요한 교재가 되기도 하였다. 법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첩학(帖學)이 학문체계로 발전하였으며, 법첩 제작도 활기를 띠었다. 법첩 애호의 분위기는 명(明)을 지나 청(淸) 가경(嘉慶,1760~1820년) 연간까지 융성했다. 이후 서예의 전통을 북위(北魏) 비석에서 찾아야 한다는 완원(阮元, 1764~1849년)의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바탕으로, 법첩의 글씨가 모각을 되풀이하면서 글씨의 원형에서 멀어졌다는 비판를 받았고 상대적을 낮게 평가되었다. 반면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을 기반으로 고대 중국 비석을 연구하는 비학(碑學)이 발전하면서 비석(碑石)을 탑본한 비첩(碑帖)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근대적 인쇄 기술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법첩은 더이상 제작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법첩과 비첩을 모두 법첩이라 부르며 특히 서예 학습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화각첩(淳化閣帖), 북송 992년. 서예의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각첩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이후 각첩제작의 모범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법첩은 오대십국(907~960) 남당(南唐, 937~975)에서 제작된 『승원첩(昇元帖)』이며, 역대 글씨를 정리한 최초의 집첩(集帖, 전집 법첩)은 북송 태종 순화 3년(992)에 제작된 『순화각첩』이다. 『순화각첩』은 법첩 제작의 기준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산 금강경(泰山 金剛經), 북제(北齊, 550~577년), 해서.

OLYMPUS DIGITAL CAMERA태산 계곡 바위에 새겨진 글씨

산둥성(山東省) 태산 경석욕(輕石峪)에 새겨져 있는 금강경은 총1040여 자인데, 그 중 12자의 탑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수많은 서예가들은 이 거대한 너럭바위의 금강경 글씨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탑본은 주로 먹물로 하지만 이렇게 주묵(朱墨)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에 새겨진 마애각석(磨崖刻石) 및 비석 글씨를 담은 비첩(碑帖)도 넓은 범주에서 법첩과 같은 의미로 여겨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법첩속의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서예는 한자 서체를 달리해가며 각 시대의 미감을 반영하였다. 전서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형태가 상형(象形)에 가깝고 획 굵기가 균일한 초기 서체인 대전(大篆)과 이를 좀 더 정리하고 변화를 준 소전(小篆)이 있다. 전서에 이어 예서가 등장하면서 필선(筆線)의 변화와 조형성이 풍부해져 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여기 소개하는 법첩은 모두 비석의 글씨를 탑본하여 만든 비첩(碑帖)으로, 초기 한자 서체(書體)인 전서와 예서를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석고문(石鼓文),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년), 전서 대전(篆書 大篆), 전국시대의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글씨다.

북모양의 돌에 새겨진 글씨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석각(石刻) 문자로, 사냥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주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전국시대 진(秦)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권량명(權量銘), 진(秦, 기원전221~기원전206), 전서 소전,

무게와 부피를 재는 저울인 권량에 새겨진 글씨이다. 중국 통일 후 진시황은 나라마다 서로 달랐던 복잡한 대전(大篆)을 정리하였는데, 이것이 소전이다. 소전의 서체는 비석(碑) 뿐 아니라 이와 같은 권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노나라 효왕의 각석, 노효황각석(魯孝王刻石), 전한 기원전56년, 예서

노효황각석은 전한 선제(宣帝) 오봉 2년(기원전 56년)에 노나라 효왕이 영광전(靈光殿)의 완성을 기념하여 건물벽에 붙였던 정초석(定礎石)이다. 여기에 새겨진 것은 고예(古隸)로, 형태는 예서이나 필획은 전서에 가깝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신비(史晨碑), 사신후비史晨後碑), 후한 169년, 예서. 후한시대 예서를 대표하는 글씨라 한다.

후한 건녕 2년(169) 노나라의 재상 사신이 공자묘(孔廟)의 제사를 성대히 행한 것을 기념하며 세운 비석이다. 사신비는 후한의 예서를 대표하는 비석으로 특히 고박(古撲)한 맛을 지닌 글씨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예술의 경지를 이룬 명필 서예가
예서에서 한층 더 변화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는 표준 서체인 해서(楷書)가 탄생하였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는 부드러운 붓으로 흘려 쓴 서체로 글씨의 아름다움을 더욱 다채롭게 표현하였다. 서체가 정리되고 체계화되면서 서예가의 시대가 도래하여 명필들이 등장하였다. 여기 소개하는 법첩에는 장지(張芝,?~192년), 종요(鍾繇, 151~230년)와 같은 초서와 해서의 대가들과 서예의 예술 경지를 개척한 왕희지(王羲之, 303~361년)의 글씨가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수선비(受禪碑), 삼국시대 위(魏, 220년), 예서. 왕희지 글씨 이전에 최고의 글씨로 여겨졌다고 한다.

삼국시대(220~280년)의 위나라 조비(曹丕,187~226년)의 황제(文帝) 등극에 관한 기록으로 수선표(受禪表)라고도 한다. 한의 예서를 잘 계승한 위나라의 대표적인 예서로 평가되며, 당(唐) 예서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선시표(宣示表), 삼국시대 위(221년), 종요(鍾繇, 151~230년), 해서. 왕희지와 함께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종요가 쓴 글씨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정자체에 가까운 글씨이다.

선시표는 남방(南方, 오)의 손권(孫權, 182~252년)을 잘 견제하여 잘 대처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종요의 해서 중 가장 유명하다. 종요는 왕희지와 함께 ‘종왕(鐘王)’으로 일컬어질 만큼 해서의 발전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단아한 글씨는 육조시대(六朝時代) 서풍(書風)이라 하여 남조(南朝) 글씨의 기반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난정서(蘭亭敍), 동진 353년, 왕희지(王羲之, 303~361년), 행서. 중국 서예을 대표하는 왕희지의 대표적인 글씨이다.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저장성 소흥현) 난정(蘭亭)에 모여 명사들이 지은 시집의 서문으로 왕희지가 쓴 글이다. 당태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당 서예가들의 임모본이 전하며, 이 탑본 법첩은 그 임모본을 바탕으로 후대에 모각된 글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당 672년, 왕희지, 행서(집자).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한 비(碑)로 다양한 흘림체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현장(玄奘, 602~664년)의 불경 번역 후, 태종이 하사한 「대당삼장성교서」, 태자 이치(李治, 628~683년)의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 그리고 현장 번역의 「반야심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법첩의 모사 방식, 법첩을 만들기 위해 글씨를 정확하게 모사하는 방법
1. 모서(摹書): 친필 위에 종이를 깔고 글씨를 직접 덧써서 본 뜨는 것.
2. 임모(臨摹): 친필을 옆에 놓고 특징을 정확히 관찰하여 옮겨 쓰는 것.
3. 탑모(榻摹): 윤곽선만 베끼고 안쪽을 먹으로 메우는 것
4. 모각(摹刻): 모사한 글씨를 돌이나 나무판에 옮겨 새겨셔 탑본(榻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OLYMPUS DIGITAL CAMERA한진석각묵영(漢秦石刻墨影, 모서), 중국 1915년, 나진옥(1866~1940)

청나라 문자학자 나진옥(羅振玉)이 한(漢)과 진(秦)의 석각(石刻) 글씨를 정리한 책으로 글씨 테두리를 그대로 그려 글씨형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종이를 대고 글씨의 형태를 본뜨는 모서(摹書)의 기초단계인 이 모사방신은 탑모(榻摹)로 발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완화유수첩(浣花流水帖, 탑모), 원 13세기 후반, 조맹부(趙孟頫, 1254~1322년), 행서

유려한 행서로 쓴 전당시(全唐詩) 법첩으로 두보(杜甫, 712~770년)와 왕유(王維, 701~761년) 등의 시 여덟 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법첩은 글씨의 윤곽을 베끼고 안쪽을 먹물로 메우는 탑모방식 모사본이다. 이 모사방식은 친필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섬세한 표현도 가능하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완화유수첩(浣花流水帖, 모각), 원 13세기 후반, 조맹부(趙孟頫, 1254~1322년), 행서

이 법첩은 옆의 탑모 법첩과 다른 모각(摹刻)방식으로 제작한 법첩이다. 모각은 글씨를 나무판에 새겨 탑본하는 방법으로, 제작이 쉽고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서 난정서(臨書 蘭亭敍, 임모), 동진 353년, 왕희지, 행서

<난정서>를 임서한 조선시대의 작품이다. 문인들은 <난정서>가 지닌 청담(淸談) 이미지를 동경하여 이를 즐겨 임서하였다. 임모는 글씨를 옆에 놓고 관찰하고 이를 정확히 재현하는 임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므로 서예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주로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난정계회도(蘭亭禊會圖), 명 16세기, 전 당인(唐寅, 1470~1524년)

OLYMPUS DIGITAL CAMERA난정계회도 중 곡수에 술잔을 띄워 돌리는 장면.

왕희지의 난정 계사모임은 시와 문학 그리고 그림으로 끊임없이 표현되어 온 주제였다.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던 당시의 정경을 섬세하게 담은 이 그림은 명의 문인화가 당인이 그렸다고 전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서예실]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씨와 집자비석

‘집자(集字)’란 필요한 글자를 선택하여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해 명필들이 글씨를 집자하였는데 주로 비석을 세우는데 많이 이용하였다. 실제 글씨를 집자하는 일은 글씨의 흐름과 새겨야 할 문장의 분위기에 알맞게 선택해야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집자비석 중 고려시대(10세기)에 세워진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겨 넣은 것으로 8세기에 활동했던 통일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비석들은 명필들이 살았던 시기와 멀지 않은 시기에 글자를 집자하여 새겼기때문에 원본 글씨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예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명필의 글씨를 모방하거나 집자하여 비석을 새기는 것은 것은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으로 보이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서성(書聖)이라 일컬어지는 동진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작품인 난정서(蘭亭書)을 모방한 탑본법첩과 또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비석은 중국 당나라의 승려 회인(懷仁)이 왕희지의 글씨를 무려 25년 동안 집자하여 완성하였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한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에는 당태종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으며, <무장사 아미타불 비석>은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씨,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29호)은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다. 봉덕사(奉德寺)종, 에밀레 종으로도 불리는 이 종은 신라 제33대 왕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의 공덕을 기리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景德王)이 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당대에 이루지 못하고 혜공왕(惠恭王)이 아버지 경덕왕의 뜻을 이어 구리 12만 근을 들여 완성하였다.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의 앞뒷면에는 1천여 자의 양각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종을 치는 목적, 이 신종을 제작하게 된 연유 그리고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 있는 김부원(金符晼)이 쓴 글씨는 균형이 잘 잡힌 해서(楷書)이며, 뒷면에 있는 요단(姚湍)의 글씨는 날카로운 필치이 글씨이다. 살이 적당히 붙은 필획은 중후한 느낌을 주어 커다란 종과 잘 어울린다. 비록 직접 쓴 글씨는 아니더라도, 통일신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이 글씨는 당시 서예의 수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보29호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씨와 문양을 탑본해 전시해 놓고 있다. 앞뒷면 비천상 중간에는 성덕대왕 업적을 찬양한 글과 이 종을 만들게 된 경위 등을 적어 놓고 있다. 직접 쓴 글씨는 아니지만 통일신라시대 서예의 경향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성덕대왕 신종 앞면에 새겨진 글씨 탑본, 해서,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29호). 신라 명필 김생이 활약했던 8세기에 쓴 글씨이다.

앞면의 글은 성덕대왕에 대한 칭송, 종을 만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 그리고 신종의 소리로써 명복을 빌고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균형잡힌 해서체로 쓰인 글씨는 통일신라 8세기 서예의 특징인 여유 있는 필획과 유연한 필치를 보여 준다.<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성덕대왕 신종 뒷면에 새겨진 글씨 탑본, 해서(楷書),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29호)

뒷면에는 찬시(讚詩) 및 종을 만든 이들의 직책과 이름 등이 있다. 찬시의 내용은 앞면과 마찬가지로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신종의 장중한 면모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찬사, 그리고 신종을 제작한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29호 성덕대왕 신종.

집자비석
‘집자(集字)’란 필요한 글자를 선택하여 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작업이다.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하여 옛날부터 명필(名筆)들이 글씨를 집자하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대체로 집자는 비석을 세우는 데 많이 이용하였다.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 801년 무렵>,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940년>,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954년> 등 한국의 대표적인 집자 비석이다. 집자는 마치 한 붓으로 쓴 듯 글자 간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일정해야 한다. 또한 한 사람의 서예가가 쓴 똑같은 글자라도 글씨의 흐름과 분위기가 모두 같지 않기 때문에 알맞은 글자를 선택하여 연결하는데 많은 시간이 든다. 중국 당나라의 승려 회인(懷仁)은 왕희지(王羲之, 307~365년, 중국 동진의 서예가)의 글씨를 무려 25년 동안 집자하여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비석을 완성하였다. 집자비석은 그 내용으로 제작의 배경을 알 수 있다는 점뿐 아니라 돌에 새겼기 때문에 글씨가 오랜 세월 보전된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또 집자된 글씨는 당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예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에 서예사와 시대별 서체 연구를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자사(太子寺) 낭공대사 비(郎空大師 碑), 고려초 9세기에 세워진 비석으로 통일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이다. 통일신라의 효공왕과 신덕왕의 국사(國師)였던 낭공대사(832~916년)를 기리는 비석으로 고려 광종5년(954) 지금의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세워졌다. 비석의 글씨는 김생(金生, 711~791년?)의 행서를 집자한 것인데, 중국 왕희자와 안진경(顔眞卿)의 글씨체 등 8세기 당시 통일신라 서예의 경향을 여실히 반영하면서도 굳세고 강건한 힘을 집어넣어 활달한 필치와 기운이 훌륭히 표현되었다. 집자는 고려의 승려 단목이 하였다.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었는데, 글은 최언위(崔彦撝, 868~944년)가 썼다. 뒷면에는 승려 순백이 쓴 후기가 새겨져 있다. 한국 서예의 신품사현(神品四賢) 가운데 한 사람인 김생은 ‘해동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휘지’로 추앙받던 명필로서 한국의 서예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낭공대사 비석은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 앞면에 새겨진 글씨. 해동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휘지’로 추앙받던 통일신라 시대 명필 김생이 쓴 글씨를 집자하였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낭공대사 비석은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글씨에 힘이 있고 기운이 넘친다.

OLYMPUS DIGITAL CAMERA
뒷면에는 승려 순백이 쓴 후기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면에 새겨진 글씨.

OLYMPUS DIGITAL CAMERA
비석 옆면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면에 새겨진 글씨.

OLYMPUS DIGITAL CAMERA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당태종 행서 집자, 고려 940년, 서예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당태종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진공대사(869~940)을 기리며 세운 비석이다. 전시되어 있는 것은 비석의 아랫면이다. 비석의 글은 진공대사를 깊이 존경하던 고려 태조가 지었고, 최광윤이 중국 당나라 태종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뒷면에는 고려태조에게 올렸던 진공대사의 글(表)이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당 태종은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비석받침과 머리돌(보물463호)는 현재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 터에 있고 진공대사 탑과 석관(보물365호)은 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씨. 당태종이 쓴 행서를 집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흥법사 옛절터에 남아 있는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463호)

OLYMPUS DIGITAL CAMERA원주 흥법사터에 있던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365호). 일제 시대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 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 왕희지 행서 집자, 통일신라 801년 무렵,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동진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나라 이후 왕희지의 글씨가 한반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39대왕 소성왕(昭聖王, 재위 798~800)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 아미타전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신 후 그 내용과 과정을 새긴 비석이다. 무장사 비석은 중국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새긴 집자비석으로 매우 중요한 왕희지 글씨 연구 자료이다. 이 비석은 홍양호(洪良浩, 1724~1802)와 추사 김정희가 찾아낸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씨. 남북조시대 왕희지의 글씨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