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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신림동 청춘] 고시촌

2015년 가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신림동 청춘’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특별전시회이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 형성되었던 고시촌 문화, 서울대학교와 함께 했던 민주화운동, 도시빈민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판자집 등 여러 형태의 삶과 문화가 신림동이라는 공간에 담겨 있다. 특별전에서는 신림동이란 지역이 형성과 변천된 과정을 바탕으로 한국 특유의 고시문화를 조명해 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스쿨제도의 도입과 함께 바뀔 것으로 보이는 고시촌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전시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2015년 가을에 열렸던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인 “신림동 청춘”. 법조인 양성을 위한 로스클제도가 도입되면서 없어지게 되는 사법시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고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던 신림동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내용이다.

신림동 입장
신림동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고시촌’이다. 로스쿨 도입 전까지 이곳은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신림동=고시촌’이라는 장소적 특성을 가졌다. 비록 서울 남부에 위치한 작은 동네지만 전국에서 몰려온 낯선 이들의 삶으로 채워진 이곳은, ‘고시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꿈을 이루기 위한 기회의 땅으로 충실한 역할을 해왔다. 고시원, 고시학원, 고시서점, 고시식당 등 신림동 골목마다 찾아볼 수 있는 ‘고시’의 흔적들은, 꿈을 위해 잠시 젊음의 화려함을 유예해 둔 우리 시대 청춘의 삶을 증명한다. 그러나 신림동의 지난 세월에는 고시합격을 위해 매진해 온 이들의 팍팍한 인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신림동 사람들은 각자 그들의 방식으로 신림동에 머물렀으며, 시대와 조응하며 신림동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형성해 왔다. 해방 후 신림동으로 강제 이주된 철거민들은 이곳을 또 다른 고향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으며, 80년대 민주화를 갈망하던 대학생들은 이곳을 기반으로 세상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고시생이 떠난 뒤 ’1인가구’라 불리며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현 청년들은 ‘오포세대’라는 자조 섞인 세상의 부름을 떠안으며 오늘도 고군부투하고 있다. 여전히 청춘들의 인생은 신림동에서 진행 중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고시촌

신림동이 인기 높은 고시촌으로 자리 잡게 된 데는 무엇보다 이곳이 도심지에서 벗어나 조용한 주택가라는 점과 서울대생과이 정보교환이 용이한 지역이라는 이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이곳 주민들은 보고 있다. 또한 고시원의 한달 비용이 하숙비보다 2~3만원 저렴하다는 것이 주머니 사정이 각박한 학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각종 시험을 앞둔 시점에는 돈이 있어도 방을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먼 길을 찾아왔다가 그냥 발길을 돌리는 경우는 물론, 심지어 순위를 정해놓고 대기하는 ‘파열현상’도 빚어진다.

『경향신문』 「신림동일대 전국 최대 고시촌으로, 해마다 합격자의 30% 배출」, 1989년 4월 19일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고시촌 풍경.

벼슬산 밑 신림동: 고시촌의 형성
‘벼슬산’이라 불리던 관악산에는 예부터 산속 절 방 한칸을 얻어 공부에 매진하던 고시수험생들이 있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돼지막’이라 불리던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일렬로 늘어선 5~6개의 1평짜리 방에 책걸상, 침구만 놓인 단순한 형태로 어려운 공부에 집중하기엔 최적의 장소로 여겨져 고시준비생들 사이에서 이미 이름이 나 있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근처로 이전해 오자 이 일대는 하숙생을 비롯해 고시준비생들이 더욱 많아졌으며, 1980년대 현재와 같은 고시원 형태이 건물이 50여 곳 들어서게 되어 본격적으로 ‘고시촌’을 형성했다. 또한 2000년대에 들어 사법고시 응시 제한연령이 폐지되고 선발인원이 1,000명에 육박하게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 고시촌으로 몰려오게 되어 그 명성이 확고해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PA284393-horz-2016_08_17신림동 항공사진(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인 도림천 주변 황량한 벌판에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서울대학교가 이전해온 1980년대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항공사진(1990년대, 2000년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리지 않다.

윗동네 아랫동네: 고시촌의 분화
현재 신림9동을 거닐다 보면 고시촌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관악산을 향한 가파른 언덕길 근처의 윗동네는 1980년대 고시촌이 형성되던 초기의 중심 장소로, 과거 고시촌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곳의 고시원은 낙후된 시설과 고시생 감소로 문을 닫거나, ‘고시낭인’이라 불리는 장수생 및 기초생활 수급자, 불안정 노동자, 외국인 유학생 등이 살고 있다. 반면, 도림천과 신림로 부근 상권이 밀집되어 있는 아랫동네의 고시촌에서는 변화된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고시생들이 점점 방음이 잘되고 깔끔하며 개인시설을 갖춘 원룸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1평짜리 방을 트거나 넓혀 풀옵션으로 개조한 원룸들이 들어선 것이다. 불편을 감내하며 공용 생활공간에서 공부하는 ‘배고픈 고시생’보다는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에만 집중하길 원하는 고시생들이 많아진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을 대표하는 고시원. 산중턱에 지은 ‘돼지막’이라 불린 허름한 건물에서 고시준비를 하던 공간이 오늘날 1인가구의 삶을 대표하는 고시원으로 바뀌었다. 건물은 현대식이지만 밀집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팍팍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원이 있는 골목길.

고시식당
고시식당은 대체로 뷔페형식으로 메인요리와 후식을 즐길 수 있다. 식권은 주로 매식, 월식으로 판매하며, 서점이나 복사집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다량을 식권을 구매했을 경우 할인율이 커지므로, 고시생들은 월식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체로 한끼에 2300원가량 한다. 그러나 최근 자금난에 못 이겨 폐업하는 식당이 늘고 있어, 고시생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입기도 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고시원와 함께 고시준비생의 삶을 잘 보여주는 고시식당.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식당 음식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식당 안내

OLYMPUS DIGITAL CAMERA식권.

독서실
독서실은 학원과 함께 운영되고 있는 곳이 많은데, 관악청소년회관~미림여고에 이르는 호암로 22, 24, 26길에 특히 넓게 분포되어 있다. 70~80년대에 고시생들이 주로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는 체제였다면, 90년대 이후는 주로 학원과 연계된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며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학원 공부를 연장하는 선에서 많은 고시생들이 이용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원 독서실.

OLYMPUS DIGITAL CAMERA고시학원.

서점과 복사집
서점과 복사집은 도림천을 따라 형성된 고시학원 주변으로 위치해 있는데, 이는 수강생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발 빠르게 공급하기 위해서다. 주로 판매하는 것은 학원 교재나 법전의 복사물, 고시식당의 식권으로 예전에 비해 이용률이 많이 줄어든 형편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점.

OLYMPUS DIGITAL CAMERA서점에서 판매하는 고시자료 복사물.

고시공원과 헬스장
체력을 길러야 오랜 수험생활을 잘 버틸 수 있기에, 운동을 틈틈이 하는 고시생들이 많다. ‘고시촌에서 불철주야 공부하는 고시생들의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고시공원은 고시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산책을 하거나 머리를 식히러 온 고시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고시공원.

녹두거리
녹두거리는 고시촌의 유일한 번화 공간으로 고시생들의 유흥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식당과 술립, 카페, 오락실 등이 주 상권을 이루고 있으며, 최근에는 토크바(Talk Bar)로 불리는 술집이 성행하고 있다. 이곳은 성매매가 목적이 아니라, 손님이 주로 자신의 넋두리를 풀어 놓으면 종업원이 맞장구 쳐주는 위로의 공간으로 외로운 고시생들이 종종 이용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생들의 삶의 공간 중 하나인 녹두거리. 그들만의 다양한 놀이문화가 담겨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녹두거리 톡크바(Takl bar)

오로지 공부
고시생들은 효율적인 시간 배분으로 성공적인 수험생활을 마치고 하루빨리 고시촌을 떠나고자 한다. 1년에 4개월 단위로 이어지는 시험단계에 대응하기 위해 ‘토가 나올정도’로 열심히 공부한다. 고시생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을 공부하며, 대체로 학원에서 수업을 듣거나 자습을 한다. ‘고시원-학원-식당-스터디’로 이어지는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은 또한 아주 쉽게 일탈로 이어질 수 있기에, 틈틈이 흐트러지는 마음을 체크하며 단속해야 한다. ‘누가 더 이 생활을 잘 이겨 내느냐’에 따라 합격여부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시를 준비하다 보면 장기간 수험생활로 지속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심리적 압박감을 다스리는 여유와 체력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준비생의 하루.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생 공부하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원 내부구조. 책상만 놓여 있는 1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꿈을 찾아 청춘을 보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고시생.

공부를 위해 포기한 것
고시생이 고시촌에 입성할 때 포기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 바로 인간관계와 외모꾸미기다. 고시생들은 고시촌에 나를 아는 누군가가 적거나 없길 바라며 자신의 개인 정보가 공유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고시원에서는 출신대학과 연령 등을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상식이며, 오직 ‘시험’과 ‘나’에게만 집중하기 위해서 타인과의 관계는 잠시 미룰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고시생’하면 덥수룩한 머리와 두꺼운 뿔테 안경, 늘어진 트레이닝복, 삼선슬리퍼에 한 손에 무거운 법전을 든 모습을 연상하듯, 실제 고시촌의 많은 이들은 ‘꾸미고 멋내고’ 싶은 마음은 접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월평균 고시비용

알바와 수험생활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고시비용을 충당하고 공부를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에게 더 이상 손을 내밀기 어려운 장수생들은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고시촌 내에서 고시식당 설거지, 학원 조교, 고시원 총무, 서점 계산원 등이며, 단기간 돈을 벌기 위해서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거나 택배업무, 대리운전 등을 하기도 한다. 공부만 해도 부족한 시간을 일과 병행하자니 수험생활의 질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중고에 몸과 마음은 금방 지치고, 신림동 고시촌에 머무는 시간도 더 길어질 수 밖에 없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모습.

선택의 기로에서
누구나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는 고시는 많은 청춘을 고시촌으로 불러들인다. 긴 침묵의 시간 끝,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위해 고시생들은 자신의 젊음을 한없이 눌러댄다. 또한 먼 훗날 고시촌에서의 추억이 아픈 기억으로 남지 않길 바라며, 다가오는 유혹을 뿌리치며 버틴다. 그러나 고시 합격률은 다만 3%, 나머지 97%의 사람들은 여러 번의 실패 후 찾아오는 무력감으로 지칠대로 지쳐 신림동 고시촌을 조용히 떠난다. 로스쿨이 도입되고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될 예정에 따라 고시촌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산꼭대기 근처 고시원에는 이른바 ‘고시낭인’이라 불리는 장수생들이 여전히 고시촌을 지키고 있다. ‘도인과 같다’는 그들의 10년이 넘는 오랜 수험생활을 그만두고 떠나는 일은, 삶의 중대한 결단이 필요한 쉽지 않은 일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원에 걸려 있는 합격 축하 안내. 많은 이들의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림동 풍경.

고시촌 괴담

“예산에 관악 현대아파트가 들어오기 전에 거기가 원래 약수터였어, 그러니까 80년대 일ㄹ이지, 그때 사건이 있었는데, 두 명의 고시생이 약수터에서 싸우다가 한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야. 한 고시생은 고등학교만 나오고 고시 준비를 했고, 다른 고시생은 대학을 나온 모양인데, ‘고졸이 무슨 사시냐’고 놀렸다고 그래서 고등학교만 나온 고시생이 칼부림을 했다고.”
- 과거 고시원과 독서실 운영 -

“90년대 고시촌에 한창 사람이 많았을 때 시험날이 되면 골목에 가방을 맨 고시생들로 꽉차곤 했어요. 그들을 실어나르는 버스도 큰 길가에 쭉 서 있고, 시험이 끝나고 밤이 되면 아랫동네에서 술에 취해 골목을 올라오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심지어 자동차 사이드미러를 깨뜨리는 학생도 있었고, 돌을 던져 고시원 창문을 깨뜨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거기에 대해 뭐라 안했어요. 오죽 답답하고 힘들면 저럴까 싶어 그냥 넘어갔어요.”
- 고시원 운영 -

“인형뽑기 기계 있잖아요. 신림동 고시생이 10만원을 그 자리에 쌓아두고 하루 종일 한느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또 구경하고 있어, 우르르 주변에 모여서, 그래서 뽑아지면 박수 쳐. 끊임없이 실패를 맛봤던 애들이 이 인형조차 못뽑으면 자기가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 90년대 고시생 출신 -

OLYMPUS DIGITAL CAMERA고시생들이 많아 찾았다는 인형뽑기.

 

서울 구대법원청사, 서울미술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대법원 청사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 위치한 구 대법원청사이다. 이 건물에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법원 건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지하1층, 지상3층의 근세 고딕풍 건물로 철근콘크리이트조와 벽돌조 구조에 화강석과 갈색타일을 붙여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이 좌우대칭을 하고 있는 日자형 평면배치를 하고 있다. 아치형 포치(Porch)가 돌출된 현관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일제강점기 공공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권위주의적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법원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서 걸어가다 보면 분수가 있는 삼거리가 있고, 그 남쪽편 언덕에 고딕풍의 오래된 건물인 구대법원청사 건물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김장생, 이황 등 유명인사들이 살았던 곳으로 구한말에는 육영공원, 독일영사관, 독립신문사옥 등이 자리잡았던 유서깊은 곳이다. 구한말 사법기관인 평리원(平理院: 한성재판소)이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법부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대법원 이전 이후 건물구조 등의 문재로 전면부를 남겨놓고 리모델링하여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도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접근성 등의 장점으로 다양한 해외 걸작들의 순회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덕수궁 부근 정동길에서도 높은 언덕에 위치한 구대법원청사. 일제강점기에 법원청사로 지어진 건물로 1995년 서초동으로 이전할때까지 대법원청사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대법원청사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 덕수궁 동남쪽 나즈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등기소 등 공공기관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대법원과 관련된 공공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대법원청사 오르는 길. 원래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숲속길로 탈바꿈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사는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 외형에서도 일제강점기 공공기관 건물에서 보여주는 위압적이면서 권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구한말 근대적인 사법기관인 한성재판소가 들어선 이래 법조타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3개의 아치가 있는 포치(Porch)현관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공공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외장은 화강석과 갈색타일을 붙였으며, 아치모양의 창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아치형 현관 내부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현관 내부에서 본 청사 앞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건물 내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전면부를 제외하고는 새로 신축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 1층. 건물내부가 원래 건물 형태와 완전히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중앙 로비가 3층까지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넓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르느와르 특별전이 열렸을 때의 모습.

SANYO DIGITAL CAMERA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은 도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미술관이다. 세계적인 걸작들이 순회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가장 선호하는 공간인 것 같다.

SANYO DIGITAL CAMERA2층 전시실 입구.

SANYO DIGITAL CAMERA미술관 3층 휴게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구대법원청사

OLYMPUS DIGITAL CAMERA구대법원청사 앞 마당. 숲으로 가려져 있지만 덕수궁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이다. 마당 앞 숲에는 야외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 티켓박스.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 앞 정동길로 나가는 길.

육영공원 터, 육영공원은 정부에서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1886년 9월 설립 당시부터 1891년 박동(현 수송동)으로 옮겨가지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독일영사관터, 독일영사관은 1884년 이곳에 있던 육영공원과 자리를 맞바꾸면서 정동시대를 열었다. 1902년 다시 상동(현 남창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독립신문사 터,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한글판과 영어판 두가지로 발간하였다. 1896년 4월7일 창간할 때부터 1899년 12월4일 폐간될 때까지 사옥이 이곳 독일영사관터 안에 있었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청사 마당과 정원은 퇴계 이황 집터, 김장생(金長生)의 생가터 등 권문세가들의 저택이 있었던 유서깊은 자리이다. 이 곳에 구한말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비롯하여, 독일영사관, 독립신문 등이 자리잡기도 하였다. 정원에는 현대 미술 조작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 앞 마당에 전시된 작품.

OLYMPUS DIGITAL CAMERA숲의 수호자, 최우람 작, 2006, 스테인레스 스틸

OLYMPUS DIGITAL CAMERA생각하다, 배형경 작, 2012년, 청동

구 대법원청사, 등록문화재237호, 1928년, 서울 중구 서소문동
이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 건물이다. 그 자리는 조선말 개화기 때 평리원(平理院, 한성재판소)이 세워졌던 곳이다. 이곳은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지하1층, 지상3층으로 근세 고딕풍으로 지은 것이다. 뾰족 아치가 아닌 반원형 아치를 사용함으로써 장중함을 더하고 있다.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조와 벽돌조 구조에 화강석과 갈색타일을 붙였다. 건물의 평면은 日자로 만들었는데, 중앙계단과 연결통로를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두개가 있어 좌우대칭을 이루었다. 법원 단지가 이전된 후 서울시가 이 건물을 인수하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개조공사를 하였다. 공사 중 구조적으로 약화된 부분들이 드러나 정면의 벽판만 보존하고 나머지 부분은 철거하여 새 건물을 이어 지었다. 이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 보존 방법 중의 하나인 정면보존 방법의 사례이다. <출처:문화재청>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서울 배재학당 동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배재학당 건물

서울 중구 정동길 옛 대법원청사였던 서울시립미술관 부근 언덕 옛 배재학당터에 남아 있는 배재학당 동관이다. 배재학당 졸업생이자 당시 교장이었던 신흥우에 의해 1916년에 세워진 건물로 설립자를 기념하는 의미로 아펜젤러 홀(Apenzeller Hall)로 불리었다. 건물은 지하1층, 지상3층으로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앞쪽의 현관과 양옆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건물의 구조와 모습, 건물에 사용된 벽돌 구조가 매우 우수하다. 이 건물은 처음 지어질 때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으며, 건물의 형태도 매우 우수하여 한국근대건축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1984년 배재중고등학교가 고덕동으로 이전하면서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2001년 3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8년 7월24일부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배재학당은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학교이다. 북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아펜젤러는 이곳에서 1885년 두명의 학생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1886년 아펜젤러의 교육에 대하여 고종황제가 그의 교육적 가치를 알게되어 배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배재의 의미는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뜻이다. 1887년 한국 최초의 벽돌교사가 세워졌다. 배재학당에는 본관을 비롯하여, 서관, 대강당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배재학당의 후신인 배재고등학교는 지금은 강동구로 이전하면서 서관은 고덕동 배재고등학교로 이전하였고, 동관은 법인사무실 등으로 사용하다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옛 배재학당 터에는 지금은 재단관련 빌딩들과 배재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건물 중 원래 자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관. 1916년에 준공된 지상3층, 지하1층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건물은 당시 유행하던 미국 도시형 주택 및 공공건물의 형태로 지었다. 천장 아래에 다락방 형태의 공간이 있고, 지하 공간도 교실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 동부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건물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계단이 있는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 당시 일본인들이 세운 근대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출입문은 없고 계단을 통해서 걸어 올라가게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측면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미국의 도시형 주택이나  건물 등과 마찬가지로 지하실을 활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층은 천장 아래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지방 바깥으로 돌출된 창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로비로 들어서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1층은 배재학당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현관 로비, 양쪽에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는데, 원래는 교실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전시실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옛 교실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

OLYMPUS DIGITAL CAMERA당시 학생들의 수업모습

OLYMPUS DIGITAL CAMERA2층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2층은 설립자 아펜젤러 가족이 살아왔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층 중앙 로비

OLYMPUS DIGITAL CAMERA2층 전시실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전시실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3층을 오르는 계단. 바깥에서 보였던 지붕 바깥으로 돌출된 창문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세미니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3층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길에서 본 배재학당. 배재학당의 후신인 배재고등학교는 1980년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면 그 자리에는 재단과 관련된 빌딩,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관 건물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안내판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 앞 정동길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과 오랜 세월을 깥이 한 고목. 그 뒷편 옛 배재학당 자리에는 업무용 빌딩이 들어서 있다.

서울 배재학당 동관, 1916년, 서울 중구 정동
이 건물은 1916년 준공하여 배재중.고등학교가 1884년 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東校舍)로 사용한 곳이다.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 목사가 1885년 8월에 세운 학교로 처음에는 주변의 민가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교정에는 이 동관을 비롯, 1887년에 준공하여 1932년에 철거된 본관, 1923년에 준공한 서관, 1933년에 준공한 대강당, 광복 후에 세워진 현대식 교사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관은 고덕동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었고, 다른 건물들은 배재공원을 만들 때 철거되었다. 이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되어 배재 중.고등학교 이전 후 문화재로 지정(2001년)되었고, 내부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외장 및 치장쌓기 벽돌구조가 뛰어나고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부재들이 건립당시의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근대교육의 발상지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SANYO DIGITAL CAMERA2010년 배재학당 동관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서울 정동극장, 원각사를 계승한 전통예술공연 무대

서울 중구 정동길 정동교회 맞은 편에 위치한 정동극장이다. 이 극장은 한국 최초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개념으로 1995년 국립중앙극장 분관 형태로 개관한 공연무대이다. 극장 건물은 지상 2층, 지하 3층 규모 400석의 객석이 있는 공연과 카페 등 부속시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마도 전통 예술을 공연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극장으로 보인다. 구한말 서구세력이 터를 잡었던 정동지역에서 전통예술을 공연하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특별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근현대 예술정신을 바탕으로 1995년 개관하였다. 한국 전통공연예술의 대중화, 세계화, 명품화를 위해 2010년 전통뮤지컬 <춘향연가>를 창작·초연하며 상설공연브랜드 를 성공적으로 런칭하여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세계 곳곳의 무대에 전통예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는데 주력해왔다. 2011년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경주의 브랜드공연<신국의 땅, 신라>를 선보여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콘텐츠 공동개발의 첫 사례로 꼽히며 지역문화발전은 물론 문화관광 활성화에 기여해오고 있다. <출처:정동극장>

OLYMPUS DIGITAL CAMERA구한말 서울성곽 돈의문(서대문)과 서소문 사이 성곽을 허물고 형성된 정동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정동극장. 서구적인 이미지의 정동길과 대비되는 느낌의 전통예술공연무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극장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극장 출입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연장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명창 이동백 동상. 구한말 고종의 총애를 받아 정3품의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던 명창으로 초기 원각사를 이끌었던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정동극장이 원각사를 계승한다는 이념을 걸고 있기때문에 이동백의 동상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까페 길들여지기,

SANYO DIGITAL CAMERA까페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야외카페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정동극장. 이 공연장의 대표 브랜드인 전통예술공연인 <미소>를 안내하는 광고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극장 앞 정동길.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길 중심에 위치한 분수가 조서어된 로타리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정동교회

서울 정동교회(사적), 최초의 개신교회 건축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정동교회이다. 1885년(고종22)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설립한 감리교 교회다. 아펜젤러는 1885년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언더우드 등과 함께 성경 번역작업에 참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교회 건물(사적)은 구한말인 1897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 건물이다. 원래 십자형으로 지어졌는데,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고 한다. 벽돌쌓기를 하였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한쪽 모퉁이에 세워진 종탑은 장식없는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북미계통의 장식이 없는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교회는 화려하지도, 독특한 건축양식도 아니기때문에 이웃의 평범한 교회처럼 보인다. 한국 개신교회 건축의 모범이 되었기때문에 외관상 차별화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 중구 정동길에 위치한 정동교회. 정동교회는 배재학당을 설립한 선교사 아펜젤러가 1985년에 설립한 교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교회 건물은 1897년에 지어진 최초의 개신교 교회건물로 붉은 벽돌로 외장을 하고 있는 평범한 건축물이다. 한국 교회건축의 모범이 되었던 건축물이었기때문에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개신교회와 거의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빅토리아시대의 양식이 반영된 창문.

OLYMPUS DIGITAL CAMERA서양식 건축물이지만 화강암석재로 쌓은 기단부에서 조선시대 전통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교회 뒷편 출입문과 창호.

OLYMPUS DIGITAL CAMERA북쪽편에서 본 정동교회

OLYMPUS DIGITAL CAMERA교회 내부. 한옥 기둥처럼 생긴 목조 기둥의 지붕을 받치면서 내부 공간을 분리해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정동교회

OLYMPUS DIGITAL CAMERA2015년 정동교회

OLYMPUS DIGITAL CAMERA
정동교회 50주년 기념비

OLYMPUS DIGITAL CAMERA정동제일교회 100주년 기념비

OLYMPUS DIGITAL CAMERA헨리 게어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년)목사 흉상. 아펜젤러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최초의 미국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1885년 4월5일 부할주일에 내한하여 1902년 6월11일 순교하기까지 정동제일교회의 초대 목사로 시무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최병헌 목사(1858~1927년) 흉상,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였던 탁사 최병헌 모사는 1858년 충북제천에서 출생하였다. 1888년 아펜젤러 목사를 통해 기독교를 소개받은 후 1893년 세례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택하였다. 1902년부터 1913년까지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교회 이필주 시택 터, 지금은 교회 마당 정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 거사 준비를 위해 학생 대표 및 기독교계 대표들이 회합을 가졌던 이필주 목사의 사택이 있던 곳이다.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는 2월25일과 26일 학생대표들이 모여 독립운동 참여 방안을 논의하였고, 2월28일에는 학생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또한 이곳에서 기독교계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에 참여할 기독교 측 민족대표의 인선을 마무리 지었다. 1918년부터 정동교회를 담임하던 이필주 목사는 3.1운동 추진계획을 듣고 그 취지에 동의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이로 인해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처:정동교회>

OLYMPUS DIGITAL CAMERA신관 건물로 보이는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교회 옆에 세워진 교육관.

OLYMPUS DIGITAL CAMERA교회 교육관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교회 100주년 기념탑 앞에서 내려다 본 정동길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으로 연결되는 정동길.

OLYMPUS DIGITAL CAMERA이화학당으로 연결되는 정동길.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교회와 정동길

서울 정동교회, 사적256호, 1897년, 서울 중구 정동
이 건물은 1895년(고종32) 착공하여 1897년(광무1) 10월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 예배당이다. 원래 정동교회는 1885년(고종22)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설립한 감리교 교회다. 처음에는 ‘벧엘 예배당’으로 명명한 한옥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신자수가 늘면서 서양식 벽돌조 예배당을 지었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나 본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일본인 요시자와가 서례하고 심의석이 시공하였다. 이 건물은 붉은 벽돌을 쌓고 나무 기둥을 세워 트러스 지붕틀을 얹은 단층 건물이다. 건물의 내부는 양쪽으로 늘어선 기둥에 의해 3개의 공간으로 구분된 삼랑식 평면이다. 십자형 경사지붕을 올렸으며, 남쪽 모서리에는 3층 높이의 평탑형식(平塔形式) 종탑을 세웠다. 내부는 단순한 평천장으로 만들었지만, 외관은 뽀족 아치, 원형창, 벽돌 내쌓기 장식, 세장한 창호와 창살(tracery) 등 빅토리아시대의 전원풍 고딕양식으로 만들었다. 현재 교회에는 이 건물과 새로 지은 신관이 함께 있다. <출처:문화재청>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정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