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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백탑파이야기] 19세기 이후 백탑파 행로

정조와 함께 조선후기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실학자들에게 정조의 죽음은 큰 영향을 미쳤다.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규장각은 그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실학자들 또한 중심부에서 크게 멀어졌다. 노론세력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어졌던 19세기에 북학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 추사 김정희나 최한기 등에 의해 명맥을 이어왔으며, 개화사상에 영향을 주기는 했으나 큰 학문적 성과나 세력화를 이루지는 못하고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1800년 백탑파의 행로 및 그 이후
19세기가 시작될 쯤 백탑파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조의 죽음은 이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모에 휘말려 귀양을 떠나거나, 몸담고 있던 기관이 해체되거나, 세도가 판치는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여생을 마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과 사상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습니다.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과 유본예, 박제가의 아들 박장암은 부친의 뒤를 이어 검서관으로 일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사상이었던 북학을 이어 받아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박제가의 제자 김정희, 실학과 개화의 교량이었던 최한기가 19세기의 새로운 지식인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이전 단계의 현실적인 개혁론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청에서 발달한 고증학의 영향으로, 학문을 통한 개혁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연구 대상과 관심이 대단히 광범위하였으며 그 깊이도 심화되었고, 초기 개화사상에 영향을 줍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도정치의 시작과 조선사회의 변화
1800년 정조가 즉위한 지 24해 째였습니다. 정조 재위 동안 조선의 국력은 신장되었고 문화는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주요 개혁 대상이었던 정치, 토지, 노비제 등 민감한 사안은 번번이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또한 자신의 친위 세력 양성소였던 규장각 관료마저 그에게 등 돌리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정조는 세자의 장인이자 사돈이었던 김조순을 불러 외척으로서의 세도를 담당해 줄것을 당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행해왔던 의리탕평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6월28일, 병석에 누운 지 보름 만에 49세의 나이로 정조가 사망했습니다. 누구보다 백성을 아꼈으며, 시대의 변화를 수용할 줄 알고, 세상의 소외된 이들에게 힘이 되었던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세상은 죽음과 함께 멈추었습니다. 변화를 꿈꾸던 조선 역시 희미하게 빛을 잃어 갔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날 유시(酉時)에 상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어느날 갑지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런바 거상도(居喪稻)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大喪)이 났다. – 『정조실록』 정조 24년 -

김정희는 박제가의 제자로,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경서 및 금석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진척시켰습니다. 또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비판하여 제주도에 유배되는 상황에서도 학문적 성숙과 추사체를 이루어 ‘추사학파’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학파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문하에는 허유, 오경석, 강위 등 중인계층과 신헌, 민규호 등 양반 사대부 계층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19세기 후반, 개화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 實事求是”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의 도에 있어 배치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 김정희, 『완당전집』 실사구시설 -

OLYMPUS DIGITAL CAMERA완당척독(阮堂尺牘), 1867년, 남병길

김정희의 제자 남병길이 간행한 김정희 편지 모읍집으로, 김정희가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16인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김정희가 황간 관아에 보낸 편지, 1852년, 김정희

과천에 살던 김정희가 임자년에 황간(현 충북 영동군) 관아에 보낸 편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김정희 편지, 19세기,

김정희가 과천에 거처할 때 영하스님에게 보낸 편지다. 영하스님은 초의스님과 함께 김정희와 긴밀히 교류하던 인물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최한기는 기(氣)철학 입장에서 서양과학기술을 수용하였으며, 실학을 확대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부민(富民)이 주도하는 상공업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여, 조선 말 중인과 성공업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한 조성의 민감한 반응을 비판하며, 문호개방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지식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나라의 제도나 풍속은 고금이 각각 다르고,
역산(曆算)과 물리(物理)는 후세로 올수록 더욱 밝아졌으니,
주공과 공자가 통달한 대도(大道)를 배우는 자는 주공과 공자가 남겨준 형적이나
고집스레 지키고 변통하자 않아야 되겠는가, 아니면 장차 주공과 공자가
통달한 대도를 본 받아서 지킬 것은 지키고, 변혁할 것은 변혁해아 하겠는가.
- 최한기, 『기축제의』-

OLYMPUS DIGITAL CAMERA준박(踳駁), 19세기, 최한기

일식과 월식, 절기차 등 천체 운행에 대해 각 절기마다 그림을 그리고 해설을 덧붙였다. 19세기 실학자의 천체관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육해법(陸海法), 1834년, 최한기

각종 관개용 수차의 크기.모양.사용법.원리 등을 그림과 해설로 기록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34년, 최한기.김정호

OLYMPUS DIGITAL CAMERA지구전후도, 뒷면.

최한기가 제작한 근대식 목판본 세계지도로, 김정희가 판각을 맡았다. 중화주의를 극복한 19세기의 사실적인 지도로평가받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규경은 조부인 이덕무의 학문을 이어받아 다양한 분야에서 넓은 지식을 드러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에서 오주(五洲)라는 말을 따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풍부한 지식이 보고인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썼습니다. 또한 동양의 전통사상과 서양의 실용적인 과학기술, 의학, 음양오행, 동식물, 풍속 등 다양한 방면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방대한 지식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살펴보며, 급변하고 있던 19세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오주연문장전산고, 19세기, 이규경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이 역사.종교.천문.풍속 등 다양한 내용을 조선과 중국의 서적을 고증하여 간단히 저술한 책으로, 백과사전적 성격을 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오랜 관직생활을 하며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논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북학을 계승하는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근대로 향하고 있는 조선의 앞날을 위해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그의 제자들과 함께 조부의 문집인 『연암집』을 통해 새로운 문명과 세계를 논했습니다. 또한 자주적 개국으로 외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조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평혼의(平渾儀), 19세기 박규수

박규수가 평면의 원에 남.북반구의 별자리를 표시한 것으로, 별자리의 위치를 통해 시간과 계절을 측정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상고도회문의례, 19세기, 박규수

역대 중국의 뛰어난 인물들이 쓴 글을 폭넓게 발췌하고, 그것을 가지고 벗들과 날이 삼아 문장을 지어보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환재재선생집(瓛齋先生集), 1911년, 박규수

박규수의 시문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조부 박지원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개화사상 및 활동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꿈은 어느덧 사라지고
정조는 소모적 당쟁을 끝내고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젊고 재능 있는 문신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와 장용영은 폐지되었으며, 규장각은 대폭 축소되어 사실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노론은 다시 정권의 핵심으로 자리잡았고, 정조의 측근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백탑파 역시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19세기가 되면 특정 소수가문에 그 힘이 집중되어 정국이 운영되는 ‘세도정치’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세도가문들은 군주라는 중세적 정치체제의 전통적 권위에서 존립했고, 제도개혁이나 민생의 안정에는 관심이 약했으며, 중첩된 혼인을 통해 협력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백탑파이야기] 백탑파와 규장각

규장각은 이 지은 글인 어제와 왕의 글씨인 어필을 봉안하던 하던 건물이었다. 정조대에 규장각은 기존의 어재.어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방대한 도서를 수집.정리하게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많은 도서들을 간행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했을 당시 규장각에는 국내서적 약 1만여점, 중국서적 약 2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으고, 부속으로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을 보관하는 봉모당, 국내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중국서적을 보관하는 열고관 등을 두었다.

노론 집안 출신인 박지원, 홍대용과 함께 백탑파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박제가, 이덕무 등 서얼 출신 인물들은 그들의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는 그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선발하였다. 이들은 규장각 주도하에 이루어진 다양한 편찬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규장각에서의 날들
영조의 뒤를 이어 등극한 정조는 노론 우위의 정국을 타개하고 남인 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성장하는 중간계층을 국왕과 직접 연결시켜 재편성함으로써 편파적 상황의 탕평을 완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백탑파는 뛰어난 학문 실력으로 새로운 힘이 되어 줄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이들을 평소 눈여겨 보던 정조는 마침내 그의 측근 관료로 살게 될 삶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바쁜 공무를 보냈고, 또 다른 이들은 정쟁의 폐해를 피해 한양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탑 인근에서의 모임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했고, 그때를 그리워하며 한숨짓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 수교주련(受敎柱聯), 조선후기, 관원들이 지켜야 할 지침을 적었다.

非先生勿入(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見來客不起(손님이 찾아와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

정조와 규장각
정조는 훌륭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1776년 즉위한 그해 9월, 창덕궁 영화당 옆 언덕에 규장각을 설립했습니다. ‘규장(奎章)’은 제왕의 글과 글씨를 이르는 말로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는 기능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의 준론 탕평의 이념적 기반 마련과 개혁을 뒷받침한는 기관으로 확대하기 위해, 이곳에서 활발한 학문연구와 함께 도서 편찬 작업을 펼쳤으며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당색에 물들지 않은 신하들을 길러 내려 했습니다. 규장각에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습니다. 관원들의 사무실 겸 숙직 장소인 이문원(摛文院)을 두었고, 선왕의 유품인 어제, 어화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 국내서적을 보관한 서고(書庫)와 중국에서 들여온 도서와 문적을 보관한 열고관(閱古館), 이후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했으며, 서적의 부식이나 훼손을 막기 위해 보존처리작업을 진행하는 곳인 서향각(書香閣), 휴식공간으로는 부용정이 있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대저 임금이 인재를 씀에는 아무리 작은 국량의 재능이라도 원래부터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한 자가 썩고 한 치가 좋은 재질이라도 오히려
모두 거두어들여서 인재를 포횽하고 도야하는 반열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법이다.
그러한 즉 어떤 사람인들 버리겠으며, 어떤 인재인들 쓸 수 없겠는가…
- 『홍재전서』 권133-

나는 물이 세상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자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 『홍재전서』 권10 -

OLYMPUS DIGITAL CAMERA‘만천명월주인옹자서’, 1798년.

정조가 자신의 호를 ‘萬千明月主人翁’이라 정하고 그 내력을 서문 형식으로 쓴 현판이다. 정조는 달을 자신으로, 모든 시냇물을 신하와 백성에 비유하면서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임을 밝히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정조의 시문.윤음.교지 및 기타 저술을 모아 엮은 문집이다. 전시된 것은 1787년 1차로 간행된 60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문체반정
1792년 정조는 기존의 문풍(文風)이 청의 패관소설이나 형식으로 변질됨을 우려하여, 당대 유행하는 문체를 비판하고 바로잡아 역대 고문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배경에는 문체를 구실로 노론에게 일정한 압박을 가해 수세로 몰린 남인을 보호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깔려 있기도 했습니다. 박지원은 정조가 지목한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의 대표자였습니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연암체’라 불릴 정도로 당대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를 제어하기 위해 박지원에게 자송문을 요구한 것입니다. 또한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남공철, 김조순 등 규장각에 소속된 여러 학자들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정도의 의도를 간파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왕의 요구에 맞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문체반정에 회의적이던 박지원과 이서구는 끝내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정조 역시 더는 글을 써내라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모두 박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 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 박지원, 『연암집』「연상각선본」 -

OLYMPUS DIGITAL CAMERA정조어필, 18세기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글을 쓰는데 혼신을 다하여 상고시처럼 꾸밈없고 담백한 글을 쓰도록 권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1856년.

정조가 당대를 혼란기로 규정하고 선현의 가르침을 얻고자 편찬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두율분운(杜律分韻), 1798년, 두보

사대부들이 과체시(科體詩, 과거시험에 채용되는 시)에만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자, 두보의 시풍을 배우게 하기 위해 정조가 이 책의 편찬을 지시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삼국지통속연의, 19세기, 나관중

정조는 『삼국지』『수호전』 등의 소설류를 패관소품으로 규정하고 금기시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상기(西廂記), 19세기, 왕실보

정조대 금서로 지정된 원나라 희곡으로,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학사지서(奎章閣學士之署),

규장각 이문원의 중앙에 걸려 있던 현판으로, ‘규장각 학사의 관서’라는 의미이다. 좌측 하단에 낙관을 통해 규장각 제학 김중서가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무예도보통지
정조는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실력 있는 군사들을 선출하였습니다. 이는 군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정조는 1789년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란 명을 내립니다.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는 문헌 고증을, 박제가는 고증과 목판 대본의 글씨 쓰는 일을, 무관 백동수는 무예를 실기(實技)’로 고증하는 일과 편찬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백탑에서 맺어진 인연이 다시 모여 그들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790년 음력 4월29일, 4권1책으로 된 『무예도보통지』와 24개의 기예를 한글로 풀이하여 만든 1권1책의 『무예도보통지 언해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에게 명하여 장용영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자세히 상고하여 편찬하게 하는 동시에, 주해를 붙이고
모든 잘잘못에 대해서도 논란을 붙이게 했다.
이어 장용영 초관 백동수에게 명하여 기예를 살펴 시험해 본 뒤에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정조실록』14년, 4월29일 -

OLYMPUS DIGITAL CAMERA무예도보통지, 1790년

무예와 전투기술을 표준화하고자 한 정조의 명으로 백동수.이덕무.박제가 등이 만든 무예서다. 총24개이 전투기술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예제보번역속집, 1610년, 최기남

『무예제보(武藝諸譜)』에 빠진 내용과, 『일본고(日本考)』에 나오는 일본의 무예를 덧붙여 다양한 무예 실기를 수록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병학통(兵學通), 1785년

조선후기 군사 교련서다. 중앙 군영과 지방 진영의 군사 훈련 질서를 통일하기 위해 만든 책으로, 훈련도감의 규정을 기준으로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기효신서(紀效新書), 조선후기, 척계광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지은 병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전술.무기.무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검서관으로 등용된 백탑파
1779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모두 서얼 출신으로, 재능있는 서얼을 옆에 두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문예부흥과 학술진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조가 규장각을 확대해 갈수록 이들의 역할도 많아졌습니다. 방대하고 끝없는 편찬사업이 이어졌고, 수많은 서적의 오,탈락 교정과 내용 검증, 규장각 내 도서목록작성, 새로 수입되는 서적의 분류, 새로운 서적 발간, 중요 서적과 문서 필사 등으로 규장각의 등불은 새벽녘이 되도록 꺼질 줄 몰랐습니다. 때문에 일주일에 3~4회는 숙직을 서야 했고, 예전과 달리 자신들의 연구 시간과 여유를 즐길 수 없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정조가 검서관이 쓴 시문을 가져와 살펴보게 하고 검서관을 모두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검서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가 앞으로 나오니 상이 차례로 돌아가며 집안과 나이를 물었다. 왕이 교서를 써서 내리기를 시작 일등은 검서관 부사용 이덕무다. 다음은 부사용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이다. – 『승정원일기』 1779년 7월13일 -

편찬사업 및 저서
규장각은 서고의 특성상 수집 역할에 충실을 기하고자 기존의 소장 자료 뿐 아니라 연행을 가는 사신을 통해서 다량의 중국 서적을 구입하거나 기증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 문화의 발전을 위한 대규모 서적편찬 사업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규장각지』『대전통편』『전운옥편』『동문비고』『오륜행실도』 등 많은 책을 편찬하고 간행했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편찬되기까지 그 안에서 책과 씨름하며 고증과 교열작업을 펼친 검서관들의 노력과 수고는 정조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함께 계속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규장각 총목(奎章閣 總目)』이 완성되었다. 임금이 평소 경적(經籍)을 숭상하여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유편(遺編)을 널리 구매하여 존현각의 옆을 확장하여 그곳에다 저장하여 두고서.. 그 규모를 점점 넓혀 병신년 첫 해에 맨 먼저 『도서지성(圖書集成)』 5천여 권을 북경의 책방에서 구입하였고, 또 홍문관의 소장본과 강화부 행궁에 저장되어 있던 명나라에서 내려준 여러 가지 책들을 옮겨다 보태었다.. 비밀스럽고 희귀한 책들로서 옛날에 없던 것으로 지금 구비되어 있는 것이 무려 수천.수백가지 종류나 되었다. – 『정조실록』 5년, 6월29일 -

OLYMPUS DIGITAL CAMERA규장전운(奎章全韻), 18세기

조선후기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이 편찬한 한자 운서(韻書)다. 조선의 한자음과 중국 본토 자음을 함께 표기하였고, 한글로 글자의 음을 달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어정규장전운, 1880년경

정조가 명하여 1792년 이덕무가 완성하고 규장각 관원들의 교정을 거쳐 4년 뒤 간행된 운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지(奎章閣志), 1784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되었으며, 규장각의 연혁.제도.기능.의식.보관서적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규장각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어정제권(御定諸圈), 1798년

정조가 1798년 9월25일부터 한달간 신하들과 강연한 내용을 적은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조보감(國朝寶鑑), 1782년

조선 역대 국왕의 업적을 모아 편년체로 기술한 사서다. 채제공이 편집을 맡아 간행하였으며, 내사본(內賜本,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책)으로 규장각에서 편찬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1873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수정한 것으로 1797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921년

정조는 무장들의 전기를 발간함으로써 유비무환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유득공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기영선(史記英選), 정조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 뛰어난 작품을 가려 뽑아 엮은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오경백편(五經百篇), 1798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중국 고전에서 백성과 선비의 교육에 관련된 내용을 정조가 직접 선정하여 교정.간행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아송(雅頌), 1799년

주희의 시를 보급하여 문풍을 이끌겠다는 목적으로 정조가 주희의 시문을 뽑아 간행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문진보(古文眞寶), 1874년경, 전 황견

주나라부터 송나라까지의 시문을 엮은 책으로 고시(古詩)와 고문(古文)의 교과서로 평가받으며 문장 학습용 교재로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백탑파이야기] 성시전도시, 도성의 번창을 노래한 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는 조선후기 중흥을 이끈 정조가 당시 한양의 모습을 그린 “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그림으로 보고 규장각 관원들에게 짓게한 시(詩)이다.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번창했던 당시 한양의 모습을 표현한 것들로 현재는 13편이 전해진다. 정조가 직접등수를 매겼는데 병조좌랑 신광하가 1등, 검서관 박제가가 2등을 차지했다. 왕조의 번성과 도성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내용으로 작자에 따라서 다양한 관점에서 수도 한양의 번창을 표현하고 있다.

백탑파의 한양노래, 성시전도시로 본 18세기 서울
수도 한양을 노래하는 문화는 정조시대에 절정을 맞이합니다. 정조는 1792년 신하들에게 번성하는 서울의 모습을 묘사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한양의 지세, 연혁부터 시끌벅적한 시장풍경, 유흥문화 등 당시 일상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왕도(王都)를 이렇게 대규모로 조감한 시도는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갖가지 개혁과 탕평을 통해 정국의 화합을 도모했던 정조는 찬란한 태평성대를 기록하게 함으로써 백성의 실정을 살피는 한편, 왕권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북학파 실학자들의 시각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18세기 역동적인 한양의 모습을 세밀하게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금척(金尺)으로 정한 우리 강산 일만리
한경(漢京)의 웅장한 모습 황도(黃圖) 속에 담겼네
한 폭의 황도 대도회를 그렸는데
역력하게 펼쳐져 손슴을 보는 것 같네
조선왕조 만세토록 기틀 흔들리지 않고
번화한 문물 모두 다 여기에 있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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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전도시 시권, 1792년, 이집두

승정원 우승지 이집두(李集斗)의 시다. 보통 성시전도시가 문집에 실려 전하는 데 반해 당시 시권(試券, 시험답안지) 원본의 형태로 남아 있다. 정조로부터 차상(次上)의 점수를 받았으며 상으로 종이 한 권을 받았다. 칠언백운고시로, 전반부는 구폭요도(九幅瑶圖), 후반부는 성시전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성시전도시, 18~19세기, 신광하

1등을 차지한 병조좌랑 신광하(申光河)의 시를 필사한 것이다. 정조로부터 ‘소리가 있는 그림’이라는 평을 받았다. 신광하의 시는 한양의 풍물을 중국풍으로 묘사하여 장중한 분위기를 갖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양 사람들의 나들이 명소
한양에 만연된 유흥의 분위기는 명승지에 대한 열광적 애호를 낳았습니다. 인격 수양을 위해 산 속에 은일하는 것이 아니라 도성 주변의 경치 좋은 곳에서 모임을 갖거나 유람의 즐거움을 만끽하였습니다. 18세기에는 그 이전에 주목되지 않았던 인왕산 기슭과 북악 일대가 최고의 경승지로 꼽힙니다. 이는 우리 산천의 감흥과 정취를 표현하고자 했던 정선과 김홍도 등의 화폭에도 담겨집니다. 백탑파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역시 이러한 명승명소를 유람하며 그 풍광을 성시전도시에 담아 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붉은 정자 세검천(洗劍川)으로 둘러 싸여 있고
빈 골짝에 백추지 다듬는 방망이 소리 울리네
세심대(洗心臺)의 꽃 필운대(弼雲臺)에 어리니
천송이 만송이 꽃들 영롱하게 빛나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필운대 행화(杏花), 북둔의 복사꽃, 흥인문밖 버들,
천연정 연꽃, 삼청동 탕춘대의 수석(水石)이
술과 노래를 즐기려는 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를 하루만에 두루 돌면서
성내외의 꽃과 버들을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거리로 여겼다.
- 유득공, 『경도잡지』-

OLYMPUS DIGITAL CAMERA유숙이 그린 ‘세검정도’.  조선후기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명소 중 하나인 세검정과 주변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세심대신해갱재축(洗心臺辛亥赓載軸, 1791년)

홍재전서(弘齋全書, 1787년),  정조의 어제(御製)를 모아 엮은 문집으로, 권1~4에는 정조가 세손시절 지은 시문을 모은 「춘저록(春邸錄)」이 수록되어 있다. 춘저록에는 조선 도읍지 한양의 팔경을 읊은 ‘국도팔영(國都八詠)’이 실려 있다. 세심대신해갱재축(洗心臺辛亥赓載軸, 1791년), 세심대에서 왕과 여러 신하들이 감회를 읊은 시를 모은 것이다. 세심대는 조선후기에 부상한 명승명소 중 한 곳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주합(酒盒), 조선후기.

술과 안주용 반찬을 담는 휴대용 그릇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여행을 할 때 간단하게 술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찬합(饌盒), 조선후기

반찬을 여러 층의 그릇에 담아 포개어 간수하거나 운반할 수 있게 만든 용기이다. 목궤에 3개의 서랍과 문판으로 구성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세시풍속
18세기에는 자국의 고유한 문화와 풍속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세시풍속을 기록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백탑파의 한 사람인 유득공이 한양의 세시와 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景都雜志)』를 저술하여 그 선구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성시전도시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이들은 액(厄)자를 종이연에 써서
해가 질 때 줄을 끊어 날려 보낸다.
매년 정월13일이나 14일에는 수표교 주변 위 아래로
연싸움을 보러온 구경꾼들이 담을 쌓은 듯 모이다.
- 유득공, 『경도잡지』

OLYMPUS DIGITAL CAMERA김준근,지연(紙鳶). 연날리기를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한무리의 소년들이 무리지어 몰려가니
팔뚝위에 보라매가 털과 부리 으스댄다.
- 박제가, 「성시전도시」-

OLYMPUS DIGITAL CAMERA김홍도,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 매사냥을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신윤복, 연소답청(年少踏靑)

OLYMPUS DIGITAL CAMERA부채(扇), 조선후기

산수화가 그려져 있고 상아로 장식된 합죽선(合竹扇)이다. 조선후기에는 문인 취향이 부채에 반영되어 합죽선이 더욱 유행하였고, 장식품을 다는 등 더욱 화려해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풍속도병(風俗圖屛, 복제), 18세기, 김홍도

한양의 남산과 성곽, 가옥과 거리의 모습이 그려진 풍속화로, 선비들과 기생, 일반 백성의 유흥과 세시풍속 등 일상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양각시문병, 19세기

이백이 쓴 「장진주(將進酒)」의 글귀가 적혀 있는 술병이다. 술을 권하는 내용으로, 음주의 즐거움과 영웅의 호방함을 읊조리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로, 조선후기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겨울철 난방기구나 음식을 데우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담뱃불을 붙이거나 인두를 달구는 인두 꽂이로도 활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도시적 삶, 도시문화의 싹틈
18세기 도시경제의 성장은 군자적 삶의 이상보다는 현실의 인간본성을 따르는 새로운 도시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일상 사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꽃, 새, 골동품의 수집 등 새로운 감각의 생활 취미가 유행하는데, 이는 그 이전 ‘완물에 정신을 판다(玩物喪志)’고 하여 경계되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술집과 기방 같은 유흥 문화가 발달하고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합니다. 도시문화의 주역이기도 했던 백탑파의 성시전도시에는 절약 대신 소비, 유흥,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도시적 감성이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인두 그림 담뱃대는 길이가 한길이요
나전칠기 담배합은 가볍고도 어여뻐라
- 박제가, 「성시전도시」 -

벼슬한 자들은 반드시 담배합을 지참하는데
쇠로 주조한 것이고 은동으로 매화와 대나무를 새겼으며
자색 녹피로 끈을 달아 재떨이와 함께 말 뒤에 달았다.
- 유득공, 「경도잡지」 -

OLYMPUS DIGITAL CAMERA신유복이 그린 상춘여흥. 한양의 부유한 양반들이 유흥을 즐기는 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담뱃대, 대통마개.대통받침,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담배합

담배합.담뱃대(19세기). 담배는 조선 중기에 유입되면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경도잡지」에 “벼슬한 자들은 반드시 담배합을 지참하는데, 쇠로 주조한 것이고 매화와 대나무를 은으로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긴 담뱃대는 장죽(長竹)이라고도 한다. 대통마개.대통받침(19세기),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부분인 대통부분을 덮는 뚜껑과 받치는 용기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타구(唾具), 19세기. 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등(提燈), 조선후기

밤길을 다닐때나 의식에서 사용한 휴대용 등이다. 자루를 달아 들고 다니기 편리하게 만들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생황(笙簧), 근대.

고려.조선시대 궁중음악에 쓰였던 아악기의 하나로, 문인들의 풍류 악기로도 쓰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안경, 19세기

안경은 조선 후기 일반 백성에게도 상당히 보급되었으나, 재질과 장식이 화려하여 고급 사치품에 속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전(別錢), 조선후기

별전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옆전 모양의 장식품 혹은 기념화폐다. 꽃무늬.부채모양.채색된 것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집비둘기 이름이 수십종이 넘어가니
아로새긴 새장에 깃발이 펄럭이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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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후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도성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중국적인 요소와 조선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 그림으로 실제 풍경이 아닌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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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에 표현된 집비둘기.

벽(癖)이란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 박제가, 「백화보(百花譜)」-

거래는 다 끝나고 연극얘기 청하니
배우의 복장은 놀랍고도 망측하다
우리나라 사당놀이 천하에 짝 없으니
허공 달려 줄 걸으니 거미가 매달린 듯
- 박제가, 「성시전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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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이 그린 ‘창배보삭’. 외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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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이 그린 가면무용.

늙고 젊은 온갖이들 지패(紙牌) 뽑아 소리치니
심한이는 미친 듯이 저물도록 앉았구나
- 박제가, 「성시전도시」-

OLYMPUS DIGITAL CAMERA성협이 그린 ‘투전’

OLYMPUS DIGITAL CAMERA투전(鬪錢), 19세기

투전은 각종 문양.문자가 표시된 패를 뽑아 패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중국에서 유입되었다. 조선 후기 바둑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된 쌍륙.투전.골패 등 노름의 열풍은 도박성 게임이 양반계층의 향락성 여가문화로 자리잡혀 갔음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쌍륙말.주사위, 조선후기

두 개의 주사위와 서른 개의 말을 가지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대한제국 시기까지 널리 유행되었다. 이 주사위는 숫자대신 문(文).무(武).훈(勳).덕(德).연(軟).빈(貧) 여섯글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바둑판.바둑돌, 20세기초

사대부들의 수양을 위한 여가활동이었던 바둑은 조선 후깅 유행하면서 유흥적 오락으로 변모되었다. 박지원의 친구가 밤늦게까지 바둑을 두다가 취침했는데 그다음날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바둑에 대한 애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다양한 한양사람들

맨발에 큰 버선은 황문의 내시이고
흘깃보며 치마걸음 누구일까 기생이라
- 박제가, 「성시전도시」-

OLYMPUS DIGITAL CAMERA기생집 앞 풍경을 그린 신윤복의 그림.

초헌(軺軒)이 빠르게 지나가니 액예(掖隸)들 ‘물럿거라’ 소리치고
작은 가마 돌아갈 떄에 여러 비녀들 에워쌌네
한가롭게 노니는 공자들 어찌 하나같이 아름다운가
번쩍이는 안마(鞍馬)는 화려함을 다투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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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에 표현된 도심 큰길 풍경

숭양(崧陽) 땅 초립(草笠)에다 다홍적삼 입고서
하인들 씩씩하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두눈을 껌뻑이며 거간꾼을 불러대고
혹 다툼 풀어주며 잘 지내라 권한다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OLYMPUS DIGITAL CAMERA저자거리에서 거래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개백정 옷 갈아 입어 사람들 몰라봐도
개는 쫓아 짖어대며 성난 듯 노려보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

OLYMPUS DIGITAL CAMERA개를 끌고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화암수록(花庵隨錄), 18세기말, 유박

유박이 자신의 화훼 재배 경험과 철학을 담아 저술한 책이다. 기이한 화훼가 있으면 천금을 주고라도 구해왔다는 기록을 통해 그의 화훼벽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괴석초충도(怪石草蟲圖), 18세기, 심사정

정선 문하의 18세기 화가 심사정의 그림이다. 괴석과 꽃, 귀뚜라미를 화보풍으로 그렸다. 조선후기에는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주변 사물을 많이 그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7언(言).100운(韻)의 장편시인 성시전도시는 현재 13편이 전한다. 1792년 신광하.박제가.이만수.이덕무.유득공.서유구.정동간.이희갑.김희순.이집두가 지은 10편과 신택권.이학규.신관호가 후에 이를 모방해 지은 3편이 있다. 당시 정조가 직접 등수를 매겼는데 병조좌랑 신광하가 1등, 검서관 박제가가 2등을 차지했다. 이어 검교직각 이만수와 승지 윤필병이 3,4등을 각각 차지했고 검서관 이덕무와 유득공은 공동5위였다. 상을 받은 신하만도 17명으로, 하나의 시제를 두고 이렇게 다량으로 창작했다는 것도 드문 일이다. 왕명으로 지어진 시인 만큼 대체로 왕도의 번성함과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지만, 창작자마다 이를 다르게 구현하였다. 어떤 시는 중국의 시를 따른 듯 의고적이고 장중하며, 어떤 시는 한양 특유의 풍경을 조선의 색채로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내용은 대체로 수도 한양의 형세와 위상을 찬양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궁궐.육조.운종가 등 도성 내 모습과 한강.명승지 등 도성밖까지 균형있게 묘사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같고,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같다.
-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裝館全書)』 -

OLYMPUS DIGITAL CAMERA동시(東詩, 19세기, 신광하 등). 신광하.박제가.이희갑의 성시전도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이다.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조선후기, 박제가), 2등을 한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다. 정조의 우수한 평가를 받은 여섯신하는 정조의 명으로 다시 ‘금강일만이천봉(金剛一萬二千峰)’ 칠언시를 지어 바쳤는데, 이것이 성시전도시 뒤에 실려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재서종(冷齋書種), 19세기말~20세기초, 유득공

고종대 장서가 심의평이 필사한 유득공의 문집으로, 5등을 한 유득공의 성시전도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은 정조의 어평이 남아 있는 유일본으로서 가치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양가(漢陽歌), 1844년

한글로 된 풍물 가사로, 조선왕도인 한양의 연혁.풍속.문물.제도 등을 노래하였다. 정조 재위기간에 만개한 한양 찬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활기찬 상업도시
조선후기 한양은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상업도시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국에도 수용되어 마침내 정조는 1791년 상업활동의 자유를 열어주게 됩니다. 이로 인해 종루 운종가와 동대문 밖 이현, 남대문 밖 칠패의 큰 시장 외에도 도성 밖으로 한강을 끼고 상권이 더욱 발달하여 많은 상품이 산처럼 쌓이고 인파로 붐볐습니다. 상업을 중시하였던 백탑파의 인물들은 성시전도시에 시장 속 모습을 생생히 담아 내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시장풍경

배오개와 종루와 칠패 등 세곳은
이 바로 도성의 세 곳 큰 저자로다
온갖 장인 일하는 곳 사람들이 붐비나니
온갖 물화(物貨) 이문 쫓아 수레가 연이었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OLYMPUS DIGITAL CAMERA김홍도가 그린 ‘장터길’

비단가게 울긋불긋 눈부시게 펼쳐졌으니
사라(紗羅).연견(練絹).능(綾).곡(穀).기(綺)비단이요
어물가게 싱싱한 생선 통통하게 살이 올랐는데
갈치.농어.준치.쏘가리.숭어.붕어.잉어라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OLYMPUS DIGITAL CAMERA김춘근, 시장

주점은 본래 인간 세상으로 웅백 성홍의 술빛 잔에 가득하네
행상과 좌고 헬 수 없이 많아
자질 구레한 물건도 갖추지 않은 것 없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OLYMPUS DIGITAL CAMERA신윤복, 주사거배(酒肆擧盃)

OLYMPUS DIGITAL CAMERA‘태평성시도에 표현된 이상적인 모습.

거리 좌우로 천보(天步)나 길게 늘어선 행랑들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
- 이덕무, 「성시전도시」-

소설 탐독에 빠진 한양 사람들
도시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서적의 유통은 서민계층으로까지 광범해졌습니다. 18세기가 되면 상업적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도서가 발간되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유행합니다. 특히 운종가와 청계천은 서책과 서화의 주요 유통공간으로, 운종가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즉 전기수(傳奇叟)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한편 통속소설류가 사대부 남녀노소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하면서, 위정자들은 음란하고 무익하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담배 가게 앞에서 소설 낭독이 벌어졌는데,
영웅이 뜻을 잃고 방황하는 대목에 이르자
듣고 있던 사람이 낭독자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다.
- 이덕무, 「아정유고」-

앉아서 수호전을 읽는 자가 있는데,
뭇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듣고 있다.
…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건만
외기에 익어서 입이 미끄럽게 내려간다.
- 박지원, 「열하일기」-

OLYMPUS DIGITAL CAMERA김홍도가 그린 ‘담배썰기’에 소설로 보이는 책을 읽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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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희, 독서하는 여인

OLYMPUS DIGITAL CAMERA시전지.시전지판, 조선후기

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와 여기에 무늬를 찍어내는 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주.모시, 20세기

시전의 으뜸 품목 중 하나로, 각가 면주전과 전포전에서 판매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돈궤.

OLYMPUS DIGITAL CAMERA상평통보, 조선후기

‘상평통보’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공평하게 쓸 수 있는 돈’을 뜻하며 1678년 국정화폐로 발행되었다. 앞면에는 ‘상평통보’를,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넣었다. 조선후기 화폐경제의 발달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양도, 1822년

위백규가 저술한 『환영지』에 실린 지도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으로, 궁궐.성곽.문루 등 주요 요소가 간략히 잘 담겨 있다. 시전행랑이 T자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진신(油鞋), 생가죽을 기름에 절이고 바닥에는 징을 박아 젖은 땅에서도 신을 수 있도록 만든 신이다. 운혜(雲鞋),홍색의 화문단(花紋緞)으로 만든 신이다. 구름무늬를 장식한 여성용 신의 하나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부녀자가 신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 20세기초, 김준근

조선후기의 사회 풍속을 98장의 그림으로 묘사한 화첩이다. 여러 판본이 수출되어 해외에도소장되어 있다. 농경생활부터 장사.수공업.의식주.종교.형벌.관혼상제 등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풍속을 보여주는 자료적 가치가 크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산통.산가지, 조선후기

상인들이 거래 시 셈을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가는 대나 뼈를 가로.세로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하여 셈을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산의 보급과 함께 사라졌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까지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되(升), 조선후기

곡물 등의 부피를 재는 용기다. 당시 부피를 세는 단위로는 작(勺).홉(合).되(升).말(斗).석(石) 등이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저울(枰).자(尺), 조선후기.

물건의 무게와 길이를 잴 때 사용하는 저울과 자다. 저울대에 점선으로 눈금을 표시하고, 끝에는 물건을 올려 놓아 평형을 이룰 때 무게를 측정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산(書算), 일제강점기.

글을 읽은 횟수를 세는 도구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몽선습, 명심보감,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교재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자문. 명필 한석봉의 글씨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한 교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한글 소설책, 사씨남정기, 초한지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책을 보관하는 상자.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백탑파이야기] 탑골에서 부는 바람

실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대두된 현실개혁적인 조선시대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당시 청나라의 고증학과 더불어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에 그 근원을 두고 양국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면이 있다. 청대의 고증학은 경서의 해석에 치중한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서구문물의 영향과 함께 농업에서 부터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구한 학문으로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실학이 기존 성리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학문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의 학문이다. 농업생산력 향상과 토지 소유관계에 따른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중농주의부터 상업과 청나라 문물의 도입을 강조하는 북학파, 민족의 정체성으로 되찾고자하는 시도를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와 형태의 학문들이 실학의 범위로 분류된다.

오늘날 ‘원각사지 구층석탑’이 남아 있는 탑골공원 주변에는 조선후기 중흥기를 이끈 정조대 실학자 중 박지원을 비롯하여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등이 살았다. 이들은 청나라 연행 등을 통해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북학파의 중요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이 살았던 지역 이름을 따서 백탑파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2014년 겨울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이들의 삶과 사상 등을 되돌아보는 의미로 “탑골에서 부는 바람 – 백탑파이야기”라는 제목을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시에서는 정조대 백탑파 사람들이 살아왔던 모습과 교류관계,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회 등을 되돌아 보는 내용들이다.

빙두른 도성 한가운데 백탑
종로 2가 30번지,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탑골공원. 먼지와 비바람을 피해 유리 보호각 속에 초라하게 서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조선시대에는 도성 한복판에 우뚝 솟아 흰 자태를 뽐내던 탑이었습니다. 그 탑을 배경으로 18세기 한양의 뛰어난 수재들이 모여 ‘백탑파’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었으며, 조선의 폐단을 여지없이 꼬집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과 지식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조선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015년 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탑골에서 부는 바람 – 백탑파 이야기』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백탑파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탑골공원 주변에 살았던 영.정조대 실학자 박지원, 홍대용, 이서구 등이 서로 교류했던 모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한양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주변 주택가를 묘사한 그림.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대표하는 이정표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18세기 동아시아 3국(조선, 청, 일본)은 이른바 ‘중흥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정조와 시대를 같이하는 청나라 건륭제, 일본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은 임진왜란 이후 지속된 평화 속에서 자국의 체제정비와 함께 실격 배양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각국은 전 시기보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상품경제가 활발해졌으며, 상업발달로 부를 축적한 서민들의 의식은 성장했습니다. 또한 지식인들은 자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학문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들 세 나라는 부분적인 개방을 통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청은 광저우를 통해, 일본은 나가사키를 개방하여 서양문물을 직접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조선은 예외적으로 청과 일본 등을 통해 서양문물을 간접적으로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지도층의 지적 호기심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며, 19세기 서양 열강의 세력에 밀리게 됩니다. 천하의 중심이 ‘중국’으로 인식되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국제질서로 동아시아 세계가 재편된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변화하는 한양
18세기 한양. 인구 20여 만이 넘어선 도성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인구증가와 상품화폐의 발달로 인한 경제구조의 다변화는 신분계층의 분화와 서민층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명분을 앞세우며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내세우던 성리학은 그 힘을 점점 잃어갔고, 대신 피지배계층의 현실에 맞춰 정책이 수행되고 학문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 발전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조선은 관념적인 세상에서 벗어나야 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경제가 곧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하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르 새 시대를 향한 사람들의 열기와 희망이 한양을 활기 찬 도시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육의전기(六矣廛旗), 육의전박물관(복제), 20세기.

육의전은 시전 가운데 으뜸이 되는 여섯 곳으로, 대체로 선전(비단).면포전(무명과 은).면주전(명주솜으로 짠 옷감).저포전(모시).지전(종이).어물전을 말한다. 육의전에 걸었던 이 깃발들은 중요한 제사인 재신제.시전진수제.산신제 등에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탑골공원 토층에 남아 있는 원각사터(圓覺寺址)의 역사
서울의 중심부인 종로2가에는 조선시대 왕실사찰인 원각사가 있었다. 태조때 세웠던 흥복사(興福寺)의 옛 터에 세조10년(1464) 원각사라는 새이름으로 절을 세웠다. 그 뒤 왕실사찰로 위용을 자랑하다가 연산군 10년(1504)에 폐사되었다. 원각사에 있던 종은 숭례문으로 옮겼다가 종루로 다시 옮겨 달았으며, 탑은 위쪽 3층이 헐리운 채 폐사로 남았다가 1946년에 이르러 원형대로 복구되었다. 2001년 원각사가 있던 탑골공원의 재정비를 위해 탑골공원 성역화계획이 세워졌다. 이에 우리 박물관은 혹시 모를 매장문화재의 훼손을 막기 위해 시굴조사를 했다. 시굴조사에서 원각사터는 깊이 2m 아래에 잠들어 있음이 드러났고 많은 유물과 유구가 개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전시된 토층은 원각사터의 북동쪽에 해당하는 토층의 전사모형으로 지하 2m 아래의 자연층 위에 조선 전기.조선후기.일제강점기의 토층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탑골공원 원각사지 절터 토층 모형. 조선초 사찰이 조성된 이래 다양한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원각사지 출토유물
원각사지 시굴조사는 2001년 서울시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 시행에 따라, 문화재 확인 및 유적 보존방법 계획 수립을 위해 2개월 간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총 11종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다량의 자기와 기와류.토제마상.동전.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원각사지 출토 기와.

OLYMPUS DIGITAL CAMERA토제 마상.

OLYMPUS DIGITAL CAMERA원각사지 출토 도자기류.

벗들에게 가는길
벗을 찾아 백탑 아래 하나 둘 모인 이들은 서울 곳곳에서 많은 이야기와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모임은 수포교와 운종가처럼 활기 넘치는 도성의 한복판뿐 아니라 몽답정.읍청정처럼 풍광이 빼어난 곳, 이덕무의 청장서옥. 서상수의 관재. 이서구의 소완정 등 벗들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이들은 함께 차를 마시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한양 곳곳의 풍경과 자연을 묘사하는 시를 지었으며,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부터 그들이 가진 학문과 사상까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모임에서는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기도 했지만, 18세기 조선사회에 유입된 청 문물의 이로운 점을 조선사회에 적용하고자 이용후생의 학문을 치열하게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탑동연첩》<탑동계회>, 조선후기, 전 이방운.

1803년 훈련도감 대장 김조순이 장수들과 탑동 근처에서 모임을 가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화폭 중앙 상단에 원각사십층석탑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성시도, 1830년

도성 안의 주요 건출물을 비롯하여 도로망.하계망 등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다. 탑골 지역을 대사동(大寺洞)과 탑동(塔洞)으로 표기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백탑 아래의 벗
당시 경화사족은 북촌에 모여 살았습니다. 이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백탑 주변으로는 관직이 낮은 양반과 전문기술을 가진 중인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백탑파도 이곳을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유득공은 1757년 운수 아래 옛집에 있다가 곧 백탑이 있는 경행방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서구는 외가에서 살다가 1765년 백탑 아래 본가로 돌아왔습니다. 이덕무는 확교동에 살다가 1766년 백탑 동쪽의 관인방 대사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박지원은 서울 반송동 야동(서소문 바깥 풀무골)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768년 백탑 인근으로 이사한 후 다시 전의감동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박지원의 공작관(孔雀館)

박지원은 1768년 32세 때 백탑 근처로 집을 옮겨 당호를 공작관이라 지었습니다. 그는 1771년경부터 ‘연암’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그 이전에 일시적으로 공작관이라는 자호(自號)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홍대용을 비롯하여 이덕무, 박제가 등 백탑파가 드나들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벗으로 우정과 학문을 나누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덕무의 청장서옥

가난했던 이덕무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서상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덕무가 대사동에 살 때의 집이 워낙 옹색한 고옥이라 바깥채에 작은 서재를 짓고 싶어도 돈이 없어 엄두를 못 내자, 서상수는 자신의 고서를 팔아서 건축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지은 집이 바로 청장서옥(淸莊書屋)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상수의 관재(觀齋)

서상수는 시, 서, 화에 능쌔으며, 퉁소를 잘 부는 예인이었습니다. 또한 서얼 신분임에도 다른 벗들보다 조금 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도동서화(古董書畵)를 즐겼으며 그 방면에 감식안이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박지원은 필세설(筆洗說)에서 서상수에 대해 조선의 서화, 골동 감상을 하나의 학문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습니다. 그의 관재는 백탑파의 시회가 자주 열리던 곳으로, 여러 벗들의 집 가운데서 제일 인기가 좋았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그들이 꿈꾸던 세상
18세기에 조선이 내포하고 있던 모순은 다양했습니다. 빈번한 자연재해로 농촌은 황폐화되었고 여기에 삼정의 문란이 더해져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또한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한 계층분화 및 중간계층의 활발한 신분상승 운동은 기존의 폐쇄적인 지배구조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에 지배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 즉 실학을 연구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 청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하고 상공업 중심의 개혁을 도모한 북학파에는 백탑파의 핵심인물이었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주장한 북한은 각각 독자적인 분야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주자의 학설만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인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며 사회의 폐단을 보다 적극적으로 논했습니다. 또한 연행을 통해 청의 발전된 기술과 생활양식, 교통수단 등을 조선의 사회에 적용시켜 발전된 사회로 나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벽혁이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거나 사회변혁을 도출해 내는 데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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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전도(渾天全圖).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서양 천문학을 반영하여 수정한 천문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파초제시도(芭蕉題詩圖), 19세기, 이재관.

값비싼 종이 대신 파초잎에 글씨를 연습했다는 한 고사로 인해 문인들은 파초잎에 시 쓰는 일을 매우 아취 있게 여겼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선비들이 사랑했던 매화
맑은 곷, 은은한 향기와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매화는 가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선비를 상징합니다. 올곧은 정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매화는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시대에 선비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꽃이었으며, 시나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또한 사랑방에 놓였던 벼루, 필통, 필가, 연적, 담뱃감,, 책장 등에 매화나무 가지 또는 만개한 꽃송일를 장식하여 사랑방에 운치를 더하고 탈속한 선비의 이상향을 그렸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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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매저구도(絶梅著句圖), 18세기, 이방운

매화가지를 꺾어 화병에 꽂아 놓고 이를 감상하며 시구를 짓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다. 절제된 필선과 담채로 묘사되어 차분한 선비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매화형연적, 19세기, 매화를 양각으로 시문한 연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매화가 그려진 백자연적.

OLYMPUS DIGITAL CAMERA인장, 조선, 상단에 매화를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석재 인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청화매화절지문필통,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문양판, 조선, 옷과 종이 등에 무늬를 찍는 도구로, 매화를 크게 새겼다.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프라하] 근대 방어시설

프라하는 17세기초 당시 유럽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의 진원지로 인구의 1/3이 감소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30년 전쟁 기간 동안 중세에 쌓은 성곽들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새로운 신무기에 대포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강이 있었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이탈리식 축성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이후에 전쟁에서 성곽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19세기에는 황제의 요새기능 포기 명령과 도심의 개발로 중세에 쌓았던 성곽들의 많은 부분이 철거되었지만, 이때 비셰흐라드와 시타델라 성채,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들 중 일부분이 보존되어 남아 있다.

초기 근대 방어시설, 기초개념 및 구축, 전투 방어, 요새 기능 축소
비교적 평온한 16세기가 지나고 17세기 초의 냉혹한 전란 현실이 몰아 닥쳤다. 왕국은 30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었다. 전쟁 개시부터 중세 성곽은 대포 시대에 거의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에 보다 개선된 방어시설이 필요했다. 먼저 기존의 석성 앞에 흙으로 된 바스티온, 즉 성곽 돌출부를 축조한 뒤 토성으로 보강하고 다시 벽돌과 돌로 감쌌다. 중세 성곽은 구축될 당시 최신의 유럽 군사 건축의 모델이었지만 새로 축조된 바스티온 시스템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탈리아식 기술을 도입하였다. 예외적으로 도시형 시타델리 성채로 개조된 비셰흐라드(Vysehrad)성은 최후의 보루로 병영시설 및 창고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강가의 바스티온 방어선은 프라하가 1648년에 스웨덴군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을 때 제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바이에른, 프러시아군대가 차례로 프라하를 공격해 왔을 때 방어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 특히 1741년 프랑스 연합군의 프라하 점령은 비셰흐라드성과 시타델라 성채 개선의 계기가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모든 방어시설이 급격히 노후되어 1848년 봉기때만 사용되었다. 반란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제국 행정부가 성채 일부를 반역자를 막을 수 있는 시설로 변경했다. 결국 그 후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그 당시 방어시설 건축가들은 바스티온 성채의 간단한 모델을 썼다. 먼저 평면도를 구획한 다음 그 주위에 참호를 파서 파낸 흙으로 오각형의 언덕, 즉 바스티온을 쌓고 그 위에 포를 설치할 포대를 만들었다. 각각의 바스티온을 토성으로 연결시키고 전체 구조물을 벽돌벽으로 보완했는데 대문, 창턱, 모퉁이 등은 모나게 깎은 사암으로 지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프라하시 구획 및 방어시설 도면, 채색 그림, 1830년 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브루스카 대문, 그림엽서(채색된 사진 복사), 190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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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셰흐라드 성의 레오폴드 대문 설계도, 마년필 채색 그림, 17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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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병 갑옷(앞뒤 흉갑, 대퇴갑, 경갑, 투구), 금속, 가죽, 16세기 말 ~17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결투용 권총, 놋쇠, 호두나마, 1730~4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총검이 부착된 보병총, 부싯돌식 격발장치, 강철, 호두나무, 18세기 말~19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기마병용 권총, 강철, 린덴나무, 17세기 중반

OLYMPUS DIGITAL CAMERA기마병용 검과 검집, 강철, 놋쇠, 나무, 17세기 말 ~18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오스트리아 장교 흉갑, 강철, 놋쇠, 벨벳, 17세기 중반

OLYMPUS DIGITAL CAMERA총탄 흔적 흉갑, 강철, 18세기 말

OLYMPUS DIGITAL CAMERA팔목가리개.

OLYMPUS DIGITAL CAMERA말머리가리개, 강철,놋쇠,17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장교 투구, 강철, 가죽, 17세기 중반

OLYMPUS DIGITAL CAMERA말이라는 뜻의 콘스카 대문, 현 국립박물관 위채(채색 사진, 1900년 경), 프라하 레트나에 위치한 제19번 보루 후방에 있는 반란 진압용 건물모습(현재 국무총리 관저가 들어선 자리), 사진(188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신시가, 비세흐라드 및 우예즈드 대문 주변의 프라하 바스티오식 방어시설 일부의 도면, 마르틴 요한 폰 에크(Martin Jahann von Eck)가 그린 그림, 채색 그림, 1741년 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1741~1742년 전투 때의 프라하 전경, 18세기 후반의 동판 인쇄 채색 복사본, 19세기 말 복사.

OLYMPUS DIGITAL CAMERA마트하우스 메리안(Mathause Marian)에 의한 프라하 조감도, 채색된 동판 인쇄,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1694년에 세워진 지트나 대문 정면 모습, 사진, 18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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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대 우예즈드 대문 정면, 사진, 19세기 말.

OLYMPUS DIGITAL CAMERA페트르진 언덕 위에 설치된 중세 성곽 및 바스티온 방어선 일부 개관, 사진, 193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흙으로 구운 벽돌, 바스티온 방어시설은 기후와 포격에 잘 견디는 벽돌로만 축조되었다. 바스티온 축성 초기에는 여러 가지 크기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18세기부터 일정한 크기의 ‘성벽돌’이 표준화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암블록. 건축물은 이회암 외에 강도가 다른 여러가지 사암으로 축조되었다. 방어시설에는 주로 바스티온 모서리나 도시 대문 외벽 축조에 이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회암 벽돌. 중세 프라하 방어시설의 대부분은 이회암 벽돌로 축조되었다. 이회암은 가공하기가 쉬우나 오랫동안 천천히 건조해야 된다. 충분히 건조되지 않으면 겨울에 얼어서 부서져 버린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미장흙손, 가문비나무, 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벽돌 흙손 (복제품), 철, 나무, 14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다림추, 강철, 19세기

프라하 요새 기능의 폐기
황제 프란츠 요세프 1세가 1866년에 프라하시의 요새 기능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70년대 후반부터 도시권 개발의 필요에 따라 중세 성곽이 헐려지면서 점차적으로 바스티온 방어선도 철거되기 시작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스라호프 대문 주변 바스티온 방어시설 철거 작업 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중세 대문이 발굴되었다. 사진 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신대문 주변 바스티온 성곽 철거 작업, 사진, 1875년

OLYMPUS DIGITAL CAMERA소지구 남쪽 변두리에 임대 주택 공사 중 까렐 황제 떄 중세 성곽 철거 작업, 사진, 193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대포를 보여주는 삽화, 윗줄 대포, 이래즐 구포(臼砲)색채 드로잉,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제19호 성 마리나 막달레나 보루에 위치한 신호 대포, 1880년대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구형 포탄, 강철, 18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대포 포탄, 강철, 18세기말 ~19세기 초.

근대유적지 중 남아 있는 곳. 바로크 양식의 방어선 중 비셰흐라드와 시타델라 성채, 도시 성곽 북부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바스티온 방어선은 현재 7.75km 보존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레오폴드 대문(1670년), 9.제36호 보루

OLYMPUS DIGITAL CAMERA14. 성채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돌출되어 있는 2개의 보루로 구성된 네모난 성곽(1639년 또는 1652년), 15.누셀스케 골짜기를 가로질러 수문이 설치된 중세 개조 성곽은 제32호 능보로 표시되기도 하였다.(14세기 중반), 16. 제31호 보루

OLYMPUS DIGITAL CAMERA18.계단식 보루 제3호. 38. 보존된 제11호 보루

OLYMPUS DIGITAL CAMERA42. 참호가 일부 보존된 제16호 보루의 오른쪽 잔재, 47. 참호가 일부 보존된 제19호 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