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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서원, 김유신 장군과 설총, 최치원을 모신곳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악서원 (西岳書院)이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과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설총과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조선 명종 때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모시기 위해 사당건립을 추진하였으며 유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이황이 사당을 세울 때 후학양성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권고하면서 ‘서악정사(西岳精舍)’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서악정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며 그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 인조대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서악서원>

현재의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이다. 앞쪽에는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뒷편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학공간은 강당건물인 시습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앞쪽엔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는 누각인 영귀루가 있다. 뒷편에 사당을 두고 있다. ‘서악서원’이라 적힌 현판은 당대 명필인 원진해가 쓴 글씨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악서원 현판>

영귀루는 강학공간 앞쪽에 세워진 누각이다.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사방이 뚫려있는 2층 문루 형태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귀루>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악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강당>

강당 앞 양쪽에는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가 있다. 동재는 조설헌(譟雪軒), 서재는 절차헌((切嗟軒)이라 부르며 2건물 모두 앞면 5칸의 큰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설헌>

OLYMPUS DIGITAL CAMERA<절차헌>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뒷편 건물>

사당에는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 신라가 유학을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설총,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큰 업적을 남긴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내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강학공간 옆에는 서원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었던 건물들이 있으며, 마당 한쪽에는 서악서원을 처음 세운 경주부윤 이정의 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는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영귀루 옆에 세워진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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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서악서원이 있는 마을은 선두산 동쪽편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다. 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릉을 비롯하여 법흥왕릉, 무열왕릉, 김유신 장군묘, 문무왕의 동생으로 삼국통일에 크게 공헌한 김인문의 묘를 비롯하여 서악동 고분군 등이 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서악서원(西岳書院), 경북 경주시 서악동 615
이 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 경주부윤 이정(李貞, 1512~1571)이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당시 경주지역의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이정은 퇴계 이황과 의논 하여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하고 손수 글씨를 써서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탔고, 인조 때 다시 세워져 나라에서 서악서원이라는 이름 (願)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글씨는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을 배치하고, 영귀루를 맨 앞에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자리 배열을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다. 왼편으로 진수재(進修齋)를, 오른편으로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영귀루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옥산서원(사적),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년)을 기리기 위해 159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으며 1573년 국왕으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 배치나 건축양식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앞쪽에,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향공간이 뒷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 입구에 위치한 청분각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국보) 등 많은 서적들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마을, 양동마을>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이중으로 등재되어 있다.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주로 중종대에 명종대에 관리이자 학자로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번의 사화에서 관직에 물러나거나 여러 사건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언적은 학자로서 성리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와 무극태극논쟁을 벌였으며, 이는 조선 성리학사에 최초의 본격전인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학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에 따라 1610년(광해군2)에 명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옥산서원(사적)>

들어가는 길

옥산서원은 경북 안강읍 옥산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은 말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정혜사지 절터 부근에 독락당을 짓고 거처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옥산천 계곡에서 경치가 뺴어난 바위 5곳에 이름을 짓고 오대(五臺)라 불렀는데 그 중 독락당 남쪽 600m 정도 떨어진 세심대(洗心臺) 부근에 서원이 세워졌다. 서원 부근에는 오랜 세월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입구의 울창한 숲>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앞 마당>

세심대(洗心臺)는 서원 앞을 흐르는 개천 가운데 있는 넓은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독락당에서 흘러내려온 개천은 세심대에서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어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세심대>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자계천 가운데에 자리한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자계천을 흐르는 물은 세심대에서 떨어져 내려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이 빼어난 경치를 이른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4~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독락당을 지어 머물면서 주변의 산과 계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세심대이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서원 정문에 해당하는 역락문 (亦樂門)은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위로는 옥산서원 특유의 흙과 벽돌을 섞어서 만든 토담으로 둘러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정문인 역락문>

강학공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제향공간이 중심이 되었던 후대의 서원에 비해 강학공간과 고직사의 규모가 크고 학문연구에 중점을 둔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동재), 암수재(闇修齋. 서재),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육중심의 서원답게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독락문을 들어서면 출입문이자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가 있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는 앞면 5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건물 양쪽에는 작은 누마루을 설치하였다.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대청마루에는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 건물인 무변루>

OLYMPUS DIGITAL CAMERA<강당에서 보이는 무변루>

OLYMPUS DIGITAL CAMERA<무변루 내부>

무변루 앞마당에는 계곡에서 물을 끌어 들여 흐를 수 있도록 작은 수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는 궁궐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금천과 비슷하게 서원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변루 앞 마당>

강당건물인 구인당은 유생들이 공부하고 학문을 논하는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잘 지어진 건물은 아니지만 단정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건물인 구인당>

옥산서원은 선조에게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대 명필 이산해가 현판글씨를 썼는데 구한말 화재로 소실되면서 추사 김정희가 다시 현판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구인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천정에 걸려 있는 글>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왼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온돌방 아궁이>

강당 앞 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동.서재에 해당하는 민구재와 암수재가 있다. 민구재는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앞면 5는 건물로 온돌방 3칸과 작은 대청마루를 1칸씩, 2개를 두고 있다. 유생들을 서열에 따라서 분리하여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암수재는 하급생이 기거하는 곳으로 건물구조는 민구재와 똑깥다.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규모가 큰 편으로 교육기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초기 서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민구재>

OLYMPUS DIGITAL CAMERA<암수재>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강학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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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옆 계곡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과 오래된 고목>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무변루, 구인당, 민구재(동재), 암수재(서재)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것이다. 처음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 며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와서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 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석봉 한호가 썼다. 구인당은 헌종 4년 183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곳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兩進齋)와 해립재(偕立齋)는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제향공간

제향공간은 위패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서원 소장 목판을 보관하던 경각(經閣), 신도비가 있는 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내삼문인 체인문 주위로 담장이 둘려져 있다. 사당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크지 않고 단정하면서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체인문과 제향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

사당 옆에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당대 유학지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명필 이산해가 썼다. 원래 신도비는 서원 앞 계곡 부근에 세워져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서 후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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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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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에 새겨진 글씨, 명필 이산해의 뛰어난 글씨체를 볼 수 있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 중종,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주자(朱子)의 주리론(主理論)에 근본을 두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거유(巨儒)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 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경각은 옥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던 전적을 보관하는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었다. 옥산서원은 경주부윤을 통해 국가에서 발행한 중요한 전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각>

국보 322-1호 <삼국사기>는 1573년 경주부(慶州府)에서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 원판, 조선 태조 때 새긴 것, 중종 때 시갠 것 등이 3종류의 판이 섞여 있다. 총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으로 인출상태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322-2호 <삼국사기>는 1512년 다시 새긴 것을 찍은 것으로 인출당 당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삼국사기, 고려 1145년, 1573년 인쇄, 종이에 인쇄, 국보 322-1호, 경주 옥산서원>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 체인묘, 전사청, 경각, 비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체인문을 들어서면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주위로 담장을 둘렀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經閣)에는 어서(御書), 어필(御筆), 내사본(內賜本), 퇴계수필(退溪手筆),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사당 왼쪽에 있는 것은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고직사를 비롯한 부속건물들

동재인 민구재 옆으로는 살림집 형태의 고직사 건물들이 있는데 다른 서원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고직사에는 상당히 많은 방을 두고 있는데, 서원을 방문하는 유력인사들이 잠시 머물 수 있도록 건물을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본채>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행랑채>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에서 본 고직사>

OLYMPUS DIGITAL CAMERA<민구재와 고직사 사이의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에서 서원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유물전시관>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
이 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언적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종묘에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가 타계한 후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1574년에는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 건축의 역사로 보면 옥산서원은 초기의 건축물에 해당하는데, 당시에 지어진 서원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따랐던 데 비해, 이 서원은 틀에 짠 듯 질서 정연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다던 이 서원의 원규(지금의 학칙)만큼 이 건축물에서도 긴장과 절제가 묻어난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가 있고, 강당인 구인당의 양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강당 뒤쪽에 서 있는 것이 회재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이다. 동재의 오른쪽으로 지어진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았던 곳이다. 이곳 고직사(庫直舍)는 다른 서원에 비해 유난히 규모가 커서 예전의 재산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고직사 뒤에 있는 문집판각(文集板閣)은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그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청도 선암서원, 구한말 서원 훼철 이후 서당으로 다시 지어진 곳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마을에 있는 선암서원이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모시기 위한 서원으로 조선 선조 때(1567년)에 향현사라는 사당으로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위치로 옮긴후 선암서원이라 하였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박하담의 후손들이 서당으로 다시 지었다.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사당이 없고 강당이 있는 선암서당과 살림집인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선암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문집 목판 등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운문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낙동강 지류인 동창천 옆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청도 선암서원 01-20200106청도 선암서원.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서당으로 다시 지어진 곳이다.

청도 선암서원 03-20200106서당으로 다시 지어진 강학공간. 큰 규모의 강당 건물과 사랑채,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청도 선암서원 04-20200106‘선암서당’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앞면 3칸의 강당 형태 건물로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청도 선암서원 05-20200106일상적인 생활공간인 사랑채. 행각 형태의 건물로 왼쪽편은 사랑방이, 오른쪽은 창고 등이 있다.

청도 선암서원 09-20200106살림집이 있는 안마당. 사랑채 한쪽편에 있는 창고가 보인다.

청도 선암서원 02-20200106선암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지류인 동창천.

청도 선암서원 07-20200106담장 바깥쪽 동천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

청도 선암서원 06-20200106서당이 있는 마당을 출입하는 작은 출입문.

청도 선암서원 08-20200106출입문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창천. 경치가 빼어난 곳에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선암서원,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이 건물은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원래 매전면 동산동 운수정에서 향현사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 10년(1577)에 군수 황응규가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고종 15년(1878)에 다시 중건되고 선암서당으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강당인 소요당, 안채, 사랑채인 득월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암서원 건축이 특징은 주택에서 서당으로 쓰일 건물이 추가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원이나 서당보다는 지방 향리초호의 저택으로 더 가치가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과 지방문화재 해동숙소학판목, 14의사목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어 한국학의 보고라 불렸다. 현재 이 유물들은 청도박물관과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전시.보관 중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상주 도남서원, 정몽주 등을 배향하기 위해 지역 유림들이 세운 서원

경북 상주시 도남동에 있는 도남서원이다. 조선중기 선조 때(1606년) 정경세를 중심으로 지방유림들이 당시 상주목사였던 류성룡의 품의를 받아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모시기 위해 처음 세워졌다. 이후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조선후기 숙종 때 ‘도남서원’이란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선현들을 모신 서원이지만 지방유림들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교육 중심의 서원이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옛 건물들은 대부분 없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도정사, 강당인 일관당, 누각인 정허헌, 출입문인 입덕문이 경사진 언덕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와 전사청, 고직사 등의 건물들이 있다. 옛모습을 그대로 복원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안동 도산서원과 비슷한 형태로 건물들을 배치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주 도남서원. 서원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상주지방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낙동강변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출입문인 입덕문

OLYMPUS DIGITAL CAMERA낙동강 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상당히 큰 규모의 누각인 정허루.

OLYMPUS DIGITAL CAMERA정허루에서 강당으로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건물인 일관당.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원래 강당인 일관당이었다는 건물. 지금은은 고직사 건물처럼 사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현판, 조선시대

창건 당시 정경세는 원호의 제정 등 제반사항을 유성룡에게 품의하여 정했는데, 그 바탕에는 상주를 영남유학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큰 뜻이 있었다. 서원 명칭인 ‘도남’은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내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재인 손학재

OLYMPUS DIGITAL CAMERA서재인 민구재. 그 옆에 장판각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인 도정사.

OLYMPUS DIGITAL CAMERA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앞 표지석. 그 뒤로 낙동강과 상주보가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상량문, 조선시대

정경세가 지은 도남서원 상량문이다. 영남에서 일어나 전해진 도학의 정맥이 이 서원을 통해 천년이나 이어질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정경세는 원우의 제도와 위치, 원호의 제정, 각종 예식문의 찬솔 등 제반사항을 앞에서 지휘했다. 이로써 정경세는 사후 2년 뒤인 1635년에 사후 2년 뒤인 1639년에 자신도 추배되었으며, 당시 봉안문은 전식이 지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도남강학계안과 조선팔도 서원록(도남서원이 적혀 있다.)

도남서원
1606년에 창건되어 167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871년(고종 8)에 국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향토 유림에서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른다. “도남”이란 명칭은 송나라 정자가 제자 양씨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한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의 유학 전통은 바로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명명한 것이다. 서원에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 선생을 모시고 해마다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낙동강가에 자리잡은 서원에서 바라보는 경관과 정취는 매우 수려하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상주시청, 2019년
  2.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상주 옥동서원 (사적), 조선초 황희 정승을 모신 서원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는 옥동서원(사적)이다. 이 서원은 고려말.조선초에 활동한 황희 선생을(1363 ~ 1452년)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 중종 때(1518년) 황희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세우면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숙종 때 현재의 위치에 사당을 옮기고 강당을 지으면서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정조 때(1787년)에 ‘옥동서원(玉洞書院)’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사액서원이 되었다. 조선후기에 전식, 황효헌 황뉴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황희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은 중요한 서원이다.

서원은 문루인 회보문, 강당인 온휘당, 사당인 경덕사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없는 등 부속시설들이 많지 않다.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기능이 약화되고 선현을 모시는 제사기능이 중시된 17~18세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주 옥동서원(사적). 조선초 명재상 황희를 모신 서원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에 훼손되지 않은 중요 서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회보문’이러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문루.  앞면 5칸의 2층건물이다. 1층은 출입문으로, 2층은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문루 바깥쪽 난간이 있는 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옆족에서 본 모습. 옆면 3칸으로 앞쪽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1층은 난방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에서 본 문루. 강당 앞 마당을 축대를 쌓아 조성하여 문루 2층과 같은 높이를 만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동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강당은 앞면 5칸의 전형적인 서원 강당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동서원’이라 적힌 현판. 조선후기 정조때 국왕이 현판을 하사한 사액서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대청마루. ‘온휘당’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온돌방에는 탁장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맞은편 방에는 ‘착로재(斲露齋)’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탁장재 온돌 아궁이. 온돌방 바깥쪽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강당. 양쪽 온돌방에는 아궁이 위로 서적들을 보관하는 책장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옆 관리사를 출입하는 작은 협문.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뒷편 마당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 건물이 있다. 제사를 올리는 기능을 중시했던 18~19세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덕사 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인 경덕사.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황희초상, 조선시대

조선 세종 때의 재상인 황희의 초상화이다. 옥동서원 소장 자료에 따르면 황희 생전인 62세(1424)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단에 채색된 형태이며, 초상화의 표현이나 묘사 등을 고려했을 때 전체적으로 고식을 따르고 있다. 황희.전식.황효헌.황뉴를 모신 사액서원이자 미훼철 서원인 옥동서원(사적 532호)에는 이 밖에 황희 초상 모사본 3본이 전해져 내려온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동서원 앞 들판.

상주 옥동서원, 사적 532호, 경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이 서원은 방촌 황희(1363 ~ 1452년)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여 존현하고, 교학하던 사학기관으로 1518년(중종 13) 백화서원이 효시가 되었다. 당초 신덕리(현재 서원의 북쪽)에 백옥영당으로 자리했으나, 1715년(숙종 41)에 이곳 백옥봉 산자락 남동쪽으로 옮겨 사당인 경덕사를 이건하고, 1716년 강당인 온휘당을 지었으며, 이후 1789년(정조13)에 옥동서원으로 사액받아 개칭하였다. 배향선현으로는 세종조의 명재상이요, 청백리인 방촌 황희 선생을 비롯하여 사서 전식, 축옹 황효헌, 반간 황뉴 등의 명현을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시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2015년.11.10자로 지방문화재 기념물에서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제532호)으로 승격되었다. (안내문, 상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상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