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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창계서원, 조선후기 학자 임영을 모신 서원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 있는 창계서원이다. 조선후기 대제학을 지낸 임영을 모신 서원으로 숙종 때인 1711년 처음 세워졌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원이 있던 자리에 재실인 영성각이 세워졌다가 최근에 사당을 다시 지으면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조선후기 전국각지에 많은 서원 중의 하나로 교육기능보다는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을 모시는 제향공간의 성격이 강한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창계서원.

SANYO DIGITAL CAMERA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문간채

SANYO DIGITAL CAMERA서원 강당 건물. 창계서원이 훼철된 후 1907년 집안 제사를 위해 그 터에 지은 재실인 영성각 건물이다. 교육을 하던 강당이기보다는 제사를 준비하고 문중회의를 하는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 있는 사당을 최근에 다시 지으면서 창계서원이 복원되었다.

창계서원,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창계 임영(1649~1696)선생을 모신 서원, 임영의 자는 덕함이요, 본관은 나주이시고, 창계는 그의 호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 벼슬은 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일생을 학문 연구에 힘써 큰 업적을 남기신 호남이 배출한 빼어난 학자이기에 훌륭한 스승으로 길이 추모하고 사표로 삼기 위해 서원을 건립한 것이다. 창계서원은 숙종 37년(1711), 회진 마을에 세워졌던 바 영조 43년(1767) 무렵 중건을 하면서 이곳 신걸산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 19세기 말 전국적으로 단행했던 서원철폐로 이 서원 역시 훼철을 당하고 말았는데 후일 그 터에 영성각이 세워졌다. 근래 민족 문화유산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 지면서 창계서원을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어 본 서원은 다시 복원 되기에 이르렀다. 원래의 위치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창계사원  청계사와 건순문이 경향의 뜻 있는 인사들과 문중의 협찬을 받아 2000년 3월 중건된 것이다. 기존의 건물인 영성각은 서원의 강당으로 함께 쓰이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남원 창주서원, 조선중기 문신 노진을 모신 서원

전북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창주서원(滄州書院)이다. 조선중기 명종 때 활동한 문신이자 유학자 노진을 모신 서원이다. 선조 12년(1579)에 고령서원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선조 33(1600)에 ‘창주’라는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59년 현재 위치에 새로 지어졌다. 사당, 강당, 동.서재 등을 갖추고 있으나 교육중심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조상들을 모시기 위한 제향 중심의 서원이다.

노진(1518~1578년)은 유학자 정여창을 배출한 함양 개평마을 출신으로 조선중기 명종 때 활동한 관리이자 학자이다. 관리로서 형조참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고루 역임하였으며, 유학자 기대승, 김인후 등과 교류하는 등 학자로서도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다. 남원 창주서원과 함양 당주서원에 모셔졌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 창주서원. 조선중기 문신 노신을 모신 곳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복원한 서원이다.

SANYO DIGITAL CAMERA창주서원 출입문. 솟을삼문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중심공간인 강당.

SANYO DIGITAL CAMERA동재

SANYO DIGITAL CAMERA서재

SANYO DIGITAL CAMERA사당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사당인 명덕사.

창주서원, 전북 남원시 도통동
본 서원은 조선중기의 문신 노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곳으로 조선 선조12년(1579)에 남원시 금지면 고룡서원으로 창건, 선조 33년 (1600)에 창주서원으로 사액되어 300여년간 천향하여 왔으나 고종8년(1871)에 조령으로 훼철되어 사림과 자손들의 회한이 애절하던 중 1964년에 현위치에 복설하였다. 선생은 중종 13년(1518) 경남 함양군 개평에서 태어나 선조 11년(1578) 61세로 졸하였다. 선생의 자는 자응, 호는 옥계, 시호는 문효이고 관향은 풍천이다. 관직은 충청, 경상도 관찰사, 전주부윤,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겸 동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577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세칭 학문은 도학연원이 백세표준이 되고 덕행에 효제와 청빈은 역대의 으뜸이라 선비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창주서원 경내에는 명덕사, 도남당, 동재, 서재, 진덕문이 있고 저서로는 옥계문집 11권 6책이 현존해 있으며 유적으로는 남원에 별묘, 경남 함양의 묘소에 신도비, 사액당주서원 터에 유허지비, 지곡에 효자정려문, 상림역사인물 공원에 흉상, 지곡연지원에 어제시비 등이 있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정읍 무성서원(사적), 통일신라 유학자 최치원을 모신 서원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무성서원(사적)이다. 통일신라 때 유학자인 최치원과 신잡, 정극인 등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모시고 있다. 고려시대 때 세워진 최치원을 모신 사당인 태산사와 성종 때 정극인이 세훈 향학당이 합쳐져 조선 숙종 때 무성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지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자,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9곳의 서원 중 한곳이다.

무성서원은 앞쪽에 강학공인인 명륜당과 동수재가, 뒷쪽에 사당이 배치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 서원을 운영했던 주요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정학풍을 계승하는 사원이라기 보다는 정극인을 비롯하여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모신 제향공간이자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읍 무성서원(사적). 통일신라 유학자 최치원과 정극인을 비롯하여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모신 서원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읍 무성서원 강학공간 중심 건물인 강당. 앞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대청마루가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28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무성서원 현판. 숙종 22년에 국가에서 이름을 내린 사액서원이다.

SANYO DIGITAL CAMERA강당 대청마루.

SANYO DIGITAL CAMERA강당 왼쪽편 작은 온돌방.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강당

SANYO DIGITAL CAMERA사당을 출입하는 내삼문.

SANYO DIGITAL CAMERA위패를 모신 사당인 태신사. 앞면 3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사당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에는 최치원을 모셨던 사당 이름인 ‘태산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는 최치원을 주향으로 신잠, 정극인 등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모셔져 있다. 특정인의 학풍을 계승하는 서원이라기보다는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모신 공간이라 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원 출입문인 현가루.

SANYO DIGITAL CAMERA현가루라 적힌 현판

무성서원, 사적 166호,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이 서원은 신라 말 유학자인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태산(태인) 군수를 지낸 최치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세워 태산사라고 불렀는데, 조선 숙종 22년(1696)에 나라에서 무성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현 건물은 현종 10년(1844)에 다시 고친 것으로 최치원 외에도 조선중종 때 태인 현감을 지낸 신잠과 유학자인 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문.김관 등의 제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모면한 몇 안되는 서원 가운데 하나로, 2층 문루인 현가루와 강당, 강수재 등 건물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참배객 명단인 봉심안, 서원의 규약집인 원규 등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도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영주 소수서원(사적), 안향을 모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이다.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웠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국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중국 당나라 때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답게 건물이 크고 그 숫자다 많은 편이다. 경사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강학공간과 제향향공간이 배치되는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죽계천변에 옛 절터에 여러 건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강학공간을 동쪽에, 제향공간을 서쪽에 두고 있는 동학서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의 중심에는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학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와 서고, 전사청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안향 등 을 모신 사당인 문성공묘가 배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주 소수서원(사적). 숙수사란 사찰이 있던 곳에 강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해 유행들이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이 크고 많은 편이다.

소수서원 들어가는 길

소수서원은 안향이 머물렀던 숙수사란 절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동쪽으로 죽계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나즈막한 언덕이 있으며, 학자수라 불리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솔밭길에는 절터임을 말해주는 당간지주를 볼 수 있으며, 죽계천 너머로 옛사람들이 쉬었던 취한대란 작은 정자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소수서원 입구.

SANYO DIGITAL CAMERA소수서원 서쪽 낮은 둔덕에는 학자수라 불리는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원 들어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59호).

SANYO DIGITAL CAMERA서원 동쪽으로 흐르는 죽계천. 고려말 유학자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되는 하천이다.

SANYO DIGITAL CAMERA죽계천 옆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취한대.

SANYO DIGITAL CAMERA소수서원 출입문. 후대 서원과는 달리 솟을삼문이나 문루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작은 협문을 두고 있다. 그 앞에은 제사에 올리던 제물을 잡던 성생단이 있다.

진입영역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가 있다. 서원 정문인 지도문 앞 잔듸 제단은 성생단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경령점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 황기로의 현판이 남아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강학공간

소수서원은 후학양성을 위해 세워진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강당 건물인 강학당(보물 1403호)를 중심으로 여러동의 건물들을 두고 있다. 유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는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문의 단계에 따라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평상시 많은 유생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강학공간 한쪽편에는 도서관 격인 장서각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강학당(보물 1403호). 앞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궁궐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겹처마를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당 내부.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이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의 건의로 국왕으로 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SANYO DIGITAL CAMERA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 중 가장 낮은 단계인 지락당. 앞면 3칸 건물로 온돌방 1칸, 마루 2칸으로 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두번째 단계인 학구재. 앞면 3칸짜리 건물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 1칸씩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3번째와 4번째 단계 유생들이 머무는 일신재와 직방재이다. 앞면 6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SANYO DIGITAL CAMERA서적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서각.

SANYO DIGITAL CAMERA일영대.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자연속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강학영역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보물 1403호)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제향공간

소수서원은 고려 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인 문성공묘(보물 1402호)과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후대 서원과는 달리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에 사당을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사당 뒷편에는 안향초상(국보 111호)와 주세붕초상(보물 717호)를 모시기 위한 건물인 영정각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원 동쪽편에 위치한 사당인 문성공묘(보물 1402호).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도 소박하며 공간도 넓게 쓰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뒷편에 있는 전사청.

SANYO DIGITAL CAMERA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영정각. 1970년대에 세워진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료대와 관세대.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들이다.

제향영역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보물 1402호)와 전사청, 영정각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의 제사를 지낸다. 문성공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안향초상(국보 111호)과 주세붕초상(보물 717호) 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서원 뒷편에 있는 사료관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받았다. 서원은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 등의 건물이 있고 제향공간에는 문성공묘, 전사청, 영정각 등이 있다.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서원 안팎으로 당간지주 등 숙수사 유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보물),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신 사당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에 있는 문성공묘(보물)이다. 고려시대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주향으로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앞쪽 제사 준비를 하는 퇴간을 두고 있다. 건물 주위로 담장을 둘렀으며, 앞과 옆에 출입문을 두고 있는데 후대 서원의 사당과는 달리 작은 협문을 사용하고 있다. 최초 서원에 세워진 사당으로 ‘사(祠’자를 쓰고 있는 다른 사당과는 달리 ‘묘(廟)’자를 사용하고 있어 격이 높음을 짐작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소수서원 문성공묘(보물). 건물은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앞에는 ‘문성공묘’라 적힌 현판이 달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출입문. 삼문형식을 하고 있는 후대 서원의 삼문과는 달리 작은 협문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학서묘의 공간배치에 따라 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향교나 후대 서원과는 달리 마당 한쪽에 담장으로 둘러진 작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출처>

  1.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