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석등

경주읍성터 출토 석등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석등이다. 높이 5.6 m로 통일신라 석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으로 복원한 것이다.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하대석 안상에 새겨진 팔부중상을 비롯하여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나며 전체적인 비례도 안정적이다. 석등 앞에 놓여진 배례석은 다른 곳에서 사용하던 것이데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나다. 통일신라 전성기 석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외형은 장흥 보림사 남북삼층석탑 앞 석등과 비슷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읍성 출토 석등>

하대석 안상에는 팔부중상을 새겨놓고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면서 생동감이 넘치는 걸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상에 팔부중상이 새겨진 하대석>

상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입체감 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화사석은 석등에 대한 이해를 위해 복원한 부분으로 큰 의미는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상대석과 화사석>

배례석은 설명을 위해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전시해 놓고 있는데 꽃무늬를 조각해 놓고 있다. 그 내력을 알 수 없지만 현조하는 배례석 중에서도 조형미나 조각수법이 상당히 뛰어난 걸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등 배례석>

장흥 보림사 남.북삼층석탑 앞 석등(국보)와 비슷한 형태인다. 규모, 비례 등에서 주는 조형미나 조각수법 등을 살펴보면 이 석등보다 뛰어난 작품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장흥 보림사 남.북삼층석탑 앞 석등(국보)>

석등, 경주읍성 터, 통일신라 8~9세기 높이 5.63m
경주읍성에 있던 이 석등은 하대석, 기다란 팔각기둥, 그리고 상대석 일부만 남아 있었으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 복원한 석등 높이가 거의 6미터에 이르는데, 통일신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석등이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등불을 밝히는 곳의 높이가 거의 5미터에 가까운데 어떻게 불을 켰을까 하는 점입니다. 매번 사다리를 놓았을까요? 그 답은 남원의 실상사 석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사 석등 앞에는 돌계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석등에도 그런 돌계단이 있지 않았을까요? 석등 앞에 있는 배례석은 향이나 각종 공양물을 올려놓기 위한 것입니다. 1938년 경주 교동에 살던 최대식 선생이 기증한 것인데, 원래 있던 곳을 알 수 없어 아쉬 울 따름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시안(Xi'an) 비림박물관] 석등(石燈), 당나라 사찰을 밝히던 석등

시안 비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당나라 시대 석등이다. 센양시 건현에 있던 사찰에서 출토된 석등이다. 부처를 모신 불전 앞을 밝히던 당나라 석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 기둥에 해당하는 반룡석주,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다. 목조건축물 형태를 하고 있는 화사석은 한국 석등에 비해 큰 편이며 기둥을 감고 있는 용을 새겨놓은 점이 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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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石燈), 당, 섬서성 건현(乾縣) 서호촌 석우사 출토>

당나라 시기의 석등은 석실, 반룡석주와 대좌 3대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사전당 바로 앞에 놓여 있으며 이로써 불의 무궁한 지혜와 법력을 표시합니다. 이 등은 원래는 9층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7층만 남아 있습니다. 지붕이 선명하고 등실이 정교하며 석주에는 네마리의 몸을 구부린 용이 새겨져 있는데 신기하고 아름다운 바 중국에 현재까지 남 아 있는 가장 정교한 당대 석등 가운데의 하나입니다. (안내문, 시안 비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 비림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

국립광주박물관 중앙 로비에 전시중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이다.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쌍사자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원래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절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반출하려던 것을 회수하여 경복궁 내에 옮겼다가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쌍사자 석등은 2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통일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이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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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2마리의 사자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석등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쌍사자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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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사실적 표현과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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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사자 석상. 사실적이며 힘이 넘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가 새겨진 평이한 모습의 아래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사석>

팔각형으로 4곳에 창을 두고 있다. 특별한 장식이 없으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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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통일신라 9세기 후분, 전남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절터
석등은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빛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는 곳이다. 받침은 두 마리의 사자가 늠름하게 가슴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며,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사자는 갈기가 달린 숫사자로 입과 갈기, 꼬리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불을 켜는 곳에는 창을 댄 못 구멍이 남아 있고, 지붕돌에는 연꽃모양 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의 석등, 박경식, 학연문화사, 2013년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석등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영암사지(사적) 절터에 남아 있는 쌍사자석등(보물)이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석등으로 금당터 앞 석축 위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2마리의 사자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2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마주선 모습인데 갈기와 꼬리, 근유 등을 사실적을 표현하고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고 4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와 비슷한 형태이며,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영암사지는 합천군 황매산 남쪽 자락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이다. 창건연대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 때 적연선사가 입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망이 아주 좋은 황매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축대를 쌓아 인공적으로 절터를 조성했는데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절터에는 쌍사자석등(보물 353호), 삼층석탑(보물 480호)와 거북받침돌(보물 489호) 2기가 남아 있으며, 금동여래입상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물과 건축부재 등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두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석등으로 생동감있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등을 8각을 기본 평면으로 하고 있다. 아래 받침돌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형태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조각해 놓았다. 사자의 갈퀴, 꼬리, 몸통의 근육 등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사석, 쌍사자에 비해 조각 수법이나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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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금당 앞에 별도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석등이 올려져 있다. 석축 옆에는 석등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계단이 있다. 석등 아래에 삼층석탑이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반대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황매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영암사지. 영주 부석사처럼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고 건물터를 조성했다. 절터는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353호,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을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 5호)과 견줄 수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합천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합천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양산 통도사 석등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 관음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이다. 석등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아래받침돌, 팔각기둥, 연꽃무늬로 장식한 윗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화사석을 두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사각형을 하고 있으며 창을 크게 만들었다. 조각수법이나 조형미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며, 화사석의 형태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도사 경내에 있는 많은 석등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양산 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때 (646년)에 자장율사가 세웠다. 불보(佛寶) 사찰로도 불리는 통도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이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사찰내에는 석종형 탑인 금강계단과 대웅전(국보 290호)를 비롯하여 많은 불전들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통도사 관음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 크고 웅장하지만 투박한 고려시대 석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투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받임돌. 가운데 기둥이 굵으며 사각형에 가까운 팔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각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창을 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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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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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통도사 불이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석등이 세워져 있는 관음전. 중로전 영역에 있는 3곳의 불전 가운데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로전에서 석등이 이곳에만 세워져 있다.

석등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석조물이다.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이 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석등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하대석을 올렸다. 그 위에 팔각의 기둥을 두었는데, 중앙에는 3줄의 띠 매듭으로 장식하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의 각 면에는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에는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고 꼭대기에는 보주를 놓아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부등형의 팔각인 점, 화사석이 세로로 긴 사각형인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안내문, 양산 통도사, 2017년)

<출처>

  1. 양산 통도사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