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석등

부산 범어사 석등

부산시 금정구 범어사 경내에 남아 있는 석등이다.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할 때 같이 조성한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등은 8각형 평면의 3단으로 된 받침돌 위에 화사석과 지붕돌이 올려진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졌으며, 가운데받침돌은 8각형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만들어져 있으며, 창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석등의 내력은 오래되었지만,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몇자례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조화나 균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불을 밝히는 등(燈)은 인류의 문명생활과 함께 다양한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을 밝혀 조명을 하는 등기(燈器)와 부처에 불빛을 올리는 공양구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 목조건물을 모방해서 만든 승탑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석탑이나 승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이후 많은 사찰에서 석등을 세웠는데 경주보다는 지방의 화엄십찰이나 선종계통 사찰에서 크고 웅장한 석등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산 범어사 석등.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간에 수리를 하여 원래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
통일신라 석등 양식이 적용되어 있으나 화개석과 지붕돌을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어 전체적인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가운데받침돌은 후대에 새로 만든 것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등을 받치는 받침돌. 윗받침돌을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개석, 문짝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다른 석등에 비해 창문을 만드는 수법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부산 금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범어사는 통일신라 때 전국 화엄십찰 중 하나이며, 남해안 침략하는 왜(倭)를 물리치고자 하는 바램으로 세웠던 사찰이다. 호국사찰 성격을 갖고 있었던 화엄종 사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대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숙종대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삼층석탑은 범어사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통일신라시대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부산 범어사 석등,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이 석등은 신라의 의상대사가 678년(문무왕18)에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오나, 양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범어사 3층석탑과 같은 9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금당이나 탑과 함께 사찰의 중심부에 놓인다. 이 석등은 원래 미륵전 앞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종루가 심검당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짐에 따라 옮긴 것이다. 형태는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놓아 석등을 밝힐 수 있는 창이 나 있는 화사석을 받치고, 그 위에 옥개석을 덮었다. 각 석재의 평면은 모두 8각이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양식에 속한다. 이 석등은 하대석 윗면의 복련이나 상대석 아랫면의 양련이 모두 복엽으로 8잎이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에는 4면에 장방형의 창을 내었다. 그러나 후대에 보완된 간주석이 빈약하고, 상대석이 두터워서 균형이 잘 맞지 않고, 하대석과의 비례가 맞이 않아 전체적 조화를 잃었다. 또 위쪽 상륜부의 부재들이 없어졌으며, 옥개석 위에 얹힌 노반은 제 짝이 아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3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령 성주사지 석등

충남 보령시 성주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석등이다. 8각형 평면의 3단의 받침돌과 화개석, 지붕돌로 구성된 높이 2.2 m의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가운데받침돌은 8각형 기둥 모야을 하고 있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고 있다. 조각수법이 비교적 많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전체적인 비례에서 주는 조형미는 양호한 편이다.

불을 밝히는 등(燈)은 인류의 문명생활과 함께 다양한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을 밝혀 조명을 하는 등기(燈器)와 부처에 불빛을 올리는 공양구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 목조건물을 모방해서 만든 승탑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석탑이나 승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이후 많은 사찰에서 석등을 세웠는데 경주보다는 지방의 화엄십찰이나 선종계통 사찰에서 크고 웅장한 석등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사지 석등. 절터 오층석탑 앞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등 화사석과 지붕돌. 조각수법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등이 세워진 아래받침돌.

성주사(聖住寺)는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중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다. 충남 보령시에서 공주, 부여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산중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평지사찰로 금당 뒷편에 3기의 삼층석탑, 앞편에는 오층석탑이 배치된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동삼층석탑은 다른 곳에서 옮겨 왔기 떄문에 금당 뒷편에 2개의 탑이 세워 별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요시 했던 기존 불교와는 달리 수행을 중시여기는 선종계열 불교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 글을 지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가 절터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사지 오층석탑과 석등.

보령 성주사지 석등, 통일신라, 높이 2.2 m
탑 앞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 석탑 4기를 해체 수리할 때 현재의 5층 석탑 앞에 복원한 것이다. 팔각을 기본으로 하였고, 복원할 때 부근의 판석 4개를 모아 지대석으로 이용하였다. 지대석 아랫돌은 정삭각형으로 각 면에 2개씩의 안상 조각이 있고, 그 위에 여덟 잎의 연꽃이 새겨져 있는 받침이 놓여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일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처마가 약간 위로 반전하였다. 조각 솜씨가 거칠고, 창에 문의 고정 흔적이 없으며, 등을 놓는 내부가 비실용적인 점 등으로 미루어 4기의 석탑보다 시대가 뒤떨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읍성터 출토된 거대한 석등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고 있는 석등이다. 통일신라 석등 중 가장 큰 규모인 높이 5.63 cm의 석등이다. 원래 경주읍성에 아래받침돌, 가운데 받침돌, 윗받침돌 일부난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8각형 평면으로 아래받침돌 옆면에는 신장상을 새겼다. 아래받침돌 윗부분과 윗받침돌에는 서러 마주보는 형태로 연꽃잎을 크고 입체감있게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8각형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화사석과 지붕돌은 남아 있지 않아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뛰어났던 조각기술과 조형미를 보여주는 석등이다.

불을 밝히는 등(燈)은 인류의 문명생활과 함께 다양한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을 밝혀 조명을 하는 등기(燈器)와 부처에 불빛을 올리는 공양구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 목조건물을 모방해서 만든 승탑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석탑이나 승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이후 많은 사찰에서 석등을 세웠는데 경주보다는 지방의 화엄십찰이나 선종계통 사찰에서 크고 웅장한 석등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석등. 높이가 6 m에 이르는 거대한 석등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상속에 신장상이 입체감있게 새겨진 아래받침돌. 윗변에 조각된 연꽃잎도 입체감이 넘친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사석.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앞에 놓여진 배례석

석등, 경주읍성터 출토, 통일신라 8~9세기, 높이 5.63 m
경주읍성에 있던 이 석등은 하대석, 기다란 팔각기둥, 그리고 상대석 일부만 남아 있었으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 복원한 석등 높이가 거의 6미터에 이르는데, 통일신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석등이었을 것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은 등불을 밝히는 곳의 높이가 거의 5미터에 가까운데 어떻게 불을 켰을까 하는 점입니다. 매번 사다리를 놓았을까요? 그 답은 남원의 실상사 석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사 석등 앞에는 돌계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석등에도 그런 돌계단이 있지 않았을까요? 석등 앞에 있는 배례석은 향이나 각종 공양물을 올려 놓기 위한 것입니다. 1938년 경주 교동에 살던 최대식 선생이 기증한 것인데, 원래 있던 곳을 알 수 없어 아쉬울 따름입니다.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국립경주박물관

김제 금산사 석등(보물)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대장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보물)이다. 이 석등은 3단의 받침돌과 화사석, 지붕돌로 구성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대칭되게 새겼으며, 가운데받침돌은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에는 4면에 창을 만들었으며 창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지붕돌은 귀통이마다 귀꽃을 조각해 놓았다. 전체적인 구성이는 세부적이 조각수법 등을 고려해 볼 때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을 밝히는 등(燈)은 인류의 문명생활과 함께 다양한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을 밝혀 조명을 하는 등기(燈器)와 부처에 불빛을 올리는 공양구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 목조건물을 모방해서 만든 승탑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석탑이나 승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이후 많은 사찰에서 석등을 세웠는데 경주보다는 지방의 화엄십찰이나 선종계통 사찰에서 크고 웅장한 석등이 많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 금산사 대장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보물). 지붕돌을 크고 투박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받침돌.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기둥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SANYO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사석.

SANYO DIGITAL CAMERA불쪽편에서 본 석등.

SANYO DIGITAL CAMERA석등은 금산사 대장전 앞에 세워져 있다. 원래 위치는 아니고 대장전을 이곳으로 옮길 때 같이 옮겼다.

김제 금산사는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로 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에 진표율사에 의해 사찰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후백제 견훤이 유폐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금산사에는 미륵불상을 모시는 장륙전 모습이 남아 있는 미륵전(국보62호)를 비롯하여 금강계단(보물26호), 오층석탑(보물25호), 육각다층석탑(보물27호)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 금산사(사적 496호).

김제 금산사 석등, 보물 828호,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법당 앞을 밝히는 등불로 인등, 장명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등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3.9 m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1922년 대장전을 이전할 때 현 위치로 옮겼다. 방형판석을 지대석으로 하대는 원형인데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간석은 팔각형이며 각 모서리마다 선을 쳐서 우주인 듯 강조하였다. 상대는 앙련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과 개석은 팔각형이며 개석 정상에는 원대를 두어 상륜부를 받들게 하였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 무량사 석등(보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 오층석탑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보물)이다. 이 석등을 8각형 평면으로 3단의 기단위에 화사석과 지붕돌, 머리장식을 올려 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 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가운데받침돌은 8각형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화사석은 4면에 불을 밝히는 창이 뚫려 있으며 지붕돌은 모통이를 살짝 들어올렸다. 전체적으로 지붕돌을 크게 만들기는 했지만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석등이다. 오층석탑(보물 185호)과 함께 고려초기에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을 밝히는 등(燈)은 인류의 문명생활과 함께 다양한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을 밝혀 조명을 하는 등기(燈器)와 부처에 불빛을 올리는 공양구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 목조건물을 모방해서 만든 승탑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석탑이나 승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이후 많은 사찰에서 석등을 세웠는데 경주보다는 지방의 화엄십찰이나 선종계통 사찰에서 크고 웅장한 석등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무량사 석등(보물). 전통적인 통일신라 석등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석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높이 2.5 m의 석등으로 3단의 기단 위에 화사석이 올려져 있다. 지붕돌이 약간 크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비례에서 주는 조형미가 간결하면서도 우수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상이 새겨진 4각형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이 올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사석은 4면에 창이 뚫려 있다. 창이 뚫린 면은 넓고 그 사이는 좁게 만들었다. 화사석에 비해 지붕돌을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량사 오층석탑(보물 185호) 앞에 세워진 석등.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석탑 앞에 세워진 석등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여 무량사는 조선 세조때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이 만년을 보낸 사찰로 경내에 김시습 초상화를 모시는 영정각과 그의 부도탑이 있다. 부여 서쪽 만수산에 있는 무량사는 삼국시대 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중창하였다. 사찰 경내에는통일신라 때 금당(장륙전)의 모습이 남아 극락전(보물 356호), 오층석탑(보물185호)와 석등(보물 233호)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여 무량사. 석등, 오층석탑, 극락전이 일렬로 나라히 세워져 있다. 1탑 1금당식 공간배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여 무량사 석등, 보물 233호, 충남 부여군 외산면
석등은 절의 탑이나 건물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지혜가 밝다는 것을 나타내는 등이다. 탑 앞에 등불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무량사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받침돌은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받침은 8각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 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이 놓여 있다. 화사석은 8면 중 4면은 넓고, 4면은 좁은 형태로, 넓은 면에 창이 뚫려 있다.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으나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석등은 연꽃잎 장식으로 보아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