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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석조(보물)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조(石槽, 보물)이다. 길이 265 cm, 폭 123 cm, 높이 56 cm로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모서리를 둥글게 곡면처리했다. 다른 석조와는 달리 내.외면에 조각이 새겨져 있고 내부 바닥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나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돌의 재질도 우수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불국사 석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앞에서 본 모습>

경주_불국사_석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석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에 물을 담는 모습>

불국사 석조(佛國寺 石槽), 보물,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이것은 장방형의 돌출된 물통(長方形石槽)으로 원래 위치가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크기는 가로 265 cm, 높이 56 cm이다. 석조의 바깥면은 도드라진 띠와 안상(眼象)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구부분은 네 모서리와 장변(長邊) 중앙에서 안쪽으로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내부바닥 중앙부에 타원형 공간을 마련하고 그 장축 양쪽 둘레에 작은 연꽃을 이중으로 새기고, 양쪽 머리에는 큰 연잎 속에 연꽃을 새긴 독특한 모습이다. 내부 장벽 중앙부에 바닥의 것과 같은 연꽃 무늬를 새기고 그 양 옆으로 다시 다른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바닥 가운데에 있는 타원형을 연꽃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보문사지 석조(보물)

경북 경주시 보분동 보문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石槽, 보물)이다. 큰돌을 파서 만든 물통로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거나 물을 마시는데 주로 사용된다. 특별한 장식을 새겨 놓지 않았으며 아랫단에 물을 빼는 구멍이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보문사지 석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보문동 일대는 신라를 건국한 경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명활산 고야촌이 있던 지역이다.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비부가 되었으며 설(薛)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설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총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 마을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가 남아 있는 보문사지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도심 방향으로 보이는 낭산과 황복사지 절터>

경주 보문리 석조(慶州 普門里 石槽, 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
이 곳은 신라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낭산(狼山)과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이에 형성된 들판으로, ‘보문사(普門寺)’라고 새겨진 기와의 발견을 통해 절 이름이 알려졌다. 부근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金堂址)와 동서의 목탑터,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이 남아 있다. 이 돌 물통(石槽)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아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로로 놓인 직육면체의 돌 안쪽을 파냈으며 외부와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불국사(佛國寺) 안에 있는 4개의 돌 물통을 모두 장식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이 보문리 돌 물통은 뒤편 북쪽 가운데 아랫단에 물을 빼기 위한 구멍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 유물들과 관련지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위키백과, 2021년

[부여박물관] 사비기 백제 때 사용되었던 석조

국립부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들이다. 주로 사비기 백제 때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석조들로 현존하는 석조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물들이다. 당시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사적 428호)을 비롯하여 부여 동남리, 현북리, 용정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 형태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의 것들도 있으며, 석연지로 추정되는 둥근 형태의 석조들도 있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만든 큰 구조물로 그 재료의 견고성 등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석조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불국사 석조는 지금도 물을 담아두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6~7세기, 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석조이다. 배모양을 하고 있는 이 석조들은 사찰에서 전해오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석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 높이가 낮고 배모양을 하고 있는 또다른 석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 높이가 낮고 특이한 형태의 석조이다. 한쪽편에 석조로 물이 유입되는 연결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유적(사적 428호). 다수의 석조들이 발견되었는데, 궁궐에서 연꽃을 키웠다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석조 (보물 194호). 사비기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지에서 있었던 것으로 연꽃을 키웠던 석련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동남리, 정사각형 평면을 하고 있는 석조로 높이가 낮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현북리, 높이가 낮고 크기도 작은 석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둥석조, 6~7세기, 부여 용정리, 둥근 원형 평면을 하고 있는 석조이다.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석조(보물 194호)로 연꽃을 키우는 석련지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

 

 

부여 석조(보물), 백제 왕궁에서 연꽃을 심었던 곳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석조(보물 194호)이다. 이 석조는 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부여현 관아 동헌 앞에 놓여 있었다. 사찰 입구에 놓여 있던 손을 씻고 샘물을 받아 먹던 석조와는 형태나 용도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工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가 형태를 하고 있는데 장식은 없지만 풍만하면서 깔끔한 곡선미를 보여 주고 있다. 궁궐 내 연꽃을 기르던 석련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처를 모시는 사찰처럼 성역화된 당시 궁궐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던 유물로 생각된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만든 큰 구조물로 그 재료의 견고성 등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석조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불국사 석조는 지금도 물을 담아두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석조(보물). 사비기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지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이다. ‘工’ 자 형태의 받침돌 위에 물을 담아두는 석조를 올려 놓고 있다. 샘물을 담아두는 사찰 석조와는 달리 연꽃을 키우던 석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부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부여 석조.

OLYMPUS DIGITAL CAMERA이 석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부여 동헌 마당에 놓여 있었다.

부여 석조, 보물 194호, 부여 관북리 추정 왕궁터
이 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工자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태의 석조가 올려져 있다.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되어,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조의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세로줄을 새기고 그 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보인다. 글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으로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국보 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긴 것과 같은 것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

보은 법주사 석조, 사찰 입구 물을 담아두는 그릇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남아 있는 석조이다. 법주사 승려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큰 석조 중 하나이다. 사각형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다. 석조는 식수를 담아두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찰입구에 놓여져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 손을 씻으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사원 입구에서 비슷한 기능을 하는 분수나 석조가 놓여 있다.

법주사(法住寺)는 삼국시대 진흥왕 때 (55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혜공왕 때(776년) 승려 진표가 크게 중창함으로써 미륵신앙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오늘날 금동미륵대불이 있는 곳에는 오랫동안 금동대불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대웅전에서는 옛 금당인 장륙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까지 신앙의 중심이었던 목탑도 유일하게 남아 있다.

보은 법주사 석조,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바닥부터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의 벽체에는 아무런 무늬 장식이 없이 단조로운 형태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는 모를 깎아서 부드러운 느낌을 내고 있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쪽은 23cm, 짧은쪽은 34cm 두께를 조정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아랫부분에 11cm의 구멍이 있어 실제로 물을 담아두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모통이부분 일부의 손상 흔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법주사 석조.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손을 씻고 목을 축이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주사 석조는 사찰 경내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개울 건너편으로 길이 있어 구석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일신라 때는 사찰을 들어오는 입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아래쪽에 물이 나오는 작은 구멍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내부.

SANYO DIGITAL CAMERA2008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