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석조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충남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사적)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보물)이다. 석조는 물을 담는 그릇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 사원, 사찰 입구에 놓여 있다. 석조에 담긴 물로 손을 씻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석조는 화강석 내부를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 석조 양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각 등으로 장식한 흔적이 없으며 작은 배수구마나 있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약 4톤 정도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2<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09년>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1<옆에서 본 모습>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4<반대쪽에서 본 모습>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3<석조 내부>

SANYO DIGITAL CAMERA<작은 배수구>

보원사는 화엄십찰 중 하나로 충남 서해안 일대에서 상당히 유서깊고 큰 사찰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폐사되었다.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마애여래삼존상(국보)에서 보원사 절터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북조와 백제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자 불교문화 전파 경로에 있던 유서깊은 큰 사찰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폐사되었다. 절터에는 석조(보물), 당간지주(보물), 오층석탑(보물), 법인국사탑(보물) 등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5<서산 보원사지 절터(사적)와 석조(보물)>

보원사지 석조, 보물,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간결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인해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내부에도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밑바닥은 평평하고 한쪽에 물을 내보내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989년(고려 경종 3년)에 제작된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을 비릇한 다른 석조물들과 관련시켜 볼 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경주 불국사 석조(보물)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조(石槽, 보물)이다. 길이 265 cm, 폭 123 cm, 높이 56 cm로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모서리를 둥글게 곡면처리했다. 다른 석조와는 달리 내.외면에 조각이 새겨져 있고 내부 바닥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나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돌의 재질도 우수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불국사 석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앞에서 본 모습>

경주_불국사_석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석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에 물을 담는 모습>

불국사 석조(佛國寺 石槽), 보물,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이것은 장방형의 돌출된 물통(長方形石槽)으로 원래 위치가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크기는 가로 265 cm, 높이 56 cm이다. 석조의 바깥면은 도드라진 띠와 안상(眼象)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구부분은 네 모서리와 장변(長邊) 중앙에서 안쪽으로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내부바닥 중앙부에 타원형 공간을 마련하고 그 장축 양쪽 둘레에 작은 연꽃을 이중으로 새기고, 양쪽 머리에는 큰 연잎 속에 연꽃을 새긴 독특한 모습이다. 내부 장벽 중앙부에 바닥의 것과 같은 연꽃 무늬를 새기고 그 양 옆으로 다시 다른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바닥 가운데에 있는 타원형을 연꽃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보문사지 석조(보물)

경북 경주시 보분동 보문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石槽, 보물)이다. 큰돌을 파서 만든 물통로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거나 물을 마시는데 주로 사용된다. 특별한 장식을 새겨 놓지 않았으며 아랫단에 물을 빼는 구멍이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보문사지 석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보문동 일대는 신라를 건국한 경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명활산 고야촌이 있던 지역이다.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비부가 되었으며 설(薛)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설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총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 마을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가 남아 있는 보문사지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도심 방향으로 보이는 낭산과 황복사지 절터>

경주 보문리 석조(慶州 普門里 石槽, 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
이 곳은 신라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낭산(狼山)과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이에 형성된 들판으로, ‘보문사(普門寺)’라고 새겨진 기와의 발견을 통해 절 이름이 알려졌다. 부근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金堂址)와 동서의 목탑터,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이 남아 있다. 이 돌 물통(石槽)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아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로로 놓인 직육면체의 돌 안쪽을 파냈으며 외부와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불국사(佛國寺) 안에 있는 4개의 돌 물통을 모두 장식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이 보문리 돌 물통은 뒤편 북쪽 가운데 아랫단에 물을 빼기 위한 구멍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 유물들과 관련지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위키백과, 2021년

[부여박물관] 사비기 백제 때 사용되었던 석조

국립부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들이다. 주로 사비기 백제 때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석조들로 현존하는 석조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물들이다. 당시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사적 428호)을 비롯하여 부여 동남리, 현북리, 용정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 형태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의 것들도 있으며, 석연지로 추정되는 둥근 형태의 석조들도 있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만든 큰 구조물로 그 재료의 견고성 등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석조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불국사 석조는 지금도 물을 담아두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6~7세기, 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석조이다. 배모양을 하고 있는 이 석조들은 사찰에서 전해오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석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 높이가 낮고 배모양을 하고 있는 또다른 석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 높이가 낮고 특이한 형태의 석조이다. 한쪽편에 석조로 물이 유입되는 연결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유적(사적 428호). 다수의 석조들이 발견되었는데, 궁궐에서 연꽃을 키웠다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석조 (보물 194호). 사비기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지에서 있었던 것으로 연꽃을 키웠던 석련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동남리, 정사각형 평면을 하고 있는 석조로 높이가 낮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6~7세기, 부여 현북리, 높이가 낮고 크기도 작은 석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둥석조, 6~7세기, 부여 용정리, 둥근 원형 평면을 하고 있는 석조이다.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석조(보물 194호)로 연꽃을 키우는 석련지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

 

 

부여 석조(보물), 백제 왕궁에서 연꽃을 심었던 곳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석조(보물 194호)이다. 이 석조는 사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부여현 관아 동헌 앞에 놓여 있었다. 사찰 입구에 놓여 있던 손을 씻고 샘물을 받아 먹던 석조와는 형태나 용도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工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가 형태를 하고 있는데 장식은 없지만 풍만하면서 깔끔한 곡선미를 보여 주고 있다. 궁궐 내 연꽃을 기르던 석련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처를 모시는 사찰처럼 성역화된 당시 궁궐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던 유물로 생각된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만든 큰 구조물로 그 재료의 견고성 등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석조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불국사 석조는 지금도 물을 담아두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석조(보물). 사비기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지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이다. ‘工’ 자 형태의 받침돌 위에 물을 담아두는 석조를 올려 놓고 있다. 샘물을 담아두는 사찰 석조와는 달리 연꽃을 키우던 석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부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부여 석조.

OLYMPUS DIGITAL CAMERA이 석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부여 동헌 마당에 놓여 있었다.

부여 석조, 보물 194호, 부여 관북리 추정 왕궁터
이 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工자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태의 석조가 올려져 있다.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되어,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조의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세로줄을 새기고 그 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보인다. 글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으로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국보 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긴 것과 같은 것이다. (부여박물관, 2012년)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