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석조불상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조불상

충남 논산시 관촉동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이다. 고려전기 석조불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높이 18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고려 광종 때 (968년경) 왕실의 후원을 받아 승려 조각장 혜명이 제작하였다.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세련되고 정밀한 조각수법을 자랑하는 통일신라 때와는 달리 투박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토속적인 불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굴이 몸통에 비해 크고, 전체적인 균형미가 떨어지지만, 위압적이면서도 토속적이고 자비로움보다는 강하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고려초기 미륵불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머리에는 높은 관을 쓰고 그 위에 보개를 올려 놓고 있으며, 네 모퉁이에는 쇠방울을 달았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묘사된 얼굴에는 눈.코.입이 크고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귀는 거의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표현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부분>

천의(天衣)는 몇가닥의 옷주름이 얕게 조각되어 있고, 두손은 몸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몸체 부분>

‘은진미륵’으로 불렸던 이 불상은 관촉사 경내 안쪽편 언덕 아래에 세워져 있다. 몸통에 비해 머리부분이 상당히 크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석불입상이다. 관촉사는 황산벌 넓은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언덕에 석축을 쌓아서 절터를 조성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상이 세워진 관촉사 경내>

OLYMPUS DIGITAL CAMERA<불상 얼굴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OLYMPUS DIGITAL CAMERA
<아래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
<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석탑, 석등, 불상이 일렬로 배치된 모습>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논산시 관촉동
높이가 18m에 이르는 국내 최대 석불로서, 보통 ‘은진미륵’이라 불리고 있다. 미륵불은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에 그 때까지도 못다 구제된 중생들을 위해 나타난다는 미래불로 대개 산이나 들 등 바깥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상은 몸통에 비해 특별히 얼굴이 강조되어 전체적인 균형미는 약간 떨어지지만 불상 전체에서 느껴지는 강한 원초적인 힘은 고려시대 초기에 이 지방에서 많이 유행하는 불교예술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얼굴과 손에 집중된 표현양식은 마치 토속적인 신상을 보는 듯 위압적이며,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강한 메시지와 신비감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1006)에 완성하였으며, 혜명대사가 대형 석불을 만들어 세울 수 없어 걱정할 때 사제촌에 나타난 동자들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기뻐하며 돌아와 불상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거석불의 대표적인 예로 인근에 있는 부여 임천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는데, 이 두 불상은 고려시대에 충남지역에서 크게 유행하던 불상의 양식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관촉사 불상의 건립은 이후 충남 각 지역에서 거불상의 조성에 큰 계기가 된 듯 하다. (안내문, 논산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논산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경북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입상(보물)이다. 높이 3.46m의 거대한 석조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조각해 놓고 있다. 옷주름, 적절한 신체의 비례, 경직되지 않은 얼굴모습 등 통일신라 불상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불상과 함께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다.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20221130_01<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머리에는 크고 넓은 육계가 솟아 있으며 네모반듯하고 풍만한 얼굴, 반쯤 뜬 눈, 넓적한 코, 웃는 입이 표현되어 있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은 얼굴에서 통일신라 말기 불사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20221130_02<불상 얼굴>

신체는 얼굴에 비에서 작은편이 짧은 목, 좁은 어깨, 짧은 팔 등 평판적인 가슴과 함께 위축된 모습을 보여준다. 옷은 허벅지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는데 둔중하고 도식적은 옷주름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20221130_03<불상 신체>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20221130_07
<정면에서 본 모습>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20221130_05
<옆에서 본 모습>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20221130_06
<뒤에서 본 모습>

주택가에 있는 절터에는 석조여래입상(보물)과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다.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와 우물 등 유구와 기와, 청자접시 등이 발견되었다.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20221130_04<절터>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은 높이 3.46m의 석불로, 보물인 동본리 삼층석탑과 함께 있다. 발견 당시에는 불상의 무릎 아래가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1960년 발굴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석불은 큰 얼굴에 길게 감은 눈, 넓적하고 짧은 코, 미소를 띤 입이 적절하게 잘 표현되어 있어 인상이 자비롭고 온화하다. 광배가 있었던 흔적은 없다. 전체적으로 큼직한 머리와 몸, 경직되지 않은 얼굴과 양다리에 있는 긴 타원형의 옷주름 등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 양식을 이으면서도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도 함께 나타난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대표적인 통일신라 사방불

경북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굴불사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사면불상(보물)이다. 이 불상은 큰 바위 에 불상을 새겼는데 서쪽에는 아미타여래, 동쪽에는 약사여래, 북쪽에는 미륵보살, 남쪽에는 석가모니를 새긴 사방불(四方佛)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8세기에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했을 때 염불소리가 들려 땅을 파보니 큰 돌이 나와 4면에 불상을 새기고 불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입체감과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뺴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부족하며 조화를 잘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사방불(四方佛)이란 각 방위마다 불국토가 있고 그곳에 상주하며 네방위를 패표하는 부처를 형상화한 불상이다. 불국토 신앙과 오악숭배사상, 호국사상 등이 결합되어 통일신라 떄 성행하였다. 불교경전엔 약 5세기경에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시대와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서쪽은 아미타여래 삼존상을 표현하고 있다. 아미타여래는 바위에 몸통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를 조각해 올려 놓았다. 좌우에는 별도로 보살상을 조각해 세워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아미타여래 삼존상>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는데 양발을 무릎위에 올리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과 신체가 세련되고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약사여래좌상>

OLYMPUS DIGITAL CAMERA<약사여래 얼굴>

북쪽면 오른쪽에는 입체감있게 조각한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팔이 달린 관음보사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면 관음보살과 미륵보살>

남쪽면에는 석가여래삼존상을 표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상과 가운데 본존상 머리를 떼어갔다고 한다. 4면에 새겨진 불상 중 조각수법이 제일 나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면 석가여래삼존상>

OLYMPUS DIGITAL CAMERA<굴불사지 절터와 석조사면불상(보물)>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보물), 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 4
이 불상은 경주의 북쪽 산인 소금강산(小金剛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약 3m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 (四方佛)형태이다. 불상은 서쪽면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동쪽면에는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남쪽면에는 삼존입상(二等立像)이, 북쪽면에는 보살상(菩薩像) 두 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북쪽면 보살상 중 한 분은 얼굴이 열하나, 팔이 여섯 달린 관세음보살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불렀다고 한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고(金鼓)에는 굴석사 (石寺)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안내문, 2012년, 경주시청)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청도 박곡리 석조여래좌상(보물),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이다. 운문사와 함께 서쪽 대비갑사로 창건된 사찰인 대비사로 들어가는 계곡 입구 마을에 모셔져 있다. 화재 등으로 광배와 대좌, 불상 등이 큰 손상을 입어 얼굴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신체는 가슴은 당당하지만 허리는 잘록하고 표현되어 있다. 옷은 몸에 밀착되어 있으며 옷주름도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인 양감이 풍부하면서 세려되게 표현되어 있으며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뛰어난 편이다.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청도 박곡리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203호05-20200106
<청도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따르고 있는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이다. 대좌는 팔각형을 기본으로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꽃무늬를 새겨놓고 있다.

청도 박곡리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203호01-20200106얼굴 형체를 알 수 없으며 훼손된 부분이 많지만 전체적인 신체비례나 세부적인 표현이 뛰어난 작품이다.

청도 박곡리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203호03-20200106불상은 대비사 계곡 입구 마을에 건물을 세워 그 안에 모셔져 있다. 그 앞에는 삼층석탑이 놓여 있어 작은 사찰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청도 박곡리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203호04-20200106마당 한쪽편에 있는 석재. 화재로 크게 훼손된 광배처럼 보인다.

청도 박곡동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203호,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이 불상은 높이 276 cm의 석조 석가여래좌상으로 대비사 골짜기 입구의 보호각 속에 모셔져 있다. 몇차례의 화재와 인위적인 파손을 당해 원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도 예술적 안목과 세련된 솜씨를 느낄 수있다. 얼굴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도 박력있는 모습, 힘찬 어깨와 당당한 가슴, 몸에 밀착된 법의 등에서 강건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수법을 볼 수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분된 8각 연꽃모양으로 당대의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은 석굴암 불상과 그 양식이 비슷한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이다. 부석사 부근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 온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를 표현한 불상이다. 팔각형의 대좌위에 올려져 있는데 대좌에는 향로와 7사자, 보살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장식적인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0221029_001<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DSC08622<불상이 올려진 석조대좌>

불상이 모셔진 자인당. 인근 절터에서 옮겨온 비로자나여래를 표현한 2기의 불상과 함께 모셔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불상이 모셔진 자인당>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0221029_003<자인당 내부>

자인당(慈忍堂)에 있는 세 분의 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인데, 보물 제220호로 지정된 불상은 세 분의 석조여래좌상 중에 양편에 모셔진 두 분의 비로자나불상이다. 대좌와 광배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8각의 하대석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중대석에는 앉아 있는 형태의 불상과 연꽃 등을 공양하는 보살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동쪽 불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으며, 서쪽 불상은 동쪽 불상보다 좀 더 당당하며 신체를 표현하는 선들이 부드러운 편이다. 세분의 불상 중에서 가운데 모셔져 있는 불상은 2010년 2월 24일 보물 제1636호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이다.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내의),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의 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사자, 합장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 불상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다. 세 불상 모두 부석사 인근의 절터에서 발견되었으며 조각수법이 같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동일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