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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석조, 사찰 입구 물을 담아두는 그릇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남아 있는 석조이다. 법주사 승려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큰 석조 중 하나이다. 사각형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다. 석조는 식수를 담아두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찰입구에 놓여져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 손을 씻으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사원 입구에서 비슷한 기능을 하는 분수나 석조가 놓여 있다.

법주사(法住寺)는 삼국시대 진흥왕 때 (55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혜공왕 때(776년) 승려 진표가 크게 중창함으로써 미륵신앙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오늘날 금동미륵대불이 있는 곳에는 오랫동안 금동대불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대웅전에서는 옛 금당인 장륙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까지 신앙의 중심이었던 목탑도 유일하게 남아 있다.

보은 법주사 석조,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바닥부터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의 벽체에는 아무런 무늬 장식이 없이 단조로운 형태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는 모를 깎아서 부드러운 느낌을 내고 있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쪽은 23cm, 짧은쪽은 34cm 두께를 조정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아랫부분에 11cm의 구멍이 있어 실제로 물을 담아두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모통이부분 일부의 손상 흔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법주사 석조.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손을 씻고 목을 축이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주사 석조는 사찰 경내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개울 건너편으로 길이 있어 구석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일신라 때는 사찰을 들어오는 입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아래쪽에 물이 나오는 작은 구멍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내부.

SANYO DIGITAL CAMERA2008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공주 대통사 석조(보물), 백제때 만들어진 석조

공주 박물관에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중동 석조(보물)와 반죽동 석조(보물)이다. 이 석조는 백제 성왕 때 세워진 대통사 절터에 남아 있던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두개의 석조는 조각수법과 크기가 거의 비슷하여, 한 건물 앞에 세워두기 위해 한쌍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다. 가장자리에는 한가닥 띠를 돌리고 중앙에는 2줄의 띠가 새겨져 있다. 중동석조(보물148호)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중동초등학교 마당에 오랫동안 있었기때문 ‘중동석조’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대통사는 공주시 반죽동에 있던 사찰로 『삼국유사』에는 신라 법흥왕이 양나라 무제를 위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성왕7년(529)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이후에도 대통사는 공주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사가 있던 반죽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공주읍치의 중심지였다. 반죽동 절터에는 통일신라때 만든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공주박물관 입구 야외전시실에 전시되이 있는 대통사 석조(보물)>

삼국시대 공주를 사찰이었던 대통사 절터에 남아 있던 것들이다. 비슷한 크기와 조각수법들을 하고 있어 원래 한 건물 앞에 세워두기 위해 1쌍으로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시 반죽동 대통사 절터에 남아 있던 반죽동 석조(보물149호). 굽이 높은 사발을 확대한 모향으로 바닥돌 외에는 거의 둥근 구조이다. ㅇ

OLYMPUS DIGITAL CAMERA 받침 기둥은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는데, 공주 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 같은 모양이라고한다. 전형적이 백제 양식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석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깨어진 부분도 있고, 새겨진 조각들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큰 화강석을 파서 만든 석조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통사 석조 중 공주 중동초등학교에서 옮겨와 중동석조(보물148호)라 불리는 석조.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 위해 옮겼다고 한다. 이때 받침돌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가운데 안상처럼 연꽃무늬를 선명하게 새겨놓은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면에 새겨진 연꽃무늬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뒤쪽에서 본 모습. 말구유로 사용하기 위해 윗부분을 손상시켜 놓은 것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박물관 대통사 석조.

공주 대통사 석조, 보물 148호, 149호
석조(石槽)란 돌을 파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이다. 절에서 물을 담아두거나 큰 행사가 끝난 후 그릇을 씻을 때 쓰는데, 흔히 연꽃을 담아 장식한다. 이들 석조는 대통사(大通寺, 공주시 반죽동 소재)의 강당터 앞쪽에 나란히 있던 것으로, 크기만 다를 뿐 양식이나 조각수법은 거의 같다. 통일신라의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둥근 몸체,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등 백제문화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각각 반죽동석조(보물149호, 높이 75cm), 중동석조(보물148호, 높이 72cm)로 불리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