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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점말동굴, 남한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구석기시대 동굴유적

충북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에 있는 점말동굴 유적이다. 1973년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시대 동굴 유적이다. 석회암지대에 형성된 동굴로 큰 동굴을 중심으로 6개의 가지굴이 있다. 동굴은 입구 너비가 2 ~ 3 m이며, 길이는 12 ~ 13 m 정도이다. 발굴.조사 결과 전기.중기.후기 구석기 문화층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털코뿔소.동굴곰,짧은꼬리 원숭의 등의 동물화석과 석기.뼈연모.식물화석 등이 확인되었다. 동굴에는 법당의 들보를 박았던 흔적이 있으며, 석조탄생불이 출토되어 석굴사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벽면에 있는 새겨진 글자를 통해 삼국시대 화랑들의 수행처로 추정되기도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점말동굴 유적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구석기시대 동굴유적이다. 석회암지대에 형성된 자연동굴으로 구석기시대 이래 오랜 세월 사람이 거주했으며, 삼국~통일신라 때에는 석굴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 입구. 이곳에서 주차한 후 약 700 m 정도 걸어가면 유적지를 찾을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 입구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 앞. 석회암지대에 형성된 자연동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은 석회암 동굴이며 30 m 높이의 석회암 바위벽이 동굴을 둘러싸고 있다. 동굴내부는 주굴인 용굴과 6개의 가지굴로 이어져 있으며, 동굴의 규모는 입구너비 3 m, 전체 길이는 현재 확인된 것이 12 ~ 13 m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 윗쪽에 있는 가지굴.

OLYMPUS DIGITAL CAMERA윗쪽에 있는 비교적 큰 가지굴.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크기의 가지굴.

OLYMPUS DIGITAL CAMERA점말동굴에서 출토된 코뿔소 앞발뼈(단양 수양개유적 사전시관, 2015년). 이곳에서는 고뿔소뼈, 사슴뼈, 하이에나뼈 등 동물뼈와 식물화석, 뼈연모 등이 확인되어 구석기시대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불곰 위턱뼈, 아래턱뼈(중앙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사슴머리뼈(중앙박물관, 2015년)

구석기 발굴 성과
구석기시대 유물로는 원숭이.코뿔소.사슴.곰.하이에나 등의 동물화석, 나뭇잎.열매껍질.나무숯.꽃가루 등의 식물자료와 뼈연모, 장신구 등이 나왔다. 발굴조사 결과 현재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짐승들이 점말동굴 주변에 살았음을 알려주며, 지층의 토양분석을 통해 얻어진 꽃가루와 식물자료를 통해 당시 식물상과 자연환경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동굴 앞 광장. 점말동굴에서는 석굴사원이 있었던 흔적 등이 확인되었으며, 화랑들이 다녀간 것으로 추정하게 하는 글자가 동굴 앞에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굴 앞 광장 발굴과 암각자 조사 내용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점말동굴 유적 돌담. 2012년 점말동굴 앞마당을 발굴조사하면서 발굴된 돌을 보존하기 위하여 동굴 진입로에 쌓아 현재의 돌담 모습이 되었다.

제천 점말동굴 유적
제천 점말동굴은 천연 석회암 동굴로 마치 용이 수평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뚫려 있어 용굴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이 동굴을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구석기 유물로는 남한에서 최초로 발굴하였다. 동굴의 쌓은 층은 아래부터 3층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아래층은 중기 구석기 ~ 6만 6천년 전에, 가운데 층은 후기 구석기 ~ 1만 3천년 전에, 가장 윗층은 신석기 ~ 7천년 전에 쌓인 층으로 조사되었다. 각 층에서 꽃가루나 사슴, 사향노루, 노루 등 짐승뼈 화석들 및 뼈연장이 많이 나오고 있어 사냥이 왕성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차돌과 석회암 판자돌을 쓴 석기나 토기조각들이 나왔다. 동굴의 전면에 법당의 들보를 박았던 흔적이 있는데 동굴에서 출토된 석조탄생불(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 추정)과 연계가 있음을 알 수 있어 이곳에 절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벽면에 쓰여진 각자는 붉은 칠이 되어 있는 글로 ‘조랑도’, ‘정랑도’ 등 화랑과 관련된 글자임을 알 수 있어 화랑의 수행처로 추정되기도 한다. 2001년 2월 2일 점말동굴 유적을 구석기 유적으로 인정하여 충청북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제천시청, 2017년
  2. 중앙박물관,2015년
  3. 단양 수양개 전시관, 2015년
  4.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지(사적),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선사유적지(사적)이다. 한반도에서 조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지 중 한 곳으로 기원전 6,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동해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작은 석호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낙산사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4 km 정도 떨어졌다. 유적지에는 당시의 집터와 복원한 움집, 유물전시관 등이 있는데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주변 지형과 자연환경 등을 살펴보면서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1977년 호수를 매꾸어서 농지로 전용하는 공사중에 다랑의 석기와 토기 조각들이 출토되면서 유적지의 존재가 알려졌다.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집터 11기, 불피웠던 자리 5기, 돌무지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어로생활을 했던 낚시도구, 돌칼 등과 가장 오래된 토기 중 하나인 덧무늬토기 등이 있다. 함경도와 연해주 등에서 살았던 신석기인들과 그 기원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성 문암리, 속초 조양동, 강릉 초당동과 함께 동해안을 대표하는 선사유적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양 오산리양양 오산리 유적지(사적).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지 중 한곳이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동해바다와 만나 석호 주변 늪지에 위치하고 있다. 남대천 연어를 쫓아서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에 재현에 놓은 집터, 불피웠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에 재현해 놓은 움집. 14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는데 원형에 가까운 평면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움집내부. 가운데 불을 피운 흔적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움집.

OLYMPUS DIGITAL CAMERA야외에서 불을 피웠던 자리를 재현해 놓고 있다.

신석기인의 움집(수혈주거)
신석기시대 움집의 평면형태는 둥글거나 혹은 네모서를 줄인 네모꼴이 대부분이다. 지름 또한 한 변의 길이가 5~6 m 정도로 면적이 20~30 m² 정도였으며 대략 4~5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움집의 바닥은 진흙을 깔아 다졌으며, 그 위에 마른 풀이나 짐승 가죽 등을 깔고 생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안 가운데의 화덕자리는 음식물의 조리뿐만 아니라 실내를 따뜻하게 하거나 밝게 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유적인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14기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대체로 직경 6 m 가량의 원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모래로 된 바닥에는 5 cm 정도의 두께로 점토를  깐 다음 불을 놓아 단단하게 처리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좁고 긴 돌을 여러 개 돌려 만든 네모난 화덕자리가 1~2개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5기의 야외노지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의 돌들은 오랫동안 불을 맞아서 깨어지거나 갈라진 채로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일종의 공동취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지의 형태는 대부분 1.5~3.4 m 의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20~30 cm가량 바닥을 파고 그 위에 여러겹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움집터는 오산리 유적을 비롯하여 서울 암사동, 충북 쌍청리, 부산 동삼동, 황해도 봉산 지탑리 등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들 움집터는 한 유적에 몇개씩 모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중에는 서로 겹쳐 있는 예도 있어 한 마을에서 여러 시기에 걸쳐 새로운 집을 지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양양군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일대는 석호가 늪지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경포호나 영랑호 등과는 달리 퇴적이 많이 진행되어 늪지처럼 보인다. 바다에서 회귀한 연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어종의 물고기와 철새들이 많았으며, 신석기인들이 살기에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이 곳은 쌍호라고 불리우며 농지로 변한 부분을 포함해서 상당히 넓은 석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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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양양 오산리,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토기인 덧무늬 토기이다. 어로생활을 하던 동해안, 남해안 신석기인들이 사용하던 토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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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양양 오산리.

토기의 출현
토기는 인간이 흙과 불을 이용하여 만들어 낸 최초의 발명품이다. 토기 발명 이전에는 나무와 갈대, 가죽 등으로 그릇을 만들어 식량을 담거나 운반하는 데 이용하였다. 새로이 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음식물의 가공법이 발달하였고, 음식물의 종류도 많아졌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는 기원전 6,000년 무렵의 덧무늬 토기로 알려져 왔다. 덧무늬토기는 겉면에 진흙 띠를 붙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기원전 8,000년 무렵의 새로운 토기가 발굴됨에 따라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시작 연대가 앞당겨지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 누른무늬토기는 기원전 4,000~3,000년 무렵에 사용한 토기로 아가리 주변에만 무늬새기개로 누르거나 벌려서 무늬를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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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찍힌 토기,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빚는 방법으로는 손빚기법과 테쌓기법, 서리기법 등이 있다. 토기를 빚을 때는 받침대로 고래 척추뼈나 넓적한 돌, 원반형 토제품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 토기 받침대와 토기 바닥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받침대 위에 넓적한 나뭇잎을 깔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토기 바닥면에 나뭇잎 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가락바퀴, 3. 양양 오산리, 4. 강릉 하시동, 신석기인들의 어로생활을 보여주는 유물로 그물을 꿰었던 가락바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물토우, 양양 오산리

OLYMPUS DIGITAL CAMERA인물토우, 양양 오산리

OLYMPUS DIGITAL CAMERA유적도 동쪽에 해안 모래언덕에 위치한 솔비치콘도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지, 사적394호,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이 유적은 기원전 6,000년 이전부터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목탄은 측정연대가 지금으로부터 8,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초기 단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77년 처음 발견된 후 1987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6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집터의 모양은 신석기 시대의 다른 유적이 움집인 것과는 달리 바닥이 둥근 형태의 지상가옥으로 밝혀졌다. 출토 유물 중, 토기는 아가리 부분에만 덧 띠를 붙이거나 눌러찍기로 무늬를 낸 납작바닥의 토기가 대표적이며, 석기는 이음낚시도구, 돌칼 등 해양어로 생활에 쓰인 도구가 많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양양군청, 2011년)

<참고문헌>

  1. 양양군청
  2. 중앙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문화재청

고성 문암리유적(사적),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지

강원도 고성군 죽암면 문암리에 있는 선사유적지(사적)이다. 발굴.조사결과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유물들이 포함된 문화층과 주거지, 야외 노지, 경작지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전기 순수무문양토기, 융기문토기, 침선문토기, 결합식 낚시어구, 옥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경작지인 밭은 돌괭이, 뒤지개 같은 석기들과 탄화곡물 등으로 추정해왔던 신석기시대 농경생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인된 신석기시대 농경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아무르강과 동북3성,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서 형성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적은 거의 없지만 사적으로 지정된 중요한 유적지로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자연환경 등을 살펴보는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유적지는 동해안에서 내륙쪽으로 400 m 떨어진 구릉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유적이 있는 고성 죽왕면 일대는 동해안을 대표하는 석호인 영랑호와 송지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지가 넓은 지역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어로와 농경생활을 같이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관동팔경 중 한곳인 청간정이 인근에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성 문암리유적(사적). 양양 오산리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BC 5,000 ~ 3,000년경) 신석기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차 발굴.조사(2010~2013년) 당시의 모습이다. 3차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 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인 ‘밭’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안내문.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당시 모습. 여러곳에 흙을 쌓아 놓고 발굴작업 중임을 표시하는 장애물을 설치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주거지 등 유구가 확인되는 곳으로 보이는 발굴 현장.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텃밭에도 발굴.조사를 위해 울타리를 세워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주변 농경지 여러곳에 발굴.조사를 위해 울타리를 세워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서 출토된 돌칼. 농경생활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다른 지역에서 출토되는 반달모양 돌칼과는 약간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결합식작살, 1.강원 고성 문암리, 2.복제품,  어로생활을 주로 했던 한반도 신석기인들이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작살이다. 자루에 노끈을 연결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바리, 신석기시대, 강원 고성 문암리,

덧무늬토기는 기원전 6,000~4,000년 무렵에 사용된 것으로 겉면에 진흙 띠를 엇붙여 무늬효과를 낸 것이다. 남해안의 여러 조개더미에서 빗살무늬토기층 아래에서 출토되고 있어 빗살무늬토기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덧무늬 토기는 강원도 고성, 양양 등 동해안과 전남 여수 등 남해안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봐서는 해안가에서 어로생활을 하던 신석기인들이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바리, 신석기시대, 고성 문암리

OLYMPUS DIGITAL CAMERA바리, 신석기시대, 고성 문암리

OLYMPUS DIGITAL CAMERA바리, 신석기시대, 고성 문암리

OLYMPUS DIGITAL CAMERA멀리서 보이는 문암리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문암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남쪽 백도항으로 가는 길. 유적지에서 3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당시 사람들이 어로생활을 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백도항.

<참고문헌>

  1. 국립문화재연구소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문화재청

예산 동서리 유적, 고조선시대 서남지역 지배계층 무덤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에 있는 고조선시대 무덤유적이다. 예산과 청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와 예당저수지가 있는 무한천이 내려다 보이는 봉수산 능선에서 무덤이 발견되었다. 고조선과 삼한시대 한반도 서남해안 해상교통로의 거점에 자리잡았던 유력 세력의 무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변에는 아산 궁평리, 백암리, 예산 동서리, 당진 소소리 등 고조선과 삼한 초기의 유적지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백제 부흥운동이 있었던 대흥 임존성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들에 의해 유물이 발견되어 부여박물관에서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무덤 구조의 일부만 확인되었다. 무덤에서는 한국식 동검, 거친무늬 거울, 나팔형 동기, 청동거울, 원개형 동기, 검파형 동기 등이 출토되었다. 나팔형 동기는 이곳에서만 출토되었으며 대쪽모양의 검파형 동기는 이곳과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에서만 출토된 유물이다. 출토된 유물들로 볼 때 대전 괴정동이나 아산 남성리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산 동사리 유적이 있는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유적은 백제 부흥이 있었던 대흥 임존성 아래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대흥군 관아. 이 곳은 조선시대 대흥군 관아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옛 동헌 건물이 남아 있다. 시골마을 작은 면소재지이지만 고대 이래로 주요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예산 동서리유적 11-20170422예당호 저수지. 예산과 청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가 있는 무한천을 막아 조성한 저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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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형 동기, 예산 동서리, 중앙박물관,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2점 출토되었다. 말머리를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형동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쪽모양동기, 예산 동서리, 부여박물관. 대쪽모양을 하고 있는 이형동기이다.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에서도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그 중 1점에는 손바닥 모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아산 남성리에 출토된 동기에 새겨진 사슴무늬와 함께 샤머니즘적 성격을 가진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민무늬거울, 예산 동서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잔무늬거울(예산 동서리), 거친무늬거울(부여 구봉리, 예산 동서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뚜껑모양 동기, 예산 동서리, 부여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뚜껑모양 동기, 예산 동서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식동검, 예산 동서리, 부여박물관, 총 9점이 출토되었는데, 요령식 동검에 비해 가늘게 만들어 졌다.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식 동검, 예산 동서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롱옥, 예산 동서리,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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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간토기(예산동서리, 부여 구봉리), 부여박물관

충남 예산 동서리 유적
한국식 동검, 거친무늬 거울, 검파형.원개형.나팔형 동기, 대롱옥.둥근옥, 검은간토기, 돌화살촉 등이 출토된 돌무지널무덤이다. 나팔형 동기는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일한 예로 중국 랴오닝 지역 장가와자 유적 출토품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출처>

  1. 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년
  2. 중앙박물관
  3. 부여박물관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부여 송국리 유적(사적), 송국리형 토기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지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 있는 송국리 유적(사적)이다. 부여 송국리는 부여와 논산의 경계가 되는 지점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송국리형토기를 비롯하여 동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된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이다. 1975년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하여 60여 기의 움집과 돌널무덤.독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마을 둘레에는 나무울타리를 둘렀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불탄 쌀과 농공구, 요령식 동검, 청동도끼 거푸집 등을 통하여 본격적인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의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에는 벼농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물로 이 곳 송국리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 유적지는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기때문에 재현해 놓은 움집 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유물은 볼 수는 없지만 청동기시대 마을이 형성된 지역적 특징과 여러 모형들로 선사시대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부여 송국리 유적(사적 249호) 입구. 넓은 평야지대인 논산과 부여.공주가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유적지는 해발 20~60 m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원형 또는 방형의 움집, 목책을 꽂았던 자리, 각종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동쪽편. 전시관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선사 주거유적지 주변의 넓은 평야. 논농사가 발달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큰 강은 흐리지 않지만, 북쪽편 계룡산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에서 개천이 흘러와서 금강을 향해서 흘러가는 지역으로 수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 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자 모양으로 생긴 구릉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 형태. 평야 지대에 위치한 낮은 구을으로 양쪽으로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모형(부여박물관).

송국리 선사취락지
송국리 일대는 해발 25 ~ 60 m에 달하는 구릉지역으로,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여러가지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야외박물관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유적은 청동기시대 취락 유적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 결과 60 ha나 되는 넓은 지역에 평면이 원형이거나 방형인 집자라와 마을을 둘러싸는 구덩이와 나무울타리, 마뭇가지를 둑에 꽂아 외부로부터 오는 적이나 짐승을 맞았던 녹채 시설같은 방어시설이 확인되었다. 토기를 굽던 가마와 마을의 물을 다루었던 배수로, 저장구덩이도 나타났다. 또 매장시설로는 돌널무덤과 움무덤, 독무덤도 조사되었다. 가까운 산척리에는 고인돌이 있어 이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밖에 백제시대의 움무덤과 독무덤, 토기가마, 고려시대의 움무덤과 돌곽무덤, 조선시대의 움무덤도 확인되었다.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중기, 혹은 후기의 문화에 속하며,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었던 마을 유적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 입구.

SANYO DIGITAL CAMERA전시관 옆에 움집을 재현해 놓고 있다. 대표적인 원형과 네모모양의 움집을 재현해 놓았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에 전시된 송국리집터(원형집자리)

OLYMPUS DIGITAL CAMERA부여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움집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움집 내부 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이제까지 조사된 43기의 집자리유적 중 원형집자리는 14기인데 중심지역은 54지구이다. 크기는 평면의 지름이 3.5~5.3 m, 깊이 0.3~1.5 m로, 크기가 다양한데, 대개 지름이 4.5 m내외이다. 원래 깊이는 1 m가 넘었으나 많이 깎여 나간 듯하다. 바닥 중앙에 길이 1 m정도의 구덩이를 길게 파고 그 양쪽 끝 부분에 기둥구멍을 대칭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인데, 원형이나 방형 집자리에 이런 구조를 가진 것을 송국리형 집자리하고 부른다. 이 구덩이 바깥 양쪽에, 혹은 구덩이 주위에 4개 기둥을 배치한 형식이 있다. 출입구 시설은 보이지 않아 사다리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닥에는 흙을 깔거나 다진 흔적이 있으나 화덕이 보이지 않는다. 층위로 보아 환호나 나무울타리, 방형 집자리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 송국리집터(장방형집자리).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모습이 후대의 주거시설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원형집터보다 연대가 빠르다고 한다. 동시대에 같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기능적인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집터 모형(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원형 집자리보다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집자리는 짧은 변이 3~5 m, 긴 변이 4~7 m, 깊이 0.3 m 정도이며 넓이는 24 ~ 28 m²정도이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을 5 m²로 계산하면 하집에 5~6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 집자리에서 보이는 타원형 구덩이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화덕시설이 명확하지 않고, 출입구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54-2호 집자리에서는 벽면에 판자를 세워 마무리하였다. 54지구와 57지구 조사결과 나무 울타리와 집자리를 짓기 위하여 경사면을 깎아 대지를 마련한 공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형 집자리보다 깊이가 얕아 반수혈 혹은 지상건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층위로 보면 원형 집자리보다 이르지만, 기능의 차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SANYO DIGITAL CAMERA마울 경계와 방어를 위해 설치한 목책. 송국리에서는 약 430 m 정도의 목책이 확인되었다.

청동기마을의 밖에 나무울타리를 세워 영역을 구획한 시설이다. 송국리유적에서는 430 m 정도가 확인되었으며 지름 30 cm가 되는 기둥을 180 cm 간격으로 열을 지어 세우고 나무를 가로질러 고정하고 점토로 벽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책은 방형주거지와 관련된 시설로 여겨진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목책 바깥에 방어를 위해 설치했던 시설인 녹채.

경사진 벽에 작은 나뭇가지를 꽂아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이나 동물들을 저지하는 시설이다. 이 시설은 목책열 밖의 경사면에 지름이 50~60 cm 정도의 비교적 큰 기둥구멍들이 130 cm 간격으로 배치되거나, 작은 기둥은 지름이 10~30 cm로 크기가 다양하며 배열이 불규칙하다. (송국리유적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마을 능선에는 목채 외 참호처럼 U자형으로 구덩이를 파서 만든 환호시설도 확인되었다.

환호시설
54지구와 57지구의 능선에 남동-북서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앞선 시기의 나무 울타리 시설을 파괴하고 지나가고 있다. 구덩이의 단면은 낮은 U자형으로, 너비는 차이가 있으나 2.7~3.8 m, 깊이는 0.9~1.4 m 정도이다. 환호는 원래 적이나 짐승의 침입을 막는 마을의 방어시설이지만, 송국리 경우에는 지형이 많이 깎여 나갔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의 깊이가 낮아 방어보다는 다른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방향이나 지형으로 보아 55지구의 원형 집자리를 둘러싼 유구로 보이는데, 층위에서 보듯이 환호와 원형 집자리가 목책과 방형집자리보다 늦게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솟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이다.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다. 이는 마을 밖의 부정을 막고 마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형태는 긴 장대 꼭대기에 세 갈래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유적 발굴.조사 당시 모습.  1975년부터 모두 11차례의 발굴.조사가 이었다. 유적지에서는 집터,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송국리형 토기를 비롯하여 당시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송국리 일대에서는 이전부터 농사를 짓다가 유물들이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을 비롯한 대학박물관에 신고되었는데, 특히 주목을 끝 것은 1974년도에 요령식동검이 들어 있는 돌널무덤이 발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75년부터이다. 농수산부가 송국리 일대 야산 약 80만 ㎡를 농지를 개간하기 위한 농지확대개발사업을 계획하였는데, 사업 이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현재까지 모두 11차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단편적인 조사에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의 모습을 밝히는데는 어려움이 많다. 이제까지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원형 집자리 14기, 장방형 집자리 26기, 부정형 2기, 미상 1기를 비롯하여 독무덤, 돌널무덤, 나무울타리, 환호 등이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불탄쌀, 부여 송국리, 청동기, 부여박물관

쌀농사의 확인
이삭따는 반달칼이나, 땅을 파는 도구인 홈자귀, 갈판 등이 발굴된 것은 송국리 주민들이 농사를 지었따는 방증자료이다. 특히 54-1호 집자리에서 나온 불탄 쌀은 토기 바닥에 찍혀 있는 볍씨자국과 더불어 벼농사가 이루어진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에 쌀농사가 전해진 경로를 추정해 보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 쌀은 화북지방과 한반도, 일본에서 즐겨 재배한 자포니카라는 짧고 통통한 종류로, 중국 화북지방에서 동북지방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 들어간 전파과정을 말해준다. 송국리 일대에서 논유적을 찾는데 실패했으나, 다른 벼농사 유적의 입지와 매우 비슷하고 구릉 양쪽으로 흐르는 작은 냇가와 저지대, 집자리가 자리한 낮은 구릉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논농사의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세모돌칼(부여 송국리), 반달돌칼(서산 휴암리), 청동기,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갈돌,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낫,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자귀와 홈자귀, 9,11.충남 부여 송국리(1982년 발굴), 대팻날, 10.충남 부여 송국리(1982년 발굴)

송국리형 석기의 특징.
이삭따는 도구로 반달칼이 나왔고, 화살촉이나 석검.석창.환상석부같은 무구, 그리고 생산 및 생활도구로 돌도끼.돌끌.칼.대팻날.흠자귀.숫돌.방추차.갈돌과 갈판.망칫돌 등이 있다. 수화도구들이 많이 나오는 한편, 그물추는 한 점도 없어, 송국리인들이 고기잡이 보다는 농경에 기반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여러 종류의 숫돌이 많이 나와 석기제작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소형의 숫돌이 많은 것은 휴대용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칼판과 갈돌은 신석기시대에 이어 널리 사용된 조리용구였고, 방추차가 많은 점으로 보아 베를 짠 직조기술도 상당히 발달했을 것이다. 불탄나무판자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을 말해준다. 특히 거풋집이 집자리에서 나온 것은 최초의 일로, 초보적이나마 청동기 주조도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토기(Red-burnished pottery),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토기(Red-burnished pottery),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 두귀단지, 부여 송국라,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민무늬토기 바리,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송국리형 토기, 부여 송국리

좁은 바닥에 배부분이 팽창되다가 아가리부분에서 좁아지고 다시 입술부분에서 밖으로 벌어지는 특징적인 토기를 송국리형 토기라고 부른다. 이런 형태를 가진 완전한 토기가 송국리에서 처음 나와서 붙인 이름인데, 요즈음에는 충청남도를 비롯하여 호남지방, 경상도지방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서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20여개소에서 비슷한 토기가 발견되었다. 점토에 장석이나 운모, 고운 모래알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홍토의 바탕흙처럼 고운 것도 있다. 최대 지름이 배 부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불안하기도 하나, 전체 균형이 잘 어울리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 집자리와 더불어 송국리 문화를 대표하는 표식중의 하나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바퀴날도끼(부여 송국리), 청동기시대,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살촉,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21.요령식 동검, 22.칼,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23.끌, 24.옥,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지배자의 등장 
농경사회에서는 개별 가족 단위의 활동을 넘어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노동이 중요해진다. 이에 따라 새로운 농경지를 둘러싼 분쟁이나 잉여생산물의 배분 등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통합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청동검이나 간돌검이며, 달도끼나 별도끼 등도 당시의 사회적 계층이나 권위를 대변하기도 한다. 고인돌의 축조와 같은 마을 지배자의 장송의례는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지배자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농경사회 내부의 크고 작은 갈등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부여박물관, 2012년)

SANYO DIGITAL CAMERA돌널무덤,

51, 52지구 남쪽 경사면에서 4기가 확인되었다. 이중 중심무덤은 요령식 동검이 나온 1호인데, 모두 남북방향으로 일직선상에 자리하고 있고, 구조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일정한 기획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호 무덤은 풍화암반을 파고 바닥에 3장의 판석을 깔아 시상대(주검을 놓는 바닥)을 마련하였고, 넓은 판석을 세워 벽을 만들었다. 그 위에 커다란 한 장의 판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는데, 지상에서는 아무런 표지가 없었다. 주검의 왼팔쪽에서 요령식 동검과 화살총.대롱옥.귀걸이 오이, 허리 부분에 돌칼과 청동 끌이 나왔다. 이 무덤의 집자리와 같은 시기에 속하는데, 날이 비파처럼 생긴 요령식 동검은 송국리 문화와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가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직리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

SANYO DIGITAL CAMERA산직리 고인돌. 송국리유적의 구릉 남단에 위치한 고인돌로서 네 개의 돌기둥을 세워 그 위에 덮개돌을 수평에 맞춰 놓은 형상이다. 하부에 매장구조가 없어 제사를 지낸 제단기능을 가졌던 고인돌로 추정된다.

<출처>

  1. 부여군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