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성곽

서산 해미읍성(사적), 충청병영이 있었던 읍성

충남 서신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해안지역을 침입하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 중 하나이다. 조선 태종 때(1471년)에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옮기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종 때 (1421년)에 완공하였다. 조선후기 효종 때(1652년)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지역 군사 거점이었다. 이후에도 무관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인근지역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70년대 이후 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등 유적지를 재정비하여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과 성문 등 주요 시설들이 잘 남아 있어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읍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1<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해미읍성(사적), 2009년>

해미읍성은 북동쪽의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넓은 평지에 성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1,5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다. 읍성은 서산 천수만 바다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있다. 남쪽으로 해미천, 동쪽으로는 황락천, 서쪽으로는 반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북쪽을 통해 가야산(해발 678m) 주변 산맥과 연결된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 주변 위성사진, 2023년>

 성벽의 높이는 4.9m이며 상부의 폭은 약 2.1m정도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큰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위쪽는 작은 돌을 사용했으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팠으며 주위에 탱자를 돌려 심어 방어를 보완하였다. 성벽 위에 조총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6<해미읍성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6<아래쪽 큰 돌로 쌓은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8<안쪽 흙으로 쌓은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 위>

해미읍성<성벽 바깥 해자>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천수만 바다가 있는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초에 쌓은 읍성의 성문으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옹성은 없다. 출입문은 돌로 쌓은 홍예가 있으며 그 위에 문루를 두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2<진남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7<안쪽에서 본 모습>

진남문은 마차 1대정도가 지나갈 정도이다. 읍성 성문의 평균적인 도로폭으로 보인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5<홍예>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4<성문 앞에 세워진 공덕비>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2009년>

성문 안쪽에는  1491년(홍치 4년)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축성연대를 기록해 놓은 글씨>

해미읍성은 조선초에 쌓은 읍성으로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천수만 바다를 향하고 있는 서남쪽에 2곳에 치성을 두고 있다. 규모는 약간 큰 편으로 포대를 설치할 수 있는 규모이나 이를 위한 방어시설은 없고 누각만 올려져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3<진남문 서쪽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문루 옆 성벽과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진남문과 성벽>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성벽과 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과 주변 성벽>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안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옆 성벽에서 보이는 관아와 청허정이 있는 동산>

SANYO DIGITAL CAMERA<서남쪽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문루>

서문은 1974년 읍성을 정비할 때 복원되었다. 서문에는 지성루(枳城樓)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었던 사실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에 옹성이나 치성 등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문>

SANYO DIGITAL CAMERA<서문 남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4<서문과 주변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0<안쪽에서 본 서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1<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9<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2<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3<북서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8<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0<북동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2<동문>

SANYO DIGITAL CAMERA<동문 문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3<동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5<동문 남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4<동문 남쪽 성벽>

읍성 내부에는 해미읍성이 폐지된 후 관아와 많은 민가들이 모여 있다. 객사는 초등학교로, 동헌은 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1970년대 읍성 복원공사를 하면서 민가들은 읍성 바깥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민가 몇채가 복원되어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9<진남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읍성 내부>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6<읍성 내부>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0<해미현 관아>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1<동헌>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2<객사>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4<동문에서 본 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5<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읍치>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7<청허정>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6<청허정에서 멀리 보이는 천수만 바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에서 보이는 민가>

SANYO DIGITAL CAMERA<민가>

서산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시대 충청도의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를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 한다. 이곳은1652년(효종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서울 숭례문(국보), 한양 도성의 정문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숭례문(국보)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이자 남문에 해당되는 성문으로 남대문이라 불리기도 했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때(1396년) 처음 축조되었으며, 세종 때(1447년) 개수공사를, 성종 때(1479년) 문루와 홍예를 헐고 크게 다시 지었다. 2008년에도 방화로 큰 피해를 입고 다시 수리하였다. 숭례문은 화강암으로 쌓은 기단위에 건립되었는데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우리나라 성문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출입문으로 홍예문을 두고 있으며, 바깥쪽 옹성을 쌓지는 않았다. 문루는 2층 누각형 건물인데 웅장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다포계이다. 단청은 적(赤),녹(綠)의 두 색을 많이 사용했다. 최근에 화재로 문루가 소실되었다고 하나 원래 있던 석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문루를 수리하였다고 하여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성곽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 숭례문(국보), 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2000년대 이전 숭례문은 차도로 가로막힌 교통섬이었으나, 인도가 연결되면서 명실상부한 성문이 되었다. 2008년 방화로 소실된 문루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으며 주변 성곽도 일부 복원했다.

OLYMPUS DIGITAL CAMERA<2006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숭례문 문루는 누각 형태로 되어 있는 읍성 성문과는 달리 방어를 위해 나무로 만든 총안을 두고 있다. 붉은색과 녹색을 위추로 한 단청에 다포계공포를 사용하고 있지만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다. ‘숭례문’이라 적힌 현판은 세로쓰기로 적혀 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문루와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방향>

OLYMPUS DIGITAL CAMERA<추녀마루 잡상>

좌우 성벽은 조선초기에 쌓에 옛 석축이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복원한 부분도 있다. 바깥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과 달리 옹성을 두지 않고 조선초기 한양도성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성문은 아치형으로 석축을 쌓은 홍예문으로 웅장하고 견고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내부 천장>

OLYMPUS DIGITAL CAMERA<성문(안쪽)>

OLYMPUS DIGITAL CAMERA<큰돌로 쌓온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 복원한 부분>

숭례문을 들어서면  경복궁과 관아인 육조거리가 있던 광화문으로 큰길이 연결된다. 오른쪽으로는 남대문시장, 종로와 광통교지역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례문 남쪽 서울역으로 연결되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남대문시장과 광통교로 연결되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남산으로 연결되는 성벽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서소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보이는 숭례문>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숭례문>

서울 숭례문, 국보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 그 후 세종30년(1448), 성종10년(1479), 고종 연간에 큰 수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매일 밤 인정(10시 무렵)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날 아침 파루(4시무렵)에 문을 열었는데, 이때 문루에 종을 담아 그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몸소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숭례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곤 하였다.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 구조가 견실하여 조선초기의 건축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는 좌우 성곽이 철거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해체보수를 하였다. 2008년 2월10일 방화사건으로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하였으며, 이때 좌우 성곽도 함께 복원하였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3년)

<출처>

  1. 안내문, 서울시청,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부산 수영성, 경상좌수영 군영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경상좌수영성 옛터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좌수 수군 총책임자가 머물던 진영(鎭營)이다. 원래는 부산포에 있었는데 세조 때(1459년)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직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후 인조 때 수영만 일대가 홍수로 매몰되면서 부산항 부근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고 하여 효종 때(1652년) 다시 옮겨져 구한말 군사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벽 대부분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고 남문 홍예와 성벽 남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아 있다. 1995년 수영구가 분리되면서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곰솔과 푸조나무 등 오래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 수영성  02-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하마비>

옛 수영성 성벽은 공원 남서쪽 언덕에 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석은 현재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성벽은 조선후기 숙종 때 감만이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은 당시 축성방식이 적용되어 잘다듬은 큰 돌로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약 2,785m 높이는 4m 정도이며 4개의 성문과 4개의 수구, 3곳의 옹성과 여러 치성을 두고 있었다. 동문 바깥쪽 수영만에 군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었다.

부산 수영성<경상좌수영성 공간배치>

부산 수영성  09-20211125<공원 서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

부산 수영성  10-20211125<성벽>

수영성 공원 서쪽편 입구에는 옛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성문 앞에는 성을 수호하는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부산 수영성  01-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홍예기석>

부산 수영성  03-20211125<안쪽에서 본 모습>

경상좌수영성 남문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을 지휘하는 본부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성’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이다. 이 남문은 숙종 18년(1692)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동에 있는 옛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용되었고 1962년 6월 수영초등학교가 광안동으로 이전한 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현재 앞뒤에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또한 좌우 1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해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조선개 ‘박견’을 성문 앞에 둔 것으로 보아 경상좌수영성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남문 안쪽에는 이곳에 경상좌사영 관아가 있었던 옛터였음을 보여주는 좌수영성지곰솔(천연기념물)
좌수영성지푸조나무(천연기념물) 등의 고목들이 남아 있다.

부산 수영성  21-20211125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천연기념물)>

부산 수영성  04-20211125<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공원 안쪽에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각각 하나의 건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부산 수영성  15-20211125<수영고당이 있던 자리>

부산 수영성  12-20211125<독신묘와 수영산신당>

이곳에는 2017년까지 수영고당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고당은 임진왜란 대 왜병에 항거한 송씨할매를 기리는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독신묘와 산신당을 각각 하나의 건축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공원 서쪽에 있는 25의용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저항하다 죽은 수영성 성민을 기리는 곳이다. 당시 경상좌수사는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성민 25명과 수군이 왜군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산 수영성  11-20211125<25의용단>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동래 출신 어민으로 경상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다시 침범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부산 수영성  07-20211125<안용복 장군 사당>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하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수영성이 있던 곳을 199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부산 수영성  08-20211125<수영사적공원>

부산 수영성  05-20211125<공원 내부>

부산 수영성  14-20211125<뒷편 산책로>

좌수영성지, 부산시 수영구
이 성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던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좌수영이란 서울에서 보아 낙동강의 좌측을 담당하는 수군의 주진을 말한다.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본래 감만이포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고,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3)에 사천(수영천)의 범람으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1652년(효종 3)에 이곳은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또다시 옮겨왔다. 그 후 1852년(고종 32)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될 때까지 243년간 이곳에 있었다. 경상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그 관할하에 1개의 첨사영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덜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되었으며,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좌수영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의 총책을 맡고 있었다. 이 성의 초기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것은 165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 동원된 인력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돌에 언양,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지방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 같다. 성의 둘래는 양 2,784m, 성벽의 높이는 4m였으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리소흘로 대부분 폐허화되고, 지금은 성벽과 남문, 홍예,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최근에 시립박물관에서 부분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부산 동래읍성, 동래부 읍치

부산시 동래구 옛 동래부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동래읍성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말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일본과 교류하는 관문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원래 규모는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1km 정도의 일반적인 읍성이었는데 조선후기 영조 때(1731년)에 현재의 규모로 크게 증축하면서 평산성 형태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치 주변 도심의 성벽과 성문은 없어졌으며 마인산 주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북문과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의 시설과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부산 동래읍성 01-20211125<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06-20211125<서장대 부근 옛 성벽>

동래읍치 주산인 마안산을 중심으로 동서쪽 구릉과 읍치가 있는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다. 전체 규모는 둘레 약 3.8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읍성으로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를, 성문으로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을 두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19-20211125<북장대가 있는 마안산>

부산 동래읍성 18-20211125<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편 구릉>

부산 동래읍성 41-20211125
<동래읍성 축성비>

성문은 현재 북문과 북장대와 동장대 사이 언덕에 있는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은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한 조선후기 성문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앞쪽과 뒷쪽에 별도로 성문이 있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부산 동래읍성 20-20211125<북문(안쪽)>

북문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성문이라기보다는 비상시 퇴각하기 위한 암문 성격이지만 옹성과 문루를 갖추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부산 동래읍성 24-20211125<북문 바깥 옹성>

부산 동래읍성 23-20211125<옹성 내부>

부산 동래읍성 25-20211125<북문 바깥쪽 길>

부산 동래읍성 22-20211125<복원된 북문 동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5-20211125<북문 문루 옆에서 보이는 북문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26-20211125<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길>

부산 동래읍성 29-20211125<북문과 북장대 사이 성벽>

부산 동래읍성 28-20211125<북장대 아래 치성>

부산 동래읍성 30-20211125<치성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31-20211125<북장대 오르는 길>

북장대는 동래읍치 주산인 마인산 정상부에 있는 군사지휘소인 장대이다. 이곳에서는 동래읍치와 주변지역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부산 동래읍성 33-20211125<북장대>

부산 동래읍성 32-20211125<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래부 읍치>

부산 동래읍성 21-20211125<북문 서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4-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6-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5-20211125<북문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02-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로 연결되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4-20211125<북문 서쪽 구릉 정상부>

부산 동래읍성 03-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 성벽과 치성>

북문 서쪽 정상부에서 서장대 사이에는 조선후기에 쌓은 복원전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산 동래읍성 07-20211125<옛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8-20211125<허물어진 모습의 치성>

부산 동래읍성 09-20211125<치성 아래 복원된 성벽>

부산 동래읍성 10-20211125<서장대와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12-20211125<서장대>

부산 동래읍성 11-20211125<서장대 아래 성벽>

동래지역에는 삼한시대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가야 고분인 복천동고분군(사적)이 북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 14-20211125<서쪽 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고분군(사적)>

동래 읍성지 (東萊 邑城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 (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 (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 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藝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사등성, 조선초 거제현 읍치였던 읍성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에 있는 사등성(沙等城)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육지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조선초 세종 때 돌아오고 거제현 관아가 복구되면서 읍치가 되었던 읍성이다. 사등성은 해안과 너무 가까우면서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수비하기 힘든 점이 있었으며 읍성 내부도 면적이 넓지 않아 많은 주민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문종 때 관아를 인근 고현성으로 옮기면서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조선초기에 쌓았던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거제 사등성 25-20220221<거제 사등성>

성벽의 둘레는 986 m이고 높이는 6.1 m 정도이다. 동서남북으로 성벽의 길이 250m 정도인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동.서.남.북으로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그 사이에 방어를 위해 치성을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폭 20 m 정도의 해자를 파서 수비를 강화하였다.

거제 사등성<거제 사등성>

현재 사등성은 북문 주변 성벽을 발굴,조사과정을 거치면서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으며 나머지 성벽은 복원하기 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거제 사등성 24-20220221<북문 동쪽편 복원된 치성>

사등성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쪽 성벽은 당시 규정에 따라 성벽 안쪽에 낮은 계단을 두고 있으며, 서쪽 성벽은 계단 위에 다시 석축을 쌓아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복원된 성벽은  발굴조사 때 확인된 축성방식에 따라 복원하였다.

거제 사등성 23-20220221<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7-20220221<서쪽 성벽(위)>

거제 사등성 18-20220221<서쪽 성벽 (안쪽)>

거제 사등성 26-20220221<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9-20220221<북쪽 성벽(안쪽)>

사등성지의 정비.복원과 관련하여 2012년과 2014년 북쪽 성벽을 조사한 결과 계단식 내벽이 조사되었고, 2015년 서쪽 성벽 조사에서는 무너진 기존 성벽 상부에 수직에 가까운 내벽을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세종 20년(1438년)의 <축성신도>의 규정에 따라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사실과 세종 이후 내벽을 수직되게 축조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원형 보존 차원에서 구간별 발굴조사 된 수법대로 정비.복원하였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사등성은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성문 앞에 ‘ㄱ’자 형태로 옹성을 두어 방어를 보완하고 있다. 성문 사이에는 앞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두고 있다. 사등성은 조선초 쌓은 규정에 따라 제대로 쌓은 읍성으로 옹성이 조선 초기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제 사등성 04-20220221<북문 옹성>

거제 사등성 06-20220221<옹성 출입문>

거제 사등성 08-20220221<옹성에서 읍성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거제 사등성 14-20220221<성벽 위에서 본 옹성>

거제 사등성 10-20220221<옹성에서 본 서쪽 성벽>

북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성벽은 아직 보원되지 않아 복원하기 전 읍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성벽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거제 사등성 07-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2-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위)>

거제 사등성 13-20220221<북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치성>

사등성지,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이 성은 삼한시대 변진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의 왕성이었다고 하나, 증명할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조선의 <문종실록>에 의하면 고려 말엽 왜구의 침략을 당해 거창으로 피난을 갔던 거제도민이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자, 섬안의 수월리라는 곳으로 들어와 나무로 방책을 쌓고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26년(세종 8)에 거제현의 관아가 수월리에서 사등리로 옮겨지면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1448년(세종 30)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성은 거제현의 관아를 고현으로 옮길 때까지 거제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쌓은 이 성은 둘레 986 m, 높이 5 m, 폭 5 m의 규모이다. 사방에 성문을 두었는데, 이 성문에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성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완전히 엄폐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卍’형을 이루며, 성 주위에 폭 20 m의 방어용 도량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성안에 학교와 마을이 있고, 성밖은 농경지이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시대 성곽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1980년대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고 주위를 정화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