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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시안성벽(西安城墙),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 성곽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시안 성벽(西安 城墻)이다. 한(漢)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중국 역대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시안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도성(都城)이다. 수(隋) 때 현재의 위치에 도성을 처음 쌓았으며 당나말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의 성곽은 명(明) 때 주원장 둘째 아들이 진왕으로 봉해지면서 다시 쌓았는 당나라 황성 터의 성을 연장하여 다시 쌓았으며 그 후 여러차례 수리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1년 중국 최초로 중점보호문물 및 AAAA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체 둘레 13.74 km로 남북으로 2.6 km, 동서로 3.5 km 정도의 직사각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높이이 12 m 정도이며, 상부 너비 12 ~ 14 m이다. 성벽 바깥에는 땅을 파서 만든 호성하(护城河,해자), 성벽 위에는 갑루, 전루, 성루 등의 누각과 여인장, 타구 등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인 장락문, 안정문, 영녕문, 안원문을 비롯하여 18곳의 성문을 두고 있다. 현재의 성벽은 구운벽돌로 성벽을 쌓은 것으로 명.청대 중국 도성(都城)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성벽, 명.청대 중국 도성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녕문(永宁门)은 장안성 남문으로 명나라 초 장안성을 다시 쌓을 때 “영녕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옹성 형태의 도성 정문으로 갑루(闸楼), 전루(箭楼), 정루(正楼)를 갖추고 있으며 앞쪽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인 조교(弔橋)가 있었다. 성문 양쪽에는 성문을 호위하기 위한 돌출된 형태의 치성(雉城)과 적루(敌楼)를 두고 있다. 도성 정문 형태가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한양 도성 숭례문(국보 1호)과 같은 성격의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영녕문.

영녕문 정루(正楼)는 성문 위에 세워진 벽돌로 쌓은 3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천안문처럼 방어적 성격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문루이다. 명나라 초(1378년) 장안성을 다시 세울 때 지어졌으며 청대(1526년) 이후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다. 숭례문 문루처럼 중국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정루

영녕문 앞은 옹성이 있으며 방어시설인 전루(箭楼)가 옹성 위에 세워져 있다. 옹성은 명나라 말(1636년) 이자성의 난 때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루(箭楼)는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벽돌로 쌓은 큰 누각 건물이다. 건물은 4층으로 앞쪽 각층에는 12개의 창을 두고 있다. 옆쪽에는 1층을 제외하고 각층에 창을 두어 총 64개의 창이 있다. 내부는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양쪽에도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옹성과 전루.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전루와 갑루

갑루(闸楼)는 옹성 바깥쪽 해자를 건너는 현수교 다리인 조교(弔橋)를 통제하기 위한 출입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작은 규모의 2층 건물로 바깥쪽을 향해 적을 공격하기 위한 창문을 두고 있다. 전루와 갑루 사이에도 옹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갑루와 옹성. 그 앞에 해자를 건너는 다리가 있고 도성 출입문을 상징하는 패방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옆을 지나는 도로.

장안성 바깥에는 성을 둘러싸는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다. 호성하(护城河)라 불리는 해자는 둘레 14.6 km 정도이다. 수당 시기에 처음 건설되었는데 방어시설이면서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며 홍수 때 물을 임시로 배출하는 배수시설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수.당시기에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명.청대에 여러차례에 걸쳐 땅을 깊게 파고 폭을 넓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해자는 남문 주위 주작문에서 건국문까지 약 2.84 km 정도이며 깊이는 4.5 ~ 6 m 이다. 지금은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동쪽 건국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서쪽 주작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시안성벽(西安城墙).비림역사문화경구(碑林历史文化景区) 호성하(护城河) 소개
수당 시기에 건설된 서안해자는 성을 에둘러 총 길이는 14.6 km이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방어체제라고 할수 있다. 고대의 “외호”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2가지 작용이 있다. 하나는 해자밖에서 적을 막아 서안성 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물저장, 그리고 황수가 배수에 사용되어 도시 기후를 개선하는 것이다. 역사상 서안 해자를 처음으로 판 것은 당나라말기였고 명나라초기 배수로를 넓혀서 확대하는데 서안해자의 중요한 두시기라고 할수있다. 그후 청나라 시기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넓힌 재자를 여러차례에 걸쳐서 더욱 깊게파고, 넓혔으며, 준설하여 근대시기의 서안해자를 형성하였다. 2013년부터 정식 시범구역으로 된 해자의 길이는 2.84 km, 물깊이는 4.5 ~ 6 m이며, 주작문부터 건국문으로 향하는 수역을 주선으로 해자연안의 경치에 대하 종합적인 개조를 진행하였습니다. 수로청소, 오수의 흐름을 막고, 물속의 생물을 다스리며, 물양을 증가하는 등 방식으로 해자수역에 대해 기본적인 처리를 진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시안 성벽 바깥쪽으로는 해자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성벽을 따라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성벽을 성문, 적루, 성벽, 여인장, 타구 등 다양한 방어시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에 조성된 공원

적루(敌楼)는 성벽 위에 세워진 누각을 말한다. 시안 성벽 위에는 적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나 성문 주위 등에 다양한 형태의 적루가 세워져 있다. 성문 양쪽에 성문을 호위하기 위해 세워진 치성 위에 세워져 있는 적루가 대표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동쪽에 세워진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모습. 벽돌로 지은 2층 누각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에 위치한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각루

OLYMPUS DIGITAL CAMERA적루가 없는 치성

장안성 남문 안쪽 문묘였던 비림박물관 앞 성벽 위에 있는 괴성루(魁星楼, Kuixing Tower)이다. 괴성루(魁星楼)는 장안성 남문 동쪽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학의 신으로 추앙받는 괴성(魁星)을 상징한다. 한자 “魁”는 “乚”이 “斗”를 들어올리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를 통과할 후보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나라 때 (1618년) 서안을 다스렸던 지방관이 이 지방 출신이 과거를 통과하지 못한것을 애석하게 생각해 문묘(文廟) 앞 성벽위에 세웠다고 한다. 근대에 파괴되었던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비림박물관 앞  괴성루

괴성루는 2층 목조건축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으로 명.청대 이전 누각 건물 형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괴성루.

성벽은 높이 12 m이며, 바닥너비 15 ~ 18 m이다. 성벽 내부에는 황토흙을 다져 쌓았으며 바깥쪽과 상부에는 구운 벽돌로 쌓았다. 성벽 상부는 너비 12 ~ 14 m로 마차 2대가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규모이다. 바깥쪽을 향해서는 방어시설인 여장과 타구가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벽돌로 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마차 2대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넓은 성벽 상부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에서 내려 보이는 비림박물관 부근 도심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 도로

장안성 북쪽 성벽은 당나라 황성 성벽 자리에 다시 명나라 때 다시 쌓은 것이다. 황성에 있던 대안궁을 비롯하여 궁궐 등은 남아 있지 않고 시안 기차역을 비롯하여 도시의 중심기능을 하고 있는 지역이다. 북쪽 성벽은 동서로 약 4.13 km이며 북문인 안원문(安远门)문을 중심으로 상무문 등 6개의 성문이 있다.

해방문(解放门)은 원래 중정문(中正门)이었는데 1934년에 이름이 바뀌었다. 1952년 시안역 광장이 확장되면서 철거되었다가 최근에 현재의 모습으로 성벽이 연결되었다. 시안 기차역은 해방문(解放门)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뒷편에 당 대명궁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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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서쪽에 위치한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안쪽).

해방문 동쪽으로는 상검문(尚俭门), 상근문(尚勤门)이 있는데 최근에 성벽을 연결하면서 도로가 지나가던 곳에 성문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상검문.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상검문 동쪽 상근문(尚勤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쪽 성벽

서안 성벽
서안 성벽은 중국에 남아있는 성벽 중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고대 성벽건축물로, 고도 장안의 모든 역사를 한데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문화재입니다. 또한 그 독특한 매력으로 인하이 새인들에게 웅장하고 장대한 모습을 뽐내며 전 세계에 고대 중국인들의 깊은 지혜를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안 성벽은 기원후 582 년 (수나라 개황 2 년)에 건설되었고 오대, 송, 금,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홍무부년에 당나라 시대 당장안성 황성을 기초로 확대 및 복원하였습니다. 서한 성벽 둘레 길이는 13.74 km, 상부 너비 12 ~ 14 m, 하부 너비 15 ~ 18 m 입니다. 성벽에는 성보호 하천(包括护城河,해자), 조교(弔橋), 갑루(闸楼), 전루(箭楼), 성루(城樓), 각루(角樓), 적루(敌楼), 여인장(女儿墙), 타구(垛口) 등의 고대 군사 시설이 갖추이지 있습니다. 현재 중국 최초 중점보호문물 및 AAAA 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 성벽 도시 및 시안 시민들의 무한한 협력과 공동노력으로 양호하게 보호되고 있으며, 오랜 고도의 신비로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세월의 변천과 역사의 흔적, 문화 정수의 축적, 풍부한 인류문화 체험을 제공하며 현대인의 생활에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고있습니다. 성벽, 환성 공원 숲, 성보호 하천, 성 보호 하천 외부 도로, 순성항 등이 “벽림하로항”(성벽, 숲, 하천, 도로, 나루터)가 5위일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어, 서안의 역사 및 문화적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국제화된 대도시로서의 중요한 지표이자 정신적인 정원과도 같은 공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고적 보호 계승에 있어서 모범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시,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청도 청도읍성,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있는 옛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쌓은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방어시설을 정비할 때 다시 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부분만 남고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고 있다.

성은 둘레 1.88 km 정도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7 m이며 북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동.서.북쪽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며, 고종 때 남문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문과 모서리부분에 치성을 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었다.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는 남원성이나 인근 언양읍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17-20200106청도군 읍치에 남아 있는 청도읍성.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읍성으로 둘레 1.8 km의 사각형을 평면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1-20200106청도읍성 동쪽 성벽. 약 340 m 정도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성벽에는 동문, 동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등 방어시설을 하고 이다.

청도 청도읍성 05-20200106읍성 동문터. 읍성 내부를 들어오는 주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위가 훼손되었다.

청도 청도읍성 03-20200106동문 남쪽에 있는 치성. 바깥으로 길게 나와 있어 동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2-20200106동쪽 성벽 바깥쪽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동쪽 바깥은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되어 있어 적을 방어하기 쉽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청도 청도읍성 07-20200106동문 안쪽 성벽. 바깥쪽은 큰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쪾은 토성처럼 흙으로 쌓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읍성 21-20200205복원하기 전 모습. 성벽은 무너지고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청도읍성 동쪽 성벽
청도읍성 동쪽 성벽은 읍성 동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 m이다. 성벽 구간은 2005년 지표조사에서 성 터 위에 집 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 폐문루, 치성 3곳이 확인되었다. 문헌에 동문루는 임진왜란 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 35년(1709)에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 22년(1798) 옛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벽 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 터, 2007년에 동문루 옆 치성, 2016 ~ 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다. 성벽 조사에서기초와 몸체(체성+내탁)가 확인되었다. 기초는 정리한 터 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마주보게 다진 3층이다. 기초 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다. 몸체는 기초 위에 약 5 m 너비로 성돌을 마주보게 내.왜벽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틈새에는 잔돌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몸체 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내탁했다. 동문루 터는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훼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폐문루 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 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성벽과 함께 쌓은 치성은 동문루 옆과 성벽 남.북쪽 모서리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정비사항은 2008년에 주차장, 관광안내소, 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2009 ~ 2010년에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에 동문루 남쪽의 성벽을 남은 성벽 위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대로 쌓았다. 성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읍성 04-20200106동문 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3-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새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5-20200106치성 아래에서 본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4-20200106청도읍성 남쪽 성벽.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해자처럼 연못이 있다.

청도 청도읍성 08-20200106북동쪽 성벽 위. 토성처럼 흙으로 쌓은 성벽길이 있으며 조총공격에 대비해 여장을 설치하였다.

청도 청도읍성 09-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1-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동문 부근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2-20200106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0-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북쪽 성벽. 멀리 치성과 북문이 보인다. 양쪽 치성에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청도 청도읍성 16-20200106고지도에 표현된 청도읍성. 평지에 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는 인근 언양읍성이나 남원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읍성내 있는 옛 청도군 관아 객사.

청도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km), 높이는 5자 5촌(약 1.65 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 (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를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문경 석현성, 영남대로 토끼비리 옛길을 지키는 조선시대 관문성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석현성이다. 조선시대 영남대로 옛길일 토끼비리가 출발하는지점으로 고모산성 남문에서 토끼비리 옛길 입구까지 약 400 m 정도로 성벽을 쌓았다. 군대가 주둔하기 위해 쌓은 산성과는 달리 주요 교통로를 막고 있는 관문성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령 고갯길 방어를 위해 쌓은 조령 관문과 비슷한 시기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석현성이 있는 이곳은 조령에서 발원하는 조령천과 문경 가은읍에서 흘러내려오는 영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이 길 밖에 없다. 영남대로 주요 고갯길인 문경새재를 넘기 위해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고모산성과 고분, 조선시대 관문성인 석현성을 비롯하여 영남대로 토끼비리 옛길이 남아 있다. 지금도 옛 영남대로를 따라서 연결되는 3번국도, 서울.부산간 가장 가까운 고속도로인 중부내륙고속도로, 옛 문경선 철도까지 이곳을 지나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경 석현성. 임진왜란 이후 주요 교통로인 영남대로를 통제하기 위해 쌓은 관문성으로 험준한 지형에 있는 토끼비리 입구에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현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고모산성을 확장하여 교통로 양쪽을 성벽을 쌓았다. 전형적인 조선후기 관문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현성 남문인 진남문.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에서 고모산성으로 연결되는 동쪽편 성벽. 잘다듬은 큰 돌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조총공격에 대비하여 성문 주위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 동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에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길로 알려져 있는 토끼비리 옛길이 남 아 있다. 1~2명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토끼비리 옛길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벼랑을 깎아 잔도 형태로 만든 길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성벽의 길이는 400 m 정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문과 문루. 아치를 사용하지 않은 단순한 개거식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문 안쪽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 안쪽 옛길. 사람들이 거주하는 읍성이 아니라 관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오가는 행인들을 위한 주막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진남문과 주변 성벽. 교통로를 막고 있는 전형적인 관문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끼비리 주변 풍경. 낙동강 지류인 영강이 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끼비리가 있는 영강 주변 풍경, 동쪽 오정산(810 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백두대간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 어룡산(617 m)이 길을 막고 있어, 그 사이를 흐르는 영강 주변만이 남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에 삼국시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았던 신라는 이곳에 고모산성을 쌓고 영남대로 교통로를 통제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3번 국도변에서 본 석현성.

<출처>

  1. 안내문, 문경시청,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문경 조령 관문(사적 147호), 백두대간 고갯길에 쌓은 관문성

경북 문경사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조령 관문(사적 147호)이다. 조선시대 영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문경새재라 불리는 조령길에 쌓은 관문성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주력부대였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가 이곳에서 합류하여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조령의 험한 지형을 활용하지 못하고 넓은 평야지대에 충주에서 왜군을 맞아 전멸하면서 이 곳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임진왜란때 충주 출신 신충원이 처음 성을 쌓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관문성을 쌓을 것을 논의만 하다가 숙종 때 전국적으로 산성을 강화할 때 이곳에 3개의 관문을 쌓았다. 고갯길 입구에 첫번째 관문 주흘관을, 임진왜란 때 성을 쌓았던 곳에 2번째 관문 조곡관을, 조령 고개 부근에 3번째 관문 조령관을 쌓았다. 군사가 주둔할 목적으로 쌓은 일반적인 산성과는 달리 교통로 주변에만 성벽을 쌓고 출입문을 둔 전형적인 관문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경 조령 관문(사적 147호),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막고 있는 대표적인 관문성이다. 조선 숙종 때 쌓았던 성벽은 크게 훼손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다. 인근에 드라마세트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전투장면을 많이 찍어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첫번째 관문인 주흘관.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성벽을 쌓고 홍예로 불리는 아치형 성문과 문루를 두고 있으며 성벽 위에는 여장이 있는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모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위 문루. ‘주휼관’이라 적인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안 천장에 그려진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잘다듬은 큰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이다. 성벽 위에는 조총 공격에 대비하여 여장을 설치하였다. 숙종 때 전국적으로 크게 보강한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양쪽으로 계곡을 성벽으로 막았다.  계곡 양쪽은 경사가 심한 지형으로 성벽의 필요성은 많지 않으나 일정부분까지는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물이 흐르는 수문.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문경새재를 오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영남제일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인해 남쪽이 관문성 바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성벽.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주훌관 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주휼관에서 약 2.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 중성의 개념으로 지은 관문으로 평탄한 지형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처음 성을 쌓았던 곳으로 실질적으로 문경새재길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곡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교적 수량이 많은 계곡이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두번째 관문인 조곡관 성문.

OLYMPUS DIGITAL CAMERA조곡관 문루. ’조곡관’이라 적현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동쪽편 성벽. 비교적 큰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성벽 위에 여장을 설치했다. 성벽을 앞으로 돌출시켜 성문을 엄호하는 치성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영남제이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사적 147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문경 조령관문 사적147호 20191216-31문경새재 고개에 세워진 3번째 관문인 조령관.

문경관문, 사적 147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숭행차 고사갈이성를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도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이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물을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이름한다.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나주 나주읍성(사적 337호), 전라도 나주목 읍치

전남 나주시 옛 나주목관아 읍치에 있는 나주읍성(사적 337호)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초 전국적으로 읍성을 정비할 때 현재의 규모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약 940 m 정도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2.7 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헐어졌으며 서문 주위에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문이 모두 있었으며 현재는 남문인 남고문과 동문인 동점문과 서문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남고문은 총루가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으며, 동점문은 옹성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성문은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나주목의 읍성으로 전주읍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옛 나주읍성 남문인 남고문. 석축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총을 사용할 수 있는 총안이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현종때 수리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남고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1-20190923남고문 석축 발굴 당시 모습. 바닥에 깔려 있던 석축이 확인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읍성 동점문. 남고문과 달리 앞쪽에 방어시설인 옹성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점문 문루. 총안을 두고 있는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옹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동점문.

나주읍성 동문터, 사적337호
나주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 성종 2년(983) 목(牧)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도시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태조의 나주경략, 현종 1년(1010) 거란의침입시 현종이 남순하여 10여 일간 머물다가 환도한 사실 등은 지방행정 중심도시로서 나주의 비중과 함께 나주읍성의 존재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김경손전이다. 고려 고종 24년(1237)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수중에 넣고 나주로 진출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하였다는 기록에 현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나주성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가 갖추어져 있었음은 정도전의 「등나주동루유무로서」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 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 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대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이 겹쳐 세조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후 나주목사 김계희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되었다. 한편 나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 7월23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나주인들이 남문의 보존을 희망하나 이미 성벽의 태반이 없어졌고 동문은 1912년에 붕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신문 1916년 10월 1일자에 도로공사 등의 영향으로 동.서.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문만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0년에 제작된 「속수나주지」에 남문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1916년 10월 ~ 1920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성벽은 잔돌끼움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재 성벽의 바깥부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이다. (동문 동점문, 서문 서성문, 남문 남고문, 북문 북망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2-20190923나주읍성 서문 부근에 남아 있는 석축. 약 100 m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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