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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청도읍성,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있는 옛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쌓은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방어시설을 정비할 때 다시 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부분만 남고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고 있다.

성은 둘레 1.88 km 정도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7 m이며 북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동.서.북쪽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며, 고종 때 남문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문과 모서리부분에 치성을 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었다.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는 남원성이나 인근 언양읍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17-20200106청도군 읍치에 남아 있는 청도읍성.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읍성으로 둘레 1.8 km의 사각형을 평면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1-20200106청도읍성 동쪽 성벽. 약 340 m 정도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성벽에는 동문, 동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등 방어시설을 하고 이다.

청도 청도읍성 05-20200106읍성 동문터. 읍성 내부를 들어오는 주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위가 훼손되었다.

청도 청도읍성 03-20200106동문 남쪽에 있는 치성. 바깥으로 길게 나와 있어 동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2-20200106동쪽 성벽 바깥쪽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동쪽 바깥은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되어 있어 적을 방어하기 쉽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청도 청도읍성 07-20200106동문 안쪽 성벽. 바깥쪽은 큰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쪾은 토성처럼 흙으로 쌓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읍성 21-20200205복원하기 전 모습. 성벽은 무너지고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청도읍성 동쪽 성벽
청도읍성 동쪽 성벽은 읍성 동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 m이다. 성벽 구간은 2005년 지표조사에서 성 터 위에 집 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 폐문루, 치성 3곳이 확인되었다. 문헌에 동문루는 임진왜란 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 35년(1709)에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 22년(1798) 옛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벽 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 터, 2007년에 동문루 옆 치성, 2016 ~ 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다. 성벽 조사에서기초와 몸체(체성+내탁)가 확인되었다. 기초는 정리한 터 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마주보게 다진 3층이다. 기초 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다. 몸체는 기초 위에 약 5 m 너비로 성돌을 마주보게 내.왜벽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틈새에는 잔돌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몸체 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내탁했다. 동문루 터는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훼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폐문루 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 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성벽과 함께 쌓은 치성은 동문루 옆과 성벽 남.북쪽 모서리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정비사항은 2008년에 주차장, 관광안내소, 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2009 ~ 2010년에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에 동문루 남쪽의 성벽을 남은 성벽 위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대로 쌓았다. 성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읍성 04-20200106동문 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3-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새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5-20200106치성 아래에서 본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4-20200106청도읍성 남쪽 성벽.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해자처럼 연못이 있다.

청도 청도읍성 08-20200106북동쪽 성벽 위. 토성처럼 흙으로 쌓은 성벽길이 있으며 조총공격에 대비해 여장을 설치하였다.

청도 청도읍성 09-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1-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동문 부근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2-20200106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0-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북쪽 성벽. 멀리 치성과 북문이 보인다. 양쪽 치성에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청도 청도읍성 16-20200106고지도에 표현된 청도읍성. 평지에 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는 인근 언양읍성이나 남원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읍성내 있는 옛 청도군 관아 객사.

청도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km), 높이는 5자 5촌(약 1.65 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 (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를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문경 석현성, 영남대로 토끼비리 옛길을 지키는 조선시대 관문성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석현성이다. 조선시대 영남대로 옛길일 토끼비리가 출발하는지점으로 고모산성 남문에서 토끼비리 옛길 입구까지 약 400 m 정도로 성벽을 쌓았다. 군대가 주둔하기 위해 쌓은 산성과는 달리 주요 교통로를 막고 있는 관문성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령 고갯길 방어를 위해 쌓은 조령 관문과 비슷한 시기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석현성이 있는 이곳은 조령에서 발원하는 조령천과 문경 가은읍에서 흘러내려오는 영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이 길 밖에 없다. 영남대로 주요 고갯길인 문경새재를 넘기 위해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고모산성과 고분, 조선시대 관문성인 석현성을 비롯하여 영남대로 토끼비리 옛길이 남아 있다. 지금도 옛 영남대로를 따라서 연결되는 3번국도, 서울.부산간 가장 가까운 고속도로인 중부내륙고속도로, 옛 문경선 철도까지 이곳을 지나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경 석현성. 임진왜란 이후 주요 교통로인 영남대로를 통제하기 위해 쌓은 관문성으로 험준한 지형에 있는 토끼비리 입구에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현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고모산성을 확장하여 교통로 양쪽을 성벽을 쌓았다. 전형적인 조선후기 관문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현성 남문인 진남문.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에서 고모산성으로 연결되는 동쪽편 성벽. 잘다듬은 큰 돌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조총공격에 대비하여 성문 주위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 동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에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길로 알려져 있는 토끼비리 옛길이 남 아 있다. 1~2명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토끼비리 옛길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벼랑을 깎아 잔도 형태로 만든 길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성벽의 길이는 400 m 정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문과 문루. 아치를 사용하지 않은 단순한 개거식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문 안쪽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 안쪽 옛길. 사람들이 거주하는 읍성이 아니라 관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오가는 행인들을 위한 주막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진남문과 주변 성벽. 교통로를 막고 있는 전형적인 관문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끼비리 주변 풍경. 낙동강 지류인 영강이 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끼비리가 있는 영강 주변 풍경, 동쪽 오정산(810 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백두대간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 어룡산(617 m)이 길을 막고 있어, 그 사이를 흐르는 영강 주변만이 남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에 삼국시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았던 신라는 이곳에 고모산성을 쌓고 영남대로 교통로를 통제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3번 국도변에서 본 석현성.

<출처>

  1. 안내문, 문경시청,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문경 조령 관문(사적 147호), 백두대간 고갯길에 쌓은 관문성

경북 문경사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조령 관문(사적 147호)이다. 조선시대 영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문경새재라 불리는 조령길에 쌓은 관문성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주력부대였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가 이곳에서 합류하여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조령의 험한 지형을 활용하지 못하고 넓은 평야지대에 충주에서 왜군을 맞아 전멸하면서 이 곳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임진왜란때 충주 출신 신충원이 처음 성을 쌓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관문성을 쌓을 것을 논의만 하다가 숙종 때 전국적으로 산성을 강화할 때 이곳에 3개의 관문을 쌓았다. 고갯길 입구에 첫번째 관문 주흘관을, 임진왜란 때 성을 쌓았던 곳에 2번째 관문 조곡관을, 조령 고개 부근에 3번째 관문 조령관을 쌓았다. 군사가 주둔할 목적으로 쌓은 일반적인 산성과는 달리 교통로 주변에만 성벽을 쌓고 출입문을 둔 전형적인 관문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경 조령 관문(사적 147호),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막고 있는 대표적인 관문성이다. 조선 숙종 때 쌓았던 성벽은 크게 훼손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다. 인근에 드라마세트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전투장면을 많이 찍어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첫번째 관문인 주흘관.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성벽을 쌓고 홍예로 불리는 아치형 성문과 문루를 두고 있으며 성벽 위에는 여장이 있는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모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위 문루. ‘주휼관’이라 적인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안 천장에 그려진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잘다듬은 큰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이다. 성벽 위에는 조총 공격에 대비하여 여장을 설치하였다. 숙종 때 전국적으로 크게 보강한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양쪽으로 계곡을 성벽으로 막았다.  계곡 양쪽은 경사가 심한 지형으로 성벽의 필요성은 많지 않으나 일정부분까지는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물이 흐르는 수문.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문경새재를 오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영남제일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인해 남쪽이 관문성 바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성벽.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주훌관 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주휼관에서 약 2.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 중성의 개념으로 지은 관문으로 평탄한 지형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처음 성을 쌓았던 곳으로 실질적으로 문경새재길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곡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교적 수량이 많은 계곡이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두번째 관문인 조곡관 성문.

OLYMPUS DIGITAL CAMERA조곡관 문루. ’조곡관’이라 적현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동쪽편 성벽. 비교적 큰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성벽 위에 여장을 설치했다. 성벽을 앞으로 돌출시켜 성문을 엄호하는 치성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영남제이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사적 147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문경 조령관문 사적147호 20191216-31문경새재 고개에 세워진 3번째 관문인 조령관.

문경관문, 사적 147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숭행차 고사갈이성를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도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이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물을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이름한다.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나주 나주읍성(사적 337호), 전라도 나주목 읍치

전남 나주시 옛 나주목관아 읍치에 있는 나주읍성(사적 337호)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초 전국적으로 읍성을 정비할 때 현재의 규모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약 940 m 정도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2.7 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헐어졌으며 서문 주위에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문이 모두 있었으며 현재는 남문인 남고문과 동문인 동점문과 서문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남고문은 총루가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으며, 동점문은 옹성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성문은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나주목의 읍성으로 전주읍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옛 나주읍성 남문인 남고문. 석축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총을 사용할 수 있는 총안이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현종때 수리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남고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1-20190923남고문 석축 발굴 당시 모습. 바닥에 깔려 있던 석축이 확인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읍성 동점문. 남고문과 달리 앞쪽에 방어시설인 옹성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점문 문루. 총안을 두고 있는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옹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동점문.

나주읍성 동문터, 사적337호
나주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 성종 2년(983) 목(牧)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도시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태조의 나주경략, 현종 1년(1010) 거란의침입시 현종이 남순하여 10여 일간 머물다가 환도한 사실 등은 지방행정 중심도시로서 나주의 비중과 함께 나주읍성의 존재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김경손전이다. 고려 고종 24년(1237)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수중에 넣고 나주로 진출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하였다는 기록에 현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나주성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가 갖추어져 있었음은 정도전의 「등나주동루유무로서」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 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 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대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이 겹쳐 세조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후 나주목사 김계희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되었다. 한편 나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 7월23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나주인들이 남문의 보존을 희망하나 이미 성벽의 태반이 없어졌고 동문은 1912년에 붕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신문 1916년 10월 1일자에 도로공사 등의 영향으로 동.서.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문만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0년에 제작된 「속수나주지」에 남문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1916년 10월 ~ 1920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성벽은 잔돌끼움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재 성벽의 바깥부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이다. (동문 동점문, 서문 서성문, 남문 남고문, 북문 북망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2-20190923나주읍성 서문 부근에 남아 있는 석축. 약 100 m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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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순천왜성,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가 쌓은 왜성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이다. 광양만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쌓은 왜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호남지방 공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쌓았다. 성벽을 쌓은 석축의 형태, 돌의 크기나 모양 등이 우리나라 산성과 다르고 일본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다이묘들의 성과 비슷하다. 성벽은 내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여러단계의 성문과 성벽을 두고 있다.

이곳은 왜장 고니시가 이끈 왜병이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 마지막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본성 정상부에서 동쪽 광양만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협이 어렴풋이 보이며, 광양제철소의 웅장한 모습도 같이 볼 수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주둔했던 울산왜성과 함께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왜성이다.천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곽 중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곳으로 일본인들은 순천성이라 불렸으며 한때는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은 광양만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다. 선박이 정박할 수 있으며, 주위를 감시하기 좋은 곳으로 전형적인 일본성곽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성 첫번째 출입문. 순천왜성 내성은 2중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그 중 첫번째 성벽으로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는데 최근 일부를 복원해 놓았다.

문지
이 문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출입문이다. 문지 옆으로는 해자를 만들고, 바다 물을 끌어들여 섬처럼 만들어 방어에 치중하였던 건물지로 여겨진다. 만조 때 멀리서 이곳 출입로가 다리처럼 보인다 하여 왜교 또는 예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문지 공사는 2007년 이루어 졌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성 축조방식을 자문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문지를 쌓는 방식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바깥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본환이라 불리는 정상부로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정상부 본환 성벽. 일본성은 정상부 본환에 지휘부가 머무는 천수각이라는 불리는 건물을 세워둔다.

SANYO DIGITAL CAMERA본환이라 불리는 정상부 성벽.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성벽. 큰 돌을 잘 다듬어 촘촘히 쌓았으며, 약간 경사를 두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성 축성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성문은 양쪽에 높은 성벽을 쌓아 적을 제압하기 좋은 형태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조선의 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둥근 형태의 옹성과 같은 역할이나 그 형태가 다르다. 포루투갈의 영향을 받은 축성방법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정상부에 위치한 본환에 남아 있는 천수기단. 이곳에 천수각이라 불리는 5층으로 추정되는 목조건축물을 세워 놓았다.

천수기단
천수 건물이 세워졌던 단으로 천수기단 앞에는 부속된 낮은 단이 있다. 천수는 성을 대표하는 권위와 상징의 건물이. 『정왜기공도권』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나 천수각 1층 아래에 오층망해루라고 쓰여져 있어 오층 건물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수기단은 오랜 세월 동안에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 200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축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다. 모서리 돌은 쐐기질하여 쪼갠 돌을 사용하였고, 쐐기질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위아래를 교차되게 쌓았다. 천수기단의 상부는 남아 있던 초석은 그대로 보존하고 기존 초석위에 새로운 초석을 놓아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정성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광양항. 그 너머로 고니시 군대와 조.명연합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렸던 노량해협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아래는 원래 바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어 공단으로 바뀌었다.

순천 순천왜성 16순천왜성은 노량해협을 마주보고 있는 여수반도 입구에 세워졌다. 연안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 여수항에 자리잡았던 전라좌수영 본영과는 달리 호남 내륙을 장악하기 용이한 지점에 요새를 구축해 놓았다.

순천왜성, 
이성은 전라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 1597년(정유년) 9월에 왜군은 경기도 부군 전쟁에서 패한 뒤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각 지역의 요충지를 찾아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성을 축조하였던 것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에ㅐ 걸쳐 이곳에서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전투이며, 이는 조.명 연합군과 왜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기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였다. 당시 전재의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2겹으로 축조되어 있고, 외성은 1겹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곽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 축조 당시의 성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성곽내 주요 건물지에 관한 내용은 전쟁의 모습이 그려진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