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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영성, 경상좌수영 군영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경상좌수영성 옛터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좌수 수군 총책임자가 머물던 진영(鎭營)이다. 원래는 부산포에 있었는데 세조 때(1459년)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직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후 인조 때 수영만 일대가 홍수로 매몰되면서 부산항 부근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고 하여 효종 때(1652년) 다시 옮겨져 구한말 군사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벽 대부문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고 남문 홍예와 성벽 남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아 있다. 1995년 수영구가 분리되면서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곰솔과 푸조나무 등 오래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 수영성  02-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하마비>

옛 수영성 성벽은 공원 남서쪽 언덕에 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석은 현재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성벽은 조선후기 숙종 때 감만이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은 당시 축성방식이 적용되어 잘다듬은 큰 돌로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약 2,785m 높이는 4m 정도이며 4개의 성문과 4개의 수구, 3곳의 옹성과 여러 치성을 두고 있었다. 동문 바깥쪽 수영만에 군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었다.

부산 수영성<경상좌수영성 공간배치>

부산 수영성  09-20211125<공원 서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

부산 수영성  10-20211125<성벽>

수영성 공원 서쪽편 입구에는 옛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성문 앞에는 성을 수호하는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부산 수영성  01-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홍예기석>

부산 수영성  03-20211125<안쪽에서 본 모습>

경상좌수영성 남문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을 지휘하는 본부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성’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이다. 이 남문은 숙종 18년(1692)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동에 있는 옛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용되었고 1962년 6월 수영초등학교가 광안동으로 이전한 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현재 앞뒤에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또한 좌우 1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해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조선개 ‘박견’을 성문 앞에 둔 것으로 보아 경상좌수영성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남문 안쪽에는 이곳에 경상좌사영 관아가 있었던 옛터였음을 보여주는 좌수영성지곰솔(천연기념물)
좌수영성지푸조나무(천연기념물) 등의 고목들이 남아 있다.

부산 수영성  21-20211125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천연기념물)>

부산 수영성  04-20211125<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공원 안쪽에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각각 하나의 건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부산 수영성  15-20211125<수영고당이 있던 자리>

부산 수영성  12-20211125<독신묘와 수영산신당>

이곳에는 2017년까지 수영고당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고당은 임진왜란 대 왜병에 항거한 송씨할매를 기리는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독신묘와 산신당을 각각 하나의 건축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공원 서쪽에 있는 25의용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저항하다 죽은 수영성 성민을 기리는 곳이다. 당시 경상좌수사는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성민 25명과 수군이 왜군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산 수영성  11-20211125<25의용단>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동래 출신 어민으로 경상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다시 침범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부산 수영성  07-20211125<안용복 장군 사당>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하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수영성이 있던 곳을 199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부산 수영성  08-20211125<수영사적공원>

부산 수영성  05-20211125<공원 내부>

부산 수영성  14-20211125<뒷편 산책로>

좌수영성지, 부산시 수영구
이 성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던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좌수영이란 서울에서 보아 낙동강의 좌측을 담당하는 수군의 주진을 말한다.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본래 감만이포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고,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3)에 사천(수영천)의 범람으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1652년(효종 3)에 이곳은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또다시 옮겨왔다. 그 후 1852년(고종 32)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될 때까지 243년간 이곳에 있었다. 경상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그 관할하에 1개의 첨사영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덜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되었으며,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좌수영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의 총책을 맡고 있었다. 이 성의 초기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것은 165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 동원된 인력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돌에 언양,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지방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 같다. 성의 둘래는 양 2,784m, 성벽의 높이는 4m였으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리소흘로 대부분 폐허화되고, 지금은 성벽과 남문, 홍예,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최근에 시립박물관에서 부분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부산 동래읍성, 동래부 읍치

부산시 동래구 옛 동래부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동래읍성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말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일본과 교류하는 관문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원래 규모는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1km 정도의 일반적인 읍성이었는데 조선후기 영조 때(1731년)에 현재의 규모로 크게 증축하면서 평산성 형태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치 주변 도심의 성벽과 성문은 없어졌으며 마인산 주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북문과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의 시설과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부산 동래읍성 01-20211125<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06-20211125<서장대 부근 옛 성벽>

동래읍치 주산인 마안산을 중심으로 동서쪽 구릉과 읍치가 있는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다. 전체 규모는 둘레 약 3.8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읍성으로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를, 성문으로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을 두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19-20211125<북장대가 있는 마안산>

부산 동래읍성 18-20211125<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편 구릉>

부산 동래읍성 41-20211125
<동래읍성 축성비>

성문은 현재 북문과 북장대와 동장대 사이 언덕에 있는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은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한 조선후기 성문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앞쪽과 뒷쪽에 별도로 성문이 있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부산 동래읍성 20-20211125<북문(안쪽)>

북문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성문이라기보다는 비상시 퇴각하기 위한 암문 성격이지만 옹성과 문루를 갖추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부산 동래읍성 24-20211125<북문 바깥 옹성>

부산 동래읍성 23-20211125<옹성 내부>

부산 동래읍성 25-20211125<북문 바깥쪽 길>

부산 동래읍성 22-20211125<복원된 북문 동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5-20211125<북문 문루 옆에서 보이는 북문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26-20211125<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길>

부산 동래읍성 29-20211125<북문과 북장대 사이 성벽>

부산 동래읍성 28-20211125<북장대 아래 치성>

부산 동래읍성 30-20211125<치성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31-20211125<북장대 오르는 길>

북장대는 동래읍치 주산인 마인산 정상부에 있는 군사지휘소인 장대이다. 이곳에서는 동래읍치와 주변지역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부산 동래읍성 33-20211125<북장대>

부산 동래읍성 32-20211125<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래부 읍치>

부산 동래읍성 21-20211125<북문 서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4-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6-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5-20211125<북문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02-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로 연결되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4-20211125<북문 서쪽 구릉 정상부>

부산 동래읍성 03-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 성벽과 치성>

북문 서쪽 정상부에서 서장대 사이에는 조선후기에 쌓은 복원전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산 동래읍성 07-20211125<옛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8-20211125<허물어진 모습의 치성>

부산 동래읍성 09-20211125<치성 아래 복원된 성벽>

부산 동래읍성 10-20211125<서장대와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12-20211125<서장대>

부산 동래읍성 11-20211125<서장대 아래 성벽>

동래지역에는 삼한시대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가야 고분인 복천동고분군(사적)이 북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 14-20211125<서쪽 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고분군(사적)>

동래 읍성지 (東萊 邑城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 (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 (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 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藝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사등성, 조선초 거제현 읍치였던 읍성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에 있는 사등성(沙等城)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육지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조선초 세종 때 돌아오고 거제현 관아가 복구되면서 읍치가 되었던 읍성이다. 사등성은 해안과 너무 가까우면서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수비하기 힘든 점이 있었으며 읍성 내부도 면적이 넓지 않아 많은 주민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문종 때 관아를 인근 고현성으로 옮기면서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조선초기에 쌓았던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거제 사등성 25-20220221<거제 사등성>

성벽의 둘레는 986 m이고 높이는 6.1 m 정도이다. 동서남북으로 성벽의 길이 250m 정도인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동.서.남.북으로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그 사이에 방어를 위해 치성을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폭 20 m 정도의 해자를 파서 수비를 강화하였다.

거제 사등성<거제 사등성>

현재 사등성은 북문 주변 성벽을 발굴,조사과정을 거치면서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으며 나머지 성벽은 복원하기 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거제 사등성 24-20220221<북문 동쪽편 복원된 치성>

사등성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쪽 성벽은 당시 규정에 따라 성벽 안쪽에 낮은 계단을 두고 있으며, 서쪽 성벽은 계단 위에 다시 석축을 쌓아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복원된 성벽은  발굴조사 때 확인된 축성방식에 따라 복원하였다.

거제 사등성 23-20220221<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7-20220221<서쪽 성벽(위)>

거제 사등성 18-20220221<서쪽 성벽 (안쪽)>

거제 사등성 26-20220221<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9-20220221<북쪽 성벽(안쪽)>

사등성지의 정비.복원과 관련하여 2012년과 2014년 북쪽 성벽을 조사한 결과 계단식 내벽이 조사되었고, 2015년 서쪽 성벽 조사에서는 무너진 기존 성벽 상부에 수직에 가까운 내벽을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세종 20년(1438년)의 <축성신도>의 규정에 따라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사실과 세종 이후 내벽을 수직되게 축조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원형 보존 차원에서 구간별 발굴조사 된 수법대로 정비.복원하였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사등성은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성문 앞에 ‘ㄱ’자 형태로 옹성을 두어 방어를 보완하고 있다. 성문 사이에는 앞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두고 있다. 사등성은 조선초 쌓은 규정에 따라 제대로 쌓은 읍성으로 옹성이 조선 초기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제 사등성 04-20220221<북문 옹성>

거제 사등성 06-20220221<옹성 출입문>

거제 사등성 08-20220221<옹성에서 읍성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거제 사등성 14-20220221<성벽 위에서 본 옹성>

거제 사등성 10-20220221<옹성에서 본 서쪽 성벽>

북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성벽은 아직 보원되지 않아 복원하기 전 읍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성벽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거제 사등성 07-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2-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위)>

거제 사등성 13-20220221<북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치성>

사등성지,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이 성은 삼한시대 변진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의 왕성이었다고 하나, 증명할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조선의 <문종실록>에 의하면 고려 말엽 왜구의 침략을 당해 거창으로 피난을 갔던 거제도민이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자, 섬안의 수월리라는 곳으로 들어와 나무로 방책을 쌓고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26년(세종 8)에 거제현의 관아가 수월리에서 사등리로 옮겨지면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1448년(세종 30)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성은 거제현의 관아를 고현으로 옮길 때까지 거제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쌓은 이 성은 둘레 986 m, 높이 5 m, 폭 5 m의 규모이다. 사방에 성문을 두었는데, 이 성문에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성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완전히 엄폐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卍’형을 이루며, 성 주위에 폭 20 m의 방어용 도량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성안에 학교와 마을이 있고, 성밖은 농경지이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시대 성곽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1980년대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고 주위를 정화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고현성, 옛 거제현 읍치에 쌓았던 읍성

경남 거제시 고현동에 있는 고현성(古縣城)이다. 조선초 세종 때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육지로 피난했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거제현 관아를 복구하면서 쌓은 읍성이다. 처음에는 인근 사등면 사등리에 읍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나 사등성이 평지에 위치하고 읍치 인구를 수용하기에 좁고 식수가 부족해 현재의 위치에 다시 읍성을 쌓고 읍치를 옮겼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점령되었으며 조선후기 현종 때 읍치를 통제영과 가까운 거제면으로 옮기면 그 기능을 잃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읍성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성벽이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거제 고현성 09-20220221<거제 고현성>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둘레 921 m, 성벽 높이 4 m 규모였다고 한다. 동, 서, 남의 3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두었으며, 모서리를 비롯하여 방어에 치약한 지점에 치성을 쌓다. 읍성은 동서 600 m, 남북 300 m 정도로 배모양의 형태로 동쪽 독봉산과 서쪽 계룡산 사이를 남북으로 흐르는 고현천 주변 골짜기를 막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거제 고현성1<거제 고현성>

거제 고현셩(古縣城)
고현성은 당시 사등면 사등리에 있던 읍성(거제 사등성)에 인구가 늘어나자 문종 1년(1451)부터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단종 1년(1453) 완공한 읍성이다. 당시 성의 둘레는 921m, 높이 4m이며, 동·서·남쪽 세 방향에 성문이 설치 하였다. 성문 앞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만들어 적으로부터 성문을 완전히 둘러싸 보호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성곽 구조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이다. 고현성은 임진왜란 으로 함락되어 현종 5년(1664) 거제면으로 거제현 관아를 옮길 때까지 약 210년간 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1950~1953) 이전까지 성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고현 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지금은 600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현재는 읍성 남서쪽 거제시청을 둘러싸고 있는 약 600 m 정도의 성벽만 남아 있다. 방어시설 중에는 옹성이 있는 북문과 4곳의 치성이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쌓은 석축성으로 조선초 쌓은 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제 고현성 03-20220221<북쪽 성벽 (바깥쪽)>

거제 고현성 32-20220221<북쪽 성벽이 시작되는 지점>

거제 고현성 04-20220221<성벽 안쪽>

거제 고현성 02-20220221<북문 옹성>

거제 고현성 05-20220221<옹성 출입문>

거제 고현성 07-20220221<옹성 내부>

거제 고현성 06-20220221<복원한 북문 문루(바깥쪽)>

거제 고현성 01-20220221<북문 문루(안쪽)>

북문을 지나면 치성이 있는 북서쪽 모서리까지 경사진 지형을 따라 성벽이 이어진다. 돌로 쌓은 석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아래쪽 성벽과는 달리 내부는 흙으로 쌓은 석축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거제 고현성 08-20220221<북쪽 성벽>

거제 고현성 12-20220221<북서쪽 모서리에 쌓은 치성>

높은 곳에 위치한 서쪽 성벽은 높이가 낮은 편이며 가운데에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두고 있다.

거제 고현성 11-20220221<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고현성 13-20220221 <서쪽 성벽 (안쪽)>

거제 고현성 16-20220221<남쪽에서 본 모습>

거제 고현성 15-20220221<북쪽 성벽에 있는 치성>

남서쪽 모서리에도 치성을 두고 있으며 남쪽 성벽에서 치성 1곳이 남아 있다.

거제 고현성 21-20220221<남서쪽 모서리 치성>

거제 고현성 22-20220221<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고현성 25-20220221<남쪽 성벽(안쪽)>

거제 고현성 26-20220221<남쪽 성벽 치성>

거제 고현성 29-20220221<남쪽 성벽 끝 부분>

거제 고현성 30-20220221<남쪽 성벽 끝 부분>

거제 고현성 31-20220221<치성>

거제현의 읍성을 가을에 고정리에 옮겨 쌓도록 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 지구(持久)하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모름지기 올 가을에 서둘러 옮겨 설치해야 하는가? 아직 2, 3년 멈추었다가 점차로 옮겨 설치해야 할 것인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거제는 바다 가운데 섬으로 바로 적이 들어오는 길에서 처음으로 대면(對面)하는 곳에 해당하여 아주 긴요하니, 올 가을에 옮겨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5월 6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경주 읍성(사적), 경주부 읍치

경북 경주시 북부동에 있는 경주 읍성(사적)이다. 조선시대 경주부 읍치가 있던 읍성으로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나 고려말 우왕 떄(1378)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해 해안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빼앗긴 경주읍성을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다시 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경주읍성은 조선초부터 여러차례 수리를 했으며 그 내용이 기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향일문(동문) 남쪽 성벽 일부와 치성 2곳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일부 복원되어 읍성을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읍성 (사적)>

<문종실록>에 따르면 읍성은 둘레 1,904 m, 높이 약 5.4 m 정도였다고 한다. 읍성 성문으로는 징례문(남문), 향일문(동문), 망미문(서문), 공진문(북문)이 있었으며 징례문 문루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벽 앞으로 돌출되어 성문을 호위할 수 있는 치성(雉城)과 성벽 바깥에는 물이 있는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 남쪽 약 50 m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쪽 성벽과 향일문을 복원하였다.

경주읍성<경주 읍성>

OLYMPUS DIGITAL CAMERA<50 m 정도 남은 동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2번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치성과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주택가로 바뀐 2번째 치성 남쪽편 성벽터>

DCIM103MEDIADJI_0914.JPG<복원된 동문과 동쪽 성벽>

경주읍성
이 성은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축읍성으로 둘레는 2,409 m이며,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이래 역대 고려왕들은 경주를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하고 994년에는 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성은 고려 현종 3년(1012년) 축성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3.6 m 정도이나 시가지 확장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고 90 m 가량의 성벽만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