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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고현성, 옛 거제현 읍치에 쌓았던 읍성

경남 거제시 고현동에 있는 고현성(古縣城)이다. 조선초 세종 때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육지로 피난했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거제현 관아를 복구하면서 쌓은 읍성이다. 처음에는 인근 사등면 사등리에 읍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나 사등성이 평지에 위치하고 읍치 인구를 수용하기에 좁고 식수가 부족해 현재의 위치에 다시 읍성을 쌓고 읍치를 옮겼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점령되었으며 조선후기 현종 때 읍치를 통제영과 가까운 거제면으로 옮기면 그 기능을 잃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읍성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성벽이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거제 고현성 09-20220221<거제 고현성>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둘레 921 m, 성벽 높이 4 m 규모였다고 한다. 동, 서, 남의 3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두었으며, 모서리를 비롯하여 방어에 치약한 지점에 치성을 쌓다. 읍성은 동서 600 m, 남북 300 m 정도로 배모양의 형태로 동쪽 독봉산과 서쪽 계룡산 사이를 남북으로 흐르는 고현천 주변 골짜기를 막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거제 고현성1<거제 고현성>

거제 고현셩(古縣城)
고현성은 당시 사등면 사등리에 있던 읍성(거제 사등성)에 인구가 늘어나자 문종 1년(1451)부터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단종 1년(1453) 완공한 읍성이다. 당시 성의 둘레는 921m, 높이 4m이며, 동·서·남쪽 세 방향에 성문이 설치 하였다. 성문 앞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만들어 적으로부터 성문을 완전히 둘러싸 보호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성곽 구조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이다. 고현성은 임진왜란 으로 함락되어 현종 5년(1664) 거제면으로 거제현 관아를 옮길 때까지 약 210년간 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1950~1953) 이전까지 성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고현 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지금은 600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현재는 읍성 남서쪽 거제시청을 둘러싸고 있는 약 600 m 정도의 성벽만 남아 있다. 방어시설 중에는 옹성이 있는 북문과 4곳의 치성이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쌓은 석축성으로 조선초 쌓은 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제 고현성 03-20220221<북쪽 성벽 (바깥쪽)>

거제 고현성 32-20220221<북쪽 성벽이 시작되는 지점>

거제 고현성 04-20220221<성벽 안쪽>

거제 고현성 02-20220221<북문 옹성>

거제 고현성 05-20220221<옹성 출입문>

거제 고현성 07-20220221<옹성 내부>

거제 고현성 06-20220221<복원한 북문 문루(바깥쪽)>

거제 고현성 01-20220221<북문 문루(안쪽)>

북문을 지나면 치성이 있는 북서쪽 모서리까지 경사진 지형을 따라 성벽이 이어진다. 돌로 쌓은 석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아래쪽 성벽과는 달리 내부는 흙으로 쌓은 석축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거제 고현성 08-20220221<북쪽 성벽>

거제 고현성 12-20220221<북서쪽 모서리에 쌓은 치성>

높은 곳에 위치한 서쪽 성벽은 높이가 낮은 편이며 가운데에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두고 있다.

거제 고현성 11-20220221<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고현성 13-20220221 <서쪽 성벽 (안쪽)>

거제 고현성 16-20220221<남쪽에서 본 모습>

거제 고현성 15-20220221<북쪽 성벽에 있는 치성>

남서쪽 모서리에도 치성을 두고 있으며 남쪽 성벽에서 치성 1곳이 남아 있다.

거제 고현성 21-20220221<남서쪽 모서리 치성>

거제 고현성 22-20220221<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고현성 25-20220221<남쪽 성벽(안쪽)>

거제 고현성 26-20220221<남쪽 성벽 치성>

거제 고현성 29-20220221<남쪽 성벽 끝 부분>

거제 고현성 30-20220221<남쪽 성벽 끝 부분>

거제 고현성 31-20220221<치성>

거제현의 읍성을 가을에 고정리에 옮겨 쌓도록 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 지구(持久)하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모름지기 올 가을에 서둘러 옮겨 설치해야 하는가? 아직 2, 3년 멈추었다가 점차로 옮겨 설치해야 할 것인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거제는 바다 가운데 섬으로 바로 적이 들어오는 길에서 처음으로 대면(對面)하는 곳에 해당하여 아주 긴요하니, 올 가을에 옮겨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5월 6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경주 읍성(사적), 경주부 읍치

경북 경주시 북부동에 있는 경주 읍성(사적)이다. 조선시대 경주부 읍치가 있던 읍성으로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나 고려말 우왕 떄(1378)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해 해안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빼앗긴 경주읍성을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다시 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경주읍성은 조선초부터 여러차례 수리를 했으며 그 내용이 기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향일문(동문) 남쪽 성벽 일부와 치성 2곳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일부 복원되어 읍성을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읍성 (사적)>

<문종실록>에 따르면 읍성은 둘레 1,904 m, 높이 약 5.4 m 정도였다고 한다. 읍성 성문으로는 징례문(남문), 향일문(동문), 망미문(서문), 공진문(북문)이 있었으며 징례문 문루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벽 앞으로 돌출되어 성문을 호위할 수 있는 치성(雉城)과 성벽 바깥에는 물이 있는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 남쪽 약 50 m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쪽 성벽과 향일문을 복원하였다.

경주읍성<경주 읍성>

OLYMPUS DIGITAL CAMERA<50 m 정도 남은 동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2번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치성과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주택가로 바뀐 2번째 치성 남쪽편 성벽터>

DCIM103MEDIADJI_0914.JPG<복원된 동문과 동쪽 성벽>

경주읍성
이 성은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축읍성으로 둘레는 2,409 m이며,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이래 역대 고려왕들은 경주를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하고 994년에는 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성은 고려 현종 3년(1012년) 축성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3.6 m 정도이나 시가지 확장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고 90 m 가량의 성벽만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월성(사적),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경주 월성(月城, 사적)이다. 삼국시대 신라 5대 파사왕이 110년에 성을 쌓고 도성을 옮긴 이래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궁성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남천 북쪽 초승달처럼 생긴 지형에 성을 쌓았다. 동,서,북쪽에는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으며, 남천이 흐르는 남쪽은 자연지형을 활용했다. 북쪽과 동,서쪽 성벽 아래에는 방어시설로 해자를 만들었다. 성곽의 입지요건이나 축성방법 등에서 대구 달성,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삼국시대 이전 삼한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월성(사적)>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년 11월(음) )
탈해(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功)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南解王) 5년(8)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년(10)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寡人)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탈해(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을 쌓다 ( 101년 02월(음) )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 101년 07월(음) )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은 둘레 2,400 m, 동서길이 900 m, 남북길이 260 m 규모로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半月城), 신월성(新月城)이라 불렀으며 궁궐이 있어 재성(在城)으로도 불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왕 때 성을 쌓고 궁성을 옮겼으며 문무왕 때 동궁과 월지, 첨성대 일대가 궁성에 편입되면서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원래는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었는데 후대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특유의 석축성으로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경주 반월성<경주 월성(사적)>

경주 시가지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을 따라 쌓은 삼한시대 토성(土城)이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월성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흘러 형산강과 합류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경주 월성(동쪽)>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월성(서쪽)>

OLYMPUS DIGITAL CAMERA<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과 남쪽 성벽>

월성에는 많은 성문이 있었는데 현재는 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와 월정교와 연결되는 서문터가 확인되고 있다. 동문터 발굴조사 결과 앞면 1칸, 옆면 3칸의 성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 출입문으로는 작은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신라와 백제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성벽은 너비 40 m, 높이 10 m 이상의 상당히 큰 규모이다. 성벽의 재료는 볏집, 점토, 건물벽체 등 다양하나 재료를 사용했으며 윗쪽에는 자연석을 견고히 쌓고 있다.  월성은 4세기 소지왕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고구려 산성 축성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문 옆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부근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으로 옮겨 놓은 석빙고>

SANYO DIGITAL CAMERA<작은 성문처럼 보이는 북쪽 성벽>

월성 북쪽에서 계림과 대릉원으로 출입하는 성문처럼 보이는 출입문을 볼 수 있는데 설명자료 등에는 성문터였다는 내용은 없다

SANYO DIGITAL CAMERA<북쪽 성문 부근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안쪽에서 본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북쪽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북쪽 출입문 서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성벽과 해자>

성안에는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 옮겨온 석빙고(보물)도 있다. 건물로는 월상루, 망덕루등의 누각과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과 내성 등이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성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월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성벽에 위치한 석빙고(보물)>

SANYO DIGITAL CAMERA<월성 내부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성문 부근 건물터>

월성은 남쪽을 흐르는 남천이 해자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쪽, 북쪽,ㅡ 서쪽으로는 인공적으로 도랑을 파서 해자를 조성했다. 해자는 월성을 크게 수리한 소지왕 때(5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월성이 동궁과 첨성대 일대로 확장되면서 조경적인 역할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남쪽, 복원이 완료된 석축해자>

월성해자는 1980년대 이후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람을 묻은 인골을 비롯하여 목간, 토기, 기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해자는 약 500년 동안 땅을 파서 만든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음이 확인되었다. 월성 부변에는 해자가 10개 이상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연못이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북쪽 성벽 아래 발굴과 복원이 진행중인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아래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에서 본 모습>

북쪽 성벽 아래 4호 해자는 동서의 길이가 약 80 m, 남북 약 40 m에 달하는 장타원형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둥근 형태의 강돌들을 이용하여 석축 해자를 조성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그 안쪽으로 쌓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비가 완료된 4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2호 해자, 3호 해자, 정비되기 이전 모습>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1호 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때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동궁(東宮)을 처음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궁궐이 월성 밖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월성 해자 북쪽에서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첨성대는 궁궐에서 창경궁 관천대와 비슷한 역할과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 679년 08월(음) )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SANYO DIGITAL CAMERA<1호 해자와 계림 사이 계림 남편 건물터>

월성 북쪽편에는 계림 남쪽과 북쪽, 첨성대 남쪽에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내물왕릉과 계림 부근, 첨성대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제의시설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보이는 계림 북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월성에서 대릉원으로 연결되는 길>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첨성대 남쪽편 건물터>

 

경주 월성(慶州 月城), 사적, 경북 경주시 인왕동 387-1
이 곳은 신라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 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月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 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후 파사왕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 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었고, 동쪽 · 북쪽 ·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도랑인 해자(子)를 팠다. 남문, 북문, 인화문 등과 임해전(臨海殿)으로 통하던 임해문이 있었으며, 그 밖에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 얼음창고인 석빙고가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시안 시안성벽(西安城墙),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 성곽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시안 성벽(西安 城墻)이다. 한(漢)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중국 역대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시안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도성(都城)이다. 수(隋) 때 현재의 위치에 도성을 처음 쌓았으며 당나말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의 성곽은 명(明) 때 주원장 둘째 아들이 진왕으로 봉해지면서 다시 쌓았는 당나라 황성 터의 성을 연장하여 다시 쌓았으며 그 후 여러차례 수리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1년 중국 최초로 중점보호문물 및 AAAA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체 둘레 13.74 km로 남북으로 2.6 km, 동서로 3.5 km 정도의 직사각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높이이 12 m 정도이며, 상부 너비 12 ~ 14 m이다. 성벽 바깥에는 땅을 파서 만든 호성하(护城河,해자), 성벽 위에는 갑루, 전루, 성루 등의 누각과 여인장, 타구 등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인 장락문, 안정문, 영녕문, 안원문을 비롯하여 18곳의 성문을 두고 있다. 현재의 성벽은 구운벽돌로 성벽을 쌓은 것으로 명.청대 중국 도성(都城)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성벽, 명.청대 중국 도성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녕문(永宁门)은 장안성 남문으로 명나라 초 장안성을 다시 쌓을 때 “영녕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옹성 형태의 도성 정문으로 갑루(闸楼), 전루(箭楼), 정루(正楼)를 갖추고 있으며 앞쪽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인 조교(弔橋)가 있었다. 성문 양쪽에는 성문을 호위하기 위한 돌출된 형태의 치성(雉城)과 적루(敌楼)를 두고 있다. 도성 정문 형태가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한양 도성 숭례문(국보 1호)과 같은 성격의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영녕문.

영녕문 정루(正楼)는 성문 위에 세워진 벽돌로 쌓은 3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천안문처럼 방어적 성격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문루이다. 명나라 초(1378년) 장안성을 다시 세울 때 지어졌으며 청대(1526년) 이후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다. 숭례문 문루처럼 중국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정루

영녕문 앞은 옹성이 있으며 방어시설인 전루(箭楼)가 옹성 위에 세워져 있다. 옹성은 명나라 말(1636년) 이자성의 난 때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루(箭楼)는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벽돌로 쌓은 큰 누각 건물이다. 건물은 4층으로 앞쪽 각층에는 12개의 창을 두고 있다. 옆쪽에는 1층을 제외하고 각층에 창을 두어 총 64개의 창이 있다. 내부는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양쪽에도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옹성과 전루.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전루와 갑루

갑루(闸楼)는 옹성 바깥쪽 해자를 건너는 현수교 다리인 조교(弔橋)를 통제하기 위한 출입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작은 규모의 2층 건물로 바깥쪽을 향해 적을 공격하기 위한 창문을 두고 있다. 전루와 갑루 사이에도 옹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갑루와 옹성. 그 앞에 해자를 건너는 다리가 있고 도성 출입문을 상징하는 패방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옆을 지나는 도로.

장안성 바깥에는 성을 둘러싸는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다. 호성하(护城河)라 불리는 해자는 둘레 14.6 km 정도이다. 수당 시기에 처음 건설되었는데 방어시설이면서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며 홍수 때 물을 임시로 배출하는 배수시설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수.당시기에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명.청대에 여러차례에 걸쳐 땅을 깊게 파고 폭을 넓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해자는 남문 주위 주작문에서 건국문까지 약 2.84 km 정도이며 깊이는 4.5 ~ 6 m 이다. 지금은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동쪽 건국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서쪽 주작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시안성벽(西安城墙).비림역사문화경구(碑林历史文化景区) 호성하(护城河) 소개
수당 시기에 건설된 서안해자는 성을 에둘러 총 길이는 14.6 km이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방어체제라고 할수 있다. 고대의 “외호”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2가지 작용이 있다. 하나는 해자밖에서 적을 막아 서안성 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물저장, 그리고 황수가 배수에 사용되어 도시 기후를 개선하는 것이다. 역사상 서안 해자를 처음으로 판 것은 당나라말기였고 명나라초기 배수로를 넓혀서 확대하는데 서안해자의 중요한 두시기라고 할수있다. 그후 청나라 시기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넓힌 재자를 여러차례에 걸쳐서 더욱 깊게파고, 넓혔으며, 준설하여 근대시기의 서안해자를 형성하였다. 2013년부터 정식 시범구역으로 된 해자의 길이는 2.84 km, 물깊이는 4.5 ~ 6 m이며, 주작문부터 건국문으로 향하는 수역을 주선으로 해자연안의 경치에 대하 종합적인 개조를 진행하였습니다. 수로청소, 오수의 흐름을 막고, 물속의 생물을 다스리며, 물양을 증가하는 등 방식으로 해자수역에 대해 기본적인 처리를 진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시안 성벽 바깥쪽으로는 해자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성벽을 따라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성벽을 성문, 적루, 성벽, 여인장, 타구 등 다양한 방어시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에 조성된 공원

적루(敌楼)는 성벽 위에 세워진 누각을 말한다. 시안 성벽 위에는 적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나 성문 주위 등에 다양한 형태의 적루가 세워져 있다. 성문 양쪽에 성문을 호위하기 위해 세워진 치성 위에 세워져 있는 적루가 대표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동쪽에 세워진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모습. 벽돌로 지은 2층 누각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에 위치한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각루

OLYMPUS DIGITAL CAMERA적루가 없는 치성

장안성 남문 안쪽 문묘였던 비림박물관 앞 성벽 위에 있는 괴성루(魁星楼, Kuixing Tower)이다. 괴성루(魁星楼)는 장안성 남문 동쪽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학의 신으로 추앙받는 괴성(魁星)을 상징한다. 한자 “魁”는 “乚”이 “斗”를 들어올리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를 통과할 후보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나라 때 (1618년) 서안을 다스렸던 지방관이 이 지방 출신이 과거를 통과하지 못한것을 애석하게 생각해 문묘(文廟) 앞 성벽위에 세웠다고 한다. 근대에 파괴되었던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비림박물관 앞  괴성루

괴성루는 2층 목조건축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으로 명.청대 이전 누각 건물 형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괴성루.

성벽은 높이 12 m이며, 바닥너비 15 ~ 18 m이다. 성벽 내부에는 황토흙을 다져 쌓았으며 바깥쪽과 상부에는 구운 벽돌로 쌓았다. 성벽 상부는 너비 12 ~ 14 m로 마차 2대가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규모이다. 바깥쪽을 향해서는 방어시설인 여장과 타구가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벽돌로 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마차 2대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넓은 성벽 상부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에서 내려 보이는 비림박물관 부근 도심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 도로

장안성 북쪽 성벽은 당나라 황성 성벽 자리에 다시 명나라 때 다시 쌓은 것이다. 황성에 있던 대안궁을 비롯하여 궁궐 등은 남아 있지 않고 시안 기차역을 비롯하여 도시의 중심기능을 하고 있는 지역이다. 북쪽 성벽은 동서로 약 4.13 km이며 북문인 안원문(安远门)문을 중심으로 상무문 등 6개의 성문이 있다.

해방문(解放门)은 원래 중정문(中正门)이었는데 1934년에 이름이 바뀌었다. 1952년 시안역 광장이 확장되면서 철거되었다가 최근에 현재의 모습으로 성벽이 연결되었다. 시안 기차역은 해방문(解放门)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뒷편에 당 대명궁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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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서쪽에 위치한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안쪽).

해방문 동쪽으로는 상검문(尚俭门), 상근문(尚勤门)이 있는데 최근에 성벽을 연결하면서 도로가 지나가던 곳에 성문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상검문.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상검문 동쪽 상근문(尚勤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쪽 성벽

서안 성벽
서안 성벽은 중국에 남아있는 성벽 중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고대 성벽건축물로, 고도 장안의 모든 역사를 한데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문화재입니다. 또한 그 독특한 매력으로 인하이 새인들에게 웅장하고 장대한 모습을 뽐내며 전 세계에 고대 중국인들의 깊은 지혜를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안 성벽은 기원후 582 년 (수나라 개황 2 년)에 건설되었고 오대, 송, 금,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홍무부년에 당나라 시대 당장안성 황성을 기초로 확대 및 복원하였습니다. 서한 성벽 둘레 길이는 13.74 km, 상부 너비 12 ~ 14 m, 하부 너비 15 ~ 18 m 입니다. 성벽에는 성보호 하천(包括护城河,해자), 조교(弔橋), 갑루(闸楼), 전루(箭楼), 성루(城樓), 각루(角樓), 적루(敌楼), 여인장(女儿墙), 타구(垛口) 등의 고대 군사 시설이 갖추이지 있습니다. 현재 중국 최초 중점보호문물 및 AAAA 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 성벽 도시 및 시안 시민들의 무한한 협력과 공동노력으로 양호하게 보호되고 있으며, 오랜 고도의 신비로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세월의 변천과 역사의 흔적, 문화 정수의 축적, 풍부한 인류문화 체험을 제공하며 현대인의 생활에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고있습니다. 성벽, 환성 공원 숲, 성보호 하천, 성 보호 하천 외부 도로, 순성항 등이 “벽림하로항”(성벽, 숲, 하천, 도로, 나루터)가 5위일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어, 서안의 역사 및 문화적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국제화된 대도시로서의 중요한 지표이자 정신적인 정원과도 같은 공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고적 보호 계승에 있어서 모범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시,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청도 청도읍성,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있는 옛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쌓은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방어시설을 정비할 때 다시 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부분만 남고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고 있다.

성은 둘레 1.88 km 정도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7 m이며 북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동.서.북쪽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며, 고종 때 남문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문과 모서리부분에 치성을 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었다.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는 남원성이나 인근 언양읍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17-20200106청도군 읍치에 남아 있는 청도읍성.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읍성으로 둘레 1.8 km의 사각형을 평면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1-20200106청도읍성 동쪽 성벽. 약 340 m 정도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성벽에는 동문, 동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등 방어시설을 하고 이다.

청도 청도읍성 05-20200106읍성 동문터. 읍성 내부를 들어오는 주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위가 훼손되었다.

청도 청도읍성 03-20200106동문 남쪽에 있는 치성. 바깥으로 길게 나와 있어 동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2-20200106동쪽 성벽 바깥쪽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동쪽 바깥은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되어 있어 적을 방어하기 쉽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청도 청도읍성 07-20200106동문 안쪽 성벽. 바깥쪽은 큰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쪾은 토성처럼 흙으로 쌓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읍성 21-20200205복원하기 전 모습. 성벽은 무너지고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청도읍성 동쪽 성벽
청도읍성 동쪽 성벽은 읍성 동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 m이다. 성벽 구간은 2005년 지표조사에서 성 터 위에 집 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 폐문루, 치성 3곳이 확인되었다. 문헌에 동문루는 임진왜란 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 35년(1709)에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 22년(1798) 옛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벽 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 터, 2007년에 동문루 옆 치성, 2016 ~ 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다. 성벽 조사에서기초와 몸체(체성+내탁)가 확인되었다. 기초는 정리한 터 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마주보게 다진 3층이다. 기초 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다. 몸체는 기초 위에 약 5 m 너비로 성돌을 마주보게 내.왜벽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틈새에는 잔돌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몸체 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내탁했다. 동문루 터는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훼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폐문루 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 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성벽과 함께 쌓은 치성은 동문루 옆과 성벽 남.북쪽 모서리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정비사항은 2008년에 주차장, 관광안내소, 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2009 ~ 2010년에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에 동문루 남쪽의 성벽을 남은 성벽 위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대로 쌓았다. 성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읍성 04-20200106동문 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3-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새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5-20200106치성 아래에서 본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4-20200106청도읍성 남쪽 성벽.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해자처럼 연못이 있다.

청도 청도읍성 08-20200106북동쪽 성벽 위. 토성처럼 흙으로 쌓은 성벽길이 있으며 조총공격에 대비해 여장을 설치하였다.

청도 청도읍성 09-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1-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동문 부근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2-20200106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0-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북쪽 성벽. 멀리 치성과 북문이 보인다. 양쪽 치성에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청도 청도읍성 16-20200106고지도에 표현된 청도읍성. 평지에 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는 인근 언양읍성이나 남원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읍성내 있는 옛 청도군 관아 객사.

청도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km), 높이는 5자 5촌(약 1.65 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 (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를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