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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관문성(사적), 왜(倭)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장성

경북 경주시 외동읍, 울산 북구 범서읍 모화리 등에 있는 통일신라 성벽인 관문성(關門城, 사적)이다. 왜(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길이 12 km에 이르는 장성(長城, Wall)이다. 경주와 울산 경계를 따라 7번 국도와 14번 국도 주변에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장성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잘 다듬을 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이전에 쌓은 산성에 비해 기술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때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잘 다듬은 돌을 5단 내지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는데, 위로 쌓아 올리면서 폭을 좁혀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는 모벌군성 또는 모벌관문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에 이곳을 관문성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관문성(사적), 경주와 울산 범서읍을 연결하는 14번 국도를 막고 있는 성벽>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慶州)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日本)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 5자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掌員)은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개원 21년 계유(癸酉)(733년)에 당나라 사람들이 북쪽 오랑캐(北狄)를 치려고 신라에 청병하여 사신 6백 4명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효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022년)

경주 서남쪽 치술령(해발 765 m)과 동남쪽 외동읍 모화리 삼태봉(해발 630 m) 사이를 성벽으로 막고 있다. 가운데에는 있는 순금산(해발 290 m)과 천마산(296 m)과 양쪽에는 산성형태의 성벽을 쌓고 있으며 7번 국도와 14번 국도 주변에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장성을 이루고 있다.

경주 관문성(사적)
<경주 관문성 일대>

관문성 남쪽으로는 경주에서 발원하여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동천으로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농경지들이 있다. 7번국도에는 높은 고개나 장애물이 없어 왜(倭)가 신라를 침범한다면 울산항에서 하루정도면 경주까지 도착할 수 있는 짧은 거리이다. 삼국통일 이후 백제와 동맹관계였던 왜(倭)에 대해서 문무왕을 비롯하여 많은 통일신라의 집권자들이 고민했던 부분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정상아래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울산 북구 동천 일대>

관문성<7번국도 동쪽 삼태봉으로 연결되는 성벽>

7번국도를 따라 흐르는 태화강 지천인 동천 주위는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관문성은 그 중 폭이 좁은 곳에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평지에 쌓은 성벽은 약  km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천 주변 성벽이 있었던 지역>

관문성은 동천 옆 위치한 순금산과 천마산을 지나 치술령까지 연결된다. 순금산 일대에는 방어에 용이하도록 테뫼식 산성처럼 성벽을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천 서쪽편 순금산 일대>

순금산 일대에는 성벽이 일부 남아 있고 주변 경치와 지형적 조건 등을 살펴볼 수 있어 관문성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관문성 탐방로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에서 전망이 좋은 지점>

OLYMPUS DIGITAL CAMERA<옛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에서 볼 수 있는 성벽의 흔적>

OLYMPUS DIGITAL CAMERA<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정상부 부근>

삼국시대 박제상의 전설이 남아 있는 치술령 아래 14번 국도 옆 마을에는 관문성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은 잘다듬은 큰돌로 아래부분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다는데 그 모습이 잘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4번국도를 막고 있던 관문성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 남아 있는 성벽을 쌓았던 큰 돌들>

관문성 성벽에서 10개의 석각이 발견되었는데, 구간별로 축성을 담당한 군현이 작업한 구역 등을 기록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글자새김돌,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글자새김돌(복제품), 경주박물관, 2012년>

관문성(關門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외
관문성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왜구를 막고자 쌓은 것이다. 이 성은 경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21 km 떨어진 외동읍 부근의 산에 축조되어 있다. 한 개의 성이 아니라 치술령(鶴述嶺)과 모화리 동편의 산 사이에 길이 12 km 정도의 장성과, 양남면 신대리의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 km 정도의 두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치술령에서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의 경계를 따라 신대리 동쪽 산까지 이른다. 관문성을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사람들은 만리성(萬里城)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터로 추측되는 석축이나 창고터, 병사터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현존하는 남산성과 관문성의 석벽을 비교해 볼 때,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서 관문성을 쌓은 기술이 훨씬 발달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문화재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

둔황 만리장성 양관(陽關)과 양관박물관

중국 둔황에 있는 한대(漢代) 만리장성 관문인 양관(陽關)이다. 한 무제 때 흉노를 공략하기 위해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하면서 옥문관과 함께 세워졌다. 옛 실크로드 남도(南道)로 나가는 관문으로 당대(唐代) 인도를 방문했던 현장법사가 양관을 통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양관 일대는 소륵하(疏勒河, Shule River) 주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크게 번창했는데 송대(宋代) 이후 실크로드와 함께 쇠퇴하였다. 당시 쌓았던 성벽은 남아 있지 않으며 언덕에 봉수대터만 볼 수 있다. 지금은 양관박물관이 세워져 실크로드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한대 만리장성 관문을 재현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재현해 놓은 옛 양관과 성벽>

만리장성 양관은 둔황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7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에서 쿤룬산맥을 따라 인도 방면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남도 관문이다. 한대(漢代) 이래 많은 왕조들이 서역을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이곳을 통해 파견했으며, 인도를 향해 순례를 떠났던 승려들이 관문을 지나갔다.

SANYO DIGITAL CAMERA<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관 부근 봉수대>

양관박물관에는 엣 양관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벽돌로 쌓은 명청대 성벽에 비해 성벽이 높지 않으며 내부도 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관 성문, 성벽, 치성, 공성과 방어무기 등을 재현해 놓고 있다.  옥문관 주변 있는 한대 장성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양관 성벽>

1973년 양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수많은 성벽터,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으며 석비, 청동제 무기, 동전, 도기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양관박물관에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양관박물관 출입문이자 성문>

둔황지역은 주변 오아시스에서 자라는 갈대와 모래자갈을 섞어서 쌓았는데 비가 없는 사막지역에 있어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남겨 놓고 있다. 진시황이 건설했던 옛 만리장성의 원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갈대와 자갈을 섞어 쌓은 성벽>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부근에 남아 있는 엣 성벽>

SANYO DIGITAL CAMERA<양관 부근 오아시스에서 볼 수 있는 갈대>

SANYO DIGITAL CAMERA<성문과 모서리를 호위하는 치성>

SANYO DIGITAL CAMERA<성벽 안쪽에 재현해 놓은 병사들의 숙영지>

성벽 바깥에는 북방 유목민과 전쟁에서 많이 사용된 공성무기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실제 유목민들이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양한 기록으로 전해져 오는 옛 중국 공성무기들을 살펴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운제(雲梯), 성벽을 오르는 사다리 수레>

SANYO DIGITAL CAMERA<궁수들을 성벽높이 만큼 들어올려 불화살공격을 하는 수레>

SANYO DIGITAL CAMERA<투석기>

SANYO DIGITAL CAMERA<망루차처럼 보이는 공성무기>

SANYO DIGITAL CAMERA<적의 화살을 막는데 사용한 수레>

SANYO DIGITAL CAMERA<성문을 부수는데 사용한 공성무기>

SANYO DIGITAL CAMERA<앞에 칼이 있어 성문이나 밀집대형을 돌파할 때 사용하는 수레>

SANYO DIGITAL CAMERA<성벽을 오르는 병사를 공격하는 무기>

SANYO DIGITAL CAMERA<비슷한 용도의 무기>

<출처>

  1. 위키백과, 2020년
  2. 실크로드 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 2006년
  3. 실크로드사전, 편저 정수일, 창비, 2013년
  4. 百度百科, 2020년

둔황 만리장성 옥문관(玉門關)과 한장성(漢長城)

중국 둔황에 있는 한대(漢代) 만리장성 서쪽 끝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이다. 한 무제 때 흉노를 공략하기 위해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하면서 옥(玉)을 수입하던 통로라 하여 옥문관이라 불렀다. 옥문관은 설치된 이래 여러 차례 위치를 옮겼으며 당대(唐代)까지 서역과 연결되는 중요 교통로로 번창하였다. 둔황 북서쪽 9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문관 유적은 1907년 영국 탐험가가 소방반성(小方盤城)을 조사하다가 옥문도위(玉門都尉)라 적힌 목간을 발견하면서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현재의 유적은 당나라 때 건설된 것이다.

옥문관은 ‘옥이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옥의 산지인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 위치한 허텐이라고 곳에서 중국의 은.주 시대부터 옥을 수입해 왔다고 한다. 이는 중국이 서역과 무역을 하고 서역을 경영하고자 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한무제때는 이 곳에 ‘옥문관도위’를 설치하고 흉노를 공략하기 위해서 수차례 출병하였으며,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역시 아마도 이 곳을 거쳐서 서역으로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유적>

옥문관은 투루판을 거쳐 천산산맥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오아시스 북로의 첫번째 관문이다. 옥문관을 지나면 중국땅을 떠나 서역으로 나가는 것으로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관문 바깥이 세상밖이라 여겨졌다. 둔황에서 옥문관까지 대중교통으로 갈 수는 없고 택시를 이용해서 찾아갈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유적지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옥문관 주위는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있고, 멀리 지평선이 보인다.  사막에서는 불어오는 거센 모래바람은 ‘삭풍(朔風)’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을 분위기이다. 수도 장안(시안)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이 곳에 주둔했던 병사들에게 변경이라는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을 것이다. 초원에서 흉노 기마병이 갑자가 몰려오는 것을 상상해 보면,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이며 변경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주위 사막>

목간이 발견되어 옥문관이었음이 확인된 관성(關城)이다. 반상 작은 밥상처럼 생겨 소방반성(小方盘城)이라 불렸다. 관성은 동서로 24m, 남북으로 26.4m이 북쪽과 서쪽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황토로 성벽을 쌓았는데 높이 10m, 상부 너비 3m, 하부너비 5m이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관성>

SANYO DIGITAL CAMERA<관성 서문>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관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북쪽과 동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북문>

SANYO DIGITAL CAMERA<동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남쪽 성벽>

이 곳 사막은 모래가 거의 없고 메마른 흙만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장성 바깥쪽으로는 지금은 물을 볼 수 없지만 소륵하(疏勒河, Shule River)라는 강이 흘렀으며 주위는 초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사람이 살기 힘들어져 송대 이후 옥문관과 실크로드는 그 중요성이 크게 줄었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남쪽 지평선>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주변에 보이는 봉수대 자리>

새원(塞垣)이라 불린 옥문관 주변 한장성(漢長城)은 옥문관 주위 한무제 때 흉노를 공락하기 위해 실크로드를 개척하면서 건설되었다.  둔황 동쪽 안서(安西)부터 서쪽 로프노르 호수부근까지 약 150km이르며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동서로 45km, 폭 500m 정도로 분포하고 있다. 현존하는 유적으로 고성(古城) 2곳, 봉수대 20곳, 성벽 18 정도가 남아 있으며 그중 옥문관과 대방반성(大方盘城)이라 불리는 고성이 잘 알려져 있으며 여러곳의 창고터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부근 한대 장성 유적>

명대에 벽돌로 쌓은 북경 주변 만리장성에 비해서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당나라 때까지 유지되었던 성벽이다. 한무제때 명장 곽거병,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후한때 명장 반초, 고구려인 후손으로 서역을 경영하였던 고선지 장군까지 수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이 곳을 거쳐갔던 역사적인 의미가 큰 유적이다.

SANYO DIGITAL CAMERA<한장성 성벽>

만리장성 성벽은 지역에 따라 다른 형태로 쌓았는데 둔황지역은 주변 오아시스에서 자라는 갈대와 모래자갈을 섞어서 쌓았는데 비가 없는 사막지역에 있어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남겨 놓고 있다. 진시황이 건설했던 옛 만리장성의 원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갈대와 자갈을 섞어 쌓은 고대 둔황지역 성벽>

SANYO DIGITAL CAMERA<가까이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인근 양관에 재현해 놓은 옛 성벽 모습>

옥문관 앞쪽으로는 로프노로 호수로 흘러가는 지금은 말라버린 소륵하가 있었다. 사방이 사막으로 되어 있는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물이 부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 오아시스에서 성벽을 쌓았던 갈대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인근 오아시스와 근처에서 자라는 갈대들>

SANYO DIGITAL CAMERA <사막을 따라서 이어지는 만리장성 흔적>

SANYO DIGITAL CAMERA<멀리 보이는 봉수대>

<출처>

  1. 위키백과, 2020년
  2. 실크로드 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 2006년
  3. 실크로드사전, 편저 정수일, 창비, 2013년
  4. 百度百科,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