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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영성, 경상좌수영 군영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경상좌수영성 옛터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좌수 수군 총책임자가 머물던 진영(鎭營)이다. 원래는 부산포에 있었는데 세조 때(1459년)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직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후 인조 때 수영만 일대가 홍수로 매몰되면서 부산항 부근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고 하여 효종 때(1652년) 다시 옮겨져 구한말 군사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벽 대부문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고 남문 홍예와 성벽 남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아 있다. 1995년 수영구가 분리되면서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곰솔과 푸조나무 등 오래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 수영성  02-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하마비>

옛 수영성 성벽은 공원 남서쪽 언덕에 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석은 현재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성벽은 조선후기 숙종 때 감만이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은 당시 축성방식이 적용되어 잘다듬은 큰 돌로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약 2,785m 높이는 4m 정도이며 4개의 성문과 4개의 수구, 3곳의 옹성과 여러 치성을 두고 있었다. 동문 바깥쪽 수영만에 군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었다.

부산 수영성<경상좌수영성 공간배치>

부산 수영성  09-20211125<공원 서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

부산 수영성  10-20211125<성벽>

수영성 공원 서쪽편 입구에는 옛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성문 앞에는 성을 수호하는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부산 수영성  01-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홍예기석>

부산 수영성  03-20211125<안쪽에서 본 모습>

경상좌수영성 남문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을 지휘하는 본부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성’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이다. 이 남문은 숙종 18년(1692)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동에 있는 옛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용되었고 1962년 6월 수영초등학교가 광안동으로 이전한 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현재 앞뒤에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또한 좌우 1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해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조선개 ‘박견’을 성문 앞에 둔 것으로 보아 경상좌수영성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남문 안쪽에는 이곳에 경상좌사영 관아가 있었던 옛터였음을 보여주는 좌수영성지곰솔(천연기념물)
좌수영성지푸조나무(천연기념물) 등의 고목들이 남아 있다.

부산 수영성  21-20211125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천연기념물)>

부산 수영성  04-20211125<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공원 안쪽에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각각 하나의 건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부산 수영성  15-20211125<수영고당이 있던 자리>

부산 수영성  12-20211125<독신묘와 수영산신당>

이곳에는 2017년까지 수영고당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고당은 임진왜란 대 왜병에 항거한 송씨할매를 기리는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독신묘와 산신당을 각각 하나의 건축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공원 서쪽에 있는 25의용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저항하다 죽은 수영성 성민을 기리는 곳이다. 당시 경상좌수사는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성민 25명과 수군이 왜군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산 수영성  11-20211125<25의용단>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동래 출신 어민으로 경상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다시 침범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부산 수영성  07-20211125<안용복 장군 사당>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하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수영성이 있던 곳을 199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부산 수영성  08-20211125<수영사적공원>

부산 수영성  05-20211125<공원 내부>

부산 수영성  14-20211125<뒷편 산책로>

좌수영성지, 부산시 수영구
이 성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던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좌수영이란 서울에서 보아 낙동강의 좌측을 담당하는 수군의 주진을 말한다.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본래 감만이포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고,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3)에 사천(수영천)의 범람으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1652년(효종 3)에 이곳은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또다시 옮겨왔다. 그 후 1852년(고종 32)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될 때까지 243년간 이곳에 있었다. 경상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그 관할하에 1개의 첨사영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덜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되었으며,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좌수영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의 총책을 맡고 있었다. 이 성의 초기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것은 165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 동원된 인력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돌에 언양,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지방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 같다. 성의 둘래는 양 2,784m, 성벽의 높이는 4m였으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리소흘로 대부분 폐허화되고, 지금은 성벽과 남문, 홍예,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최근에 시립박물관에서 부분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있는 이충무공유적(사적)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을 지휘했던 곳이다. 충무공은 한산대첩 후 이곳에 운주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 본영으로 삼았다. 이후 정유재란 때 칠전량에서 조선수군이 크게 패하면서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영조 때(1739년) 통제사 조경이 유허비를 세우고 운주당이 있던 자리에 제승당중건하면서 이충무공의 업적을 기렸다. 이후 197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크게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한산도<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한산도(閑山島)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약간 규모의 섬으로 약 610세대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한산도 앞 바다에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산도 앞바다에는 거북선 모양의 등대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여객선에서 보이는 한산도>

SANYO DIGITAL CAMERA<거북등대>

통영항에서 한산도 유적지까지는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으며 선착장에서 유적지까지는 해안길을 따라 약 800m 정도 걸으면 된다.

SANYO DIGITAL CAMERA<여객선 선착장>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입구>

유적지에는 1976년에 크게 중건한 제승당을 중심으로 이순신 장군의 <진중시>로 유명한 수루,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활터인 한산정이 있다. 또한 조선후기 영조 때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세우면서 이곳이 한산도 수영 운주당이 있었음을 기록한 유허비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제승당>

제승당(制勝堂)
제107대 조경 통제사가 운주당 자리에 현 건물을 복원하면서 제승당이라 이름한 이곳은 현대의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 곳이다. 충무공은 1593년 7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한양으로 붙잡혀 가기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영을 여기에 설치하였다. 승리를 만드는 건물의 이륵과 같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도 짜고, 총통과 같은 신문기의 제작과 보급에 힘쓰는 등 모든 군무를 관장하던 곳이었다. 총 1,491일 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가 여기에서 쓰여졌고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의 제승당은 충무공이 떠난 뒤 폐허가 되었다가 1739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한 것을 197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수루는 적의 동태를 관측하는 일종의 망루이다. 조선후기 영조 떄 김천택의 시조집 <청구영언>에 실린 <진중시>의 배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한산섬 수루>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청구영언>

SANYO DIGITAL CAMERA<수루에서 보이는 한산도 앞바다>

이 수루는 일종의 망루로서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이곳에 자주 올라 왜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우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하던 곳이다. 또 이곳에는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을 연결, 봉화.고동.연등을 이용하여 남해안 적 동태를 파악하였다. 이 건물은 1976년 정화사업 떄 한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현 위치에 고증을 통해 신축한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충무사는 이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76년에 크게 중건한 사당이다.

SANYO DIGITAL CAMERA<충무사 홍살문>

SANYO DIGITAL CAMERA<충무사>

유적지에는 1739년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지으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와 통제사 이규석이 다시 세운 유허비가 있으며 입구에는 이충무공의 후손으로 통제사나 부사로 역임했던 이들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들을 모아놓았다.

SANYO DIGITAL CAMERA<제승당 유허비>

SANYO DIGITAL CAMERA<제승당 유허비>

제승당 유허비
왼쪽 비석은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작전지휘소로 세웠던 곳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아 타 없어졌었다. 이 비석은 무른 사암으로 제작되어 마모가 심하다. 오른쪽 비석은 충무공의 후손으로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이 새로 세운 것으로 전에 있었던 비석을 묻은 곳이라는 표식이 있다. 가운데 비석은 오른쪽 비석의 뒷면을 한글로 풀어 새겨 놓은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SANYO DIGITAL CAMERA<후손통제사 행적비>

SANYO DIGITAL CAMERA<후손통제사 행적비>

후손통제사행적비
이 비들은 충무공의 후손으로 통제사나 부사로 부임했던 이들의 선행을 기념하기 위해 한산도와 거제도의 주민들이 약 240 ~ 130년 전에 세웠던 송덕비를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오른쪽부터 제121대 통제사 이태상(5세손), 제138대 통제사 이한창(6세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8세손), 부사 이태권(8세손), 제203대 통제사 이규안(10세손)의 송덕비가 늘어서 있다. 이한창 통제사의 송덕비에는 ‘섬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준 공덕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고 새겨져 있는데, 나머지도 비슷한 내용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한산정은 이충무공이 활을 쏘던 곳으로 표적과의 거리는 145m이다. 과녁은 바다를 끼고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한산청>

SANYO DIGITAL CAMERA<과녁>

한산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2년 임진왜란 때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치른 장소이다. 여기에 집무실 겸 작전지휘본부였던 운주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다. 이곳은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국난을 극복한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운주당은 1597년에 건물이 없어졌으나 142년 후인 1740년 통제사 조경이 다시 짓고 이 사실을 비에 적어 남겼다. 1959년 정부가 사적으로 지정한 이래로 여러 차례 보수하여 왔으나 민족의 영웅을 모시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였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둘러본 후 이순신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높은 뜻을 후손만대에 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지를 확장하고 보수하여 1976년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이곳에는 이순신이 생전에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곳인 제승당을 비롯하여 공의 존영을 모신 충무사와 유허비, 공덕비, 한산정, 수루 등 부속 건물들이 말끔히 복원되어 수려한 주변 경관과 더불어 당시 조선 수군 본영의 면모를 되찾아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갔어도 나라 사랑하던 마음은 출렁이는 푸른 바다와 함께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조국 수호의 영원한 횃불이 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우리는 다 같이 옷깃을 여미고 공의 공적을 가슴 깊이 되새겨 영광된 통일 조국의 기반이 되기를 다짐하자.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08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위키백과, 2022년

 

 

전라좌수영 본영

전남 여수시 군자동 일대에 있었던 전라좌수영 본영이다.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남해안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본영을 각각 2곳을 두었는데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서쪽을 담당하는 수영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조선초 성종 때(1479) 순천 오동포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수영에는 둘레 1.13 km의 수영성이 설치되었는데 현재는 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80여동의 건물, 2024호의 민가 등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객사 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만이 남아 있다.

전라좌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수군을 이끌면서 왜군을 상대로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면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되기도 하였다.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에는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사적392호), 충무공을 추모하며 세운 타루비(보물 1288호), 사당인 충민사(사적381호), 전라좌수영을 지원했던 승병들의 머물렀던 흥국사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구도심에 남아 있는 옛 전라좌수영. 객사였던 진남관(국보 304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전라좌수영성 모형(유물전시관 내 전시). 여수 구항 일대 둘레 1.3 km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정문 앞에는 함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내부에는 80여 동의 관아 건물과 2,000여 호의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앞 바다에서 보이는 전라좌수영성 일대. 객사건물인 진남관이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진남관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전라좌수영성의 규모
전라좌수영성의 설치 당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21년 10월에 전라좌수영성을 수축하였는데, 당시의 규모를 둘레 3,634자라 했다. 또 1847년 기록인 『호좌수영지』에서는 성주위가 3,158포척이라 했다. 성종년간의 규모를 당시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 km가 되는데, 현재 성곽의 터로 실측된 1.74 km와 약간의 차이만 있다. 이는 이후 설치되는 치나 오성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방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관아 문루인 망해루.

OLYMPUS DIGITAL CAMERA망해루에서 옛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길. 망해루에서 바다까지는 250 여 m 정도의 짧은 거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객사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 앞면 15칸, 옆면 5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궐패를 모시는 객사이지만 전라좌수영 소속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수군훈련을 지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가운데 정청부분. 다른 지방 관아 객사와는 달리 좌.우익랑을 두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내부. 벽체를 두지 않고 내부는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수 앞바다. 지금은 건물로 막혀 있지만 선박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579년(성종 10) 순천 내례포의 수군 만호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해남의 수영을 ‘전라우도수영’, 순천의 신설 수영을 ‘전라좌도수영’이라고 하면서 부터다.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했던 여수는 조선시대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구국의 성지로 전승의 사명을 다한 곳이며, 지금까지 이순신장군의 기백과 충정 정신이 도도히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아래 전라좌수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난중일기(국보 76호, 복제품), 난중일기는 이순신장군이 임진란(1592~1598) 7년 동안 싸움터에서 손수 쓴 진중일기로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간첩(국보 76호, 복제품), 이순신장군이 친척들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를 수집하여 만든 책이다. 크기는 세로 33 cm, 가로 44 cm로 글씨는 한문 초서로 쓰여 있다.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이곳 여수에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여수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정시킨 곳인데, 1593년(선조 26) 8월부터 1601년(선조 34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거둔 승리는 조선이 왜적에게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수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곳곳에 문화유적으로 남아 있다.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 공의 공적을 새긴 통제이공수군대첩비, 공을 추모하여 세운 눈물의 비석 ‘타루비’, 국내 최초로 세워진 이순신 사당 ‘충민사’가 있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 선 승려들의 흥국사도 있으며, 송현마을에는 효성이 지극했던 공이 전쟁중에 어머니 변씨를 모셔와 보살핀 곳도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글을 되새기게 하는 이곳 여수는 임진왜란 때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임명장,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부하장교에게 직책을 수여하는 명령서

OLYMPUS DIGITAL CAMERA좌수영 수군의 서본, 전라좌도 수군이 쓰던 글씨교본

전라좌수영 여수와 임진왜란 
여수는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왜구의 침략경로에 노출되어 있어 왜구가 침략하기 시작한 고려 말부터 수군기지화 되다가 진례만호와 내례만호를 거쳐 성종 10년(1479)에 드디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1895) 혁파되기까지 417년 동안 남해안 방어의 주력기지로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다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여수의 좌수영수군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바다의 모든 왜적을 격파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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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소의 톱

여수 전라좌수영 31-20100911여수 선소 유적(사적 392호),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전라좌수영 조선소 유적이다. 이곳에서 거북선을 비롯한 함선들을 건조하였다.

여수와 거북선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하여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는 한편 갖가지 병기를 시험하는 등 마치 왜적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는 듯 대비하였다.
난중일기: 인전년 3월 27일 <일찍 조반을 먹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여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 전라좌수영 동쪽과 돌산도 사이의 해협에 선박의 통행을 막기 위해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이 설치되었던 여수 종포와 돌산도 사이의 해협. 광양만을 통해 남해 노량해협으로 연결되는 연안항로의 주요 지점으로 지금은 거북선대교가 세워져 있다.

철쇄방비시설
이 방비시설은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통행을 막는 시설이었다. 우선 긴 쇠사슬의 중간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로 사용하고, 이 쇠사슬을 바다에 가로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수면에 큰 돌을 달아매어 닻으로 사용했다. 『난중일기』에 ‘돌은 신생포(지금의 율촌)에서 떠왔고, 나무는 두산도(지금의 돌산)에서 베어 왔으며, 공은 거의 날마다 이 쇠사슬을 건너 매는 일을 감독했다’고 적혀 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전라좌수영.삼도수군통제영.진남관
전라좌수영- 조선시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 1479년(성종10)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32)에 없앴다. 현재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라좌수영 성안에는 건물 80여 동,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 봄이면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여 매영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해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1593년(선조 26)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진남관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수군의 중심기지였다. 여수지역에서 목재를 조달하여 건축하였으며,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경기도 교동도호부 관아, 교동읍성과 삼도수군통어영

교동도호부(喬桐都護府)는 한강 입구 강화 교동도에 설치된 조선시대 행정구역이다. 교동도는 섬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지금은 강화군에 속해 있지만 삼국시대때부터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와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교동도는 개화산을 비롯하여 여러 섬으로 되어 있었으나 간척사업으로 넓은 들판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고목근현이라 불렀으며 신라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경기수영이 남양에서 이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633년에는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가 설치되어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고장이다. 도호부사는 원래 종3품의 외관직이지만, 교동도호부사는 경기수영을 담당하던 정3품의 수군절도사가 겸임하였다.

강화 교동읍성 01-20200302<교동읍성 남문>

삼도수군통어영과 교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강화 교동도 읍내리에는 관아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읍성을 둘러싸고 있던 읍성 석축 일부와 남문 홍예만이 남아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430 m이며, 동.남.북에 성문을 두었다.

OLYMPUS DIGITAL CAMERA<2017년 문루를 복원하기 전 홍예만 남은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홍예>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문루 내부의 석축. ‘南樓’라고 적힌 글자가 보인다.>

강화 교동읍성 13-20200302<안쪽에서 본 남문 유랑루(庾亮樓)>

OLYMPUS DIGITAL CAMERA<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三道’라고 적힌 글자>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표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북받침돌>

성벽은 높이 6 m 정도이며 바깥쪽에 바깥쪽에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쌓은 조선후기 성벽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방어시설로는 옹성(甕城), 치(雉) 등을 두고 있다.  현재는 성벽은 돌로 쌓은 석축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앞 옹성을 쌓았던 석축>

강화 교동읍성 12-20200302<남문 동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02-20200302<남문 서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14-20200302<마을 민가 담장으로 사용되었던 서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15-20200302<서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07-20200302<북문 공북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

강화 교동읍성 06-20200302<북문 동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08-20200302<북문 서쪽 성벽>

교동읍성 북문을 나서면 교동향교와 화개산성이 있는 화개산으로 연결된다. 비상시 북문을 통해 화개산성으로 대피할 수 있다.

강화 교동읍성 10-20200302<북문에서 보이는 화개산>

강화 교동읍성 11-20200302<아래에서 본 북쪽 성벽>

교동읍성(喬桐邑城),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이 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돌로 쌓았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을 유랑루(庾亮樓), 북문을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동문과 북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문루 부분이 무너졌던 것을 201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교동도에 지금은 옛 교동부 관아의 흔적은 읍성을 쌓았던 성곽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고,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 남쪽 기슭에 관아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이 향교가 남아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한강 입구가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관아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교동향교는 후묘전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동.서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안으로 보이는 읍내리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교동도후부 관아가 있었던 읍성 내부 마을>

강화 교동읍성 16-20200302<마을에서 보이는 남문>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들은 교동면 관내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1년도부터 강화군 및 교동유림에서 이 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교동향교 입구 마을에 세워진 읍내리 비석군>

화개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향교는 고려시대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이다. 한강 입구가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관아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교동향교>

교동도는 인구가 많지 않은 작은 섬이지만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비롯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많은 물자가 오가는 연안 수로의 주요 교통요지였다. 조선후기 인조 때 강화도 방어를 위하여 남양(화성시)에 있던 삼도수군통어사를 이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수군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도수군통어영이 남산포 선착장>

강화 교동읍성 04-20200302<남산포 앞 바다>

강화 교동읍성 03-20200302<교동읍성 앞 해안 갯벌>

OLYMPUS DIGITAL CAMERA<교동읍성 남쪽 갯벌 안쪽 들판, 이 곳에 선박들이 정박해 있으면서 훈련도 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화개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교동읍성과 남산포 일대>

삼도수군통어영지(三道水軍統禦營址)
조선 인조7년(1629)에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 화량진에 설치되어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다음 인조 11년(1633)에는 3도(경기, 충청, 황해) 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에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수군을 훈련하던 훈련장 및 정박시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 1기가 현존하고 있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