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시안

시안 대청진사(西安大淸眞寺, The Great Mosque of Xi’an)

중국 고대 수도였던 시안 중심부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를 지나 이슬람 주거지역인 회족거리에 들어서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회교사원인 시안대청진사(西安大清真寺, The Great Mosque of Xi’an)를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현종 때(742년) 처음 세워졌으며, 송,원,명,청대에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공내전 이후 한때 철강공장으로 개조되기도 했으나 1956년 문화유적지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들은 명나라 초에 중건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중국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슬람사원(Mosque)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대청진사(西安大清真寺)>

대청진사는 벽으로 둘러싸인 5개의 안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 메카방향으로 건물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높은 첨탑과 웅장한 돔으로 상징되는 아랍의 이슬람사원과는 달리 전통적인 중국 사당 건물형식과 공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패루(牌樓), 오간루(五間樓), 칙사전(敕賜樓), 선례루(宣禮樓), 일진정(一眞亭), 예배대전(禮拜大展)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양쪽에 부속건물들을 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의 건축양식과 공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3번째 안뜰에 있는 3층 누각건물인 선례루가 첨탑역할을 하고 있으며, 대성전과 비슷한 형태의 대예배전이 대형돔이 있는 기도실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대청친사 가람배치>

오간루(五間樓) 앞 첫번째 안뜰

대청진사는 동.서방향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동쪽에 첫번째 출입문이 오간루를 중심으로 첫번째 안뜰이 조성되어 있다. 넓은 광장과 웅장한 출입문이 있는 전통적인 이슬람사원과는 달리 회족거리라 불리는 상업지구 골목길과 연결된 북쪽 대사정문(大寺正門)을 통해 안뜰에 들어서면 동쪽 방향으로 중국 전통 패루(牌樓)가 있고 정면에는 명대에 조성된 조벽(照壁, Screeen wall)이라 불리는 벽돌담장이 있다. 안뜰 양쪽에는 사무실로 보이는 북전청(北殿廳)과 남전청(南殿廳)이 자리잡고 있다. 손을 씻을 수 있는 수조(水操)가 있는 전통 이슬람사원과는 달리 중국식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패루에서 직선방향으로 중국 사당 출입문 양식을 보여주는 앞면 5칸 규모의 큰 출입문이 오간루를 통해 2번째 안뜰로 들어갈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회족거리 골목길에서 대청진사를 출입하는 1칸 규모의 작은 정문>

OLYMPUS DIGITAL CAMERA<조벽(照碧, Screen wall), 이슬람양식 문양으로 벽을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패루와 첫번째 안뜰>

OLYMPUS DIGITAL CAMERA<북전청(北殿廳)>

대청진사의 실질적인 출입문인 오간루(五間樓)는 문묘 출입문인 대성문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출입문에는 청진사(淸眞寺)라 적힌 청나라 양식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바닥에는 북모양의 석고(石鼓)가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간루(五間樓)>

OLYMPUS DIGITAL CAMERA<이슬람 양식을 보여주는 오간루 내부 벽면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중국적인 석고>

OLYMPUS DIGITAL CAMERA<2번째 안뜰에서 본 오간루>

칙사전(敕賜樓) 앞 2번째 안뜰

오간문을 지나면 칙사전(敕賜樓) 앞 2번째 안뜰로 들어선다. 2번째 안뜰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삼문형식의 패방을 중심으로 충천이룡비(沖天驪龍碑)라 불리는 중요한 비석이 세워져 있어 문묘의 비림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비명에 <칙사(敕賜)>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국가에서 내린 것으로 보인다. 칙사전 내부에는 여러기의 중요한 비석들이 있으며 가운데 답도에서 볼 수 있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성스러운 공간임을 보여준다. 남쪽편 건물은 목욕실(沐浴室)로 소개되어 있는데 기도실을 출입하기 전 몸을 씻는 공간이 있는 이슬람사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칙사전 앞 2번째 안뜰>

OLYMPUS DIGITAL CAMERA<2번째 안뜰 가운데 위치한 패방>

OLYMPUS DIGITAL CAMERA
<2번째 안뜰에 세워진 비석>

OLYMPUS DIGITAL CAMERA<2번째 안뜰 북전청>

OLYMPUS DIGITAL CAMERA<2번째 안뜰 남쪽 목욕실로 소개된 건물>

3번째 안뜰로 출입하는 문은 가운데 앞면 3칸 규모의 칙사전 건물이 있고 양쪽에 작은 협문이 있다. 신도들은 협문을 통해 출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칙사전 내부 바닥에는 답도로 보이는 조각이 있고 양쪽에 비석들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칙사전>

OLYMPUS DIGITAL CAMERA<칙사전 벽면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칙사전 현판, 칙사예배사(敕賜禮拜寺)라 적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칙사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칙사전 내부 바닥에 있는 답도처럼 보이는 조각상>

OLYMPUS DIGITAL CAMERA<칙사전 내부에 있는 비석들>

OLYMPUS DIGITAL CAMERA<3번째 안뜰로 들어가는 협문>

OLYMPUS DIGITAL CAMERA<3번째 안쯜에서 본 칙사전>

선례루(宣禮樓) 앞 3번째 안뜰

3번째 안뜰에는 모스크 첨탑 역할을 하는 3층 누각건물인 선례루(宣禮樓)를 중심으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선례루는 시안 대청진사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성심루(省心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문묘 대성전 앞 벽옹(辟雍)이나 행단(杏壇)을 연상시킨다. 기도실에 해당하는 대예배전을 출입하기 전에 예를 갖추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진사를 대표하는 선례루>

OLYMPUS DIGITAL CAMERA<선례루 바닥에 있는 답도 장식>

선례루를 지나면 대예배전이 있는 4번째 안뜰을 출입하는 작은 협문인 달삼문(達三門)이 있고 그 앞에는 청나라 말(1809년)에 세워진 공덕비가 있다.  남.북으로 부속건불인  남방(南房), 남궁전(南宮殿)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달삼문과 공덕비>

OLYMPUS DIGITAL CAMERA
<청나라 말(1809년)에 세워진 공덕비>

OLYMPUS DIGITAL CAMERA <북쪽 부속건물인 홍경당(洪經堂)>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부속건물>

OLYMPUS DIGITAL CAMERA<협문을 통해 연결되는 통로>

예배대전(禮拜大展)이 있는 4번째 안뜰

4번째 안뜰은 대청진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서방에서는 돔으로 된 지붕이 있는 거대한 모스크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달삼문을 지나면 신도들이 모스크에 들어가지 전에 대기하는 공간인 일진정(一眞亭)이 있고,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마당을 지나면 예배대전 월대를 출입하는 출입문을 볼 수 있다. 문묘 대성전과 비슷한 건물형태로 일반적인 모스크에 비하면 작게 보이지만 중국 사당건물 중에는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달삼문을 지나면 보이는 일진정>

OLYMPUS DIGITAL CAMERA<일진정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북청(北廳)>

OLYMPUS DIGITAL CAMERA
<북청 앞 마당에 세워진 비석>

OLYMPUS DIGITAL CAMERA<남청(南廳)>

OLYMPUS DIGITAL CAMERA<일진정을 지나 예배대전으로 연결되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앞 답도>

예배대전(禮拜大殿, Prayer Hall)을 모스크에서 기도를 올리는 핵심공간이다. 건물은 문묘 대성전과 비슷한 형태로 앞면 7칸, 옆면 9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내부는 1,300 ㎡로 1,000명 이상의 신도들이 동시에 기도를 올릴 수 있다. 내부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받은 코란이 벽면에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배대전>

OLYMPUS DIGITAL CAMERA<아랍어로 적혀 있는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예배실 앞, 1칸 정도의 툇간을 두고 있는 대성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배실로 들어가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벽면에 새겨진 장식과 화병>

OLYMPUS DIGITAL CAMERA<예배대전 앞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월대를 출입하는 출입문>

Introduction to Xi’an Great Mosque
Upon arriving in the ancient capital Xi’an, after passing the Bell Tower and Drum Tower, you will be in the Muslim residential area – Bei Yuan Men. Here, you will see a historic and magnificent ancient architectural complex – Xi’an, Great Mosque, a nationally famous mosque located in Huajue Lane in northwest corner of the Drum Tower. According to the existing inscription records, the Mosque was built in the first year of Tianbao period (742 A.D) under the reign of Emperor Xuanzong LI Long)l in Tang Dynasty, with a history of more than 1,270 years. It was rebuilt and expanded in the Song, Yuan, Ming and Qing Dynasties, especially after the foundin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relevant departments appropriated special funds for renovations year by year under the correct ethnic and religious policie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the People’s Government. Finally, a large-scale great ancient architectural complex was gradually formed, with buildings, platforms, pavilions and halls standing together harmoniously. Xi’an Great Mosque was announced as a provincial key cultural relic protection unit in 1956 and was included in the third batch of the national key cultural units in 1988. Since its opening in 1978, the Mosque has attracted a large number of tourists from more than 100 countries and regions around the world with a total of over ten million people, including Muslims and compatriots from Hong Kong, Macao and Talwan, and has received many heads of states, senior government officials and other honored guests. We believe that you will know more about this ancient architectural complex and the Muslims’ religious life after your visit. (안내문, 시안 대청진사,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 대청진사,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시안 천복사 중수비

시안 천복사(薦福寺)는 당나라 즉천무후가 당고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제 저택이 있던 곳에 처음 세워졌다. 당나라 화엄종 중심 사찰이었으며 대자은사와 함께 장안(長安)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 번창하였다. 북송 이후 천복사는 소안탑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는데 그 내력과 당시 가람배치 등을 기록한 중수비가 사찰 곳곳에 남아 있다. 사찰 입구 옛 천왕전터 앞에 있는 북송 때 세운 중수비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소안탑 뒷편 후문에는 1811년에 세워진 것이 있다. 또한 지금은 비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글씨가 남아 있는 <다보탑감응비>가 천복사에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천복사 전경>

천복사 남산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불전이자 출입문인 천왕문 앞에는 천복사를 대표하는 2기의 중수비가 세워져 있다. 그 중  <대천복사중수탑기>비는 북송 때 (1116년) 세워진 것으로 소안탑을 중수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하였다. 현존하는 천복사 중수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문에는 당나라 때 천복사에 소안탑을 세웠다는 것과 북송 때 신도들의 시주로 수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옆에는 <칙사천복선사중수기>비가 세워져 있다. 명나라 때(1472년) 세워졌다. 앞면에는 천복사를 중건한 내용을, 뒷면에 중건을 위해 시주한 관리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복사 천왕전터 앞에 세워져 있는 2기의 중수비>

OLYMPUS DIGITAL CAMERA
<대천복사중수탑기비 (<大薦福寺重修塔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restoration of the Pagoda of the Grand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대천복사중수탑기비 탁본, 당대 천복사 중수비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수기비 (<勅賜薦福禪寺重修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Imperial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수기비 뒷면>

천복사 주불전인 대웅보전 앞에는 4기의 비석들을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명.청대에 천복사를 중건하면서 세웠던 비석들이다. <칙사천복선사중건기>비, <예부차부.천복전당도> 비, <중수천복사사비기> 비,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보전 앞 마당에 세워진 4기의 비석>

<칙사천복선사중건기> 비는 명나라 때(1458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비문에는 천복사 중건과 소안탑 수리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뒷면에는 천복사 중건과 소안탑 수리에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예부차부.천복전당도> 비는 명나라 때 (1449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예부로부터 받은 공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천복사 중건과 관련된 내용이다. 뒷면에는 당시 천복사 가람배치를 그림으로 새겨 놓고 있다. 윗부분에 당시 소안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건기비 (<勅賜薦福禪寺重建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Imperial Jia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건기비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
<예부차부.천복전당도비 (<禮部箚付.薦福殿堂圖>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n Instructional letter from the Ministry of RItes & a Drawing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예부차부.천복전당도비 뒷면>

<중수천복사사비기> 비는 청나라 때 (1684년) 세워진 중수비이다. 비문에는 심오법사(心奧法師)와 자곡선사(紫谷禪師)가 천복사를 중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는 청나라 때(1692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중수기는 천복사 창건과 중수 내력을 기록하고 있으며 윗부분에 천복사 가람배치와 영역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사비기> 비 (<重修薦福寺碑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사비기비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 (<重修薦福寺碑記.薦福殿堂圖.薦福地粮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Jianfu Temple & a Drawing of the Jianfu Temple & a Record of the Territory and Properties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청대 비석 조각>

소안탑 앞에는 청대에 소안탑을 수리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2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보수천복사보탑기>비는 청나라 때(1683년) 세워진 비석이다. 청나라 때 소안탑을 수리한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다. <천복사래원> 비는 청나라 때(1734년) 세워진 비석이다. 비문에는 청나라 때(1677년) 천복사를 중건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소안탑 앞에 세워진 2기의 비석>

OLYMPUS DIGITAL CAMERA
<보수천복사보탑기비(<补修薦福寺寶塔記>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pairs of the Pagoda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천복사래원비 (薦福寺來源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the Origin of the Jiafu Temple)>

소안탑 뒷편에는 청나라 말에 천복사(1811년) 를 수리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해 놓은 중수비와 명나라 때 지장전을 중수하면서 세워놓은 비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복사 후문에 세워져 있는 2기의 비석>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지장왕전비(重修薦福寺地藏王殿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novation of the Ksitigarbha Hall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지장왕전비>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비 (重修薦福寺碑記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pair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비>

당나라 명필 안진경(顏眞卿, 709 ~ 785년)의 대표작으로 서예 교본으로 사용되었던 다보탑감응비(多寶塔感應碑, Stele of Abundant Trearsure Pagoda)이다.  천복사(薦福寺)에 세워졌던 것으로 북송 때 비림이 조성되면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
<다보탑감응비>

<출처>

  1. 안내문, 시안 천복사,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시안 당 대명궁(大明宮) 유적

중국 시안에 있는 당나라 황궁이었던 대명궁(大明宮) 유적이다. 당 고종 때(662년) 처음 지어져 220년 동안 당나라 황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장안성 안에 있는 수나라 때 정궁으로 지은 태극궁을 사용했으나 습하고 벌레가 많아 이궁(離宮)으로 건설되었는데 당 고종 때 대대적을 수리하면서 정궁이 되었다. 당나라 말 황소의 난(875 ~ 884년) 이후 지방 병마절도사들의 반란으로 파괴된 후 황궁의 기능을 상실했다.

대명궁은 궁궐배치의 기준이 되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원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3문3조(三門三朝)’의 원칙에 따라 황실가족의 생활공간인 내조(內朝), 집무공간인 중조(中朝), 신하들이 집무공간인 외조(外朝)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은 정전인 함원전(含元殿), 편전인 선정전(宣政殿), 내전인 자신전(紫宸殿)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선정전 서쪽에 영녕전(永寧殿)과 외조에 해당하는 궐내각사 등이 있었다. 내전인 자진전 뒷편에는 태액지(太液池)라는 큰 연못이 있으면 넓은 정원에는 황실에서 숭상했던 도교사원 등이 들어서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당 대명궁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유적 입구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유적지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유적지 공간배치도>

OLYMPUS DIGITAL CAMERA<입구 매표소>

 외조(外朝), 함원전 바깥 영역

외조(外朝)는  궁궐 바깥 영역으로 대명궁에서는 오문(午門)에 해당하는 단봉문(丹鳳門)에서 정전에 해당하는 함원전까지 길이 630 m의 넓은 공간을 말한다. 함원전을 중심으로 외국 사신의 접견, 황제 즉위식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베이징 자금성이나 서울 경복궁의 경우 정전 정문까지 공간을 말하며 그 기능의 거의 비슷하다. 함원전 월대 아래로 바깥세상과 궁궐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금수(錦水)라 불리는 수로가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앞 광장>

함원전(含元殿, Hanyuan Hall) 함원전은 대명궁(大明宮) 중심축에 있는 첫번째 건물로 궁궐 의례 공간인 정전(正殿) 영역의 중심건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 고종 14년(663년)에 완공되었으며 886년까지 224년 동안 사용되었다. 함원전 영역은 정전, 복도, 동.서 누각, 종루와 고루, 통로(龍尾道)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원전 앞에는 넓은 광장과 외부세계와 분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수로가 있다. 건물 양쪽에는 신하들이 대기했던 조당(朝堂)이 있었으며 양쪽 누각 아래에 함원전으로 오르는 통로가 있다. 건물 뒷편에는 내전을 출입하는 선정문(宣政門)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정전인 함원전>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건물 모형>

함원전은 높게 쌓은 월대 위에 세워졌는데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건물 바닥은 동서 76.8 m, 남북 43 m, 높이 3.46 m의 3층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원전 월대는 수로(水路)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 내전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함원전 양쪽에는 비슷한 높이 큰 누각인 서봉루와 상란각이 있으며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날개가 있는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터에 복원해 놓은 월대>

월대는 벽돌로 쌓았으며 양쪽에 월대를 오르는 계단이 있고 가운데 정전 건물이 세워져 있다. 월대는 자금성 태화전과 마찬가지로 3층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함원전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바닥에 깔려 있는 전돌>

OLYMPUS DIGITAL CAMERA<남아 있는 건물 구조물>

함원전은 중국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궁궐 건축물이다. 전면에 14개이 기둥이 있고 기둥 사이 간격은 5.35 m이다. 측면에는 6개의 기둥이 있으며 간격은 4.6 m이다. 전체 62개의 기둥을 받치는 추춧돌이 있었는데 그 중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건물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당육전(唐六典)”에 “함원전(含元殿) 양쪽에는 누각이 있는데 동쪽에 상란각(翔鸞閣), 서쪽에 서봉각(栖鳳閣)이라 한다.”라 기록되어 있다. 누각은 새의 날개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함원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봉황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건물을 오봉루(五鳳樓)라고 하며 자금성 정전 입구에 있는 오문(午門)이 이런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원래는 상란각이라 불렀든데 지금은 난상각 (鸞翔閣)이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상란각(翔鸞閣),  Luanxiang Pavilion) 터>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상란각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서봉각(栖鳳閣) 터>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서봉각 월대와 함원전을 오르는 통로>

동조당(东朝堂)은 난상각 아래 있는 건물로 서봉각 아래 서조당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함원전이 있는 정전 영역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이다. 당 고조 때(662년) 함원전과 함께 세워졌다. 이 건물은 신하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이다. 태자와 승상이 관리들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아래 동조당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서조당 건물터>

함원전 뒷편으로는 편전인 선정전(宣政殿)과 내전인 자신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선정전 서쪽에 영녕전(永寧殿)과 외조에 해당하는 궐내각사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에서 선정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함원전>

 함원전 양쪽으로는 성벽 수준의 높고 견고한 담장이 세워져 와조와 중조를 분리하고 있다. 이를 제이도궁장(第二道宮墻)이라 한다. 지금읜 옛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이도궁장>

중조(中朝), 치조(治朝) 또는 조정(朝廷)이라 불렸던 정치의 중심 공간

중조(中朝)는 치조(治朝)라고도 하며 궁궐에서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자금성이나 경복궁은 국가적인 행사기 치러지는 정전(正殿)이 치조의 중심공간이나 대명궁은 편전에 해당하는 선정전(宣政殿)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정전인 함원전은 외조 공간의 중심이 되고 있다. 황제와 신하들의 정치공간인 조정(朝廷)은 선정전 마당을 말하며 선정전 좌우에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중서성, 문하성, 어사대, 전중내성(殿中内省) 등 황제 직속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경복궁의 경우 동쪽은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東宮)이, 서쪽에 국왕직속 기관들이 모여있는 궐내각사가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조(中朝)함원전과 선정전 사이 공간>

선정전에서 130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정문(宣政門)은 함원전과 선정전을 연결하는 유일한 출입문이다. 당문종(唐文宗) 재위시 황제는 실권자였던 환관을 죽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는데 이를 “감로지변(甘露之变)”이라 한다. 당시 황제는 선정문을 통해 선정전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양쪽으로 중서성 등 황제직속 기관들이 있는 궐내각사 출입문인 월화문(月华門)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문 모형>

선정전(宣政殿, Xuanzheng Hall)은 함원전에서 북쪽으로 약 3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선정전은 대명궁에서 함원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신하들의 접견, 과거시험 합격자 발표, 사신 접견 등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금성 건청궁 선정전은 대명궁에서 중요한 장소이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선정전터에는 벽돌과 나무로 옛 형태 일부를 재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과 조정>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터 내부>

선정전 건물을 앞면 11칸의 중층 건물로 대명궁에서 함원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가운데 5칸은 나무로 만든 판문이, 양쪽 3칸 씩은 창문이 있는 벽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와 일본에서 이런 양식 거대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봉정사 극락전 등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선정전터>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앞 조정>

대명궁 중조(中朝)는 선정전 좌우로 직속 관청들이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쪽에 당의 정치제도인 3성6부 중 법령 초안을 입안하는 중서성, 최고 감찰기구인 어사대, 전중내성과 창고 등이, 동쪽에 문하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館), 정책 연구기관인 홍문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과는 달리 황세자를 위한 동궁은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동쪽 중서성 등 궐내각사가 있었던 옛터>

중서성(中書省)은 문하성.상서성과 함께 당나라 최고 정치기구인 3성 중 하나이다. 황제가 내리는 조칙과 국가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등 황제를 보좌하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중서성 장관은 중서령(中書令)이라 불렸으며 우상(右相)이라고도 한다. 상서성  장관인 상서령을 실제로 두지 않기때문에 최고의 관직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서성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중서성 모형>

어사대(御史台) 중서성(中書省) 남쪽과 월화문(月华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어사대는 당나라 최고 감찰기관으로 조선시대 사헌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고위직 관원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조선시대 사헌부는 의정부와 함께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어사대 옛터>

전중내성(殿中内省院落)은 중서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황실과 궁궐 관청에 식사와 의복, 의약 등을 제공하는 업문를 수행했다. 창덕궁 궐내각사에도 내의원과 약방이 홍문관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전중내성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전중내성 건물 모형>

경림고(琼林庫), 대영고(大盈庫)는 황실의 보물을을 보관하는 창고로 조선시대 내탕고(內帑庫)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당나라 백자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이곳에 보관된 보물들을 황제가 신하들에 하사하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전중내성과 서쪽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창고 건물터에 전시해 놓은 조형물>

함원전과 마찬가지로 선정전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제삼도궁장(第三道宮墻)이라는 높은 담장이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내전에 해당하는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동쪽편 제삼도궁장(第三道宮墻) 터>

OLYMPUS DIGITAL CAMERA<궁장을 재현해 놓은 모습>

내조(內朝), 황제와 가족들의 생활공간

내조(內朝)는 황제와 가족들이 생활하는 생활 공간으로 연조(燕朝)라고도 부른다. 내조에는 황제가 일상적으로 머무는 공간인 자신전(紫宸殿, Zichen Hall)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황실가족들이 거처하는 생활공간과 불교사찰, 도교사원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신하들을 접견하는 공간인 연영전(延英殿)과 사정전(思政殿), 최고 학술기관인 한림원(翰林院), 공식 연회 공간인 인덕전(麟德殿)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경회루, 수정전(옛 집현전) 등이 서쪽에, 자경전(慈慶殿) 등이 동쪽에 배치된 경복궁과 같은 공간배치이다. 자신전 뒷편으로는 경주 반월지(안압지)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큰 연못인 태액지(太液池)와 여름 별궁인 함량전(含凉殿)과 다양한 수목이 심어져 있는 넓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내조>

자신전(紫宸殿, Zichen Hall)은 선정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원전과 함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당 고종 때(66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내전의 중심건물로 황제가 거처하면서 일상적인 업무를 논의하는 공간이었다. 내부는 전실과 후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전실에서는 업무를 처리하고 후실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당나라 최고 관료들만 자진전에 출입할 수 있었다. 서쪽에 있는 사정전과 연영전이 일상 업무를 처리하고 신하와 외국 특사를 접견하는 공식 장소였지만 황제는 자진전을 많이 사용하였다. 자진전 건물터는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건물터에 철골구조로 옛 자진전 목재 구조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터, 철골로 목조건축물 구조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건물 모형, 앞면 9칸의 2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구조물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건물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정문인 자신문(紫宸門)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앞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담장터>

연영전(延英殿, Yanying Hall)은 자신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황제과 고위 관리들과 국무를 논의하고 군사적인 결정을 내린 장소이다. 황제는 국가적인 공식행사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당나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영역 건물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건물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출입문과 부속건물터>

사정전(思政殿, Sizheng Hall)은 연영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황제가 신하들에게 상을 주거나 간단한 연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후기 황제의 권력약화로 국정을 관료들과 환관들이 국사를 처리했는데 자진전이나 연영전은 황제의 공간이었기때문에 주로 사정전에 모여 업무를 처리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건물터>

사정전과 연영전 뒷편으로는 함상전(含象殿), 명의전(明義殿), 시정원(侍政院), 내시별성(內侍別省) 등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건물 이름으로 볼 때 황제를 보필하는 환관들이 근무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옆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뒷편 건물터>

자신전 뒷편으로는 침전인 연옆전(蓮葉殿)을 비롯하여 온실전(溫室殿), 선휘전(宣徽殿)같은 생활공간과 불교사찰인 명덕사(明德寺)가 있었으며 태액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는 청휘각(淸暉閣) 같은 휴식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뒷편>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동쪽편 건물터>

후원(後苑)

태액지(太液池)는 대명궁 북쪽에 있는 황실정원으로 연꽃이 아름다워 연엽지(蓮葉池)라고도 불렀다. 태액지는 동쪽과 서쪽에 2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이 더 큰 규모이다. 서쪽 연못은 인덕전과 함께 황실을 찾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경복경 경회루 연못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으며 동쪽 연못은 황실 가족을 위한 공간이다. 사각형을 하고 있는 경회루 연못과는 달리 경주 반월지처럼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서쪽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두어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구현하고 있다. 연못 북쪽에는 여름 별궁에 해당하는 함량전(含凉殿)과 도교사원, 불교사찰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태액지>

OLYMPUS DIGITAL CAMERA<태액지 옛모습을 그린 그림>

함량전(含凉殿, Hanliang Hall)은 태액지 동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황실은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함량전을 세웠다. 함령전은 물방울을 뿌려주는 냉방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함량전 모형>

<출처>

  1. 안내문, 시안시,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시안 진시황 병마용갱 3호갱

시안 진시황릉 3호갱은 1976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1호갱 북쪽 25 m, 2호갱 서쪽 12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 28.8 m, 남북 24.6 m 정도로 U자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전체 면적 520 ㎡ 정도로 1, 2호 갱에 비해 그 규모는 상당히 작은 편이다. 1977년 9개월 간 첫 발굴.조사 후 보존을 위해 다시 흙으로 덮었으며, 1988년 전시장을 지은 후 다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발굴.조사 결과 유적 대부분은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68구의 병용, 1기의 전차, 34개의 청동제 무기가 출토되었다. 3호갱은 1, 2호갱의 지휘부로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시황릉 병마용갱 3호갱>

3호갱은 동쪽 끝 경사로가 출입로로 사용되었으며 입구에 전차가 있는 방이 있다. 양쪽 복도를 통해 남쪽 방과 북쪽방을 연결하고 있다. 남쪽 방에는 통로, 2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되며 북쪽방은 동쪽을 향하는 직선형이다. 1, 2호갱과 같은 구조로 흙으로 벽을 쌓아 칸막이를 만들고 목재 서까래가 있는 지붕으로 덮혀 있으며 통로에 병마용이 도열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갱 내부>

출입문 경사로를 들어서면 정면에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도열해 있으며 복도를 통해 양쪽 방으로 연결된다. 양쪽 통로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갱 입구에 있는 방>

OLYMPUS DIGITAL CAMERA<입구 통로>

OLYMPUS DIGITAL CAMERA<통로에 도열해 있는 병사>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방>

OLYMPUS DIGITAL CAMERA<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작은 방>

OLYMPUS DIGITAL CAMERA<맞은편>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일직선 통로 형태의 북쪽편 방>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Preface
Pit 3 was discovered in June 1976, located north of Pit 1 at the western end. It is 25 meters to the south of Pit 1 and 120 meters to the east of Pit 2. It is of U-shape about 520 square meters, measuring 28.8 meters long from east to west, 24.57 meters wide from north to south and 5.2 ~ 5.4 meters deep. Investigation shows that Pit 3 was destroyed seriously in history. Only 68 pottery figures, one chariot and 34 bronze weapons were unearthed from this pit. Pit 3 is now known as the command center of Pit 1 and Pit 2. (안내문, 시안 병마용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 병마용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시안 진시황 병마용갱 2호갱, 발굴현장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곳

1호갱에서 북쪽으로 20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2호갱은 1976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L’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서로 124 m, 남북으로 98 m 정도 규모이다. 보병 위주로 구성된 1호갱과는 달리 궁수, 전차, 기병, 보병 등이 4개 대열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 대형은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전투시 유연하게 병력을 재배치할 수 있는 형태로 진(秦)의 독특한 군사전략과 대형이 잘 반영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굴이 진행중이며 발굴된 토용 중 아주 적은 수만 갱내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같은 1호갱과는 달리 고고학 발굴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으며, 병마용을 대표하는 토용들을 별도의 전시공간에서 가까이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시황 병마용갱 2호갱>

OLYMPUS DIGITAL CAMERA<2호갱 내부>

진흙으로 쌓은 벽이 견고한 서까래가 있는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지붕은 섬유매트가 있는 진흙으로 덮혀 있다. 병마용 유물 발굴 과정에서 지붕들은 해체되었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서 갱을 덮고 있는 지붕을 확인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붕목유적(棚木遺跡, remains of Roof beams), 병마용이 도열해 있는 갱의 지붕>

1호갱과는 달리 2호갱은 출토된 병마용들을 도열해 전시하지는 않고 있으며, 바깥쪽에 앉아서 활을 쏘는 궤사용, 서서 활을 쏘는 입사용, 장교로 보이는 중급군리용, 장군으로 추정되는 고급군리용 등 병마용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전차가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전차로 보이는 병마용들>

OLYMPUS DIGITAL CAMERA<지붕이 남아 있는 부분>

앉아서 노(弩)를 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궤사용(跪射俑, Kneeling Archer)은 2호갱 북동쪽에 위치한 궁수 중심의 대열에 발견된 것으로 갑옷을 입고 있다. 원래 노(弩)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호갱에서는 160명이 궤사용이 발굴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2호갱 출토 궤사용(跪射俑, Kneeling Archers)>

OLYMPUS DIGITAL CAMERA <궤사용들이 주로 출토된 부분>

2호갱에서는 약 116명이 기병용이 말과 함께 출토되었다. 말들은 하곡마(河曲馬, Heque horse)라 불리는 티벳 북서부지방에서 가져온 품종이라한다. 말들은 안장이 얹혀 있지만 유목민들이 사용했던 등자는 아직 없다. 기병은 꽉끼는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으며 한손에는 고삐를, 다른손에는 활을 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기병용 출토현장(騎兵俑, Cavalryman)>

OLYMPUS DIGITAL CAMERA
안마기병용(鞍馬騎兵俑, Cavalryman with his saddle war-horse)

OLYMPUS DIGITAL CAMERA<안장을 얹은 말>

OLYMPUS DIGITAL CAMERA <기병용이 출토된 부분>

2호갱에서 출토된 입사용(立射俑, Standing Archer)이다. 갑옷이 아닌 전투복을 입고 있는 보병으로 양손의 포즈는 활을 쏘는 자세를 하고 있다. 2호갱에서는 172구의 입사용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입사용(立射俑, Standing Archer)>

2호갱에서 출토된 중급군리용(中級軍吏俑, Middle-ranking Officer)이다. 모자와 네모난 신발을 신고 있다. 갑옷아래 군복은 무릎까지 늘어져 있다. 중급장교의 갑옷은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가습갑옷만 있고 다른 하는 가슴갑옷과 검은 갑옷을 같이 입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중급군리용(中級軍吏俑, Middle-ranking Officer)>

2호갱에서 발견된 장군으로 보이는 7구의 고급군리용(高級軍吏俑, High-ranking Officer) 중 하나이다. 고급군리용의 키, 의복, 투구는 그의 높은 지위를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미늘 갑옷을 입고 있으며 턱아래 리본으로 묶은 투구를 착용하고 있다. 갑옷을 장식하기 위해 리본으로 만든 8개의 매듬, 전면에 3개, 후면에 3개, 어깨에 각각 1개의 매듭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고급군리용(高級軍吏俑, High-ranking Officer)>

진시황 병마용갱은 3곳 모두 비슷한 토목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그 크기와 모양은 다르게 조성되었더. 갱은 지하 5 m 정도이며 흙으로 만든 칸막이벽으로 공간을 분리한 긴 복도형태를 하고 있다. 바닥은 도기 벽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강한 서까래가 있는 지붕으로 덮혀 있다. 지붕은 섬유매트와 흙으로 덮혀 있으며 경사지니 도로를 통해 지상으로 연결된다. 전체적으로 병마용을 은폐하기 용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붕목유적(棚木遺跡, The traces of timber), 병마용갱을 덮고 있는 지붕>

OLYMPUS DIGITAL CAMERA<지붕과 그 아래에 묻혀 있는 병마용>

OLYMPUS DIGITAL CAMERA<병마용갱에 사용되었던 벽돌들>

OLYMPUS DIGITAL CAMERA<복도에 묻혀 있는 병마용>

OLYMPUS DIGITAL CAMERA<복도에 묻혀 있는 병마용>

OLYMPUS DIGITAL CAMERA<철전판(鐵栓板, Iron belt), 철추(鐵錘, Iron hammer), 철부(鐵斧, Iron axe)>

OLYMPUS DIGITAL CAMERA<포지전(鋪地磚, The pottery floor bricks)>

OLYMPUS DIGITAL CAMERA<붕목유적(棚木遺跡, The traces of timber)>

진시황 병마용에서는 동노기(銅弩機, Bronze crossbow trigger), 동월(銅鉞, Bronze battleaxe), 동극(銅戟, bronze halberd), 동모(銅矛, Bronze spear), 동피(銅鈹, broze pi), 동성(銅殳, Bronz Shi), 동과(銅戈, Bronze Gi) 등 약 4만여 개의 청동무기가 출토되었다. 이 무기들은 모형제작, 주조, 마무리 과정을 통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무기의 표면에는 크롬처리기술을 통해 도금되어 발굴 당시 새것처럼 반짝여 보였다고 한다. 이것은 진나라 때 도금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으며 무기제조 과정이 표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균(金鈞, Bronze hook)

OLYMPUS DIGITAL CAMERA동전촉(銅箭鏃, bronze arrow-heads), 철정동촉(鐵錠銅鏃, Bronze arrow with iron shaft)

OLYMPUS DIGITAL CAMERA
동노기(銅弩機, Bronze crossbow trigger), 동월(銅鉞, Bronze battleaxe)

OLYMPUS DIGITAL CAMERA동검(Bronze Sword)

OLYMPUS DIGITAL CAMERA동극(銅戟, bronze halberd), 동모(銅矛, Bronze spear), 동피(銅鈹, broze pi), 동성(銅殳, Bronz Shi), 동과(銅戈, Bronze Gi)

Preface
Located 20 meter to the north of Pit 1 at the eastern end, Pit 2 is in “L” shape. This pit was discovered in April 1976, covering area of 6,000 square meter. It measures 124 meters long from east to West, 98 meters wide from to south and 5 meters deep. Different from Pit 1, Pit 2 consists of mixed military force in four arrays: archers, war chariots, cavalrymen and infantrymen. The four arrays seemed to exist independently, but could be assembled immediately to constitute a complete battle formation during the war times. This reflects the unique strategy of Qin military affairs. The excavation work of Pit 2 is still continuing. At present a large area of the remnants of the roof beams and small part of the pottery warriors and horses are being exhibited in the Pit. It is a rare chance for visitors to enjoy the archaeological digging at the site. (안내문, 시안 진시황 병마용갱박물관)

<출처>

  1. 안내문, 시안 병마용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