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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가장 오래된 신라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이다. 2009년 포항시 흥해읍 중성링서 발견된 석비(石碑)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이다. 모양이 일정치 않은 돌에 20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대부분 판독이 가능할 정도이다. 신라 관등제 성립과정, 신라 6부의 내부구조, 신라의 지방통치와 분쟁 해결절차 등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글씨체는 예서인데 다른 신라비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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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 신라비, 복제품, 삼국시대(신라) 501년, 포항 중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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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

비문 맨 앞에 나오는 ‘辛巳’는 이 비가 건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라 지배층이 포항 중성리 지역 호족에게 명령을 내려, ‘궁宮’, 즉 토지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조정한 내용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부정형의 자연석으로 한 면에만 음각을 하였다. 이 비가 발견된 지점은 ‘영일 냉수리비(국보)’가 발견된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울진 봉평 신라비(국보)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있는 울진 봉평 신라비(국보)이다. 삼국시대 신라 법흥왕 때(524년경)에 세운 석비이다. 비는 자역석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다. 한쪽 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400자 정도이다. 울진 지역에 신라에 복속되면서 주민들이 저항하자 신라에서 육부회의를 열어 책임자에게 형벌을 내리고 이를 기록해 놓았다. 법흥왕 떄 율령반포와 6부제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검증해 주고 있다. 비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구려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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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 신라비, 524년, 경북 울진, 국보,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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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신라비에 새겨진 글씨>

524년(신라 법흥왕 11)에 신라 지배층이 울진 봉평리 지역에 명령을 내린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명령을 이행한 뒤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책임자에게 형벌을내렸다.
“525년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 매금왕 등 …. 명령을 내렸다. …. 노인법에 따른다. 신라 6부는 점박이 소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 …. 아척혜 마을의 나니리에게 곤장 60대를 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2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이다. 이 불상은 1976년 경북 선산읍 봉한동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국보)과 함께 출토된 2점의 금동보살입상 중 하나이다. 보살상은 머리에 꽃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편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복잡하고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이 특이한 보살상으로 삼국시대인 7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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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 국보, 경북 구미 봉한동, 신라 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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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본 모습>

 <출처>

  1. 안내문, 대구박물관,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경주 월성(사적),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경주 월성(月城, 사적)이다. 삼국시대 신라 5대 파사왕이 110년에 성을 쌓고 도성을 옮긴 이래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궁성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남천 북쪽 초승달처럼 생긴 지형에 성을 쌓았다. 동,서,북쪽에는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으며, 남천이 흐르는 남쪽은 자연지형을 활용했다. 북쪽과 동,서쪽 성벽 아래에는 방어시설로 해자를 만들었다. 성곽의 입지요건이나 축성방법 등에서 대구 달성,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삼국시대 이전 삼한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월성(사적)>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년 11월(음) )
탈해(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功)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南解王) 5년(8)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년(10)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寡人)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탈해(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을 쌓다 ( 101년 02월(음) )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 101년 07월(음) )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은 둘레 2,400 m, 동서길이 900 m, 남북길이 260 m 규모로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半月城), 신월성(新月城)이라 불렀으며 궁궐이 있어 재성(在城)으로도 불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왕 때 성을 쌓고 궁성을 옮겼으며 문무왕 때 동궁과 월지, 첨성대 일대가 궁성에 편입되면서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원래는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었는데 후대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특유의 석축성으로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경주 반월성<경주 월성(사적)>

경주 시가지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을 따라 쌓은 삼한시대 토성(土城)이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월성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흘러 형산강과 합류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경주 월성(동쪽)>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월성(서쪽)>

OLYMPUS DIGITAL CAMERA<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과 남쪽 성벽>

월성에는 많은 성문이 있었는데 현재는 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와 월정교와 연결되는 서문터가 확인되고 있다. 동문터 발굴조사 결과 앞면 1칸, 옆면 3칸의 성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 출입문으로는 작은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신라와 백제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성벽은 너비 40 m, 높이 10 m 이상의 상당히 큰 규모이다. 성벽의 재료는 볏집, 점토, 건물벽체 등 다양하나 재료를 사용했으며 윗쪽에는 자연석을 견고히 쌓고 있다.  월성은 4세기 소지왕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고구려 산성 축성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문 옆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부근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으로 옮겨 놓은 석빙고>

SANYO DIGITAL CAMERA<작은 성문처럼 보이는 북쪽 성벽>

월성 북쪽에서 계림과 대릉원으로 출입하는 성문처럼 보이는 출입문을 볼 수 있는데 설명자료 등에는 성문터였다는 내용은 없다

SANYO DIGITAL CAMERA<북쪽 성문 부근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안쪽에서 본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북쪽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북쪽 출입문 서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성벽과 해자>

성안에는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 옮겨온 석빙고(보물)도 있다. 건물로는 월상루, 망덕루등의 누각과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과 내성 등이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성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월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성벽에 위치한 석빙고(보물)>

SANYO DIGITAL CAMERA<월성 내부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성문 부근 건물터>

월성은 남쪽을 흐르는 남천이 해자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쪽, 북쪽,ㅡ 서쪽으로는 인공적으로 도랑을 파서 해자를 조성했다. 해자는 월성을 크게 수리한 소지왕 때(5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월성이 동궁과 첨성대 일대로 확장되면서 조경적인 역할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남쪽, 복원이 완료된 석축해자>

월성해자는 1980년대 이후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람을 묻은 인골을 비롯하여 목간, 토기, 기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해자는 약 500년 동안 땅을 파서 만든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음이 확인되었다. 월성 부변에는 해자가 10개 이상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연못이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북쪽 성벽 아래 발굴과 복원이 진행중인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아래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에서 본 모습>

북쪽 성벽 아래 4호 해자는 동서의 길이가 약 80 m, 남북 약 40 m에 달하는 장타원형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둥근 형태의 강돌들을 이용하여 석축 해자를 조성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그 안쪽으로 쌓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비가 완료된 4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2호 해자, 3호 해자, 정비되기 이전 모습>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1호 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때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동궁(東宮)을 처음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궁궐이 월성 밖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월성 해자 북쪽에서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첨성대는 궁궐에서 창경궁 관천대와 비슷한 역할과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 679년 08월(음) )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SANYO DIGITAL CAMERA<1호 해자와 계림 사이 계림 남편 건물터>

월성 북쪽편에는 계림 남쪽과 북쪽, 첨성대 남쪽에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내물왕릉과 계림 부근, 첨성대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제의시설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보이는 계림 북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월성에서 대릉원으로 연결되는 길>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첨성대 남쪽편 건물터>

 

경주 월성(慶州 月城), 사적, 경북 경주시 인왕동 387-1
이 곳은 신라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 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月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 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후 파사왕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 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었고, 동쪽 · 북쪽 ·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도랑인 해자(子)를 팠다. 남문, 북문, 인화문 등과 임해전(臨海殿)으로 통하던 임해문이 있었으며, 그 밖에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 얼음창고인 석빙고가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계림(사적), 김알지 탄생설화가 있는 곳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계림(桂林, 사적)이다.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아래에 있는 신성한 숲으로 원래는 시림(始林)으로 불렸는데 김알지가 태어난 후 계림으로 불렀다고 한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으며 내물왕 이후 김씨의 후손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계림은 느티니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수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계림(사적)>

알지가 태어나고 계림을 국호로 삼다 ( 65년 03월(음) )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1의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월성 북쪽 출입문을 나서면 서쪽편에 작은 숲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문화재로 분류할 수 있는 유적,유물이 발굴된 장소는 아니지만 신라 천년을 이끌어온 김알지 탄생 설화가 있는 숲이다. 계림은 오래된 고목들이 많고 종류도 다양해 독특한 숲을 이루고 있다. 계림 끝부분에는 경주김씨 세습 체제를 구축한 내물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월성에서 계림으로 내려오는 길>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볼 수 있는 고목들>

SANYO DIGITAL CAMERA<계림 숲>

계림에는 조선후기 순조 때(1803년)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 비각>

계림 끝에는 김알지 후손으로 왕위에 올른 내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내물왕릉(사적)이다. 신라는 내물왕 이후 김씨와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계림 바깥쪽으로는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인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보이는 고분들>

SANYO DIGITAL CAMERA<내물왕릉(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첨성대 부근에서 보이는 계림>

OLYMPUS DIGITAL CAMERA<계림 야경>

대릉원 입구에는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를 모시는 계림세묘(桂林世廟)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림 세묘>

경주 계림 (慶州 桂林), 사적, 경북 경주시 교동 1
이 숲은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탤해왕)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계림)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5.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