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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성(사적), 신라 경주를 방어하는 주요 산성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명활성(明活城, 사적)이다. 이 성은 경주 동쪽 명활산에 있는 둘레 약 6 km의 신라 산성이다.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이다. 성을 쌓은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405년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처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선덕여왕 때 비담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명활성은 경주에서 동해안 감포와 연결되는 도로와 불국사를 통해 울산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지나가는 주요 교통로에 있다. 동쪽에서 신라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았던 오래된 신라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명활성(사적)>

명활산은 신라 6촌 중 명활산고야촌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높지 않은 산이나 북쪽 악산과 함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북천이 흐르고 있다. 교통로를 지나가는 군사들을 제압하기 용이한 곳에 산성을 쌓고 있다. 동해안을 통해 경주를 공격하는 왜(倭)를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의 압력이 심했던 5세기에는 궁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주 명활성 (사적)
<경주 명활성 위치>

경주는 월성 남쪽의 남천, 서쪽의 형산강, 북쪽의 알천이 자연스럽게 해자를 형성하고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쉬운 지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과 북천(알천)>

성벽은 6세기 이전에 처음 쌓았으며 후대 여러차례 보수를 하면서 견고한 신라 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방어가 용이한 능선에는 초기 성벽 형태인 토성을 그대로 두고 계곡이나 방어에 취약한 곳을 석축으로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  계곡에 있는 성벽(복원)>

명활성은 성벽을 쌓은 석축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남아 있던 일부성벽을 보완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석축은 꽤 큰 자연석을 다듬어서 2층으로 쌓았는데, 석성과 토성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성 석축>

2012년 당시 명활성은 복원이 진행중이었는데 주변에 석축을 쌓은 많은 석재들을 볼 수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이 진행중인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옛 모습을 복하고 있는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복원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구역, 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능선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도 석축을 쌓고 있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이어지는 명활성 성벽에는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초기에 쌓았던 토축을 계속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으로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토축으로 보이는 경사진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에서 보이는 명활산>

명활성은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확장되어다. 진흥왕 때(544년) 다시 쌓았으며 진평왕 때(593년) 성벽을 확장했다. 진흥왕 때 성벽을 다시 쌓으면서 그 내역을 기록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으며 안압지에서 ‘명활산성비’로 추정되는 비석조각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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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산성비, 551년, 경주 명활산성>

551년 11월 중에 명활산성을 쌓고, 거기에 관여한 지방관, 역부를 동원한 지방의 촌주, 공사의 실무자와 공사내용, 비의 위치, 공사기간, 비문을 작성한 사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비는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나오는 최초의 것으로 군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통일기 이전 신라의 신분제와 관등제, 역역동원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삼국시대(신라) 551년, 경주 안압지>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산 334
이 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하는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토성(5km)과 석성(4.5km)이 함께 있다. 신라 실성왕(實聖王) 4년(405)에 왜병(倭兵)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산성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자비왕(慈悲王) 18년(475)에는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가 소지왕(昭知王) 1년(479)부터 월성(月城) 으로 다시 옮겼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는 비담(硏)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金碩信)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1988년 성 주변에서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만든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를 발견하여 당시의 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정강왕릉(사적), 신라 50대 정강왕

경북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 50대 정강왕(재위 886~887년)의 무덤이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병으로 죽고 여동생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헌강왕릉과 함께 경주 남산 북동쪽 구릉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쇠퇴기에 조성한 소박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정강왕릉(사적)>

봉분은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이며 이 4 m, 지름 14 m의 크지 않은 규모이다. 아래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을 3단으로 둘레석을 쌓았다. 무덤 앞에는 제사를 위해 제단이 있다. 전성기 왕릉과는 둘레석에 십이지신상을 장식하지 않았으며 제단도 아주 간소하게 만들어졌다. 문.무인석을 비롯하여 석상들의 전혀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제사를 올리는 제단>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담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 

신라 정강왕릉(定康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
이 능은 경주 남산(南山)의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 김황)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 m, 지름 15 m로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둘레돌을 돌렸는데,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방형 깬돌(割石)을 2단으로 쌓았다. 바로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아우로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분황사지(사적), 신라 경주 칠처가람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터인 분황사지(사적)이다. 분황사(芬皇寺)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 선덕여왕 때(634년) 창건되었는데 경주의 신성한 숲 7곳에 조성했던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하나이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계율종을 창시한 자장(慈藏, 590 ~ 658년)과 원효(元曉, 617 ~ 686년)가 머물면서 수행했다. 황룡사와 함께 선덕왕의 후원을 받았던 높은 위상의 사찰이었으며 원효가 창시했다고 여겨지는 불교 법성종(法性宗) 중심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이후 법성종이 번성하지 못하고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크게 쇠퇴하여 작은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분황사지(사적)>

분황사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를 비롯하여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 웅장한 약사여래상이 모셔졌던 사찰이다. 분황사는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큰 사찰이었는데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각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원효대사비를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당간지주, 석정 등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칠처가람의 신성한 숲을 연상시키는 분황사 전경>

2008년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 석탑 남쪽에 중문터와 긴 회랑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앞쪽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건물은 석탑, 금당, 중문이 남북으로 일직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 황룡사와 담을 맞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발굴 현장 모습>

SANYO DIGITAL CAMERA<발굴, 조사 당시 남쪽 중문터와 회랑터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구황동 당간지주>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옛날 절에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 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cm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臺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 기둥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지 동쪽 건물터>

경북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절터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국보 30호)이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것으로 선덕왕 때  세워졌다.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등이 화강석을 이용해서 목탑처럼 쌓은 것이라면, 분황사 모전석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7세기 신라의 조각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왕상>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SANYO DIGITAL CAMERA<분황사 석탑을 쌓았던 석재들>

석탑에는 사리와 함께 수정.금바늘 등의 공양품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비교적 초기의 사리갖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집게 등이 있어 분황사의 발원자인 선덕왕과 이 사리갖춤을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 <수정, 향유병, 장신구>

OLYMPUS DIGITAL CAMERA <선덕여왕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쪽집게>

분황사에는 삼국시대 돌우물(石井)이 남아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바깥쪽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는 유서깊은 우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석정>

분황사 석정(芬皇寺石井)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응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인 사성체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 11년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통지, 청지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사신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어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넣어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분황사지석탑 옆에는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인 화쟁국사비 받침돌이 남아 있다. 고려 명종 때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추사 김정희가 절근처에서 발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쟁국사비 받침돌>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이 비부는 고려사에 세워진 원로 비 의 받침들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 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비는 없이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비신을 받쳤던 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비적’ 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비대는 직육면체이고, 상대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분황사는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북면 세곳에 불전을 배치한 품(品)자형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흘 하고 있는 신라 최초의 공간배치이다. 기록에 따르면 30만근 이상의 구리를 들여 약사여래상을 조성해 금당에 안치하였으며 화가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도 있었다고 한다.

경주 분황사지 03<분황사 가람배치>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출토 석조 유물>

SANYO DIGITAL CAMERA<불상과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자, 7~8세기, 분황사>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보상화무늬수막새, 새무늬암맥새, 분황사 출토>

현재의 분황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되었는데 약사여래를 모신 보광전이 옛 북금당터 한쪽편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보광전>

분황사(芬皇寺), 사적 548호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유서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주석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率居)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755)에 강고내말(强古乃木)이 구리 306,7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寺格)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중문.석탑.3금당·강당·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寺域)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 구황동 당간지주,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 등의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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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이다.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백제와의 경쟁을 이기고 한강유역을 장악한 후 북한산을 방문하면서 그 내용을 새겨 놓은 것으로 황초령, 마운령, 창녕에 세운 비석과 함께 4개의 순수비(巡狩碑) 중 하나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활약과 강력한 왕권, 당시의 관직제도와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북한산 비봉에 있었는데 현재는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창녕 척경비가 건립된 561년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569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보3호01-20200212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삼국시대(신라) 진흥왕 16년(555), 서울 북한산 비봉>

비는 직사각형의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들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 m, 너비 69 cm이다.

국보3호02-20200212
<옆쪽에서 본 모습>

국보3호03-20200212
<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뒤에서 본 모습>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후기 순조 때(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여 그 내용을 판독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비에는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의 글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운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다.

국보3호07-20200212<비에 새겨진 글씨, 윗부분>

국보3호06-20200212<비에 새겨진 글씨, 아랫부분>

국보3호05-20200212
<비에 적혀 있는 글씨>

국보3호04-20200212
<비석 옆면에는 추사 김정희가 이 비석을 조사했다는 내용이 그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던 북한산 비봉>

OLYMPUS DIGITAL CAMERA<2014년 전시 모습>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순수의 목적, 순수에 참여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북한산 비봉에 서 있었으나 현재는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여기에 전시되고 있다. 비가 있던 원래 자리에는 원형을 본뜬 모형이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조사한 결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후에도 김정희는 다시 이 비를 찾아 조사하였는데 옆면에 그런 사실이 그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국보)

국립중앙박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국보)이다. 경주 보문동 부부총에서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유물로 태환이식(太環耳飾)이라 불렸다 태환이식이란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하여 무게를 가볍게 한 귀걸이이다. 전형적인 삼국시대 금귀걸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세부적으로 금실과 금알갱이를 섬세하게 붙이는 누금세공(鏤金細工)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금귀걸이 전체에 누금세공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조형미와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455호 01-20200212<금귀걸이, 경주 보문동, 국보, 삼국시대(신라) 6세기>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20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특별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