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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정동 방형분(사적)

경북 경주시 구정동에 있는 방형분(方形墳, 사적)이다. 경주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9 km 떨어진 불국사 부근에 있는 통일신라 귀족층의 무덤이다. 봉분의 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방형분이라 불린다. 봉분의 한변이 9 m, 높이는 2.7 m로 바깥쪽에는 12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을 둘렀다, 무덤내부는 남쪽에 출입구가 있는 굴식돌방무덤이다. 모서리에는 서역인 얼굴을 하고 있는 무인상과 서역풍의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구정동 방형분(사적)>

무덤은 둘레석으로 정사각형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봉토을 올려 놓은 형태로 내부는 남쪽으로 널길이 나있고, 그 안에 돌문이 있다.  출입구에서 시신이 올려져 있던 내부까지는 석재로  쌓아 널길을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널길과 무덤 내부>

둘레석은 각 모서리 사이에 방향에 따라서 3개씩 십이지신상을 새겨 놓고 있다. 무인상과 사자상이 돋을 새김을 하고 있는 돌기둥이 모서리에 세워져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둘레석 모서리에는 서역인 얼굴을 하고 있는 무인상과 서역풍의 사자상이 입체감있게 돋을새김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모서리 석재>

기둥돌에 새겨진 인물상은 원성왕릉에서 볼 수 있는 서역인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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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상>

사자상은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는 표현이 돋보인다. 서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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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상>

구정동 방형분의 모서리에 세웠던 기둥돌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깥쪽 두 면에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처럼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서역풍의 호인(胡人)이 사자와 함께 얕게 새겨져 있습니다. 머리에 띠를 매었고, 장화같은 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폴로의 스틱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있습니다. 이 계통의 인물을 아랍인, 이란인, 소그드인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십이지신상 돼지, 쥐, 소>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십이지신상 호랑이, 토끼, 용>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십이지신상인 뱀, 말, 양>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십이지신상 원숭이, 닭, 개>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구정동 방형분(사적)>

경주 구정리 방형분, 사적, 경북 경주시 구정동 산 41
이 무덤은 경주시내에서 약 9 km 떨어진 대덕산(大德山) 남쪽 구릉 말단과 접하는 평지에 위치해 있으며, 네모나기 때문에 ‘방형분’ 이라 불린다. 남쪽으로 널길이 나 있고, 그 안에 쌍여닫이 돌문이 있는 돌방무덤(石室墳)이다. 한 변이 9 m, 높이는 2.7 m인 봉토로 되어 있다. 돌방 서쪽에는 주검과 널을 얹었던 돌받침대가 있다. 바깥 아래쪽은 다듬은 돌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모서리에 세웠던 돌기둥에는 무인상과 사자상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네모무덤으로 특이한 것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황남동 고분군

경북 경주시 황남대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인 황남동 고분군이다. 일제감점기에 일련 번호가 붙여진 흙을 쌓아 올린 봉분이 30여기 남아 있으며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들도 있다. 고분공원으로 조성된 대릉원에는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으며, 월성 아래 계림 부근에는 내물왕릉을 비롯하여 5기 정도의 큰 무덤들이며, 멀리 서쪽편 황남초등학교 부근에도 6기 정도의 봉분이 있는 무덤을 볼 수 있다. 큰 무덤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고분과 주위 풍경은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남동 고분군, 내물왕릉 부근>

황남동 고분군<경주 황남동 일대 고분들>

신라 왕성이었던 월성 북쪽에는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과 첨성대를 비롯한 왕궁터가 자리잡고 있다. 첨성대 서남쪽에는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탄생설화가 담긴 계림과 내물왕릉을 비롯하여 5기의 고분이 자리잡고 있다. 넓은 잔디밭에 첨성대와 계림, 그리고 고분들이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를 대표하는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내물왕릉(사적)>

SANYO DIGITAL CAMERA<내물왕릉 앞 28호, 29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28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29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18호 무덤>

119호 무덤은 황남대총, 노동동 봉황대와 함께 봉분의 규모가 가장 큰 무덤이다. 삼국유사에 첨성대 남쪽에 내물왕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왕릉급 무덤으로 내물왕릉으로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동 119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119호 무덤>

황남동 119호 무덤 서쪽 300 m 정도 떨어진 황리단길 부근 들판에는 신라 고분을 대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19호 무덤과 연결되어 있지만 중간에 주택이 들어서 있어 분리된 지역처럼 보인다. 경주시 입구에 위치한 고분답게 가장 이른 시기인 1910년 이전에 일본인에 의해 발굴되어 돌무지덧널무덤의 형태가 확인되었다. 이후 신라 고분 발굴조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남동 고분군>

OLYMPUS DIGITAL CAMERA<143호 무덤>

145호 무덤은 일제강점기 이전 1906년 일본인이 처음 조사하였으며 1909년에 일부를 발굴,조사하여 돌무지만 확인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 있는 144호, 14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4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주택가에 있는 124호 무덤>

이곳은 최근 경주 황리단길이라 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바뀌었다. 황남동 일대에서 보이는 고분의 모습의 고도 경주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동 고분군  앞 길>

황남동 고분군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 초기의 무덤들로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 주변의 무덤에 120 ~ 124, 144 ~ 146호의 일련번호를 붙였다. 무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측되며, 1906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가 신라 고본으로는 최초로 발굴 조사를 실시한 황남동 남총이 위치하고 있다. 남총은 1909년에 일본 미술사학자인 세키노 타다시가 다시 조사하여 내부의 돌무지층을 확인하였으며, 이후의 신라 고분 발굴 조사에 영향을 주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황오동 고분군

경북 경주시에 있는 대릉원(大陵園) 중 황오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일제강점기에 70여기의 무덤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10기 정도가 봉분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후 도로를 개설하거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많은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대릉원에 무덤에 비해 봉분의 규모는 작지만 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3~4세기부터 5세기까지 경주지역 신라 무덤들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오동 고분군을 대표하는 39호 무덤>

황오동 고분군은 대릉원 동쪽 주택가였던 쪽샘지구와 경주도심과 박물관을 연결하는 대로인 원화로 양쪽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경주 황오동고분군_<경주 대릉원 황오동 고분군>

황오동 고분군 중 발굴 조사된 무덤은 1호, 4호, 5호, 16호, 33호분 등으로 경주도심과 경주박물관을 연결하는 도로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구도심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다양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오동 고분군 3호 무덤>

3호 무덤은 경주 도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볼 수 있는 무덤으로 신라 고분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무덤 뒷편 봉분>

일제강점기에 신라고분을 조사하면서 무덤에 번호를 부여했는데 1번부터 5번까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4호 무덤과 5호 무덤은 도로를 개설하면서 발굴조사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도로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곱은옥 달린 유리 목걸이(6세기, 황오동 5호 무덤),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6세기, 황오동), 곱은옥달린 유리 장신구(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유리목걸이>

OLYMPUS DIGITAL CAMERA<금구슬(6세기, 황오동 5호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팔찌(6세기, 황오동 5호무덤), 금팔찌(5세기, 황남대총)>

쪽샘지구는 대릉원 동쪽편 일대에 있던 주택가를 말한다. 2007년 이후 국가에서 이 지역을 매입하여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고분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조사과정에서 200여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주택가였던 이곳은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무덤 안쪽으로 보이는 쪽샘지구 발굴, 조사 현장>

OLYMPUS DIGITAL CAMERA<멀리 보이는 39호 무덤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보이는 39호 무덤과 공개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4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를 진행중인 38호, 37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을 조성 중인 38호, 3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39호 무덤 옆 33호, 34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중인 44호 무덤 안쪽>

OLYMPUS DIGITAL CAMERA<51호, 52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으로 보이는 언덕>

황오동 52호 무덤은 194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는데  금장식 작은칼, 금도금 은팔찌,  금귀걸이(보물), 금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1-20220215
<황오동 52호 무덤 출토 유물, 1.금장식 작은칼, 2. 금도금 은팔찌, 3. 금귀걸이 4. 금귀걸이>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4-20220215<황오동 금귀걸이(보물)>

OLYMPUS DIGITAL CAMERA<14호, 15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 <금귀걸이, 5세기, 황오동 1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뒷편 45호, 46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에 있던 주택들, 15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골목길>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옛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가운데서 본 대릉원 입구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 입구 계림로에서 쪽샘지구로 들어가는 골목길>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2-20220215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1932년 발굴, 신라 5세기>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3-20220215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1962년 발굴, 신라 5세기>

 월성로 고분군은 1985년 도로 주변 하도도 정비공사 중 발견된 삼국시대 무덤이다. 4 ~ 6세기 신라 왕족 및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대릉원 동쪽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56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덧덜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 형태가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걸이(4~5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4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4세기, 월성로 가-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6세기, 노서동 138호 무덤), 금귀걸이(6세기, 월성로 가-5-1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제드리개(4~6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금목걸이>

경주 황오리 고분군, 사적, 경북 경주시 황오동 325
이 곳 황오동에는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고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10여 기에 이른다. 이 무덤들은 인접 지역에서 발굴된 무덤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주로 4~5세기경의 왕족 또는 귀족을 묻은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20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특별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미추왕릉 지구

경북 경주시에 있는 대릉원(大陵園) 중 미추왕릉 주변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의 무덤이 대릉(大陵)에 있다고 하여 대릉원(大陵園)이라 불렸으며 1973년에 공원으로 조성된 지역이다. 이곳에는 신라 고분을 대표하는 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20여기의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이 있으며 봉분이 남아 있는 많은 무덤들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신라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 대부분이지만 구덩식돌덧널무덤과 독무덤 등 여러 형식의 무덤이 섞여 있다. 주변 황오동, 노동동, 노서동, 인왕동 고분들과 시기적, 지리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어 대릉원으로 통합하여 재지정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을 대표하는  황남대총과 주변 무덤들>

경주 대릉원에 있는 무덤들은 월성 아래에 있는 내물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노서동까지 연결되어 조성되었으며 이후 왕릉은 서악동으로 옮겨 조성된다. 도심이었던 주변지역과는 달리 대릉원 일대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국가 공원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주민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지구_<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지구>

1973년 대릉원을 공원으로 조성할 때 담장부지에서 많은 무덤들이 발굴, 조사되었다. 무덤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었으며 구덩식돌덧널무덤과 독널무덤들도 섞여 있었다. 도기 서수형 명기(보물), 상감 유리구슬(보물), 뿔잔과 잔받침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입구>

대릉원 입구에서 미추왕릉 사이의 담장을 따라 이어진 숲길 주변은 많은 무덤들이 발굴, 조사된 곳으로 미추왕릉지구 C, D구역으로 분류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지구 C, D 구역>

미추왕릉 부근 무덤에서 출토된 도기로 만든 명기(明器)이다.  거북모양의 몸을 하고 있으며, 머리와 꼬리는 용모양이다. 머리는 S자형으로 높이 들고 있고 목덜미, 등, 꼬레 뿔이 붙어 있다. 몸통은 비어있고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있고 엉덩이에 밥그릇 모양의 주입구(注入口)가 있어 주전자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도기 서수형 명기(보물)>

미추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길이 24 cm, 상감유리옥 지름 1.8 cm의 옥 목걸이다. 구슬에는 물속을 헤엄치는 오리 16마리와 두 사람의 얼굴이 아주 세밀하게 상감되어 있다. 상감유리구슬은 서아시아나 지중해에서 유행했던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신라의 상감유리구슬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직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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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유리목걸이(보물), 경주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뿔잔과 잔받침대, 5~6세기, 미추왕릉 C지구 7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사적)>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 ~ 284년)은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후예로 김씨 중 처음 왕위에 올랐다. 경주 대릉원에 있는 왕릉 중 큰 규모의 무덤으로 높이 12.4 m, 지름 15.7 m 정도이다. 경주 김씨 시조에 준하는 위상을 갖고 있는 무덤을 조선시대 이후 성역화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숭혜전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미추왕릉>

미추왕릉을 지나면 길 옆 양쪽에 큰 규모의 무덤 5기를 볼 수 있으며 미추왕릉 뒷편에 작은 무덤들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서쪽편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연결되는 길>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옆 105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옆 103호, 105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3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1호 무덤>

101호 무덤을 지나면 중간 규모의 무덤인 99호 무덤이 있고 안쪽에 황남대총을 비롯한 무덤들이 모여 있다. 황남대총 서쪽편 모서리에 천마총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마총 앞 99호 무덤>

경주 대릉원 155호 무덤인 천마총(天馬塚)은 1973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가 파악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금관과 관장식, 금제허리띠,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天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라 부른다. 무덤은 높이 12 m, 바닥지름 47 m으로 대릉원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무덤이다.

SANYO DIGITAL CAMERA<155호 무덤인 천마총>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천마총>

천마총 장니 천마도(障泥 天馬圖,국보)는 1973년 황남동고분 155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그림은 말의 안장 안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이다. 가운데에는 흰색으로 천마가 그려져 있으며, 테두리에는 여러색의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5~5세기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신라에서 그려진 그림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말다래(天馬塚障泥), 6세기, 경주 천마총, 복제품>

천마총금관
<천마총 금관(국보)>

천마총_금제_허리띠
<천마총 금제허리띠(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천마총 관모(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새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 금제관식(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천마총 금제관식(보물)>

천마총 목걸이(보물)는 내부 관(棺)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 있던 것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화려한 장식구이다. 목걸이는 6줄로 이어져 있는데 좌우와 가운데에는 큰 굽은 옥이 매달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마총 목걸이(보물)>

OLYMPUS DIGITAL CAMERA<봉황장식 큰칼(보물621호)과 큰칼(6세기, 천마총)>

SANYO DIGITAL CAMERA<천마총 앞에서 보이는 황남대총>

경주 대릉원 98호 무덤인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길이 120 m의 거대한 쌍분이다. 먼저 조성된 남분이 왕의 무덤이며, 나중에 덧붙여진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목재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조가구를 먼저 설치하고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수많은 껴묻거리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고분 중에서 그 수량이 많으면서 수준도 높다.

SANYO DIGITAL CAMERA<98호 무덤인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은  높이 17.2 cm, 지름 16.6 cm 크기로 머리띠 위에 3개의 가지가 있는 장식이 있다. 가운데에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은판을 붙였으며 좌우에는 깃털이 있는 반달모양의 은판을 붙였다. 신라 관모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보물631호-01-20200212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은제관모, 5세기,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관꾸미개, 금, 삼국시대 5세기, 황남대총, 보물>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보물)>

OLYMPUS DIGITAL CAMERA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꾸미개,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보물),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큰칼, 황남대총 남분>

SANYO DIGITAL CAMERA<은제말안장꾸미개와 목심, 황남대총 남분>

국보193호-01-20200212
<봉황모양유리병, 경주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은 높이 27.5 cm이며, 드리개는 길이 13~ 30.3 cm이다.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삼단으로 쌓아 올린 나무모양을 3개 두고 있으며, 뒷쪽에는 사슴뿔모양을 하고 있는 장식 2개을 두고 있다.

국보191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은제관식(보물)>

국보192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국보)>

보물623호-01-20200212<팔찌(보물)>

보물623호-02-20200212<반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황남대총 북분), 금제 드리개(황남대총 북분)>

보물624호-02-20200212<유리잔, 경주 황남대총 북분, 삼국시대(신라) 6세기, 보물>

보물627호-01-20200212<황남대총 북분 은잔(보물)>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보물)>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토기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뒷편 연못>

황남대총 앞으로는 쌍분 형태인 97호 무덤과 95호 무덤이 있고 동쪽편에 중간 규모의 93호, 92호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97호, 95호 무덤과 미추왕릉 사이는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앞 97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과 98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97호 무덤, 쌍분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95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동쪽편에 있는 93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 앞 광장과 100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광장 서쪽편에 있는 100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3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미추왕릉>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뒷편 108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8호 무덤>

1973년 대릉원 미추왕릉지구를 유적 공원화하는 공사를 하면 옛 경주시청에서 계림으로 연결되는 도로 바깥에 있던 90호 무덤이 공원에 포함되면서 계림로 도로공사가 있었는데 이때 많은 무덤들이 확인되었으며 14호 무덤에서 계림로보검(보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90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계림로>

계림로 보검(보물)은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된 길이 36 cm의 칼이다. 철제 칼집과 칼은 녹슬어 남아 있지 않고 금으로 된 장식만 남아 있다. 자루 끝부분은 골무처럼 생겼는데 가운데 붉은 마노를 박았다. 가운데에는 있는 반원형 돌출부는 칼을 허리에 매달기 위한 장치이다. 금알갱이를 붙인 금판의 내부에 붉은 석류석과 유리를 넣었다. 이런 형태의 칼은 동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유럽이나 중동지방에서 발견되는 형태로 당시 동,서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림로 보검, 보물,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5세기>

미추왕릉지구 계림호 30호 무덤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신라 토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높이 34 cm, 윗부분 지름 22.4 cm로 큰 편이며, 위에서 아래로 한번에 5개의 선을 그었고 그 선 사이에 동심원을 새기고 개구리.새.거북이.사람 등의 토우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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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장식항아리 (국보), 5세기, 경주 미추왕릉지구>

경주 황남리 고분군, 사적, 경북 경주시 황남동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 m, 높이 12.7 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 m, 동서길이 80 m, 높이 23 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20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특별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황남대총, 화려한 유물들이 발굴된 무덤

경북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에 있는 경주 대릉원 98호 무덤인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길이 120 m의 거대한 쌍분인 이 무덤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 되었다. 먼저 조성된 남분이 왕의 무덤이며, 나중에 덧붙여진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목재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조가구를 먼저 설치하고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수많은 껴묻거리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고분 중에서 그 수량이 많으면서 수준도 높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도 많으며 서역이나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된 것도 있다. 4~5세기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989호 무덤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과 95호 무덤 사이로 보이는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과 98호 무덤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천마총에서 보이는 황남대총>

무덤의 구조는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나무로 널과 덧널을 짜고,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바깥에는 흙을 높게 쌓은 구조이다. 황남대총은 남분을 먼저 조성하고 북분을 다시 잇대어 쌓아 표주박 모양의 쌍분이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무덤 구조>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북분) 발굴 당시(1974년) 모습>

장송은 무덤에서 시작된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로 널과 덧널을 짜고, 그 주위에 강돌로 돌무지를 쌓고, 가장 바깥에 흙을 높게 덮은 무덤입니다. 나무로 짠 널과 덧널은 그 형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돌무지는 덧널이 썩으면 한순간에 흐트러집니다. 봉분은 흙을 기계에 다져 쌓지 않았으므로 표면에 따로 찰흙을 입히지 않으면 금방 흘러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무지덧널무덤은 생전에 만들어 두기 어렵고, 그러한 증거가 지금까지 발견되지도 않았습니다. 황남대총에는 봉우리가 두개인데, 그 이유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돌무지 덧널무덤 2기를 잇대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자를 모신 남분을 먼저 만들고, 이후에 여자를 모신 북분을 남분에 붙여 만들었습니다. 이들 주인공은 신라 적석목곽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황금 장신구로 저장한 점 등으로 보아 왕인 마립간과 왕비인 부인임에 분명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은 높이 27.5 cm이며, 드리개는 길이 13~ 30.3 cm이다.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삼단으로 쌓아 올린 나무모양을 3개 두고 있으며, 뒷쪽에는 사슴뿔모양을 하고 있는 장식 2개을 두고 있다. 금관드리개는 좌우에 대칭적으로 3개씩 굵은 고리에 매달아 늘어뜨렸다. 안쪽 끝부분에는 푸른색의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국보191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황남대총 북분 은제관식(보물)은 날개모양의 조익형관식(鳥翼形冠飾) 1점과 나비모양 접형관식(蝶形冠飾) 2점이 출토되었다. 금제관식에 비해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은제관식(보물)>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국보)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 금속판을 붙인 것으로 길이 120 cm이며 28장의 판으로 만들어졌다. 허리띠 아래에는 13개의 띠드리개가 연결되어 있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모양, 주머니모양, 쪽집게모양 등이 달려 있는데, 북방유목민들이 생활습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192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허리띠, 5세기,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굴된 은제 허리띠 끝장식에  ‘夫人帶’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의 주인공을 여성(왕비)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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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대’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 끝장식,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허리띠 끝장식, 5세기,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팔찌는 지름 7.5 cm 정도 크기로 몸에 착용한 채로 오른쪽에 5개, 왼쪽에 6개가 발견되었다. 반지는 지름 1.8 cm로 모두 19개가 발견되었다. 서역풍의 장식문양을 하고 있어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보물623호-01-20200212<팔찌(보물)>

보물623호-02-20200212<반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드리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제드리개(황남대총 북분), 금귀걸이(황남대총 북분), 금귀걸이(황남동 442번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황남대총 북분), 금제 드리개(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나뭇가지모양 장식,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띠,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투조판, 5세기,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보물)은 높이 7 cm, 윗부분 지름 10.5 cm 크기이다. 받침에 약간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외형이나 유리의 무늬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볼 수 없는 형태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유물이다.

보물624호-02-20200212<유리잔, 경주 황남대총 북분, 삼국시대(신라) 6세기, 보물>

황남대총 북분 은잔(보물)은 높이 3.5 cm, 지름 7 cm 크기로 표면에 특이한 장식을 새겨놓고 있다. 사람머리를 하고 있는 새, 용 등 상상속의 동물을 표현하고 있는데 페르시아에서 전래되어 중국 남북조시대 유행했던 형식이라 한다.

보물627호-01-20200212<황남대총 북분 은잔(보물)>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보물)는 높이 10 cm, 지름 10 cm, 무게 169g로 이전부터 토기로 만들어졌던 굽다리접시와 같은 형태인데 나뭇잎 모양 장식 7개가 붙여져 있다. 실제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무덤에 껴묻거리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보물)>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보물)은 3가지 종류로 높이 8 cm, 지름 10 cm의 은제합, 높이 5.5 cm, 지름 10.5 cm의 은제완, 높이 4.5 cm, 지름 11 cm의 금제완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굽다리접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금.은제 굽다리접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청동 세발솥, 5세기, 황남대총 북분>

SANYO DIGITAL CAMERA<청동긴목 항아리>

신라 무덤의 청동그릇은 대부분 고구려에서 온 것이나, 몇몇은 그 계보가 뚜렷하지 않다. 황남대총의 청동제 긴목항아리는 신라 질그릇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목이 곧게 길며 바닥이 둥글다. 이는 고구려의 항아리가 나팔처럼 벌어진 목과 편평한 바닥인 점과 비교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마량’명 칠기 (복원품)>

황남대총에서 칠기는 남분에서 총9점, 북분에서는 300여개로 추정되는 분량의 칠기 파편들이 출토되었다. 이 중 남분에서 바닥에 ‘마량’글자가 있는 칠기가 출토되었다. 칠기들의 표면에는 물결무늬와 불꽃무늬 등이 그려져 있고, 그 외에 달리는 사금과 말, 날개를 펼친 봉황과 비상하고 있는 용 등으로 추정되는 동물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뿔모양 장식, 은제 뿔모양 장식, 은제 뿔잔 마구리>

마립간, 황금의 나라 신라를 열다.
4세기 중반에 고구려는 이미 북방평원을 아우르는 거대 왕국이었고, 백제는 한반도 중부에서 서남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튼실한 왕국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즈음인 356년 신라에서 미추이사금의 조카이자 사위인 내물(內物)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내물은 앞서 사용하던 이사금이란 왕호를 가장 높은 지위란 뜻을 지닌 ‘마립간(麻立干)’이라 바꾸었습니다. 마립간이란, 앞선 삼한시기부터 지역소국을 이끌던 지배자인 干(Khan)보다 한층 더 높은 통치자를 일컫는 신라 고유의 왕호입니다. 이 통치자는 황금에 주목하였고, 황금을 통해 나라의 위계를 새로 만들어갔습니다. 마립간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속하는 왕족은 황금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였습니다. 방계로 멀어진 왕족과 지방의 전통적인 족장세력은 금동 혹은 은으로 꾸민 복식을 사용하였습니다. 복식을 꾸민 장신구는 재질만 다를 뿐 모양이 마립간의 것과 같았는데, 모두가 신라 사람이라는 표시였던 듯합니다. 황금의 나라, 신라는 마립간이 다스리던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은  높이 17.2 cm, 지름 16.6 cm 크기로 머리띠 위에 3개의 가지가 있는 장식이 있다. 가운데에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은판을 붙였으며 좌우에는 깃털이 있는 반달모양의 은판을 붙였다. 신라 관모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보물631호-01-20200212<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

은제 관모는 황남대총 남분의 부장궤에서 출토되었다. 앞쪽에는 금동제 맞새김판을 덧댄 오각형의 은판을 붙였는데, 간략화된 용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은제관모, 5세기,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관모, 남분,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백화수피제 고깔, 남분>

황남대총 남분 금제관식(보물)은 관모에 끼워 장식하는 것으로, 새 날개를 본떠 만든 것이다. 날개가 달려있어 화려하며 날아갈 듯한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45 cm, 날개 끝 너비 59 cm 크기로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山자 모양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꾸미개, 금, 삼국시대 5세기, 황남대총, 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관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남분 금제허리띠(보물)는 길이 99 cm이며 띠드리개는 작은것 18 ~ 22 cm, 큰 것은 79.5 cm이다. 허리띠는 문양이 뚫린 사각형 판과 나뭇잎 장식을 연결하였다. 장식 아래에는 7줄의 띠 드리개가 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다른 금제허리띠에 비해 형태는 단순하고, 매달린 드리개 수와 종류도 적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허리띠 드리개, 5세기,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는 곱은옥 모양의 금 구슬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의 금 구슬을 연결하였다. 금사슬, 금 구슬, 곱은옥이 비례와 구성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인다. 푸른색의 곱은옥을 사용하지 않고 금으로 곱은옥 모양을 만든것이 특이한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

가슴꾸미개는 목걸이와는 달리 가슴 앞부분과 어깨, 등부분까지 꾸며준다. 왕릉금 무덤인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확인되며, 잠자리구슬이라고도 불리는 청령옥, 금구슬, 곱은옥 등 다양한 구슬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꾸미개,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유리목걸이,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곱은옥,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유리 목걸이(5세기, 황남대총 남분)와 유리구슬(5세기,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금속제 구슬(황남대총 남분), 금속제구슬(황오동 무덤), 금제달개(천마총), 금제장식(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보물)이다. 갑옷 중 전투시 팔뚝을 보호하는 팔뚝가리개로 길이 35 cm이다. 팔목을 끼우는 부분에 경첩을 위아래로 달았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 중 은으로 만든 유일한 팔뚝가리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보물),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남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말은 신라 무덤에서 나온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닥판, 발등을 감싸는 부분, 발뒷축을 감싸는 부분 등 3매의 금동판을 접합하여 만들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신발,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장식구,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장식구,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달개,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허리띠 끝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남분>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국보)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유리병 1점과 유리잔 3점이다. 유물들은 파손된 채 발견되었으나 원형을 알 수 있게 복원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국보193호-01-20200212
<봉황모양유리병, 경주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국보193호-02-20200212
<유리잔,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국보>

국보193호-03-20200212<유리잔,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은제국자,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대롱이 달린 작은 단지, 5세기, 황남대총 남분>

마립간시기 신라에 도입된 최초의 말갖춤은 중무장기병과 관련이 있습니다. 처음에 실전무구였던 말갖춤은 4세기말 이후 귀금속 장식이 더해져 지위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이를 장식마구라 부를 수 있습니다. 금빛과 비단벌레의 화려함이 어우러진 신라 마립간시기의 말갖춤은 역사상 어디의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마립간을 위해 만든 화려한 말갖춤은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최상의 물품이었습니다. 황남대총 남분에는 최소한 7벌의 말갖춤이 있고, 이 가운데 장식마구가 최소 4벌입니다. 서로 겹쳐 일렬로 둔 화려한 말갖춤은 요즘 방식으로 리무진 4대를 가지런하게 주차해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은제말안장꾸미개와 목심, 황남대총 남분>

화려한 말안장꾸미개로 전체를 은으로 장식하고 있다. 물자가 풍부한 현대에서 이런 화려한 말안장을 사용하지는 않는 매우 화려한 말안장이다.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장식 안장 장식구, 북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장식 말띠드리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빈단벌레 장식 안장 장식구,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장식 재갈, 북분, 금동제 말띠꾸미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비단벌레 허리띠, 남분>

SANYO DIGITAL CAMERA<말안장 꾸미개>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꾸미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장식, 북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꾸미개, 남분>

SANYO DIGITAL CAMERA<솟을장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재갈, 금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발걸이, 청동, 삼국시대(신라), 경주 황남대총>

SANYO DIGITAL CAMERA<은제 수식부 삼각형 장식, 남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드리개>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말띠드리개>

SANYO DIGITAL CAMERA<청동말방울, 금동제 복발형 말갖춤>

환두대도라고도 불리는 허리띠에 매달고 다닐 수 있는 고리가 달린 칼이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칼의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큰칼, 황남대총 남분>

SANYO DIGITAL CAMERA<장식손칼, 남분>

황남대총에서는 엄청난 양의 철제 도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동북아시아에서 손꼽을 정도로 많은 양이라 한다. 출토된 유물로는 대장간 연장과 덩이쇠, 무기류, 농기구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쇠화살촉,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쇠투겁창,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큰투겁창,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큰칼,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덩이쇠,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사각형 쇠막대,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큰덩이쇠, 5세기, 황남대총 남분>

OLYMPUS DIGITAL CAMERA<쇠도끼, 5세기, 황남대총 남분>

나라의 힘은 쇠에서 나왔다.
쇠는 거의 모든 물건으로 만들수 있으며, 그 무엇보다 단단하게도 날카롭게도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재료입니다. 쇠로 만든 연모나 무기는 이를 장악한 세력에게 엄청난 힘을 몰아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철 생산을 바탕으로 고대의 나라들은 세워지고 커질 수 있었습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대장간 연모와 덩이쇠는 신라가 제철의 강국이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발굴된 철제품의 물량은 단연 동북아시아에서 손꼽을 정도입니다. 신라의 왕은 쇠를 기반으로 나라의 힘을 키웠고, 쇠로 만든 농기구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쇠로 만든 무기로 나라를 지켜갔습니다. 왕릉의 대장간 연모와 철제품은 국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토기들(큰 항아리, 그릇쟁반과 뚜껑굽다리접시,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뚜껑, 기목항아리)은 무덤의 주인이 사후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껴묻거리로 묻었던 생활용품이다. 실제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껴묻거리 용도로 만든 것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토기들>

OLYMPUS DIGITAL CAMERA<그릇쟁반과 뚜껑굽다리접시, 황남대총 북분>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황남대총 남분>

SANYO DIGITAL CAMERA<토기들>

무덤을 통해 확인되는 물품은 거의대부분 썩지 않는 재질뿐입니다. 황남대총에는 지금은 알 수 없는 귀한 물건이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칠기는 물론 각종 비단옷과 펠트로 만든 카펫 등이 가득했을 듯 합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일본에 수출한 주요 물품에 이것들이 있기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무엇보다 황남대총에서 빛나는 것은 귀금속과 그릇들입니다. 질그릇 모양의 것도 있고 칠기를 본 뜬 것도 있습니다. 귀금속 그릇은 순전히 왕족만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왕릉에는 그 어떤 무덤보다 많이 넣어 두었음을 황남대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황남대총은 내물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무덤으로 당시는 신라와 고구려가 협력하던 시기였다. 출토 유물 중에는 고구려에 전해진 유물도 있고, 고구려적인 특징을 가진 것이 많다.

SANYO DIGITAL CAMERA<청동합, 은합, 남분>

뚜껑에 ‘+’자 모양 손잡이를 단 금속으로 만든 합은 고구려에서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집안 칠성산 96호 무덤 출토품이다. 신라에서 황남대총 남분, 서봉총, 천마총, 은련총, 경산 조영동 1~2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은제와 청동제가 있는데, 황남대총 남분과 서봉총 출토품은 은으로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청동솥, 청동초두, 남분>

남분출토 허리띠꾸미개의 몽황무늬와 금동제 장식에 들어간 문양들이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남분 출토 허리띠꾸미개와 금동제 장식>

SANYO DIGITAL CAMERA<허리띠꾸미개와 화실집꾸미개, 집안 마선구1호 벽화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황남대총에서는 당시에 많이 볼 수 없는 쇠거울과 조문박국경이라는 청동거울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에서 들여온 것을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쇠거울(북분)과 청동거울(남분)>

북분에서는 흑갈유반구병이 나왔다. 고리가 어깨에 세로로 달렸고, 목이 그리 길지 않으며, 나팔모양으로 입이 벌여졌으나 터이 없다. 동진 초기인 4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SANYO DIGITAL CAMERA<흑갈유반유병, 북분>

지금까지 실크로드를 거쳐 왔다고 본 물품들 중에는 정작 동북아시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중국대륙의 산물로 보아야 합니다. 짙은 청색을 띠는 유리그릇과 육각 구획속에 다양한 동물이 표현된 은잔이 대표적입니다. 이밖에 흑갈색의 작은 도자기 병은 중국 남조의 산물입니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거쳐온 물품과 함께 신라사신이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이모가이 장식 금동제 말띠꾸미개>

‘이모가이’라고 부르는 원뿔처럼 생긴 고둥의 구멍 주변은 편평하여 흡사 소용돌이처럼 둥글게 말려있다. 이는 일본열고 규슈 지방의 남부와 더 남쪽 바다에 서식하는 아열대 고둥이다. 특이한 형태 때문에 들여온 듯 하여, 다듬어서 말띠꾸미개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데 사용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금동제 야광조개국자>

황남대총에는 왜에서 온 물품이 있는데, 대부분 물건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일본열도 남쪽의 아열대에서 사는 고둥의 껍데기는 말갖춤을 꾸미는 재료와 금동으로 입술을 감싼 아름다운 국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울러 곱은 옥의 재료인 경옥도 수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경옥은 비취라고도 하는데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채굴지는 일본 니이가타현 이토이가와 유역입니다. 곱은옥의 원류는 청동기시대에 천하석으로 만든 것이 있으므로 한반도가 분명합니다. 다만 신라무덤에 있는 경옥제 곱은옥은 광석 또는 완제품으로 일본열도에서 수입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지구<경주 대릉원(사적) 미추왕릉지구 주요 무덤들>

황남대총(皇南大塚)이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이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는 쌍무덤입니다. 남쪽 무덤(남분)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북분)을 잇대어 만들었습니다. 무덤의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밝혀졌습니다. 남분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분에는 여자가 묻혔으며, 이들은 부부로 추정됩니다. 남북 길이가 120 m이며 동서 지름이 80 m인데, 높이가 남분은 21.9 m이고, 북분은 22.6 m입니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5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남분의 주인공이 당시에 마립간이라는 칭호로 불린 신라의 왕이었겠지만,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0년
  6.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7. Cultural Heritage Wiki,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