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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무왕릉, 신라 45대 신무왕

경북 경주시 동방동에 있는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 김우징)의 능이다. 신무왕은 원성왕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무덤이 신무왕릉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신무왕릉(사적)>

신무왕이 즉위하다 ( 839년 윤01월(음) )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우징(祐徵)으로,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사촌 동생이다. 예징(禮徵) 등이 왕궁 안을 깨끗이 한 후, 예를 갖추어 그를 맞이해 즉위케 하였다. 조부 이찬(伊湌) 예영(禮英)을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죽은 아버지를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을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추존하였다. 아들 경응(慶膺)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궁복(弓福)을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하고 식읍[食實封] 2,000호를 주었다. 이홍(利弘)이 두려워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산속 숲으로 도망갔으나, 왕이 기병[騎士]을 보내 쫓아가 잡아 죽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신무왕이 죽다 ( 839년 07월23일(음) )
〔원년(839)〕 왕이 큰 병으로 드러누웠다. 〔왕의〕 꿈에 이홍(利弘)이 화살을 쏘아 등에 맞았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등에 종기[瘡]가 났다. 이달 23일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봉분의 크기는 높이 3m, 지름 16m이며,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다. 능은 낭산 사천왕사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경주 신무왕릉, 사적
이 능은 신라 제45대 신무왕(839 재위)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무왕의 이름은 우징(祐徵)이고,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인 상대등 김균정(金均貞)의 아들이다. 흥덕왕(興德王) 사후에 왕위 쟁탈전에서 아버지를 도왔으나 패하여 청해진으로 도망하였다가 장보고(張保皐)의 군사를 빌려 민애왕(閔哀王)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왕경의 동남쪽인 동방동에 있는데 능이 있는 구릉 동남쪽 산의 이름이 형제산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효소왕릉, 신라 32대 효소왕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년)의 능이다.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20년 정도 재위했으나 대부분 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력을 확충했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제도를 받아들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황복사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어린나이 죽었으며 동생인 성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효소왕릉(사적)>

효소왕이 왕위에 오르다 ( 692년 07월(음) )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홍(洪)을〕 공(恭)이라고도 적는다.으로 신문왕(神文王)의 태자(太子)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신목왕후(神穆王后)로서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딸이다. 당(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사신을 보내 조문(弔問)·제사(祭祀)하고, 이어 왕을 신라왕(新羅王)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으로 책봉하였다.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를 고쳐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하였는데, 이(理)란 글자가 〔왕의〕 이름자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효소왕이 죽다 ( 702년 07월(음) )
11년(702)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봉분은 높이 4.3 m, 지름 10.3 m의 원형 봉토무덤이다.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았으나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성덕왕릉과는 달리 문인석, 사자장 같은 석물을 두지 않고 있으며 무덤 앞에 작은 혼유석만 있다. 봉분의 규모는 크지 않으며 특별한 장식이 없는 등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이기 이전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효소왕릉 봉분>

OLYMPUS DIGITAL CAMERA<성덕왕릉 거북받침돌 뒷편으로 보이는 효소왕릉>

OLYMPUS DIGITAL CAMERA<효소왕릉 앞 들판>

경주 효소왕릉, 사적,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김이공)이 모셔진 곳이다. 토함산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 서쪽에 있다. 능은 밑둘레 57 m, 지름 15.5 m, 높이 4.3 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인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몇 개만이 드러나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쪽 가까운 곳에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이 있다. 왕은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 등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성덕왕릉, 신라 33대 성덕왕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의 능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36년 동안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중국 선현들의 초상화를 태학에 두었다. 당의 균전제를 본떠 자영농에서 정전을 지븍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당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가 중단하기도했으며. 대동강 이남을 통일신라의 영토로 확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성덕왕릉(사적)>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다 ( 702년 07월(음) )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고쳤다 『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하고 이틀간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 조문·위로하고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형의 장군(將軍)·도독(都督) 칭호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성덕왕이 죽다 ( 737년 (음) )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밑둘레가 46 m, 높이 5 m로 조선 왕릉 봉분규모와 비슷한데 이는 신라가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정형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석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로 세워 받치고 있다. 둘레석 받침돌 사이에는 화강석을 입체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십이지신상이 세워져 있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을 둘러세웠다. 무덤 주위에는 사자상과 문인석을 배치하였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받침돌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과 삼각형 받침대>

둘레석이 돋을새김으로 한 다른 왕릉의 십이지산상과는 달리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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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받침돌 사이에 세워진 십이지산상1>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돌난간>

정면에는 상석을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큰 편이며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형태이다. 신라 왕릉의 완성된 형식을 보여주는 38대 원성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성덕왕릉부터 정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있는 상석>

성덕왕릉에는 무인석 1쌍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는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인석1>

OLYMPUS DIGITAL CAMERA<일부만 남은 무인석>

왕릉의 네모서리에는 4기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은 사자상, 문인상 등 석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1>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2>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3>

성덕왕릉비는 경덕왕 때(754년)에 세워졌다. 현재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이를 기준은 성덕왕릉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성덕왕비를 세우다 ( 754년 05월(음) )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9 신라본기 제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비를 세웠던 거북받침돌>

신라 성덕왕릉(新羅 聖德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의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 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 (孝昭王)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唐)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덤은 밑둘레가 46 m, 지름이 14.5 m, 높이가 5 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입체 (立體)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石獅子)와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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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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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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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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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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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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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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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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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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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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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산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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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2>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원성왕릉(사적), 신라 38대 원성왕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년)의 능이다 원성왕은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당나라와 통교하였으며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 집권기는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원성왕릉(사적)>

원성왕이 즉위하다 ( 785년 01월(음) )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으로 나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는 김씨로 신술(神述)5 각간(角干)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반신(叛臣)이 발호(跋扈)하였는데, 선덕왕(宣德王)이 당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앞장서서 임금의 곁에 있는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신이 그에 동조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었기에,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집안 조카인 주원(周元)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에서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里) 떨어진 곳에 위치였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오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人君]은 큰 자리라 진실로 사람이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것은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평소 덕망이 높고 왕의 자질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경신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이 죽다 ( 798년 12월29일(음) )
〔14년(798)〕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관[柩]을 옮겨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릉은 괘릉(掛陵)으로도 불리는데, 무덤을 조성할 떄 물이 괘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 민간신앙과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괘릉 근처에 숭복사터가 있어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입구에서 보이는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서 보이는 능역 입구>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동(西洞) 곡사(鵠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가 있다. 또한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창건했으며, 할아버지인 훈입 잡간(訓入 匝干)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 의관 잡간(義官 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삼았으며, 고조 법선 대아간(法宣 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바로 마질차 잡간(摩叱次 匝干)이다.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원성왕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서 떨어진 왕릉 입구에은 사자 2쌍, 문무인석 각 1쌍, 석화표 1쌍이 서 있다. 괘릉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신랑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으며, 십이지상석을 둘레돌에 새겨 넣는 등 신라 특유의 봉분 양식도 잘 반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능역>

봉분은 봉분은 밑둘레 70 m, 지름 21.9 m, 높이 7.7 m 규모로 둘레석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바깥쪽에 난간을 세웠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床石)은 후대 조선왕릉이나 다른 신라 왕릉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무인석과 함께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난간석>

봉토 둘레에는 방향에 따라서 이에 해당하는 십이지신상을 새겨놓고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상당히 세밀하고 뛰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쥐(子), 0시>

OLYMPUS DIGITAL CAMERA<소(丑), 1시>

OLYMPUS DIGITAL CAMERA<호랑이(寅), 2시>

OLYMPUS DIGITAL CAMERA<토끼(卯), 3시>

OLYMPUS DIGITAL CAMERA<용(辰), 4시>

OLYMPUS DIGITAL CAMERA<뱀(巳), 5시>

OLYMPUS DIGITAL CAMERA<말(午), 6시>

OLYMPUS DIGITAL CAMERA<양(未), 7시>

OLYMPUS DIGITAL CAMERA<원숭이(申), 8시>

OLYMPUS DIGITAL CAMERA<닭(酉), 9시>

OLYMPUS DIGITAL CAMERA<개(戌), 10시>

OLYMPUS DIGITAL CAMERA<돼지(亥), 11시>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인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왕릉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표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봉분을 조성하고 그 앞에는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이 봉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에 원성왕릉은 봉분과 떨어진 왕릉 입구 출입로 양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입구 서쪽편에 세워진 석물들>

상스러운 동물인 사자 2마리,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이 나란히 서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석물들은 봉분 둘레석의  12지신상과 더불어 신라 왕릉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석물들>

무인석은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서역인 얼굴 특징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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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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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경주 원성왕릉, 사적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년)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 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약 69 m, 지름 약 22 m, 높이 약 7.4 m이며,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石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화표석, 문인석, 무인석과 돌사자를 좌우로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능은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곡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현재의 숭복사터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만들었다. 별칭으로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의 민간신앙이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은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를 고치기도 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내물왕릉(사적), 신라 17대 내물왕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의 능이다. 내물왕은 김씨로서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내물왕 재위기간 동안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진한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차례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나 말년에 왜와 가야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여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나 고구려와 북조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물왕 이후 김씨에 의한 독점적인 왕위계승이 이루어 졌으며 왕의 명칭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삼국유사>에 왕릉은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내물왕릉(사적)>

나물이사금이 즉위하다 ( 356년 04월(음) )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이 즉위하였다. 성(姓)은 김(金)이고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角干) 말구(末仇)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비(妃)는 김씨(金氏)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흘해(訖解)가 죽고 아들이 없어서 나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말구와 미추이사금은 형제이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왜인을 독산에서 크게 물리치다 ( 393년 05월(음) )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였다. 〔왜인을〕 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나물이사금이 죽다 ( 402년 02월(음) )
47년(402) 봄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무덤은 높이 5.3 m, 지름 22 m의 원형봉토무덤이다. 내물왕 시기 신라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일반적이나 무덤의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어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황남대총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내물왕릉>

OLYMPUS DIGITAL CAMERA<내물왕릉이 있는 월성 아래 황남동 고분군>

신라 내물왕릉(新羅 奈勿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교동 14
이 능은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을 모신 곳으로 대릉원의 남쪽이자 월성(月城)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능은 밑둘레 68m, 높이 5.8m, 지름 22m 정도로 흙을 둥글게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조금 큰 돌이 튀어나와 있고 깎여 나간 봉토 밑으로 돌무지가 조금 드러나 있다. 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내물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외교와 국방에 힘썼으며, 고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릉이 “첨성대(星) 서남(西南)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황남동 고분군<내물왕릉이 있는 경주 황남동 고분군>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