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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미추왕릉(사적), 신라 13대 미추왕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에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 ~ 284))의 능이다. 미추왕은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후예로 김씨 중 처음 왕위에 올랐다. 12대 첨해왕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했다. 경주 대릉원에 있는 왕릉 중 큰 규모의 무덤으로 높이 12.4 m, 지름 15.7 m 정도이다. 경주 김씨 시조에 준하는 위상을 갖고 있는 무덤을 조선시대 이후 성역화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숭혜전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미추왕릉(사적)>

미추이사금이 즉위하다 ( 262년 01월(음) )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어떤 글에서는 미조(味照)라 하였다. 성은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박씨는 이칠갈문왕(伊柒葛文王)의 딸이고, 왕비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은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는 계림(鷄林)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脫解王)이 거두어 궁중에서 기르다가, 나중에 대보(大輔)에 임명하였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바로 미추의 아버지이다. 〔전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미추이사금이 죽다 ( 284년 10월(음) )
〔23년(284)〕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셔서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이서고국이 쳐들어왔으나 신비한 군사들의 도움으로 물리치다 ( 297년 01월(음) )
14년(297) 봄 정월에 지량(智良)을 이찬(伊湌)에 임명하고, 장흔(長昕)을 일길찬(一吉湌)에 임명하고, 순선(順宣)을 사찬(沙湌)에 임명하였다.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우리나라가 많은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하였다. 문득 신비한 병사들이 〔도와주러〕 왔는데,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해 물리쳤는데, 그 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사람들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음병(陰兵)을 보내 싸움을 도와주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봉분>

미추왕은 경주 김씨 중 처음 왕위에 올라 시조에 준하는 위상을 갖는다. 무덤 앞에는 유교식 제사를 올리기 위한 혼유석이 놓여 있으며 왕릉 주위에 담장이 둘러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왕릉 앞에 놓여진 혼유석과 담장>

숭혜전은 경주 김씨 중 처음으로 왕이된 13대 미추왕과 삼국통일을 이룬 30대 문무무왕과 마지막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모신 사당이었으나 구한말 고종 때 사당을 크게 짓고 미추왕과 문무왕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숭혜전>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지구<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지구>

신라 미추왕릉(味鄒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황남동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 ~ 284)을 모신 곳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높이 12.4 m, 지름 56.7 m로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이며,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陵)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무는 혼유선(魂遊石)이 있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경주 오릉(사적), 신라 시조 박혁거세,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경주 오릉(五陵, 사적)이다.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서남쪽 1.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능역에는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 있는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과 박혁거세의 왕후 알영부인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분으로 실제로는 이런 형태의 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등장한 무덤의 형태이며, 후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미추왕릉이나 김해 수로왕릉 처럼 주요 성씨 시조 무덤으로 조선시대 이후 제단이 설치되는 등 성역화되어 있다. 조선 선조 이후에는 박씨 종친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오릉(사적)>

앞쪽에 있는 1호 무덤은 높이 10 m로 큰 편이며, 뒷편에 높이 9 m의 2호무덤, 높이 7.2 m 표주박형태의 3호무덤, 높이 3.6 m의 4호 무덤, 높이 1.8 m의 5호 무덤이 있다. 후대 무덤의 형식이며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높이 10 m의 1호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호무덤, 3호무덤>

OLYMPUS DIGITAL CAMERA<표주박형태의 3호 무덤과 뒷편 안쪽에 있는 4, 5호 무덤>

혁거세거서간이 죽다 ( 4년 03월(음) )
61년(4) 봄 3월에 거서간이 승하(升遐)하였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내니,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누리가 생기고 남해차차웅이 죽다 ( 24년 09월(음) )
21년(24) 가을 9월에 누리[蝗]가 생겼다. 왕이 돌아가시니 사릉원(蛇陵園) 내에서 장례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유리이사금이 죽다 ( 57년 10월(음) )
〔34년(57)〕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사릉원(蛇陵園) 내에서 장례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파사이사금이 죽다 ( 112년 10월(음) )
33년(112)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사릉원(蛇陵園) 내에서 장례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나라 성씨 중 박씨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왕계를 제외하면 대부분 통일신라 말기 경명왕(54대), 경애왕(55대)의 후손으로 밀양.반남.고령.함양 등 전국 각지에 그 본을 두고 있다. 경주 오릉은 박씨들의 시조를 모신 곳으로 조선시대부터 성역화되어 넓은 능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경도 잘 꾸며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오릉>

오릉 앞에는 조선왕릉 정자각처럼 제사를 올리는 큰 건물이 세워져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 등이 놓여 있다. 주위에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다양한 나무들을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릉 앞 제사를 올리는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놓여진 상석과 간단한 석물들>

OLYMPUS DIGITAL CAMERA<오릉으로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오릉 주변 숲>

숭덕전은 신라시조 박혁거세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건물로 조선초 세종 때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대에 지어진 것이다. 그 앞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오릉 숭덕전>

시조묘를 세우다 ( 6년 01월(음) )
3년(6)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신라 종묘제의 시작 ( 6년 (음) )
제사(祭祀), 신라(新羅) 종묘(宗廟)의 제도(制)를 살펴보면, 제2대 남해왕(南解王) 3년 봄에 처음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묘당을 세워 사계절로 제사지냈는데, 친누이 아로(阿老)註 004에게 제사(祭祀)를 주관하게 했었다.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 제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신라 오릉(新羅 五陵, 사적), 경북 경주시 탑동 67-1
이 능은 남산의 서북쪽에 해당되는 경주 평야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赫居世王)과 제2대 남해왕(南解王),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 (婆娑王) 등 초기의 박씨 임금 네 분과, 혁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閼英夫人)의 능으로 전해 온다.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겉모습은 경주시내 평지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경내에는 혁거세왕의 제향(祭享)을 받드는 숭덕전(崇德殿)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경주 오릉 능역 내에는 신라 시조 왕비 알영부인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우물인 알영정(閼英井) 터가 있으며 그곳에는 이를 기념하는 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오릉 알영정 터>

알영이 태어나다 ( 기원전 53년 01월 )
5년(B.C. 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노구(老嫗)가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성장하면서 덕행과 용모가 빼어나니, 시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신라시조왕비 탄강지(新羅始祖王妃 誕降) 알영정(閼英井)
알영정(閼英井)은 신라시조왕비 알영(英)부인께서 탄생한 곳이다. 기원전 69년에 한 노구(老區)가 이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우물가에 큰 용이 있어 놀랐다. 그 용 옆구리에서 귀녀가 탄생하기에 수양(修養)한바 용모가 단미(端美)하고 총명(聰明)·지혜(智慧)하여 시조왕비가 되었다. 신라 시조왕 재위(在位) 61년간 내보(內輔)가 지대하였고 권유농상(勸誘農桑)하고 무휼빈민(無恤民)하여 이성(二聖)으로 존경을 받았다. 천강성배(天降聖配)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헌안왕릉(사적), 신라 47대 헌안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김의정)의 능이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호족세력이 세력을 키워나가던 시기 반란을 통해 집권했던 세력으로 신라 왕실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문성왕릉과 함께 진흥왕릉 비슷한 규모의 작은 봉분을 쌓아 왕릉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석물과 십이지신상 등으로 장식했던 이전 왕릉과는 달리 진흥왕릉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호족세력이 경주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에 왕릉을 조성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헌안왕릉(사적)>

헌안왕이 즉위하다 ( 857년 09월(음) )
헌안왕(憲安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이다 또는 우정(祐靖)이라고도 한다.. 신무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인데,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헌안왕이 죽다 ( 861년 01월29일(음) )
5년(861)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침상에 누워 위독해지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 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의 두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牝雞之晨]에 가까우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덕성을 지녔으니, 그대들이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고, 과인이 죽더라도 또한 이름을 오래 남길[不朽]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달 29일에 죽으니,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있는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 앞 절터>

김양은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문성왕을 받들었다. 그뒤 헌안왕이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보고와 함께 신무왕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무열왕릉 옆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헌안왕이 문성왕릉과 김양의 무덤을 조성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 앞 김양의 무덤>

신라 헌안왕릉(新羅 憲安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김의정)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왕릉(眞興王陵)과 함께 선도산 (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지름 15.3m, 높이 4.3m 되는 이 능의 밑둘레에는 자연 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封土)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신무왕(神武王)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文聖王)의 뒤를 이은 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眞興 王陵考」에서 태종 무열왕릉 뒤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 4기의 고분을 진흥·진지(眞智)·문성(聖) ·헌안(憲安)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문성왕릉(사적), 신라 46대 문성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김경응)의 능이다. 문성왕은 신무왕의 아들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지방호족 세력을 견체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던 왕이다. 삼촌인 47대 헌안왕과 함께 신라 전성기를 마련한 진흥왕릉 능역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반란을 통해 민애왕을 몰아내고 집권했기 때문에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곳에 능을 마련한 것으로 보있다. 반란에 큰 역할을 했던 김양의 무덤은 태종무열왕릉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문성왕릉(사적)>

문성왕이 즉위하다 ( 839년 07월(음) )
문성왕(文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응(慶膺)이며, 신무왕(神武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청해진을 혁파하다 ( 851년 02월(음) )
13년(851) 봄 2월에 청해진(淸海鎭)을 혁파하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이 유조를 내리고 죽다 ( 857년 09월(음) )
19년(857)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들었다. ~ 생략 ~ ~ 7일이 지나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공작지(孔雀趾)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떄 <승정원일기>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같은 언덕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모여 있는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 앞에 있는 절터>

김양은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문성왕을 받들었다. 그뒤 헌안왕이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보고와 함께 신무왕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무열왕릉 옆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 무열왕릉 아래에 있는 김양의 무덤>

신라 문성왕릉(新羅 文聖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김경응)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眞興)·헌안왕릉(憲安王陵)과 함께 선도산(仙桃山)의 남쪽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능의 지름은 20.6 m, 높이는 5.5 m이다. 신무왕(神武王)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청해진(淸海鎭)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 眞興王陵考」에서 무열왕릉(武烈王陵)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진지(眞智)·문성 · 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진지왕릉(사적), 신라 25대 진지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김사륜/김금륜)의 능이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라 백제군을 격퇴하고 중국 남조 진(陳)과 외교관계를 맺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집권 4년만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국정을 문란하게 운영하고 황음에 빠져 폐위되었다고 한다. 귀족세력간의 대립에서 폐위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진지왕릉(사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다 ( 576년 08월(음) )
진지왕(眞智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하였다.이고,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태자(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眞智)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지왕이 죽다 ( 579년 07월17일(음) )
〔4년(579)〕 가을 7월 17일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에 왕위에 올라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579)라고 하였으나 오류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도화녀 비형랑,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삼국사기>에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경사는 진흥왕릉이 있다는 애공사(哀公寺)와 같은 사찰로 추정되어 진흥왕릉 아래에 있는 무덤을 진지왕릉으로 보고 있다.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 고분군에 있는 무덤 중 하나라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석탑이 있는 영경사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뒷편에 있는 4기의 왕릉>

OLYMPUS DIGITAL CAMERA<진지왕릉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서악동 고분군(사적)>

신라 진지왕릉(新羅 眞智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2
이 능은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김사륜/김금륜)이 모셔진 곳이다. 밑둘레 53m, 높이 3m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 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지왕은 법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거칠부(居朵大)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 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도화녀 비형랑,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