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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진흥왕릉(사적), 신라 24대 진흥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의 능이다. 진흥왕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으며, 대가야을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신라 최대 영토을 차지하였다. 점령된 지역을 순시하면서 척경비을 세웠다.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게 했으며, 화랑도를 창설하고 경주에 황룡사를 창건했다. 삼국시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진흥왕릉(사적)>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다 ( 540년 07월(음) )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이고,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부인(夫人) 김씨(金氏)로서 법흥왕(法興王)의 딸이며, 왕비는 박씨(朴氏)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攝政)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이곳에 있는 4기의 왕릉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높이 5.8 m, 지름 20 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바깥쪽에는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쌓았다. 왕릉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아래에 있는 3기의 왕릉도 이 능을 형식을 따라서 봉분을 작게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진흥왕릉>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세운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말하며, 단양 적성비(赤城碑)는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항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산에 순행하다 ( 555년 10월(음) )
〔16년(555)〕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히고 경계를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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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 진흥왕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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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 진흥왕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창녕 척경비(국보)>

SANYO DIGITAL CAMERA<단양 신라적성비(국보)>

왕릉 아래쪽에는 서악동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 절터가 있다. <삼국사기>에 왕릉들 앞에 애공사(哀公寺), 영경사(永敬寺), 공작지(孔雀趾)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석탑을 기준으로 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절터>

절터 뒷편에는 4기의 왕릉 외에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들이 있다.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 진흥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뒷편에 있는 4기의 왕릉>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진흥왕의 업적에 비해 무덤 규모가 작은편이고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의 무덤과 같은 장소라 기록되어 있어 태종무열왕릉 뒷편 서악동 고분군 중 위에서 2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서악동 고분군(사적)>

신라 진흥왕릉(新羅 眞興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 서북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지름 20m, 높이 5.8m되는 타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왕은 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漢江) 유역에 한산주(漢山州)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시하고 북한산비(北漢山碑), 황초령비(黃草嶺碑), , 마운령비(磨雲嶺碑) 등의 순수비를 세웠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眞興王 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眞興)· 진지(眞智)·문성(文聖)·헌안(憲安)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태종무열왕릉(사적),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45 ~661, 김춘추)의 무덤이다. 신라 29대왕인 태종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이며,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연개소문을 만났으며, 당나라에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얻어 삼국토대의 기초를 이루었다. 654년 진덕여왕을 이어서 진골의 신분으로 최초로 왕이 되었으며,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에 김유신 등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료체제와 군사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다. 재위기간 동안에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문무왕대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사적)>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오르다 ( 654년 03월(음)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眞智王)註 002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 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 『당서(唐書)』에는 “진덕(眞德)의 동생”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眞平王)의 딸이고, 왕비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湌) 서현(舒玄)의 딸이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뛰어나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왕을 섬겨서 지위는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의 황제가 특진(特進)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요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德行)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 만한 이가 없는데,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춘추는 세 번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태종무열왕이 죽다 ( 661년 06월(음) )
〔8년(661) 6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무열왕의〕 부고를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비교적 큰 규모의 원형봉토분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발굴이 되지는 않았지만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봉분에 비해서 장식이 소박한 편이고 무덤주위에 자연석을 돌렸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OLYMPUS DIGITAL CAMERA<반대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주위에 심어진 소나무>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뒷편 서악동고분군(사적)과 선도산>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능역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이 있는 능역>

무덤 앞에 국보 25호로 지정된 무열왕릉비가 있어 신라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정확하게 왕릉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이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석비는 글자가 적혀진 몸들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화강석을 세련되게 조각하여 만든 이 석비은 후대에 세워진 많은 석비에 큰 영향을 주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입구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가 있는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비(국보)>

신라 무열왕릉(武烈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884-1
이 능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45 ~661, 김춘추)을 안치한 곳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中代)의 첫 진골(眞骨) 출신의 왕으로 삼국 통일을 이룩하려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 m, 높이 8.7 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과 머릿돌이 나왔는데 무열왕이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 太宗武烈大王址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경애왕릉(사적), 신라 55대 경애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927)의 무덤이다. 54대 경명왕의 친동생으로 재위 기간동안 친고려 정책을 이어나갔다. 927년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순왕은 남산 해목령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경애왕릉(사적)>

경애왕이 즉위하다 ( 924년 08월(음) ),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위응(魏膺)이고, 경명왕(景明王)의 친동생이다.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 927년 09월(음) ), 〔4년(927)〕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습격하였다. ~ 생략 ~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 가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 생략 ~ 왕은 왕비와 첩 몇 명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왕비와 첩을 간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곧 왕의 친척 동생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애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봉분은 지름 12 m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경주에 있는 마지막 신라왕릉으로 당시의 국력를 말해주듯 봉분의 규모도 작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애왕릉 봉분>

전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장사 지내다 ( 927년 11월(음) )
〔원년(927)〕 전왕(前王)의 시신을 들어 서당(西堂)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였다. 시호(諡號)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애왕릉은 배동 삼릉에서 남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배리삼릉과 경애왕릉 앞으로 형산강을 따라 경주와 언양을 이어주는 도로가 있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난 꽤 운치있는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애왕릉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들어가는 길, 소나무숲>

OLYMPUS DIGITAL CAMERA<소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왕릉>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1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927)을 모신 곳이다. 밑 둘레 43 m, 지름 12 m, 높이 4.2 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南山)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勝川;
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石亭)에서 잔치[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삼릉(사적) 경명왕릉, 신라 54대 경명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의 무덤이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신덕왕광 경명왕 재위 기간 신라는 경주 주변 지역만 다스리는데 그쳤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죽은 후 황복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뿌렸다고 한다. 신덕왕릉과 함께 조선후기 이후 왕릉으로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경명왕릉>

경명왕이 즉위하다 ( 917년 07월(음) ),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승영(昇英)으로 신덕왕(神德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왕이 죽다 ( 924년 08월(음) ), 〔8년(924)〕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삼릉(사적) 신덕왕릉, 신라 53대 신덕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의 무덤이다. 52대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 자격으로 왕에 추대되었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신덕왕릉이라 전하는 무덤은 1953년과 1963년데 도굴되어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장하여 뼈를 잠현 남쪽에 묻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경명왕릉과 함께 조선후기 이후 이곳을 왕릉으로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경주 배동 삼릉(사적) 신덕왕릉>

신덕왕이 즉위하다 ( 912년 04월(음) ), 신덕왕(神德王)이 즉위하였다.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경휘(景暉)로 아달라왕(阿達羅王)註 002의 먼 자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으로 정강대왕(定康大王)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며, 왕비 김씨는 헌강대왕(憲康大王)의 딸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국인(國人)이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왕이 죽다 ( 917년 07월(음) ), 〔6년(917)〕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신덕왕,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